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5/427)

* * *

“명절인데···. 명절인데···.”

9월 13일. 멤버들이 하루 푹 쉬기로 한 추석.

멀쩡한 소파를 놔두고 바닥에 드러누운 박가람이 중얼거렸다. 얼마 남지 않은 M/V 촬영을 위해 식단 조절에 들어가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우리 가족 모두 맛있는 전과 떡, 과일을 먹고 있겠지···?”

멤버들은 혼잣말하는 박가람을 그냥 두었다. 강보배가 외출 채비를 하고 나오는 유호에게 물었다.

“어디 가? 집?”

“회사 작업실 갔다가, 집에서 저녁 먹고 올게.”

“응.”

본래 금요일은 유호가 고정으로 출연하는 <뮤직센터>가 있는 날이었지만, 이런저런 추석 특집 예능 편성으로 이번 주는 휴방이었다.

박가람이 유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맛있는 건 싸 오지 마, 리더···.”

“싸 오라고 해도 안 싸 올 거야. 걱정하지 마.”

“흐윽.”

“써한 넌 달냥이 데리고 어디 가? 병원?”

한율은 달냥을 넣은 이동장을 현관 앞에 놓았다.

“집에.”

어제 고향으로 내려간 부모를 대신해, 잠깐 집에 들러서 고양이들 밥과 화장실 청소를 하기로 했다.

길우성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들 밥 챙겨주러? 그럼 나도!”

“따로 또 갈 곳 있어서 안 돼.”

“아니, 누가 계속 너 따라다닌대? 너희 집 고양이들이랑 놀아주러 간다고.”

“집주인이 없는 집에서?”

“안 될 건 없잖아?”

뻔뻔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 한율은 미간을 찡그린 채 길우성을 바라보다가 한숨 쉬었다.

“5분 내로 준비해.”

“으히힛.”

“나도 똑순이네 보고 싶은데···.”

“형도 5분 드릴게요.”

열심히 실내 자전거를 타던 강보배가 활짝 웃으며 뛰어내렸다.

“간식은 뭐 사갈까?”

분주히 움직이는 멤버들 가운데, 박가람이 뒹굴 바닥을 굴렀다.

“나도 놀러 갈래···.”

잠시 후. 한율은 본가의 고양이들을 길우성, 강보배, 박가람에게 맡겨놓고 다시 차에 탔다. 달냥을 넣은 이동장을 챙기고.

“힘들면 불러.”

체내에 마력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젠 웬만한 고양이보단 튼튼하지만, 그래도 장거리 이동엔 스트레스를 받을 터다. 멀미를 할 수도 있고.

이동장을 안전벨트로 고정하며 말하자, 달냥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대답했다. 므앙.

달냥을 데리고 도착한 목적지는 경기도의 별장.

한율은 달냥의 목걸이에 걸어둔 보호 마법에 이상 없는지 확인하곤 이동장 문을 열었다.

···킁킁. 낯선 장소로 온 달냥은 살며시 낮은 포복 자세를 취한 채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녔다. 한율은 준비한 그릇에다 깨끗한 물과 사료를 채워 거실에 두었다.

“여기가 우리 두 번째 보금자리야. 잘 기억해.”

오늘은 다른 사람 없이 달냥만 데리고 왔기에, 드레스룸에 마련한 비밀 공간 문을 활짝 열었다. 환기 시스템이 작동되곤 있으나, 오랫동안 문을 닫았던 탓에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새집 특유의 냄새가 풍겼다. 청소와 관리를 맡은 업체도 이 공간의 존재를 모르고.

위잉. 슥삭슥삭. 로봇청소기를 가져와 작동시키곤 걸레질을 하며 청소 시작. 비밀의 방으로 내려오는 계단 통로에 달냥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므아앙!

청소를 마친 뒤엔 달냥이 이런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지, 지형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기억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산책을 나섰다.

읅웱오옭···.

바로 옆에 듬직한 보호자가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본능인지.

달냥은 도중에 마주친 뱀을 보곤 무서워하기는커녕 엉덩이를 실룩거리다 튀어 나갔다.

파파팟! 뱀을 세게 후려쳐 바닥에 패대기친 뒤, 두 앞발을 번갈아 가며 신나게 때린다. 펀치가 어찌나 빠르고 센지, 뱀은 반격할 틈도 찾지 못한 채 정신없이 맞는 모양새였다.

“···달냥, 그만.”

멈칫. 달냥이 동작을 멈췄다.

므아앙···.

달냥에게 이런저런 훈련을 시키고 서울로 돌아온 건 해가 저물 때 즈음이었다. 도심 도로는 추석 차례를 지내고 귀경하는 차량으로 빽빽했다.

한율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으며 신호만 멀뚱멀뚱 지켜보았다.

[오늘 새벽 SNS에 퍼지며 큰 파장을 일으켰던 클럽 폭행 영상 속 가해자가, 정원그룹 회장의 차남인 정이장 씨로 밝혀졌습니다. 폭행당한 피해자는 그의 지인으로···.]

‘정이장?’

한율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뉴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아.’

안인섭에게서 빼돌린 파일 속 인물. 자신의 아이를 가진 배우를 해외로 보내버렸다던 이야기의 주인공.

직접 찍힌 영상은 두 개로, 하나는 웨이터로 추정되는 젊은 남성을 폭행하고 사람들 앞에서 조롱하는 영상. 다른 하나는 함께 잠자리를 가졌던 여성 연예인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영상이었다. 상대는 배우와 모델, 아이돌, VJ 등 아주 다양했다.

[경찰서에 출두한 정이장 씨는 취재진을 향해 술에 취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또 진심으로 반성한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쓰레기는 언제고 어디서든 티가 난다더니.

한율은 불쾌한 뉴스 대신 음악을 듣기 위해 오디오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이어지는 앵커의 말에 잠시 멈췄다.

[한편, 폭행 현장에 함께 있었다고 알려진 인기 남자 아이돌그룹 멤버 A씨는 정이장 씨와는 그날 처음 우연히 마주친 사이에 불과하다며 일행임을 부인···.]

“써한, 실검 봤어?”

숙소로 들어가자 거실에서 해괴한 요가 동작을 취하던 길우성이 소리 높여 물었다. 한율은 이동장을 바닥에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달냥이 쭈욱 기지개를 켜며 느긋하게 이동장을 나왔다.

“정이장 사건?”

“아니, 아스대. 방송 안 봤냐?”

“아. 달냥이 목욕시키느라.”

“대체 어디를 갔었기에 집이 아닌 곳에서 달냥이를 씻겨? 달냥이 스트레스받게.”

“별장.”

“아.”

“너랑 형들은 우리 집에서 몇 시에 나왔어?”

길우성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희 어무니, 아부지한테 인사드리고 저녁까지 얻어먹고 왔는데?”

“······.”

뭐지, 이 자식들?

다소 황당한 시선으로 길우성을 바라보는데, 강보배가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은 30분 정도만 더 놀아주고 나오려고 했는데, 어머님이 펫캠으로 우릴 보셨나 봐. 나한테 전화하시더니, 바쁘지 않으면 조금 더 느긋하게 있어도 된다고, 저녁까지 먹고 가라고 하셔서···. 하하.”

“그리고 너한테 그거 전해달라고 하심.”

길우성이 소파 옆에 놓인 종이가방 여러 개를 가리켰다. 안에는 새 옷과 신발, 액세서리 상자가 잔뜩 담겨 있었다.

소파에 반대로 드러누운 박가람이 팔걸이를 탁탁 두드리며 보챘다.

“어서 꺼내 보시게. 이 형님이 잘 어울리는지, 스타일을 한번 봐주도록 할 터이니.”

“씻고 올게요.”

“엉.”

씻고 나서 포털사이트에 접속했을 때 실검엔 아스대나 한율의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연예 뉴스란 메인엔 기사가 떠 있었다.

[<아스대> 신궁에서 현장 코치가 된 어스래빗 서한율]

[매년 명절마다 MBS <아이돌 스포츠대회> 양궁 종목에서 뛰어난 실력을 선보이며 ‘신궁’이란 별명을 얻은 보이그룹 어스래빗 서한율이 오늘 방송된 추석특집 아스대에선 선수가 아닌 현장 리포터 겸 코치로 대활약했다.

(사진=MBS <2019 아이돌 스포츠대회>)

오늘 방송에서 서한율은 정태현에게 과녁 렌즈를 박살 내는 선수가 나오면 출연한 아이돌 전원에게 피자를 사겠다고 내기를 제안···(중략).]

-서한율 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우리 애들이 오래간만에 비싼 피자를 맛있게 먹었어요ㅜㅜ

-율톢 학원쌤 컨셉 너무 좋아

-서한율 진짜 엑스텐 렌즈 박살 나오니까 0.5초 어리둥절ㅋㅋㅋㅋㅋ

ㄴ대박 귀여웠음ㅋㅋㅋㅋ

ㄴ???: 아니 나는 이번에도 정태현 지갑 털려고 도발한 건데..?

ㄴ그래도 결국 정태현이 어떻게 애 혼자 돈 쓰게 두냐고 절반 부담한 거 보고 흐뭇

ㄴ정태현 씨 한율이 만날 때마다 은근 잘 챙겨주더라구용ㅎㅎ

ㄴ원래 인기 많은 아이돌에겐 친절한 분임

-이런 쌤이 입시학원에 있으면 난 4수라도 할 듯

ㄴ대학 합격하고서도 계속 다니지

-haunting 뮤비 보다가 아스대 흑발 쌤 모드 보니까 동일 인물 맞나 싶고.. 물론 난 둘 다 애정함♡

이번엔 실검 1위 [정이장 아이돌]을 눌렀다. 정이장이 저지른 폭행 사건 자체보다는, 그와 함께 있었던 아이돌이 누군지 궁금한 사람들이 더 많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기사는 온통 아이돌 A의 ‘정이장과는 그날 처음 우연히 마주친 사이’라는 주장만 담고 있을 뿐, 더 깊게 파헤치고자 하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댓글과 달리.

-이거 약쟁이 ㄹㅏㅌ말고 그룹 ㄹㅌ 멤버라던데. 내 친구가 직접 클럽에서 봄.

ㄴPDF 따서 아림으로 전송 완료^^

‘어쩐지 실검 3위가 ‘루트’더라니.’

잠시 정이장 파일 중 하나를 뿌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 유상호 사건 당시, L그룹은 아주 빠른 속도로 유력 유포자인 안인섭을 찾아냈다. 정원그룹 또한 그에 못지않은 정보 수집력을 갖추고 있을 터.

‘당장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귀찮기도 하고.

한율은 핸드폰 전원을 가볍게 눌렀다.

사흘 후인 16일.

어스래빗이 정규 1집 앨범 후속곡 <로컬영화> M/V를 한창 촬영하는 동안, 포털사이트 실검과 뉴스란은 갑작스레 터진 대형 스캔들로 난리 났다.

[[단독]정원그룹 회장 차남 정이장 영상 파문··· 연예계 비상]

[정원그룹 회장의 차남인 정이장의 영상이 각종 SNS와 너튜브를 통해 퍼지며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유흥업소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찍힌 영상 속 정이장은 배우와 모델, VJ, 아이돌로 추정되는 이들을 거론하며···(중략).]

-영상 보니까 이름 나오는 부분만 다 잘라냈던데 웬 비상?

ㄴ기자들 입장에서 대충 누구누군지 짐작 가니까 제목에다 ‘비상’이라고 쓴 거 아닐까

ㄴㅇㅇ 정이장 정도면 좋은 자리에 백 번은 더 꽂아줬을 테니, 다들 알만한 사람들이다에 한 표

-와 정이장한테 스폰 받았던 애들 죄다 벌벌 떨고 있을 듯

-더러운 스폰으로 남의 자리 차지한 애들은 다 망했으면 좋겠다.

제보자는 까마귀

시간을 거슬러 이틀 전 14일.

-서한율 없는 서한율 본가에서 서한율 부모님이랑 저녁까지 먹고 온 거 실화냐고 그것도 추석에ㅋㅋㅋㅋㅋ

-명절마다 한복 입어줘서 정말 고마워ㅜㅜ

-나도 사랑해♡

추석 맞이 라이브 방송을 즐겁게 마쳤을 때였다. 2층 회의실로 들어온 오 팀장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김 쌤이··· 그··· 대기업 회장 아들 폭행 사건의 피해자라고요?!”

멤버들은 너무 놀라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김 쌤’은 어스래빗 데뷔 앨범 재킷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그들의 사진을 전담, 이프림도 ‘역시 김 쌤’이라며 만족하는 아이돌 화보 전문 포토그래퍼였다.

“네. 그래서 21일로 잡힌 앨범 재킷 촬영 일정을 재조정하거나 다른 포토그래퍼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친 것도 그렇지만, 언론과 대중의 쏟아지는 주목에 많은 심적 부담을 느끼고 계신 것 같아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뉴스에선 폭행 피해자가 정이장의 지인이라고 나오던데···. 어쩌다 그런 쓰레기랑 엮이신 거지?”

“그 지인이란 말은, 정이장 측에서 조금이라도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흘린 거짓입니다.”

오 팀장이 사과패드를 내밀었다.

“곧 포털사이트에 올라갈 기사입니다.”

멤버들의 머리가 사과패드 위로 모였다. 유호가 소리 내어 기사를 읽었다.

“아이돌 화보 전문 포토그래퍼인 A씨는, 지인의 부름으로 클럽을 찾았다가 이날 처음 정이장을 만났으며, 여자 아이돌을 부르면 한 사람당 천만 원을 주겠다는 정이장의 말을 거절하고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폭행이 시작되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와, 이 개ㅆ···!”

순간 열이 확 올라왔는지, 평소 욕을 쓰지 않던 이건우가 몸을 돌리더니 허공에다 대고 욕설을 쏟아냈다. 다른 멤버들의 입에서도 욕이 흘러나왔다. 라이언은 뒷골목에서 총 맞고 뒈지라는 식의 저주를 영어로 뱉어냈다.

“여자 아이돌을 불러? 천만 원? 씨발, 우리 직업을 얼마나 뭐로 보고 있었으면 이딴 소리를 지껄여, 이 개만도 못한 쓰레기가.”

“······.”

전혀 예상치 못한 폭행 피해자의 정체. 한율은 미간을 구기며 회의실에 걸린 달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앨범의 기본인 재킷 촬영이 늦어지면 컴백까지 촘촘히 짜인 다른 일정까지 어그러진다. 다른 포토그래퍼를 급히 데려와 촬영을 진행한다 해도, 김 쌤처럼 좋은 퀼리티를 뽑아낼지 장담할 수 없다.

데뷔 2년 만에 내는 정규 1집 앨범인데 말이다.

“혹시.”

한율은 오 팀장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 자리로 김 쌤을 불렀다던 지인이 ‘루트’ 멤버예요?”

그리고 현재, 16일.

<로컬영화> M/V 1일 차 촬영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한율은 실검과 연예 뉴스란, 사회 뉴스란까지 장악한 정이장 관련 기사를 훑었다.

[정이장, 연예인 접대부 취급도 모자라 폭행·갑질도 일상]

[정이장 실체 폭로 영상 2건, 전문가들 ‘조작 가능성 제로’]

[정원그룹, ‘정이장은 오너의 가족일 뿐 회사와 무관’ 선 긋기]

[재계와 연예계의 은밀한 관계··· 과연 정이장 뿐일까?]

[아림 엔터, 정이장 사건 관련 허위사실 유포 및 악플 강경 대응 예고]

아무리 정이장이 회사와 무관하다고 선을 긋고 소리쳐도, 이번 이슈로 기업 이미지가 훼손되어 증발하거나 그럴 예정인 금액이 엄청날 터.

정원그룹은 눈에 불을 켜고 영상을 찍고 유포한 사람을 찾아 나설 것이다. 정이장 본인이 영상 속 말을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있을 때 지껄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어떡해서든. 영상을 몰래 찍은 자가 그보다 더한 것을 갖고 있진 않을까, 불안하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찍은 자는 몰라도 제보자는 찾기 힘들 것이다.

한율은 다른 기사를 클릭했다.

[정이장 실체 폭로 영상, 제보자는 까마귀?!]

[정이장 영상 2건을 최초로 단독 보도한 언론 매체에서 제보자가 까마귀라고 밝혀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까마귀에게 제보받았다고 주장하는 기자는 ‘새벽에 옥상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이쪽으로 날아오더라. 무서워서 잠시 몸을 웅크렸는데 옥상 난간에 앉은 까마귀가 한쪽 발을 흔드는 게 아닌가. 거기에 영상이 담긴 작은 USB가 묶여있었다.’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중략).]

-?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네?? 까마귀요???? 네???????

-지금 21세기 맞음?

-중세 때나 쓰던 제보 방법이네ㅋㅋㅋㅋㅋㅋㅋㅋ

-까마귀는 무슨. 이걸 믿냐 ㅂㅅ들아?

-훈련받은 까마귀는 6~7세 아이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으며 야생 까마귀도 도구를 사용할 정도로 똑똑하다고 합니다. 주인에게 훈련받은 애완 까마귀일 가능성이 크겠네요.

-범인은 사육사.........

한편 그 시각, MOHE 숙소.

거실에서 TV 뉴스를 보던 안인섭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 새끼가 또.’

파일 도둑이 이번엔 대기업 회장 차남을 건드렸다.

‘씨발, 아무리 정이장 뇌가 알코올에 찌들어 썩었어도, 두 영상이 찍힌 날짜에 늘 내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낼 텐데.’

설령 그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당시 그 자리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정원그룹 측에 오해받지 않으려, 혹은 잘 보이기 위해 ‘거기엔 누구도 있었다’라고 적극적으로 알릴 가능성이 크다.

‘어떡하지? 차라리 내가 먼저 선수 칠까? 아니, 씨발, 늘 내가 있었는데 믿겠냐고!’

두려움이 엄습했다. 지난번 유상호 일로 L그룹과 얽혔을 땐 외부로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았던 터라 추궁과 협박으로 그쳤다. 하지만 이번 이슈는 해외에서도 보도되며 정원그룹 회장이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중.

‘어떡하지? 날 건드리면 더한 게 터질 거라고 허세라도 부려? 아니면 끝까지 시치미를 떼? 정이장 영상은 ‘그 남자’에게도 전송했었으니··· 그쪽에다 덮어씌워? 아니, 팽 당한 보복으로 그쪽에다 뒤집어씌운다고 생각하면?’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그럴싸한 길을 찾기는커녕 더 어지러워질 뿐이었다.

‘그냥 한국을 뜰까? 어디로 가지?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그렇지!’

그 순간, 예전에 주인결 폭로 영상이 떴을 때 파성줌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단, 그 동네에다 몰카 설치하고 다니는 놈이 있단 찌라시 뿌려놨어. 혹시 몰라 대역도 준비해뒀고』

안인섭은 다른 멤버의 방문을 두드렸다.

쾅쾅.

“야, 폰 좀 쓰자!”

* * *

21일. 어스래빗의 정규 1집 앨범 재킷 촬영 현장. 어스래빗 멤버들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와서 촬영 준비를 하는 김 쌤에게 다가갔다.

“김 쌤!”

“고생 많으셨어요, 쌤!”

“다친 데는 괜찮으세요?”

포토그래퍼 김 쌤이 덥수룩하게 난 수염을 긁으며 웃었다.

“그럼, 며칠이나 지났는데. 어쨌든 걱정 끼쳐서 다들 미안하다. 날 믿고, SNS로 응원해준 것도 고맙고.”

“헤헷.”

처음 클럽 폭행 사건이 터졌을 때, 초반엔 피해자인 김 쌤 역시 곤욕을 치렀었다. 정이장 측에서 먼저 흘린 ‘피해자는 정이장과 지인 사이다’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어차피 끼리끼리 어울리다 처맞은 거였을 테니 그닥 불쌍하진 않음ㅋ

김 쌤이 언론을 통해 자신의 직업과 폭행당한 경위, 정이장과는 그날 처음 만나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 밝혔음에도 표면 반응은 나아지지 않았다.

-처음 만나기는 해도 상대가 누군지는 알고 나갔겠지

-오히려 정이장한테 여돌 소개해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가 ㅈㄴ 처맞은 거라던데?

ㄴ결국 거액 합의금 꿀꺽. 목표 달성^^

-나 아는 애가 저 작가랑 작업했었는데 여돌한테 은근히 치근덕거려서 소문 안 좋다고 함ㅇㅇ

피해자도 나쁜 놈이다, 맞을 만해서 맞았을 거다, 라는 댓글과 그에 찍힌 공감수. 정원그룹 측의 여론 조작 작업일 가능성이 컸으나, 귀가 얇은 이들은 그대로 속아 넘어가 김 쌤을 의심했다.

하지만 16일, 정이장의 영상 2건이 터지며 김 쌤을 향했던 의심의 눈초리가 걷혔다.

-‘여자 아이돌을 부르면 한 사람당 천만 원을 주겠다는 정이장의 말을 거절하고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폭행이 시작되었다’<13일 폭행당했던 포토그래퍼의 말

ㄴ이번에 터진 기사 영상 보니까 정이장 진짜 여자 연예인에 환장한 놈이던데ㅋㅋㅋ 스폰한 애들이 대체 몇 명이기에 자랑질만 5분이 넘냐?

ㄴ그 술집 웨이터 두들겨 패는 영상도 진짜 살벌하더라

-피해자가 먼저 돈 노리고 여돌 소개 제안했다가 처맞은 거라고 떠들던 ㅆ무새들아 다 어디 갔니^^

ㄴㅈㅇ그룹 알바생들 이번엔 조작 영상이라고 댓글 쓰러 가서 바쁘다고 합니다.

-어쩐지... 같이 작업했던 아이돌들이 직접 SNS에다 ‘김 쌤 그런 분 아니에요.’라고 적은 거 보고 뭔가 이상하다 했다.

그래도 여전히 부정적인 이야기만 믿고, 혹은 그러기를 바라며 떠드는 사람들이 있겠으나, 김 쌤은 정이장을 상대로 낸 고소를 취하하지 않고 업무로 복귀했다.

“그럼!”

김 쌤이 굵직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오늘도 힘내서 촬영해봅시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앨범 재킷 및 굿즈에 들어갈 화보 촬영은 이틀 동안 진행되었다. 그 뒤 하루를 건너뛰고 타이틀곡 M/V를 이틀 연속 촬영. 다음 날인 26일엔 MBS K <주말 아이돌> 녹화를 진행했다.

어스래빗이 이렇게 컴백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정이장 사건은 서서히 기세가 잦아들다가 어느 순간 뉴스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연예계에는 아직 후폭풍이 남아있었다.

“나 오늘 이상한 소리 들었다.”

“무슨 소리요?”

29일 밤. SBC 예능 <너의 집> 스튜디오 녹화를 마치고 돌아온 차남석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것도 한율의 방으로 찾아와서.

“원래 오늘 녹화에 나 말고 다른 게스트가 한 명 더 있었거든? 그런데 제작진이 갑자기 야외 촬영까지 마친 그 배우를 컷하고, 급하게 다른 사람 섭외해서 새로 찍었는데··· 그 이유가 정이장한테 스폰받았던 배우라서 그런 거라더라. 고정 출연자 매니저들이 수군거리는 거 들었어.”

“그 배우가 누군데요?”

“강선형.”

정이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이름 중 하나.

한율은 시치미를 뚝 떼고 ‘그렇구나’란 표정을 지었다.

까마귀를 통해 제보한 영상에선 이름이 나오는 부분을 모두 잘라냈지만, 정이장과 지저분한 스폰 관계를 맺었던 이들은 언제고 원본이 퍼질까 두려워하고 있을 터다.

방송국 관계자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정이장 스폰 소문이 달린 연예인의 출연을 꺼리는 거고.

“그런데 말이야.”

다른 용건이라도 있는 건지, 차남석이 책상 앞 의자를 돌려 앉았다.

“내가···.”

그가 닫은 문을 한번 보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예전부터 서한율 너한테 할까 말까 고민했던 말이 있었거든? 그런데 선을 넘는 참견 같기도 하고, 네가 그렇게 바보도 아니니까 말하려다 말았었는데···.”

무슨 이야기이길래 이렇게 머뭇거리는 걸까.

“뭔데요?”

폴짝. 달냥이 차남석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차남석은 달냥을 쓰다듬으며 다시 머뭇거리다가 한율을 바라보았다.

“너 이해원하고 개인적으로 자주 연락하냐?”

한율은 그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바로 파악했다.

“해원이 형이랑 놀지 말라고요?”

“···어.”

대답한 차남석은 목 뒤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선을 넘는 참견이 아닌가,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김 쌤 사건 초반에, 김 쌤이 정이장이랑 지인이란 잘못된 정보가 흘러나오면서 ‘끼리끼리’라는 말로 오히려 공격받았었잖아. 그런데 오늘 강선형이 스폰 소문 때문에 잘린 것 같다란 얘기 들으니까 또 걱정되더라.”

그렁그렁.

그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달냥이 눈을 감으며 골골거렸다.

“분명 MOHE에 관한 소문도 알게 모르게 퍼져 있을 텐데, 나중에 다 까발려지면 평소 친해 보였단 이유 하나만으로 너한테도 불똥이 튀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들법한 걱정이고 생각이었으므로.

차남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소한 거 하나만 가지고도 온갖 추측이랑 망상으로 우릴 공격하는 놈들이 좀 많아야지.”

혼내려는 건 아닐 거야

컴백까지 나흘.

유호와 길우성, 한율은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유호와 길우성은 현장전의 차에, 한율은 조유찬의 차에 올라탔다. 두 차는 함께 움직이다가 도중에 갈라졌다.

“우성이, 다른 잔뼈 굵은 선배들이랑 스튜디오 예능 찍는 건 처음인데. 괜찮을까 모르겠다.”

오늘 유호와 길우성이 간 곳은 tv Mu <뮤직마켓>. 작년에 한율이 영화 <고양이 난로> 홍보차 출연했던 토요일 인기 예능이었다.

“호 형이 잘 챙기겠죠. 그리고 낯짝 두껍고 뻔뻔하잖아요. 가끔 허둥대면서 아무 말은 좀 하겠지만.”

조유찬이 하하 웃었다.

“역시 친한 친구라 잘 아네.”

“······.”

한율은 입을 다물곤 가방에서 <서울 구미호> 대본을 꺼냈다.

“안녕하십니까. <서울 구미호>에서 구미호 ‘형호’ 역을 맡은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짝짝짝. <서울 구미호> 대본 리딩회가 열리는 회의실. 사람들이 점잖은 박수로 화답했다.

한율이 자리에 앉자 이번엔 맞은편의 현미나가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형사 ‘민해솔’ 역을 맡은 현미나라고 합니다. 실력이 뛰어난 배우 분들, 제작진 분들과 함께 좋은 드라마를 촬영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시 박수. 그 순간 현미나의 뒤쪽, 다른 단역 배우들과 나란히 간이 의자에 앉은 고은훤과 한율의 시선이 마주쳤다. 조금 전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인사를 나눴었기에 서로 가볍게 입가만 올렸다.

고은훤은 몇 달 전 <서울 구미호> ‘형호’ 오디션 당시 심사위원들에게 나쁘지 않은 평을 받았다. 그러나 주연을 맡기엔 인지도와 연기가 평범하고, 그대로 돌려보내자니 아쉽다며 단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이제설의 ‘슬호’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구미호 ‘진호’로.

“인간이 시장에서 소고기 몇 점 사며 일일이 감사를 표하는 걸 봤나? 출신 나라 따지고, 육질 따지고, 가격 따지고, 이런 잔인한 것들. 적어도 우리는 인간처럼 도축하지 않고 정기만 쏙, 응? 아프지 않게 살짝 취하고 나름대로 보답도 하지 않나.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여우 마음 상하려 그러네.”

1화 대본 리딩 중. 한율은 고은훤이 연기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단역이라 비중은 크지 않지만, 저 대사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 그가 노력한 시간이 엿보였다.

지난번 함께 저녁을 먹으며 잘 준비하고 있냐 물었을 땐 ‘대사량이 많아서 힘들어’라고 엄살을 부리더니.

슥슥.

“······?”

옆에 앉은 이제설이 대본 [진호] 이름에다 끼적거렸다.

[발음O, 발성△, 호흡O, 몰입△←배짱?]

동등한 관계이자 편한 친구인 슬호에게 하는 대사인데, 조금 전 시선이 마주치자 눈빛이 흔들린 게 아쉬운 모양. 그러나 그는 고은훤의 연기 감상만 적을 뿐, 다른 배우들이 대본을 읽을 땐 메모하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은훤 씨, 오늘 시간 있어요?”

대본 리딩은 예상했던 시간 안에 끝났다. 스태프들이 홍보 사진과 영상, 인터뷰 촬영을 준비할 때, 이제설이 고은훤을 찾았다.

“네? 저요···? 그··· 이따가 저녁에 아르바이트가 있기는 한데···.”

“그럼 점심은 같이 먹을 수 있겠네요?”

“네···?”

당황하여 한율을 바라보는 고은훤. 조연과 단역을 전전하며 아직 ‘신인배우’ 타이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라, 이제설이 퍽 어렵게 느껴지는 듯했다.

한율은 괜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혼내려는 건 아닐 테니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요, 형.”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설도 고은훤이 저를 어려워한다는 걸 느끼고 있을 테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우리, 작품 속에서 몇백 년을 알고 지낸 친한 구미호 사이잖아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서로에게 익숙해져야, 나중에 촬영할 때 연기가 자연스럽게 잘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배역에 관해 천천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요.”

“아···.”

“점심은 내가 살게요. 뭐 좋아해요?”

고은훤은 감히 이제설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한율은 여러 번의 사진 촬영, 인터뷰를 마친 뒤 오준기 PD와 인사를 나눴다. 오 PD는 <서울 구미호> 오디션 심사에 참여했던 박명길 PD 대신 영입된 인물이었다. 도중에 PD가 바뀐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 촬영 때 만나요, 한율 씨. 상담할 게 있으면 언제든 편히 연락하고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한율은 <서울 구미호> 작가, 주요 스태프들과 관계자들, 아직 남은 다른 배우들에게도 일일이 인사하곤 갈 채비를 했다.

“진짜 가···?”

덥석. 얌전히 구석에 앉아 이제설의 사진 촬영, 인터뷰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고은훤이 한율의 옷을 잡았다.

오늘 처음 만난, 그것도 까마득한 선배인 이제설과 단둘이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게 퍽 부담스러울 법도 했다. 이런저런 판단으로 거절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연기나 작중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만 할 테니 너무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요, 형.”

“아니, 그래도···.”

고은훤이 힐끗 이제설 쪽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나 1화에만 잠깐 나오는 단역인데?”

한율은 대답 대신 고은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회의실을 나섰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조유찬이 화색을 띤 얼굴로 성큼 다가왔다.

“한율아, 좋은 소식 들어왔다.”

“······?”

좋은 소식은 회사에 도착하고 나서 오 팀장에게 들을 수 있었다.

“원제로와 스타믹스가 10월에 투어 간다는 건 잘 알지? 두 팀에 각각 <뮤직뮤직>, <락뮤닷> MC가 있는 것도.”

“스페셜 MC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오 팀장이 씨익 웃었다.

“그래.”

“우리 팀에 <뮤직센터> 고정 MC가 있는데도요?”

“딱 하루만 하는 스페셜 MC니까 괜찮아. 하지만 두 곳 모두 나가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겠지? 마침 에서 우승했으니 뮤닷 방송을 선택하는 게 자연스럽긴 하지만··· 네 의견부터 들어보는 게 순서 같아서.”

“저한테만 들어온 섭외는 아니죠?”

“<뮤직뮤직>은 한율이 너 아니면 건우. <락뮤닷>은 멤버 중 한 명 아무나.”

“건우 형은 뭐래요?”

“건우는 <뮤직뮤직>은 힘들 것 같다고 하더라.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한율은 이건우가 데뷔 전부터 아이허니의 팬이었단 사실을 떠올렸다. 스타믹스 JE로부터 유린에게 절대 이성적인 관심을 두지 말란 경고를 들은 것도. 어쩌면 그 후 JE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저도 <뮤직뮤직>은 패스요. KBC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팀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에서 우승했으니, <락뮤닷>에 서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아요. 그렇다고 꼭 제가 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그래. 그럼 <락뮤닷> 스페셜 MC 건은 나중에 애들 다 모이면 그때 다시 말할게. 다른 중요한 이야기도.”

다른 중요한 이야기?

한율은 새로운 섭외가 또 있나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날 밤 자정, 어스래빗 연습실. 아침 일찍 <뮤직마켓> 스케줄을 하러 갔던 유호와 길우성이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흐어어···.”

길우성이 힘없이 무릎을 꺾더니 연습실 바닥에 쓰러졌다. 철퍼덕.

“나 오늘 연습 못 해···. 힘없어···.”

“뭐? 컴백이 나흘밖에 안 남았는데 연습을 못 하겠다고? 일어나, 이 짜식!”

박가람이 강제로 길우성을 일으켰다. 길우성은 흐느적거리면서 섰다가 다시 풀썩 쓰러졌다.

“피곤해···.”

강보배가 한율에게 물었다.

“<뮤직마켓> 녹화가 그렇게 오래 걸리고 힘들어?”

“1라운드마다 한 시간은 기본이고, 방송에 나갈 그림, 분량, 리액션도 신경 써야 하니까 조금 피곤하긴 하더라고요. 어떻게 편집돼서 나갈지 모르니까 내내 표정 관리도 해야 하고.”

대답하던 한율은 유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늦었네요? 일찍 출근해서 녹화가 앞 순서인 줄 알았는데.”

<뮤직마켓>은 하루에 2주분을 녹화한다.

“그게···.”

유호가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원래는 앞 순서였는데, 갑자기 19일 방송분을 먼저 녹화해야겠다고 해서 밀렸어.”

“잉? 왜?”

“녹화 당일에 갑자기?”

“그러면 아침부터 내내 대기하고 있었단 소리야? 아니, 남의 시간을 대체 뭐로 아는 거야?”

유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돌아왔다는 생각에 불쾌감을 표하는 멤버들.

차남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질에 제대로 당한 거네요. 너흰 섭외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라이언이 팍 미간을 구겼다.

“왜 그런 짓을 하는데?”

“우리 회사가 힘도 없고 작으니까. 형, 거기 고정 출연자들은 당일에 순서가 바뀌었다고 들은 것 같지 않았죠?”

“어. 그분들은 더 일찍 이야기를 들은 것 같더라. ···아니, 그런데 나 아직 밀린 이유 말 안 했는데?”

“이유가 뭐였는데요?”

“19일 방송 게스트가 오후에 급한 스케줄이 생겨서 어쩔 수 없다고 했어.”

“게스트가 누구였는데요.”

뒹굴. 길우성이 옆으로 누우며 대답했다.

“히아신스.”

“······.”

“······.”

연습실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갑질 당한 거 맞네. <뮤직마켓>, 아림이 제작하는 프로그램이잖아.”

“형, 솔직히 말해. 뒤 순서로 밀린 거 알고 나서 잠깐 회사나 다른 데로 외출할 생각, 할 수 있었어, 없었어?”

“아림 짜증 나.”

“히아신스도 기껏 두어 명 섭외됐을 텐데 무슨 갑자기 스케줄이 생겨. 거기 몇 달 뒤 스케줄까지 꼼꼼히 관리한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역시 대한민국 최고 걸그룹은 온더로즈지. 암.”

“크래라고 해주라.”

삑. 덜컹.

그때 오 팀장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다소 두꺼운 바인더를 품에 안고.

“모두에게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닥을 굴러다니던 길우성이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