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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뉴욕 K-POP 콘서트’ 뜨거운 반응!]
[미국 날짜로 3일과 4일 이틀 연속으로 열린 <2019 뉴욕 K-POP 콘서트>가 현지 K-POP 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번 콘서트에는 25팀 아이돌그룹이 참여···(중략).]
드라마 촬영장. 작년까지만 해도 ‘감성소녀’의 리더이자 멤버 ‘제유’로서 기사 속 뉴욕 공연장에 섰던 유제희는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그러다 잠시 멈춘 곳은 감성소녀의 무대 사진.
‘기분이 이상하네.’
자신이 없는 감성소녀의 사진에선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없으면 과연 이 팀은 어떻게 될까.
탈퇴하기 직전까지 고민을 거듭하게 만든 걱정이 결국 괜한 것이었단 생각에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뭘 그렇게 봐?”
함께 드라마를 찍는 주연배우, 윤승권이 멋대로 가까이 앉으며 물었다.
“그냥, 인터넷 기사 보고 있었어요.”
연기실력과는 별개로 사생활, 특히 여성 편력이 심하단 소문이 도는 사람인지라, 유제희는 적당히 선을 긋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윤승권은 아랑곳없이 친한 척 고개를 들이밀며 멋대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아아, 친구들 기사?”
“네.”
상당히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그러나 상대는 몇 개의 작품을 히트시키고, 인맥까지 화려한 이 바닥 선배. 유제희는 윤승권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1, 2초 정도 뜸을 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 커피 드시겠어요? 제가 가서 받아올게요.”
“그럴 줄 알고.”
윤승권이 반대쪽에 놔둔 커피 두 잔을 집었다.
“미리 가져왔지? 제희 씨랑 대사도 맞추고, 이야기도 나눌 겸 해서?”
“아···. 감사합니다.”
유제희는 커피를 받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보다 살짝, 거리를 두고.
윤승권이 상처받은 얼굴로 웃었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 나 무서운 사람 아니야. 아, 제희 씨가 올해 스물다섯 살이지? 나랑 일곱 살 밖에 차이 안 나니까,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도 돼. 어차피 나중에 키스도 할 사인데.”
“네?”
유제희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키스 신은 없다고 알고 있는데···.”
작중에서 유제희는 윤승권을 짝사랑하며 그의 사랑을 훼방하는 역이었다. 그러나 주 배경이 회사이기도 하고, 애초에 윤승권이 맡은 역은 유제희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아예 없는 캐릭터였다.
‘신체접촉이라곤 해도 고작 손목이나 팔을 잡는 것뿐이라, 그래서 출연을 결정한 건데···.’
난데없이 키스 신이라니.
“응?”
유제희에게 시선을 둔 채 커피를 마신 윤승권이 씨익 웃었다.
“제희 씨 아직 7화 대본 못 봤구나? 여주인공 질투 유발 장면이 필요한데, 조금 센 게 좋겠다고 그래서 작가님이 넣으셨어.”
“아···.”
유제희는 얼굴에 불쾌감과 싫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금 당황한 기색만 내비쳤다. 지저분한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성추행까지 하며 팬이라고 주장하던 범죄자 앞에서도 웃는 가면을 썼던 아이돌 시절처럼.
“너무 걱정하지 마. 진짜로는 안 할 테니까.”
윤승권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희 씨만 잘 협조해주면.”
“네···.”
“애초에 작품 내에서 키스하든 뭘 하든, 그냥 일하는 것뿐인데 일일이 상대를 이성으로 의식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제희 씨, 설마··· 남자친구 때문에 그래?”
“아니에요.”
남자친구가 없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서 일부러 묻는 말인 것 같아, 유제희는 부정만 하곤 커피를 마셨다. 그때 마침 시야에 매니저 김인정이 들어왔다.
“···아, 오빠! 그거 찾았어요?”
“어?”
유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윤승권에게 꾸벅였다.
“잠시 실례할게요, 선배님.”
그러곤 윤승권의 시야에 의아해하는 김인정의 표정이 들어가지 않도록 적당히 가리며 걸음을 옮겼다.
“흐음···.”
멀어지는 유제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승권은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쉽게 생겨놓곤 조신한 척은. 나중에 술이라도 잔뜩 먹여서···.’
우웅.
윤승권은 커피를 내려놓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희우 결별설 뜸.]
-[(링크)]
그의 입가에 툭 미소가 걸렸다.
‘어이구, 잘난 이희우 씨. 딴따라 새끼는 진지하게 만나는 거 아니라고 오빠들이 그렇게 말렸건만. 내 이럴 줄 알았다.’
기사 링크를 누르며 그는 혀를 찼다.
‘괜히 쉬운 년이란 이미지만 달게 되고, 이게 뭐냐.’
대체 뭘 덮으려고
“써한, 포털사이트 실검 봤어?”
6일. 뉴욕 K-POP 콘서트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버스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데, 길우성이 한율의 눈앞에 핸드폰을 들이댔다.
“이거 봤냐고.”
포털사이트 실검 1위. [이희우 민준 결별]이 떠 있었다.
“······?”
의아함을 부르는 문구였다. 왜냐하면 바로 이틀 전, 블블 민준과 통화할 때 이희우와 헤어질 낌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
-[조금 전에 누나랑 30분 넘게 통화했더니 폰이 뜨겁다. 제대하면 폰부터 바꿔야겠어.]
한참이나 남은 제대를 언급하는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가득했고.
“아직 당사자 확인은 안 된 의혹이기는 한데···.”
“확인도 안 된 설에 호들갑은.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주변에서 난리 칠 일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왜, 주변에서 잘 사귀는 커플 보면 괜히 흐뭇하고 그러잖아. 으음, 대리 만족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
통로 건너편에 앉은 차남석이 길우성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시죠, 남석 씨?”
“너희 누나랑 박현우.”
“응?”
길우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차남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못 들었구나. 그럼 됐어.”
“뭐지? 무슨 뜻이지, 남석 씨? ···설마?!”
다급하게 통화 앱을 실행하고 전화번호를 찍는 길우성의 손. 출발하는 버스 안에 길우성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난 그 교제 반댈세!”
길우성의 핸드폰에서 길미현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바 중이야, 바빠! 끊어!]
뚝.
“······.”
멍해진 얼굴로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던 길우성은, 이번엔 박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 그 교제 반대요, 형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절대···! ···여보세요? 박현우 씨? ···야, 박현우?”
박현우는 말없이 전화를 끊은 모양. 길우성이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이 싸람들이 진짜!”
앞에 앉은 박가람이 길우성을 돌아보았다.
“잘 사귀는 커플 보면 괜히 흐뭇하고, 대리 만족 느껴진다면서요, 길우성 씨.”
“현우 정도면 괜찮지 않아?”
이건우가 천천히 손가락을 꼽았다.
“술도 안 마셔, 담배도 안 피워, 취미는 그냥 게임 정도에다가··· 잘생겼고, 연기 잘해서 굶을 걱정도 없어. 성격···도 좋은 편 아냐?”
“전에 졸업식 때 보니까 동생도 잘 챙기던데. 가족이랑 아이 대하는 모습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잖아.”
멤버들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길우성은 부루퉁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엄마가 그러는데, 친한 사람이랑 가족이 사귀면 안 좋댔어. 둘이 크게 싸우거나 헤어지기라도 하면 나중에 그 사람과의 관계도 어색해진다고.”
“아.”
“건우 형, 생각해봐. 만약에 형네 누나랑 호 형이 사귀면 어떨 것 같아?”
이건우와 유호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건우가 안쓰러운 눈빛을 하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런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 너희 누나가 뭐가 되냐···.”
“제발 좀 데려가 주세요?”
“······.”
“에에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걸 아니까 그렇게, 어? 쉽게 말이 나오는 거야. 보배 형, 형네 동생이랑 라욘 형이 사귀면···.”
라이언이 산뜻하게 끼어들었다.
“난 성인, 동생은 미성년자. 범죄야. 나빠. 그리고 난 같은 나이 아니면 누나가 좋아.”
“어, 그래···.”
“내 동생 남자친구 있어, 우성아.”
“아, 그렇구낭···.”
“우성아. 아무리 가족이라도 경찰이 개입할 만한 잘못된 관계가 아닌 이상, 남녀 문제엔 섣불리 끼어드는 건 아닌 것 같아.”
유호가 길우성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나중에 현우랑 어색해질까 봐 걱정하는 건 이해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당사자들 마음이잖아. 그러니 적당히 선을 지키며 두고 보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우성이 너도 이제 성인이잖아. 두 사람도 성인이고.”
“그래, 현우라고 네 생각을 안 했을까.”
“안 했을 것 같은데. 그 형 전부터 우리 곰순이한테 들이댔거든.”
“아.”
하아. 한숨을 푹 내쉬는 길우성의 어깨가 축 처졌다.
“전에 분명 차였다는 소리 듣고 안심했었는데 어느새···.”
박가람이 이건우에게 속닥거렸다.
“나중에 현우랑 어색해질까 봐 걱정된다는 건 핑계고, 그냥 누나 아까워서 저러는 것 같지 않아?”
“네가 봐도 그렇지?”
한율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핸드폰으로 연예뉴스란 메인에 뜬 기사를 읽었다.
* * *
[블블 민준♡이희우 결별설에 양측 소속사 ‘사실 확인 중’]
-이럴 줄 알았다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남자 군대 가지 않았나? 이희우도 별수 없네ㅋ
ㄴ그래서 오래 간 건지도 모름ㅇㅇ
-그렇게 요란하게 사귀더니 이제 쪽팔려서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냐
ㄴ헤어진 게 쪽팔릴 일임? 뭔 죄짓는 것도 아니고
ㄴ원댓글 분, 죄짓기 싫어서 애초부터 연애를 안 한답니다
ㄴ못 하는 게 아니고?
-솔직히 이희우가 뭐가 아쉬워서 아이돌이랑 사귀냐? 어릴 때부터 춤 노래만 하느라 머리도 텅텅 비었을 거고, 사방에 가슴이랑 허벅지 드러내고 다니는 여돌 천지에다 오빠오빠 따라다니면서 감시하는 빠순이들까지ㄷㄷ
-난 아직도 ㅁㅈ 사생들이 벌인 범죄 생각하면 지금까지 사귄 것도 용함
-남자가 군대 가면 보통 여자가 먼저 헤어지자 말하지만, 여자가 제대할 때까지 지켜주면 남자 쪽이 여자한테 이별 통보하는 게 보통임. 고로 군 기간을 넘든 안 넘든 헤어지는 게 순리
-얘들아, 쟤네가 헤어진다고 너희랑 만나주진 않아
-울 오빠가 ㅁㅈ이랑 같은 부댄데, 이희우 자주 면회 온다고 하던데? 항상 분위기도 좋았다던데? 머지??
ㄴ웃으면서 안녕?
“다들 아주 많이 신났네.”
광고 화보 촬영으로 이탈리아에 온 이희우는, 뒤늦게 자신의 결별설을 확인하곤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바로 이틀 전 웃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한 민준이, 돌연 이런 식으로 이별을 통보할 리 없는 까닭이었다. 갑자기 죽을 병에라도 걸렸다면 모를까.
“민선아, 익명 커뮤에다 내 지인이랍시고 이딴 소설을 쓴 사람이 대체 누굴까? 난 헤어지겠단 말은커녕 연애 상담도 한 기억이 없는데··· 참 신기하다. 그렇지?”
“그러게요. 그리고 지인이란 증거도 없이 ‘내가 들었다!’라는 일방적인 주장 어디를 믿고 기사까지 쓰는지···. 언론도 이상한데요?”
“정치권에서 무슨 이슈 덮으려고 나 이용하나? 그거 아니면 상당히 뜬금없기는 한데···.”
그도 그럴게, 사실 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결별설이 연예뉴스란을 넘어 생활 뉴스란에도 올라가 있었다.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댓글 란엔 왜 알고 싶지도 않은, 관심도 없는 연예인 결별설 따위를 여기에서 봐야 하냐며 괜히 두 사람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악플이 많았다.
이희우는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막상 당해보니 기분 참 뭣 같네.”
그러나 카메라 앱을 실행한 그녀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웃었다.
찰칵.
찍은 셀카는 SNS에다 올렸다.
[준이 거 :)]
짧고 굵은 한마디.
곧바로 댓글 반응이 쏟아졌다.
-캬
-역시 희우 언니 쿨함 그 자체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진짜 예쁘다
-제발 익명 사이트에 증거도 없이 올라온 글 좀 믿지 마라, 멍청이들아
ㄴ좋다고 퍼다 나르는 인간들이나 기레기들이나 도긴개긴
ㄴㅁㅈ 팬들이 좋아서 퍼다 날랐을 듯
-대체 뭘 덮으려고 잘 사귀는 사람들을 건드리는 건지
이렇게 난데없이 뜬 두 사람의 결별설은 이희우의 직접적인 해명으로 곧 잠잠해질 것 같았으나, 이번엔 결별설이 단순 해프닝이었다는 기사가 줄줄이 연예뉴스란 메인을 도배했다. 실검 말미엔 [이희우 준이거]가 올라왔다.
“보여?”
보이그룹 MOHE의 소속사인 VEL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타악. 책상 위에 사과패드가 던지듯 놓였다. 사과패드엔 [‘민준♡’ 이희우, 개인 SNS로 결별설 일축] 제목이 크게 적힌 인터넷 기사가 떠 있었다.
“너 때문에 일어난 사달이?”
“······.”
대표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는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지만, 소파에 두 다리를 올린 채 앉은 안인섭은 말없이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인섭아. ···야.”
“내가 안 했다고 몇 번을 말해요.”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부정. 대표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네가 못 믿게 행동하니까 그런 거 아냐! 어? 그래, 네 말대로 누가 네 노트북 사용해서, 네 ID랑 비밀번호 다 알아내서 제보 메일을 보냈다 치자. 왜 하필 그 직전에 그런 사진을 구해선···! 너 그 사진 구한 거 누구누구 알아. 그 사진 때문에 FJ에서 움직인 거 아냐!”
“아, 모른다고!”
안인섭이 벌떡 일어났다.
“씨발, 계속 같은 말 되풀이하게 할 거면 부르지 말라 그랬잖아요!”
“뭐? 씨발?”
대표도 기가 찬 얼굴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올렸다.
“너 지금 나한테 욕한 거냐?! 이게 계속 오냐오냐해주다 보니까, 이젠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지?!”
“오냐오냐?”
안인섭이 피식 웃었다.
“말로만 오냐오냐했지, 솔직히 대표님이 한 게 뭐 있어요? 네?”
“뭐, 뭐?”
“이렇게 앉아서 생색낼 시간 있으면, A&R 팀이나 싹 물갈이해요. 어디서 매일 누더기처럼 기운 곡이나 들고 와선 진짜···. 하.”
벌컥. 대놓고 한숨까지 쉬며 멋대로 나가는 안인섭의 태도에, 대표는 입을 크게 벌린 채 뻐끔거리다가 목 뒤를 잡았다.
“와, 저 새끼, 저거···.”
대표실 밖에 있던 매니저가 무슨 일이냐는 듯 조심스럽게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대표의 목소리가 복도까지 쩌렁 울렸다.
“진짜 미친 거 아냐, 저놈?!”
안인섭은 복도를 걸으며 의아하게 쳐다보는 직원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씨발,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오라 가라 지랄이야. 누가 대가리 텅 빈 양아치 출신 아니랄까 봐.’
지난달, 도깨비장난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난데없이 차의 블랙박스가 터진 날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피곤해서 한숨 잔 사이, 누군가 자신의 노트북을 사용해 FJ그룹에다 유상호 관련 제보 메일을 보냈다.
처음엔 서한율에게 연락 받은 이해원이 그런 짓을 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메일이 발송된 시간, 이해원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보이는 라디오에 출연 중이었다. 다른 멤버들 또한 회사에 있거나 여자친구 집에 있었다는 게 확인되었다.
‘엘리베이터나 현관 앞 CCTV에도 찍힌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안인섭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한때 두려움에 휩싸였었다.
메일이 발송된 날, 그 시각.
안인섭은 머릿속에 시커먼 안개가 훅 밀려들어 오는 것처럼 까무룩 잠들었었다. 그 감각은 클라우드의 파일이 몽땅 삭제되기 전날 밤, 술에 잔뜩 취해 블랙아웃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느낀 것과 흡사했다.
어쨌든 L그룹 간의 일은 스폰서가 어떻게든 중재하기도 하고, 이우그룹의 이채현도 이해원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하면 싸움을 거는 걸로 간주하겠다고 나서서 더 크게 번지진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제보 메일에 첨부되었던 사진이 한 언론 매체에 의해 공개되었다. 그래서 L그룹은 급한 대로 이희우의 결별설을 뿌리고, 뒤에선 해당 사진이 실린 기사를 내리고 수습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유상호 관련 건을 확인했던 FJ그룹이나 L그룹의 누군가가 유출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너 때문인 거 알지?』
생각할수록 욕이 나왔다.
정말 원인을 따지자면 제 주제도 모르고 이제설과 주연을 맡으려 한 유상호의 과욕 때문 아닌가?
‘서한율보다 연기 잘한다고 착각에 빠진 새끼나, 그런 새끼를 밀어주려는 썩은 동태 눈깔 할망구나.’
아무리 재수가 없고 싫어도, 서한율이 연기를 잘한다는 건 자신도 인정하는 바인데 말이다.
‘···가만.’
서한율에 대해 떠올리던 안인섭은, 문득 함께 떠오르는 기억에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나 서한율 앞에서도 그런 식으로 잠든 적 있지 않았나? 분명··· <감성 푸드트럭> 촬영할 때 대기실로 서한율이 찾아오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안인섭은 당시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다,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
올해도 안 주면 울어버릴 거야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잠들었다고 ‘착각’했을 때, 서한율이 뭔가를 보거나 듣진 않았을까?
안인섭은 멈췄던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핸드폰으로 작년 스케줄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클라우드 파일이 몽땅 사라진 것도, <감성 푸드트럭>을 촬영하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 제보 메일이 날아간 것도 서한율을 만난 날이고.’
상상도 하긴 싫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자신에게 다른 인격이 있고, 그 인격이 서한율에게 클라우드 ID와 비밀번호를 나불거렸다면?
‘그렇다면 왜 다른 누구도 아닌 서한율에게? 차라리 서한율이 나한테 최면을 걸었다는 게 더 신빙성 있겠다.’
그러나 제보 메일 건을 생각해보면 최면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서한율과 헤어지고 나서 블랙박스를 새 걸로 교체하고, 세차장에 들른 다음에 숙소까지 멀쩡히 운전해서 돌아왔다. 그 모든 행위가 최면 상태로 가능한 일인가?
‘어쨌든 직접 만나서 확인해봐야겠어.’
안인섭은 비어있는 보컬 연습실로 들어가 서한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으로 설정된 풀썸 노래가 흘러나오다 끊겼다.
안인섭은 서한율이 대답하기도 전 용건을 던졌다.
“중요하게 물어볼 얘기 있어. 당장 만나.”
-[싫은데요.]
뚝.
“이런 씨.”
안인섭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해원 일이야.”
-[······.]
서한율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숨을 쉬었다.
-[하···. 그럼 선배님이 이쪽으로 오세요.]
한율은 안인섭의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한숨을 쉬었다. 14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오늘 도착했다. 그리고 시차를 맞추려고 일부러 이 시간까지 버티다 이제 막 자려고 했건만.
‘이번엔 또 무슨 용건인지.’
이제 잘 시간이구나, 기분 좋게 베개에다 꾹꾹이를 하던 달냥은, 한율이 입었던 잠옷을 벗고 외출할 채비를 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므앙?
“금방 다녀올게.”
한율은 달냥의 머리를 쓰다듬곤 방을 나섰다. 멤버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숙소 안은 고요했다.
도어락을 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삐릭···. 철컥.
안인섭과 만난 건 아파트 단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공원 주차장이었다.
“마실래?”
안인섭은 벤치에 앉아 캔맥주 하나를 까고 있었다. 한율은 주차장에 세워진 그의 차를 힐끗하곤 미간을 찡그렸다.
“차 갖고 오지 않았어요?”
“갈 땐 택시 탈 거야.”
유상호 관련 제보 사건 이후 밥도 잘 안 먹고 사람이 멍해진 것 같다더니, 정말로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수척해졌다. 눈빛이나 목소리에 은근히 서 있던 날도 둔해졌고.
“당장 보자고 한 용건이나 들려주세요. 오늘 귀국해서 굉장히 피곤하거든요. 여기, 모기도 많을 것 같고.”
툭. 안인섭이 편의점 봉투 뒤에 가려진 무언가를 반대편 옆에 놓았다. 보조배터리와 연결한 휴대용 모기 퇴치기였다.
“자.”
“···어울리지 않게 왜 이래요.”
“뭐. 팬한테 받은 선물, 적절히 사용하는 게 잘못된 일이냐?”
그러고서 안인섭은 한참 동안 맥주를 들이켜더니, 깊은숨과 함께 캔을 든 손을 내렸다.
여전히 우두커니 선 한율을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이해원 일이라곤 생각 안 하는 눈치네?”
“무슨 일이 있었으면 해원이 형이 직접 말했을 테니까요.”
“둘이 아주 친해졌나 봐? 그렇게 말···.”
“이번엔 또 무슨 용건이기에.”
한율은 안인섭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그와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으므로. 정말 피곤하기도 하고.
“해원이 형 핑계까지 대면서 부른 건지, 궁금해서 나왔어요.”
“······.”
안인섭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품을 뒤적거렸다.
“담배 피울 거면 그냥 가고요.”
“···하, 씨.”
꺼내려던 담배와 라이터를 도로 집어넣으며 안인섭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머뭇거리던 용건을 말했다.
“너. 나한테서 이상한 점 느낀 적 없어?”
“어떤 이상한 점이요?”
“<감성 푸드트럭> 촬영할 때 네가 나 혼자 있는 대기실로 찾아왔었잖아. 그때 말이야. 예를 들면 내가 갑자기 나에 대해 주절거렸다거나···.”
안인섭은 이해원에게도 자신이 이중인격처럼 보일 때가 있었냐 물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직전, 잠들 듯 의식이 꺼지던 현상이 그 전조가 아닐까 추측하고, <감성 푸드트럭> 때도 그랬었다는 걸 이제야 떠올린 모양.
“사소한 거 하나라도 좋아. 솔직히 말해봐.”
“왜 그래야 하는데요?”
“너도 이해원한테 들어서 알고 있을 거 아냐. 내가 무슨 짓을··· 하. 벌였다는 이야기. 어쨌든 그 일 덕에 유상호랑 L그룹이 순순히 물러나고, 예정대로 네가 그 드라마에 캐스팅된 거잖아. 안 그래?”
그래도 눈앞에 선 사람의 짓이라 생각하지 않는 걸 보면, 현실적인 사고가 흐려지진 않은 듯했다.
본인 기준의 상식도.
“없었어요. 해원이 형에 대해 얘기하던 도중에, 피곤한 얼굴로 눈 끔뻑거리다가 그대로 잠든 것 외엔. 그래서 기면증이라도 있나 싶었죠.”
“잠꼬대 같은 건? 없었어?”
“네.”
탁. 안인섭은 캔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
천천히 내뱉는 한숨엔 안도하는 감정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한율이 거짓말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 법도 하건만, 그런 의심할 여력도 없이 지친 모양이었다.
“그럼 용건은 끝난 거죠?”
안인섭은 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갈게요.”
한율은 안인섭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곤 한 걸음 떼려다, 다시 고개를 돌려 주의를 줬다.
“갈 때 택시 타는 거 잊지 마세요. 괜히 음주운전이 살인미수나 다름없는 행위란 말이···.”
풀썩.
“······.”
한율은 말을 멈추곤 눈을 깜빡거렸다. 마치 전원이 나간 인형처럼 안인섭이 힘없이 쓰러졌다. 앞으로 쏠린 무게 중심 탓에 스르륵 땅바닥으로 떨어질 듯 휘청거리기까지 해, 한율은 성큼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텅그렁. 바닥에 빈 맥주캔, 그리고 새 캔맥주 여러 개가 담긴 편의점 봉투가 떨어졌다.
쯧. 한율은 혀를 찼다.
‘참 사람 귀찮게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야.’
잠시 후, 자정이 넘은 시간.
숙소로 돌아와 보니 거실엔 차남석과 달냥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이 밤에 어디 갔다 와?”
“잠깐 안인섭이 불러서 나갔다가, 병원에 데려다주고 왔어요.”
“안인섭?”
차남석이 미간을 구겼다.
“네가 안인섭을 왜 만나, 그것도 이 시간에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그리고 병원은 또 무슨 소리야.”
“설명하자면 조금 기니까 내일 말할게요. 그런데 형은 안 자고 뭐 해요? 자던 거 아니었어요?”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잠깐 깼는데, 다시 잠이 들려던 찰나에 이 녀석이 내 머리맡에 올라와서 또 깼어.”
한율은 달냥을 안았다.
므앙.
“괜히 미안하네요.”
“괜찮아. 그럼 들어가서 자. 너 엄청 피곤해 보인다.”
“네. 형도요.”
“어.”
두 사람은 거실 조명과 TV를 끄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