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427)

* * *

8월 9일. 올림픽 공원에 있는 경기장에선 <2019 소리구름어워즈> 준비가 한창이었다. 올해도 무대에 오르기로 한 어스래빗은, 리허설을 위해 아침 일찍 경기장을 찾았다.

“올해도 상 안 주면 나 울어버릴 거야.”

“이프림 분위기 보니까, 이번에도 공연만 시키고 상 안 주면 다 엎어버릴 기세더라.”

어스래빗은 ‘남자 아이돌그룹 퍼포먼스 상’ 후보에 올랐다. 무대에선 과 두 곡을 부르기로 했다. 중간엔 20초가량의 새로운 퍼포먼스도 들어갈 예정.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경기장에 설치된 야외무대 앞에는 커다란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아래 비치된 의자에 앉은 건 모두 어제 아스대 본선 녹화장에서도 본 얼굴들.

“안녕하세요옵.”

“날씨가 참 덥네요.”

“휴대용 선풍기 필요하신 분?”

“엇···. 감사합니다, 선배님.”

멤버들은 일부러 넉넉하게 챙겨온 휴대용 선풍기를, 필요해 보이는 후배들에게 나눠준 후 빈자리에 앉았다.

경기장 가득 울려 퍼지던 다른 팀 음악이 멈췄을 때, 길우성이 멤버들을 향해 큰소리로 물었다.

“이따가 게임 존 가서 놀 사람?”

“막내, 아까 유찬이 형 말할 때 잤구나? 리허설 끝나면 회사 갔다가, 시간 맞춰서 샵에 갔다가, 레드카펫 때 다시 올 거야.”

“잉? 샵에 가서 헤메를 받는다고? 시간 괜찮아?”

“응.”

작년과 재작년엔 리허설을 끝내고 난 뒤 대기실에서 헤메를 받고, 레드카펫이 시작되는 4시까지 하릴없이 시간을 죽였었다. 샵에서 좋은 시간대의 예약을 못 잡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샵에서 먼저 어스래빗을 위해 좋은 시간대를 비워놓았다.

“아니면 우성이 너 혼자 여기에서 실컷 게임 하다가 따로 샵으로 올래?”

길우성이 정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 아니? 여기에 계속 있어야 할 거 아니면 회사 가서 조금이라도 연습해야지. 어제 종일 못 했잖아.”

“기특한 우리 막냉이.”

“흐.”

“배고파.”

“아점 메뉴나 미리 생각해놓자. 난 고기. 무조건 고기.”

“나도 고기.”

“불고기, 삼겹살, 갈비 정식···.”

“갈비찜 좋다···.”

“갈비찜이면 예약해놓는 게 좋지 않아?”

“핸드폰 있는 사람?”

“있을 턱이 있나. 다 매니저 형들한테 맡겨놨는데.”

“지금 시켜야 하는데? 그래야 딱 알맞게 포장된 거 가져가고, 회사로 갈 때 즈음엔 양념이 적절하게 배서 최상의 맛이 나는데?”

뒤에 앉은 신인 걸그룹 멤버들이 그들의 대화를 듣곤 작게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박가람은 아랑곳없이 벌떡 일어나 매니저를 찾았다.

“장전이 혀엉! 우리 갈비찜! 포장! 미리! 형!”

“아니, 왜 단어 끊어서 말할 때마다 산만하게 덩실거려?! 앉아, 먼지 날려!”

리허설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왔을 땐 10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들은 연습실에서 아침 겸 점심을 적당히 먹고, 생방송 때 선보일 신곡부터 시작해서 안무가 완성된 다음 앨범 수록곡을 연습했다. 아직 정식 녹음이 안 된 가이드 버전이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마지막으론 오늘 소리구름어워즈에서 할 무대 최종 연습.

“우리 참 시간 알차게 보내는 것 같다.”

“뿌듯.”

연습을 끝내고 난 뒤엔 씻고 나서 샵으로 향했다. 꽃단장을 마치고 차에 탄 건 3시 무렵.

“안무 연습 너무 열심히 했나 봐. 차에 타니까 졸려.”

“참아. 팅팅 부은 얼굴로 레드카펫 밟을 거야?”

한율은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소리구름어워즈 관련 기사를 클릭해서 훑었다.

우웅. 상단에 이해원이 보낸 톡이 떴다.

-[인섭이 형 방금 퇴원했어. 한율이 너한테 고맙다고]

-[이런 표정으로 전해달라더라.]

-[(이모티콘)]

-[아무튼]

-[오늘 꼭 상 받자, 어스래빗!]

-[아니, 받을 수 있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

사흘 전, 안인섭을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데려간 한율은 이해원에게 연락했다. 이해원은 놀란 얼굴로 매니저와 함께 달려왔다.

그리고 어제 아스대 본선 녹화장.

『이제 당분간 형이 한율이 너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대표님이 형 핸드폰이랑 차 키 전부 압수했거든. 그리고···.』

이해원이 작게 속닥거렸다.

『‘그 사람’도 형한테서 손을 뗄 것 같아.』

MOHE 멤버들이 ‘파성줌마’라고 부르던 안인섭의 스폰서. 옷이나 가방, 핸드폰 케이스에 이어 차까지. 유독 파란색을 좋아해서 붙인 별명이라고 했다.

이해원의 말로는 뭔가 큰 사업체를 굴리는 사람 같기는 한데,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재계와 이 바닥 쪽 인맥은 아주 화려한 것 같다고.

‘파일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한율은 작년, 그 사람이 소리구름 대표에게도 입김을 불어 넣었단 사실을 상기했다.

‘누군지 조금 궁금하긴 하네.’

어떻게 죽일까요?

<2019 소리구름어워즈> 공연에서 어스래빗이 도중 넣은 새로운 퍼포먼스는, 멤버 중 춤 실력이 가장 뛰어난 길우성과 곡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리는 강보배가 주축이었다.

‘서늘한 분노’란 감정에 몰입한 강보배. 그의 또 다른 자아를 표현하는 길우성의 처절한 몸짓, 춤사위.

-분위기 대박

-흑발 춤 진짜 잘 춘다

-누가 퍼포먼스 상 후보 아니랄까봐

-이번에도 상 안 주면 이건 소리구름에 문제가 있는 거임

-춤신춤톢 흑발 이름은 길우성입니다!

이처럼 어스래빗 무대를 호평하는 반응에 부응하듯, ‘남자 아이돌그룹 퍼포먼스 상’ 시상자는 활짝 웃으며 어스래빗을 크게 불렀다.

소리구름어워즈 세 번째 출연 만에 받는 상이었다.

[미주와 호주, 유럽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컴백 활동을 하고, 그 와중에 생긴 여러 가지 일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도 잘 버티고 달려와 준 우리 멤버들에게 정말 고맙고···.]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좌기훈 대표는 TV로 어스래빗의 수상 장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WB래빗 좌기훈 대표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대형 기획사처럼 좋은 기회를 잘 잡아준 것도 아니고 지원을 넉넉하게 해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여 성장한 아이들이 되레 고맙다고 말한다.

엔터 회사를 운영하며 가장 뿌듯하고, 아이들에게도 고마운 순간이었다.

‘아직도 작년, 소리구름이 상을 주기로 했다가 돌연 철회한 걸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좌 대표는 어스래빗 멤버들이 무대에서 내려갈 때까지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다가, 경영팀장에게 톡을 보냈다. 퇴근 시간 이후 업무상 연락은 최대한 피하려고 했지만, 이번엔 자제하기 힘들었다. 바로 앞서 ‘여자 아이돌그룹 퍼포먼스 상’은 크리스탈 래빗이 받았기 때문.

[이번 달 전 직원에게 보너스 빵빵하게 지급합시다~ ^^~]

[물론 경영팀도 포함이요~]

-[네! :D]

-[(이모티콘)]

네티즌 반응을 보기 위해 사과패드에다 켜놓은 너튜브 채팅 창은 시끌벅적했다.

-퍼포먼스 전부 토끼들이 쓸어갔어!!!

-떠비 연습실에선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떠비 안무가들 모두 노예 계약했단 소문이 있음 마음에 드는 안무가 나올 때까지 갇

-춤추는 토끼 군단

똑똑.

“대표님, 유재용입니다.”

“네, 들어와요.”

좌 대표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매니지 A팀 유재용 팀장을 맞이했다. 그러나 대표실로 들어오는 유 팀장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가 거의 업어 키우다시피 한 크리스탈 래빗이 상을 받은 좋은 날인데도.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어두운데···.”

일부러 어스래빗 수상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찾아온 것 같은 타이밍도 심상치 않다.

“잠깐 드릴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네, 앉아요.”

TV에선 다른 아이돌그룹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좌 대표는 리모컨으로 TV 볼륨을 낮추며 맞은편에 앉는 유 팀장의 얼굴을 살폈다. 누가 봐도 몹시 화가 나, 오히려 머릿속이 냉랭한 사고로 팽팽 돌아가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혹시.”

크래가 데뷔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지방 행사를 뛰러 갔을 때였다. 그 지역 높은 분이라고 거들먹거리던 남자가, 당시 미성년자였던 크래 멤버를 성희롱, 성추행했을 때도 유 팀장은 이런 표정을 지었었다.

그리고,

“아는 깡패 없으십···.”

“아는 깡패 없어요.”

이런 대화를 나눴었다.

“······.”

“왜요. 무슨 일인데요, 팀장님. 누가 또 애들 건드렸어요?”

“후우···.”

유 팀장이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제희 씨랑 같이 드라마 촬영 중인 배우 윤승권 있잖습니까.”

“네.”

“오늘 드라마 중간 회식 도중에 제희 씨를 추행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곤 술김에 장난치려다가 한 실수였다고··· 하, 이런 개ㅆ···.”

좌 대표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어지는 유 팀장의 찰진 쌍욕을 들었다.

“···후. 이 새끼가 아주 악질인 게 뭐냐면, 다른 사람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사람들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교묘한 각도로 그랬답니다. 그놈 여자 밝힌다는 소문 들었을 땐 그냥 편력이 심한 정도겠거니 했는데 이···.”

2차 쌍욕 퍼레이드. 좌 대표는 이번에도 조용히 유 팀장이 쏟아내는 욕설과 정황을 들었다. 그리고 유 팀장이 스스로 심호흡하며 진정하고 나서야 물었다.

“그래서, 지금 제희 씨는요?”

“일단 집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술이 완전히 깨서 정신이 맑아지면 그때 차근차근 짚어보겠다고요. 본인의 착각일 수도 있다면서.”

“네···. 팀장님.”

좌 대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진지하게 논의 주제를 던졌다.

“윤승권, 어떻게 죽일까요?”

* * *

소리구름어워즈가 끝나고 난 뒤, 어스래빗은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소리구름어워즈 첫 수상 기념 라방을 진행했다. 곧 뮤닷에서 6화가 방송될 시간이라, 방송이 끝나고 나서 라이브를 하기엔 너무 늦기 때문이었다.

6화에서는 출연자들이 평소에 커버하고 싶었던 곡을 선보였다. 어스래빗은 탑 티어에 있는 여성 솔로 가수 ‘진사랑’의 곡을 어스래빗 스타일로 편곡하고, 원곡엔 없는 안무와 랩까지 넣었다.

반응은 좋았다.

-8톢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 함께 날아갈 것 같습니다

-2주 만에 이런 퀼리티 높은 무대를 준비한다는 게 말이 안 될 것 같은데 만들어버리네 미친 토끼들;

-정작 편곡에 힘쓴 리더톢이 파트가 별로 없는 이유: 편곡하느라 진 다 빠짐

“바빴던 한 주가, 이렇게 지나가네요.”

방송이 끝난 새벽 1시 20분. 한율은 따로 개인 라이브 방송을 켰다. 말끔하게 씻은 민낯에다 티셔츠, 잠옷 바지를 입은 편안한 모습으로.

“웬일로 또 라방을, 그것도 개인 라이브를 숙소에서 하냐고요?”

한율은 쉴 새 없이 올라오는 톡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적당한 질문에 대답했다. 풀썩. 베개에 편히 머리까지 대고 속닥거리듯이 조용조용.

“오늘 방송된 리디스 무대에서 제 파트가 적었잖아요. 그 이유가, 그 무대를 준비할 때랑 제가 준비하던 드라마 오디션 시기가 겹쳐서 멤버들이 배려해준 거거든요. 그런데 조금 전 방송을 보는데.”

므앙. 달냥이 카메라를 가리며 라방 영상에 난입했다.

-깜짝야

-달냥아아

-그래 율이 오빠 네 거야 달냥아

-[핸드폰 보면서 혼잣말하지 말고 나랑 얘기하자 이런 뜻으로 끼어든 것 같네요.]

한율은 달냥을 품에 안으며 말을 이었다.

“가람이 형이, 너 오늘 리디스 방송 분량 얼마 안 되니까, 라방이라도 해. 할당량은 채워야지. ···라고 해서 켰어요.”

-ㅋㅋㅋㅋㅋ

-형 말 잘 듣는 율톢

-자체 할당제ㅋㅋㅋㅋ

“그런데 지금 너무 졸려서··· 5분만 하고 끌게요.”

-그랭

-그렇게 이쁘게 웃으면서 말하면 ‘어!!!!!!!!!!!’

-[독일어 해주세요♡]

-벌써 구미호 역에 몰입하는 거니 그런 거니

-[LA에서도 공연만 하고 바로 돌아갈 건가요? :‘(]

-[오늘 상 받은 거 너무 축하해]

-한율아 진사랑 님 SNS에 오늘 너희 무대 올라간 거 봤어?

-어떻게 잠들기 전 모습도 이렇게 고울 수가 있지

-여름 지나기 전에 하고 싶은 거 있어?

“진사랑 선배님이 SNS에요?”

한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부스스 일어났다. 핸드폰 카메라를 향해 꾸벅.

“감사합니다. 이 라방을 보고 계실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율은 해외 팬들의 질문에도 유창한 영어와 간단한 독일어로 대답하고선,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정말 5분 만에 라방을 껐다.

[라이브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칼 같당

-웃는 거 보면 무슨 말이든 다 잘 들어줄 것 같은데 그래도 칼처럼 끊는 게 율톢의 매력이지 암

방송이 종료되자 이번엔 저들끼리 떠드는 팬들. 한율은 전원 버튼을 가볍게 누르곤 다시 누웠다.

그때였다.

우웅.

[발신번호표시제한]

“······?”

라방을 끝내자마자 걸려오는 수상한 전화.

‘사생이었다면 번호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라방 중에 걸 텐데.’

한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서한율 씨?]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 더더욱 수상쩍어, 한율은 태연히 거짓을 뱉었다.

“전화 잘못 거셨어요.”

귀에서 핸드폰을 떨어뜨리는데, 상대방이 빠른 어조로 크게 말했다.

-[L그룹 본사 비서실입니다.]

“네, 발신번호표시제한 농담 잘 들었습니다.”

뚝. 한율은 아예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해놓고 잠을 청했다. 정말 L그룹 본사 비서실인지 사칭인지 모르겠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리허설에, 연습에, 공연까지.

무척 피곤했다.

다음 날 아침.

주말이라 한율은 평소보다 한 시간 늦은 9시에 일어났다. 오늘은 가사도우미가 오지 않기 때문에 청소기부터 돌리고, 달냥의 밥을 챙겼다. 모래 화장실 청소까지 마친 뒤엔 화분을 살폈다.

“써한, 너 핸드폰 꺼놨어? 유찬이 형이 연결 안 된다고 하던데.”

방에 딸린 욕실에서 씻고 나왔을 땐 길우성이 달냥과 놀아주고 있었다. 한율은 그제야 핸드폰의 비행기 모드 설정을 해제, 조유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에 이상한 전화가 와서.”

“사생?”

“몰라. 형들은 먼저 갔어?”

“엉. 남석 씨 빼고.”

조유찬이 전화를 받았다.

-[어, 한율아. 일어났어?]

“네. 이제 막 회사로 갈까 하는데, 무슨 일이에요?”

혹시 새벽에 왔던 발신번호표시제한 전화와 관련 있는 일일까. 그러나 조유찬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무슨 일이긴요, 스케줄 문제죠. 숙소로 데리러 갈까?]

“번거롭게 뭘요. 제 차 끌고 갈게요.”

-[응. 그럼 12시까지 사무실로 와.]

“네.”

그 시각, L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L백화점 사장실.

새벽에 서한율에게 발신번호표시제한으로 전화를 걸었다가 바로 장난 전화 취급을 받았다는 비서의 보고에, L그룹 회장의 손녀이자 L백화점 사장 강수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뭐 대뜸 ‘아, 네! L그룹에서 어쩐 일이시죠?’ 하고 굽신거리면서 반응할 줄 알았어요? 장 비서님, 그렇게 안 보였는데 참 순진하네. 뉴스 안 봐요? 요즘 아이돌들, 온갖 방법으로 스토킹 당한다잖아. 경계심이 없겠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얼른 직접 움직이세요. 고모는 아직 걔한테 생각이 미치지 않는 모양이니까.”

“네.”

“이번엔 본사가 아니라 이쪽 비서라고 솔직히 밝히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장 비서가 사장실을 나갔다. 강수희는 책상에 팔꿈치를 세우곤 턱을 괬다. 그러곤 왼손으로 잡은 마우스를 움직이며 클릭, 클릭.

모니터엔 배우 유상호의 이미지가 떠 있었다.

‘잘생기긴 잘생겼는데···. 어릴 때부터 호빠나 다니던 이런 쓰레기 어디를 믿고 예뻐하는 건지.’

강수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둘 다 교통사고나 성병에 걸려 콱 뒈지면 참 좋을 텐데.”

띠리링뚱땅띵.

핸드폰이 울리며 [친구 A]가 액정에 떴다.

“어, 왜.”

-[깡쑤, 이따가 파티에 올 거지?]

“나 일해야 해. 지금도 회사야.”

-[사람 됐네, 깡수? 토요일인데 출근을 다 하고? 그래도 잠깐이라도 와. 모델이랑 배우, 아이돌 누구도 부른다더라. 잘 노는 애들로만.]

강수희는 미간을 구겼다.

“난 우리한테 빌붙어보려고 그런 자리에 헤벌쭉 나타나서 굽신거리는 애들 극혐이거든? 나중에 명단이나 보내.”

-[왜?]

“아빠한테 말해서, 우리 회사 일 영영 못 받게 하려고.”

-[이 소소하게 미친년.]

본의 아니게 수집 중

“안녕하십니까. L백화점의 장기백이라고 합니다.”

한율은 장기백의 명함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정말 L그룹 본사 비서실 분이 아니시네요?”

“제가 생각이 모자라 허풍을 떨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일 얘기였다면 굳이 그 시간에 개인적으로 연락하진 않으셨을 테고···.”

한율은 그의 명함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슥 도로 돌려주었다. 무슨 용건인지는 몰라도, 따로 관계를 맺고 싶진 않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무슨 용건인지 바로 들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L백화점에서 저에게 연락할 만한 일이 뭔지, 도통 짐작이 가질 않아서요.”

한율이 다시 장기백의 연락을 받은 건, 점심시간이 되어서 구내식당으로 향할 때였다.

-[새벽엔 실례했습니다. L그룹의 장기백이라고 합니다.]

-[(사진)]

-[(사진)]

-[오늘 조용히 따로 만날 수 있을까요? 부탁드립니다.]

그는 자신이 정말 L그룹 사람이란 걸 증명하고자, L백화점 사장과 함께 찍힌 사진, L백화점 사원증 사진을 메시지에 첨부해 보냈다.

조작과 사칭일 수도 있으나,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자신을 불러낼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서 속는 셈 치고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WB래빗과 그리 멀지 않은 카페.

2층에 있는 카페 입구엔 [내부 사정으로 오후 2시까지 쉽니다] 종이가 붙어있었고, 사람이라곤 장기백과 카페 사장뿐이었다. 카페 사장도 두 사람 앞에 음료를 내려놓곤 가게를 나갔다.

“네. 우선, 우리 쪽 문제로 드라마 출연에 잡음이 섞이게 한 점,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유상호의 스폰서인 L그룹 관계자가 한율의 자리를 부당하게 뺏으려 했다는걸, 한율도 잘 알고 있으리라 확신하는 어조였다. 그러나 한율은 놀라거나 하는 꾸밈없이, 가만히 장기백을 바라보았다. 장기백도 덤덤히 본론을 꺼냈다.

“지난달 15일. 그리고 며칠 전인 6일. 안인섭 씨 만나셨죠? 그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안인섭을 조사하면서, FJ그룹에 제보 메일이 날아가기 전에 안인섭과 한율이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전에 만난 것까지 주시하다니.

‘제보 건으로 결국 내가 캐스팅되어서? 그래서 나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보는 건가?’

“말씀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유상호 스캔들은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될, 저희 L그룹의 체면이 걸린 문제입니다. 하지만 초반 대처가 미흡하여 이렇게 뒤늦게나마 다시, 누구에게 얼마나 알려졌는지 조용히 조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소정의 사례 또한 준비했습니다. 한율 씨의 시간은 금과 같으니까요.”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

늦어도 너무 늦은 거 아닌가?

한율은 의아했지만, 안인섭이 유상호의 과거 사진을 보여주며 지껄였던 이야기를 순순히 들려주었다.

화요일 밤에 만나 나눈 이야기도.

데뷔하기 전부터 안인섭을 둘러싼 안 좋은 소문부터 시작해, 안인섭이 자신에게 또 다른 인격이 있는 건 아닐까 스스로 의심하는 것 같다는 말까지 모두 말이다.

안인섭이 L그룹 쪽에 어디까지 말했는지, 이들이 어디까지 따로 알아냈는지 모르므로.

“들으면 들을수록 참··· 피곤하셨겠네요. 한율 씨로선 정말 대화하기 싫은 상대였을 텐데. ···그럼.”

집중하며 경청하던 장기백이 물었다.

“한율 씨가 본 사진엔 유상호 혼자만 찍혀 있었고, 그 사진도 보기만 하고 바로 돌려주셨다는 거죠?”

“네. 안인섭의 차나 주변 주차 차량 블랙박스에도 찍혔을 테니, 확인해보세요.”

“아닙니다. 한율 씨가 그랬다면 그런 거겠죠. 믿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 상사에게 한소리라도 들은 걸까. 새벽에 발신번호표시제한으로 무례하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과 달리, 장기백은 내내 공손한 태도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야기도 끝난 것 같으니, 이만 가봐도 될까요?”

“네, 그리고 오늘 일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희 그룹의 체면이 걸린 일이라.”

“그렇게 할게요.”

“참, 가시기 전에 이거.”

장기백이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저희 백화점 상품권입니다.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이니 언제든 편히 오셔서 쇼핑을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아니요, 비밀이라고 하셨잖아요. 이런 선물을 받는 건 조금 위험할 것 같네요.”

“아. 또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응원하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나누고 나서 한율은 먼저 카페를 나왔다. 계단엔 카페 사장이 쭈그리고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수고하세요.”

카페 사장이 머쓱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네, 안녕히 가세요.”

계단을 내려가며, 한율은 이 육체가 아주 어렸을 때 모친과 함께 본 드라마를 떠올렸다. 대기업 총수 일가 내에서 벌어지는 암투를 그린 드라마였다.

가끔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기도 하지 않던가.

‘집안싸움에 사용할 약점을 찾는 건가?’

장기백과 대화를 나누며 느낀 건데, 그는 안인섭이 한율에게 보여줬다던 사진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정확히는 한율이 ‘원본’ 사진을 보거나 받진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느껴졌다.

‘그때 혹시 몰라 따로 챙기기는 했는데.’

FJ그룹에 제보 메일을 보낼 때, 한율은 안인섭이 따로 가지고 있던 원본 사진을 발견했다. 그리고 메일에다 첨부하고, 따로 USB에다가도 저장했다.

‘그나저나···.’

한율은 어스래빗 단톡방에다 [카페 가는 중. 커피 마실 사람?]이라고 올려놓으며 생각했다. 어째 ‘그런 사람들’의 치부를 하나씩 수집하고 있는 것 같다고.

참 본의 아니게 말이다.

“······.”

장기백은 창을 통해 멀어지는 서한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강수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장 비서님. 만났어요?]

“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만···.”

그는 서한율과 나눈 대화 중 핵심만을 골라 보고했다.

-[사진은 봤지만, 받지 않겠다 거절하고 헤어졌다?]

“네. 그리고 우리 쪽에서 준비한 사례도 거절했습니다. 금액도 보지 않고요.”

-[애가 생각이 있네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만났으니 받을 법도 한데.]

강수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부모님이 수백억 원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에 비해 푼돈일 가능성이 큰 상품권을 덥석 받는 것도 이상하긴 하겠네.]

“그리고 안인섭이 제보 메일을 보냈단 건 알고 있지만, 원본 사진이 따로 있다곤 생각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소득이 없네요. 보지도 않은 걸 봤다고 증언해달라 할 수도 없고.]

“사장님께서 원하신다면···.”

-[됐어요. 애초부터 크게 기대 안 했으니까. 하··· 그때 언론에 유출됐을 때 어떻게든 원본을 확보했어야 했는데.]

“늦게 아셨잖습니까.”

강수희는 재차 한숨을 내쉬곤 말을 돌렸다.

-[올 때 베스트 아이스크림이나 부탁해요.]

“네. 민트초코 맞으시죠?”

-[네. 패밀리 사이즈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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