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427)

* * *

‘그년만 아니었어도 진짜…!’

벌컥벌컥. 어젯밤, 길우성의 집 담을 넘으려고 시도했던 양상원은 속에서 치솟는 분노와 짜증에 술을 들이켰다.

“후우….”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알짱거리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골목엔 여전히 낯선 차들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었다.

‘찌질한 딴따라 새끼 하나 조지려 한 거 가지고 씨발, 가지가지 하네, 병신들.’

우웅. 그 순간 또 울리는 핸드폰.

대체 어떤 놈이 유출한 건지, 오늘 아침부터 모르는 번호로 욕설이 적힌 메시지와 전화가 꾸준히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과 변호사 전화를 받아야 하는 까닭에 전원을 끄지 못하는 상태.

양상원은 핸드폰을 낚아채며 중얼거렸다.

“그래, 더 보내라, 새끼들아. 고소로 합의금 단단히 챙겨보자.”

그러나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뜨겁게 올라오던 술기운과 분노가 한순간에 싸악 사라졌다.

-[정확히 34,730,300원이다^^]

-[감옥에 간다고 네가 망가뜨린 차가 멀쩡해지진 않아요.]

부모 명의로 끌어다 쓴 각종 카드대금과 대출이야 부모가 어떻게든 해결하겠지만, 술 먹고 운전대를 잡았다가 망가뜨린 차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물며 차 주인은 이 지역에서 알아주는 깡패의 동생.

‘씨발, 진짜 어제 그년만 아니었어도…!’

길우성의 부모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의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음악방송 1위니, 여러 나라로 콘서트를 다녀왔다느니 하는 걸 보면 분명히 돈을 많이 벌었을 테니까. CF도 종종 보이고.

‘그 새끼야 내가 윽박지르면 겁먹고 알아서 내놓겠지. 부모랑 집을 내가 다 아는데.’

하지만 어젯밤, 길우성의 집에 불이 꺼진 걸 확인하고 담을 넘으려던 순간이었다. 분명히 아무도 없던 골목길, 그것도 바로 등 뒤에서 별안간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쿵. 놀라 헛디딘 손에 밀린 돌이 안쪽으로 떨어졌다.

양상원은 담에 엉거주춤 올라간 상태로 상대를 쳐다봤다. 그곳엔 도깨비처럼 시퍼런 눈을 한 작고 왜소한 체격의 사람이 서 있었다.

‘사람이야, 귀신이야?!’

그와 비슷하게 검은색 옷과 모자, 마스크를 쓴 여자가 무언가를 꺼내며 천천히 다가왔다.

『지금 우성 오빠한테 해코지하러 온 거예요? 뒤지실래요?』

양상원은 급히 담에서 내려오려 했다. 귀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파란 눈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그 순간, 여자가 순식간에 달려와 그에게 전기 충격기를 대며 외쳤다.

『야, 이 도둑 새끼야…!』

파지직.

『…악!』

털썩.

그리고 아래로 떨어진 그의 의식이 멀어지는 사이, 아주 희미하게 들린 말.

『너 같은 쓰레기가 감히 지구의 평화를 위협해?』

기억은 그걸로 끝이었다.

양상원은 이를 바득 갈았다. 길우성의 팀 이름이 ‘어스래빗’이었다. 그리고 ‘어스’는 지구를 가리킨다.

‘분명 길우성 팬이 틀림없어. 그러니 조만간 알아서 목격자라고 나타나겠지. 그때 두고 보자, 귀신 눈깔 년아.’

난 다른 게 걱정이다

“그럼 한율이 새벽 6시에 나간 거야?”

31일 낮. 다시 길우성의 집을 찾은 멤버들은 거실에 커다란 상을 펼치고 점심을 먹었다.

“응. 여기에서 공항까지 조금 멀잖아.”

“멋지다, 하뉼. 준비하려면 더 일찍 일어났을 텐데.”

“한율이가 평소 말이나 행동이 무뚝뚝해도 은근히 정이 많다니까. 막 드라마 촬영으로 바쁜 와중에 우성이 걱정된다고 내려왔다 간 거 봐.”

“그나저나 건우 형, 나중에 이야기 듣고 서운해하는 거 아냐?”

“이건우 성격상 서운해하기보다는 바로 못 와서 미안해할걸? 그보다 난 다른 게 걱정이다.”

멤버들의 시선이 박가람을 향했다. 박가람이 젓가락으로 떡갈비를 집으며 말했다.

“이건우, 촬영 도중에 라미네이트 떨어지면 어떡하냐?”

“…….”

“만약에, 어? 거기에서 뭔가 질기거나 딱딱한 생소한 음식을 먹다가 떨어진다고 생각해봐. 정글에 라미네이트 예쁘게 붙여줄 치과가 있을 것 같아? 그리고 고작 그것 때문에 도시까지 갔다 오라고 제작진이 허락해줄까? 그럼 우리 이건우는 촬영 내내 입도 제대로 벌리지 못하다가, 한번 앗차 하는 순간에 바보 같은 얼굴로 찍히겠지? 그렇게 되면 아주 이미지가, 어? 볼만하겠다. 히히.”

“악마다.”

“같은 팀 맞냐.”

“그런데 형들.”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멤버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길우성이 씩 웃었다.

“나 걱정돼서 내려온 거 맞지?”

“일단은 그렇지? 그런데 법적인 문제는 변호사 쌤이랑 경찰분들이 해주시는 거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다, 야.”

“음. 이렇게 우성이네 밥만 축내다 가는 거지. 그런데 삐약이, 보배 가방 깔고 누웠는데?”

“아이, 귀여워라.”

찰칵, 찰칵.

“…….”

어제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괜찮냐고,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따뜻하게 토닥거려주더니.

길우성은 다시 말없이 멤버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 아직 놀란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무섭고 불안한뎅.”

“그래?”

“라이언, 길우성 이마는 왜 짚어.”

“감정은 머리 문제잖아.”

“그래서 한가하면 도와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뭔데?”

길우성이 생글생글 웃었다.

* * *

[어스래빗, 길우성 사고 소식에 제주로 한달음]

[보이그룹 어스래빗이 친형제와 같은 의리를 보여주어 화제다.

지난 29일 밤, 길우성에게 앙심을 품은 과거 학폭 가해자가 흉기를 지니고 길우성의 집 앞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은 어스래빗 멤버들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제주로 내려갔다. 드라마 <서울 구미호> 촬영 중인 서한율 역시 밤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내려갔다가 오늘 31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중략).

한편 A씨는 한밤중 우연히 길우성의 집 앞을 지나가다가 그의 극성팬에게 공격당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어이가 없다, 진짜.”

<서울 구미호> 실내세트장.

촬영 시간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한율은 분장을 마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길우성의 사건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까닭일까. 여느 때보다 스태프를 비롯한 배우들이 한율의 눈치를 살피기는 했지만, 평소처럼 대본을 연구하고 연습한 ‘형호’를 연기했다.

그러다 잠시 쉬는 시간.

“차로 10분 거리에 사는 놈이 하필 그 시간에 우성이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그것도 제일 악질 가해자였던 놈이? 와….”

조유찬이 인터넷에 뜬 기사를 보며 목 뒤를 잡았다.

“아, 뒷골이야.”

“…….”

한율은 레몬생강차를 마시며 대본을 넘겼다.

‘형호’가 속한 영화제작 동아리 <빠밤!>이 1999년도와 2017년 발생한 사건을 모티브로 단편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데, 형호가 2017년도 사건이 벌어진 실제 장소를 섭외하고, 그곳을 살피는 내용이었다.

2017년 가족을 모두 죽이고 자살한 남자가 몸담고 있던 회사는, 극 중 대기업인 ‘한대그룹’. 1999년, 바로 앞집에서 참변을 당한 가족의 가장 역시 한대그룹과 관련된 인물로, 형호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한, 사건 내막을 아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형호가 바로 한대그룹 회장의 손자로 둔갑한 까닭에, 시청자들도 조금 의심할 것이다.

저 구미호가 괜히 저 집안사람으로 둔갑한 게 아니구나.

조유찬이 조용히 대본만 보는 한율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한율아, 이젠 우성이 걱정 안 되니?”

“언론이랑 팬들 모두 길우성을 주목하고 있으니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요. 멤버들도 내려가 있고.”

“그건 그런데….”

조유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모님이 자기 때문에 큰일을 당할 뻔했다는 자책이랑 충격이 마음 깊이 박히진 않을까 걱정된다.”

“옆에서 살펴보고, 힘들어하는 기미가 보이면 상담 선생님께 보낼게요.”

“그래. 드라마 촬영으로 바쁘지만, 그래도 한율이 네가 가장 가까운 친구니까 옆에서 잘 지켜봐 줘.”

“네.”

그날 밤, 다음 촬영장으로 이동 중.

잠깐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오후 시간대에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 알림이 들어와 있었다.

[어스래빗-☆대낮 핼러윈 댄스파티☆]

한창 드라마를 촬영할 때 라이브로 진행했던 모양.

한율은 영상을 재생했다. 예전, 길우성이 춤 영상을 찍었던 돌담이 나왔다.

둥, 두두둥. 조악한 음질의 BGM이 흘러나오며 우스꽝스럽게 분장한 멤버들이 한 명씩 입장한다. 문방구점에서 팔 법한 장난감 요술봉이나 망토, 방패, 직접 만든 것 같은 토끼 가면이나 수염을 달고.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고양이 ‘삐약’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담 위로 올라와 멤버들을 내려다본다.

엉망진창 핼러윈 의상을 입은 멤버들은 진지한 얼굴로 , 과거 길우성이 그곳에서 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뒤의 곡은 한두 시간 정도 연습했는지 얼추 잘 추기는 했지만, 영상은 담 위에서 멤버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삐약이를 클로즈업하면서 뚝 끝났다.

“…….”

참 누가 기획했는지 환히 보이는 영상이었다. 보나 마나 자기 일로 놀랐을 팬들을 위해 길우성이 생각했을 터.

한율은 오늘도 드라마 촬영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전원 버튼을 눌렀다.

“한율아, 오랜만.”

이동한 촬영장에는 또 다른 주연, ‘슬호’ 역을 맡은 이제설이 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아니. 오늘 아침에 민초 산책시키다가 넘어졌거든.”

‘민초’는 그가 키우는 비글 이름이었다.

“저런. 많이 다치셨어요?”

“그냥 멍이 좀 든 정도야. 그나저나 친구는 괜찮아? 실검이랑 기사 보니까 난리 났던데.”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럼 다행이고. 세상에 참 나쁜 사람들이 많아. 그렇지?”

스태프들이 촬영 준비를 하는 동안, 한율은 이제설과 간이의자에 나란히 앉아 대본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어려운 용어가 너무 많아서 큰일이다. 한율아, 나 잠깐 발음 괜찮은지 들어볼래?”

이제설이 대사를 가리키며 영어로 된 범죄심리학 용어를 읽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미국에서 오래 산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려?”

“네.”

이제설이 씩 웃었다. 그러나 조금 불안한지, 그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영어만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서울 구미호>에서 ‘슬호’는 미제사건 전담팀의 자문을 맡게 된 범죄심리학자로, 10년 가까이 미국에서 생활했다는 설정이었다.

오늘은 미제사건 전담팀 형사들과 인사를 나누기 전, 1999년과 2017년에 발생한 두 건의 강남 일가족 사망 사건과 유사한 사건 하나가 더 드러났다는 소식에 현장을 찾았다가 ‘형호’, ‘민해솔’과 마주치는 씬.

드라마로 치면 1화 말미 내용이지만, 한율이 뒤늦게 합류하여 이제야 찍는 씬이기도 했다.

무술팀 스태프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두 분 촬영 들어가기 전에 액션 합 맞춰볼게요.”

“네.”

슬호와 형호는 수백 년 전, 모종의 일로 서로 감정이 상한 채 다투고 헤어져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마주치자마자 이를 드러내고 싸울 예정.

정확히는 형호가 먼저 슬호를 공격해 벌어지는 싸움으로, 구미호답게 직접 몸을 부딪치는 액션보다는 CG를 활용한 도술 싸움이었다.

“한율 씨, 영상만 보고 연습한 거 맞아요? 너무 잘하시는데?”

“역시 무대에서 춤추는 가수라 몸놀림이 가볍고 좋네요. 아, 어릴 때 특공무술도 배웠었다고 했죠?”

지난 한두 달 동안 컴백 준비와 앨범 활동으로 바빴던 까닭에, 한율은 무술팀이 보내준 영상으로 액션 씬을 혼자 연습했었다. 그리 어려운 동작이 아니기도 하고.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촬영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이 장소, 이 시간대에 찍어야 하는 씬을 몰아서 찍기도 하고, 스태프들 정비 시간이나 다른 배우들이 촬영하는 동안 대기하다 보니 시간이 쭉쭉 흘렀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배님.”

“응. 더 있다간 미나랑 마주칠라. 빨리 들어가.”

대기하는 동안 계속 대본만 들여다보는 건 아무리 집중력 좋은 배우라 할지라도 힘들다. 그래서 이제설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시간도 많았는데, 그 역시 현미나가 한율에게 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이 바닥에 만연한 비효율적인 문화를 차근차근 바꿔보자고. 가령, 제 몸이 피곤한데도 일부러 인사하기 위해 찾아가거나 기다리는 등의 행위 말이다.

“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시고요.”

이제설은 ‘형호’의 공격으로 나무에 걸쳐져 있다가 쿵 떨어져, 현미나와 만나는 씬 촬영이 남은 상태.

“응. 모레… 아니, 내일이구나. 내일 보자.”

“네.”

한율은 스태프 한 명, 한 명 일일이 찾아가 꾸벅꾸벅 인사하고 나서 차에 탔다.

“수고했어, 한율아.”

“형도 기다리느라 정말 수고하셨어요.”

조유찬이 반쯤 풀린 눈으로 씩 웃었다.

“OTT 월정액 서비스를 알차게 이용 중이다.”

“운전 제가 할까요?”

“아냐, 아냐. 졸음 껌 씹으면 돼. 걱정하지 말고 자.”

“네.”

하지만 한율은 바로 자는 대신, 실내등을 켜놓고 클렌징 티슈로 메이크업을 지웠다. 숙소에 도착해 씻는 시간을 몇 분이라도 줄이기 위함이었다.

“아, 우성이 사과 녹음 파일 있잖아.”

“네.”

“그거 내일…이 아니라 오늘 아침 되면 녹취록 풀기로 했어. 자꾸 우성이가 과거 피해 사실을 부풀려서 말했다느니, 가해자로 알려진 애들이 실상은 피해자라느니 헛소리하는 것들이 있어서. 녹취록 공개 안 하는 이유를 멋대로 추측하고 떠드는 방구석 악플러들도 있고.”

“풀버전으로요?”

“걔들이 진짜 사과한 내용만. 그리고 우성이네 부모님도 예정보다 빨리 이사하기로 했대.”

“네.”

‘그러고 보니 나도 새로운 집을 알아봐야 하는데.’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튼튼히 정비하고 준비해두려면, 지금부터 슬슬 괜찮은 집을 찾아봐야 할 터.

한율은 날이 밝으면 일단 모친에게 물어보자고 생각하며 클렌징 티슈를 정리했다.

다음 날.

차르륵. 한율은 자동 급식기에서 사료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곤 눈을 떴다. 까득까득. 사료를 먹던 달냥이 귀를 쫑긋하더니, 한율이 깬 걸 알곤 종종종 달려와 침대로 올라왔다.

므앙?

한율은 달냥을 품에 안고 쓰다듬다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낮 1시. 오늘은 촬영이 6시부터라, 3시까지는 여유로웠다.

“일어났어?”

거실로 나가자 소파에 누워있던 강보배가 손을 들며 반겼다.

“형, 언제 왔어요?”

“어제저녁 비행기로 호 형이랑 같이 왔어. 한율이 넌 오늘 새벽 몇 시에 들어온 거야?”

유호는 <뮤직센터> 스케줄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율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대답했다.

“다섯 시쯤이요. 밥은 먹었어요?”

“너 일어나면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지. 뭐 먹을까?”

“형은 뭐 먹고 싶어요?”

“계란말이랑 제육볶음.”

“그럼 그거 시켜요.”

“응.”

강보배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한율은 씻기 위해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다, 무심코 시야를 스친 TV를 다시 돌아보았다.

[Ⅱ]

[차세대 글로벌 걸그룹을 꿈꾸는 소녀들을 기다립니다!]

뮤닷이 원제로에 이어서 이번엔 걸그룹을 만들 모양이었다. 아직 접수 날짜가 한참 남은 걸로 보아, 예선과 프로그램 녹화를 진행하다 보면 내년 여름 즈음이 될 터. 원제로의 계약이 끝날 무렵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엔 조용하네.’

투어를 떠나서 그런가?

그 순간이었다.

“……!”

한율은 덥석 화장지를 집으며 정민솔에 관한 생각을 날려 보냈다. 저 멀리 달냥이 헤어볼을 토하기 위해 몸을 꿀렁거리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각, 호주 시드니의 한 공연장.

VIP 티켓 소지자를 대상으로 한 미니 팬미팅을 마친 원제로 멤버들은, 지친 걸음으로 대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풀썩 드러눕듯 쓰러진 변지욱이 징징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생각이 제대로 안 나냐…. 나 진짜 멍청한가 봐….”

“하하.”

…쾅. 그때 누군가 탈의실 문을 세게 닫았다. 그 소리에 주위를 크게 둘러본 변지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민솔이 형이었지? 무슨 일 있었나? 화난 것 같은데.”

“글쎄?”

“아까 어떤 팬이 한 질문 때문인 것 같다.”

“무슨 질문?”

두 사람의 고개가 라일을 향했다. 라일은 살며시 매니저들을 살피곤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어스래빗과 관련된 소문 진짜냐고, 특히 라이언이랑 사이 나쁘냐고 묻더라고. 그것도 상당히 매서운 눈빛으로 민솔이 쳐다보면서.”

“아이고….”

지구토끼랑 정말 친해?

‘짜증 나.’

타악. 정민솔은 신경질적으로 겉옷을 벗었다.

애초에 해외 인지도는 어스래빗이 높단 건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작은 공연장일지라도, 유럽 투어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것 또한 3년 차 보이그룹치곤 대단한 성과라는 것도.

하지만 비싼 VIP 티켓을 사고 들어온 사람 입에서 어스래빗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정민솔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고작 그딴 걸 물어보려고 여기에 왔다고?’

지금까지 쌓인 임기응변과 경험으로 ‘서로 웃으면서 인사하는 사이에요’라고 웃으며 넘겼지만, 분한 마음과 짜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자그마한 질시도.

‘내 팬들은….’

하. 자신의 팬들을 떠올린 정민솔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대체 왜 쌈닭 같은 애들만 붙어선.’

원제로가 데뷔한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앨범은 발매할 때마다 판매량을 경신하고 해외투어 티켓도 오픈하자마자 동이 났지만, 국내에서 새롭게 유입되는 팬은 줄고 있었다. 기존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팬들 역시 천천히, 조용히 빠지는 중.

하루는 팬 매니저가 이렇게 말했다.

『민솔아, 너 팬들한테 넌지시 메시지라도 줘야겠다. 오죽하면 다른 애들 팬들이 네 팬들 부담스럽고 무섭다고 하겠냐.』

팬이라면 좋아하는 아이돌을 믿고, 앨범과 굿즈를 사주면서 응원해주는 걸로 충분한데, 대체 왜 당사자를 곤란하게 할 정도로 과잉보호하고 나서서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또 같은 그룹 팬까지 공격하고 다니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아까 걔처럼 조용히 묻던가.’

이런 생각까지 들게 되니, 더욱더 한숨이 나올 뿐.

‘매니지 회사도 문제야. 지금 개개인이 가진 인기를 이용해 돈 벌 생각만 하지, 우리 한 명 한 명의 미래를 위한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콘텐츠 대본도 팬들이 원하는 소꿉놀이 장단에 맞춰주는 수준이고.’

정민솔은 감정을 추스르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니 원제로가 해체하고 인기가 떨어지기 전에 나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해. 옛날에 내뱉은 사소한 말실수에 계속 붙잡힐 순 없잖아?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사실 이 생각은 이전부터 조금씩 들었었다. 자존심 때문에 외면하고 있었던 것뿐이지.

그래도 를 촬영하는 동안엔 그나마 말이 통하는 유호와 웃으면서 대화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잘 잡히도록 애썼었다. 표정이 굳지 않도록 계속 미소를 짓다가 얼굴 근육에 마비가 올 뻔한 적도 있었고.

하지만 조금 전 어스래빗 팬의 말을 듣는 순간,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미적지근하게 굴어선 안 되겠구나. 어스래빗 멤버들과 있었던 일이 잘못된 오해이고 루머란 걸 확실히 보여줘야겠구나.

정민솔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정신 차려, 정민솔. 그깟 자존심이 스케줄을 잡아주진 않잖아. 웃어.’

눈꼬리는 순하게 내리고, 입가는 부드럽게 올리고.

WB래빗 연습생으로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아이돌을 꿈꾸며 수없이 연습하며 만든 미소.

정민솔은 그 상태로 탈의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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