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9월 6일. 뮤닷 마지막 방송이 있는 날.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오늘 방송은 평소보다 3시간 빠른 8시 10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오도 되기 전, 스튜디오 앞에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방청권을 획득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대부분 리디스 출연 6팀의 응원 굿즈로 치장한 팬들이었다.
“흐흐.”
[Rediscovery/어스래빗 대기실]
박가람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오늘로 리디스 촬영도 끝이구먼?”
“빡센 퍼포먼스 연습이 하나 줄어드는구먼?”
“속 시원하냐.”
이건우의 물음에 박가람과 길우성이 두 손을 높이 번쩍 들고 흔들흔들 기쁨을 표현했다. 대기실 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향해.
“이예에.”
한율은 소파에 편히 앉아 어제 리허설 때 찍은 영상을 돌려보았다. 실수나 미흡했던 점을 다시 체크하기 위해서.
스태프가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외쳤다.
“어스래빗, 30분 후에 리허설 진행할게요!”
“네엡!”
오늘 무대 순서는 블루액션, 풀썸, 원제로, 그레이트7, 하울링, 어스래빗.
2주 전 워터파크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건 블루액션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첫 번째 순서를 선택, 뒤이어 점수가 높았던 어스래빗이 망설임 없이 마지막 순서를 선택했다. 리허설 순서도 무대 순서와 같아, 그들은 다른 팀보다 여유롭게 출근했다.
“아안녀엉하세요.”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이번엔 블루액션의 안세현이 고개를 내밀었다.
“왔어? 리허설은?”
서서 스트레칭을 하던 차남석이 그대로 그에게 손을 들었다. 툭. 두 사람의 주먹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진작 끝났지. 그런데···.”
안세현이 놀란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이 머리 색 대박이다. 멋있어.”
“어울려요?”
“어. 역시 얼굴이 잘생기니까 뭘 해도 다 어울린다, 야.”
카메라를 의식한 듯한 언행. 이런 비즈니스적인 행동은 데뷔 이후 자신도 종종 했었기에, 한율은 ‘나도 잘 안다’라는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들 이따가 리허설 잘해요. 어스래빗 홧팅!”
“응, 고마워.”
“블루액션 파이팅!”
“가서 쉬어요, 형.”
“응, 이따 봐~.”
안세현이 문을 닫으며 퇴장했다.
잠시 후, 리허설을 마치고 돌아온 어스래빗은 곧바로 헤어 메이크업 단장에 들어갔다. 다른 팀도 막 준비에 들어갔는지, 복도는 각 대기실에서 나오는 드라이어기 소리로 시끄러웠다.
“어우, 깜짝이야.”
헤어 메이크업을 다 받고 나서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는 중. 거울을 보며 새 피어싱을 끼우던 길우성이 뒤에 비친 한율을 보곤 움찔 떨었다.
“메이크업까지 하니까 꼭 귀신 같다, 써한.”
이번 곡 분위기와 컨셉에 맞춰, 어스래빗의 비주얼 디렉터는 한율에게 파격적인 변신 시도를 추천했다. 몇 달 뒤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면 한동안은 탈색이든 염색이든 마음대로 못 할 테니, 이참에 미리 해보자며.
“탈색 몇 번 했냐?”
“많이.”
“그랭.”
이윽고 8시 5분. 무대 백스테이지에 화려하게 꾸민 출연자 6팀 전원이 모였다.
“생방송이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될까.”
“우승하면 뮤닷이 직접 리얼리티 예능 제작해주잖아. 당연히 긴장되지. 막대한 상품이 걸려 있는데.”
“기대는 접는 게 좋지 않을까?”
백스테이지는 무대 쪽에서 들리는 관객들의 기척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스태프들 탓에 어수선했다. 그러나 그 소음을 뚫고 들리는 목소리.
“어차피 우승은 인기 투표로 정해져서 어스래빗 아니면 원제로가 할 텐데.”
하울링의 진정이었다. 그는 박가람을 힐끗하고선 리더인 다감에게 투덜거렸다.
“우리야 뭐 들러리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겉으로 다 드러난다고 형이 전부터 말했지? 팬들 앞에서 한심한 꼴 보일래?”
“누가 잘 안 한 댔나···.”
눈치를 보아하니 박가람에게 상한 감정을 이런 식으로 표출하는 모양이었다. 상대방이 왜 거리를 두려 하는지, 그 이유에 관해선 생각도 하지 않고.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그때 백스테이지로 무대 MC인 옥정훈이 들어왔다. 옥정훈은 출연자들의 등이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격려했다.
“다들 끝까지 열심히 해요! 파이팅!”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율은 백스테이지에 설치된 TV로 시선을 옮겼다. 현재 송출되는 뮤닷 채널 우측 상단에 뜬 로고.
[생방송까지 남은 시간 01:04]
유호가 멤버들의 어깨나 등을 두드리며 주의를 끌었다.
“우리 단독 콘서트는 아니지만, 모여서 파이팅 구호 한번 외칠까?”
“무대 전에 하자.”
“그래.”
곧 무대 쪽에서 웅장한 음악과 함께 옥정훈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이돌의 재발견 .]
꺄아악!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
[마지막 특별 생방송을 찾아와주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MC, 옥정훈이라고 합니다.]
출연 팀의 등장 순서 또한 무대 순서와 같았다.
소속 팬덤 상관없이 출연자들에게 지금까지 수고했다며 인사하는 걸까. 한 팀씩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비슷한 크기의 환호성이 들렸다. 꺄아악!
이윽고 마지막으로 어스래빗의 등장.
어스래빗을 소개하는 짤막한 VCR 효과음, 어스래빗의 곡 중 가장 성적이 좋았던 가 흘러나왔다.
“가자.”
한율은 멤버들을 따라 환한 조명이 내리박히는 무대로 올라갔다.
거대한 LED 전광판에 한율의 얼굴이 잡혔다. 이마를 살며시 드러낸 아주 연한 백금발에 은빛이 감도는 푸른색 렌즈, 창백한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강렬한 아이 메이크업.
어스래빗 슬로건을 든 팬들이 울부짖었다.
꺄아아악!
오늘 처음 공개할 신곡 은 에서 이어지는, 몽환적이면서도 다소 어두운 컨셉의 곡이었다.
서울 집값 너무 비싸
각 팀이 등장하는 오프닝이 지나 MC의 투표 방식 설명.
마지막 순서인 어스래빗은 생방송 시작 한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의 무대를 최초로 공개했다.
[부서진 나리 조각 a haunting image 삼켜]
[줄기를 잘라 붙여 되돌리는 image 잡아]
누군가의 무덤을 파헤치고, 위험한 주술 의식을 암시하는 퍼포먼스와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멤버들의 표정 연기.
가 자신의 모든 걸 버릴 정도로 소녀를 사랑한 탓에 실패한 것을 자책하는 내용이라면, 은 시간을 되돌려 이번엔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안무와 스타일 또한 다소 음습한 내용에 맞춰, 흔히 아이돌 팬들이 ‘퇴폐 섹시’라 일컫는 컨셉으로 이뤄졌다.
처음 이 곡을 선정할 당시엔 ‘너무 어둡다.’, ‘청량 컨셉으로 활동했을 때와 이미지가 극단적으로 상반되어 위험하지 않나?’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었다. 그러나 ‘어차피 리디스에서 한 번만 하고 말 건데 괜찮지 않을까? 어스래빗이 보다 더 어두운 곡도 멋있게 소화할 수 있는 팀이라는 걸 보여주자’라는 의견에 힘이 실렸다.
멤버들 또한 이 요구하는 어려운 감정 연기에 부담을 느꼈으나, 이내 ‘어차피 한 번이니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노래 엔딩은 멤버들 중 연기실력이 가장 뛰어난 한율이 장식했다.
[네가 없는 숲에서.]
시간을 되돌렸던 것 자체가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반전 결말을 품고.
···꺄아아악!
숨을 죽이고 무대를 보던 관객들의 비명과 같은 환호성으로 오디오를 채웠다. 프로그램 톡창, 방송이 생중계되는 너튜브 채팅창에도 무수한 톡이 페이지를 빠르게 스치며 올라갔다.
-와 어떻게 엔딩에 딱 맞춰서 눈물 뚝 예쁘게 흘리냐
-마지막 서한율 조각인 줄
-떠비 진짜.. 막내즈 성인됐다고 자꾸 이런 무대 시키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쉐도위도 분위기 미쳤는데 더한 게 나왔네ㄷㄷ
-부서진 나리?
-연기장인돌ㄷㄷㄷㄷ
-시간을 되돌리는 흑마법사 토끼단.. 흑토끼단.. 블랙토끼.. 어...? 화이트블랙 WB의 그 까만 토끼...?
-지난주 워터파크에서 장난치던 애들이 안 보여요
-ㅅ1발 타팬인데 홀린 듯 봤다
-이거 하려고 지난번 무대 쉽게 갔구나ㅋㅋㅋ
-분위기 끝판왕
-서한율이 쓴 렌즈랑 아이섀도, 글로우 제품 아시는 분???
-뭐야 내 4분 돌려줘요
-칼각 안무에다 라이브+어려운 표정 연기.. 다 쏟아부었구나
-콘서트에서 보고 싶다
-중간에 무대 보는 다른 팀 아이돌 표정(꒪⌓꒪)머엉=내 표정
-가사 중 ‘나리’는 백합의 순우리말입니다!
-나는 오늘도 동양풍 컨셉 희망 존버를 이어간다...
-흑화 토끼단 잘 봤습니다.
어스래빗을 비추던 중앙 무대 조명이 꺼지고, MC의 머리 위, 다른 출연자들이 앉은 사이드 객석 조명이 부드럽게 켜졌다.
옥정훈이 다른 출연자들에게 어스래빗의 무대 감상을 묻는 동안, 어스래빗 멤버들은 어둠 속에서 백스테이지로 퇴장했다.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백스테이지에는 스페셜 무대를 준비 중인 출연자들이 모여있었다. 풀썸의 효운, 블루액션의 은강, 원제로의 정민솔, 그레이트7의 김권석, 하울링의 다감. 모두 각 팀의 메인 보컬이었다.
“여기 TV로 봤는데 진짜 멋있더라.”
“감사합니다.”
“다들 정말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눈 멤버들은 서로 다독거리며 호흡을 골랐다. 대기하던 스타일리스트들이 다가와 그들의 땀을 닦아주고 메이크업과 머리를 고쳐주었다.
“남석아, 옷 갈아입자.”
다른 팀 메보들과 스페셜 무대에 참여할 차남석은 임시로 만들어진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자, 한율이 너도 물 마셔.”
“고마워요, 형.”
한율은 조유찬이 내미는 생수를 받았다. 빨대를 가볍게 문 채 물을 천천히 마시며 TV로 시선을 옮겼다. 약간의 딜레이를 두고 송출되는 방송엔 [투표 마감까지 06:12] 자막이 떠 있었다.
투표는 생방송 동안 국내는 문자, 해외는 앱을 통해 진행되는 중이었다.
오늘 우승팀이 받을 상품은 뮤닷에서 제작비부터 촬영, 편성까지 책임져주는 리얼리티 예능. 자금난에 시달리는 중소 기획사 입장에선 대단히 좋은 기회고, 돈이 없어 프로모션을 빵빵하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아이돌을 안타깝게 여기던 팬들에게도 아주 간절한 상품이었다.
그러나 하울링의 진정처럼 어차피 우승은 어스래빗이나 원제로의 몫이라고, 다른 네 팀의 팬들은 리디스 출연에만 만족하자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오늘 내가 봤을 땐···.’
한율은 얼굴 근육을 우스꽝스럽게 쓰며 입을 푸는 풀썸의 효운을 바라보았다.
‘풀썸 노래가 굉장히 좋았는데.’
풀썸의 무대를 보는 동안 어스래빗 멤버들, 다른 출연자들 얼굴에도 비슷한 감상이 그려졌었다. 하지만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에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인지도.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뉼, 가자.”
라이언이 한율의 어깨를 두드리듯 감쌌다. 그의 얼굴엔 어려운 무대를 끝냈다는 후련함으로 가득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20여 분 후, 포털사이트 연예 뉴스란 메인.
[ 최종 승자는 ‘어스래빗’ ···“안달·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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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승 어스래빗, 10월 정규 1집으로 컴백]
[글로벌 팬들의 압도적 선택 ‘어스래빗’ 명실상부 대세돌 등극]
[어스래빗, 무대와 180도 다른 해맑은 분위기로 라이브 방송]
[어스래빗의 미친 컨셉 소화 능력]
“서한율 비주얼 진짜 대박이다.”
“얘 우리 학교 다니기는 하냐? 1학기 초반에만 잠깐 보이고 말았던 것 같은데.”
“남자 아이돌은 대학을 입대 연기 사유로 쓰잖아. 비싼 등록금만 내고 안 나오는 거지.”
“그나저나 남돌 기사는 왜 보냐?”
대학 구내식당. ‘어스래빗’을 검색해 기사를 보던 고재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남돌 기사가 아니라 친구 기사 보는 건데?”
“친구?”
함께 밥을 먹던 동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연락은 하냐?”
“뭐래. 어제도 축하한다고 톡 주고받았거든? 보여줘?”
“어, 보여줘 봐.”
고재영은 당당히 서한율과의 톡방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기가 아예 폰을 가져가서 살피려 하자,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어허. 이 위로는 유출되면 곤란한 이야기가 있어서 안 되고.”
예를 들면, 배우 이강대 이야기.
“수상한데. 너 얘랑 따로 술 마신 적은 있냐?”
“인기 많고 바쁜 아이돌 불러내서 술을 마셔? 미쳤냐?”
“뭘. 아이돌들 바빠도 할 거 다 하면서 살잖아. 그 누구냐? 이번에··· 갑자기 혼전임신 폭탄 발표하고 초스피드로 결혼한 사람.”
“그건 하룻밤 실수로 벌어진 일 수습에 가깝지 않냐? 아니, 하룻밤이 뭐야? 20분 정도만 주어져도···.”
“밥 먹는 중에 뭔 소릴 지껄이는 거야, 이 미친놈이.”
“아무리 상대가 연예인이라도 함부로 말 지껄이는 거 아니다.”
고재영 또한 경솔하게 말을 뱉는 동기를 질색하며 바라보다가, 의자를 슥 옆으로 옮기며 거리 두었다. 나 이놈이랑 안 친해요, 라고 주변에 어필하기 위해.
우웅. 그때 손에 든 핸드폰이 울렸다.
[서한율]
웬일로 먼저 전화를?! 고재영은 잠시 놀랐으나, 이내 그 티를 감추며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조용히 해, 서한율 전화 왔다.”
“헐?”
“진짜냐?”
“쉿.”
동기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고재영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서한율! 어쩐 일이야?”
고재영과 통화를 마친 한율은 유 팀장에게 말했다.
“바로 준비하겠대요.”
“역시 소속사에 현역 배우가 있으니까 이런 점이 좋네. 그 친구 연락처 여기에다 적어줘.”
“현우 형은요?”
한율은 포스트잇에다 고재영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적으며 물었다. 매니지 A팀이 배우 박현우와 유제희를 담당하는 까닭이었다.
“다른 사람 소개할 바에야 본인이 하겠다고 해서, 됐다고 했어. 그렇다고 프로덕션에만 맡기는 것도 조금 불안하고.”
“우리 회사 연습생들은요?”
고재영에게 연락한 건 다름이 아닌, 11월에 컴백하는 드림래빗 M/V 때문이었다. M/V에 출연할 10대 후반 내지 20대 초반 남자배우를 오디션으로 뽑고자 하는데, 그냥 공고를 내면 너무 많은 지원자가 몰리는 까닭에 이렇게 인맥이나 소개를 통해 지원자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이번 M/V 컨셉 때문에 안 돼.”
“네.”
스킨십이 있거나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곡인 모양.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포스트잇을 내밀었다.
“여기요.”
“고마워. 그럼 연습 수고해.”
“네, 팀장님도 수고하세요.”
2층 사무실을 나온 한율은 곧장 지하의 연습실로 향했다. 바로 어제 뮤닷 에서 우승하는 큰 성과를 거뒀지만, 컴백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아 오늘도 내내 연습이었다. 어차피 다음 주면 추석이니, 그때 하루 푹 쉬자며 멤버들끼리도 이야기 나눴다.
“서한율.”
“네.”
연습실로 들어가자 차남석이 대충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내일 은강이랑 안세현이 은훤이 형 불러서 저녁 같이 먹자는데, 너도 갈 거지?”
“해원이 형은 안 부른대요?”
예전에 이해원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안 될 것 같지만, 일단 물어보았다.
“은훤이 형이 물어봤는데, 힘들대.”
“네. 메뉴는요?”
“그건 내일까지 느긋하게 정하는 걸로.”
옆에서 대화를 듣던 유호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고칼로리 음식이나 술은 안 돼. 우리 오늘도 회식인데, 뮤비 촬영 9일밖에 안 남았잖아.”
“네.”
그날 저녁. 어스래빗 멤버들은 싱글벙글 푸근한 미소를 짓는 좌기훈 대표로부터 법카를 받고 한우 전문식당으로 향했다. 우승 축하 및 수고의 의미로 열린 회식엔, 방송 내내 어스래빗의 서포트를 맡은 매니지 B팀과 A&R팀, 스타일리스트팀, 안무가 등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팀장님, 우리 리얼리티 예능은 언제 찍어요?”
“아직 일정 조율 중이지만, 내년 초 즈음으로 예상됩니다.”
“겨울 여행 가는 거 찍었으면 좋겠다. 대기업 자금으로 떠나는 여행.”
“크으! 그럼 나 스키 타고 싶어. 전에 스위스 갔을 때 처음 타봤는데, 진짜 재밌더라.”
“해외여행은 힘들겠지?”
“어허. 너무 욕심부리면 안 돼.”
제각기 희망 사항을 떠드는 멤버들. 가만히 듣던 오 팀장이 적당히 익은 소고기를 멤버들 접시에 담아주었다.
“일정이 잡히면 그때 구체적으로 뭘 하고 싶은지 정리합시다. 혹시 출연하고 싶은 프로그램은 없습니까? 스케줄 잡아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강보배가 눈을 반짝이며 손을 들었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오 팀장이 선수 쳤다.
“그 건에 관해선 아직 얘기 진행 중입니다.”
“넵!”
박가람이 쌈에다 소고기를 잔뜩 쌓으며 물었다.
“전에 말한 괴담 예능?”
“응.”
“으.”
고개를 흔들며 질색하는 유호. 그 옆에서 차남석이 살며시 손을 들었다.
“저 집 보러 다니는 예능이요.”
“남석 씨 요즘 집에 관심 많더라? 전에는 부동산 앱 들여다보더니.”
“남석이 너 독립하게?”
‘독립’이란 말에 다른 테이블에 앉은 스태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차남석을 향했다. 차남석은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에 당황해하면서 대답했다.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하게 될 거잖아. 집에 대한 정보는 미리 차근차근, 다양하게 습득해두는 게 좋다고 해서.”
“알아봐도, 방범이 잘 된 튼튼한 고급 빌라나 단독이 좋을 것 같아요.”
조용히 고기를 먹던 한율은 넌지시 말했다.
“고층 아파트는 재난 상황이 벌어지거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기라도 하면 난감해지잖아요. 이웃이 많으니 이런저런 민원 들어오는 것도 많아 신경도 쓰이고.”
“···라고 아파트 소유주가 말하니까 이상하다.”
“그래서 조만간 새집 알아보려고요.”
“방범이 잘 된 튼튼한 빌라나 단독으로?”
“네.”
“잉? 그럼 우리는?”
멤버들이 한율을 주목했다.
한율은 뭘 묻냐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같이 가야죠. 독립할 분은 편히 독립하시고.”
흐. 길우성이 웃었다.
“난 계속 써한 따라다녀야징. 서울 집값 너무 비싸.”
다 망했으면 좋겠다
9월 9일 밤.
우웅. 안무 연습을 끝내고 혼자 보컬 연습실에서 노래 연습을 하던 한율은 핸드폰을 들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차남석이 톡을 보냈다.
-[어제 은훤 형네 집에서 찍은 사진, SNS에 올려도 되냐?]
-[이거]
-[(사진)]
-[팀장님한테 허락은 받음.]
웬일로 개인 SNS에 사적인 모임 사진을 올리려는 걸까.
한율은 조금 의아했지만,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사진이기에 그러라고 답장을 보냈다.
[네.]
-[ㅇㅇ]
곧 차남석의 개인 SNS에 사진이 올라왔다.
[어제 저녁ㅎ #보컬3인연 #있을거다있는고은훤씨집 #기름쏙뺀오븐구이치킨]
-성인 남성 5명이 모였는데 음료가 전부 사이다나 환타야
-은훤 님 진짜 반갑다
-안구 정화♡
-율톢이 튀긴 치킨을 안 먹어서 형아들이 오븐구이 시켜줬나보다ㅎㅎ
-내 최애차애가 전부 모였어ㅜㅜ
-해원인 어디 갔엉?
-보컬3 우정 영원히!!!!!!
-보기 좋다
차남석은 퇴근 차량에 탑승했을 때 SNS에 사진을 올린 이유를 말해주었다.
“은강이 그러더라. SNS에 같이 찍은 사진을 올리면 은훤이 형한테 조금이나마 도움 되지 않겠냐고. 물론 형 자존심 상할 수 있으니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사람’을 멱살 잡고 캐리하는 것도 아니고, SNS에 사진 올리는 것 정도야 괜찮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은훤이 형한텐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말 없는 일방적인 배려가 나중에 오해를 부르는 일도 있잖아요.”
그런가? 한율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 형이 아주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고···. 형한테 사과해야겠다.”
“동생 말 잘 듣는 착한 남석 씨.”
“닥쳐.”
“막내 시무룩···.”
“막내 좀 예뻐해 줘라, 남석아.”
“미안.”
“사과는 진심을 담아 베스트 아이스크림 스트로베리 맛으로.”
“닥쳐.”
“시무룩···.”
“그나저나 남석이 너 내일 <너의 집> 제작진이랑 미팅 있잖아. 예습은 많이 했어?”
차남석이 씩 웃었다.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보고 있어요.”
지난 회식. 멤버들에게 나가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냐고 물었던 오 팀장은 정말로 차남석이 희망하던 <너의 집> 제작진과 미팅 약속을 잡아 왔다. 강보배가 나가고 싶어 하던 MBS <괴담> 제작진과의 미팅 약속도.
참고로 뮤닷 음악토크 예능 <뮤직카페> 측에서도 어스래빗 멤버들을 출연시키고 싶다는 연락이 와, 오늘 낮에 라이언과 이건우가 미팅을 다녀왔다.
운전하던 조유찬이 룸미러를 통해 멤버들을 보았다.
“그래도 피부랑 눈 나빠질 수 있으니까 수면 시간은 지켜. 남석이뿐만이 아니라, 너희 모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