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WB래빗, 소속 아티스트 정보 상습 유출 직원 해고]
[인기 아이돌그룹 크리스탈 래빗과 드림래빗, 어스래빗이 소속된 WB래빗 엔터테인먼트가 아티스트의 스케줄을 비롯해 항공과 숙소 예약 정보 등을 팬들에게 상습적으로 돈을 받고 팔아넘긴 내부 직원을 해고했다.
WB래빗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중략).]
“참 아쉽네. 나랑 말이 좀 통하던 사람이었는데.”
앗싸일보 연예부. 김 기자는 자신이 쓴 기사 댓글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댓글엔 잘됐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애들이 사생한테 얼마나 고통받는지 잘 알면서 돈에 눈멀어 정보 팔아넘기는 인간은 고소로 뼛속까지 탈탈 털려야 함ㅇㅇ
쩝. 김 기자는 컵을 들다가 커피가 없다는 걸 깨닫곤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새 커피를 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띠링. 그 순간 도착한 메일 하나.
“…….”
김 기자는 바로 메일을 열어볼까 잠시 망설이다가 탕비실로 향했다. 연예부 기자에게 쓸 만한 제보 메일이 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협박과 욕설, 패드립, 말도 안 되는 망상 커뮤글을 제보랍시고 보내는가 하면, 쓸만한 기삿거리를 줄 테니 대뜸 입금부터 하라는 사기꾼도 많았다.
언젠가는 원제로에 관해 부정적인 기사를 한번 썼더니, 한 시간에 수백 통씩 항의 메일이 날아온 적도 있었다.
‘별거 아니겠지.’
그러나 잠시 후. 커피를 타고 오던 도중, 다른 기자와 잠깐 수다를 떨다가 자리로 돌아온 김 기자는 10분 전의 자신을 나무랐다.
‘이런 미친놈아! 기자란 놈이 이렇게 더럽게 촉이 안 좋아서야!’
메일 내용은 아주 간결했다.
[조용히 만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하지만 내용보다 중요한 건, 보낸 사람.
2012년 데뷔하여 올해 8년 차. 한 달 뒤면 9년 차가 되는 걸그룹 감성소녀의 멤버, 순형이었다.
사칭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는지, 순형은 SNS 로그인을 해야만 보이는 개인 설정 화면까지 캡처해서 첨부했다.
김 기자는 누가 자신의 모니터를 훔쳐볼까, 주위를 살핀 후 빠르게 답장 버튼을 눌러 개인 핸드폰 번호를 적었다.
[…위 번호로 언제든 연락해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발신.
이틀 후인 12월 18일.
한율을 제외한 어스래빗 멤버들이 일본에서 귀국한 날.
앗싸일보에서 내보낸 단독 기사가 포털사이트 경제뉴스란 메인에 걸렸다.
[[단독]정원건설 정이장, 협박받아 대피 시설 건설 추진?!]
[지난달 정원걸설 대표이사로 취임한 정이장 씨가, 개인 핸드폰을 해킹한 해커로부터 협박을 받아 수원에 대규모 대피 시설 건설 공사에 착수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익명의 제보자는 정이장 씨가 정원건설로 대표이사로 취임하기 전…(중략).]
알아서 하겠지
-지금 나만 이 기사 이해 안 가냐? 개인 핸드폰을 털었는데 돈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대피 시설 지으라고 협박했다고??? 해커가 존나 안전과민증 환자인가
ㄴ종말 씨부렁거리는 종교 광신도에 한 표
-지어도 굳이? 수원에?
-학교, 병원, 아파트 지하 주차장, 지하철, 지하상가 등등 유사시에 대피소 역할 하는 곳이 태반인데 뭔 뻘짓인지ㅋ 너희들 그거 아냐? 반지하도 비상대피시설임ㅋㅋ
-정원그룹 회장이 임원들한테 지진에도 끄떡없는 안전한 대피 시설 만들겠다고 선언한 얘기 돌았었는데 그게 정이장 폰 털려서 그런 거였네ㅋㅋㅋ 그 안에 터지면 핵폭탄급인 뭔가가 잔뜩 들어있었나 봐?
ㄴ지으려면 지진 자주 발생하는 지역에다 지어야지 수원은 진짜 어리둥절
ㄴ땅값+건설비용보다 터지면 더 큰일 나는 게 폰에 있었다는 소리
-이 폭로가 사실이면ㅋㅋㅋㅋㅋ 나 같으면 쪽팔려 ㄷㅈ듯ㅋㅋㅋㅋㅋㅋ
-다들 침착해! 이건 누군가의 거대한 음모다!
‘이제야?’
<서울 구미호> 드라마 촬영 도중 대기시간.
핸드폰으로 기사를 본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원은 이 소문을 어찌어찌하다가 들었다고 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이니, 이미 그 바닥에 소문이 쉬쉬하며 돌고도 남았을 터. 기사는 오히려 한참 늦게 터진 셈이었다.
‘한동안 초조해지겠네.’
어쨌든 이 일이 크게 공론화되었으니, 계나리는 방공시설 건설에 차질이 생기진 않을까 초조해질 터다. 이우그룹까지 비슷한 협박을 받아 방공시설 건설 중이란 사실이 드러나면, 여론을 의식해 두 그룹 모두 태도를 바꿀 수 있으니.
‘대기업 자존심이 있어서 협박받았단 사실 자체를 쉽게 인정하진 않을 테지만. 뭐, 알아서 하겠지.’
한율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연예뉴스란을 클릭했다. 메인에 어스래빗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포토뉴스]어스래빗, 日에서 휴가 끝내고 오늘 귀국]
[(사진=앗싸일보)
지난 13일 RMMA에서 남자그룹상을 받은 뒤 일본에 머물며 휴가를 즐긴 어스래빗 멤버들이 오늘 18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기사엔 공항에서 찍힌 멤버들의 사진이 잔뜩 실려있었다. 무언가 내기라도 한 건지, 유호와 강보배는 머리에 호랑이 모자를 쓰고 있다.
“요즘 아이들 보면, 참 재밌게 노는 것 같아.”
‘형호’ 역의 아버지 역할을 맡은 중년 배우 ‘전칠구’가 한율의 뒤를 지나, 옆에 앉았다.
그가 한율의 핸드폰에 뜬 사진을 가리켰다.
“그런 건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아닐 거 아냐.”
“네. 콘텐츠 찍을 땐 기본적으로 기획된 대로 하는데, 이런 스케줄 외 시간엔 자율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쇼맨십도 이 바닥에선 꼭 필요한 재능 중 하나지. 아무나 못 하잖아. 나 처음 연극 무대에 섰을 때 생각하면…. 어후.”
미숙했던 과거가 떠오르는지,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한율아. 다음 주 크리스마스에도 촬영 있던가?”
“아니요. 그날은 드라마 촬영 전부 스탑하고 쉬기로 했어요.”
“그럼 그날 약속 있나? 있겠지?”
“저녁 약속이 있긴 한데… 왜요, 선생님?”
“내가 아는 후배가 속한 극단이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전칠구가 머쓱하게 웃더니 가방에서 팸플릿 하나를 꺼냈다.
“여기 어린이 병동에서 작게 공연하거든. 어제 후배가 그 일로 논의할 게 있어서 찾아갔는데, 거기에서 지내는 꼬마가 네 사진 카드를 애지중지 갖고 다니더란 거야. 그래서 ‘너 서한율 좋아하니?’ 물어보니까 바로 눈을 막 초롱초롱 빛냈다고 하더라고.”
“제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짠 나타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신 거죠?”
“거기까진 욕심이지, 네가 아주 바쁜 걸 잘 아는데. 그냥, 적절한 시간에 영상 통화라도 가능한가 싶어서. 나도 그날 갈 거라, 내 폰으로. 회사 분에게 물어봐야 하나?”
“아니요, 그 정돈 일일이 허락받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 그래?”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말했다.
“통화 20분 전에만 미리 연락해주세요. 준비 안 된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인사하면 좀 그렇잖아요.”
“그래, 고맙다.”
극 중에서 그려지는 독한 모습과 달리, 전칠구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참 좋아하겠어.”
다음 날 새벽. 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숙소는 거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2020 설특집 아이돌 스포츠 대회> 예선 녹화를 하러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난 멤버들이 널브러지거나 어슬렁거리는 모습으로 한율을 맞이했다.
“오셨소.”
“촬영 수고했어, 한율아.”
“어서 와. 수고했어.”
“하이, 서한율. 우리 없는 동안 숙소에서 혼자 지내보니까 어땠어?”
므앙. 한율은 어제 본가에서 데려온 달냥을 품에 안았다.
“조용해서 좋던데요.”
“저런.”
“매니저 형 기다리는 중이에요?”
“응.”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녹화해요.”
“엉. 어서 방에 들어가서 쉬어. 밤새 촬영하고 와서 피곤하겠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방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 한 걸음 떼려는 찰나,
“……?”
뒤에서 느껴지는 수상한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커흠.”
막 일어나려던 것처럼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박가람이, 곧바로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곤 기지개 켜며 헛기침했다. 차남석은 리모컨을 집어 채널을 돌렸다.
“이 시간엔 볼 만한 게….”
“어, 야한 영화 한다.”
“차남석.”
“내가 알고 돌렸겠어요?”
“모르고 돌렸을 것 같진 않은데? 이 시간대엔 거의 19금 영화만 나오잖아.”
“빨리 돌리기나 해요, 형님.”
“…으아, 여기가 더 야해!”
“돌려, 돌려! 차라리 뉴스 채널을 찍으라고!”
[해당 보도에 정원그룹 측은 협박설은 사실무근이라며 강력히 부인하는 한편….]
왠지 단체로 수상쩍다.
뭐지. 한율은 걸음을 다시 옮겨,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인 광경에 잠시 어리둥절.
“……?”
“따라다랏따~.”
살금살금 한율의 뒤로 다가온 길우성이 국내 영화 OST이자, 예능 프로그램에서 집을 소개할 때 곧잘 흘러나오는 음악을 흥얼거렸다.
“따라다라라라~.”
침대에 각양각색의 크기를 지닌 선물 상자, 면세점이나 브랜드 로고가 찍힌 종이가방이 산타 토끼 인형을 중심으로 모여있었다.
“우리가 정말 너만 두고 마음 편히 놀기만 했을 것 같냐.”
“저 토끼 인형, 한율이 너 대신해서 계속 데리고 다닌 애야. 나중에 영상 뜨면 직접 봐.”
한율은 방 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못 본 척, 자연스럽게 웃음을 터뜨리며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길우성처럼 한율의 뒤로 슬금슬금 다가와 있었다.
“이것부터 물어봐도 돼요?”
“뭔데?”
“사비로 산 거예요, 아니면 법카로….”
멤버들이 억울하고 어이없다는 얼굴로 동시에 외쳤다.
“당연히 사비지!”
“당연히 사비지! 어? 이 짜식? 어? 우리를 뭐로 보고!”
한율은 장난이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설치된 카메라엔, 선물을 하나씩 꺼내 보는 한율과 신이 나서 떠드는 멤버들의 모습이 촬영되었다.
* * *
아스대가 진행될 경기도의 한 실내종합운동장. 길우성은 쌀쌀한 한기를 느끼곤 제 두 팔을 슥슥 매만졌다.
“아으, 춥다. 히터 아직 안 켰나?”
“이제야 막 켠 것 같아.”
“추웡, 추웡.”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 안녕!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어스래빗 멤버들은 이제야 막 도착한 원제로 멤버들과 인사를 나눴다.
현강희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한율 선배님은 촬영 가셨어요?”
“응. 오늘은 안 오고, 다음 주 본선 녹화할 땐 올 거야. 와, 그런데 오늘 진짜 춥지 않아?”
“그러게요.”
“자.”
정민솔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길우성에게 내밀었다.
“가져.”
포장도 뜯지 않은 새 핫팩이었다. 엉겁결에 받은 길우성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진짜 나 주는 거야?”
“어. 많아.”
정민솔이 주머니에서 새 핫팩 5개를 더 꺼냈다.
“아니, 이 정도면 난로를 들고 다니는 수준 아냐?”
“난로는 무슨. 너도 하나 줄까?”
정민솔의 시선이 옆에서 멀뚱히 쳐다보던 라이언을 향했다. 라이언은 뚱한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민솔은 ‘그래’라며 가볍게 말하곤 유호에게 물었다.
“형네 크리스마스 음원 언제 나와요? ‘하양 토끼 까망 토끼’.”
“내일 오후 6시. 스트리밍해 줄 거야?”
“SNS에 듣는 거 인증샷 올릴게요.”
“오오, 그래 주면 우리야 고맙지.”
“나도 함!”
“넌 당연히 해야지, 변지욱.”
“그런데 한율이 형은 언제 쉬어? 쉬는 날에 우리 밥 사주기로 했는데.”
“25일은 쉰다고 들었는데 한율이가 은근 인싸라, 이미 다른 선약 잡혀있을걸? 아마 내년을 기약해야 할 거다.”
“히익.”
불쑥. 스카이러너의 하신이 끼어들었다.
“나도 잡을 거야, 선약. 나한테 무대 연기 특강 해주기로 했거든.”
“너희 선생님께 배우라고 하지 않았냐?”
“RMMA 끝나자마자 또 졸라서 답변받아냈지. 진짜 완전 귀찮다는 얼굴로 ‘아, 알았어.’ 이렇게 하긴 했지만.”
“어스래빗 들어와. 그럼 연습 때마다 무료로 받을 수 있어.”
“어, 그럴까?”
하신이 냉큼 길우성과 유호 사이에 끼었다. 그러자 뒤에서 지켜보던 용맹이 하신을 덥석 잡아 빼냈다.
“‘어, 그럴까?’는 뭐가 ‘어, 그럴까?’야! 이리 와, 인마!”
질질 끌려가면서 하신이 큰소리로 물었다.
“나 언제 떠비에 놀러 가면 돼…?!”
길우성이 두 손을 흔들며 외쳤다.
“너도 내년을 기약하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잘 들리진 않았지만,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카이러너 팬들의 입가엔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무대에서나 팬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편한 모습, 그 나이대에 맞는 자연스러운 그들의 모습이 친근감을 주는 까닭이었다.
“우리 애들끼리 노는 것도 좋지만, 다른 아이돌 친구들하고 편히 어울리는 것도 왠지 흐뭇하네요.”
“새벽부터 오느라 조금 힘들긴 했는데, 이 맛에 아스대 직관하나 봐요. 애들이 누구랑 친한지도 알게 되고.”
반면 어스래빗 팬덤인 이프림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언과 원제로의 정민솔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까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프림의 마음 기저엔 아직 정민솔과 어스래빗 간의 루머가 앙금처럼 남아있었다.
특히 정민솔이 라이언을 두고 했다던 말.
[저 거지 같은 검머외 새끼는 왜 뽑은 거야? 존나 찝찝하네, 씨발.]
그래서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뮤닷 를 촬영할 때도 함께 있는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터라 더욱.
“답답하네. 무슨 얘기 나누는지 좀 알고 싶은데.”
“그러게요. 아까 라욘이 뚱한 얼굴로 고개 흔들어서 아직 사이가 안 좋나 했는데.”
“왠지, 정민솔이 친한 척 자꾸 다가가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이프림은 슬그머니 원제로 팬덤이 모인 곳을 살폈다. 그러다 서로 시선이 마주쳐, 휙 모른 척.
‘오해였던 걸까? 아니면 용서를 구하고 화해한 걸까?’
이프림은 ‘오늘 하루 두고 보면 알겠지.’라고 생각하며 서로 떨어지는 어스래빗과 원제로를 보았다.
“아까 정민솔이랑 무슨 얘기 했냐?”
개막식이 끝나고 자리에 앉았을 때, 차남석은 넌지시 라이언에게 물었다. 조금 전엔 다른 아이돌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두 사람의 대화를 잘 듣지 못했다.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하던데.”
“그놈이 웃긴 얘길 해서.”
“그러니까 무슨 얘기.”
라이언은 ‘왜 내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하냐’란 뚱한 얼굴로 차남석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콘텐츠 촬영으로 원제로 유닛 나눠서 노래 작업하기로 했는데, 나보고 랩 피처링 해달래.”
하. 차남석은 저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너한테? 저 새끼 미친 거 아냐?”
“그것 봐. 웃긴 얘기 맞지?”
둘이 싸웠어?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기온이 영하까지 내려간 새벽.
한율은 멤버들과 함께 뮤닷을 찾았다.
“너희 드라이 리허설 끝나면 다른 스튜디오에서 <박하와 산타토끼> 사녹부터 진행할 거야.”
“네.”
대기실은 다른 팀과 함께 사용하는 공동 대기실.
지난번 <로컬영화>로 활동할 당시엔 1위 후보에 오르지 않았어도 단독 대기실을 받았었다. 그래서 다시 공동 대기실이 되었단 사실에 아쉬운 마음이 들 법도 하지만, 멤버들은 그러려니 하며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락뮤닷>은 크리스마스 특집이자 연말 특집을 겸하여, 그들보다 성적 좋은 선배들이 대거 출연하는 까닭이었다.
“그럼 오늘 사녹 끝나자마자 다시 촬영장 가는 거야?”
드라이 리허설 준비를 마치고 스튜디오로 가는 길. 강보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율에게 물었다.
“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찍기로 해서요.”
“첫 방송이 언제랬지?”
“1월 31일이요.”
“한 달하고 일주일 정도 남았구나.”
“아.”
앞서 걷던 유호가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너희, 플리마켓에 내놓을 물건은 추리고 있지?”
“으음, 고민 중이야.”
“이번엔 굿즈도 같이 팔 예정이니까, 꼭 물건 많이 내놔야 한다는 부담은 갖지 마.”
“네.”
마침 크리스마스인 내일은 부모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한율은 가는 김에 플리마켓에 내놓을 물건이 있는지 찾아보자고 생각하며 물었다.
“이번에도 대충 어떤 물건을 내놓는지 촬영하는 게 좋겠죠?”
“응. 입장 응모가 다음 주 금요일부터니까, 적어도 그 전에 찍어서 SNS에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아. 홍보도 겸해서.”
“네.”
짧게 편곡한 <로컬영화>와 까지 해서 약 4분 30초 무대. 드라이 리허설을 끝낸 뒤엔 대기실로 돌아와 단장을 받았다. 그리고 ‘하양 토끼 까망 토끼’의 <박하와 산타토끼> 사녹이 진행될 별도의 작은 스튜디오로 이동.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그곳에서 크리스탈 래빗 멤버들과 만나 인사를 나눴다.
“리허설부터 할게요!”
그들은 사전에 정해진 자리에 서거나 앉았다. 한율은 기역 자 형태로 된 가로등에 살짝 기대어 섰다. 가로등에 매달린 그네에 조심조심 앉아보던 라나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거 쓰러지는 거 아니겠지?”
그네 가로등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제가 꽉 잡고 있을게요.”
“그럼 그림이 안 살잖아. 내가 다리에 힘 빡 줄게.”
“내내 의자 자세 취하시려고요?”
“나 스쾃 잘해.”
“그거랑은 조금 다르지 않아요?”
예쁘게 차려입고선 스쾃 자세를 취하는 아이돌 곁으로 스태프가 다가왔다.
“이거 밑에 받쳐야 해요.”
“네?”
스태프가 가져온 투명한 플라스틱 스툴을 그네 안장 아래에 댔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소품을 이용해 교묘하게 의자가 없는 것처럼 숨겼다.
“오, 되게 신기하다.”
“다행이네요, 선배님.”
라나는 머쓱하게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스튜디오가 왜 이렇게 덥지?”
사녹은 3번의 리허설을 거친 뒤 진행되었다. 안무라고 보기 힘든 가벼운 동작만 있는 곡이라 힘든 건 없었다. 개인 파트도 짧고.
“수고하셨습니다!”
두 그룹은 스태프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한 후 스튜디오를 나왔다. 크래의 미랑이 슬슬 길우성에게 다가가더니 주먹으로 팔을 가볍게 쳤다.
“이따가 빨간색 자판기 앞으로 와.”
“용건은 톡으로 하십쇼, 누님.”
“애초에 톡이랑 전화로 대답을 제대로 안 한 게 누군데.”
“대답 제대로 했거든? 정말 별일 없었다니까 그러네. 정 못 믿겠으면 라욘 형한테 물어봐.”
라이언을 언급하는 걸로 보아, 지난번 김철영 사건 때문인 듯했다.
아직 다른 멤버들을 비롯해, 외부엔 어스래빗 숙소를 찾아온 자들이 김철영과 양상원이란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양상원 사건이 있은 지 두 달 밖에 지나지 않은데다, 하필이면 길우성이 잠깐 입국했을 때 벌어진 일이라 혹시나 하는 걱정이 든 모양.
미랑이 라이언을 돌아보았다.
“정말로 그날 별일 없었어요?”
라이언은 미랑과 시선이 마주치는 걸 슬쩍 피하며 대답했다.
“응, 없었어요.”
“기절한 놈 얼굴도 같이 봤다면서요. 진짜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았어요?”
“응. 아니, 네. 하뉼한테도 물어봐요. 얘도 봤어요.”
“그래, 써한도 봤거든? 네가 말 좀 해봐라, 써한.”
한율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봤을 땐 별일 없는 상태였어요. 침입을 시도한 괴한 얼굴도 처음 본다는 반응이었고.”
정말일까. 미랑은 잠시 미심쩍다는 시선으로 한율과 길우성, 라이언을 천천히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OK. 세 분, 의심해서 미안해요.”
“별말씀을.”
“누나도 나이 드니까 잔걱정이 많아지… 아얏.”
“나 아직 스물두 살이거든? 어디에서 나이 타령이얏.”
“엄마처럼 등짝 스매싱을 하니까 나이 타령을… 아얏, 아!”
“매를 벌어, 그냥. 그리고 그렇게 세게 안 쳤거든? 엄살 적당히 부리지?”
“흐.”
어릴 적에도 저렇게 곧잘 혼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참 자연스럽다. 그러다 모퉁이를 돌아 <락뮤닷> 출연자 대기실이 나오는 순간, 길우성과 미랑은 언제 티격태격했냐는 듯 거리를 벌리고 떨어졌다. 저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다른 이들도 시치미를 뚝 뗀 채 인사를 나눴다.
“그럼 수고하세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선배님.”
크리스탈 래빗 멤버들이 단독 대기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그때 다른 공동 대기실에서 나오던 보이그룹 V12가 그들을 향해 힘차게 인사했다. 드라이 리허설을 하러 가는지 다들 머리카락이 부스스한 민낯이었다. 몇 명은 안경까지 써서 순간 누군지 못 알아볼 정도.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V12 멤버 김찬이 한율에게 한 번 더 고개를 꾸벅였다.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RMMA에서도 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왠지 오래간만에 뵙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지난주 아스대 예선 때도 안 나오셨고.”
“그땐 드라마 촬영 때문에. 모레엔 나갈 거예요.”
“넵! 흐, 이따가 사녹 끝나고 앨범 드리러 갈게요.”
“아…. 전 사녹 끝나면 다른 스케줄 하러 가야 해서 아마 없을 텐데. 제 몫은 얘한테 대신 맡겨주세요.”
“넵!”
“그럼 리허설 수고하세요.”
“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선배님!”
“수고하세요.”
오래 대화를 나눌 순 없어, 그들은 대충 인사를 마무리했다. 12명이나 되는 V12 멤버 중, 가장 뒤쪽에 말없이 서 있던 티모도 고개를 숙이며 옆을 지나쳤다.
잠시 시선이 마주친 한율에게도 꾸벅.
“수고하세요.”
“……?”
자주 얼굴을 보거나 따로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굉장히 서먹서먹한 태도로.
길우성이 한율의 팔을 툭 치며 조용히 말했다.
“…가자, 써한.”
길우성의 태도도 이상했다. 얼마 전 RMMA에서 마주쳤을 땐 평범하게 인사했던 것 같은데, 이번엔 티모와 아예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한율은 대기실로 돌아간 후에야 물었다.
“둘이 싸웠냐?”
“싸운 건 아닌데.”
길우성이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난주 아스대에서 만났을 때 묘하게 거리를 두더라고. 그래서 무슨 일 있냐고 물었더니 나보고 대뜸 ‘눈치 없는 새끼’라고 기분 나쁘게 말하잖아. 그래서 그 뒤로 말 안 하는 중이야.”
“진짜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눈치 없이 말 걸었던 건 아니고?”
“아니거든?”
“내가 봤을 땐, 우성이가 눈치 없었던 것 같긴 했어.”
“…형님?”
길우성이 충격받은 얼굴로 이건우를 돌아보았다. 칸막이 쪽을 힐끗한 이건우가 목소리를 낮췄다.
“안 그런 척해도, 올해 RMMA 스페셜 무대에 못 선 것 때문에 많이 의기소침해졌던 것 같더라고. 그런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 무대에 올라갔던 우성이가 왜 그러냐고 알짱거리는데, 얄밉지 않았겠어?”
“아니, 그게 내 탓도 아닌데….”
“머리론 알겠지만, 감정이란 게 마음대로 안 되잖아. 네가 동갑이고, 비슷하게 팀의 메인 댄서도 맡고 있고 하니까 더 질투가 나지 않았을까? 뭐, 다 내 추측이지만.”
“그래도 ‘새끼’는 심하잖아. 나 진심 상처받았다고….”
“음, 그 말은 심하긴 했지.”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박가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솔직히 우리 나이대에 친구끼리 쌍욕 주고받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러면 안 되니까. 그래서 쌍욕 면역력이 약해진 것 같아. 악플러가 지껄이는 쌍욕은 개소리니까 제외하고.”
“그런 면역력도 있었어?”
“아니, 나도 장난으로 ‘새끼야’ 그러는 건 괜찮거든? 그런데 완전 짜증 난 표정에다 날 선 목소리로 말하니까….”
박가람이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툴툴거리는 길우성을 살폈다.
“그래서 삐치셨어용, 길우성 씨?”
“…….”
“박다람이한테 삐칠 삘인데.”
“미안하다, 막내야. 형이 핫초코 사줄까?”
“어.”
“그래, 나가자.”
박가람과 길우성이 사이좋게 대기실을 나갔다.
별일 아니네. 한율은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가방을 집었다.
“레몬 생강차 드실 분?”
차남석이 손을 들었다.
“나.”
드라마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한율은 시간이 나면 회사에서 꼭 안무 연습을 한 뒤 들어가곤 했다. 그게 자정이 됐든, 새벽 3시가 됐든. 그렇다 보니 멤버들과 마주치는 시간이 들쑥날쑥하여,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자연스레 줄었었다.
그래서 한율은 이참에 그 이야기를 꺼냈다.
“저 단독주택 하나 샀어요.”
“응?”
한율은 숙소에서 미리 탄 레몬 생강차를 종이컵에다 따라 차남석에게 내밀었다.
“지하실이랑 다락방이 있는 이층집인데, 지금 리모델링 공사 중이에요.”
“……?”
잠깐 잘 준비를 하던 다른 멤버들도 의아한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차남석이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이사할 새 숙소 말하는 거야?”
“네. 전에 둘러본 빌라 중 하나를 고를까 했는데, 주택이 요새처럼 튼튼하게 지어진 게 참 마음에 들더라고요. 내부도 넓고.”
“사진 있어?”
한율은 핸드폰을 꺼내 집 사진을 보여주었다. 멤버들의 머리가 모였다.
“와, 서울에 이런 집이 있었어?”
“담이 있기는 있는데…. 집 건물 자체가 성벽처럼 지어진 것 같다.”
“여기가 차고, 이게 대문이요.”
“그런데 이쪽 벽은, 부수면 바로 방인 거야?”
“네. 그런데 굉장히 두껍더라고요. 한 이 정도?”
“응? 1층에선 바깥을 아예 못 보는 구조 같은데?”
“가운데 정원만 볼 수 있어요. 대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이런 큰 통창이 있고, 다른 창도 많아요. 발코니도 있고.”
“뭐야? 뭘 그렇게 봐?”
그때 박가람과 길우성이 자판기에서 파는 핫초코를 들고 돌아왔다.
“한율이 집 샀대. 우리 새 숙소로 쓸 집.”
“뭣이?!”
머리가 더 모였다.
“방 몇 개야?”
“1층엔 3개, 2층에도 3개. 다락방까지 치면 총 7개지만, 거기는 취미 공간 비슷한 걸로 쓰려고요.”
“지하실도 있다며.”
“반 정돈 차고가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거긴 창고로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호. 화장실은?”
“안방 내부에 있는 것까지 총 4개요.”
“좋다. 합격.”
“한율이 집인데 박다람이 네가 합격 판정을 왜 내려.”
“흐흐. 평생 빌붙어서 살려고.”
“기생충이세요?”
“그럼 이사는 언제쯤 할 계획이야?”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3월이요. <서울 구미호> 드라마 촬영 끝나고 나서.”
한편, <락뮤닷> 스튜디오.
막 드라이 리허설을 마친 V12 멤버들은 스태프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하며 무대를 내려왔다. 김찬은 바로 옆에 있던 티모의 등을 살며시 토닥거렸다.
“너무 일찍 나와서 그런가, 정신이 없다. 가서 따뜻한 핫초코 한 잔 마시고 한숨 자자, 형.”
“…….”
슥. 티모는 김찬의 손길을 피하려는 듯, 말없이 걷는 속도를 높였다. 점점 벌어지는 거리. 김찬은 티모를 부르려다, 힘없이 입을 다물었다.
리더가 조용히 다가와 한숨을 쉬었다.
“쟨 또 왜 저럴까? 찬아.”
“글쎄요…. 지난주부턴 기분이 엄청 저조해 보이네요….”
“왜긴 왜겠어.”
쯧. 다른 멤버가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불안해서 그런 거겠지. 자기가 늦게 복귀한 바람에 RMMA 스페셜 무대에 못 서게 되었다는 자책이 겹쳐서 더더욱. 그리고… 아직도 티모가 그거 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하아….”
V12 멤버들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스튜디오를 나오는 순간,
쾅.
“……?!”
“깜짝이야. 이게 무슨 소리….”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 V12 멤버들은 대경실색했다. 먼저 나갔던 티모가 후배 아이돌의 멱살을 잡은 채 벽에다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후배들과 <락뮤닷> 스태프들이 오가는 자리에서.
티모가 후배를 향해 사납게 외쳤다.
“뭐, 이 새꺄? 다시 한번 말해봐! 누가 뭘 해?!”
팬 만나러 감
V12의 티모가 후배 아이돌을 폭행했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출연자 대기실까지 퍼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어스래빗 멤버들도 소란을 듣고선 복도로 나왔다.
저 멀리 모퉁이 너머에서 ‘이게 뭣 하는 짓들이야!’, ‘방송이 장난이야?!’라는 호통이 희미하게 들렸다.
“들어와, 얘들아.”
조유찬과 현장전이 어스래빗 멤버들을 불렀다.
“애들끼리 싸움 나는 게 뭐 한두 번이냐.”
“아니, 이 새벽에 싸울 일이 뭐가 있어요. 다들 비몽사몽 상태로 리허설 하는 시간인데….”
“상황 정리되면 그때 내가 알아볼 테니까, 너희들 컨디션부터 챙겨. 한율인 사녹 끝나면 바로 촬영장 가야 하는데, 너희들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면 애 잠 못 잔다.”
“왜 절 파세요, 형.”
“다 너흴 위해서 하는 말이야. 자, 다들 가서 누워. 조금이라도 자야지.”
“아직 핫초코 다 안 마셨는뎅.”
“원샷해. 들어와, 우성아.”
현장전이 여전히 복도에 서 있는 길우성을 대기실 안으로 이끌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멀리 시선을 던지던 길우성이 고개를 돌렸다.
“…네.”
티모가 후배를 벽에다 밀치고 주먹으로 얼굴을 한 대 갈긴 이유는 사녹 전, 스튜디오 앞에서 만난 원제로 멤버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 후배가 티모 보더니, 멤버들한테 ‘약쟁이 새끼 지나간다.’ 이렇게 말하면서 비웃었대요.”
“아….”
어스래빗 멤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티모가 작년 이맘때에 벌어진 소피아 드러그 사건의 억울한 피해자가 맞는다면, 그 말을 듣고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진실은 또 티모 본인밖에 모르는 법이라, 반응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한 후배, 누구래요?”
“‘빅타임’의… 누구라더라? 영어 이름이었는데.”
“네….”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길우성의 표정을 살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 민솔아. 지난주에 라방하면서 <박하와 산타토끼>, 팬들한테 추천해줬다면서? 고맙다.”
공기가 살며시 가라앉으려 할 때, 유호가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정민솔이 어깨를 으쓱였다.
“SNS에 인증하는 것보단, 직접 노래를 조금이나마 들려주면서 따라부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서요. 이따가 생방할 때도 무대에서 부를 거죠?”
“응. 몇 명은 스케줄 때문에 빠지지만.”
“난 SNS에 너튜브 뮤비 링크 달고, 형네 SNS 알림 글에 ‘좋아요’도 눌렀는데.”
“그래서 전화로 고맙다고 했잖아.”
“또 칭찬해달란 소리지, 큰형. 난 늘 칭찬이 고프다.”
변지욱이 빨리 칭찬하라는 듯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유호는 칭찬 대신에 원제로 리더인 유지에게 물었다.
“얘 평소에 칭찬 안 해주세요?”
“칭찬해도, 식상하고 뻔한 말은 싫다고 불평해서 아예 안 해주고 있어요. 버릇 나빠질까 봐.”
“넌 왜 답장이 없냐?”
그때 정민솔이 라이언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라이언이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번호 차단했어.”
“…….”
정민솔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와, 진짜 너무하네.”
스튜디오에서 원제로 매니저가 나와 고했다.
“원제로, 슬슬 준비합시다.”
“네.”
“우리도 들어가자.”
문이 열린 김에, 어스래빗 멤버들도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사녹을 마친 뒤 한율은 먼저 짐을 챙기고 조유찬과 함께 대기실을 나섰다. 마주치는 다른 선후배 가수들, 스태프들에게 ‘수고하십시오’ 인사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타자마자 가방에서 클렌징 티슈를 꺼내는 한율을 보며 조유찬이 말했다.
“가서 분장팀 스태프한테 지워달라 그러지.”
“시간 아깝잖아요. 그리고 다른 스케줄로 한 메이크업인데, 내 화장품이랑 도구까지 꺼내 가면서 지워달라 그러는 건 갑질 같기도 하고.”
“크으.”
조유찬이 시동을 걸며 감탄사를 흘렸다.
“역시 우리 애가 참 바르다. 선이 딱 분명해서 좋아.”
갑자기 왜 칭찬하고 그럴까.
한율의 의문을 읽은 듯이 조유찬이 술술 말을 꺼냈다.
“내가 얼마 전에 다른 엔터에 다니는 친구를 만났거든? 누군지는 말 못 하지만, 한율이 너처럼 아이돌 겸 배우를 담당하고 있는데… 어우, 애가 점점 인기가 많아지니까 선을 막 넘나드나 봐. 어리거나 연차 낮은 스태프한테 반말, 장난식의 욕설은 기본이고, 협찬받은 액세서리 그대로 찬 채 술집 갔다가 훼손시켜놓곤 ‘협찬이 아니라 선물 아니었어요?’라고 뻔뻔하게 나오고, 걸치고 싶은 브랜드 협찬받아오라고 스타일리스트 닦달하다가 안 되니까 무능하다고 욕하고….”
상상만 해도 질색이라는 듯, 그가 고개를 부르르 털었다.
“난 너희 매니저라서 참 행복하다.”
“그런데 어제랑 오늘 얼핏 들어보니까 원제로 쪽에서 라이언에게 뭔가 제안한 것 같던데, 뭐에요?”
“아아.”
화제가 급전환됐지만, 조유찬은 순순히 알려주었다. 한율이 영양가 없는 주제엔 별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자체 콘텐츠로 팀내 유닛을 나눠서 노래 작업을 하는데, 민솔이가 라이언에게 랩 피처링을 받고 싶나 봐. 처음엔 라이언에게 물어봤는데 라이언이 거절하니까, 회사 통해서 정식으로 제안을 넣었다? 그런데 우리라고 뭐 어쩌겠어. 본인이 싫다는데. 그랬더니 다시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것 같더라.”
“아아.”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작년부터 이어진 어스래빗과의 루머를 깔끔하게 정리하려는 모양이었다. 본인의 연예계 생활을 위해서.
‘그러고 보니.’
박고영이 커뮤에 올린 정민솔 폭로 글로 시끄러워졌을 때, 라이언은 이렇게 말했다.
『고영에 대해 알려지면 사람들은 분명 욕먹을 만했다고 등 돌릴 거야. 그래서 지금은 말 안 해. …내가 정민솔한테 들었던 말도 함께 얼렁뚱땅 넘어갈 테니까.』
나중에 기회 봐서 확실히 보내버리려는 거냐는 차남석의 물음엔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순서가 있다고.
정민솔은 한율이 막 WB래빗에 들어갔을 때 이미 라이언을 도둑놈으로 취급했었다. 그러니 그간 쌓이고 쌓인 앙금이 말뿐인 사과 몇 번에 풀렸을 리가 없다.
잊어버렸을 리는 더더욱.
‘원제로가 해체될 즈음 복수하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가 제일 적절한 시기였다. 원제로란 팀에 묶인 거대한 팬덤도 흩어지고, 정민솔도 FJ그룹 계열 매니지 회사에서 자그마한 콩콩 엔터 그늘로 다시 돌아갈 때이니.
“한율아, 그런데 내일 정말 거기 갈 거야? 혼자 괜찮겠어?”
“그냥 병원인데요, 뭘.”
“그래도…. 형도 같이 갈까?”
한율은 사용한 클렌징 티슈를 차량용 휴지통에다 버렸다. 그리고 이번엔 아이 메이크업 리무버와 화장 솜을 꺼냈다.
“형 내일 그분이랑 사귀고 난 뒤 첫 크리스마스 데이트잖아요. 저 그런 날에 매니저 불러내는 갑질 연예인 아닙니다.”
조유찬의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흐…. 내가 진짜 너희 매니저라서 참 행복하다. 아무튼, 심심하면 멤버 한 명이라도 데려가. 기껏 크리스마슨데, 온종일 숙소에 늘어져 있게 두는 것도 좀 그렇잖아. 아무리 밤에 크리스마스 기념 라방을 할 거라곤 해도.”
“네.”
한편, 뮤닷에 남은 어스래빗 멤버들은 옷을 갈아입고 이프림이 모인 곳으로 이동했다. 일본에서 휴가를 즐길 때 서한율 대신이라며 들고 다닌 산타토끼 인형도 챙겨서.
“허허허, 메에리 크리스마스으!”
꺄아아악! 이프림은 산타 혹은 루돌프 복장을 한 어스래빗 멤버들을 보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다.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을 글썽이는 이도 있었다.
“오빠, 오빠들 나왔어, 어떡해…!”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미니 팬미팅을 할 거란 공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이렇게 모인 이유도 어스래빗이 쏘는 간식을 먹고, 크리스마스 기념 굿즈도 받아 가라고 해서 모인 것뿐.
‘역대급으로 치열한 경쟁률을 뚫은 보람이 있었어…!’
지난 앨범 활동이 끝나고 한 달이 훌쩍 지났다. RMMA도 국내가 아닌 일본에서 열린 데다, 다음 컴백은 언제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한동안 어스래빗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사라진 팬들은, 이번 <락뮤닷>에 어스래빗이 나온단 소식에 앞다퉈 사녹 방청에 응모했다.
물론 크리스마스니 이런 깜짝 등장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월드투어와 이후 어스래빗의 인기가 부쩍 많아짐에 따라 경호도 삼엄해져 포기한 마음이 더 컸다. 얼마 전 사생 스토커의 숙소 침입 및 절도 사건과 양상원 사건도 있었고.
그렇기에 팬들은 멤버들의 이번 깜짝 등장이 반갑고,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비록 한 명은 보이지 않았지만.
서한율을 제외한 7명의 어스래빗 멤버들이 일렬로 섰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이프림은 다시 한번 더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사녹 방청엔 실패했어도 ‘혹시 남는 굿즈가 있다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품고 벨트 차단봉 너머에 모인 다른 이프림도 함께.
꺄아아악!
“응? 여기 어스래빗 선배님들 대기실 아니에요…?”
어스래빗의 대기 공간. V12의 김찬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은빛 돗자리가 깔린 널찍한 공간엔 스카이러너의 용맹과 하신, 원제로의 현강희와 변지욱이 편히 앉아 과자를 먹거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맞는데, 지금 미니 팬미팅하러 가서 없어요.”
“아아.”
김찬이 함께 온 V12 멤버들을 돌아보며 용맹의 말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어스래빗 선배님들 미니 팬미팅하러 가셨대.”
“그럼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다시 오자.”
김찬은 앉아있는 네 명을 향해 고개를 꾸벅이곤 퇴장했다. 하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을 나가는 V12 멤버들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티모는 안 보인다. 사녹 끝내자마자 보냈나 봐.”
“저분들 다음 주까지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여러모로 힘들어지겠네요.”
“아까 빅타임 쪽 분위기 슬쩍 봤는데, 고소하네, 마네 아주 심각하더라.”
쯧쯧. 용맹은 조용히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상대가 맞을 짓을 했다곤 해도, 아이돌이 폭력을 사용하는 건 이미지에 아주 심한 손상을 입힌다. 하물며 티모는 잠깐이나마 드러그 의심까지 받았던 상황.
‘심하면 계약 파기까지 당할지도 모르겠는데.’
이유야 어떻든 음방 관계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후배를 때렸다. 회사로선 그보다 더 큰 사고를 치진 않을까 불안해질 터.
“그나저나 서한율 지금 이동 중이겠지? 차에서 자고 있으려나?”
하신이 핸드폰을 꺼냈다.
“왜?”
“내일 놀자고 하려고.”
“크리스마스에? 남자 둘이?”
“아니, 크리스마스에 만날 여자친구 하나 없는 다른 모쏠들도 불러서.”
“…그렇게 말하니까 끼기 싫다.”
변지욱이 현강희의 손을 잡아 함께 들었다.
“저희가 끼겠습니다.”
현강희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난 모쏠 아닌데….”
“현강, 유치원 때 사귄 게 사귄 거냐?”
“일단 톡부터 보내고.”
용맹은 하신이 톡을 작성하는 걸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조용히 속닥.
“나도. 나도 낀다.”
“크크.”
“…….”
의자에 앉아있던 어스래빗의 스타일리스트는 들고 있던 펜 반대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 아이돌들은 대체 왜 주인 없는 남의 대기실에 와서 간식을 축내며 수다를 떠는 걸까.
“어? 답톡 왔다.”
-[내일 저녁은 약속 있어서 안 됨. 낮엔 ○○병원 어린이 병동에 팬 만나러 감.]
함께 서한율의 답장을 본 네 사람은 고개를 기울였다.
“으음…?”
못 보던 사생이랑 홈마가 늘었어
“다들 계속 여기 있을래? 아니면 숙소에 가서 조금 쉬다가 올래?”
미니 팬미팅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오는 중. 현장전의 물음에 유호가 먼저 손을 들었다.
“저는 회사요. 조금이라도 작업하고 싶은 게 있어서.”
“난 숙소!”
“전 그냥 여기 있을… 님들 왜 여기에 계세요.”
‘어스래빗’ 종이가 붙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간 길우성은, 자신들의 공간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용맹과 하신, 변지욱을 발견하곤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세 사람이 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놀러 왔습니다.”
“아까까진 강희도 있었는데 잠깐 화장실 갔어. 미니 팬미팅은 잘했어?”
“응, 써한이 없어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런데 지금 먹는 그 간식, 우리 거 아니야?”
“맞아.”
“뭐지, 이 뻔뻔함은?”
“박스로 사줄게.”
“왜 그것만 먹냐. 다른 것도 있어, 더 먹어.”
“그런데 너희 대기실에 안 있고 왜 여기에 있어?”
차남석이 용맹에게 물었다. 용맹은 어스래빗 멤버들의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심심해서 놀러 왔다니까. 아, 아까 V12 친구들 왔다 갔었어. 너희 미니 팬미팅 갔다고 하니까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더라.”
“맹 형, 혹시 티모도 있었어?”
길우성의 물음에 하신이 고개를 저었다.
“걘 사녹 끝나자마자 간 것 같던데? 안 보이더라.”
“아아….”
“걱정돼?”
“아니, 뭐….”
길우성은 목 뒤를 긁적였다.
“사람 때린 건 정말 잘못한 일이지만, 이런저런 일로 마음고생 많이 하다가 돌아온 애잖아. 그래서….”
“우성아.”
가만히 길우성을 바라보던 용맹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응?”
“잠깐 형이랑 얘기 좀 하자.”
“……?”
길우성은 의아한 얼굴로 용맹을 따라 대기실을 나섰다. 뒤에서 박가람이 외쳤다.
“막내야, 루돌프 코는 빼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