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크르르. 잔뜩 성이 난 울음소리를 흘리는 들짐승의 시야가 거칠게 흔들린다. 그 중심엔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퍼석!
[꺅!]
도망치던 아이가 젖은 낙엽에 미끄러져 넘어진다. 크르르···. 들짐승 또한 쫓던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간다.
[흑, 흐윽, 흐아앙······.]
뒤를 돌아본 아이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진다. 상처투성이가 된 맨발로 젖은 땅과 마른 낙엽을 마구 밀어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한다.
[해, 해피야아···. 흐윽···. 살려줘, 해피야······.]
크르르. ···커헝! 먹잇감을 위협하는 듯한, 혹은 공격받는 듯한 짐승의 찢어질 것 같은 날카로운 울부짖음.
새벽빛으로 물든 도시.
고층 아파트와 빌딩이 멀리 보이는 고급 주택가 하늘 위로, 무언가에 놀란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른다.
차칵차칵.
1999년 신문.
[강도의 소행인가?! 일가족 참변]
거실과 침실, 욕실, 정원에서 죽은 채 발견된 피해자들의 사진. 거칠게 뜯긴 채 버려진 개 목걸이와 핏자국.
[강남 일가족 살인 사건, 미제로 남겨지나]
[경찰 “남은 유가족에게 송구···.”]
[강남 일가족 사건, 유산은 미국 거주 딸에게]
차칵차칵.
신문 속 흑백 사진이 생생한 컬러로 바뀐다. 모자이크 처리된 시신의 윤곽과 배경도 달라진다. 흑백 사진에 찍힌 경찰 제복이나, 촌스러운 사람들의 머리 스타일도.
차칵차칵.
현장 감식이 진행 중인 참혹한 살인 사건 현장. 감식반이 피로 물든 2017년 10월 달력을 촬영한다.
막 현장에 도착한 형사 민해솔이 경악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대체 왜 이런 짓을···.]
그리고 2019년 현재.
[영화제작 동아리 <빠밤!>] 종이가 부착된 작은 부실.
1999년 신문 조각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화이트보드 앞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사람들은 딸이 누군가를 사주해, 가족들을 죽였다고 의심했어. 그런데 증거가 없어서, 결국엔 못 잡았지.”
“부장, 그다음엔? 딸은 어떻게 됐어?”
“그게, 굉장히 수상해. 보통은 가족들이 하루아침에 끔찍하게 살해당하면 그 범인을 꼭 좀 잡아달라고 경찰에 애원하든 뭘 하든 노력하기 마련이잖아. 아무리 친하지 않았던 가족이라도 말이야. 그런데 아~무 것도 안 했대. 경찰 조사받고, 유산 받자마자 사건 벌어진 집 처분하고, 그걸로 끝.”
“흐음.”
심드렁한 얼굴로 노트에다 낙서를 끼적거리던 소년이 미간을 찡그렸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깨끗하고 하얀 피부와 단정한 이목구비, 눈에 띄는 파란색 피어싱과 고가의 손목시계.
교복 명찰에 자수로 새겨진 이름은 [최형호].
“그냥 집 처분도 아니고 사건 벌어진 집이라고 하니까, 다른 집도 있단 소리로 들리네?”
“오, 역시 형호.”
부장이 보드마카로 형호를 가리켰다.
“예리해.”
형호는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제가 그리는 낙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가 정말정말정말 어렵게 알아낸 정본데, 이 강남 일가족에게는 아버지 명의로 된 다른 집이 한 채 더 있었어. 바로 사건이 일어났던 이 집의.”
부장이 책상에 두 손을 얹었다. 그러곤 저를 주목하는 다른 학생들, 복도로 난 창까지 쭉 살핀 후 조용히 말을 이었다.
“뒷집.”
그제야 형호가 못생긴 여우 낙서를 멈추곤, 흥미롭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부장이 신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이 뒷집에서, 1999년에 벌어진 이 사건과 아주 유사한 사건이 또 벌어져.”
“또?”
“2017년 10월에 발생한.”
부장이 화이트보드에다 거칠게 글자를 휘갈겨 썼다.
[강남 일가족 자살 사건.]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자살?”
“유사하다며?”
“뭐가 비슷한데?”
“주식에 실패하고 전 재산을 날리게 된 아버지가 가족들을 죽이고 자살한 사건인데···.”
“컷, OK! 잠시 휴식할게요!”
진짜 학교 내부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세트장. 한율의 <서울 구미호> 첫 촬영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커피 마실래?”
“고마워요, 형.”
한율은 조유찬에게서 커피를 받아 빨대를 입에 물었다. 커피엔 어스래빗 로고가 그려진 컵홀더가 끼워져 있었다. 이프림이 한율의 <서울 구미호> 첫 촬영을 축하한다며 촬영장에 커피차를 보냈다.
“진해서 좋네요.”
“네 커피 취향을 내가 딱 알지. 촬영 중엔 늘 평소보다 진하게 마시잖아. 그나저나 아까, 우성이한테서 톡 온 것 같더라.”
“그래요?”
한율은 조유찬에게 맡겨놓은 핸드폰을 받으며 개인 대기실로 향했다. 어차피 별 용건 아닐 테니 여기에서 봐도 되겠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과하게 눈치를 보는 단역 배우들의 태도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고, 불편해서.
-[달냥이 언제 데려와?]
한율은 대기실 의자에 앉고 나서야 답장을 보냈다.
[내일 제주도 내려가면서 달냥은 왜 찾아.]
-[가기 전에 충전해야지!]
-[아니면 내가 오늘 데려올까? 호 형 차 타고]
사실 달냥은 오늘 촬영이 끝나면 데려올 예정이었다. 드라마 촬영으로 바빠져서 집을 자주 비우긴 하겠지만, 그래도 다른 멤버들이 있을 테니.
‘오늘 야간 촬영이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나리란 보장도 없고, 맡겨볼까.’
[어머니한테 먼저 연락하고]
-[ㅇ]
잠시 후, 학교 세트장에서 촬영을 마친 한율은 폐건물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오디션에서 작가의 요구로 선보였던 씬을 촬영하기 위해서.
“안녕하십니까. ‘형호’ 역을 맡은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한율은 죽은 사람 역할을 할 단역과 인사를 나눴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해지기 전에 리허설 가볼게요!”
“네!”
한율은 공사가 중단된 것처럼 만들어진 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대본엔 10층 정도 높이의 폐건물로 나와 있지만, 실제 세트는 4층으로 촬영이 이뤄지는 곳도 2층이었다.
함께 계단을 오르며 내부를 둘러본 조유찬이 중얼거렸다.
“여기 해 떨어지면 진짜 으스스하겠다. 밤에 촬영해야 하는 씬 맞지?”
“네. 그런데 예전에 데뷔 앨범 재킷 찍은 곳이랑 비슷하지 않아요?”
“아, 그때 거기. 호가 뭐 나올 것 같지 않냐면서 무서워했었···.”
우웅.
“아잇, 깜짝야! ···하하.”
진동 소리에 화들짝 놀란 조유찬은, 바로 뒤따라오던 스태프들에게 민망한 웃음을 흘리곤 가방에서 한율의 핸드폰을 꺼냈다.
“네 핸드폰 같은데?”
핸드폰엔 달냥을 무사히 숙소로 데려왔다는 길우성의 톡이 들어와 있었다. 심통이 잔뜩 난 달냥의 사진도 함께.
-[달냥 진짜 웃김ㅋㅋㅋㅋ]
-[숙소에 너 없는 거 알고]
-[한참 동안 네 방에서 너 어디 갔냐고 찾으면서 울다가 우리 쫓아다니면서 항의하더니]
-[나랑 호 형 솜방망이 펀치로 때림ㅋㅋㅋㅋㅋ]
-[안 아픈 게 킬포다]
-[(이모티콘)]
정신 나간 인간은 어디에나 있다
밤. 검붉은색 렌즈를 낀 서한율이 쭈그리고 앉아 손끝에 묻은 액체를 할짝거린다. 달콤한 무언가를 취하는 여우처럼 요사스러운 눈빛과 몸짓. 그러나 전화 상대방을 향해 내뱉는 웃음소리와 말투는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천연덕스러웠다.
“히, 괜히 전화했다 싶죠?”
인간을 오랫동안 관찰한 구미호가 둔갑하면 저런 모습일까.
지켜보던 분장팀 스태프는 홀린 듯이 서한율을 바라보다, 문득 불어온 바람에 부르르 떨었다.
‘오늘 정말 춥네.’
그러나 그보다 더 얇은 교복 차림의 서한율은 끝까지 집중을 놓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 밑창을 확인, 바닥에다 피를 슥슥 문질러 닦는데도 호흡이나 발음이 뭉개지지 않았다.
“정말 보답하고 싶으면 빨리 우리 회사에 입사해요. 그리고 내 눈과 귀가 되어주는 거지.”
또한 태연하게 옮기는 걸음은 마치 사뿐사뿐 조용한 여우. 이후 CG로 아주 희미하게 구미호의 꼬리를 넣어주지 않을까.
또 다른 카메라에 미소 짓는 서한율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크, 완벽하지 않아요?”
분장팀 스태프는 서한율의 대사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정말 완벽하다.
“OK, 컷!”
한참 동안 카메라 속 서한율이 멀어지는 걸 지켜보던 PD가 외쳤다. 동시에 서한율이 이쪽으로 휙 몸을 돌렸다. 조금 전 사람을 현혹하던 묘한 분위기는 저 멀리 내던지고 종종종 웃으며 다가온다.
“해 떨어지니까 정말 춥네요.”
“하하. 모니터링하고, 다시 갈게요.”
“네.”
잡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숨죽이던 다른 스태프들도 그제야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분장팀 스태프는 10여 분째 차갑고 지저분한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있는 단역을 살폈다.
“진짜 추우시겠다···. 그래도 아직은 일어나시면 안 돼요. 아시죠?”
“······.”
단역은 입을 움직이는 대신, 눈을 천천히 끔뻑거리며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닥이나 그의 옷에 번진 가짜 피, 분장이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 다시 갈게요!”
모니터를 확인한 PD가 외치고, 서한율이 다시 단역 곁으로 다가왔다.
‘와···.’
다급히 카메라 밖으로 나오던 분장 스태프는, 옆을 지나치는 서한율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몇 초 사이에 서한율의 표정과 분위기가 영락없이 ‘형호’로 바뀌어 있었다.
시신 역할 배우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무미건조하다.
‘괜히 사람들이 연기천재돌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구나.’
서한율은 이번에도 단 한 번의 NG 없이 OK 사인을 받았다.
폐건물에서의 촬영이 끝났다.
한율은 시신 역할 단역을 찾아가 인사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배님.”
“하하, 아닙니다. 이게 제 일인데요. 괜찮습니다. 한율 씨도 정말 수고 많았어요.”
그러나 단역의 안색은 분장보다 더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10분 넘게 차가운 바닥에 꿈쩍도 못 하고 누워있었으니 당연했다. 한율이 도착하기 전 살해당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까지 치면, 더 오랫동안 서늘한 가을바람에 노출되었을 터.
“여기까진 자차로 오셨어요?”
“아뇨, 촬영팀 버스 타고 왔어요.”
“그럼 저희 차 타고 같이 가요. 집이 서울 맞으시죠?”
“네? 맞기는 하지만···. 아뇨, 왔을 때처럼 촬영팀 버스에 타면 됩니다. 이제 옷도 갈아입고 분장도 지워야 해서요.”
한율은 웃으면서 말했다.
“기다릴게요. 느긋하게 하세요.”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단역 배우는 끝내 호의를 거절해서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로 사양하곤 먼저 자리를 떴다.
잠시 후, 차에 올라타자마자 조유찬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부담스럽나보다 한율아.”
“왜들 그럴까요. 아까 실내세트장에서도 그러던데.”
한율은 학교 세트장에서도 NG 한번 낼 때마다 자신의 눈치를 보던 단역 배우들을 떠올렸다.
“다른 매니저들이랑 스태프들이랑 대화하면서 들었는데, 지금 단역들한테는 한율이 네가 대하기 어렵게 느껴지나 봐.”
“그렇게 느껴지도록 행동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3년 전 <하울링>을 촬영할 때부터 한율은 상대가 보조출연자든 단역이든, 마주치면 늘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촬영장에 지각한 적도, 갑질은커녕 짜증 한 번 낸 적이 없어 평판이나 소문도 나쁘지 않을 터.
더군다나 <서울 구미호>는 오늘이 첫 촬영 아니던가.
“백호 영화제에서 신인남우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아이돌로서도 인기가 많아. 또 아버지는 KBC 국장이야. 그런데 막상 촬영장에서 보니까 아주 겸손하고, 차분하고, 조용해. 당연히 어렵게 느껴지지. 함부로 건들면 안 될 것 같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니까.”
“······.”
“어떤 단역 배우 매니저도 그런 말 하더라.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여러 배우를 케어해봤지만, 만약 자신이 한율이 네 매니저였으면 편히 대할 엄두가 안 날 것 같다고.”
“과장이 심하네요.”
이쪽에 잘 보이기 위해 아첨한 느낌이 든다.
“아니야, 한율아. 아이돌로 활동할 때야 늘 방긋방긋 허술한 면모, 귀여운 면모, 인간적인 면모를 자연스럽게 내보여야 해서 부각이 안 될 뿐이지, 연기할 때 너? 완전 카리스마 쩔거든? 아까 촬영할 때 다른 스태프들 표정 못 봤어?”
이후 조유찬은 30여 분 동안 한율에게 ‘넌 연기 천재다’라는 요지의 칭찬과 매니저로서 뿌듯한 감정을 늘어놓았고, 가만히 듣던 한율은 따뜻한 히터 공기에 취해 까무룩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어스래빗 숙소.
“그럼 일주일 푹 쉬고 오겠습니다, 멤버들.”
과하게 멋을 낸 길우성이 작은 캐리어 가방을 현관 옆에 세웠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밤에 어디 나다니지 말고, 인터넷에 오를 만한 짓 저지르지 말고.”
“한동안 쉰다고 너무 기름진 거 많이 먹지 말고, 몸 굳어지지 않도록 꾸준히 운동도 하고”
“자기 전에 스트레칭하는 거 잊지 마라.”
“스타아이에 접속하는 건 좋은데, 위치 드러나는 사진이나 말은 올리지 않도록 조심해. 주변에 민폐 끼칠 수 있다.”
“올 때 제주 유채꿀.”
“나는 맛있는 거 아무거나.”
므앙.
줄줄이 길우성에게 잔소리 및 요구 사항을 읊은 멤버들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
해외도 아니고 제주도, 그것도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가는 것뿐인데, 나도 한마디 해야 하나.
한율은 길우성의 손에 끼워진 팀 반지를 힐끗하곤 입을 열었다.
“동창들 조심해라. 정신 나간 인간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문단속도 잘하고.”
큰 기대는 안 하지만 일단 들어보겠다. 라는 표정으로 한율을 바라보던 길우성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 자식은 가란 거야, 말란 거야.”
길우성은 내일 정글로 떠나는 이건우와 서로 잘 다녀오라며 가볍게 포옹하곤 숙소를 나갔다.
한율은 벽에 걸린 달력을 살폈다.
‘웬만하면 반지를 빼지 않으니, 별일은 없겠지.’
고작 일주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 * *
“기분이 이상해, 형.”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
차를 탔을 때 막 들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길우성은 텅 빈 뒷자리를 돌아보았다가 옆에서 운전하는 윤승우를 바라보았다.
“혼자 어딘가를 간다는 게 막 어색하고 허전해.”
“어디를 가든 항상 옆에 멤버들이 있었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그것도 있고···.”
길우성은 뒷말을 흐렸다. 오래간만에 부모님을 만난다는 생각에 들떠 잠시 잊고 있었다. 선녀보살의 경고를.
『절대 그 애 영역 밖으로 벗어나지 마.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으면.』
‘나한테 제주도는 객지가 아니지만, 서한율한테는 활동 영역 밖인 객지나 다름없는데···.’
조금 전 서한율의 충고도 새삼 마음에 걸린다.
‘동창을 조심하라니. 꼭 나한테 칼 들고 찾아오는 놈이 있을 것 같단 소리로 들리잖아!’
그리고 전혀 그럴 가능성이 없다 확신하기 힘든 게 문제다. 서한율 말마따나, 정신 나간 인간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어릴 적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도 그랬다. 괴롭히고 싶어서 괴롭혀놓곤 ‘다 네가 잘못한 거야. 너 때문이야. 너한테 문제가 있어서 그래.’라며 이유를 뒤집어씌웠다. 없으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만들었다.
나이를 먹는다고 그 사고방식이 쉽게 달라질까.
‘여전히 내 탓을 하는 녀석들이 있겠지. 저질렀던 잘못이 드러나 받게 된 비난, 그로 인해 꼬인 일들까지 모두.’
길우성은 며칠 전에 만난 다섯 명을 떠올렸다. 특히 김지우를 제외한 네 명. 그들 딴엔 최대한 감추려 노력했겠지만, 그래도 슬쩍슬쩍 진심이 엿보였다.
‘씨발, 적당히 좀 하자.’
짜증.
사람은 절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한테 큰 앙심을 품은 사람이 없다곤··· 확신 못 해.’
그렇게 생각하니 또 불안이 밀려왔다.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거면 몰라도, 만약 부모님이 다 잠든 한밤중에 찾아와 집에 불이라도 지르면?
‘아냐.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까진···. 그리고 내가 오늘 제주로 내려가는 걸 아는 것도, 우리 가족이랑 멤버들, 회사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내가 멍청하게 티만 내지 않으면.’
“아이고, 우리 아드을!”
“아이고, 우리 아부지!”
제주국제공항 1층 로비. 길우성은 마중을 나온 부모를 보자마자 촐싹거리며 달려갔다.
와락!
“아이고, 우리 엄무아!”
“다 큰 애가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엄마 눈엔 아직 애라서?”
“그런 얘긴 엄마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우성아?”
히. 길우성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잠시 후, 온갖 나무가 구불구불 길을 감싼 한적한 동네.
현무암으로 된 돌담이 견고하게 쌓인 집 마당으로 들어서며, 길우성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작년 3월, 안무 영상을 찍기 위해 내려온 이후로 1년 반 만에 찾은 본가.
“우리 집은 여전하구낭. 어? 안녀엉~.”
마당 한구석에서 사료를 먹던 고양이가 귀를 쫑긋하며 길우성을 쳐다보았다.
“전에 다른 고양이랑 싸우다 다친 걸 치료해준 후론 자꾸 여기 온다. 그래서 밥 좀 챙겨줬더니 아예 여기에서 살고 있어.”
길우성이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나중에 이사할 때 어떡해? 챙겨주던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건 쟤한텐 생존이 걸린 큰 문젠데?”
길우성의 부모는 내년 1월, 오랫동안 살았던 이 집을 떠나기로 했다. 이유는 몰상식하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
이전에도 길우성의 팬이라며 멋대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만, 최근 인터넷에 길우성의 과거 학폭 피해 사건이 오르내리자 이젠 기자를 사칭한 이상한 사람들까지 찾아와 어쩔 수 없었다.
이웃 주민들에게서 시끄럽다며 항의가 들어오기도 하고.
“데려가야지, 어쩌겠어. 한번 돌봤으면 끝까지 책임지고 돌봐야지.”
“아빠 고양이 털 알레르기 있잖아.”
길우성의 아버지가 씩 웃었다.
“지금 약 먹으면서 적응 기간 갖고 있다.”
“크으. 그럼 쟤 집안에도 들어오는 거야?”
“거실까지만. 밤에도 거실에서 자.”
그렇구나. 길우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방을 뒤적였다.
“···아들. 너 왜 가방에 고양이 간식 넣고 다니냐.”
“필수품이라서?”
제주로 내려오면 며칠 편히 쉬면서 부모님과 여기저기 놀러 다니려 했던 길우성은, 목표를 하나 더 추가했다. 내려온 김에 고양이 ‘삐약’을 안전하게, 완전하게 실내 고양이로 만들겠다고.
부모님이 해준 맛있는 밥을 먹고 난 뒤 길우성은 삐약을 집안으로 유인, 온종일 삐약과 놀아주며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찾아온 밤.
“삐약, 잘 자.”
뺙.
길우성은 자신의 침대 옆 방석에 자리 잡고 눕는 삐약을 쓰다듬었다. 그러곤 조명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아침에 느낀 허전함이 슬슬 다시 찾아왔다.
‘이상하네. 분명 숙소에 있는 방보다 넓고, 매트리스도 푹신하고, 옆에 삐약이도 있는데.’
결국 길우성은 누운 채 핸드폰을 켰다. 시력 교정 수술을 받은 이후로 어두운 곳에서 핸드폰을 하는 행위는 지양했었지만, 너무 심심했다. 그래서 멤버들의 SNS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너튜브 채널 댓글을 살폈다가, 스타아이에 들어가 팬들의 게시글에 댓글을 달며 놀았다.
[우성아 머해??]
-[[Useong]자려고 누웠어용]
[길우성 사랑한다, 진심이다, 보고 싶다.]
-[[Useong]저두용ㅎㅎ]
[어스래빗 내년 시즌그리팅 촬영 마쳤겠지??? 애들 새하얗고 몽글몽글한 분위기로 사진 찍었으면]
-[[Useong]몽글몽글한 우성이 왔어욥(*ˊᗜˋ*)♡]
[애들 술버릇 궁금하다]
-[[Useong]호 형은 –10살이 돼용(폭로)]
ㄴ[으아니?!]
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폭로해도 괜찮은 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YuHo]야ㅡㅡ]
ㄴ[본인 등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시간으로 달리는 웃음 의성어. 길우성 또한 큭큭거리면서 조용히 웃었다.
그때였다.
쿵!
“······?!”
별안간 마당 쪽에서 난 굉음에 놀라 길우성은 벌떡 일어났다. 곤히 자던 삐약도 일어나 창문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부모님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이내 거실 쪽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무슨 소리야?”
“꼭 담에 있는 돌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는데···. 당신은 여기에 있어요.”
길우성은 방에서 나왔다. 아버지가 현관문 옆에 놓인 빗자루를 들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있었다.
그 순간 담 너머에서 들리는 앳된 소녀의 외침.
“야, 이 도둑 새끼야!”
“···악!”
털썩.
“······?!”
5분 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길우성의 집 담 앞에 쓰러진 남자를 살폈다. 쓰러진 남자 옆에는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방이 열려있었는데, 그 안엔 청테이프와 날카로운 흉기, 정체불명의 약통이 들어있었다.
“이 집 담을 넘으려다가 뒤에서 전기 충격기로 공격당해 떨어진 것 같은데··· 아는 사람입니까?”
경찰이 조심스레 남자의 모자를 벗겼다. 고작 스무 살 정도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앳된 얼굴.
가만히 남자의 얼굴을 살피던 길우성은 깊은 한숨과 함께 미간을 구겼다.
“네. 제 초등학교 동창이에요.”
너 같은 쓰레기가 감히
“너랑 동창이라고?!”
길우성의 아버지가 놀란 어조로 되물었다.
경찰이 오고 저 멀리에서 구급차까지 달려오자, 무슨 일이 생겼나 나온 동네 주민들이 수군거렸다.
“네. 그런데….”
길우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작 이놈을 전기 충격기로 잡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목소리는 내 또래 학생 같았는데… 자정이 가까운 이 시간에 우리 집 근처에 있었던 걸 보면 사생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놈을 잡아서 소리만 지르고 도망친 건가? 아니, 그런데 요즘 사생은 전기 충격기도 가지고 다녀?’
“그럼 번거로우시겠지만, 일단 경찰서로 가서….”
어쨌든 지금은 이놈을 처리하는 게 급선무. 길우성은 부모 옆에 붙었다.
“저도 같이 갈게요.”
한율이 길우성에게 생긴 일을 들은 건,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인 30일 오후였다.
“우성인 너희들 놀라고 걱정한다고 당분간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게 숨길 일은 아니잖아. 숨겨질 일도 아니고.”
“…….”
한율은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읽었다.
[[단독]어스래빗 길우성 학폭 가해자, 적반하장 보복 범행 시도!]
[어제 29일 밤, 보이그룹 어스래빗 멤버 길우성이 과거 학폭 가해자에게 보복성 범죄를 당할뻔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중략)
길우성의 본가에 침입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 A씨는 초등학생 시절 길우성을 괴롭히고 따돌린 학폭 가해자 중 한 명으로, 인터넷에 과거에 저지른 학폭 가해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자 평소 길우성에게 앙심을 품었다고 알려졌으며…(중략).
한편 경찰은 A씨를 발견하고 저지한 목격자를 찾고 있다.]
-이 ㅅㄲ 길우성 데뷔했을 때부터 길우성 어릴 때 ㅈㄴ 찌질했다느니 까고 다니다가 커뮤에 지가 한 짓 퍼지고 애들이 피하니까 그때부터 길우성 때문에 인생 꼬였다고, 만나면 가만 안 둘 거라고 개ㅈ1랄 떨고 학교에서 일진 놀이하다가 징계 먹고 인터넷 도박으로 돈 처 날리고 중고사기치고 부모 등골 뽑아먹다가 길우성 내려온 거 알고 강도질하러 갔다는 게 학계의 정설
ㄴ찌질한 건 본인이었고
ㄴ학폭 가해자의 전형적인 루저 인생 코스를 밟는 중이네 한심하다
-담 넘는 범인 막은 거 길우성 사생이라던데ㅋ ‘도둑새끼야!’ 소리 지르고 전기 충격기로 뒤에서 지지고 튀었다고
ㄴ진짜요??????
ㄴ어질어질하네
ㄴ학폭가해강도미수범VS사생임?
ㄴ어.... 음.... 어......?
ㄴ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검에도 다시 길우성의 이름이 올라왔다.
[길우성 학폭가해자], [길우성 보복미수]
한율은 길우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으로 설정된 크리스탈 래빗의 발랄한 노래가 나오다 끊겼다.
-[네 말이 현실이 되었다!]
일부러 텐션을 높인 듯한 장난스러운 목소리.
-[그러나 용서한다, 친구!]
쩌렁쩌렁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한율은 핸드폰을 귓가에서 뗐다가 대답했다.
“멀쩡하면 됐어. 끊어.”
뚝.
“범인은 어떻게 됐어요?”
“아직 경찰 조사 중인데, 이 자식이 자꾸 말을 바꾸는 모양이야. 처음엔 도둑질하러 갔다고 그랬다가, 잠이 안 와 산책하는데 갑자기 전기 충격기로 공격당해 담 쪽으로 쓰러진 것뿐이라고 그랬다가. 어쨌든 지금 우리 회사 일 봐주는 로펌 변호사 쌤이 내려간 상태야. 대표님도.”
“대표님도요?”
조유찬은 머리 위로 검지 두 개를 세워 뿔 모양을 만들었다.
“어. 머리끝까지 단단히 화가 나신 채로. 오 팀장님도 같이 내려갔으니 별일은 없을 거야.”
그러고서 깊은 한숨.
“그리고 다른 애들도 내려간다고 하더라. 3시 비행기라고 했으니까… 지금쯤 공항에 있겠다.”
“건우 형은 아직 모르는 거죠?”
이건우는 <정글 탐험> 촬영을 위해 새벽에 출국한 상태.
“그렇지. 나중에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때 장전 씨가 차분히 알려주기로 했어.”
한율은 촬영 큐시트를 집어 들었다. 오늘 한율의 촬영은 해가 지기 전 끝날 예정이었다.
“저도 오늘 내려갈게요. 8시 비행기가 적당할 것 같네요.”
“뭐? 한율아, 너 내일도 아침부터 촬영 있거든요? 여기 보이지?”
“11시부터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친구이자 같은 팀 멤버가 큰일을 당할 뻔했는데 저만 가만히 있으면 되나요. 건우 형처럼 먼 오지로 날아간 것도 아니고.”
“그래도 괜찮겠어? 많이 피곤할 텐데….”
“형도 길우성 걱정되잖아요.”
“그렇긴 한데….”
조유찬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PD님이랑 팀장님에게 말할게.”
“네. 고마워요, 형.”
한율이 제주도 길우성 집에 도착한 건, 밤 11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와줘서 오히려 정말 고마운걸요.”
길우성의 부모는 한율을 정말 반갑게 맞이했다.
“밥은 먹었니?”
“네, 먹고 왔어요.”
그들에게 오는 길에 사 온 간단한 방문 선물을 건네는데, 길우성이 방에서 나오며 한쪽 코를 훌쩍거렸다.
“안 와도 된다니까 기어코 왔냐. 답지 않게.”
한율은 잠시 길우성을 살폈다. 앞서 전화로 멤버들에게 들은 것처럼 사지도 멀쩡하고 다친 곳도 없었다. 멘탈 상태도 무난해 보이고.
“급히 오느라 속옷이랑 칫솔만 사고 갈아입을 옷은 안 가져왔다. 내놔.”
“…….”
한율이 씻고 나왔을 때 함께 왔던 조유찬은 멤버들이 묵는 숙소로 간 뒤였다. 한율은 길우성 침대 옆에 깔린 이부자리에 앉아, 길우성이 겪은 일을 자세히 들었다.
“이 새끼가 자꾸 말을 바꾸더라고. 전기 충격기에 당한 충격으로 쓰러지다가 담에 있는 돌을 안쪽으로 떨어뜨린 것뿐인데 무슨 주거침입 시도냐, 가방의 흉기랑 테이프는 예전에 캠핑할 때 넣어두고 빼는 걸 깜빡한 거다, 소지하면 안 되는 불법 무기도 아닌데 무슨 문제가 되냐, 약은 자기가 먹으려고 산 거다.”
“…….”
“그래서 변호사 쌤도 난감한 눈치야. 경찰도 마찬가지고. 오히려 그 새끼 지금, 전기 충격기로 공격한 사람 찾아달라고 난리 치고 있다니까? 자기는 길 가다가 봉변당한 선량한 시민이라고? 그리고 더 황당한 건, 이 새끼가 지금 풀려났단 거야!”
“블랙박스나 CCTV는?”
하아. 길우성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놈이 여기 골목으로 들어오는 것밖에 안 찍혔어. 아빠 차 블랙박스는 다른 차가 앞을 막은 상태라 안 찍혔고.”
길우성이 사과패드로 영상을 재생했다. 골목 입구 모퉁이 너머에 세워진 차량 블랙박스였다. 검은색으로 무장한 남자가 이쪽 골목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45초 정도 뒤.”
비슷하게 검은색 옷과 모자, 마스크를 쓴, 상당히 왜소한 체격의 누군가가 급히 골목에서 뛰어나온다.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 사람이 전기 충격기?”
“그런 것 같아. 사건 발생 시각이랑 일치하거든. 그리고 지금 경찰이 이 사람을 찾는 중이야. 우리한테는 중요한 목격자, 그 썩을 놈한테는 폭행 가해자니까.”
“그래도 범인은 내심 이 사람이 잡히지 않길 바라겠네.”
“그렇지 않을까? 분명히 우리 가족 셋 다, 돌이 떨어지는 소리 듣고 10초 정도 있다가 전기 충격기로 당하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거든? 그것만 봐도 그놈 진술이랑 모순되잖아. 그런데 그 새끼는 우리가 멀쩡한 사람을 도둑으로 몰려고 거짓말한다고 박박 우기는데, 진짜 어이없더라.”
“짐작 가는 사람은 없어?”
“처음엔 사생이 아닐까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기 충격기를 갖고 있었단 게 마음에 걸려.”
한율은 무심코 마음속에서 일어난 생각을 말했다.
“널 노리던 또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
“……!”
길우성이 입을 벌리며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는데…? 나, 뭐, 나도 모르게 죽을죄라도 지은 거야? 그래…?”
“…….”
한율은 지구로 와서 길우성을 찾아냈을 때, 잠시 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 척추 신경을 박살 내서 불구로 만들어버릴까 고민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이유로 길우성을 노릴 사람은 없을 터.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를 말해본 것뿐이야.”
그러나 길우성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눈초리로 한율을 째려보았다. 퍽 과장된 표정 연기였으나 진심도 섞인 듯하여, 한율은 작게 한숨 쉬었다.
“작년에 이희우 선배님한테 일어났던 사건 기억나냐? 어떤 여자가 선배님 집 지하 주차장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는데, 선배님에게 화학약품 테러했다고 떠들어서 기사도 났었잖아.”
씩씩거리던 길우성이 미간을 찡그리더니 눈동자를 굴렸다.
“…아, 기억난다. 그게 왜?”
“그 사람, 내 사생이었어.”
“뭐?! …헛.”
놀라 큰소리를 낸 길우성이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닫힌 문과 창문 쪽을 돌아봤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진짜야?”
“혼자만의 망상으로 나랑 선배님 사이를 단단히 오해하고, 엉뚱하게 선배님을 해코지하려 했던 것 같더라.”
“…….”
길우성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했다.
“아직 이 영상 속 사람이 그런 부류인지는 몰라. 하지만 내 말의 요지는, 우리 같은 직업은 많은 관심을 받는 것만큼, 이상한 사람의 표적이 되기도 쉽단 소리야. 당장 남석이 형 물건 훔쳐 갔던 사생을 떠올려봐. 그게 남석이 형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었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우린, 잘못이 없어도 언제나 조심해야지.”
“으음….”
길우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가 인상을 썼다.
“뭐야, 결국 잔소리잖아.”
“알아들었으면 그만 자.”
한율은 길우성의 침대에 사과패드를 툭 던지곤 일어났다.
“나 내일 아침 8시 비행기라 일찍 일어나야 해.”
툭. 조명을 끄고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에 누웠다. 길우성도 구시렁거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니, 그렇게 바쁘면 오지 말지….”
어두워진 방 안. 조금 전 집 앞에 알짱거리던 기자들도 돌아가거나 차에 틀어박혔는지, 고요한 밤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부스럭. 길우성이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당기며 웅얼거렸다.
“그래도 와줘서 고맙다.”
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