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날인 25일 아침. 한율은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새벽에 돌아오자마자 잠든 지 8시간 만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나.”
씻고 나서 편한 옷을 입고 거실로 나오자, 금방이라도 외출할 사람처럼 말끔하게 차려입은 길우성이 소파에서 잔소리했다. 한율은 벽시계를 힐끗했다.
“아직 10시밖에 안 됐거든?”
“선물 고르다 보면 시간 훅훅 가잖아. 그것도 계산해야지.”
“선물은 이미 준비해서 차 트렁크에 실어뒀어.”
“잉? 언제? 뭐 샀는데?”
“책, 장난감, 모자, 양말, 장갑.”
“아…. 진작 좀 말하지.”
길우성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바로 어제, 스카이러너의 하신에게서 오늘 놀 수 있냐고 연락이 왔다. 저녁엔 선약이 있고, 낮엔 병원으로 팬을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돌아온 1차 답변은 ‘잠깐만’. 밤이 되자 두 번째로 날아온 답변은 ‘사생 때문에 오히려 대민폐 끼칠 수 있다고 가지 말래ㅜㅜ’였다.
그 답변을 보자, 조유찬이 괜히 ‘나도 같이 갈까?’ 물어본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잘 와닿진 않지만, 어스래빗 인기도 부쩍 많아졌으므로.
‘못 보던 사생이랑 홈마도 늘었고.’
그러니 경호원과 매니저 없이 갔다가, 개념 없는 사생들이 좋다고 접근하여 혼란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오래 머무는 것 또한 민폐가 되겠지.’
그래서 얼굴을 꽁꽁 싸맨 채 가서 선물만 전달하고, 전칠구가 말한 아이와 사진만 찍은 뒤 곧바로 나오기로 했다.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아이들을 위해 공연하는 극단이 받아야 할 관심까지 앗아갈 수 있으므로, 아주 빠르게.
그런데 어젯밤, 길우성이 용맹에게 다 들었다면서 같이 가자는 톡을 보냈다.
“선물 사는 데에 얼마 들었어?”
“보태주게?”
길우성이 씨익 웃었다.
“나도 이제 정산받는 남자야, 이거 왜 이래?”
“그럼 톡으로 영수증 보낸다.”
“엉.”
“너희 몇 시에 나가?”
빨래를 돌렸는지, 다용도실에서 나오던 이건우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12시 즈음에 나가려고요.”
“그럼 아침 먹고 가. 형이 오래간만에 밥해줄게.”
“오래간만? 처음 아니에요?”
“응? 아, 한율이 너 없을 때 했었어.”
“건우 형 싱겁게 요리 잘해.”
“칭찬이지?”
이건우가 만든 음식은 길우성의 말처럼 싱거운데 은근히 맛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서 그런지, 다른 멤버들도 하나둘 잠이 덜 깬 얼굴로 나와 식탁 앞에 앉았다.
유호가 한율과 길우성에게 말했다.
“너희 조심히, 그리고 되도록 조용히 다녀와. 뿌듯한 일 하러 갔다가 오히려 시끄러워지면 서로 상처잖아.”
“네.”
“엉.”
“혹시 오늘 거기 가는 거.”
차남석이 계란말이를 집으며 한율에게 물었다.
“기부금 사용 확인도 할 겸 가는 거야?”
“기부금이요?”
“어젯밤에 뉴스랑 포털사이트 메인에 기사 크게 떴잖아. 공익 법인 기부금 지출 내역 투명성 어쩌고저쩌고.”
“아, 그 기사 나도 봤어.”
툭. 강보배가 전자레인지에 돌린 즉석밥을 그릇에다가 엎었다.
“연예인들이 몇천만 원, 몇억씩 기부한다고 자주 기사 나는 단체가 있는데, 정작 개인기부자 명단에 그 사람들 이름이 한 명도 안 올라가 있다는 그 기사 맞지? 기부금품 지출명세서도 아리송하게 기재된 부분도 많고. 심지어 어떤 곳은 들어온 기부금을 임원 개인 통장에다 입금하고선, 기자가 취재 나오니까 잠깐 사정이 있어서 맡겨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지껄였다더라.”
“그래서 너도 이참에 기부금 사용 내역이라도 확인하러 가는 건가 했지.”
한율은 눈을 끔뻑였다.
“그건 전혀 생각을 못 했는데요.”
“너 설마… 올해 그 병원에 1억 기부한 사실 자체를 잊은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박가람이 유명한 교양 프로그램 <사람극장> 성우처럼 읊었다.
“대답이 한 박자 늦다. 잊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
한율은 못 들은 척 핸드폰을 꺼냈다.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정말 기부 관련 기사가 메인에 크게 떠 있었다.
그래서일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율 씨. 그렇지 않아도 연락드리려던 차였습니다.”
오후 1시 즈음, 한 대학병원의 어린이 병동. 한율을 보고 너무 좋아서 울음을 터뜨린 팬과 함께 사진도 찍고, 잠깐 이야기도 나누고 나올 때였다. 높은 직급을 지닌 병원 관계자가 한율을 찾아왔다.
“여기, 한율 씨가 기부해주신 1억 사용 명세서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취약계층 어린이 환자 선정부터 시작해 수술과 입원, 이후 케어. 이 모든 게 단시간에 진행되는 일이 아니다 보니 이렇게 정리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의 얼굴에선 행여나 이번 기부금 이슈 때문에 한율과 같은 기부자의 마음이 변하진 않을까, 그런 초조함이 엿보였다.
“살펴보시고, 혹시라도 의문점이 생기시면 언제든 하단에 적힌 번호로 연락해주십시오.”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율은 서류 봉투를 든 채 고개를 꾸벅였다. 나란히 선 길우성도 꾸벅. 병원 관계자를 비롯해 함께 온 다른 인원도 고개를 숙였다.
“저희야말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후엔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곤 급히 인사를 마무리했다. 매년 이곳 어린이 병동에서 공연하는 극단 사람들, 그리고 전칠구와도 인사를 나누고 나서 다시 차에 탄 건 10분 뒤.
“존경한다, 친구야.”
철컥. 길우성이 안전벨트를 매며 대뜸 말했다.
“나도 더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아빠 더 좋은 집으로 이사시켜드리고, 형편 어려워서 치료 제때 못 받는 애들 도와주고 싶다.”
“…….”
한율은 말없이 시동부터 걸었다. 뒤늦게 두 사람이 병원에 왔다는 이야기가 퍼졌는지,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주차장 쪽을 기웃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우웅.
“어? 하신한테서 전화 왔다. …어, 하신쓰. …어, 이제 병원에서 나가는 중.”
길우성이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하신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톡으로 주소 보내줄 테니까 그리로 와, 거기서 만나자. 지욱이랑 강희도 온대?]
“아니, 회사에서 안 된다고 했대. 크리스마스 이벤트로 무슨 깜짝 콘텐츠 촬영해야 한다고.”
-[OK.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톡으로 보내. 미리 주문해놓게.]
“알았다아.”
힐끗. 한율은 사이드미러와 전방을 살피며 차를 움직였다. 뒤늦게 한율의 차를 발견한 아이들이 잰걸음으로 쫓아오는 게 보였지만, 못 본 척 속도를 높여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괜히 머뭇거렸다간 더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써한, 넌 뭐 먹고 싶냐?”
“아침을 너무 많이 먹어서 별생각 없는데. 이따가 저녁 약속도 있고.”
“그렇다면 해물파전. 왜냐하면 내가 먹고 싶으니까.”
“마음대로.”
냐옹. 길우성 핸드폰에서 초코톡 알림이 울렸다. 하신으로부터 톡이 온 모양. 길우성이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띠링.
[길 안내를 시작합니다. 200m 앞 좌회전입니다.]
“야, 써한.”
“왜.”
“넌 티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생각해야 해?”
“생각해야 하냐니….”
길우성이 조금 충격받은 눈빛으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은 전방을 주시한 채 대답했다.
“너만큼 그렇게 친하진 않아서.”
“어…. 하긴, 그랬지.”
길우성이 입을 다물며 차 안은 조용해졌다. 그러기를 몇 분. 차창 밖을 바라보던 길우성이 다시 운을 뗐다.
“어제 맹이 형이 그러더라.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안 좋은 의혹과 꼬리표를 지닌 사람과는 거리를 둬야 한다고. 본인을 위해서도, 같은 팀 멤버들을 위해서도.”
“형이 맞는 말 했네.”
“하지만 티모가 정말 억울한 피해자라면? 데뷔하려고 몇 년 동안 고생했던 게 나쁜 사람들의 수작질 때문에, 가라앉지 않는 불쾌한 소문이랑 의혹 때문에 허망하게 날아간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고, 불안하겠어. 그런데 친했던 동료까지 믿어주지 않고 등을 돌리면….”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길우성이 말을 이었다.
“사람이 정말 불안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한테도 날을 세우게 되잖아. 그러다 나중에 후회하고. 나는 지금 티모가 그런 상태 같거든.”
“연락은 해봤냐?”
“어. 그런데 안 받더라. 답도 없고.”
“그럼 그냥 둬.”
신호등이 적색으로 바뀌었다. 한율은 천천히 차를 세웠다.
“지금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몇 년 동안 함께한 같은 팀 멤버들이라고 다를까.”
“멤버랑 친구는 다르잖아. 괜히 신경 쓰이게 할까 봐 오히려 멤버들한테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도 있을 거고….”
“그렇게 멤버들을 위했다면 방송국에서 후배 패는 짓은 안 했겠지.”
“아니, 그러니까 마음이 불안하고 여유가 사라지면 이성적인 판단 자체가 잘 안 되잖아.”
“행동으로 표출됐으니 이제 V12 멤버들이랑 그쪽 회사가 케어하겠지. 그리고 이것부터 차분히 생각해봐.”
길우성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한율을 보았다.
“뭘.”
“지금 네가 정말 걱정하는 게 티모인지, 아니면 네 불안한 마음인지.”
“…뭐?”
멍해진 길우성의 표정.
그 순간이었다.
“……?!”
한율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삑삑삑삑! 차에서 느닷없이 경고음이 울리더니, …쿵. 이상하리만치 바짝 접근하던 오른쪽 차선 차량이 한율의 차를 들이받았다.
아주 약하게 박아서 살짝 흔들린 정도였으나, 길우성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뭐야!”
삑삑삑삑.
한율은 일단 시끄러운 경고음부터 껐다.
“너 일단 고개 숙여.”
“어?”
“숙이라고.”
덥석. 길우성의 뒤통수를 잡아 강제로 앞으로 숙이게 한 후 조수석 창을 내렸다. 가해 차량 운전석 차창도 내려갔다.
“어머, 죄송해요! 잠깐 저리로 가서 확인해요! 제가 빨리 보험 처리해드릴게요!”
큰소리로 외치면서도 움찔움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 무던히 애쓰는 운전자. 옆에 앉은 동승자는 아예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 면면은 최근, 한율에게 새로 붙은 사생 스토커들.
한율은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을 미소로 가리며 외쳤다. 스륵. 길우성의 뒤통수를 누르는 손에서 아른거리던 푸른빛이 사그라졌다.
“일단 그 뒤에 있는 카메라 좀 내려주시겠어요?”
잘나서 인기 많은 건 죄가 아니야
차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한율은 대로변에다 차를 세웠다. 사생 스토커들이 탄 가해 차량, 한율의 차 바로 뒤 차량도 따라왔다.
한율은 뒤 차량에도 사생 스토커가 탄 건 아닐까, 잠깐 경계했었으나 곧 안심했다. 4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흥분한 얼굴로 내렸다.
“뒤에서 보니까 누가 봐도 고의로 슬슬 들이받는 것 같던데, 혹시 아는 사이에요?”
“아니요.”
곧바로 부정. 한율은 받힌 곳을 살폈다. 워낙 튼튼한 차인데다가 아주 약하게 받아서 그런지 살짝 흠이 난 정도였다. 찰칵. 그 부분을 핸드폰으로 찍었다.
“우리 블랙박스에 다 찍혔거든요. 아니, 그런데 이 아가씨는 차를 받았으면 사과부터 해야지 왜 사진만 찍고 있어? 어? 그것도 차가 아니라 사람 사진을?”
“팀장님 곧 오신대.”
길우성이 조수석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러자 흠집 난 부분을 찍는 척 한율을 찍던 가해자가 뒤 차량 운전자의 말을 무시, 한율과 길우성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들 어스래빗 맞죠? 저 기억하세요? 저 바로 어제 <락뮤닷> 사녹 방청 가서 가장 앞자리에 앉았었는데!”
알고서 일부러 쫓아와 들이받아 놓고 뻔뻔하게. 함께 차에 탔던 동승자들은 시시덕거렸다.
“우성 오빠 가까이에서 보니까 생각보다 키 크다. 비율 봐.”
“쌩얼 대박. 라방에서 본 거랑 똑같아!”
“오빠! 저희 오빠들 팬인데, 악수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돼요?”
한율은 그들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일단 보험사에 연락부터 할게요.”
“네!”
“뭐야, 연예인이에요?”
길우성도 그들의 악수 요구를 못 들은 척, 뒤 차량 차주에게 다가가 살갑게 웃으며 물었다.
“선생님, 저희가 접촉사고가 처음이라 그러는데, 경찰도 불러야 하는 거죠?”
찰칵찰칵. 사진을 찍는 건 비단 그들만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대낮, 도심 한복판 4차선 도로에서 발생한 접촉사고다. 느릿느릿 옆을 지나던 차량과 인도에서도,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의아한 시선을 던진 사람 중 몇 명이 핸드폰을 들었다.
“저거 서한율 아냐?”
찰칵.
그날 오후,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어스래빗 서한율, 신호대기 중 접촉사고 피해]
[오늘 25일 낮, 보이그룹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신호대기 중 접촉사고를 당했다.
사고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같은 팀 멤버 길우성과 ○○대학병원 어린이병원을 깜짝 방문, 어린이 팬을 만나 선물을 전달하고 돌아가던 중 발생했다.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신호대기 중인 서한율의 차를 다른 차선의 가해 차량이 접근하여 접촉사고를 냈다고 전해진다.
(서한율의 뒤 차량 블랙박스에 찍힌 사고 당시 영상)
어스래빗 소속사인 WB래빗 관계자는 ‘두 사람은 전혀 다친 곳이 없으며 사고 수습 후 곧장 지인들과의 약속 장소로 향해 휴일을 즐겼다’라고 밝혔으나, 커뮤니티 사이트와 SNS에 퍼지는 ‘가해 차량 운전자와 일행이 서한율의 사생 스토커라더라’란 의혹에 대해선 침묵했다.
한편 서한율은 개인 SNS에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어린이병원에서 무료로 공연하는 극단 ‘송이송이’ 배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그들의 선행을 홍보했다.
(사진=서한율 개인 SNS)]
-신고로 비공개된 댓글입니다.
-내 친구가 직접 봤는데 가해자들 서한율 사생 맞음. 차 상태 확인하려고 서한율 내리니까 바로 핸드폰이랑 카메라 꺼내서 차가 아니라 서한율만 좋다고 찍었다더라
-연예인 가까이에서 보겠다고 외제차를 들이받았네
ㄴ미친X들이니까ㅇㅇ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햇으면 애초에 사생이 되질 않앗것지
ㄴ외제차라고 해도 저거 그렇게 안 비쌈ㅋㅋ
ㄴ출고가만 7천이었는데 안 비싸다고?
ㄴ1억 미만 잡
ㄴ???: 아들~ 오늘도 취업 준비 안 하고 방구석에서 나 1억 미만 차ㄴㄴ 허세 부리는 거 아니지?
-크리스마스에 좋은 일 하러 갔는데 미친X들이 X을 뿌렸네
-어떤 아이돌은 사생팬들이 스케줄 차에다 불법 위치추적 장치까지 부착했다고 기사 떴던데ㅋ
ㄴ사생팬도 시대에 따라 진화 중인 거임
ㄴ사생 뒤에 ‘팬’자 붙이지 마세요. 팬이 아니라 스토킹 범죄자들입니다.
-미친 정신병자들;;
커뮤와 SNS에 사진이 급속도로 퍼진 탓일까. 한율의 사고 기사는 단숨에 연예뉴스란 메인에 자리 잡았다. 저녁에 만난 부모는 한율을 보자마자 다친 곳이 없는지 이리저리 살폈다.
“대체 자식을 어떻게 키웠기에 그런 생각 없는 짓을 벌이는지…. 그래도 다친 곳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걱정하지 마, 율아. 무슨 수를 써서든, 두 번 다시 그런 짓 못 하게 법적으로 강력 처벌받도록 할 거야.”
“모처럼 크리스마스인데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게 뭐 있냐. 잘나서 인기 많은 건 전혀 죄가 아니다.”
“우성인 괜찮아?”
“네, 멀쩡해요. 그리고 이거, 두 분께 드리려고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한율은 선물로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부모는 주차장까지 가서 한율의 차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엔 플리마켓에 내놓을 물건을 찾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작년, 지금의 아파트로 숙소를 옮긴 뒤부터 한율은 안 입는 옷이나 신발을 이곳으로 가져오지 않았다. 올해 초에도 한번 플리마켓을 위해 덜어내기도 하여, 점점 이 집에서 아들의 물건이 줄어든다는 허전한 마음일까.
모친이 쓸쓸하게 웃었다.
“이젠 내놓을 만한 물건이 별로 없네….”
가만히 모친을 바라보던 한율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씀과 달리 잔뜩 꺼내고 계시는데요.”
옷장에서 코트와 패딩 열 벌을 한꺼번에 꺼내던 모친이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이젠 사이즈가 안 맞지 않니?”
* * *
26일 새벽, <2020 설 특집 아이돌 스포츠 대회> 본선 녹화가 진행될 경기도의 한 실내종합운동장.
풀썸의 효운이 한율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한율의 두 팔을 덥석 잡고선 몸을 이리저리 휙휙 돌리며 살폈다.
“정말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진짜 사생이 저지른 짓 맞아? 미친 거 아니야?”
“어제도 톡으로 대답했지만, 저 멀쩡해요.”
어제 기사가 뜬 직후, 한율의 핸드폰에는 괜찮냐는 지인들의 연락이 연달아 들어왔다. 명절에만 안부 인사를 주고받던 이사문 감독까지. <서울 구미호> PD는 아예 영상 통화를 걸었다.
“차는?”
“차도 아주 약간 흠집 난 것 빼곤 멀쩡해요.”
다른 아이돌들의 시선도 한율을 향했다. 단순 접촉사고가 아니라 사생 스토커의 짓이란 소문이 난 까닭이었다. 사생 스토커의 범죄라면 그들에게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므로.
“법적 처벌 정말 세게 때리기를 응원한다. 진심으로.”
“노력해볼게요.”
“어제 교통사고 났었다면서요. 괜찮아요?”
그때 조금 전부터 이쪽을 힐끗하던 다른 선배 아이돌들도 다가와 물었다.
“아무리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무시하면 안 돼요. 병원에서 정밀검사는 받아봤어요?”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슷한 질문과 걱정은 말하는 사람만 달라질 뿐, 녹화 시작 전까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자리에 앉기 전, 한율은 이프림을 향해 괜찮다는 신호와 함께 환한 미소를 보냈다.
“나중에 점심 같이 먹어요, 이프림!”
“이참에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오는 사람들, 눈에 딱 보이더라.”
자리에 앉자, 차남석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 옆에서 이건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만약 다른 팀이었어도, 이번 기회에 한율이랑 말 한마디 주고받으려 했을걸? 한율이라면 왠지 우리한테 좋은 선례를 남겨줄 것 같은 기대도 들잖아.”
“천만 명의 아이돌과 아이돌 연습생들이 꼭 크게 혼쭐내주기를 바란다고, 너희 외숙부님께 전해드려.”
“네.”
“언제 우리나라 인구 중 천만 명이 아이돌이 된 거냐, 박가람이.”
“배고파.”
“우리 회사 일 봐주는 로펌이 아니라, 한율이네 외삼촌이 직접 맡아주시는 거야?”
“아니요?”
“응?”
“약간 도움만 주신대요.”
“나도 배고프다.”
아스대 본선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한율은 양궁 현장 리포터 겸 코치 외엔 따로 나가는 종목이 없어, 자리에 가만히 앉아 멤버들이나 친한 아이돌의 경기를 응원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시간엔 정말로 이프림이 모인 자리로 도시락을 가지고 올라갔다.
“한율아, 정말 괜찮아? 진짜 다친 데 없는 거지?”
“정말 괜찮아요. 쌩쌩해.”
“왜 나한텐 안 물어봐영?”
함께 올라온 길우성이 서운한 얼굴로 묻자, 이프림은 단체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달랬다.
“우리 우성이도 괜찮지이?”
“어제 라방에서 춤 지인짜 멋있게 추는 거 잘 봤어요, 오빠!”
“히.”
“그런데 어제 라방에서 나온 그 특대형 케이크, 정말로 대표님이 만든 거야?”
“네, 대표님이 따님이랑 같이 만들었대요. 정말 맛있었어요.”
“데코레이션도 진짜 귀여웠는데. 특히 그 산타토끼 사탕. 그거 결국 어떻게 했어요?”
길우성이 아래를 가리키며 고자질했다.
“가람이 형이 반으로 뚝 잘라서 라욘 형이랑 나눠 먹었어요. 진짜 잔인하지 않아요?”
“우성이 너두 토끼 케이크 막 잘랐잖아. 오른쪽 귀는 내 거다! 막 이러면서.”
“히.”
점심시간이 끝난 후엔 바로 양궁 본선이었다. 한율과 길우성은 이프림과 후식으로 나온 호두과자까지 나눠 먹고 나서야 일어났다.
“우린 이제 가서 분장 준비해야겠네요. 갔다 올게요.”
“응! 잘해, 얘들아!”
“이번에야말로 엑스!”
길우성이 머리 위로 두 팔을 교차하자 이프림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텐!”
잠시 후, 양궁 본선 시작.
올해도 아스대 MC를 맡은 정태현이 다른 MC들과 떠들었다.
[지난 추석 특집 때 저랑 한율 씨랑 내기했었잖아요.]
[엑스텐이 나오면 한율 씨가 전 출연 아이돌에게 비싼 피자 쏘고, 정태현 씨는 실패한다에 치킨 거셨었죠?]
[그런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뭔가 이상한 거예요. 아니, ‘전 아이돌 동료를 믿습니다!’ 이 멋진 멘트랑은 다르게, 엑스텐은 안 나올 확률이 더 높잖아요? …서한율 쟤 대체 뭐지?]
[제대로 도발에 걸리셨죠.]
[일부러 도발에 넘어가 주신 거 아니었어요? 선수분들에게 맛있는 거 사주시려고?]
[아, 그런 걸로 칠까요?]
[이미 늦었어요.]
MC들의 대화가 스피커를 통해 장내에 크게 울렸다. 그러나 한율은 안 들리는 척, 고운 빛깔 도포 자락을 살랑이며 느긋한 걸음으로 등장했다. 대형 전광판에 얼굴이 크게 잡히는 순간엔, 들고 있던 부채를 촤악 펼치며 얼굴을 반쯤 가렸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화사한 눈웃음과 가벼운 윙크.
꺄아아악! 조금 전까지 함께 호두과자를 먹었던 이프림이 목청껏 환호성을 질렀다. MC 정태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스래빗! 올해엔 아주 대놓고 한율 씨의 드라마를 홍보하고 있어요? 그것도 MBS에서 타 방송사 드라마를…?! 꽃선비 한율 씨를 따라, 귀여운 우성 구미호, 라이언 구미호가 등장합니다.]
한편 그 시각,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오동식 팀장은 조금 이해하기 힘든 전화를 받았다.
“…네?”
바로 어제 서한율의 차를 들이받고선 고의가 아닌 실수라고 박박 우기던 가해자들이, 돌연 담당 경찰에게 ‘일부러 한율이 차 들이받는 건 어때요?’ 이런 대화가 오간 초코톡 스샷을 전송했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모자라서 지금껏 서한율을 따라다니며 몰래 찍은 사진과 영상, 저들끼리 SNS와 커뮤에서 나눈 저급한 게시글 캡처까지 몽땅.
-[경찰이 ‘이거 뭐냐’ 물어보니까 자기넨 그런 거 보낸 적 없다고 또 발뺌하고 있다네요. 아니, 본인들 핸드폰이랑 메일로 다 전송해놓고선 해킹이라도 당했다는 건지…. 어쨌든 이걸로 고의성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끊은 오 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이 바닥에서 10년 동안 일하며 별의별 사람을 다 겪어봤지만, 사생 스토커들의 사고체계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응? 팀장님.”
뒤를 지나가던 매니지 A팀 직원이 오 팀장의 모니터를 보곤 멈췄다.
“이 사진들은 다 뭐에요? 스타일리스트 팀에서 보낸 거예요? 예쁜 거 많은데요?”
“한율이가 플리마켓에 내놓을 물건 사진입니다.”
“이걸 다요? 어? 이 시계 예쁘다. 어디 거지?”
“브랜드는 기억 안 나는데, 우리 월급보다 더 비쌌습니다.”
“와우….”
우웅. 그때 키보드 옆에 내려놓았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오 팀장은 액정에 뜬 이름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남석이 생일이라서 전화하셨나?
“네, 할아버님. 오동식 팀장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어제오늘 일인가요
[쏘기 전에 각오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길우성 씨.]
한복 입은 구미호 분장을 한 길우성이 카메라를 향해 외쳤다.
[차남석! 생일 축하한다!]
대형 전광판. 동생의 반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차남석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꺄아아악! 이프림의 즐거운 환호성이 울리는 가운데, 원카운트 리더는 진심이 담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 쟤. 노래도 잘하는데.”
“춤도 잘 추고 연기도 잘하죠.”
“다 가졌네, 다 가졌어. 키도 크고.”
“다는 아닐걸? 작년에 쟤네 아버지 빚 사건 기억 안 나? 채권자가 소속사에 전화해서 돈 대신 갚으라고 한 거, 막 기사에 뜨고 그랬었잖아.”
“아, 그게 쟤였나?”
“…….”
“야, 나기혁. 넌 아까부터 뭘 그렇게 힐끗거려.”
리더가 팔꿈치로 나기혁을 툭 쳤다. 나기혁이 화들짝 놀라며 리더를 돌아보았다.
“어? 아니… 그냥.”
찬형은 나기혁이 힐끗거린 곳을 살폈다. 같은 소속사 걸그룹 퍼플아워가 있는 곳이었다. 퍼플아워의 루아가 옆에 있는 아이허니의 유린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너 자꾸 루아 보면서 티 내지 마라. 위에서 팬들 다 지켜보고 있다.”
리더의 주의에 나기혁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았어, 주의할게.”
루아와 싸우기라도 했나. 둘은 사귄 지 2년 가까이 되었는데, 가끔 싸운 것으로 보일 때엔 주로 나기혁이 헤어질까 봐 쩔쩔매는 쪽이었다.
바람이나 피우는 주제에 말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안 보이네?”
“누구?”
“V12의 티모.”
나기혁이 미간을 찡그렸다.
“소속사가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주먹질한 놈을 스케줄하라고 내보내겠어? 그것도 피해자도 같이하는 스케줄인데?”
“그런데 걔 원래 그런 성격이었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모르지, 뭐. 연차 쌓이면서 슬슬 본색 드러내는 것일지도.”
[아…. 길우성 선수, 아쉽게 간발의 차이로 9점입니다.]
양궁 결승 전엔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넓은 장내에 치킨 특유의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양궁 출전 선수들은 한데 모인 상태로 치킨 상자를 열었다.
“올해도 네 덕에 포식한다, 한율아. 고마워.”
“감사합니다, 한율 선배님!”
“제가 사는 것도 아닌데요, 뭘.”
“태현 선배님, 올해도 일부러 도발에 넘어가 주신 것 같지?”
“응.”
한율은 한복이 구겨질까, 조심조심 라이언과 길우성 앞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치킨 대신 치즈볼을 집었다. 근처에 앉아있던 아이허니의 서래가 슬쩍 말을 건넸다.
“잘 먹을게요!”
“네, 맛있게 드세요.”
“그런데… 정말 몸 괜찮으신 거 맞죠?”
“네.”
“다행이다.”
살랑.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서래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관객석과는 거리가 멀어 팬들 눈엔 잘 보이진 않겠지만, 가까이에선 한율에게 이성적 호감을 표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법한 표정과 제스처였다.
한율은 예전, 음악방송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서래가 자신의 주머니에 초코바를 넣고 도망쳤던 일을 떠올렸다. 초코바 포장지엔 귀여운 토끼와 하트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그 뒤론 별일 없이 시간만 흘러, 그때 품었던 가벼운 호감도 자연스레 사라졌다고 생각했건만.
“지리산.”
“…네?”
멀뚱히 서래와 한율을 번갈아 보던 라이언이 대뜸 서래를 향해 말했다.
“정상까지 당일 왕복 가능해야 해요.”
“…….”
서래의 눈썹 끝이 처연하게 내려갔다. 주어는 빠졌지만,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단번에 파악했다는 듯.
스카이러너의 용맹이 살짝 얼굴을 내밀며 한율에게 물었다.
“그 조건, 진심이었어?”
“노코멘트 할게요.”
“…….”
길우성은 조용히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닭날개를 물었다. 바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