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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래빗 서한율, 제주도에서 포착!]
[16일 오후, 어스래빗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제주국제공항에서 포착되었다.
(사진=익명의 제보자)
이날 다른 어스래빗 멤버 길우성과 이건우도 제주에 내려온 사실이 확인되어, 팬들은 제주도에서 비밀 스케줄이 있는 것 아니냐 기대…(중략).]
-길우성 SNS 보니까 서한율은 단순히 휴일이라 한숨 돌리러 간 거드만ㅋ 길우성은 그냥 부모님 보러 간 거고
-기대는 기자 양반이 하는 듯
-휴일엔 좀 냅둬!!!!!!!!!!!!!!
-인기 많아지니 이젠 마음 편히 놀러 다니지도 못하겠네ㅋ 그냥 갠적으로 쉬러 간 것도 사생이고 기레기고 다 따라붙어서 생중계하니
ㄴ능력에 비해 큰돈 버는 거면 감수해야지
ㄴ비단 어스래빗뿐만이 아니라 아이돌 보면서 행복해하는 팬들 많습니다. 다른 사람 행복하게 만드는 게 어디 쉬운 건 줄 아세요? 본인 눈에 탐탁지 않다고 함부로 능력이 어쩌니 평가절하하지 마세요.
ㄴ능력 큰돈 ㅇㅈㄹ 본인은 다른 사람한테 긍정적 효과를 뿌린 적이 있나 참 궁금하다ㅋ 지금도 부정적인 기운을 튀기는데
-별게 다 기사다
-사생활을 만천하에 까발리는 누구 씨들 덕분에 길우성 부모님 결국 오랫동안 추억 깃든 그 집 팔고 이사했답니다^^ 속 시원하세요?
ㄴ딴따라 가족이면 감당해야지^^ 빠순이들 지갑 턴 돈으로 집 사고 차 사고 해외여행 가고 그럴 텐데
ㄴ누가 보면 아이돌이 강도짓한 줄
-요즘 돈 많은 해외 사생들 사람 고용해서 아이돌 일거수일투족 보고 받는다던데
ㄴ예전부터 연예인 쫓아다니면서 찍은 사진이나 영상, 사생활 정보 뒤에서 파는 인간들 은근히 많았음. 심지어 기획사 직원이 팔기도 함ㅇㅇ
“참 비밀이 없는 세상이야. 안 그러냐, 써한?”
17일 낮. 탁 트인 바다와 작은 섬이 보이는 해안가의 카페. 한율과 길우성, 이건우는 야외 테라스에 앉아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한율은 공항에서 찍힌 자신의 사진을 힐끗했다.
“그러네.”
“이 기사를 어제 봤어야 네가 나타난 거 보고 안 놀랐을 텐데. 어? 왜 또 너답지 않게 서프라이즈로 불쑥 나타나고 그러냐. 어?”
어제, 한율은 이건우와 조용히 연락해 둘이 번화가로 나오도록 한 뒤, 길우성 혼자 위험한 상황에 놓이도록 수작을 부려보았다. 그렇게 하면 다시 길우성을 보호하러 나타날까 싶어서.
‘55’와 ‘전기 충격기범’이 동일인이며, 마법사란 사실을 알기 전이었다.
“내 마음이지.”
“그래, 잘났다.”
차칵차칵. 가까이에서 그들을 몰래 촬영하는 카메라 셔터앱 소리나 기척이 느껴졌으나, 세 사람은 태연하게 무시했다.
“그래도 한율이 차 있으니까 편하긴 하다. 택시를 탔으면 이런 곳을 느긋하게 찾을 여유가 쉽게 안 생겼을 거야.”
“왜 그렇게 미터기 요금이 올라가는 걸 보면 심장도 같이 뛰는지 모르겠엉.”
“렌터카 빌리지 그랬어요.”
“우성이가 불안하다고 빌리지 말래.”
“건우 형 평소에 운전도 자주 안 하고, 렌터카 빌리려면 주민등록번호나 핸드폰 번호 등등 다 기재해야 하잖아. 물론 고객 개인정보를 잘 관리하는 업체가 대부분이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우리 막내, 참 신중해졌어?”
“흐. 내 정보가 유출되면, 나뿐만이 아니라 가족들한테까지 피해가 가니까 나부터 조심해야겠더라고.”
“…….”
두 사람이 흐뭇하거나 뿌듯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한율은 조용히 커피를 마시다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향해 핸드폰을 들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딴청을 피웠다. 개중엔 이전에도 종종 봤던 사생 스토커들도 섞여 있었는데, 마법사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직접 발로 뛸 필요 없이, 저런 자들을 통해 이쪽 정보를 쉽게 구하고 있겠지.’
우웅.
한율은 언제 날 잡아서 길우성의 사생 스토커를 한 명씩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금요일 아침 뮤센 스케줄 가기 전이면 잠깐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
언제 만날 수 있냐 물어본 지 한 시간 만에 온 답장.
유상호 이슈가 터지기 전까지긴 하지만, 안인섭은 혼자 잘만 돌아다니던데. 이해원은 왜 이렇게 통제를 받는 걸까.
[네. 22일 전에 스케줄 조정해보고 연락드릴게요.]
-[ㅇㅇ]
그날 밤,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보컬 연습실.
“형, 형, 남석 씨. 혹시 써한한테 말했어?”
차남석은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오는 길우성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뭘.”
언제 서울로 돌아왔냐 묻는 건 패스했다.
“그거 말이야.”
길우성이 문을 닫고 속닥거리듯 말했다.
“써한이 우리 생명줄이라던 무속인 쌤 말.”
“그걸 내가 왜 말해.”
“그렇지? 본인이 알면 효과 떨어진다고 했으니까?”
차남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안 믿는 미신을 왜 서한율한테….”
“형, 써한 덕에 무사히 여기 있는 거잖아. 미국 K-POP 콘서트 때도 써한이랑 같이 가려고 나랑 출발 하루 미룬 거 생각 안 나?”
“…….”
“허세 부릴 때가 아니야, 형님. 내가 어제 무슨 일을 겪은 줄 알아? 들으면 진짜 소름 돋을걸?”
길우성은 어제 제주 시내로 이건우와 함께 나갔다가, 이건우가 자리를 비운 사이 겪은 일을 차남석에게 떠들었다.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날아간 모자를 주우려다 오토바이와 부딪칠 뻔한 일, 근처를 지나가던 화물차 적재물이 떨어져 자신을 덮칠 뻔한 일, 머리 위 간판이 불안하게 흔들린 일 등등.
“그리고 이 모든 이상한 일들이, 꼭 본인이 없으면 내가 위험해질 걸 아는 것처럼 써한이 짠 나타난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멈췄다니까?”
“그거 다른 관점에서 보면.”
차남석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건우 형이 널 보호하고 있었던 거 아냐?”
“헉…?! 뭐야, 그럼 우리 팀에 안전 부적이 둘이나 있는 거야…? 가람이 형한테 말해서, 건우 형도 그 무속인 쌤한테 데려가 볼까?”
“잊고 있나 본데, 건우 형도 가톨릭 신자야.”
“에이, 뭐 어때. 스테파노 씨도 믿는데.”
“나가.”
길우성은 들어왔을 때처럼 이번에도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곤 흐느적흐느적 춤추면서 퇴장했다.
“연습실에 제주 감귤 갖다 놨어용.”
철컥.
“…후우.”
차남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음악 파일을 재생하려다, 닫힌 문을 돌아보며 머뭇거렸다.
‘진짜 서한율한테 뭐가 있나?’
얼마 전, 다른 아이돌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야, 너희 팀 서한율. 걔 기 완전 세다며? 걔만 나타나면 원래 있던 귀신들이 싹 사라진다던데?』
아이돌 중엔 간혹 자신이 ‘그런’ 체질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슬슬 나오기 시작한 소문.
『이거 나 아는 언니가 말해준 건데, 그 언니가 종종 음방 대기실이나 복도 모퉁이 뒤에 이렇게 숨어서 쳐다보는 귀신을 보거든? 그런데 어스래빗만 오면 그날은 진~짜 대기실이고 어디고 다 클린하대.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날짜를 맞춰보니까 그분들만 오는 날만, 정말로.』
나쁜 소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분 좋은 소문도 아니다. 아이돌 이미지에 별반 도움도 안 되고.
‘너무 크게 번지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우웅. 차남석은 진동으로 울리는 핸드폰을 집었다.
오 팀장의 톡.
-[보는 즉시 2층 사무실로.]
“……?”
일요일 밤 9시. 급하게 자신을 호출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차남석은 의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차남석은 오 팀장의 PC 화면을 보곤 할 말을 잃었다. 모니터엔 차남석과 함께 RMMA 스페셜 무대에 설, 걸그룹 ‘에스더즈’ 보컬 ‘디브’의 SNS 캡처 이미지가 떠 있었다.
[오늘은 피부 상태 최상♡]
디브의 셀카. 그녀가 귀에 끼고 있는 피어싱이 상당히 친숙하다.
“…….”
탁. 가만히 차남석을 바라보던 오 팀장이 다음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이번에도 디브의 SNS 캡처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사진이었다. 그녀의 손목엔 차남석이 자주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와 비슷한 디자인, 띠 색이 같은 손목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사랑스러운 하늘♡]
탁. 마지막으로 똑같거나 비슷한 제품을 착용한 두 사람의 비교 사진. 영락없이 커플템을 맞춘 남녀였다.
“사귀니?”
오 팀장의 물음을 듣고 나서야 차남석은 멍하니 벌린 입을 움직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세요. 지금껏 인사 외엔 대화도 나눠본 적도 없고, 무대 연습을 아예 따로 하는데. 더군다나….”
하. 말하면서도 점점 어이가 없어져 웃음이 나왔다.
“저 피어싱, 3년 전에 서한율이 <하울링> 촬영으로 뉴욕에 갔다가 선물로 사 온 거거든요? 손목시계는 중학생 때 쇼핑몰에서 산 싸구려고?”
“그래. 우리도 남석이 네가 디브와 연애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에스더즈 소속사랑 디브에게 DM으로 연락한 상태야. 다음 달 RMMA 스페셜 무대에 함께 설 두 사람인데, 이 SNS를 보면 팬들이 오해할 위험이 크다, 내려달라, 벌써 눈치 빠른 팬들이 캐치해서 우려를 표하고 있다, 협찬이면 협찬 표기를 해달라. 그런데….”
오 팀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안경을 고쳐 썼다.
“이 자식들이 답변이 없어요.”
“하….”
더 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에스더즈는 어스래빗보다 한 달 늦게 데뷔했다.
소속사가 가난하기도 하고 무대 의상 노출이 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노래는 괜찮았다. 음방도 꾸준히 돌고, 부산 아뮤페에도 나오면서 신인치곤 나름 선방하는 듯했다.
그러다 도중에 멤버 중 한 명이 극심한 불안장애로 활동 중단. 이후 에스더즈는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 새로운 음반은커녕 지방 행사만 전전하며 잊혀갔다.
작년, 한 지방 행사에서 비를 맞으며 꿋꿋하게 무대를 하는 모습이 너튜브에서 대박을 터뜨리기 전까진.
여기에 유명 연예인의 ‘이 노래가 좋다’ 언급으로 역주행까지 하면서 다시 살아나는 중이었다. 그렇게 얻은 인지도로 보컬 디브의 노래 실력이 재조명, RMMA 스페셜 보컬 무대까지 서게 된 거고.
“도통 이해가 안 되네요. 이런 짓 같은 거 하지 않아도 RMMA에 서면, 그걸로도 충분히 해외 팬들의 주목을 받게 될 텐데. 오히려 이 방식은….”
차남석에게 악감정이 있지 않고서야, 이쪽 팬들에게 욕먹고 싶어 환장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정말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라면 말이다.
“부르셨어요, 팀장님?”
그때, 사무실로 들어온 크리스탈 래빗의 라나가 곧장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연습하다가 왔는지, 아주 편한 트레이닝 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어, 라나 씨. 내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요.”
“뭔데…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오 팀장과 차남석을 번갈아 보던 라나가 순간 말을 흐렸다. 모니터에 뜬 디브와 차남석의 사진 때문이었다.
“혹시 디브 씨 연락처 알아요? 아니면 에스더즈 멤버 아무나. 아주 심각한 일이에요.”
라나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아…. 모르는데. 다른 애들한테 물어볼게요.”
“네, 부탁할게요.”
라나가 다급한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차남석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협박 우리도 받았어
“으아, 이게 웬 초콜릿이야?”
“스태프분들에게 나눠줄 선물이요.”
월요일 새벽. 한율은 차 트렁크에다 초콜릿 로고가 새겨진 박스를 실었다. 조수석에 탄 뒤엔 조유찬에게 종이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형 거. 면세점에서 적당한 거 하나 골랐어요.”
종이가방 안을 들여다본 조유찬이 활짝 웃었다.
“오, 백팩! 이거 비싼 거 아냐?”
“형이 전에 쓰던 가방, 예전에 저 가드하다가 팬한테 잡혀서 뜯어졌었잖아요.”
“하하. 고마워, 잘 쓸게!”
그러나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조유찬을 바라보았다. 지난 이틀 동안 조유찬도 쉬었을 텐데, 그새 뺨이 핼쑥해진 까닭이었다.
“그런데 잠 제대로 못 잤어요? 안색이 안 좋은데.”
“아니, 잠은 제대로 잤는데…. 그제 내내 복통에 시달렸었거든. 그 여파가 아직 얼굴에 남은 거야.”
“음식 잘못 먹은 거예요?”
“응. 다른 매니저랑 같이 배달 음식 시켜 먹었는데 나만 탈이 나선…. 이것 때문에 어제 소개팅도 망한 것 같아.”
조유찬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시동을 걸었다. 받은 선물을 품에 안은 채 운전하려고 해서, 한율은 그걸 집어 뒷좌석으로 옮겨주었다.
“소개팅은 첫인상이 중요하잖아. 그런데 다 죽어가는 면상으로 비실비실 나타났으니…. 에휴. 연락 안 오는 것도 이해된다.”
“저런. 형은 그분이 마음에 드셨고요?”
“응. 평범하게 직장 생활하는 분인데, 말할 때마다 정말 신중히 생각하고 말하는 게 정말 인상 깊더라고. 원래 본인 성격이 조금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타입이니,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양해도 구하고, 병원에 안 가봐도 되냐, 괜찮냐 걱정해주기도 하고.”
“그런데 그분은 이제설 선배님과 어떻게 연결된 사이에요?”
“제설 씨 스타일리스트의 친구의 언니.”
“아.”
소개팅 결과가 좋지 않아도, 이제설과 딱히 불편해지지 않을 법한 먼 관계였다.
한율은 촬영장으로 가는 동안 조유찬의 소개팅 썰을 마저 더 들었다.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그른 것 같다는 푸념도 세 번이나.
“혹시 나… 못생겨서 차인 걸까…?”
“그건 아닐 거예요. 형이 우리 매니저란 건 아는 거죠?”
“어. 아니? 처음엔 그냥 배우 매니저로 알고 계시더라고. 그래서 너희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더니, 아이돌 매니저 정말 힘들지 않냐고 걱정하시던…. 그것 때문인가?!”
오늘 한율이 오전에 촬영할 씬은 경찰서에서 현미나, 이제설과 삼자대면하는 장면. 세트장은 외관부터 진짜 경찰서 건물과 흡사했다.
한율은 PD와 스태프들, 배우들에게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55’가 길우성에게 따로 접근하지는 않을까. 다른 수작을 부리진 않을까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다. 당장 길우성 사생 스토커를 통해 그쪽으로 정보가 흘러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심하게 흔적만 남기고 숨는 그런 자 때문에 지금 생활을 어그러뜨리자니 자존심이 상한다.
‘만약을 위한 대비도 해뒀고.’
인기 아이돌인 까닭에 일거수일투족 정보가 쉽게 노출되기는 하나, 그러므로 평범한 방법으론 길우성에게 접근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양상원 사건 때문에 이쪽 경계심도 부쩍 강해진 상태고.
“잘 쉬었어요, 한율 씨? 제주도 갔다 왔다면서요.”
“네. 간 김에 제주 특산품 초콜릿 좀 사 왔어요.”
조유찬이 초콜릿 박스를 간이 테이블에다 쌓았다.
“아이고, 안 그래도 되는데…. 정말 고마워요, 한율 씨.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한율 씨.”
조연출이 다른 스태프들에게 손짓했다. 스태프들이 다가와 한율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초콜릿을 하나씩 챙겼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언제 왔는지, 현미나도 그 틈에 슬쩍 끼어서 초콜릿 하나를 집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한율 씨.”
“안녕하세요, 선배님. 일찍 나오셨네요?”
현미나가 경찰서 세트장을 가리키며 넉살 좋게 웃었다.
“여기 내 직장이잖아요. 미리 분위기 좀 잡으려고 일찍 왔죠? 아침은 먹었어요?”
“네, 오는 길에 간단히. 선배님은요?”
“저기에서 샌드위치 먹었어요.”
한율은 현미나와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커피차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이제설의 포토 배너가 걸린 커피차 앞 휴지통엔 이미 빈 일회용 컵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런데, 한율 씨. 혹시 배우 중에….”
주문한 커피를 받고 마실 만한 장소를 찾아 천천히 걷는 중. 현미나가 살며시 목소리를 낮췄다.
“‘이강대’랑 안 좋게 얽힌 적 있어요?”
“……?”
이강대가 누구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한율은 뒤늦게 아 하며 입을 열었다. 한율이 특별출연했던 <장인>에서 ‘곽종무’ 역을 맡은 배우. 백호영화제 시상식 뒤풀이 자리에서 이윤영을 모욕하고, 그도 모자라 술자리에서 한율의 험담을 늘어놓고 이상한 루머까지 퍼뜨린 못난이 이름이었다.
“백호영화제에서 스치듯 인사한 것 외엔 대화 나눠본 적 없는 분이세요. 그런데 그분은 왜요?”
“사적인 자리에서 한율 씨 험담한 것 때문에, 여러 PD님이랑 감독님들한테 찍혔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요. 정확히는 이강대 본인이 ‘그런 것 같다’라고 하소연하면서 퍼뜨리는 것 같지만.”
한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분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분에 대해 한마디도 한 적이 없거든요.”
“배우란 게 겉으론 고아해 보여도, 속으론 자기보다 실력 좋고 잘나가는 사람을 보면 배알이 뒤틀려 못 견디는 사람 천지라 그래요. 그런 부류 중 한 명인 거죠, 뭐. 더구나 한율 씨 같은 경우엔 아버지가 방송국 국장님이시니까, 그 역풍을 노리는 것일 수도 있고.”
단순한 사람들은 ‘당연히 국장 아들이 아빠 믿고 갑질하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걸 되레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이 은근 많았다. ‘너 나 무시하기만 해? 갑질했다고 폭로할 거야!’라고 눈을 부릅뜨는 사람들.
한율이 이미지가 생명인 아이돌이기 때문이었다.
부친 덕에 가끔 소소하게 특혜받는 건 사실이지만.
한율은 현미나의 의심에 동조하는 대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전에 그 일 때문인가….”
“무슨 일이요?”
“이강대 선배님이 저랑 윤영 선배님을 부도덕한 관계인 양 떠든 게 SNS에까지 퍼져서, 회사 측에서 법적 대응을 시사한 적이 있었거든요.”
현미나가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못났네요. 그러면서 오히려 한율 씨 때문에 찍힌 것 같다고 떠들다니….”
“안녕하세요!”
그때 멀리서 이제설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의 손에는 한율이 가지고 온 초콜릿이 들려 있었다.
“지각생입니다!”
큐시트에 기재된 촬영 시작 2시간 전. 오늘도 주연 배우들이 모두 일찍 출근해, 촬영 또한 자연스레 빨리 시작되었다.
* * *
‘아, 머리야….’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일까. 이해원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그러나 마음 놓고 아픔을 표현하기보다는, 조용히 눈을 떠서 주위부터 살폈다.
다행히 객실엔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이해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이채현이 갑자기 이곳 풀빌라로 그를 불렀다. 도착했을 땐 명품으로 치장한 20대 중후반 사람들이 신나게 파티 중이었는데,
『야! 우리 멍멍이, 조온나 잘생겼지?!』
거나하게 취한 이채현이 큰소리로 외치며 이해원을 안았고, 소원 등처럼 예쁜 조명이 둥둥 뜬 수영장에 같이 빠졌다.
그 뒤론 엉망이었다. 옷을 제대로 말릴 틈도 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반강제로 술을 계속 받아 마셔야 했기에.
‘뭐 실수한 건 없겠지?’
이해원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발견하곤 두 눈을 질끈.
“하….”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솔직히 처음 이채현을 만났을 땐, 안인섭의 말처럼 얼마 못 가 지겹다고, 재미없다고 내쳐질 줄 알았다. 그러나 벌써 3년째. 이채현은 심심할 때마다 이해원을 불렀다.
매미 날개를 뜯는 아이처럼 태연히 담뱃불로 지지기도 하고, 어쩔 땐 침대로 유혹하기도 하고, 평범한 연인처럼 데이트하자고 하기도 하고, 그러다 짜증 나는 일, 화나는 일이 있으면 감정 쓰레기통으로 대하며 때리기도 하며.
‘대체 언제까지….’
먼저 떨어지고자 하는 낌새를 조금이라도 보이면 얼마나 잔인하게 나올지 뻔히 예상되기에, 이해원은 오늘도 속으로만 간절히 바랐다.
이채현이 얼른 나에게 질렸으면 좋겠다고.
이해원은 천천히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씻기나 하자. 술이 조금 묻기는 했지만, 옷도 멀쩡…. 어?’
그 순간, 옷에 술이 묻게 된 상황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시끄러운 음악 속. 시야에서 사라진 이채현을 찾기 위해 움직였을 때였다. 술잔을 들고 비틀비틀 다가오던 상대와 부딪치며 술이 옷에 묻었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사람, 분명히….’
걸그룹 감성소녀 멤버, 순형이었다.
풀썩. 이해원은 침대에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망했다.’
순형이 음방 MC인 자신을 절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더구나 그녀가 말도 많고 개념도 없는 건 돌판에서 아주 유명한 사실.
‘어떡하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이채현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바로 순형의 입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내 아주 문제 있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단 생각이 들어 고개를 털었다.
‘따로 조용히 부탁하자. 순형 선배님도 파티에 온 걸 보면…. 그런데 누구랑 온 거지?’
파티에 참석한 사람 대부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숫자가 많지 않아 지금도 대충 기억이 났다. 그러나 순형과 사귄다고 알려진 스포츠 선수는 없었다. 순형도 썩 즐거워하는 기색이 아니었고.
‘하….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이해원은 재차 한숨을 쉬며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 씻고 나왔을 땐 침대에 새 속옷과 옷이 놓여 있었다. 이해원은 놀라지 않고 순순히 그것들을 걸쳤다.
우웅.
이채현의 톡.
-[식당으로 내려와.]
객실을 나오자 건물 내부 그 어디에도 간밤에 벌어진 파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창을 통해 보이는 수영장 역시 푸른 물이 깨끗하게 반짝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식당에 놓인 긴 테이블에는 간밤의 파티에도 있었던 남자 둘, 여자 한 명이 더 앉아있었다. 그들은 이해원을 힐끗하곤 말없이 무시했다.
챙. 이채현이 젓가락으로 그릇을 쳤다.
“씨발, 지금 내 남자 무시하냐?”
“…하이.”
“…굿모닝.”
“어떻게 아침에도 그렇게 잘생길 수 있어요? 앉아요, 편히.”
“앉아.”
“…….”
어젯밤엔 멍멍이라고 소개하더니.
이해원은 어색한 미소로 꾸벅거린 후 이채현 옆에 앉았다. 요리사가 내려놓는 음식은 보기만 해도 얼큰한 해장국이었지만, 먹다가 체할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조용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쌍꺼풀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하고 못생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 너희 그 얘기 들었냐? 정원그룹, 완전 이상한 협박 받고 있다는 거?”
“무슨 협박?”
“전에 정원그룹 차남 정이장 사건 터졌었잖아. 그런데 누가 그 직후에 정이장 핸드폰 털었나 보더라. 해킹으로.”
“으, 나 그 사람 진짜 싫어.”
해장국을 들이마시던 여자가 진저리를 쳤다.
“마흔 다 되어가는 애 딸린 아저씨가 자꾸 우리 파티에 끼워달라 그러는 거, 완전 징그럽지 않아?”
“아, 말 끊지 말아봐. 아무튼 이 해킹범이 정이장도 아니고 정원그룹 회장한테, 폰에 있는 것들 다 풀리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자기 요구 들어달라고 했단다.”
“무슨 요구. 빨리 본론.”
이해원은 수저와 식기가 부딪치지 않도록 조용히, 천천히 밥을 먹었다.
“대한민국 곳곳에.”
남자가 그들을 한차례 둘러보곤 목소리를 깔았다.
“핵폭탄도 견딜 수 있는 방공시설을 지어라. 그것도 1년 안에, 비상식량이랑 물품까지 꽉꽉 채워서.”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데없이 웬 핵폭탄? 미친 거 아냐?”
“아오씹.”
그 순간 이채현이 돌연 쌍욕을 내뱉었다. 낄낄거리며 비웃으려던 여자가 얼른 입을 다물며 이채현의 눈치를 살폈다.
이채현이 미간을 깊게 찡그린 채 수저를 내려놓았다.
“우리도 비슷한 협박 받았는데. 같은 새낀가?”
별일 없지?
22일 아침. 이해원이 다니는 샵의 루프탑카페.
아직 이른 시간이고 주로 샵 손님을 상대로 영업하는 곳이라 그런지, 야외 테이블 자리에 앉아있는 손님은 이해원 한 명뿐이었다. 한율은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에요, 형.”
“응? 응, 오랜만이야.”
이해원은 한율이 악수를 청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일어나 손을 맞잡았다. 손을 과하게 씻고 닦던 습관이 조금은 나아진 건지, 생각만큼 거칠진 않았다.
“머리 색 바꿨네요?”
한율은 예전에 JE에게 했던 것처럼, 살며시 그에게 마력을 흘려보냈다.
“응. 슬슬 컴백 준비 단계라. 한율이 넌 오늘 촬영 없어?”
“오후에 잠깐 있어요.”
‘…역시.’
JE나 박가람처럼 ‘그런 것’에 예민한 체질도 아닌 것 같고, 자신에게서 특이한 기운을 느낀 적도 없는 것 같아 별반 기대하진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이해원은 자연스럽게 악수하던 손을 뗐다.
‘이해원에게 마법사 소질이 있다 확신하고 그런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니야.’
이는 ‘55’가 이해원과 접촉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상대가 아이돌이니 일반적인 접근이 어렵긴 하겠지만, 마법사 아닌가.
‘…아니. 길우성의 예전 집처럼 CCTV가 드문 곳이면 몰라도, 어디에 카메라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복잡한 서울에선 함부로 행동하기가 힘들긴 하지.’
팬 이벤트 때 가볍게 하이터치를 하기는 하지만, 한율의 경우에도 마력을 흘려보내 체내의 마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는 데에 2초 정도가 걸린다. 그러니 한율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마법사라면 상대를 더 오래 붙잡고 집중해야 할 터.
“이거, 제주도에서 사 온 선물이에요.”
한율은 이해원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가지고 온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핸드크림이네? 고마워, 잘 쓸게.”
주위에 아무도 없겠다, 안이 환히 보이는 실내에서 커피를 만드는 직원과도 거리가 멀어, 한율은 편히 이해원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만 아직도 개인 외출 금지에요? 다른 MOHE 멤버들은 휴일에 자유롭게 놀러 다니는 것 같던데.”
“금지는 아닌데… 사장님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해서.”
이해원이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휴일에 나와봤자 딱히 갈 데도, 만날 사람도 없거든. 고은훤도 알바하랴, 연기 공부하랴 바쁘고. 나도 휴일에 놀기보다는 나한테 필요한 연습이랑 공부하는 게 좋기도 하고.”
한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시궁창에서 빠져나올 생각 없냐고 물었을 때 이해원은 아직 무섭다고, 고민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도 본인 나름대로 생각하는 게 있을 터.
“그런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야?”
“형, 전에 받은 이상한 메시지요. 그거 아직 폰에 있어요?”
“응. 잠깐만.”
이해원이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내밀었다.
-[호그○트에 입학할 생각 없어요?]
받은 날짜는 10월 11일.
“형 핸드폰, 본인 명의죠?”
“응.”
“이 메시지 받기 전후로 이상한 일은 없었고요?”
이해원이 ‘55’에게 이 메시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전화로 물어본 질문. 이해원은 그때처럼 기억을 더듬다가 부정했다.
“전에 통화할 때도 말했지만, 딱히 없었어. 번호가 유출될 만한 일도. 우리는 택배나 배달 음식 주문할 때도 항상 매니저 형 번호를 쓰거든. 왜? 굉장히 이상하고 수상한 사람이야?”
한율은 바로 어제, 최은후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생 스토커가 이젠 하다 하다 대포폰까지 쓰는구나. 진짜 명의자는 노숙자고, 이걸 처음 가지고 있던 곳은 이래저래 뒤가 구린 대부업체더라.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있다면… 여기가 9월 초에 도둑이 들었었다네?』
“네. 사정상 자세히는 말 못 하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 만약에 이 번호가 아니더라도, 이상한 메시지가 또 오면 그땐 저한테 연락해주세요.”
“응, 그럴게.”
“다른 사람한텐 비밀로 하고요. 우리 번호를 쉽게 수집한 걸 보면 근처에 있는 것 같거든요.”
“응.”
이해원이 진지한 얼굴로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은 그런 그를 가만히 보다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돌려주며 물었다.
“그나저나 최근에 다른 별일은 없어요? 이런 이상한 메시지 말고.”
통상적인 안부. 마침 카페 직원이 나와 그들에게 직접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응. 인섭이 형도 요즘…. 감사합니다.”
이해원은 직원이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대답을 이었다.
“게임에 빠져 사느라 잠잠해. 담배랑 술도 예전보다 많이 줄여서 상태도 좋아졌고. 다른 일이라면….”
아. 이해원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이상한 소문 하나 들은 거?”
“이상한 소문이요?”
“응. 며칠 전에 사장님이 불러서 갔다가… 어찌어찌하다가 들은 이야긴데, 정원그룹 회장 아들 정이장 있잖아. 포토그래퍼 김 쌤 폭행한 사람.”
“네.”
“누가 그 사람 핸드폰을 해킹했대.”
커피를 들던 한율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핸드폰… 해킹이요?”
“응. 잘은 모르겠지만, 폰에 악성 코드를 심어서 저장된 사진이랑 영상, 초코톡 대화 등등을 빼돌리는 방법이 있나 봐. 그런데 이 해킹한 사람이, 그거 다 까발려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우리나라 곳곳에다 핵폭탄 견딜 수 있는 방공시설을 지으라고 요구했대.”
“…….”
생각지 못한 곳에서 선물처럼 훅 들어온 단서.
한율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 몇 개가 맞춰졌다.
‘왜 이걸 생각 못 했을까.’
이해원과 헤어지고 나서 차로 돌아온 한율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인터넷으로 ‘핸드폰 해킹’을 검색해보니, 무심코 내려받은 파일 속 숨겨진 악성 코드가 정보를 빼돌린다는 등 온갖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핸드폰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담겨 있는가.
자주 접속하는 사이트나 SNS ID, 비밀번호, 은행 정보, 사진, 동영상, 메모, 사적인 대화, 전화번호, 통화 녹음 파일 등등. 그만큼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현대인의 필수품이었다.
‘만약 내 핸드폰도 해킹당했다면.’
한율도 아침에 눈 뜨자마자 하는 일이 핸드폰 확인이었다. 손에 쥔 채 잠든 적도 많고, 안에는 미발표된 곡 음원이나 대본 사진까지 넣고 다닌다.
지금까지 이상한 메시지 링크를 클릭하거나 쓸데없는 앱을 설치한 적은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
‘더 큰 문제는, 해킹 위험성을 알았다고 해서 안 쓸 수가 없는 물건이란 사실이야.’
한율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핸드폰을 가방에 처박았다.
‘나보다 약한 마법사라고 무시할 때가 아니었어.’
상대는 한율이 문외한인 전문 기술을 이용해 대기업을 농락하는 중이었다. 길우성만이 아니라 한율을 포함, 다른 멤버들에게 붙은 사생 스토커나 홈마의 핸드폰까지 환히 들여다보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대체 어떤 자일까.’
왜소하고 작은 체구. 그리고 여자.
길우성의 말에 따르면 목소리가 앳된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상대에 대한 정보가 모일수록 의문도 하나씩 늘어난다.
‘그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왜 우리를 가만히 두는 거지? 어스래빗이 망하게끔 조작하거나 사실처럼 교묘히 위장한 악성루머를 뿌려 매장하고 따로 떨어뜨려 놓는 게, 그쪽에서도 길우성과 접촉하기에 편할 텐데?’
한율은 이유를 추측해보면서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내비게이션에 미리 입력해 둔 목적지를 터치했다. 며칠 전부터 라이언과 박가람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카스텔라 전문점이었다.
‘어쨌든 핸드폰부터 바꿔야겠어.’
이미 안에 담긴 것 모두 털렸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날 밤 10시, 이건우가 촬영한 <정글 탐험>이 방송되기 전.
본방 사수를 위해 일찍 숙소로 귀가한 멤버들이 거실로 모였다. 작은 테이블에는 한율이 사다 놓은 여러 종류의 카스텔라와 차가 놓였다.
“잘 먹을게, 한율아.”
“이예에~ 카스테엘라아~.”
“고마워, 하뉼 형님.”
“네.”
“응? 써한, 폰 바꿨냐?”
소파에 앉은 한율은 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어.”
“최신 기종? 형이 한번 봐도 돼?”
“보기만 하세요. 이상한 거 내려받진 마시고.”
“이 형님을 뭐로 보고!”
그러면서 박가람이 가장 먼저 한 짓은, 본인의 셀카 촬영.
찰칵.
“서한율 새 폰 첫 셀카 주인공은 나다! 오, 자체 필터 기능 좋고~.”
“…….”
“박다람이, 초등학생이냐? 이리 줘 봐.”
찰칵.
“나도, 나도.”
“그다음은 저요.”
“어휴, 형들이 되어가지곤 동생 새 폰에다 무슨 짓들이야. 난 메이플 필터로 해 줘.”
“<정글 탐험> 본방을 기다리며 단체 컷!”
찰칵, 찰칵.
“…….”
한율은 광고 시간 5분 37초가 지나고 나서야 핸드폰을 돌려받았다.
긴박감 넘치는 BGM으로 시작된 방송.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하이라이트 장면이 빠르게 흘러나왔다. 땀으로 흠뻑 젖은 이건우가 어깨와 팔 근육을 뽐내며 신중히 나무를 타는 모습도.
[으아아…!]
멀리에서 잡은 정글 포커스에 이건우의 함성이 쩌렁쩌렁 울린다.
박가람이 카스텔라 한 덩어리를 통째로 베어 물었다.
“오우, 벌써 부담스러운걸?”
“건우 너 여기에서 더 벌크업 하면, 너만 이미지 동떨어질 수 있단 거 알지?”
“걱정하지 마. 근육을 조금 더 슬림 탄탄하게 다듬으려고 계획 세우는 중이거든.”
“그런데 카스텔라 먹어도 돼?”
“아직 계획 단계라고. 내 거 내려놔라?”
BGM이 사그라지고 까맣게 된 화면에 흰색 자막.
[2019년 10월 11일.]
[새로운 탐험 대원 첫 미팅]
SBC <정글 탐험> 회의실이 나왔다. 가장 먼저 이건우가 소심하게 인사하며 등장.
[안녕하세요.]
TV 속 본인을 보자마자 이건우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와, 정말 부담스럽다. 아니, 메이크업 왜 저렇게 진해?”
“저 때 미팅, 사녹 끝내고 바로 갔었잖아.”
“눈가에 반짝이도 안 떼고 갔네.”
“분명히 SBC로 가는 도중에 거울을 봤는데, 왜 저거 붙인 걸 신경을 안 썼지?”
“그걸 우리한테 물어보면.”
이건우 소개 영상으로 무대에서 복근을 드러낸 채 격렬하게 춤추는 모습, 랩하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다시 회의실. 카리스마 넘치던 무대 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제작진의 말에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심스레 묻는 이건우.
[그 예방접종 주사… 그거 많이 아파요?]
[이건우(만22세) 한창 주사가 무서울 나이]
멤버들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멤버들의 셀카 사진을 살피면서, 기존 핸드폰에 있던 것 중 어떤 파일을 옮겨야 하나 고민하던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참 평화롭다고.
게이트가 열리면 길우성을 단속하며 지구 멸망을 적극적으로 방조할 자신. 길우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게 분명한 지구인 ‘55’.
불리한 건 한율이었다.
상대방은 이쪽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데, 이쪽은 상대방의 정체가 감도 잡히질 않으니.
‘이대로 느긋하게 있어도 괜찮은 건가.’
므앙. 한율의 무릎에 누워있던 달냥이 폴짝 내려가 카스텔라와 포크에 관심을 보였다. 킁킁.
“달냥, 안 돼.”
퍽. 탱그랑!
“아닛, 왜 멀쩡한 포크를 바닥에 내동댕이치세욧!”
“와, 냥아치다.”
곧이어 다른 게스트의 미팅 영상이 지나고, 10월 29일. 이건우가 정글로 출발하기 전날 밤, 숙소에서 짐을 챙기는 셀프 카메라 영상이 흘러나왔다.
[므앙, 므앙.]
[달냥이 너도 정글 가게?]
[므앙.]
영상 속 이건우는 짐을 챙기다가 달냥을 가방에서 꺼내는 행위를 반복했다. 멤버들이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
한율은 방송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자리를 지키다, 뒷정리를 멤버들에게 맡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밤 특유의 검푸른 빛에 잠긴 방 안. 등을 댄 문 너머에서 멤버들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먹어, 살쪄! 어차피 팅팅 부을 거, 몇 그램 보탠다고 안 될 건 뭐요!
‘휴식.’
천천히 한숨을 내뱉는 한율의 눈에 은은한 푸른빛이 서렸다.
‘이쯤에서 끝낼까.’
그 순간이었다.
우웅.
“……?”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사생 스토커일 수도 있고, 그자일 수도 있다.
한율은 망설이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서한율? 너 왜 전화 받아.]
“……?”
전화를 건 사람은 스타믹스의 JE였다.
“전화하신 분이 왜 전화를 받냐고 물어보시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죠.”
-[아니, 처음 보는 번호일 거 아냐. 그런데 바로 받는 게 이상해서. 뭐 하냐?]
“그냥, 이제 자려고요. 선배님은 전화 연결이 안 되던데, 번호 바꾼 거예요?”
오늘 이해원을 만나고 나서 한율은 진짜 마법사 소질을 보유한 JE에게 연락해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건 ‘없는 번호입니다’ 안내.
-[실수로 떨어뜨려서 액정이 완전히 나갔거든. 그리고 오늘 입국해서 기기 바꾸는 김에 번호도 바꿨는데….]
하던 말을 흐리는 JE.
“바꿨는데요?”
한율이 묻고 나서야 머뭇거리던 JE가 말을 이었다.
-[갑자기 너한테 전화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뭐 별일 없지?]
아직 확정된 건 아니야
“…….”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한율이 처한 상황과 생각을 알고 묻는 것 같은 타이밍이라.
‘유달리 촉이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여보세요? 서한율?]
“선배님.”
-[어.]
한율의 눈에 아른거리던 푸른빛이 사라졌다.
“드라마에 카메오 출연 안 하실래요?”
며칠 전, PD가 넌지시 말했었다. 이야기가 너무 무겁게만 흘러가지 않도록, 그리고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 장면으로 구미호 회담 장면을 넣고 싶다고.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미리 약속받고 싶어서요.”
-[뭔가 순서가 뒤죽박죽인 것 같은데…. 대사 한 줄 이하도 가능하냐?]
“네, 아마도.”
-[그럼 생각해볼게.]
“네. 쉬세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어. 너도 잘 자라.]
통화 종료. 한율은 작게 한숨을 쉬며, 다리에 비비적거리는 달냥을 쓰다듬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