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427)

* * *

‘환장하겠네, 진짜.’

정이장은 입고 있던 코트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그러곤 담배를 꼬나문 채 진열장에 놓인 새 위스키를 깠다.

담배 한 모금. 술은 벌컥벌컥.

‘지난번 일 이후로 되는 일이 없어!’

병나발을 분 뒤엔 다시 담배를 깊게 빨아 마시곤 연기를 훅 내뿜었다. 그러다 옆에 놓인 스툴을 걷어찼다. 쾅! 호텔 비품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이 호텔이 바로 정원그룹 것인데, 누가 감히 정원그룹 회장 아들인 자신에게 뭐라 할 건가.

하지만 그런 자신도 음습한 해커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에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아오, 씨발!”

쾅! 쾅!

손가락질받을 법한 각종 갑질이나 지시를 한 정황들, 내연녀들과 나눈 대화, 후원해주던 연예인들에게 전송받은 음란 영상 등등. 이런 것들이야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고 어떻게든 덮어버릴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룹의 중요한 기밀이 담긴 메일이 털린 건 심각한 문제였다. 대외적으로 그룹에서 마땅한 직책이 없는 그가, 그룹을 위해 물밑에서 진행하던 여러 불법 작업 정황과 흔적이 모두 담겨 있었으므로.

그게 전부 터지면 부친이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건 물론, 그것과 연결된 고위 인사 수십 명의 모가지도 한꺼번에 날아간다. 돈도 물론이고.

‘씨발, 내 손에 잡히기만 해! 가족 친척할 것 없이 주변 새끼들 모두 깡그리 불태워 죽여버릴 테니까!’

이미 그룹에서 전문가 여럿을 고용해 해커를 역추적하는 중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 대체 어떤 방법으로 대기업 그룹 회장 침실에 태연히 서류 바인더를 놓고 갔는가였다.

최첨단 보안시설과 삼엄한 경비를 대체 어떻게 뚫고?

어쨌든 해커는 정이장의 메일, 첨부된 파일 일부를 프린트해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지 않고 시간을 끌수록, 중요한 파일을 하나씩 까발리겠다고 선언했다.

처음에 부친은 해커의 개수작에 응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바로 이틀 후, 그룹 소유 언론사에 파일 일부가 제보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을 바꿨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 특히 지진과 같은 재해가 우리나라에서도 해마다 발생하며 큰 인명 피해를 낳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정원그룹은, 지진에도 끄떡없는 안전한 대피 시설을 지으려 합니다.]

정이장은 부친이 휘두른 골프채에 맞아 엉덩이에 시퍼런 피멍이 들었다. 그리고 상처가 낫기도 전, 어기적거리며 방공시설을 지을 부지를 직접 둘러보러 다녀야 했다.

치익. 테이블에다 담배를 비벼 끄면서 그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러곤 이를 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전에 영상 뿌린 것도 그 새끼가 틀림없어.”

“그건 나야.”

“……?!”

아무도 없어야 할 곳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

정이장은 기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훅. 그 순간 모든 조명이 꺼지며 시야가 캄캄해졌다. 창을 통해 들어와야 할 도심의 불빛마저 암막 커튼으로 차단된 것처럼,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누, 누구야!”

덜그럭. 쓰러진 스툴을 세워서 앉는 기척.

정이장은 그쪽을 향해 들고 있던 술병을 던지려 했지만, 스멀거리는 무언가가 순식간에 온몸을 휘감고 압박하여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

뻐끔뻐끔. 그리고 숨은 쉬어지는데, 목소리는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 작은 한숨에 이어 권태로운 목소리.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 그럼 빨리 끝나.”

그 시각, 어스래빗 숙소.

“잉? 달냥이 밖에 없네?”

RMMA 스페셜 무대 연습을 갔던 길우성은, 회사에서 따로 또 연습하다가 멤버들과 함께 숙소로 귀가했다. 그리고 혼자 소파에 누워있는 달냥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써한 아직 안 들어온 거야?”

폴짝. 소파에서 내려온 달냥이 길우성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발에다 코를 대고 킁킁.

“아니, 시간이 몇 신데 지금…?!”

“둬.”

유호가 핸드폰을 꺼내는 길우성을 말렸다.

“한율이, 생각할 게 많나 보더라. 저녁 약속 끝나면 잠깐 밤바람 좀 쐬다가 온대.”

“그래도 시간이 몇 신데….”

길우성의 시선이 벽시계를 향했다. 어느덧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덥석. 이번엔 달냥이 두 발로 서서 길우성의 다리를 잡고 바지 냄새를 맡았다.

“달냥, 넌 왜 그러냥…. 이상한 냄새 나?”

“달냥이, 전에 우리 스페셜 무대 연습하러 다른 기획사 갔다 왔을 때도 집요하게 냄새 맡지 않았나?”

“아. 낯선 냄새가 나서 그렇구나.”

“내가 볼 땐.”

가만히 달냥의 행동을 지켜보던 강보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관리하는 영역이 허락도 없이 낯선 냄새를 묻히고 와서, 지금 검사하는 중이야.”

“나 사람이 아니라 영역이었어?”

그러면서 길우성은 조심스레 쭈그려 앉았다. 그러자 달냥이 이번엔 길우성의 손 냄새를 맡더니, 팔을 잡고선 다른 부위 냄새도 맡았다. 킁킁.

“캔을 딸 수 있는 민둥민둥한 큰 고양인데, 자기 소유물이자 영역인 거지.”

“내가 달냥의 소유물이었다니!”

“달냥 귀여워.”

찰칵.

툭. 한참 동안 길우성의 냄새를 맡던 달냥이 두 앞발을 내렸다. 그러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바닥에 있던 캣닢 인형을 물고선 소파로 올라갔다.

몸 상했을 때 깨지는 돈이 더 커

므앙.

“왔냐?”

새벽 1시 20분. 숙소로 돌아온 한율은 거실에 혼자 앉아있는 차남석을 의아하게 보았다.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TV를 보고 있었다.

“형 요즘 늦게까지 TV 보는 것 같네요.”

“늦게까지 TV 볼 때만 마주치는 거야.”

“보일러라도 켜지. 안 추워요?”

“혼자 있을 때 왜 켜, 가스비 아깝게.”

한율은 조명과 거실 보일러를 켰다.

“형 몸 상했을 때 깨지는 돈이 더 커요.”

“…넌 왜 이렇게 늦었냐? 밖에 바람 장난 아니게 불어서 쌀쌀했을 텐데.”

“잠깐 드라이브하고 밤바람 좀 쐬려는데 비가 오더라고요. 마침 내일 찍어야 하는 씬이랑 분위기가 비슷해서 내친김에 대본 좀 읽다 보니. 당연히 차에 히터 따뜻하게 틀어놓고요.”

“넌 그런 거 전혀 안 무섭냐?”

차남석이 신기하단 얼굴로 물었다.

“비바람 치는 한밤중에 혼자 차에 앉아있는 거?”

“무서울 게 뭐 있어요. 총 든 강도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아닌데.”

“요새 아이돌 사이에 묘한 소문이 돌아. 우리만 음방에 오면 귀신이 하나도 안 보인다는 소문. 그중엔 서한율 너 때문인 것 같다고 딱 가리키는 사람도 있다더라.”

“그거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더 신기한데요?”

한율은 싱겁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욕실에서 씻는 동안엔 조금 전 정이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55’가 과연 정원그룹과 이우그룹. 이 두 그룹에만 그런 협박과 요구를 했을까?’

이우그룹도 비슷한 협박을 받았다는 건 정이장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대기업, 방공시설을 지을 여력을 지닌 또 다른 곳도 협박받지 않았을까? 게이트가 열린 세상을 겪었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지어도 부족할 거란 걸 아주 잘 알 테니.

‘국내부터 지으려는 걸 보면 연고지가 여기란 뜻이겠지. 어쨌든 하는 행동을 보면 실수를 몇 가지 흘렸을 것 같긴 한데….’

이해원이나 JE, 은강, 안세현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부터 시작해, 양상원을 제압하고 대기업을 협박한 방식까지. 뭔가 엉성하고 허술한 티가 난다.

그리고 현재 정원그룹에서 전문가들을 고용해 ‘55’를 추적 중이었다. 그자가 약속을 제대로 지키리란 보장이 없는 까닭이었다. 아마 이우그룹도 독자적으로 추적 중일 테고.

‘하지만 ‘55’는 2년 후 게이트가 열린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 전에 방공시설과 구호물자만 제대로 갖추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커.’

추적에 대한 두려움보다, 아주 강한 제 편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지 않을까.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어느 날 예고 없이 게이트가 열리고 크고 작은 괴물이 쏟아져나온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 날아다니는 온갖 무기. 급기야 핵무기를 사용하는 국가까지 나와, 세상은 순식간에 엉망진창.

이 이야기를 고스란히 믿을 사람은 없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어 신뢰를 얻지 않는 한.

‘하지만 신뢰를 얻기만 하면 천군만마가 되는 상대. 우스꽝스러운 음모론 같은 것도 대비하여 온갖 기관을 만드는 곳. 세계 최대 군사비 지출 1위.’

미국.

‘내가 ‘55’였다면 바로 미국으로 날아갔을 거야. 하지만 아직 국내 대기업을 상대로 협박이나 하고 있단 건, 최근에서야 넘어왔다는 소리겠지. 그리고 그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올해 9월 초. 그럼 지금 상당히 조급한 상태가 아닐까.’

아무리 돌아오기 전, 신뢰를 얻기 위한 정보를 머릿속에 꼭꼭 쑤셔 넣었다고 해도 말이다. 이제 2년도 채 남지 않았으니.

‘아니면 한국만이라도 구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어쨌든 잡아보면 알게 될 터다.

이해원과 JE에게 그런 메시지를 보낸 정확한 이유도.

‘내 주변에 마법사 소질을 지닌 이가 있단 걸 알고, 내 반응을 보기 위해 보낸 것 같지만.’

샤워를 마친 한율은 드레스룸에서 잠옷을 걸치고 나왔다. 그러다 여전히 거실에서 TV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차남석이 심드렁한 얼굴로 소파에 누워 코믹 좀비 영화를 보는 중이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한율은 냉장고를 열며 물었다. 그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건 드문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내일의 컨디션을 위해 억지로라도 잠자리에 들었을 텐데.

“그냥 좀 답답해서. 자라, 늦었다.”

“형도 들어가서 자요.”

“어.”

차남석이 순순히 일어나 TV와 거실 보일러, 조명을 껐다. 한율은 그가 터벅터벅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생수를 챙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한율은 먼저 숙소를 나가려는 길우성과 이건우에게 종이가방을 하나씩 내밀었다.

“JE 선배님이 전해달래요.”

“오!”

“스위스 여행 의리?!”

두 사람은 신이 나 바로 종이가방에 부착된 투명 테이프를 떼어냈다. 그들이 받은 선물은 같은 브랜드에, 디자인이 다른 모자였다. 찰칵, 찰칵. 모자를 쓴 채 제각기 셀카 촬영.

길우성이 소리 내어 톡을 썼다.

“지은 형님, 감사합…니당, 하트, 전송.”

한율은 가만히 두 사람의 핸드폰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남석이 형은?”

“아직 자는 중. 요새 호 형이랑 같이 늦게 출근해.”

“갔다 올게, 하뉼.”

“오늘 촬영도 수고해.”

먼저 신발을 신은 라이언과 강보배가 한율에게 손을 흔들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중에 봐요.”

네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오늘 촬영은 실내세트장이 아닌, 한강이 보이는 도심에서 2시부터 찍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조유찬이 데리러 오기로 한 건 12시.

므앙.

“……?”

달냥이 한율을 부르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의아해서 따라 들어가 봤더니 핸드폰이 진동하는 중. 한율은 달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니.”

지난번, 한율이 부탁한 집 중 적당한 곳을 몇 군데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한율은 시계를 힐끗했다.

“지금 보러 갈 수 있어요?”

가볍게 씻고 나서 외출 준비를 하고 나왔을 땐, 차남석과 박가람이 거실 소파에 앉거나 누워서 TV를 보고 있었다.

아침 인사는 생략.

“형들은 언제 나가요?”

“호 형 일어나면.”

“넌 오늘 촬영 오후에 있다고 들었는데. 벌써 나가?”

“촬영이 아니라 집 보러 가요.”

늘어져 있던 박가람이 벌떡 일어났다.

“나도!”

차남석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질하며 일어났다.

“진작 말하지, 세수도 안 했는데.”

“같이 가잔 소린 안 했는데요.”

“새로 이사할 숙소 알아보러 가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네, 같이 가요. 10분 드릴게요.”

“잇힛힛.”

박가람이 촐싹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집 보러 가자, 집! 일어나라, 맏이!”

잠시 후. 한율은 차남석과 박가람, 유호와 함께 고급빌라 단지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중개사와 인사를 나누고 대문을 통과했다.

박가람이 차남석의 팔을 덥석 잡은 채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여기 엄청 비싼 곳 아냐…? 막 연예인들 사는데 같은데.”

“형도 연예인이에요.”

중개사가 하하 웃었다.

“그래도 지금 보러 가시는 매물은 급매로 나온 터라, 아주 저렴합니다.”

“얼만데요?”

속닥속닥.

“…….”

중개사의 대답을 들은 박가람이 얼었다.

“서울에서 이렇게 조용하고, 프라이빗하면서도 입지 좋은 매물은 정말 찾기 힘듭니다. 보안 시스템도 정말 훌륭하고요. 여기에 피트니스 클럽, 와인 바, 영화관 등 편의시설까지 갖춰져 있고, 주차도 세대마다 5대씩 가능! 그리고….”

박가람이 이번엔 한율의 팔을 덥석 잡고선 활짝 웃었다.

“난 이 집 반댈세.”

“아직 안을 보지도 않았는데요?”

“집세로 얼마를 뜯어갈 셈이냐…!”

근처에 무너지면 위협이 될 만큼 큰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건물과도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여차했을 때 결계를 펼치기에도 무난하다. 바로 앞은 한강에다, 대형 마트와 대학병원도 멀지 않다.

‘입지는 괜찮은데, 확실히 비싸긴 해.’

지금 사는 아파트보다 가격이 몇 배나 더 나가니.

하지만 매물로 나온 집 안으로 들어간 순간, 한율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신축이라 그런지 세련된 인테리어와 색감, 쾌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방마다 바로 보이는 탁 트인 한강.

창을 살짝 열자, 막 비가 그쳐 서늘하면서도 기분 좋은 바람이 들어왔다. 옆에서 중개사도 열심히 바람을 넣었다.

“전용면적 82평! 방이 다섯 개! 욕실도 네 개! 8명의 멤버가 함께 살기 좋다! 집 안에서 숨바꼭질해도, 안무 연습을 해도 될 정도로 아주 넓고 튼튼! 내진 설계 OK! 층간 소음 걱정 또한 저언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친이 얼마까지 보태준다고 했더라.

* * *

[서한율, 드라마 촬영 중 아역 배우와 다정하게 실뜨기]

[(사진 제공=힐링 픽처스)

tv Mu와 OTT 서비스에서 내년 1월 방영 예정인 드라마 <서울 구미호> 제작사 힐링 픽처스에서, 주연 형호 역을 맡은 서한율이 휴식 시간 중 아역 배우와 다정하게 실뜨기하는 사진을 공개했다.]

-미친 서한율 한복 핏

-아역 배우 바라보는 눈에서 다정한 꿀이 뚝뚝ㅎ 우리 율톢은 나중에 좋은 아빠되겠다♡

-저 미소랑 눈빛은 반칙이지

-나 전에 어스래빗 팬미팅 때 사정 생겨서 3살 조카 데리고 갔었는데 그때 떠비 아저씨? 매니저? 분이 괜찮다고 통과시켜주시고 지구톢들도 한 번씩 와서 귀엽다고 악수하고 사진 찍어주고 율톢도 건강하게 자라라고 웃으면서 말하는데 레알찐감동이었음ㅠㅠ

ㄴ애들 너무 착하죠ㅜㅜ

ㄴ어린아이 대하는 거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던데 지구톢이들 모두 심성 이쁜 게 보여서 더 이뻐요♡

ㄴ응 주작

ㄴ너튜브에 ‘어스래빗 팬미팅 조카’ 치면 나온다. 연예인 미담만 나오면 주작 ㅇ1지ㄹ 좀 그만 떨어

‘다행이다.’

기사에 나온 사진을 흐뭇하게 보던 계나리는 다른 기사를 클릭했다.

[어스래빗, 맛있는 간식 차려놓고 <정글 탐험> 본방 사수!]

-본격 민낯 당당하게 공개하는 아이돌그룹

-다른 아이돌들은 메이크업 지우면 누가 누군지 잘 못 알아보겠던데, 어스래빗은 딱 구분감

-진짜 어떻게 이런 애들을 한데로 모아놨지..? 좌기훈 씨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지난주에 모 백화점에서 <서울 구미호> 촬영하는 거 우연히 봤는데 서한율 실물 넘사 수준인 거 보고 진짜 아이돌이랑 배우는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느낌

‘오빠가 계속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어.’

지난번 서한율이 갑자기 제주로 내려갔다는 걸 알았을 때, 계나리는 내심 조마조마했었다. 마법사란 흔적을 남긴 게 잘못된 판단은 아닐까, 오히려 그를 자극해 일이 틀어지는 건 아닐까.

그러나 다행히, 서한율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본업으로 복귀했다. 자신이 남겨놓은 흔적을 절대 못 알아봤을 리 없는데 말이다.

‘본래는… 그때 우성이 오빠한테 큰일이 생기자마자 오빠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종적을 감췄었으니까.’

그리고 2021년 여름, 게이트가 열리고 다시 몇 해.

계나리는 먼 타국에서 자신의 학창 시절 최애돌이었던 서한율을 발견했다.

아주 기적 같은 만남이었다.

“헤헷.”

사진 속 웃는 어스래빗 멤버들을 보며 계나리도 웃음을 흘렸다. 이들의 미소를 지켜냈다는 뿌듯함이 가슴에 따뜻하게 퍼졌다.

‘얼른 오빠한테 사실대로 말하고 칭찬받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서한율과 만나기가 겁도 나고, 할 일도 많았다.

계나리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다른 노트북을 펼쳤다. 일부러 깔아놓은 덫에 정원그룹과 이우그룹이 고용한 걸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하나둘 걸려들어, 자신들끼리 다투고 있었다.

‘쌤들이 몇 년 후에나 만들 미로와 함정을,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어욥!’

이대로 붙잡힐 수는 없다! 나 추적할 시간에 얼른얼른 공사에나 착수하란 말이얏!

계나리는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타닥타다닥.

딩동. 그 순간 또 다른 노트북. 어스래빗 사생 스토커의 초코톡 대화 화면이 실시간으로 떴다.

[호람남율 부동산 아저씨 같은 사람이랑 완죤 비싼 고급빌라랑 단독주택 보러 다님. 슬슬 이사 갈 듯ㅜㅜ]

-[어디어디?]

[첨엔 한남동에서 몇 군데 갔다가 서초동 갔다가 암튼 어지러움]

[(사진)]

[이게 처음에 간 곳. 들킬까 봐 멀리서 찍음]

-[대박]

-[진심 서한율이랑 결혼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될까?]

[ㄲㅈ 내 거야]

힐끗. 잠깐 대화창을 훑은 계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사자들 앞에선 절대 입에 담지 못할 법한 추잡한 망상 대화가 줄줄 이어지고 있었다.

“으.”

아침으로 뭐 먹지

WB래빗 엔터테인먼트.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며 박가람이 중얼거렸다. 서한율은 세 사람을 회사까지 태워다 준 뒤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뭐가?”

“예전부터 우리 할아버지가 했던 말씀이,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댔어.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본인에게 과분한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결국엔 둘리가 된다고.”

“뭔 소리야. 할아버지가 진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라는 말이 섞인 것 같은데요, 형.”

박가람이 차남석과 유호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100억대 집은 우리에게 너무 비현실적이란 소리야.”

“음…. 사실 그렇게 비싼 집에 산다고 생각하니 많이 부담스럽긴 하더라. 한율인 그 집이 퍽 마음에 들어서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그런 데에서 진짜 금수저란 게 티 나는 거징.”

“전 세 번째로 둘러본 빌라가 마음에 들던데.”

차남석이 천천히 걸으면서 말을 이었다.

“위아래가 빈 곳 있었잖아요. 각각 방 4개에 욕실 3개씩 있던 곳.”

“어스래빗 세대 분리? 그것도 좋을 것 같다. 각각 방 하나씩 쓸 수 있는 거잖아.”

“두 집 가격을 합쳐도 처음 본 집 가격에 못 미치던 거기 말이지? 그런데 거기… 주차장 통해서 외부인이 쉽게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

“담 넘기도 쉽겠더라.”

“저도 그게 마음에 걸리긴 하는데….”

그때였다.

삐릭, 벌컥!

“오셨소!”

남자 연습생 안무 연습실에서 돌연 길우성이 튀어나왔다.

“아이, 깜짝이야! 네가 왜 여기에서 나와.”

“일요일에도 열심히 연습하는 우리 후배들 안무 연습 좀 봐주고 있었지? 자! 얘들아, 인사해. 나랑 같이 어스래빗이란 팀에 있는 멤버들이야.”

연습생들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이쪽은 잘생긴 차남석 씨, 이쪽은 쪼꼬미 박다람이 씨, 이쪽은 호구 겸 작곡가 선생 유호… 으, 아, 이거 놓으… 놓아랏!”

말없이 씩 웃던 박가람이 길우성의 목에 헤드록을 건 채 질질 끌고 갔다.

“잠깐 저기 구석에 가서 형이랑 얘기 좀 할까?”

유호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고개를 돌려 연습생들에게 미소 지었다.

“다들 밥은 먹었어?”

“아니요, 아직.”

“그렇구나. 갈비탕 먹을래?”

“네? 네!”

우웅.

“……?”

차남석은 핸드폰을 꺼냈다가, 연습생들에게 인사하곤 걸음을 옮겼다.

“다들 수고해요. …네, 할아버지. …네, 통화 가능해요.”

그날 밤.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연습실로 온 한율은, 길우성에게 잡혀 강제로 바닥에 앉았다. 길우성이 맞은편에 털썩 앉더니 신문하듯 물었다.

“써한 너 이 짜식, 새 숙소 후보지로 백 억대 빌라 보고 왔다며? 사실이냐?”

“어. 그런데?”

길우성이 고개를 숙였다.

“호떡 하나만 사주십시오, 형님.”

“…….”

“한율이 표정 봐.”

한율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형들은 몇 시에 들어갈 거예요?”

오래간만에 8명이 모두 모여, 어스래빗 멤버들은 한 시간 동안 RMMA에서 선보일 무대 연습을 차례대로 했다.

“그럼 우린 먼저 들어갈게.”

“네, 수고하셨어요.”

당장 컴백도 먼 휴식기라 활동기에 비해 바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한가하게 RMMA만 준비하는 건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안무 연습으로 혹사한 몸, 강한 조명과 수면 부족으로 상한 피부를 달래기 위해 중간중간 병원에 케어받으러 다닌다. 그동안 미뤘던 곡 작업을 하거나 레슨을 받기도 하고.

그렇게 아침부터 하루를 알차게 보낸 멤버들이 하나둘 갈 채비를 했다.

“너무 늦게까진 연습하지 말고, 피곤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싶으면 차라리 일찍 들어와서 푹 자. 다친다.”

“네. 내일 봐요, 형.”

“한율아, 난 작업실에 있을 테니까 숙소 갈 때 톡 해. 같이 들어가자.”

“네.”

“나 잊어버리고 그냥 가면 안 돼.”

“네.”

“써한, 오늘은 달냥이 간식 줘도 되냐?”

“안 돼. 낮에 내가 줬거든.”

“쳇.”

자정이 되자 연습실에는 한율과 유호, 차남석만 남았다.

유호가 핸드폰으로 알람을 맞췄다.

“연습은 1시까지만 하자. 한율이 내일도 촬영 있으니까.”

“밤 촬영이라 괜찮아요.”

“그래도 컨디션 챙길 수 있을 때 챙겨둬야지. 아까 보니까 실수도 몇 번 없던데.”

“네.”

“그럼 무대 등장부터 천천히 가자.”

거울과 마주 선 채 뒷걸음질. 그리고 자리에 없는 멤버들의 동선을 머릿속에 그린 채, 유호의 입에서 나오는 박자, 가사와 함께 몸을 움직였다.

“원, 투, 따다다단, 빠지고, 부서진 나리 조각, a haunting image, 각도랑 시선 주의하고, 삼, 켜.”

한 시간에 걸친 추가 연습을 끝내고 난 후엔 잠깐 뻗어있다가, 남자 연습생 휴게실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짧은 순간 동안 땀이 식어 한기가 들었다.

한율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연습실에도 욕실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게. 그런데 욕실 만들려면 대공사에 들어가야 해서, 아예 회사가 이사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여기 건물도 오래됐잖아.”

“…….”

“형은 아직도 고민 중이에요?”

“…어?”

통 말이 없던 차남석이 뒤늦게 반응했다. 아침에 집을 둘러보러 다닐 때는 눈이 호기심,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이런 집을 사고 싶다’란 의욕으로 생기가 돌더니.

“아침에 할아버지랑 급히 통화하는 것 같던데.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

“별일은 아니고….”

잠시 머뭇거리던 차남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씻고 나서 말할게요.”

새벽 1시 30분. 휴게실에서 젖은 머리카락까지 꼼꼼히 말린 세 사람은 유호의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이 아담해, 난방을 켜자 공기가 금세 훈훈해졌다. 여기에 따뜻한 율무차의 고소한 향기까지.

차남석은 율무차를 마시며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바로 어젯밤, 크래의 채아로부터 들은 디브의 사정을.

“거기 회사가 나쁘다느니 하는 생각보단, 나 자신이 너무 쪽팔리더라고요. 잠깐이었지만 ‘쟨 뭔데 내 발목을 잡지?’ 이딴 생각을 했다는 게. 사실 그렇게까지 내가 잘난 것도 아닌데, 팀이 1위 몇 번 했다고 기고만장해진 건가? 아니, 인기가 많으면 사람 함부로 무시해도 되는 권리라도 생겨? 이런 생각도 들고.”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올바르고 건전한 고민이었다. 유호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지, 그의 입가엔 미약한 미소가 걸렸다.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갖고 있었던 거야?”

“그것 말고도….”

차남석은 좋은 성과를 낼수록 아이돌 활동이 아닌 다른 부가적인 문제들이 생기고, 그것에 피곤을 느끼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다가와 고민이라고 했다.

“그 문제들까지 끌어안고 가는 것 또한 이 일의 일부인 건가? 자꾸 그런 의문도 들어서요. 남들도 다 겪는 일인데 내가 유난인가 싶기도 하고.”

“음, 음.”

“…제대로 듣고 있어요, 형?”

“음, 음. 할아버님은 뭐라셔?”

“…….”

차남석은 아예 흐뭇한 미소를 짓는 유호를 불만 섞인 시선으로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버지가 기어코 짐 싸 들고 쳐들어왔대요.”

“저런.”

“그런데 할아버지도 이젠 나이가 있으시니까, 혼자 지내시는 것보단 그래도 낫지 않겠냔 생각이 들어서….”

율무차 한 모금, 다시 한숨.

“다른 한편으론, 아버지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로 건강만 안 좋아지시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고. 그래서 일단 내일 집에 가보려고요.”

“나도 같이 가도 돼?”

“형이요?”

유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희 할아버지에게 인사도 드릴 겸, 만약을 위해서. 가족 간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잖아. 그러니까….”

“네.”

“어?”

유호가 눈을 끔뻑거렸다. 차남석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형이 같이 가주면 안심될 것 같네요. 어느 정도 인내심과 이성의 끈은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 응. 그래. 몇 시에 갈까?”

“12시 즈음에 갈 생각인데, 괜찮아요?”

“응.”

한율은 어느덧 빈 종이컵을 휴지통에 넣었다.

“그럼 이제 들어갈까요?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그래, 가자.”

세 사람은 작업실을 나와 1층 로비를 거쳐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러다 차 키를 꺼내는 순간, 한율은 덜컥 걸음을 멈췄다.

“…….”

“왜 그래?”

“뭔가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나 알 것 같아.”

차남석이 핸드폰을 꺼내며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강보배에게 톡을 보냈다.

[야, 가자.]

-[ㅇㅇ]

유호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우리, 보배한테 두고두고 서운하단 말 들을 뻔했다.”

다음 날.

우웅, 우웅.

밤부터 촬영이라 일부러 알람을 맞추지 않았던 한율은,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손을 더듬거렸다.

간신히 눈을 뜨고 액정에 뜬 낯선 번호를 확인.

“…….”

사생 스토커일까, ‘55’일까. 후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숨부터 내쉰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꺄르르 웃는 소리. 받았어, 받았어! 멀리서 떠드는 듯한 소리, 굉장히 들뜬 목소리.

-[한율이 핸드폰 맞아요?]

“아니요….”

뚝. 한율은 반대로 몸을 돌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우웅, 우웅.

“…….”

아예 방해금지 설정 모드로 해놨어야 했는데. 한율은 뒤늦게 후회하면서 다시 핸드폰을 집었다. 이번엔 조금 전과 다른 번호였다.

“네….”

-[서한율… 씨?]

이번엔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생 스토커가 일부러 남자에게 부탁해 번호를 확인하는 일도 있는 터라, 한율은 이번에도 거짓을 뱉었다.

“아닌데요.”

그러곤 통화를 끊으려 할 때, 상대방이 다급하게 외쳤다.

-[나 이강대라고 하는데…!]

“…….”

한율은 다시 핸드폰을 귓가에 댔다. 자주 듣던 목소리가 아니라서 이강대 본인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번호를 확인하려는 사람이 뜬금없이 그의 이름을 댈 확률은 낮으니.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쩐 일이세요?”

-[어…. 자는 중에 깨웠다면 미안해. 혹시 오늘도 학교 안 나와? 촬영으로 바쁜가?]

불행하게도 자신과 조별 과제로 묶인 이들을 위해, 가끔 온라인상으로만 활동하는 대학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가본 게 언제였더라.

‘생각난 김에 잠깐 얼굴이라도 비추러 갈까.’

이미 학점은 글렀지만 말이다.

가만히 있는다고 ‘55’의 추적 현황에 새로운 단서가 잡히는 것도 아니고, 그자의 경계심을 낮추기 위해 표면적으론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기로 했으니.

“오늘 가긴 하는데…. 무슨 용건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너한테 꼭 할 말이 있어서. 잠깐이라도 시간이 맞으면 만났으면 하는데.]

한율은 예전에 현미나가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율의 험담을 했던 것 때문에 PD와 감독들에게 찍힌 것 같다고, 본인이 하소연처럼 떠들고 다닌다던가.

WB래빗에선 법적 대응을 시사하기만 하고 행동으로 나서진 않았으니, 그 이야기일 터다.

“선배님 계속 학교에 계실 거예요?”

-[어. 연극 동아리방에 있을 거야.]

“그럼 도착하고 나서 연락드릴게요. 이 번호로 드리면 되죠?”

-[어.]

통화하는 동안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한율은 상체를 부스스 일으켰다.

“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씻고 나서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나왔을 때, 숙소는 조용했다.

멤버들은 숙소에 있을 땐 달냥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을 살짝 열어놓는 편인데, 열린 틈 사이로 봤더니 방마다 차남석과 유호, 강보배가 아직 자는 중이었다.

한율은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달냥을 쓰다듬어준 뒤 조용히 숙소를 나왔다.

[정원그룹 회장 차남 정이장 씨가, 오늘 정원건설 대표이사 자리에 취임합니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걸자마자 흘러나오는 라디오 뉴스.

한율은 뉴스를 들으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아침으로 뭐 먹지.’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

“…어?!”

조용히 강의실로 들어와 옆에 앉자,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고재영이 눈을 크게 떴다.

“웬일이냐, 네가 학교엘 다 나오고?! 오늘 촬영 없어?”

그의 큰 목소리에 다른 학생들의 시선도 이쪽을 향했다. 그러곤 놀란 얼굴로 옆에 앉은 친구의 팔을 때리거나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속닥거린다. 몇 명은 신기하단 얼굴로 대놓고 한율을 쳐다보았다.

“있어.”

“그런데 왜 나왔어. 교수님이 부른 거야?”

“밤부터 촬영이라서 겸사겸사. 잘 지냈냐?”

한율은 오면서 사 온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고재영이 히죽 웃더니 주변에 자랑하듯 대답했다.

“그럼! 네 덕분에 오디션 접수 서류에다 쓸 경력이 한 줄 더 늘어나서, 아주 잘 지낸다. 드림래빗 친구들은 어때? 잘 지내? 일본에서 돌아왔어?”

“몰라. 나도 안 본 지 오래야.”

“아, 그렇겠네. …하, 이 녀석 교재 깨끗한 거 봐라.”

곧 교수가 들어왔다. 강의에 앞서 출석 확인. ‘서한율’ 이름을 별 감흥 없이 불렀던 교수는, ‘네’ 하고 들려온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교수가 마이크를 잡은 채 다시 불렀다.

[서한율 학생?]

한율은 재차 손들었다.

“네.”

[TV로만 봤던 터라 긴가민가했네요. 우리 자주 좀 봅시다.]

교수의 웃음 섞인 말에 주변 학생들도 웃었다. 2학기 들어 11월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출석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율은 누군가 이 모습을 핸드폰으로 몰래 촬영하는 낌새를 눈치챘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네, 노력하겠습니다.”

잠시 후, 강의가 끝나고 문이 열렸다. 문 앞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안을 기웃거렸다.

“대박. 우리 학교 다니긴 다니는구나?”

“같이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 들어줄까?”

“나 방금 친구한테 서한율 왔다고 톡 보냈거든? 바로 택시 타고 튀어온다고, 잘 잡고 있으라는데 어떻게 잡아?”

찰칵찰칵.

고재영이 주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본인 동의 없이 사진 찍는 사람 누구시죠?”

1학기 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그동안 인기와 성적이 훌쩍 뛰어서 그런 걸까. 한율은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불어나는 구경꾼들의 시선을 느꼈다.

팬심이 아닌 호기심. 지금 보고 있는 ‘서한율’이란 연예인을 다른 이들의 관심을 얻기 위한 소재, 떠들어댈 만한 화젯거리로 활용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엿보였다.

“한율아, 안녕!”

그때 한 여학생이 다가와 머쓱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나 기억나? 1학기 때 우리, 같은 과목 자주 듣고 조별 과제도 같이 했었는데.”

“물론 기억나지. 오랜만이다, 희정아. 잘 지냈어?”

“응. 전에 톡 답장해줘서 고마워.”

고재영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톡? 무슨 톡?”

“희정이가 나 생일 때 축하한다고 톡 보냈었거든.”

“난 너 바쁜데다가 괜히 방해될까 봐 안 보냈는데…. 이제 점심 먹으러 갈 거지?”

“아니.”

가방끈을 대충 한쪽 어깨에만 걸친 채 걸음을 옮겼다. 한율이 동물원 원숭이라도 되는 것처럼 몰려와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던 이들이 조금씩 물러나며 길을 터주었다.

“이강대 선배님이 연극 동방에서 잠깐 만나자고 하셔서. 안내해줄 수 있어?”

고재영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강대 선배님이?”

이강대와 고재영이 속한 연극 동아리방은 생각보다 넓었다. 한쪽 벽면이 온통 거울로 채워진 연습실에는 온갖 소품이 사물함에 잘 정리되어 있었고, 바로 옆에는 자그마한 회의실도 딸려 있었다.

이강대는 수수한 차림으로 회의실에 앉아있었다.

“이렇게 직접 마주 보는 건 백호영화제 이후로 처음인가? 아,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전화할 때부터 편하게 해놓고 이제 와서?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앉아. 커피 마실래?”

고재영까지 따라 들어왔지만, 이강대는 상관없다는 듯 미니 냉장고에서 캔커피 3개를 꺼냈다.

“괜찮습니다. 따로 마시는 게 있거든요.”

한율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고재영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뭔데? 혹시 또 꿀 들어간 레몬 생강차야?”

“어.”

“수분이 꿀로 절여지겠다, 야.”

“일부러 너 주려고 사다 놓은 건데… 할 수 없지.”

이강대가 작게 한숨 쉬며 커피 하나를 도로 냉장고에 넣었다.

“재영이 넌 커피 마실 거지?”

“넵.”

“그래. 그럼 이거 줄 테니까, 잠깐 문 앞에서 다른 사람 못 들어오게 지키고 있어 줄래? 한율이랑 나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있거든.”

“…네?”

이강대가 웃으며 말했다.

“이따가 맛있는 거 사줄게. 부탁해, 재영아?”

“아….”

고재영이 한율을 바라보았다. 평소 술만 마시면 한율을 깎아내리려던 이강대이기에, 둘이 싸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그러나 한율이 괜찮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이자, 그는 입가를 슬쩍 올리며 커피를 받았다.

“네. 그런데 서한율이 학교 나온 거 보고 몰려온 애들이 있어서, 너무 오래 걸리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야, 내가 얘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냐? 말이 좀 이상하다, 너?”

고재영은 고개를 꾸벅이곤 황급히 동방을 나갔다. 상대가 같은 학과, 같은 동아리 선배라, 그 나름대로 용기 내서 한 말이었을 터다.

“실력이 좋아서 평소 잘 봐줬더니 아주…. 앉아, 앉아.”

“네.”

한율은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보온병 뚜껑에다가 차를 따랐다.

“…….”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이강대가 캔커피를 테이블에 놓았다. 그러곤 한율의 옆으로 다가와 돌연 무릎을 꿇었다.

털썩. 조금 전까지 가볍게 웃던 그의 낯도 진지하게 변했다.

“나 좀 살려주라.”

“……?”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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