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70/427)

* * *

주말 오후라 손님이 많은 카페. 길우성에게 사과하기 위해 모인 4인방은 조심히 주위를 살폈다.

구시렁구시렁.

“야, 그런데 우리 진짜 이렇게 우르르 몰려가도 괜찮은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뭐 한 명씩 따로 가서 석고대죄라도 해? 그게 더 모양새가 이상하겠다. 그렇게까지 큰 잘못···도 안 했잖아, 우리?”

“그래. 솔직히 우리가 걜 때리기를 했냐, 뭘 했냐? 그래도 같이 해야 하는 조별 활동 같은 거는 다 끼워줬는데. 와, 생각해보니까 존나 얼척 없네?”

“소풍이고 현장학습이고 스스로 혼자 따로 떨어져 다녀놓고···. 걔도 친해지려는 노력 전혀 안 했잖아? 완전히 어릴 때 당한 걸로 꽁해선, 나중에 애들이 말 걸어도 그냥 단답형으로만 대답하고.”

“그런데 진짜 녹음해도 별문제 없겠지? 그쪽에서 정한 장소로 오라는 것도 조금 찝찝한데.”

“뭘. 우리도 피해자잖아. 씨발, 나 아직도 재작년에 겪은 일 생각하면···. 그놈 아니었으면 나 내신이고 수능이고 그렇게까지 안 망했다고.”

“녹음이든 녹화든 핸드폰으로 해라. 전에 배수원 일 못 들었냐?”

큭큭. 배수원 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은 웃음을 흘렸다.

작년 2월. 길우성에게 무릎 꿇고 사죄 쇼를 벌이려던 배수원 일행이 감지기에 걸려 도망친 일화는 그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삑삑 소리에 당황해서 존나 병신같이 튀었다며.”

“갑자기 그게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말하는데, 진짜 웃겨 죽는 줄.”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딱 진정성 있어 보이게, 오버는 하지 말고 미안하다고만 말하자. 내가 그땐 뭐 잘 몰랐다, 휩쓸렸다··· 이런 류의 변명은 나중에 빌미가 될 게 뻔하니까 집어치우고. 분명히 그쪽도 녹음할걸?”

“당연하지.”

말하면서도 그들은 행여 근처 손님들이 자신들 이야기를 듣진 않을까, 경계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걔네가 빠순이들한테서 뜯는 돈이 장난 아닌데, 회사에서 맨몸으로 내보내겠냐?”

“씨발, 그냥 듣보로 묻혔으면 이런 짓까진 안 해도 됐는데. 대체 그 새끼 뭘 보고 좋아하는 건지, 빠순이들 뇌는 진짜 이해 안 간다.”

“아이돌 좋아하는 것들 수준이야 뻔하지. 뇌는 텅텅 비고, 겉으론 혀 짧은 소리, 애교 같은 거 부리면서 뒤로는 지들끼리 더러운 짓거리 다 하는 데도 좋다고 따라다니는 거 보면.”

“그놈도 여돌이랑 해봤겠지? 아니면 같은 회사 연습생이랑?”

“와씨, 상상만 해도 존나 부럽.”

“그런데 김지우는 왜 연락이 없냐? 지가 먼저 커뮤에다 사과문까지 올려놓고.”

우웅.

“양반은 못 되네.”

그들은 김지우가 보낸 지도를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WB래빗이 김지우를 통해 보낸 약속 장소는, WB래빗 엔터테인먼트와 그리 멀지 않은 골목길 건물 2층이었다. 계단 입구 옆에 놓인 작은 카페 안내판이 없었다면 찾기 힘든 곳.

[카페 ‘Day’ 브레이크타임 15시~16시]

“연예인들이 다니는 가겐가? 간판도 알아보기 힘들다.”

“와, 나중에 친구들이랑 와 봐야지.”

찰칵.

“야, 위에 들릴지도 모르니까 조용히 해.”

“왔냐?”

그때 다른 방향에서 김지우가 등장했다. 네 사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야아, 김지우. 너 살 많이 빠졌다?”

“서울 촌놈 다 됐네, 김지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김지우는 카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내 사과를 할 테니까, 너희는 너희 알아서 해. 서로 묻어가지 말자고.”

“뭐?”

“쟤 뭐라는 거냐?”

“선 긋기 들어가네, 김지우. 지도 똑같았던 주제에.”

그들의 반응을 무시, 김지우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며 덧붙였다.

“같은 팀 멤버도 몇 명 같이 왔다니까 표정 관리 잘하고.”

한 명이 큭큭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이돌 만나기 참 쉽죠?”

그러나 그들은 카페 출입문이 보이자마자 입을 다물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2년 전 여름이었다. 커뮤니티 사이트에 길우성의 과거 따돌림피해 이야기가 올라왔다. 해당 이슈는 순식간에 주요 가해자였던 그들을 에워쌌다.

『때리면 티 난다고 패드립이랑 쌍욕 해대고, 무슨 말만 하면 비웃거나 무시하고 그랬다며? 실내화랑 가방도 숨기고.』

『진짜 악질이었네, 역겨운 학폭 가해자 새끼들. 아무리 어렸어도 그렇지. 할 짓, 못 할 짓도 구분 못 하고. 가정교육은 본인들이 못 받은 거였구요~.』

『내가 그때 같은 학교였는데, 다른 반인 내가 봐도 진짜 심하기는 했음.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그래도 꿋꿋하게 학교 다니던 길우성이 정말 대단해 보이더라.』

『최고의 복수는 가해자들보다 더 인생 성공하는 거라잖아. 지금 저것들 꼬락서니 봐라.』

『집단으로 괴롭혀놓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다닌 거? 존나 소름인데. 혹시 길우성 부모 식당가서 친구니까 서비스 달라고 한 것도 저 새끼들 아니야?』

『쟤네 그 남돌··· 누구지? 아무튼 걔한테 패드립 박으면서 6년 넘게 따돌린 애들이잖아. 야, 말 섞지 마. 너까지 비슷한 부류라고 오해 산다.』

『진심 쓰레기.』

억울했다. 나보다 더 심하게 군 아이들도 있는데, 웃으면서 방관하던 다른 아이들도 있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나 누구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길우성의 팬인지 모를 네티즌들은 그들의 SNS를 털어 사진을 유포하고 조롱했다.

길우성의 소속사 측에서 가해자로 언급되는 이들의 신상은 모두 허위이며, 과도한 신상 추적과 비난을 자제해달라고 나서기는 했으나, 그들은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 학교에서 고립된 후였다. 가족들도 동네에 얼굴 들고 다니기 창피하다며 기막혀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제주도를 떠나면서 이제 겨우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길우성이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면서, 과거 따돌림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가십에 환장한 너튜버들과 더 집요한 네티즌들이 달라붙어 그들의 신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 하나.

어스래빗이 월드투어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아지고, 앞으로도 더 많아질 것 같기 때문.

그러니 겨우 찾은 지금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선, 나중에 주변에 들키더라도 과거의 잘못을 참회했다고 인정받기 위해선 길우성을 만나 사과해야 한다.

억울해도.

딸랑.

“어서 오세요.”

아담한 카페 안. 4인용 테이블 두 개를 이어붙이던 남성이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앉으세요. 음료는 뭐로 드릴까요? 계산은 일행분이 먼저 하셨으니 편히 고르시면 됩니다.”

먼저 했다고? 아무도 안 보이는데.

그들은 빈 카페 안을 둘러보다가, 파티션과 커다란 화분으로 안이 가려진 또 다른 테이블이 있음을 깨달았다.

“왔나 본데요.”

안에서 말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커다란 화분 잎사귀를 손으로 치우며 모습을 드러냈다.

훤칠한 키에 결점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와 이목구비. 그리고 비현실적인 연한 백금발 사이로 반짝거리는 푸른색과 검은색 십자가 피어싱.

TV로만 보던 인물이 CF의 한 장면처럼 등장했다. 그들은 잠시 표정 관리를 잊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실내인데도 커피와 달콤한 향을 실은 청량한 바람이 부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어스래빗의 서한율이 그들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아주 우스워 보여

약속 시간 30분 전.

한율이 회사에 도착했을 때, 길우성은 라이언과 함께 1층 로비에 서 있었다.

“나도 갈 거야.”

“라욘 형까진 안 가도 괜찮다니까···.”

“너흰 친구고, 난 ‘형’ 대표야.”

라이언은 마법 저항력이 약한 편인데, 데려가도 괜찮을까.

한율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쓸 일이 뭐가 있을까 해서.

“출발하죠.”

장소는 예전에 한율이 L백화점의 장기백을 만난 그 카페였다.

아는 사람만 찾을 정도로 존재감이 약하고, 사장 혼자 꾸릴 정도로 작은 곳이라 조용히 이야기 나누기엔 적당했다. 무엇보다 회사와 가까워 오 팀장에게 추천했더니, 오 팀장이 직접 카페로 찾아가 사장에게 양해를 구했다고.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한율이 들어가자 카페 사장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을 뿐, 딱히 알은체하진 않았다. 세 사람은 음료를 주문한 뒤 파티션과 대형 화분으로 가려진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녹음하자.”

“녹음?”

한율의 말에 길우성이 고개를 기울였다.

“걔네가 동의할까?”

“더 기꺼워할 거야. 우리가 이미지를 챙기기 위해 솔직한 감정을 삼키고 언행에 주의할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본인들도 그래야 한다는 걸 망각하고 말이지.”

“기꺼··· 기꺼워?”

“‘기껍다’로 검색해보세요.”

라이언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으로 검색했다.

“아, 기뻐하다.”

“학폭 가해자들 사고방식이야 뻔하잖아.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어서 당한 거라는 자기 합리화.”

타인을 괴롭힐 땐 괴롭힐 만하다며 자기 합리화로 중무장한 상태였을 테니, 기억 또한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별거 아닌 일’로 치부되어 흐릿해졌을 터.

“그러니 네가 당한 일을 적나라하게 늘어놓고 따지진 않을 거라 생각하지 않을까. 그들 딴에 피해자는 ‘당할 만해서 당한 사람’이니까, ‘쪽팔려서 말하겠어? 그것도 이미지가 중요한 아이돌인데?’ 이렇게. 물론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지는 낯빛.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명 중 못해도 한 명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뻔해. 그럼 녹음 외에는?”

지잉. 진동벨이 울렸다.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알아서 해야지. 사과를 받든 말든, 그건 네 마음이잖아.”

“엉···.”

“형은 아무리 화나도 욕하거나 때리면 안 돼요. 몰래 촬영될 수 있으니까 위협적인 제스처도 절대.”

라이언이 씩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형’ 대표로 왔어.”

그리고 그들은 주문한 음료를 마시며, 곧 다가올 유호의 생일에 관해 의논했다.

“선물로 명패 어때? [토끼 전용 작곡가 유호 선생].”

“호 형 요즘 다른 회사에도 곡 보낸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러니까 ‘토끼 전용’이란 글귀를 새기자는 거지. 어딜 좋은 곡을 남 주려고.”

딸랑.

“어서 오세요.”

카페 사장이 계단 입구 옆에다 3시부터 4시까지 브레이크타임이라고 명시해뒀다. 그러니 일반 손님이 아닌, 기다리던 그들이 도착한 것일 터.

“왔나 본데요.”

이번에도 바깥쪽에 앉은 한율이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사과하는 거, 내가 봐도 아주 우스워 보여. 그리고 믿기지 않겠지만···.”

다섯 명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커뮤니티에 자필 사과문을 올린 김지우였다. 그는 과하게 침울한 기색을 띤 네 사람과 달리, 조금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한 번도 너한테 했던 짓들 잊은 적 없어.”

길우성은 말없이 김지우를 바라보았다.

“여덟 살 때, 누나랑 싸웠다가 부모님께 혼나서 집을 나온 적이 있었어. 그때 네가 너희 누나랑 너희 누나 친구랑 같이 재밌게 노는 게 보이는 거야. 그 모습이 무척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짜증 났었어. 그래서 괜히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 싶었고··· 그게 시작이었어.”

김지우는 한 입도 대지 않은 커피를 내려다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길우성 네가 ‘대체 왜 나한테 이러냐’ 화내고 울어도, 솔직히 대답하기엔 쪽팔리니까 ‘그건 네가 찾아야지’라고 억지 부리고, 멍청이라고 놀리면서 실내화도 숨겼어. 모두 내 짜증을 돋운 네 잘못이라고 뒤집어씌우면서.”

짧은 심호흡. 길우성과 시선을 마주하며 김지우가 또박또박 말했다.

“미안해.”

“······.”

처음 이들과 대면했을 때부터 내내 표정이 없던 길우성은, 이번에도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입 밖으론 내지 않지만,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음.

“···나도, 미안해.”

그냥 사과만 하고 가면 끝이다.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온 것일까. 김지우가 본인이 저지른 잘못을 구체적으로 읊자, 당혹스러운 기색을 흘리던 네 사람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잘못을 축소하면서 용서받을 수 있을까 궁리하는 게 훤히 보였다.

“애들한테 휩쓸렸다곤 해도 그런 말로 놀려선 안 됐는데··· 미안해. 장난이랍시고 너한테 우유 팩 찬 것도···.”

“내가 정말 멍청했어.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이제야 알겠더라. 하지만 우성이 너도 기억하지? 너 특히 괴롭히던 놈, 그놈이 그땐 애들한테 정말 무서운 놈이었잖아. 나중엔 너희 집에 가려는 거, 네가 오지 말라고 싫다고 거부하니까 너 때리기도 했다며.”

“···그래도 나, 5학년 때 너 혼자 청소하는 거 도와주기도 했잖아. 기억나지···?”

마지막 한 명은 아예 더듬을만한 기억 자체가 떠오르지 않은 듯했다.

“미안하다. 변명은 안 할게. 내가 정말 나쁜 새끼였어.”

“······.”

이번에도 가만히 듣기만 한 길우성은, 다시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자 조용히 컵을 들었다. 한율은 빨대 끝으로 레모네이드 안의 레몬을 쿡쿡 찌르곤 휘저었다. 라이언은 멀뚱멀뚱 신기하단 얼굴로 다섯 사람을 바라보는 중.

“···그럼.”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길우성이 천천히 컵을 내려놓았다.

“이제 내가 말해도 되지?”

끄덕끄덕.

“우선 이 말부터 해둘게. 나, 너희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이 자리에 나온 거 아니야. 너희의 사과를 듣겠다는 게, 곧 용서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거야.”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그들이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조금 전 처음 만나 인사 직후, 한율은 그들에게 모든 대화를 녹음하자 제안했다. 사과한 증거를 남기는 게, 지금 너희 신상을 추적하고 악질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혼낼 때 도움 되지 않겠냐 설득해서.

그들은 한율의 예상대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현재 길우성과 김지우의 핸드폰으로 녹음을 진행 중.

하지만 녹음 파일 공개, 그로 인한 이미지 훼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길우성의 쌀쌀한 반응에 당황한 표정들이었다.

“그래도 내 기억과 다른 오류는 짚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길우성은 그러거나 말거나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때 우유 팩 찬 게 장난이었다고. 내 바지 아래랑 신발이 우유로 다 젖으니까, 우리 엄마 들먹거리면서 지저분한 패드립 했었잖아. 비린내 풀풀 나는 환장의 모자라고. 그 말도 장난이었어?”

“······!”

길우성이 고개를 돌렸다.

“나 심하게 괴롭힌 애. 걔가 무서워서 동조했던 것 치곤···. 너 나한테 따로 우리 누나 생리하냐고 물어본 적 있었잖아. 가슴도 얼마나 나왔냐 묻고. ‘길우성 그 새끼, 걔한테 처맞았대. 변태 취급했다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애들한테 떠드는 것도 다 들었어. 변태는 누가 변태였는지 모르겠네.”

“그, 그게···.”

“너는 청소 도와준 행위만 기억하고, 나한테 한 말은 기억나지 않나 봐. ‘말 제대로 못 하는 거지새끼 동정해주는 것도 참 피곤하다.’ ‘넌 학교에 친구도 없는데 대체 왜 나와? 나 같으면 쪽팔려서 안 나오겠다.’ 그래도 그때 청소 도와줘서 고마웠어.”

“······.”

“난 네 변명이 참 궁금했는데,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까 나도 별말 안 할게. 그런데 있잖아. 초등학교 3학년 때 뺏어간 내 게임기는 언제 돌려줄 거야?”

한율은 새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는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녹음 앱은 여전히 제대로 실행 중이었다.

“그··· 정말, 미안해.”

한 명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나도 다 기억나는데, 세세하게 말하면··· 어, 그때 네가 받았던 상처를 다시 헤집게 될까 봐···.”

“그래, 나도···. 이거 다 녹음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우성아, 진짜 미안해. 나, 네가 춤도 정말 잘 추고 그래서 솔직히 친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애들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이제 와서 왜 이러냐고 네가 차갑게 굴까 봐 겁도 나고 그래서 더 세게 말한다는 게···. 그런데 내가 정말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

길우성의 게임기를 뺏어간 이는 ‘내가 그런 적이 있었나?’라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러다 옆에서 열심히 변명하는 친구들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린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미안, 내가 잘 기억이 안 나서···. 내가 그랬다면 정말 미안해. 그런데 진짜··· 내가 가져간 거 맞아···?”

“응. 뒤에 붙인 고양이 캐릭터 스티커 보고, ‘네가 여자애냐? 우웩.’ 이러면서 손톱으로 긁다가 찢은 것도 기억나. 그 후에 그거, 네가 무서운 6학년 형한테 뺏겼다고 짜증 내면서 내 가방 걷어찬 것도.”

“······.”

“나중에 돌려받기는 했어?”

“그, 그게···. 그때 그 형이 굉장히 무서운 형이라서···.”

이제야 기억이 났는지, 그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쨌든 너희들 이야기, 잘 들었어.”

“···야, 우성아.”

“조금 전에 너희들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이 자리에 나온 거 아니라고 말했지? 그래도 궁금했거든. 너희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본인 기억에도 없는 잘못을 사과하는 건 모순이잖아.”

길우성은 조용히,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난 너희에게 받을 사과가 없는 것 같아. 너희들 말처럼,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잖아.”

당황한 네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로 길우성이 본인이 당했던 일을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말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아니, 나는 다 기억한다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말해도 괜찮아, 친구야.”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우성, 몇 번이고 고민하고 마음 다잡아서 이 자리 나왔어. 그러니 말해도 괜찮아. 우성, 강하거든.”

“······.”

“우성, 앉아. 사과 들어야지.”

‘우유 팩’ 사건 가해자의 시선이 녹음 앱이 켜진 핸드폰과 길우성 사이를 어지럽게 오갔다.

* * *

“좋은 멜론은 어떻게 구별하는 거지?”

대형마트 과일 코너 앞.

길우성이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수박처럼 두드리면 안 될 것 같은데.”

한율은 진열대에 놓인 멜론 하나를 들어 살폈다. 눈에 띄는 백금발은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써서 감췄다. 그러나 근처 손님들은 한 번씩 한율과 그 일행을 힐끗, 혹은 대놓고 쳐다보며 지나갔다.

라이언이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꼭지가 시들지 않고, 같은 크기 중에서 묵직한 걸 고르래. 그물? 그물도 촘촘해야 한다는데, 그물이 어디 있어? 포장지?”

“껍질의 이 하얀 선 말하는 것 같아.”

“아아.”

“몇 통 사가야 되냐?”

“서너 통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한율은 멜론 4개가 담긴 큼직한 박스를 카트에 실었다.

“온 김에 필요한 것도 좀 사 갈까?”

“형님,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주십시오.”

“내가 왜 네 형님이야.”

“맛있는 거 사주면 다 형님이잖아.”

라이언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나도 하뉼한테 형이라고 불러야 해?”

“응. 몰랐어, 형? 남석 씨도, 가람이 형도 가끔 써한한테 형이라 그러잖아.”

“······!”

“거짓말이에요.”

“······!”

덥석. 한율은 길우성의 멱살을 잡는 라이언을 뒤로 한 채 카트를 끌고 갔다.

회사로 돌아왔을 땐 4시가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한율은 보컬 연습실에 있는 박가람을 찾아가 멜론 박스를 내려놓았다.

“형이 깎으세요.”

“헐···. 진짜 사 왔냐?”

박가람이 박스를 들여다보며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나가려는 한율을 덥석 잡고, 아직 열려있는 문을 닫았다.

“어땠어? 길우성, 괜찮았어?”

“네. 말이나 태도 보니까, 훨씬 전부터 오늘 같은 날이 올 걸 예상하고 준비한 것 같던데요. 저랑 라이언은 나설 틈도 없었어요. 그리고 오늘 대화 녹취록도 다 공개하기로 했고요.”

“으잉? 가해자들이 녹취록 공개를 OK 했다고?”

말도 안 돼.

놀란 표정을 짓던 박가람이 눈썹을 구겼다.

“너희 대체 무슨 짓을 어떻게 한 거야?”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린 나설 틈도 없었다니까요.”

“이상하네···. 뭐, 우성이 마음이 잘 풀리기만 한다면 다행이지만.”

박가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율의 옷은 여전히 꽉 잡은 채 놓지 않았다.

“더 할 말 있어요?”

나도 놀러 가고 싶어

힐끗. 박가람의 시선이 한율의 뒤를 향했다.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닫힌 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 조금 전에 JE랑 통화했다. 내가 본 걸 JE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뭘 봤는데요?”

박가람은 입을 꾹 다문 채 한율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파란색 파충류 눈깔.”

“아아.”

이 아이도 봤구나.

“언제요?”

“부산 아뮤페 공연 때. 당장 너한테 말할까 하다가, ‘그 거대한 눈깔도 같이 들으면 어떡하지?’란 생각이 들어서 일단 JE한테 물어봤어. 왠지 JE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너도 이미 알고 있다며?”

한율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작년에 JE 선배님한테 듣고 처음 알았어요.”

“그게 언제였어? 선녀 보살님 만나기 전에?”

“네.”

“와···.”

박가람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혹시 그게 잡것들 물리치는 거대한 잡것인가? 아니, 신점까지 방해할 정도면 대체···.”

“JE 선배님에게도 말했지만, 그것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은 적은 딱히 없는 것 같아요.”

“그래, 음. 그럼 다행이기는 한데···. 난 그때 진짜 놀라 기절할 뻔했거든? 발가락에 쥐도 나고? 아무튼 너한테 별 탈 없는 거면 다행이기는 한데···.”

박가람은 다시 찝찝한 시선으로 한율의 뒤를 살피더니, 멜론 박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잘라야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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