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아. 차남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답답하게 꽉 막힌 듯한 가슴은 그대로, 머리만 띵하면서 울렸다.
“제가 오면서 말했죠? 저 사람, 말이 안 통한다고.”
유호는 말없이 차남석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조금 전, 두 사람은 유호의 차를 타고 차남석의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집에 아무도 없어, 밭으로 향했다.
밭에서 일하던 차남석의 조부는 두 사람을 발견하곤 굽혔던 허리를 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냐. 어서 와요.』
알록달록한 작업복을 입은 차남석의 부친도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같이 일하는 친구도 같이 왔네? 반가워요.』
유호는 차 씨 삼대를 보며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잘생긴 차남석의 20년 후, 50년 후를 그린 듯한 사람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니, 뭐 이런 사기 수준의 유전자가…?!’
그리고 20여 분 후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작년, 차남석이 아버지 대신 빚을 갚는 걸 보면서, 그리 좋은 아버지는 아니란 걸 예상하긴 했었다. 하지만 말하는 걸 보니… 대화 자체가 통하지 않는 심각한 마이페이스였다.
『말씀은 바로 하셔야죠, 아버지. 여기 아버지 공간 같은 건 옛적에 사라진 지 오래예요. 그리고 할아버지도 할아버지만의 생활이 있는데.』
차남석이 거실 절반을 차지한 짐을 가리키며 그에게 화냈다.
『이렇게 불쑥 끼어드는 건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뻔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정작 할아버지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고 아버지 멋대로 행동한다는 생각, 전혀 안 드세요?』
『자식이 부모 모시고 사는 게 그리 안 될 일이냐? 난 나중에 너한테 강요도, 바라지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할아버지가 정 걱정되면 근처에 다른 집을 구하시라고요. 여기는 할아버지 집이거든요?』
『네가 전에 나 대신해서 큰돈 갚아준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내 자식이라고 해도, 아버지 모시고 사는 건 내 문제야. 네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란 말이다.』
『여기 아버지 공간 없다고 몇 번을 말해요! 설마 지금 제 방 노리시는 거예요?』
『나 자식 방 꿰찰 만큼 염치없는 사람 아니다. 그리고 거실에서 지내도 충분해.』
『할아버지가 불편해하시잖아요! 한두 살 먹은 아이도 아니고, 쉰 바라보는 아들이 가뜩이나 좁은 집 중앙을 턱 하니 차지하고 있으면! 할아버지 친구분들도 놀러 오기 불편해하실 테고!』
『옛날엔 단칸방에서 다 그렇게 살았다.』
『아, 진짜! 혹시 돈 필요해서 그러세요? 제가 집 구해드려요? 네? 아니면, 또 사고 치셨어요? 이번엔 얼만데요.』
『사람들한테 무슨 욕을 더 먹으려고 자식 돈을 터냐. 됐다. 아버지 집이 있는데 뭣 하러.』
『……!』
자꾸만 원점으로 돌아가는 대화.
유호는 그 순간, 답답함을 못 이겨 훌륭한 성량을 낭비하려는 메인 보컬을 황급히 달래 방으로 데려왔다.
“옛날부터 저랬어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본인 마음속에 답부터 정해놓고….”
후우. 다시 깊은 한숨.
닫힌 방문 너머에서 차남석 조부와 부친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여기 있으면 나도 답답하고 쟤도 답답하다. 뒤늦게라도 정 효도하고 싶으면, 남석이 말처럼 근처에 다른 집 구해서 직장 다니면서 안심을 줘라. 어차피 너 밭일 오래 못 한다.”
“하루밖에 안 지났습니다, 아버지. 저도 고민 많이 하고, 다 정리하고 왔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정리하라고 내가 언제 그랬냐, 오히려 말렸지. 너 여기에서 지내면 내가 불편하다.”
“아니요? 전 아버지 걱정돼서 안 되겠습니다. 이제 연세도 있으신데, 밭일하다가 어디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나가.”
“싫습니다.”
여전히 도돌이표 같은 대화.
유호는 다시 차남석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내가 딱히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그래도 형 덕에 큰소리는 내지 않을 수 있었어요.”
오후에 안무 연습과 레슨, 병원 예약이 잡힌 까닭에, 차남석은 결국 부친을 설득하지 못한 채 집을 나섰다.
대문 밖까지 배웅을 나온 조부가 차남석의 팔을 두드렸다.
“네 아빠는 이상한 소문 나지 않도록 내가 잘 내쫓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냥 있는 동안, 할아버지 몫까지 밭일 열심히 시키세요. 그럼 못 견디고 또 나가겠죠. 반찬도 괜히 재룟값 많이 드는 비싼 거 만들지 마시고요.”
“그래. 춥다, 얼른 차에 타라.”
“할아버지 먼저 들어가세요.”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뵐게요!”
“여기까지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우리 남석이 잘 부탁해요. 운전 조심히 하고.”
“네!”
두 사람은 조부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차에 탔다.
“그런데 너희 할아버지랑 아버지, 정말 미남이시더라. 어떻게 그렇게 좋은 것만 쏙쏙 물려받았어. 목소리까지 정말.”
“그래서 더 한몫한 것 같아요.”
“뭐가?”
안전벨트를 맨 유호는 시동을 걸며 차남석을 바라보았다. 철컥. 차남석이 안전벨트를 매며 한숨을 쉬었다.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 어릴 적부터 주변에서 잘 생겼다고 극찬하고, 가만히만 있어도 사람들이 선물이고 뭐고 다 알아서 해주니까 저렇게 된 것 같대요.”
“아….”
“그러면서 저한테 그러셨어요. 넌 절대 사람의 호의를 함부로 이용하지 마라. 나중에 다 벌 받는다.”
유호가 씩 웃었다.
“남석이 네가 할아버지를 닮아서 천만다행이다.”
“다행이죠.”
차남석은 재차 한숨을 쉬며 시트에 몸을 묻었다.
“이프림 보고 싶네요. 가다가 휴게소에서 라방이나 잠깐 할까요?”
“그럴까?”
한편, 차남석의 조부는 차가 출발하는 걸 보고 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앉아있던 아들이 물었다.
“애들 갔어요?”
“…그래.”
“그 얘긴 하셨어요?”
털컥. 그는 문을 닫으며 대답했다.
“안 했다. 그런 얘길 뭣 하러 해, 애 걱정하게. 차라리 경찰을 부르지.”
“네. 그리고 저도 있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하단 시선으로 쏘아봤지만, 쉰을 바라보는 아들은 뻔뻔하게 흘려넘기며 아이들이 사 온 레드향 상자를 열었다.
“비싸고 맛있는 걸로 잘 사 왔네. 하나 드시죠, 아버지.”
“나가.”
나도 호두과자 좋아해
커뮤니티 사이트 연예인 게시판.
[제목: ㅇㄱㄷ랑 ㅅㅎㅇ 머 있음??]
[오늘 ㅅㅎㅇ 백 만년 만에 학교 나와서 ㅇㄱㄷ랑 단독 면담했다던데]
-듣보는 초성으로 쓰지 마라 모른다
ㄴㅇ1ㄱㄷ 서ㅎㅇ
ㄴ초성 쓰려면 끝까지 써라 일관성 없는 ㅅㄲ야
-ㅇㄱㄷ 평소에 ㅅㅎㅇ 존나 씹고 다녔다고 소문 파다하던데 그것도 모자라서 한창 드라마 찍는 애 학교에 호출한 거? ㅋㅋㅋㅋㅋ 존나 용감한데?
ㄴㅇㅇㅇ이 ㅅㅎㅇ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서 영화까지 꽂아준 건 사실임. ㄱㄱ 종방연 때 ㅇㅇㅇ한테 작업 거는 남자배우들 다 쳐내면서 챙겨주는 거 본 목격자가 한둘이 아님
ㄴ오다리 루머도 사실이었던 거 아냐?
ㄴ정작 그 루머에 ㅇㅇㅇ은 없었어 죄다 아이돌이었지
ㄴ빠순이들 좌표 찍고 몰려오기 전에 지워라 ㄸㅂ가 ㅇㄱㄷ한테도 법적 대응했단 소문 돌고 있다
ㄴ배우한테도 고소장 날린 거임? 존나 멋있네
ㄴ그것때문에 ㅅㅎㅇ 호출한 거? ㅋㅋㅋㅋㅋ
ㄴㅇㄱㄷ 혹시 이ㅇㅇ한테 마음 있었던 거 아니냐?
ㄴ지금부터 둘이 싸워라
-----이상 고소장 받을 ㅂㅅ 명단.
-서씨 실물 사진
ㄴ(사진)
ㄴ이ㅅ낀 학교 갈 때도 분칠하나
ㄴ쌩얼임
ㄴㅅㅂ
SNS에도 몰래 찍거나 대놓고 찍은 한율의 사진과 영상이 금세 떠돌았다. 벤치에 앉아 무료한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학생들과 함께 사진 찍어주는 모습까지.
-TV로 봤던 것보다 실물이 훨씬 더 호리호리한데, 그냥 멸치처럼 삐쩍 마른 게 아니라 관리 잘해서 늘씬한데 탄탄한? 그런 느낌임. 얼굴 개작고 키 큼ㅋ 무엇보다 피부 넘사 수준에다 확실히 연예인 아우라 나더라 좋은 향기도 나고ㅎㅎ
ㄴ고양이 샴푸가 취향이시구나?
ㄴ??? 먼 소리임?
ㄴ지나가던 이프림입니다. 최근에 달냥(율톢 고양이입니다!)이 조금이라도 목욕에 거부감이 없도록, 고양이 샴푸 향과 비슷한 향수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라방에서 직접 말해줬어용!
ㄴ역효과 날 것 같은데
ㄴ다행히 효과는 긍정적이라고 합니당!
“이래서 인기가 너무 많아도 안 좋아. 어떻게 5분 전에 있었던 일이 벌써 SNS에 퍼지냐?”
고재영이 한율에게 보여주었던 핸드폰을 회수했다. 한율은 말없이 커피에 올려진 휘핑크림을 빨대로 툭툭 건드렸다. 분명히 조금만 뿌려달라고 했는데, 아이스크림처럼 굉장히 높이, 아주 듬뿍 쌓아놨다.
“이강대 선배님은 뭐래? 아, 말하기 곤란하면 하지 않아도 되고.”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옆 테이블과 불과 1m도 떨어져 있지 않은 카페. 한율은 빨대 끝으로 크림을 살짝 떴다.
“어. 말 안 할게.”
“…어, 그래.”
이강대가 술자리에서 한율을 입에 올려 깎아내리던 건, 고재영만이 아니라 이미 다른 사람들을 통해 알게 모르게 퍼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일도 언젠가 본인이 떠들고 다니겠지만, 굳이 자신이 나서서 말하고 싶진 않았다.
이강대가 무릎까지 꿇고 사과했다는 걸.
『선배님이 저에게 어떤 편견을 가지든, 싫어하든 그런 건 선배님의 마음이니 상관없어요. 하지만 혼자만의 생각을 객관적 사실인 것처럼 주변에 말하고 다니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고, 그에 관해서도 저보다 먼저 사과받아야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요.』
한율은 이 뒤에 덧붙인 말만 들려주었다.
“만난 김에 엉뚱한 오해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
“오해? 무슨 오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난 그런 게 있더라고.”
“아니, 넌 가만히 있는데 왜 자꾸?”
『정말… 나에 대해 누구한테도 말 한 적 없어…?』
놀랍게도 이강대 본인이 정말로, 자신이 한율을 험담했던 것 때문에 섭외가 뚝 끊기고, 이 바닥 관계자들이 저를 피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모르겠다, 나도.”
우웅. 한율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 큼지막하게 뜬 이름에 고재영의 눈이 커졌다.
“헉! 이제설 선배님…?!”
“네, 선배님. …네, 괜찮아요. …네, 나중에 뵙겠습니다.”
통화는 짧게 끝났다.
고재영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뭐야? 제설 선배님이 뭐래?”
“국화빵이랑 호두과자 좋아하냐고 물으시는데.”
“…으음?”
그날 밤, <서울 구미호> 촬영이 진행될 L백화점. 임시 주연 대기실로 들어가자 고소한 냄새가 한율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것 때문에 낮에 전화로 물어보신 거예요?”
“응. 조금 식었지만 맛있어, 먹어봐.”
테이블 한쪽에 국화빵과 호두과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이제설이 일회용 젓가락을 내밀었다.
“일반 세트장이었으면 바로 앞에 간식차가 서서 막 만들어진 걸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여긴 마땅히 세울 자리가 없어서 조금 떨어진 곳에다 세웠거든. 주차장은 안전상의 문제로 화기 사용이 불가능하고.”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이제설은 조유찬에게도 젓가락을 내밀었다.
“형도 드세요.”
“감사합니다.”
한율은 호두과자부터 집어먹었다. 식긴 했지만 맛있었다.
“오늘 학교 갔다 왔다며? 기사로 떴더라.”
“기자분들이 아주 심심하신가 봐요. 학생이 학교 가는 것까지 기사로 써주시고.”
이제설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사람들, 국민의 알 권리 운운하면서 데이트할 때도 졸졸 따라다니는데 뭘.”
“국민을 붙이는 건 거창하긴 하지만.”
까득. 조유찬이 새로 깐 생수를 한율 앞으로 내밀며 이제설에게 말했다.
“탑급 배우와 아이돌 커플은 뭔가 특별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과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주로 어디로 어떤 데이트를 즐기는지, 무슨 옷을 입는지, 뭘 먹는지 등등. 거기에서 공통점을 찾기도 하고 참고도 하는 거죠.”
“정보의 수요가 있다는 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최소한, 1박 넘는 여행은 따라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설이 허공에다 시선을 던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떤 호텔, 어떤 분위기 컨셉의 객실에 묵었는지 기사에다 구구절절 다 쓰지 말라고….”
“기레기들이 나빴네요.”
똑똑. 조연출이 대기실 문을 노크하며 들어왔다.
“두 분 잠깐 나와보시겠어요? 인사를 드려야 할 분이 계셔서요.”
“……?”
한율과 이제설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조연출이 뒤를 살피더니 살며시 문을 닫고선 다가왔다. 그러곤 조용히 하는 말.
“L백화점의 강수희 사장님이 지금 지점장실에 계신다네요.”
본래 L그룹은 유상호 관련 일이 있고 난 후 드라마 투자 의사를 철회하고 물러났었다. 그러나 배우들이 모두 캐스팅되고 난 뒤, L그룹이 아닌 L백화점에서 따로 힐링픽처스 측으로 연락이 왔다.
아무리 L그룹 쪽에서 갑질 같은 수작을 부리려 했어도, 제작사 입장에선 대기업과 연이 완전히 끊어지는 건 불안한 일. 그렇게 힐링픽처스는 L백화점과 장소 협찬 계약을 체결, L백화점은 극 중 한대그룹 소유의 백화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 내일이 영업 휴무일이라, 오늘은 밤부터 내일까지 촬영이 쭉 진행될 예정.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석 달 전에 만난 L백화점의 장기백을 떠올렸다. 사장의 비서라고 했으니, 그도 오늘 함께 오지 않았을까.
또각또각.
L그룹 회장의 손녀이자 L백화점의 젊은 사장, 강수희는 자신의 구두 굽 소리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괜히 오늘 와선.”
장기백도 조용히 대답했다.
“저는 사장님께서 일부러 오늘 여기 방문하겠다고 하신 줄 알았습니다.”
“내가 무슨 철부지 애예요? 드라마 촬영한다고 신나서 놀러 오게?”
“죄송합니다.”
작년에 L백화점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강수희는 가끔 전국에 있는 지점에 불시방문하곤 했다. 그래야 평소 어떻게 잘 관리하는지 잘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찾아온 지점에서 드라마 촬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지점장은 강수희가 L백화점이 장소 협찬 중인 <서울 구미호> 촬영을 직접 보러 왔구나 단단히 오해, 말릴 새도 없이 PD에게 연락했다.
강수희는 앞서 걷는 지점장의 뒤통수를 보며 중얼거렸다.
“젊은 사장이라고 편견은….”
어쨌든 그렇게 인사받으러 행차한 꼴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이제설과 서한율, 두 남자 주인공이 나온 날에.
이 일이 알려지면 사람들, 특히 지인들이 과연 뭐라고 떠들지… 상상만으로도 벌써 피곤해졌다. 평소, 재계와 인연을 맺으려 기웃거리는 연예인들 극혐이라며 그렇게 떠들었는데 말이다.
‘지금이라도 급한 일이 생겼다고 턴할까? 아냐. 그럼 또 그거대로 온갖 억측이 나올 테니, 딱 3분 만에 인사 끝내고 쿨하게 나가자. 그게 좋겠다.’
강수희는 이미지컨설턴트를 통해 수없이 연습하고 다듬은 담담한 표정과 미소를 준비했다.
그러나 1분 뒤.
“<서울 구미호> 주연을 맡은 배우 이제설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네, 만나서 반가워요.”
이제설을 보자마자 멋대로 더 올라가려는 입꼬리.
재벌가 자제들이 부르기만 하면 좋다고 달려와, 어떻게든 눈에 들려고 온갖 수를 부리던 B급들과는 확연히 다른 아우라가 풍겼다. 그리고 목소리와 발음은 또 어찌나 좋은지.
강수희는 계산된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난번에 촬영하신 드라마 정말 재밌게 봤어요.”
“감사합니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이번엔 아이돌이자 배우인 서한율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울 구미호>에서 또 다른 주연을 맡은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한율 씨. 드라마에서 이 백화점 사장 아들로 나온다고 들었는데, 살살 좀 부탁드릴게요.”
진짜 재벌 3세가 재벌가 자제 역할 배우에게 던지는 소소한 농담. 서한율 또한 이제설처럼 담담히, 잘 보이려 아부하는 낌새 없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작가님께 달린 문제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PD님, 저희 L백화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바로 자리를 뜨겠다는 인사. PD는 이렇게 금방? 의외란 표정을 채 감추지 못하고 지점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이내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네, 있는 그대로 훌륭하고 멋있게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강수희는 끝까지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다른 스태프들에게도 가볍게 묵례하곤 걸음을 옮겼다. 내내 곁에 말없이 서 있던 장기백 또한 사람들에게 묵례하며 그 뒤를 따랐다.
한순간 서한율과 시선이 마주치긴 했으나, 둘 다 모른 척 고개만 꾸벅였다.
이윽고 지점장과 강수희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스태프들이 슬슬 흩어졌다.
“급한 일 있으신가? 생각보다 빨리 가셨는데?”
“제설 씨랑 한율 씨, 가까이에서 한번 보고 싶으셨나 보지. 그렇다고 너무 오래 붙잡으면 말 나올 거 뻔하니까. 아까 못 봤어? 제설 씨랑 눈 딱 마주치자마자 좋아서 입가 움찔거리던 거.”
“그런데 뉴스랑 기사로 봤을 때보다 훨씬 젊던데?”
“서른한 살밖에 안 됐으니까 당연하지. 그런데 너무 어려 보이면 무시당한다고, 일부러 더 나이 들어 보이게끔 꾸미고 다닌다더라.”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말말말.
한율은 ‘L그룹도 ‘55’에게 협박을 받았을까?’라는 작은 의문만 떠올리며 임시 대기실로 들어갔다.
* * *
[원제로, 투어 성공적으로 마치고 오늘 금의환향]
[5인 컴백 MOHE! 한층 성숙해지고 세련된 무대 선보여]
[KBC <뮤직뮤직> MC JE·유린, 커플 같은 환상의 무대 호흡]
[29일 <정글 탐험> 이건우, 뜻밖의 야생미 자랑]
[어스래빗 박가람 팬클럽, 생일 축하선물로 올해도 기부 플렉스!]
잔잔한 나날이 흘렀다.
한때 인터넷 실검을 뜨겁게 달궜던 길우성의 과거 학폭 피해 논란과 양상원 사건은 이젠 커뮤에서도 언급하는 이 하나 없이 잊혔다. 어스래빗 관련 기사 또한 유호의 <뮤직센터> MC 활약과 이건우가 나간 <정글 탐험> 방송 리뷰 정도로 소소.
실검에 이건우의 이름이 오르기도 했지만, 잡음 없는 좋은 관심이므로 멤버들은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서울 구미호> 촬영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율은 시간이 날 때마다 정이장에게 ‘55’의 추적 진행 상황을 보고받거나, ‘55’를 독자적으로 찾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날짜는 어느새 12월 12일.
어스래빗은 <2019 RMMA in JAPAN> 스케줄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했다.
누가 호텔 정보 흘렸냐
“RMMA를 보면 세대가 바뀌는 걸 알 수 있다고들 하던데…. 정말 그런가?”
도쿄에 도착, 이동하는 버스 안.
“라인업 봐. 2년 전에 우리랑 함께 참석한 선배님 중, 몇 분이 남았는지.”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슬프다.”
“…….”
“어? 하뉼 눈 떴다.”
“이제 정신이 좀 드냐, 써한?”
요 며칠 동안 한율은 드라마 촬영 후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안무 연습, 병원, 더 짬이 나면 헬스장으로 향하는 일과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55’도 따로 추적하고, 간간이 정이장도 찾고.
오늘은 밤샘 촬영을 마치고 숙소에서 씻자마자 인천국제공항으로 출발,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기내에서도, 일본에 도착 후 버스에서도, 앉기만 하면 눈을 붙였다. 모자란 잠을 보충하기 위해.
한율은 천천히 눈을 끔뻑거리며 차창 밖을 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오후 2시.
“올해 RMMA 비하인드 영상 초반, 네 분량은 없을 것이야.”
“이동 중 내내 자던 모습만 따로 편집하시지 않을까?”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공연장. 리허설 하고 나서 호텔로 갈 거야.”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 상태를 확인. 피곤한데다 잠을 자서 그런지 조금 부었다.
“그런데 한율아, 너 정말 14일까지 휴일이야? 촬영 없어?”
“네. 대신에 다음 주 아스대 예선 녹화는 못 할 것 같아요.”
연말에는 연말 특집으로 줄줄이 잡힌 스케줄을 뛰어야 하므로, 제작진과 협의해서 미리 촬영 일자를 타이트하게 조율했다.
“네가 고생이 많다. 어스래빗을 위해서….”
“제가 쓸 돈 벌려고 그러는 건데요.”
“아.”
“당사자의 감동 파괴.”
한율은 농담이라는 듯 가볍게 웃곤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들어갔다.
2021년 7월로 끝나리라 여겼던 휴식. 그러나 이젠 언제 끝내게 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쉴 수 있을 때 만끽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서한율’로 살아가는 지금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테니.
[2019 RMMA in JAPAN, 대세 아이돌그룹 총출동]
[1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릴 <2019 RMMA in JAPAN> 참석을 위해 대세 아이돌그룹이 일본으로 출국했다.
공연 라인업에는…(중략).]
공연 라인업을 보자, 잠결에 들은 강보배의 말처럼 세대교체가 진행되는 게 느껴졌다.
2년 전, 그들과 함께했던 블블은 작년부터 멤버들의 입대로 라인업에서 빠졌고, 작년에 참석했던 데뷔 8년 차 온더로즈는 올해 앨범 활동을 하지 않아 빠졌다.
다른 선배 그룹도 마찬가지. 입대나 뜸해진 앨범 주기, 개인 활동, 떨어진 인지도 혹은 부정적인 이슈 등으로 하나둘, RMMA처럼 큰 이벤트 라인업에서 이름이 빠졌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어스래빗처럼 4세대로 분류되어 막 자라나는 아이돌그룹.
그리고 올해 어스래빗은 작년에 받았던 ‘차세대 월드 아이돌 남자그룹상’보다 더 높은 인지도와 성적을 요구하는 ‘댄스 퍼포먼스상’, ‘남자그룹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겹치는 후보는 스카이러너, 원카운트, 원제로.
-원제로야 출발부터 화제성으로 대박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어스래빗은 중소에서 차근차근 올라와서 대형기획사 소속 선배들이랑 비비네.. 뭔가 감동이다ㅜㅜ
-어스래빗 올해 성적 제일 좋았는데 무관이겠네
ㄴ왜요 받을 수도 있죠
ㄴ스카이러너랑 원카운트 제치고? 상 받아도 받는 순간 상대 팬덤이 전쟁 선포해서 급피곤해질 걸요ㅋ 대형기획사가 괜히 대형기획사가 아니죠 골수 내리사랑이 얼마나 지독한데
ㄴ대형기획사 팬덤은 대형 소속이라는 자부심 있어서 그게 무너지면 지들 집 천장이 무너지는 듯한 위기의식 느끼고 집단행동 살벌하게 나서잖아 빌보드 1위 찍은 애들도 초반에 얼마나 씹히고 견제당했는지 생각해보면 진짜ㄷㄷ
ㄴ본인 시험 성적이나 지키고 아이돌 성적 지키는 건지 모르겠다ㅋㅋ 한심 그 자체
ㄴ죽인다...팩폭러..죽인다...
-공연은 공연대로 빡세게 시켜놓고 상 하나도 안 주면 뮤닷 폭파한다.
어스래빗이 공연장에 도착했을 땐 드림래빗의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드림래빗은 현재 일본에서 활동하며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데, 그런 까닭인지 1절은 일본어로, 2절부터는 한국어로 불렀다.
노래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며 박가람이 외쳤다.
“잘한다, 우리 동생들!”
음악 소리가 아주 크고 거리가 있어 드림래빗 멤버들에겐 닿지 않았지만, 바로 옆에 있던 스카이러너 멤버들에겐 아주 잘 들린 모양이었다. 몇몇 멤버들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오랜만이다, 한율아.”
스카이러너 용맹이 한율에게 크게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한율은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이에요, 형.”
“드라마 촬영은 잘 돼가?”
“네. …아, 형.”
“응?”
곁에 카메라가 돌고 있고 다른 아이돌이나 스태프들도 있었지만, 한율은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제안했다.
“드라마 카메오 출연 안 하실래요? 구미호 역으로.”
용맹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어?”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구미호들을 찾는 중인데, 지금 남석이 형이랑 JE 선배님까진 섭외됐거든요. 형도 있으면 딱 조화로울 것 같아서요.”
“어…….”
용맹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엔 다른 멤버와 이야기를 나누는 매니저가 있었다. 지난번에 회사가 멋대로 WB래빗에 연락, <서울 구미호> 카메오 출연이 가능하냐 물어본 일이 떠오른 듯했다.
한율은 손끝으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며 주의를 끌었다.
“형네 회사가 부탁한 것 때문은 아니에요.”
“혹시 하신이한테 들었어?”
“네. 그런데 듣지 않았어도, 형을 떠올렸을 거예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해당 역할에 적합한 사람이 몇 없어서요.”
“그렇구나…. 흐.”
머쓱하게 목 뒤를 긁적거리며 용맹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바로 옆에서 대화를 듣던 하신이 그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용맹 씨 좋아한다.”
용맹이 박치기로 하신을 떨어뜨렸다.
“치워.”
딱.
“아얏.”
드림래빗이 리허설을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웬만한 사람은 WB래빗 소속 아이돌끼리 서로 앨범 작업에 참여하거나, 함께 음원도 내며 서로 친하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두 팀은 편히 인사를 나눴다. 그렇다고 너무 막역해 보이지는 않도록.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들 언제 왔어요?”
“5분 전에? 그런데 안무 조금 바뀐 것 같던데? 원래 이거 아니었나?”
“오늘은 핸드마이크 들고 할 거라서 조금 바꿨어요.”
“그렇구낭.”
“수고하셨습니다.”
한율이 가볍게 인사하자, 박세은도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네. 선배님은 이제부터 수고하세요.”
“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드림래빗 멤버들은 다른 가수들에게도 꾸벅꾸벅 인사하며 퇴장했다. 그러다 공연장으로 들어오던 원카운트 멤버들과 마주쳐, 다시 꾸벅꾸벅.
별생각 없이 그 모습을 보던 한율은 고개를 돌리려다, 이상함을 느끼곤 다시 그쪽을 바라보았다.
“……?”
“왜 그래, 하뉼?”
순간이지만 박세은이 흠칫 놀란 것 같았는데.
그러나 한율은 별일 아니겠지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어스래빗 멤버들이 참여하는 스페셜 무대는 세 개.
하나는 이건우와 길우성이 참여하는 댄스 퍼포먼스 무대, 다른 하나는 차남석이 에스더즈 디브와 함께하는 커플 무대, 나머지 하나는 한율을 제외한 멤버들의 선배 아이돌그룹 커버 무대.
한율은 어스래빗 무대에만 오르지만, 그렇다고 혼자 호텔로 가는 건 위험하다고 하여 내내 의자에 앉아 다른 멤버들의 리허설을 지켜보았다.
“저 두 사람 오늘 처음 무대 호흡 맞추는 거 맞아? 왜 저렇게 잘해?”
지금은 차남석과 디브의 리허설이 진행되는 중. 노래는 남녀가 함께 부르는 유명한 커플 듀엣곡이었다. 나란히 앉은 길우성과 박가람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했다.
“눈 감고 들으면 좋기는 한데… 디브 씨가 남석이 얼굴을 전혀 못 보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그냥 음방이면 몰라도 RMMA에서 커플 노래를 끝까지 저렇게 부르면 안 될 텐데. 해외 팬 대부분은 우리나라 노래 특유의 그 몰입되는 무대 연기도 중요하게 여기잖아.”
“지난번 그 사건 때문인가….”
리허설 끝. 노래를 부를 땐 세상 다정했던 차남석의 표정도 본래대로 돌아와 디브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남은 리허설까지 모두 끝내고 공연장을 나섰을 땐 어느새 해가 저물어 캄캄했다. 그리고 주차장 출구에 모여있다가 버스를 향해 손과 현수막을 흔드는 사람들.
수고했어어!
사람이 모인 곳은 어스래빗이 묵을 호텔 앞도 마찬가지였다.
“남석! 남서억!”
“호야! 유, 호…!”
“건우야, 사랑해!”
따뜻한 히터 공기와 피곤함으로 깜빡 잠들었던 멤버들은 그 소리에 놀라 하나둘 눈을 떴다.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팬들이 버스로 몰려와 외치거나 벌써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탕탕탕! 버스를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라이언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깜짝이야….”
호텔과 가로등의 조명을 등진 채 버스를 둘러싼 팬들의 그림자. 마치 꾸물거리는 거대한 뱀 같았다.
밖에서 목청 큰 누군가가 영어로 외쳤다.
[얘들아, 보고 싶어! 빨리 나와!]
오 팀장이 멤버들이 앉은 뒷좌석 쪽으로 다가왔다.
“좌석에 흘린 거 없는지 다들 잘 챙기세요. 특히 핸드폰. 맡기고 싶은 사람은 저한테 맡겨도 됩니다.”
아이돌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이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물건 1순위가 바로 아이돌의 개인 핸드폰이었다. 경호원들과 매니저들이 있다고 해도, 눈이 뒤집힌 극성팬은 무슨 짓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
밖에선 안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박가람은 차창 쪽을 조심스럽게 힐끗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전에 왔을 때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지난번 월드투어 이후 입소문이 클릭을 부르고, 클릭이 다시 새로운 팬을 유입시키며 해외 팬들이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이후 국내에만 있어서 체감이 잘 안 되었을 뿐이지, 뮤비도 공개 하루 만에 천만 뷰를 찍었잖아요?”
“…….”
멤버들은 말없이 그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오 팀장이 멤버들의 핸드폰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쳐도 너무 몰려온 감이 있지만.”
“꺄아아악! 서한율! 율아!”
“보배!”
[우성! 나 좀 봐줘, 우성! 나 너 보러 비행기 타고 왔어!]
“라이언 오, 빠아…!”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사방에서 어색한 한국어와 온갖 외국어가 고막과 머리를 날카롭게 때렸다. 그러나 평소보다 많이 고용된 경호원들의 단단한 가드 덕분에, 멤버들은 무사히 호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저 여기 투숙객이에요! 비켜주세요!]
그러자 이번엔 같은 호텔을 예약한 극성팬들이 등장. 미리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조용히 카메라를 들고 접근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약하셨습니까?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급기야 사태를 주시하던 호텔 직원들까지 나서, 어스래빗 멤버들은 매니저들과 경호원들에게 꽁꽁 둘러싸인 채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잠시 후, 멤버들의 짐이 쌓인 매니저 객실.
박가람이 두 눈을 부라린 채 주위를 휙휙 살폈다.
“누구야. 누가 호텔 정보 흘렸어. 누구야.”
“진짜 이 정도면 누가 SNS에다 공지한 수준 아냐?”
“공지했으면 더 몰려왔을 걸요, 형.”
“난 순간 공항으로 착각했어….”
“후우….”
오 팀장이 멤버들의 핸드폰을 나눠주었다.
“다들 피곤할 테니 얼른 객실로 가서 쉬어요. 저녁은 우리가 직접 가져다줄 테니까 객실 밖으론 절대 나오지 말고. 그리고 매니저 아닌 사람이 찾아오면, 설령 호텔 직원이라고 해도 절대 대답하지 말고 일단 우리한테 먼저 전화하세요. 필요한 게 있거나 룸서비스 시키고 싶어도 전화하고.”
“네.”
객실로 갈 때도 매니저들은 복도 끝 모퉁이에서 이쪽을 향하는 시선을 차단하며 함께 움직였다.
“오늘 다들 수고했다.”
“쉬어랑.”
한율은 길우성과 같은 객실로 들어갔다.
삐릭, 철컥.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데….”
문을 닫자마자 길우성은 안전고리까지 단단히 채웠다. 그러곤 깊은 한숨을 쉬며 한율을 돌아보았다.
“아까 버스에서 눈 뜨자마자 몰려온 팬분들 봤을 때, 솔직히 조금 무섭지 않았냐? 사랑한다고 외치면서 빨리 내리라고, 막 무섭게 버스 두드리고….”
한율은 안으로 캐리어를 끌고 가며 대답했다.
“딱히?”
“부러운 강심장. 아니, 그런데 대체 누가 우리 호텔 정보 흘린 걸까? 아오! 잡히기만 해봐라, 이 망할 놈.”
“…….”
‘망할 놈’이 된 한율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여우는 어떻게 울지
정원그룹과 이우그룹이 고용한 전문가들은, ‘55’가 핸드폰 해킹 당시 서울에 있었다는 걸 제외하곤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55’가 그들이 추적할 수 있는 판도에 더는 나타나지 않은 까닭이었다.
방공시설 건설 진행이 지지부진하다 싶으면 오프라인으로 협박 자료를 살포시 갖다 놓는데, 해커가 무슨 수로 그를 잡을 수 있을까. 발로 뛰는 자들이 잡아야지.
‘‘55’가 두 그룹에 방공시설을 지으라고 한 곳은 경주와 수원. 그렇다면 한번은 직접 둘러보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 한율은 짬이 날 때마다 달냥처럼 마나에 예민한 까마귀 몇 마리를 찾았다. 그리고 여러 번의 반복 훈련 끝에 GPS를 부착, 두 곳에 풀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바로 지난주 금요일. 어스래빗이 크리스탈 래빗과 ‘하양 토끼 까망 토끼’ 크리스마스 스페셜 노래 M/V를 한창 촬영하던 날.
‘55’로 추정되는 이가 이우그룹이 맡은 경주 방공시설 건설 부지에 나타났다.
‘55’가 풍기는 마나를 감지한 까마귀들은 그 뒤를 끈덕지게 추적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서울의 모 고등학교가 있는 일대, 학원이 즐비한 거리, 고급 아파트 단지. 주로 이 세 곳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왜소한 체격과 앳된 목소리를 지니고 있어, 의심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GPS 기록을 보고선 확신했다.
‘55’는 현재 미성년자구나.
단독행동에 여러 제약이 걸리는, 미성년자.
그래서 해외 스케줄을 나온 김에 덫을 하나 파보기로 했다. 호텔 정보를 살포시 흘린 것도 그 일환.
“그나저나 저녁 메뉴는 뭘까? 따뜻한 국물 요리 먹고 싶은데.”
“지금이라도 승우 형한테 전화해서 물어봐.”
“그럴까?”
한율은 캐리어의 자물쇠를 풀고 열어, 갈아입을 옷과 목욕용품부터 꺼냈다.
“나 먼저 씻는다.”
“엉.”
목욕하고 나왔을 땐 테이블에 화려한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한율은 기초화장품부터 바르고 나서 테이블 앞에 앉았다. 곧 길우성이 욕실로 들어갔다.
우웅.
“……?”
일본 뉴스를 보면서 저녁을 먹는데, 드림래빗의 박세은으로부터 톡이 왔다.
-[잠깐 톡 괜찮아ㅜㅜ?]
[ㅇㅇ]
-[혹시..]
-[원카운트 기혁 선배님에 대해서 잘 알아?]
상당히 뜬금없는 질문. 한율은 솔직히 잘 모른다고 대답하려다, 조금 전에 박세은이 원카운트와 인사하던 중 흠칫 놀랐던 걸 떠올렸다.
[왜? 무슨 일 있어?]
상대방이 톡을 작성 중일 때 뜨는 물결표시. 그러나 답변이 올라온 건 30초가 훌쩍 지난 뒤였다.
-[내 착각일 수 있는데..]
-[자꾸 나한테 작업 거는 것 같아서...ㅠㅠ]
이후로 막힘없이 톡이 이어졌다.
-[몇 달 전부터 사람 별로 없을 때마다 와서 이런저런 피드백 잘해주시고 그래서]
-[아, 같은 고등학교 나와서 챙겨주시는 건가 했거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톡을 보내시더라구..]
-[그래두 선배님이니까 무시할 수 없잖아ㅠ 고민 같은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말하구, 방송이랑 무대 피드백도 꼼꼼하게 신경 써주시고 그러니까 고맙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대답 몇 번 했는데,. 갑자기 전화로]
-[사람들 오해하니까 주변 사람들, 멤버들한테도 자기랑 연락하는 거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그 말 듣고]
-[대체 뭐지??? 조금 쎄했거든]
-[어쨌든 그러구 나서 한 며칠 조용하다가 아까 공연장 나갈 때 잠깐 마주쳤거든?]
-[그런데 갑자기 내 손끝 살짝 잡으니까 왠지..ㅠㅠ]
“…….”
-[실은 라욘 오빠한테 물어볼까 하다가]
-[라욘 오빠는 찬형 선배님 말고 다른 원카 선배님들이랑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아서ㅜㅜ]
-[어쨌든 내 착각이겠지??]
-[그냥 장난치시는 거겠지??]
-[(이모티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율은 본래 세상, 그리고 지구에서 살아오는 동안, 바람둥이가 그 기질을 고치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통화 가능?]
-[ㅇㅇ]
한율은 박세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세은?”
-[응….]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작은 목소리.
한율은 짧고 굵게 말했다.
“그 사람 여자친구 두 명이야.”
핸드폰 너머에서 놀라는 기척이 생생히 느껴졌다.
-[……!]
다음 날 아침. 조유찬이 퀭한 얼굴로 객실을 찾아왔다.
“너희들 짐 챙겨. 바로 체크아웃할 거야.”
“사생들 때문에요?”
“응.”
“설마… 밤새 객실 앞 지킨 건 아니죠?”
“그건 아닌데, 걱정되어서 잠을 푹 잘 수가 있어야지. 아이돌 얼굴 보겠다고 일부러 화재경보기 울리는 미친 자들도 있으니까.”
조유찬이 힘없이 미소 지었다.
“어쨌든 잊은 물건 없는지 확인 잘하고, 캐리어에 잘 넣어둬. 차에 싣고 다니다가 RMMA 끝나면 그때 다른 호텔 체크인하면서 들일 거야. 캐리어만 따로 실어서 먼저 보내면 그거 따라가서 보고, 또 같은 호텔 예약할 수 있거든.”
“네.”
“그럼 한 시간 후에 데리러 올게. 그전까진 아무한테도 문 열어주지 마.”
“네.”
삐릭. 문이 닫히며 자동으로 잠겼다. 길우성이 한숨을 푹 내쉬며 까치집이 된 머리를 긁적였다.
“매니저 형들도 고생이다, 진짜.”
한율은 올해 크리스마스엔 매니저들에게 줄 선물을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한 시간 후. 어스래빗 멤버들은 어제보다 더 구름떼처럼 몰려든 팬들을 간신히 피해 버스에 탑승했다.
“다들 멀쩡하냐? 개인 가방은 괜찮고?”
이건우가 자신의 왼팔을 슥슥 매만졌다.
“누가 내 팔 세게 꼬집었어.”
“저런. 난 머리 맞았는데.”
“팬이라면서 왜 때려? 팬 맞아?”
라이언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차창 쪽을 보며 말하자, 차남석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대답했다.
“그래야 돌아봐 준다고 생각한 거겠지.”
“사이코야?”
퉁퉁퉁. 열리지 않는 창을 열기 위해 안간힘 쓰는 손들이 다닥다닥, 검게 붙었다 떨어지며 두드렸다.
[얼굴 좀 보여줘, 얘들아!]
[선물 있어! 남석! 남석아!]
[잘하고 와!]
[어스래빗 사랑해!]
“…….”
“…….”
한율은 복잡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멤버들을 보며, 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도 잘 챙겨줘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