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427)

* * *

“나기혁은 왜 갑자기 너희한테 친한 척이야?”

조금 전, 나기혁이 찬형을 데리러 왔다는 핑계로 찾아왔다. 그는 한율과 길우성에게 언제 연락을 줄 건지 은근히 묻곤 퇴장했다.

“두 살 위 선배를 이름으로만 부르는 차남석 씨의 패기.”

“우리한테 약점 잡혔어.”

“무슨 약점?”

“있어, 그런 거.”

차남석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한율도 말해줄 수 없다는 의미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라이언에게 따로 생각이 있는 것 같아서.

몇 시간 후, 서울에서 샵 직원들이 도착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꽃단장을 받으면서, 부산 아뮤페 측에서 나온 카메라에 대고 손을 흔들거나 윙크했다. 아뮤페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짤막하게 나갈 영상이었다.

“2년 전 데뷔하고 나서 매년, 꾸준히 부산 아뮤페에 출석 도장을 찍는 어스래빗입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저녁 6시 30분. <부산 아시아 뮤직 페스티벌> 두 번째 날 공연이 시작되었다. 첫 무대를 연 건 어스래빗의 직속 후배인 드림래빗. 어스래빗 멤버들은 대기실에서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영상을 보았다.

“애들 데뷔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무대에서 여유가 보이네. 표정 연기도 좋고.”

“크으, 고음 탄탄 가창력 보소.”

“한창 컴백 준비로 정신없이 바쁠 텐데, 참 기특하다.”

“누구 닮았겠냐.”

“우리?”

“크래 선배님들 닮은 거겠지. 우리가 해준 게 뭐 있다고.”

“든든한 방파제 역할?”

“그건 회사 아닐까.”

“아니야, 로펌이야.”

밑도 끝도 없는 팔불출 같은 대화와 흐뭇한 미소. 근처에 있던 스태프들이 소리 없이 웃었다.

외국인 가수를 포함, 오늘 공연 라인업에 오른 11팀 중 어스래빗은 6번째 순서였다. 어스래빗은 4번째 순서인 원제로가 TV에 등장했을 때 백스테이지로 이동했다.

백스테이지에는 그들보다 뒤 순서인 핑크팝의 리스가 먼저 와 있었다. 바로 앞 순서인 외국인 가수는 리프트나 다른 곳을 통해 무대에 등장할 예정인지,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혼자 멀뚱히 구석에 서 있던 리스가 멤버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늘 두 번째로 나누는 인사였다.

“네, 안녕하세요.”

잠시 후, 무대를 끝낸 원제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백스테이지로 돌아왔다.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수고하세요.”

그들은 가볍게 손을 맞부딪치거나 팔을 툭툭 두드리곤 반대 방향을 보았다. 그러다 무심코 스친 한율의 시야. 핑크팝의 리스가 부러움이 담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스래빗이나 원제로와 그렇게 인사하고 싶은 게 아니라, 동료들끼리 무심하지만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 그 자체가 부러운 듯이.

스태프가 외쳤다.

“어스래빗 준비할게요!”

“네!”

어스래빗은 1분 남짓 짧게 편곡한 버전의 과 , 을 차례대로 소화했다.

기온이 뚝 떨어진데다 바람도 서늘했으나, 무대를 모두 마친 멤버들의 얼굴과 목덜미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래도 카메라를 향해 여유롭게 웃으며 아이돌식 엔딩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꺄아아아!

무대 위 조명이 꺼졌다. 한율은 거친 숨소리가 오디오에 잡히지 않도록 호흡을 강제로 억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덥석!

“······?”

바로 곁에 있던 박가람이 돌연 한율을 잡았다. 순간 얘가 왜 이러나 의아했지만, 어스름하게 보이는 표정이나 걸음걸이 상태가 이상했다. 한율은 일단 그를 부축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큰일 났어.”

백스테이지로 돌아와 마이크가 꺼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박가람이 입을 뗐다. 그제야 다른 멤버들도 박가람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다가왔다.

“왜? 어디 아파?”

“왜 그래, 박가람.”

백스테이지에서 대기하던 원카운트도 무슨 일이 있나 기웃거렸다.

여전히 한율의 팔을 잡은 채, 박가람이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발가락에 쥐 났어.”

“······.”

“진심 진짜 아파. 못 걷겠어.”

“···그래도 다 끝난 다음에 나서 다행이네.”

“워낙 작은 부위라 근육이 아니라 관절 문제를 착각한 걸지도 모르니까 일단··· 그래, 업혀라.”

한율은 박가람의 인이어와 마이크를 대신 제거해주었다. 조유찬의 등에 업힌 박가람은 먼저 백스테이지에서 나가며 다른 출연팀에게 인사했다. 아주 씩씩하게.

“수고하십쇼!”

“하아···.”

유호가 한숨을 푹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순간 식겁했네.”

“평소에 안무 연습이랑 운동 끝나면 근육 꼼꼼하게 잘 풀어주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저거저거.”

이건우는 고개를 저으며 스태프가 내미는 생수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까득.

“이거 먼저 마셔, 리더.”

“땡큐.”

“내 것도 까 줘, 둘째 형.”

까득.

“자.”

“나도.”

까득. 이건우는 말없이 라이언에게도 새 생수 뚜껑을 열어주고 건넸다. 그동안 차남석과 강보배, 한율은 알아서 생수 뚜껑을 열어 마셨다.

수건으로 적당히 땀을 닦으며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을 땐, 비상시를 대비해 대기하던 의료진이 박가람의 발을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 없는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이젠 멀쩡하게 잘 움직이네요, 쌤. 흐.”

까딱까딱.

그 모습을 본 차남석이 조용히 말했다.

“라방에서 이프림에게 들려줄 썰 하나 생겼네요.”

“그래, 아파도 계속 저렇게 소소한 수준으로 아팠으면 좋겠다.”

너한텐 큰일 같은데요

<부산 아시아 뮤직 페스티벌> 마지막 무대는, 전 출연진이 함께 부르는 부산 대표 노래였다.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꽃가루와 시끄러운 폭죽 소리. 노래가 끝난 뒤에도 가수들은 객석을 향해 한참 동안 손을 흔들며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서서히 무대 조명이 어둑해지고, 공연했던 순서대로 차례차례 무대를 내려갔다. 그리고 좁은 백스테이지가 아닌, 복도에 길게 서서 다른 출연팀과 인사를 나눴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이제 곧바로 서울 올라가?”

“아뇨, 저희는 여기에서 하루 묵은 다음에 내일 비행기 탈 예정이에요.”

“선배님, 오늘 1위 정말 축하드립니다!”

원제로의 현강희가 큰소리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한율은 웃으며 화답했다.

“고마워.”

“어스래빗 선배님들, 1위 축하드립니다!”

다른 후배들도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멤버들은 일일이 고맙다고 인사하다가, 곧이어 복도로 나오는 다른 팀과도 인사를 나눴다. 이런 인사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아 얼떨떨해 보이는 외국 가수들에게도.

“수고하셨습니다!”

대기실로 돌아온 뒤엔 불편한 무대 의상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집에 가자아.”

“얘들아, 너희 내일 비행기로 올라간다.”

“응? 드림래빗 차로 올라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애들은 여기에 있다가 내일 비행기 타고 해외 가고?”

“대표님 말씀이, 급한 스케줄 없으니까 하룻밤 푹 자고 내일 안전하게 비행기로 올라오래.”

“그럼 애들이 타고 온 차는요?”

“다른 직원들이 운전해서 끌고 갈 거야. 걱정하지 마.”

차를 운전해야 하는 직원들은 힘들겠지만, 어스래빗 멤버들에겐 좋은 소식이었다. 차 안이 아닌 침대에서 편히 잘 수 있으므로.

“호텔은 어제 거기에요?”

“아니, 다른 곳. 다들 뭐 잊은 거 없나 잘 챙겨.”

“네에.”

오늘 밤 묵을 호텔은 도심과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었다. 객실은 둘씩 사용하게 되었는데, 한율이 먼저 객실 문을 열자 박가람이 졸졸 쫓아 들어왔다.

“호텔 뒤쪽 봤냐? 나무들이 빽빽하고 울창하게 자란 게, 꼭 귀신 나올 것 같더라.”

“발은 괜찮아요?”

“어, 완전 멀쩡. 그런데 힘 빡 주면서 꼼지락거리면 또 쥐 날 것 같다. 자기 전에 반신욕이라도 해야겠어.”

“그럼 나 먼저 씻을게요.”

“엉.”

그러나 씻고 나왔을 때, 객실엔 박가람 대신 길우성이 뚱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가람이 형은?”

“내쫓았어.”

“그래.”

길우성은 침대에 얌전히 앉아 TV를 보다가, 한율이 기초화장품을 다 바르고 정리할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야, 써한. 네가 나라면.”

“······?”

“이거 보고, 어떻게 대응할 거야?”

한율은 길우성이 내미는 사과패드를 받았다. 커뮤니티 사이트 어스래빗 게시판. 누군가 자필로 쓴 장문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스래빗 팬 여러분.

저는 길우성과 같은 D 초등학교를 나온 동창생 B입니다.]

과거에 친구들과 함께 길우성을 따돌리고, 비웃거나 무시한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기회가 된다면 길우성을 직접 만나 사과하고 싶다는 내용의 자필 사과문이었다.

댓글란엔 어스래빗 팬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릴 때 멍청하게 남들한테 휩쓸려서 무시 한번 했다가ㅋㅋ

-여론이랑 팬 동원해서 과잉 복수 ㅈㄴ무섭네

-초중 내내 혼자 다녔으면 ㄱㅇㅅ한테도 조금 문제 있었던 거 아닌가? 너희도 어릴 때 같이 어울리기 싫은 애들 한두 명 있었잖아

-따돌림당하는 애 도와줬다가 타깃이 나로 바뀔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방관한 것도 그렇게 죽을죄냐 지들은 안 그런 척

-때린 것도 아니고 같이 놀기 싫어서 안 놀았는데 순식간에 학폭 가해자가 되어서 평생 들을 욕 다 처먹고ㅋ 얘네도 진짜 피곤하겠다 이래서 얽히기 싫었던 거 아닌가?

작성자의 두개골을 열어 확인하고 싶은 댓글 몇 개도 있었다. 그러나 이프림은 단체로 무시하기로 입을 맞췄는지, 해당 게시글이나 어그로엔 일절 반응하지 않는 중이었다.

[길톢 눈물점 지켜줘서 고마워요 떠비]

[다람이 율톢 부축받는 거 본 이푸림 없어?]

[거누 으른섹시미 터지는 옆얼굴]

[오늘 공연 직캠 움짤 모음]

[차남석 알쓰 소문 진실 알고 싶다]

[부산 공연 수고했어 어스래빗]

다만, 관리자가 메인 상단에 띄운 한 게시글이 눈에 띄었다.

[제목: 우리는 짱쎈 이프림.]

[배부르지 않냐?]

미끼를 물지 말란 뜻인가.

“벌써 너튜브 영상이랑 기사까지 떴다? 과거 길우성 학폭 가해자 네티즌, 자필 사과문 어쩌고저쩌고.”

한율은 사과패드를 돌려주었다.

“회사에선 뭐래?”

“방금 팀장님이랑 통화했는데, 직접 만나 사과하고 싶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으니까 만나는 게 좋겠대. 안 그러면 날 다른 종류의 가해자로 만들 수 있다고. 그런데··· 이 글 쓴 사람이 누군지 통 짐작이 안 간단 말이지. 몇 번이고 읽어봐도 상대방을 특정할 만한 단서도 없고. 설마 지난번에 라욘 형 탐지기에 걸려 도망친 것 중 하나는 아니겠지?”

“회사 통해서 약속 잡아보면 누군지 정확히 밝히겠지.”

“역시 만나야겠지···?”

한숨을 푹 내쉬는 길우성의 얼굴엔 여러 가지 걱정이 섞여 있었다. 한율은 가만히 길우성을 보다가 말했다.

“그땐 나도 같이 가.”

“잉? 왜?”

“혹시 모르니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매니저 형이나 다른 멤버 형들 데리고 가면 상대방으로선 압박감 준다고 생각할 거 아냐. 하지만 난.”

한율은 속으로 한숨 쉰 후 말을 이었다.

“같은 팀 멤버 이전에 네 친구니까, 그 자리에 끼어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겠어?”

“아아.”

길우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가 탄산을 마신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크으.”

“······.”

그 시각, 길우성의 부탁으로 객실을 나온 박가람은 홀로 호텔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겉으론 생각 없이 웃는 것 같아도, 속은 힘들겠지.’

어제와 오늘 인터넷에 길우성 이름과 더불어 아픈 과거가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그러니 가장 가까운 친구인 서한율과 먼저 여러 가지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나저나···.’

박가람은 복도 끝 창 앞에 서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 시퍼런 눈은 뭐였지?’

몇 시간 전, 부산 아뮤페에서 어스래빗 무대를 막 끝냈을 때. 천천히 어두워지는 조명 아래에서, 박가람은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예고 없이 찾아든 오싹한 한기.

놀라 고개를 돌린 곳엔 서한율이 있었다.

서한율 곁에 바짝 붙어있는, 한 쌍의 거대한 푸른색 눈동자도.

『······?!』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도 안 나온다고, 박가람은 잠시 멍하니 굳었다가 다급히 서한율을 잡았다. 파충류 눈깔을 한 거대한 잡것이 서한율을 노리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그 순간 얄궂게도, 발가락에 쥐가 났다.

커다란 푸른색 안광 한 쌍도 사라졌다.

‘참 이상하네. 보살님 말씀으론 서한율 기가 굉장히 세서 웬만한 잡것들은 접근도 못 한다고 했는데. ···아니, 그렇다는 건 그 시퍼런 눈깔은 웬만한 잡것이 아니란 소리 아니야?!’

그때 머리를 스치는 단상 하나.

‘가만. 혹시 전에 JE가 말한 소름 돋고 섬뜩한 기분이란 게···?’

영화 <고양이 난로> 개봉 시사회 때, JE가 서한율에게 가톨릭 묵주를 선물했던 것도 생각이 났다.

‘JE한테 물어봐야겠다. 그러려면 일단 조용한 곳.’

박가람은 휙 몸을 돌려 한 객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차남석이, 문 열어라.”

전화 통화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누군가에게 말하는 차남석의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곧 문이 열렸다.

“네. 그럼 내일 다시 전화할게요, 할아버지. 주무세요. ···무슨 일이에요, 형?”

할아버지랑 통화 중이었구나. 박가람은 객실 안을 크게 둘러보며 들어갔다.

“길우성 원래 이 방이었지? 그놈 대신 왔다.”

“네.”

“그런데 집에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영 안 좋은데.”

“······.”

박가람 대신 객실 문을 닫으며 머뭇거리는 차남석.

“아니, 그렇다고 꼭 말해달란 소리는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정도로 큰일은 아니라서요.”

“잉. 그럼 더 말해도 되는 거 아니야?”

그런가? 차남석은 어깨를 으쓱이다가 대답했다.

“그냥, 갑자기, 아버지가 할아버지 모시고 살겠다고 해서요.”

“그거···.”

박가람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너한텐 큰일··· 같은데요, 차남석 씨.”

* * *

어스래빗 활동 2주 차.

어스래빗은 <락뮤닷>, <로얄K뮤직>에 이어 <뮤직센터>에서 다시 1위를 받으며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후속곡 <로컬영화> 활동은 다음 주 화요일 <락뮤닷>을 시작으로 일주일 동안만 할 예정.

“내일 몇 명 온대?”

“다섯 명이요.”

<뮤직센터>에서 받은 1위 트로피를 가지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

“걔네 사과하러 오는 거 맞아? 생각이 제대로 박혀있으면, 집단 따돌림 했던 것들이 또 집단으로 와서 피해자를 둘러쌀 생각, 전혀 못 할 것 같은데.”

지난번, 길우성의 결정을 들은 회사는 커뮤에 자필 사과문을 올린 사람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그리고 24시간 만에 온 답변.

[함께 사과하고 싶다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약속 날짜는 바로 내일인 19일.

“생각할수록 진짜 괘씸해. 만약 우성이가 유명해지지 않았다면, 실검에 오르지도 않았다면 사과할 생각, 했을까?”

“우르르 몰려와서 서로 대충 묻어가기식으로 사과하고,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했으니 이제 끝난 일이라고 주변에 떠들고 다닐 거 생각하니까 좀···.”

“우리도 가는 거 어때? 아무리 한율이가 같이 간다고 해도, 사람 수 믿고 무슨 말을 어떻게 싸지를지 누가 알아.”

“흐.”

가만히 멤버들의 이야기를 듣던 길우성이 멍청한 얼굴로 실실 웃었다. 차남석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넌 왜 남 일처럼 웃고 있어. 길우성 네 일이거든?”

“그냥, 든든해서. 우리 멤버들···.”

“오글거릴 것 같으니까 그 이상은 하지 마라.”

“흐흐.”

“그런데 한율아, 너 내일 더순한화장품 팬미팅 있잖아. 시간 괜찮아?”

“팬미팅은 1시고, 만나기로 한 건 3시라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 장소는?”

“내일 우리가 정해서 알리기로 했어요.”

“설마 개인 연락처 넘긴 건 아니지?”

길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연하지. 뭘 믿고 넘겨.”

“한율이도 같이 가니 별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나면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해.”

“응.”

다음 날, 더순한화장품 팬미팅이 열릴 종합쇼핑몰.

샵에서 가볍게 단장을 받고 온 한율은, 진은수가 있었을 때처럼 팬미팅 시작 직전까지 차에서 시간을 보냈다. <서울 구미호> 대본을 보고, 너튜브로 여우 영상을 보기도 하며.

“한율아, 10분 남았다. 올라가자.”

“네.”

사무실로 올라가 광고주인 더순한화장품 관계자, 이단영과 인사를 나눴다. 이단영과 CF를 촬영할 당시, 분위기 망치는 소리를 늘어놓았던 김용철 부장은 오지 않았다.

더순한화장품 직원이 넉살 좋은 웃음을 지었다.

“이번 앨범 활동 대박 나신 거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한율 씨.”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이번에 나온 수면팩, 정말 순해서 좋더라고요. 단영 씨는 최근 찍는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님도 곧 촬영 들어가시죠?”

“네. 이달 말부터 들어갈 예정이에요.”

팬미팅 시작 5분 전. 그들은 관계자 전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팬미팅 장소로 향했다.

꺄아! 웅성웅성.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작은 환호성과 기대로 가득 찬 목소리가 팬미팅 공간을 커다랗게 울렸다.

“안녕하세요.”

꺄아악! 한율이 인사하자 더욱 커지는 소녀들의 환호성. 이단영을 보러 온 남학생 팬들은 조용히 입을 틀어막거나, 낮은 목소리로 ‘진짜 예뻐’, ‘실물 존예’를 중얼거렸다.

이번 팬미팅 방식은 지난번과 똑같았다. 원하는 모델 한 사람을 선택해 당첨된 응모권으로, 해당 모델만 만날 수 있는 방식.

“<로컬영화>도, <서울 구미호>도 대박 나자, 서한율!”

“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요, 누나.”

“응. 건강도 꼭 챙기고!”

호감으로 가득한 눈을 빛내던 여성 팬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장했다. 한율은 그다음 팬이 다가오는 동안, 앞으로 기울여진 여우 귀 머리띠를 제대로 고쳐 썼다.

“어?”

“······?”

그때 옆에서 놀란 소리를 내는 조유찬.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조유찬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커다란 그림자가 스윽 한율에게 드리워졌다.

“님, 하이요.”

진은수가 모델을 그만두어, 이젠 팬미팅에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개나리의 오빠가 이번에도 나타났다.

뭐라는 거야

한율은 반갑게 미소 지었다.

“오늘도 동생 분 대신 오셨어요?”

개나리 오빠는 이번엔 친한 척하지 말라는 말을 건너뛰었다. 대신 반쯤 체념한 얼굴로 웃었다.

“네. 오늘은 ‘안녕, 개나리야?’하고, ‘나쁜 짓은 하면 안 된다, 개나리야.’라고 적어주세요.”

나쁜 짓?

“무슨 일 있으셨어요?”

“요즘 부쩍 수상해 보여서요. 갑자기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게. 그래도 님 덕질하고 나 부려 먹는 건 여전하지만.”

한율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엽서에다 펜을 끼적거렸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개나리 오빠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엽서를 받았다.

“감사요.”

잠시 후, 팬미팅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

“대체 뭘까? 개나리 오빠.”

조유찬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한두 번이야 운이 저엉말 좋다고 치부할 순 있어도···. 오늘도 온 거 보니 슬슬 무섭던데? 한율이 너한테 각인되고 싶어서 몇 개 안 샀는데 당첨됐다고 거짓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한율은 조유찬이 흐린 뒷말에 숨은 다른 의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개나리’란 동생이 정말 실존하기는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전에 형, 개나리 오빠한테 사인받지 않았어요?”

“어, 받았지? ···아! 잠깐만?”

조유찬이 길가에 차를 세웠다.

“내가 그때 팀장님에게 보여주려고 사인을 사진으로 찍어뒀거든? ···여기 있다. 음···. 이름 알아볼 수 있겠어?”

한율은 조유찬의 핸드폰을 받아 개나리 오빠의 사인을 살폈다. 지렁이처럼 어지럽게 휘갈겨 쓰기는 했지만, 얼추 이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계마루. 성이 계씨네요.”

“이름이 보여?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아무튼 그게 본명이면 단번에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흔한 성씨는 아니잖아.”

한율은 조유찬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고, 자신의 핸드폰으로 SNS에 접속해 ‘계마루’를 찾았다. 바로 떴다.

[Gye_Maru01]

프사를 보니 개나리 오빠가 맞았다. 업로드된 사진도 친구들과 바보처럼 찍은 사진들뿐인, 조유찬의 의심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고3이었다.

진은수 팬이라고 말한 것과 달리 아이돌 관련 사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팬 활동은 현생과 선을 긋고 즐기는 사람이 많은 편이니.

“한율이 너 지금 설마.”

차를 다시 움직이며 조유찬이 룸미러를 힐끗거렸다.

“개나리 오빠 검색하는 건 아니지? 아무리 수상해도 팬의 개인정보는 함부로 사용하면 안 돼. 그런 나쁜 짓은 회사가 할 일이야.”

이미 했는데.

“그냥 연예 기사 보고 있어요.”

“그래.”

태연하게 거짓말한 한율은 ‘계나리’를 검색했다. 이번에도 바로 나왔다.

‘이 아이는···.’

최근에 올라온 사진. 크로플과 음료가 놓인 테이블에서 두 소녀가 비슷하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상당히 낯익었다.

직접 얼굴을 본 지 조금 오래되기도 하고, 연하게 화장하기는 했으나 분명 자칭 서한율, 차남석 1호 팬인 후드소녀 이아름이었다.

[크로플 매일 먹고 싶당 #살쪄안돼 #아름아름]

다른 사진을 살펴보니 이쪽도 계마루처럼 평범했다. 학교 화단이나 하늘을 찍은 사진, 길고양이 사진, 같은 교복을 입은 친구들과 찍은 사진 등등.

고층 아파트 발코니에서 찍은 듯한 어스래빗 공식 응원봉 사진도 있었다. 도시 야경을 배경으로 푸른색과 녹색으로 얼룩진 토끼 머리가 환하게 빛나고 있다.

[#어스래빗포에버 #서한율사랑해]

한편 그 시각,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어스래빗 연습실.

남자 연습생 휴게실에서 씻고 온 길우성은, 거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멤버들의 안무 연습을 보았다.

“라욘 형, 뒤꿈치 조금 더 부드럽게. 보배 형 눈빛 아련··· 아니, 강아지 표정은 지우고, 따다다단~ 샥샥. 아이, 잘한다~.”

“···너 나와, 길우성. 정신 산만해.”

“어허, 집중! 프로가 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집중해야지 말이야.”

“······.”

멤버들은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연습에 집중했다. 길우성이 잠시 후 있을 약속 때문에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는 걸 눈치챈 까닭이었다. 지금도 본인 나름대로 곤두선 신경을 풀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하고 있다는 것도.

우웅.

“······.”

길우성은 손에 쥔 핸드폰을 확인하곤 웃으며 일어났다. 2층 사무실로 올라오라는 오 팀장의 톡이었다.

“형님들, 올 때 뭐 사 올까?”

음악 없이 입으로 가사와 박자를 내며 연습하던 멤버들이 멈췄다. 박가람이 수건으로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멜론 먹고 싶다. 멜론맛 아이스크림 말고, 진짜 멜론.”

“응, 써한한테 그렇게 전할게. 그럼 갔다 올게용!”

길우성은 멤버들에게 손을 흔들며 연습실을 나섰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유호가 크게 외쳤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꼭!”

“네엡!”

삐리릭, 철컥.

문이 자동으로 잠겼다.

“진짜 우리는 안 가봐도 될까? 한 명 정도는 더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제부터 그 말 했는데 우성이가 계속 괜찮다고 거부했잖아.”

“그래도 우리 팀 이름으로 여론에 알려질 일인데, 이대로 막내들만 보내자고요?”

어젯밤부터 길우성을 제외하고 벌어진 토론.

“그렇다고 본인이 싫다는데 강제로 끼어들 수는 없잖아. 팀 이전에 우성이 개인 문제이기도 하고.”

“그럼 내가 갈게.”

“라이언 네가?”

벽시계를 확인한 라이언이 들었던 손을 내렸다. 2시 15분. 약속 시간까지 아직 조금 여유가 남았다.

“우성, 내가 우기면 OK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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