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84/427)

* * *

“새벽부터 나와서 종일 고생했다, 얘들아. 남석인 생일이었는데 제대로 파티도 못 하고 어떡하냐.”

아스대 녹화는 자정이 훌쩍 지나야 끝났다. 실내종합운동장 주차장을 벗어난 어스래빗의 차는 곧장 서울의 MBS를 향해 달렸다.

“크리스마스 라방할 때 미리 한꺼번에 해서 괜찮아요.”

“남석이 너 오늘 전광판에 크게 잡힐 때마다, 애들이 너 진짜 잘생겼다고 감탄하더라.”

“어제오늘 일인가요.”

“와, 우와. 나도 저런 말 당연하다는 듯 담담하게 한번 해보고 싶다.”

“그런데 너희들.”

잠시 신호에 걸려 멈췄을 때, 조유찬이 룸미러를 통해 멤버들을 살폈다.

“오늘 다른 애들이랑 뭐 별일 없었지?”

“무슨 별일이요?”

“선수들끼리 모였을 때 말이야. 아무래도 여자애들하고도 가까이 있게 되니까… 조금 걱정돼서.”

“나는 떳떳하다! 1!”

박가람이 느닷없이 눈치 게임을 시작했다. 유호와 이건우가 질세라 연달아 외쳤다.

“2!”

“3!”

“…4!”

동시에 4를 외친 차남석과 라이언이 서로를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던 강보배가 뒤늦게 손을 들었다.

“6!”

“7이요.”

“…마지막 한 명 누구냐.”

“막내. 얘 벌써 입 벌리고 잔다.”

“막내도 이상 무입니다, 매니저님. 제가 장담합니다.”

“응, 그래. 안심이네.”

몇 시간 후. MBS 연말 특집방송 리허설을 마친 어스래빗은 숙소로 귀가했다. 3시간 자고 일어난 뒤엔 KBC로 가서 내일 있을 <뮤직뮤직 대축제> 리허설을 진행했다.

“너희들 MBS랑 KBC 무대 구성이랑 동선 헷갈리면 안 된다.”

“네에.”

“어차피 곡 하나는 다른데요, 뭘.”

“불안하니까 리허설 영상 계속 돌려봐.”

“네에….”

오후엔 다시 MBS로 가서 최종 리허설을 진행, 생방송 시작 2시간 전에 단장을 받고 내내 대기하다, 무대로 올라갔다. 부른 곡은 와 .

내일 KBC <뮤직뮤직 대축제>와 모레 SBC 연말 특집방송에도 을 부르기로 하여, 컨셉과 엔딩 무대 포즈에 차별을 두기로 했다.

-이프림, 어스래빗 쓰리피스 슈트 누아르 컨셉에 치여 사망

-ㅁㅊ 비율 개 쩔어ㅜㅜ

-어제 아스대에서 호두과자 욤뇸뇸 먹던 톢이들 어디 갔지

-가족들 다 같이 보는 연말 특집방송에서 이게 무슨 황송하기 짝이 없는 무대를

다음 날 28일은 내일 있을 SBC 연말 특집방송 리허설을 갔다가 KBC로 향했다.

“우리 어제 무대 사진 예쁘게 잘 나왔다.”

“거울로 봤을 땐 아이섀도가 좀 과하지 않나 했는데, 괜찮네.”

“오늘 우리 5분 40초다.”

“무대 시간?”

“어. 작년엔 4분 10초였잖아. 1분 30초 더 늘었어.”

“크으.”

“순서도 1부 초반에서 2부 마지막 두 번째로 밀렸고.”

“크으. 1년 동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라이언이 고개를 갸웃하며 해맑게 대답했다.

“칠레 조명 사고?”

“…….”

“…이언아.”

“그렇다. KBC는 우리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다.”

“그런 것 치곤…. 우리 올해 음방 빼곤 KBC에서 섭외받은 적 한 번도 없지 않아?”

“어? 그러고 보니?”

멤버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율을 향했다. 한율은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훑으며 대답했다.

“네, 저 때문인 것 같네요.”

[어스래빗 서한율 교통사고 가해자, 스토킹 행위 자백]

기사 내용은 오 팀장에게 전화로 들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한율의 차를 들이받자며 모의한 초코톡 스샷을 비롯해, 지금까지 한율을 몰래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담당 경찰관에게 보냈다는 것. 그러고선 본인들이 보내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했다가, 결국 빼도 박도 못할 증거 때문에 자백했다는 내용이었다.

‘계나리 짓인가.’

“편애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지 않기 위해, 오히려 차별받고 있었단 소리…?!”

조유찬이 작게 한숨 쉬었다.

“얘들아, KBC엔 본래 아이돌이 출연할 법한 예능 자체가 적잖니.”

“아, 그랬지. <아이돌 장학퀴즈쇼>도 폐지됐잖아.”

“요즘 3사 방송국이 그런 추세긴 하지. 이 바닥도 이젠 지상파만 고집하지 않고, 온갖 플랫폼 통해서 자체 콘텐츠를 내보내니까.”

“그렇게 점점 대중과 멀어지는 걸까. 슬프당….”

<뮤직뮤직 대축제> 최종 리허설이 진행되는 무대 앞에는 그제와 어제, 조금 전 SBC에서도 마주친 원제로가 앉아있었다. 무대에선 아이허니의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하이.”

“또 보네.”

“…….”

“…….”

편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두 팀의 멤버들. 그러나 정민솔과 라이언은 서로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라이언이 끝내 정민솔의 랩 피처링 부탁을 거절한데다, 이곳엔 지켜보는 팬들도 없어서 그런지 본래대로 서먹해졌다.

“작년 생각난다.”

라일이 문득 말을 꺼냈다.

“작년에 우리, <뮤직뮤직 대축제> 리허설 끝내고 대기실 가다가 한율이네 아버지랑 마주쳐서 인사 나눴었잖아.”

“하필이면 라일 형이 서한율한테 누나 있었으면 당장 소개해달라고 했을 거라고 말할 때였었지.”

“그리고 강희가 한율이 형네 아버지라고 말하자마자, 라일 형 표정.”

변지욱이 ‘뭉크’의 <절규> 속 인물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머쓱하게 한율의 눈치를 살피던 라일이 변지욱의 머리에 손을 턱하니 올렸다.

“내가 언제 그랬냐.”

“진짜 딱 이랬는… 아파, 이 싸람아!”

“뭐? 이 싸람? 형한테, 이 싸람?”

“난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은 형으로 취급 안 한다!”

“아니, 그렇게 세게 누르지도 않았…!”

그때 잠깐 멈췄던 아이허니의 노래가 다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다툼은 큰 음악 소리에 묻혀 저절로 잦아들었다.

원제로의 리허설이 시작될 땐 어스래빗 뒤 순서인 스타믹스가 도착했다.

“얘들아, 밖에 눈 온다?”

“눈 와요? 펑펑?”

“펑펑 정돈 아닌데, 밤에는 많이 내릴 거라고 하더라.”

“안녕하세요, 선배님. 또 뵙네요.”

“어, 하… 이.”

인사를 받던 JE가 중간에 말을 흐리다가 맺었다. 한율은 그의 시선이 잠시 자신의 배후를 살핀 걸 알아차렸지만, 태연히 모른 척했다.

JE도 다른 이야기를 했다.

“너희 이번 플리마켓 응모, 언제 시작이야?”

“다음 주 금요일이요. 왜요?”

“네 SNS에 올라온 사진 봤는데, 내가 갖고 싶었던 시계가 있어서.”

최종리허설을 마친 뒤엔 샵으로 가서 단장을 받았다.

오후 5시. 레드카펫 생중계가 시작될 즈음 다시 <뮤직뮤직 대축제>가 진행될 공개홀.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송이를 맞으며 레드카펫을 밟고, 포토존에서 준비한 여러 포즈를 취했다.

올해도 레드카펫 MC를 맡은 정태현이 매끄럽게 어스래빗을 소개했다.

“올해 10개국 15개 도시 월드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며, 명실상부 대세 K-POP 아이돌 반열에 오른 어스래빗이 입장합니다. 1년 동안 부쩍 성장한 만큼, 올해엔 미소에서 여유가 보이네요.”

재작년과 작년, 한율에게 ‘국장님 아드님’이라고 비꼬듯이 어그로를 끌었던 개그맨 강바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자리를 대신한 다른 개그맨이 감탄사를 냈다.

“1년 동안 비주얼도 다들 훤칠해졌어요. 이제 장가가도 되겠는데요?”

“네? 막내 멤버들이 이제 고작 스무 살인데 무슨 소리세요.”

“아, 국장님이 들으시면 깜짝 놀라시겠네요.”

<뮤직뮤직 대축제>가 생중계되는 너튜브 실시간 채팅창.

-잘생긴 애 옆에 귀여운 애 옆에 잘생긴 애 옆에 귀여운 애 옆에 잘생긴 애 옆에 귀여운 애 옆에 멋진 애 옆에 잘생긴 애

-강바로 어설픈 짝퉁 버전인가? 약하네

-강바로 어디 감?? 이번엔 진짜로 서한율이 보내버림??

-장가라니 허락 못 한다

-[어스래빗의 미국 방문은 언제인가요?]

-강바로 여름에 음주운전 걸려서 아웃됨

-♡♡♡♡♡♡♡♡어스래빗 사랑합니다♡♡♡♡♡♡♡♡

-지금 당장 장가가면 팬들 폭동 일으킨다

-너희들 강바로 무시하지 마라. 작년에 ‘PD님 미국 가셨어욧!’ 이 말 해서 칠레 뮤뮤 조명 사고 터지고 진짜 뮤뮤 PD 잘렸자나

-[나는 사랑스러운 토끼들이 우리나라에도 방문해 줄 거라 믿는다]

-눈 점점 많이 오는데.. 별일 없겠지?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엔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아이돌 A군 본가 무단침입 상습 절도범 잡혀]

[지난 26일, 인기 아이돌그룹 멤버 A군의 고향 집을 상습적으로 무단침입하며 A군의 물건을 훔친 B씨가 A군의 아버지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몇 달 전부터 A군의 고향 집 인근을 배회하던 B씨는 A군의 가족에게 말을 걸거나 무단으로 마당과 집안까지 들어와 사진을 찍거나 집안일을 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벌였으며, A군의 어린 시절 물건을 상습적으로 훔쳐…(중략).]

-ㅈ1ㄹ났네 진짜

향수 뭐 써요?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어요? 아니면 지금 이 복장 그대로?”

어스래빗 단독 대기실. 그곳엔 이미 스태프들이 무대의상과 소품을 가지런히 정리한 상태였다. TV에선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뮤직뮤직 대축제> 레드카펫 영상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공연은 2부 후반이라 멀었으니까, 지금 복장 그대로 가는 게 낫겠다. 무대의상이 더 불편하잖아.”

“네.”

“물 가져가도 돼요?”

“네, 네.”

멤버들은 거울을 한번 살핀 뒤 단체 대기실 인터뷰가 열릴 장소로 향했다. 넓은 대기실에는 앞서 레드카펫을 밟은 팀들이 먼저 와 있었다. 대부분 아스대부터 함께 녹화했던 이들이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곤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뒤쪽에서 한 남녀 아이돌의 조심스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계주 때 넘어지신 거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아, 그런데 말 놓기로 하지 않았…나?”

소위 ‘만남의 장’이라 불리는 아스대 녹화를 계기로 친해진 사이인 듯했다.

음방이야 대기실 인사나 엔딩 무대에서만 잠깐 마주치고, 스태프들도 곁에 있어 친해질 시간이 짧다. 그러나 아스대는 온종일 녹화하는 데다, 다들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 머리론 안 된다는 걸 잘 알아도, 한번 생긴 호감은 쉽게 통제하기가 힘들다.

“안녕하세요, 퍼플아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퍼플아워 멤버들이 꾸벅꾸벅 인사하며 들어왔다.

“은수야!”

아이허니의 유린이 진은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좀 늦었네? 우리보다 먼저 들어오지 않았어?”

“잠깐 옷에 문제가 생겨서요. 그것 좀 고치느라 늦었어요.”

“그렇구나. 난 또 일부러 늦게 들어온 줄 알았네.”

유린이 일어나 진은수의 두 손을 잡고 흔들흔들. 아스대 녹화 때 바로 옆자리에 앉으며 퍽 친해진 모양이었다.

“우리 귀여운 은수, 빨리 보고 싶었는뎅. 밥은 먹었어? 어떡해, 이틀 사이에 살 더 빠진 것 같은데. 혹시 다이어트하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선배님은 저녁 드셨어요?”

“먹고 싶었는데… 이것 봐. 허리라인 딱 드러나는 옷을 입는데 어떻게 먹어, 참아야징….”

힐끗.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던 유린의 시선이 잠시 퍼플아워 리더 루아를 향했다.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던 루아가 돌연 한율에게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 나중에 사인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인이요?”

“네. 우리 사촌 동생이 선배님 팬이라고, 제에발 설 선물로 사인 대신 받아다 달라고 부탁해서요. 안 될까요?”

동료 간의 이런 부탁은 흔한 일이라, 한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안녕하십니까, 원카운트입니다.”

이번엔 대기실로 원카운트가 들어왔다. 다른 아이돌 전부 그쪽을 향해 묵례했으나, 루아는 나기혁만 힐끗하고선 한율을 향해 웃었다. 누가 봐도 한율에게 호감이 있다 착각할 정도로 환하고 부드럽게, 애교를 담아.

“고마워요, 선배님. 나중에 대기실로 찾아갈게요.”

물론 당사자인 한율은 연기란 걸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말이다.

한율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기혁의 시선을 담담히 흘려넘겼다.

“네.”

그러곤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옆에서 길우성과 강보배가 진지한 얼굴로 대화하고 있었다.

“내가 찾은 스타아이의 최대 강점은 이거야.”

“뭔데?”

“스타아이에 모르는 걸 올리면, 전문가 이프림이 등판해서 핵심만 콕콕 집어서 정답을 알려줘. 전에 내가 ‘블랙홀은 정말 존재할까요?’라고 물어봤더니 일…반 상대성 이론? 이거에 관해서 먼저 설명해주시는데, 결국엔 하나도 이해 못 했어.”

“앞으론 묻지 마. 바보인 거 들키잖아.”

“이미 알고 계신 것 같던데?”

박가람이 슬쩍 끼어들었다.

“보배 너 구구단 약한 것도 다 알고 계시더라.”

“그건 전에 콘텐츠 촬영할 때 구구단 퀴즈가 나와서….”

강보배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우물쭈물하자, 길우성이 벌떡 일어나 박가람에게 아이처럼 외쳤다.

“우리 보배 구구단만 못 하지, 바보 아니다! 무시하지 마라!”

“…너 이리 와, 길우성.”

“저거 점점 형들 이름 막 불러, 이제?”

큭큭. 가까이에 있던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율은 빨리 대기실 인터뷰가 시작되기를 바랐다.

잠시 후, 단체 인터뷰가 끝나고 <뮤직뮤직 대축제> 시작 10분 전. 정말로 루아가 어스래빗 대기실을 찾아왔다. 영화 <고양이 난로> DVD 한정판 세트에 포함되었던 포토북을 들고, 진은수와 함께.

“안녕하세요….”

진은수는 마지못해 끌려온 듯한 인상이었다.

“혼자 오면 모양새가 조금 이상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은수랑은 광고 모델로 같이 활동해서 친하시잖아요. 여기, 유호 선배님도 계시고.”

보통 여자 아이돌은 남들에게 오해 살까, 보이그룹 대기실엔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매니저를 통하거나 문밖에서 사인받을 물건만 건넬 거라 생각했건만, 루아는 진은수의 손을 잡고 당당히 안까지 들어왔다.

이미 들어온 사람들더러 나가라고 하는 건 더 이상하여, 한율은 손을 내밀었다.

“어디다 하면 될까요?”

루아가 포토북과 펜을 건넸다.

“앞장이요. 동생 이름은 ‘소민’이고, 내년에 중학교 입학해요.”

한율은 루아가 준 정보를 토대로 적절한 메시지를 적었다. 라이언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더니 참견했다.

“<고양이 난로>잖아. 고양이도 그려줘.”

“그럴까요?”

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주시면 더 감사하죠. 소민이가 진짜 좋아하겠다.”

“은수야, 마카롱 먹을래?”

진은수는 음악방송 MC 일 외에 이렇게 보이그룹 대기실에 오래 있는 건 처음이라는 듯, 안절부절못하다가 유호를 보고선 조금 진정했다.

“아뇨, 괜찮아요. 흐….”

그 사이 한율은 찐빵처럼 생긴 고양이가 윙크하는 낙서로 마무리, 포토북과 펜을 내밀었다.

“여기요.”

“고마워요, 선배님. 아, 라이언.”

“……?”

라이언이 뚱한 얼굴로 루아를 바라보았다.

“혹시 은혜랑 연락해? 그저께 걔한테 번호 물어보려고 했는데 깜빡했어.”

아림에서 함께 연습생 생활을 했던 ‘스마일 썬’의 최은혜를 말하는 모양. 그리고 라이언과 루아, 최은혜 모두 스물한 살 동갑이었다.

“안 하고, 번호도 몰라.”

“톡 친추도 안 했어?”

“응.”

“그래, 알았어. …그럼 수고하세요. 가자, 은수야.”

“네…! 수고하세요, 선배님. 수고하세요….”

근처에 앉아있던 박가람이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가십쇼, 손님.”

두 사람이 나간 뒤, 한율은 테이블에 두었던 텀블러를 집었다. 그러다 구석진 곳에서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차남석을 발견했다.

“남석이 형은 왜 저래요?”

“몰라? 조금 전에 누구랑 통화하는 것 같더니, 그 후로 내내 벽에 붙어서 저런다.”

그때 차남석이 고개를 들더니 한율을 바라보았다. 그가 곧장 다가왔다.

“야, 서한율. 네 별장 지어준 곳 말이야, 비쌌어? 남양주까지도 와서 작업해줄까?”

“글쎄요. 저 같은 경우엔 외할아버지 소개로 작업을 의뢰한 거라. 할아버지 집, 새로 지으려고요?”

차남석은 연습생 생활이 길어 그만큼 회사에 쌓인 빚도 많았다. 그러나 어스래빗 단체 CF 외에도 단독 CF, 드라마와 투어 수익금이 적잖게 들어와, 회사에선 이제 그의 사정을 고려해 수익 중 일정 비율을 빚으로 차감하지 않고 정산해주고 있었다.

“어, 지금 사시는 그 동네에. 토지 매입부터 해야 하나?”

아주 당연한 걸 묻는 것도 그렇고, 평소답지 않게 경황이 없어 보인다.

“그래야죠.”

“왜 그래, 차남석이. 무슨 일 있어?”

차남석은 대기실에 있는 다른 스태프들을 둘러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게…. 내일 스케줄 끝나고 말할게요.”

한편, 퍼플아워와 드림래빗이 함께 사용하는 대기실. 루아와 진은수가 돌아오자, 퍼플아워 막내 송의연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진짜 한율 선배님 사인받고 온 거야?”

“응. 그럼 뭐 거짓말인 줄 알았어? 이렇게 한정판 포토북까지 챙겨왔는데?”

“봐도 돼?”

루아는 흔쾌히 포토북을 내밀었다. 포토북을 펼친 송의연은 서한율의 사인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님 글씨 진짜 예술이다. 아, 고양이 귀여웡~.”

그러더니 입술을 삐죽거리며 진은수와 루아를 번갈아 보았다.

“은수 언니 말고 나 데려가지.”

“미쳤어? 너 데려가면 분명 건우 선배님만 뚫어져라 쳐다볼 텐데?”

“그래도… 은수 언니보단 티 안 났을걸?”

진은수는 화들짝 놀라 바로 부정했다.

“무슨…! 소리야…. 티 날 것도 없는데….”

“그래. 은수 얘, 가서 벽만 봤어. 인사도 벽 쪽으로 하더라.”

“그런데 언니 요즘 좀 이상한 거 알아? 왜 그렇게 은수 언니만 챙겨? 아스대 때도 화장실 갈 때마다 은수 언니만 데리고 가더니?”

하. 루아가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괜히 그러겠어? 저번부터 유린이 자꾸 얘한테 집적대잖아. 막 친한 척하고.”

“아이허니 유린? 왜? 친해지면 어때서.”

루아가 드림래빗 멤버들과 스태프들이 있는 곳을 살피곤 목소리를 낮췄다.

“걔 왠지 느낌 좀 싸해. 웃으면서 말하는데 이상하게 사람 무시하는 기분도 들고, 또 나한테 그러더라. 사람 보는 눈 좀 키워야겠다고. 참,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친 루아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음방 MC 하나 겨우 붙들고 있는 주제에.”

“그 소문 때문에 싸한 건 아니고?”

“소문? 무슨 소문?”

“저기….”

진은수는 그만하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틀 전 아스대 때 옆에 앉으며 가까워진 터라 아직 유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험담하는 것 또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얘기는….”

“그 언니, 완전히 남돌 킬러라던데?”

송의연은 진은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아랑곳없이 말을 뱉었다.

“밝고 순진하고, 잘 챙겨주는 그런 이미지에 넘어가서 놀아난 애들이 한둘이 아니래.”

“그만….”

“진짜? 대박이다. 대체 어떤 머저리가 그런 애한테 넘어가는지, 면상 한번 보고 싶네. 가만, 그러면 JE 선배님이랑도 뭐 있는 거 아니야? 둘이 오랫동안 MC 했었잖아. 스페셜 무대도 자주 하니까 같이 연습실에 있는 시간도….”

진은수는 조금 더 성량을 높였다.

“그만 해요.”

그제야 루아와 송의연의 시선이 진은수를 향했다. 진은수는 이쪽 대화를 못 들은 듯한 사람들을 살피곤 또박또박 말했다.

“다른 사람 이야기 함부로 하면, 나중에 본인에게도 똑같이 돌아온다는 거 다 알잖아요.”

“…….”

풉. 송의연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뭐래, 이 언니. 한동안 말 잘 들어줬더니 진짜.”

“송의연. 여기 단독 대기실 아니다. 표정 관리해.”

루아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하자 송의연도 활짝 웃었다. 그러곤 진은수에게 말했다.

“왜? 언니도 음방 MC 하면서 관심 많이 받으니까 동질감 느껴져서 그래? 언니도 혹시…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의심과 모욕. 진은수의 커다란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의연이 너 그 말… 너무 심하다는 생각 안 들어?”

“뭐가? 언니도 인기 많지 않냐고 묻는 건데, 이게 심한 말이었어?”

“메이크업 지워져. 오늘 무대 망칠래, 진은수? 메이크업 선생님들 다 돌아갔는데?”

휙. 진은수는 몸을 돌리곤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물이 바깥으로 번지지 않도록 천천히 삼키며, 손으로 부채질했다. 루아의 말처럼 무대에 멀쩡한 모습으로 올라가야 하기에, 의심과 경멸의 눈초리에 푹 찔린 아픔도 꾹꾹 참았다.

…훌쩍. 그러다 이들과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어져, 대기실을 나갔다.

타악. 닫힌 문을 보며 송의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착한 척 내숭은. 쟤도 분명히 폰 쥐여주면 남자 장난 아니게 꼬일걸?”

진은수는 복도 벽에 기댄 채 크게 심호흡하곤 천장을 보았다. 눈치 없는 눈물이 다시 비집고 나오려 했다.

‘사이가 나쁜 팀은 어디에도 있어. 우리도 그럴 뿐이야.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할 순 없는 거잖아. 비즈니스 관계인 사람의 선 넘는 말에 일일이 상처받지 말자, 진은수. 비즈니스 관계, 비즈니스 관계….’

그렇게 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깜빡거리며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데, 앞을 지나던 이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

스타믹스의 JE였다.

이젠 괜찮겠다 싶어, 진은수는 천천히 고개를 바로 하며 변명부터 했다. 퍼플아워 불화설이 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므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아…. 안약을 너무 많이 넣어서요. 왜 그러세요, 선배님?”

“이런 질문 상당히 뜬금없고, 어쩌면 불쾌하게 들릴 거 아는데요.”

“……?”

의아해하는 진은수를 향해 JE가 미간을 찡그렸다.

“향수 뭐 써요?”

문제 생기는 건 아니겠지?

그러잖아도 물기가 어려, 혹시 우는 건 아닐까 했던 진은수의 눈에 정말로 눈물이 맺혔다.

“…네?”

떨리는 목소리와 상처받은 표정. JE는 아차 했다. 행여 진은수에게도,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수작질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을까 선을 긋고 말한다는 게 과한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향기가 너무 좋아서… 아니, 그게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있으면 차가운 인상이란 사실도 잠시 잊었다. 여기에 미간까지 찡그렸으니, 마치 이상한 냄새라도 난다는 듯이 들렸을 터.

“…흐윽.”

“미안해요, 은수 씨. 상처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JE를 당혹스럽게 만든 건 한 가지 더 있었다. 한걸음 가까이 다가간 순간, 진은수에게서 나던 좋은 향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대신 ‘진짜’ 향수 냄새가 났다.

무심결에 ‘진짜’ 향수 냄새니, 뭐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하고.

“뭐 하냐, 손지은?”

설상가상, 막 옆 대기실에서 나오던 아이허니의 유린이 사나운 기세로 다가왔다. 유린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 떨어뜨릴 것 같은 진은수, 그 앞에서 잔뜩 당황해하는 JE를 번갈아 보았다.

“너 지금 은수 울린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파닥파닥. 진은수는 고개를 젖힌 채, 눈에다 손부채질했다. 루아와 송의연 때문에 마음이 퍽 약해진 상태라 그럴까. 조금 전 JE의 말과 표정이 아프게 와 닿았지만, 점점 이쪽으로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 무서웠다.

“…아니에요, 선배님.”

흡. 진은수는 호흡으로 눈물을 강제로 삼키곤 유린을 바라보았다.

“제가 막 안에서 안약을 넣고 나왔는데, 실수로 너무 많이 넣어서, 그래서 선배님이 우는 거냐고 걱정해주신 거예요.”

그러곤 곧바로 JE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어? 아니….”

고개를 든 진은수는 유린을 향해 입가를 올리며 활짝 웃었다. 그러곤 씩씩한 몸짓으로 대기실로 들어갔다.

탁. 닫히는 문을 보던 유린의 시선이 JE를 향했다.

“진짜야? 아닌 것 같은데?”

JE는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내가 나중에 따로 사과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뭐야, 은수한테 대체 뭐라고 그랬는데.”

“좀 오해할 만하게 했어. 그 이상 묻지 마. 사람들 입에 은수 씨 오르내리게 할 거 아니면.”

JE는 대충 말을 마무리하곤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당장 다시 문을 두드려 불러내 사과하기엔, 이쪽을 향한 시선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유린은 황당한 얼굴로 멀어지는 JE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야?’

“언니, 무슨 일이래?”

그러다 뒤에 다른 아이허니 멤버들이 있단 걸 깨닫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별일 아니야. 은수가 안약을 많이 넣었는데, 손지은이 그걸 보고 운다고 착각했나 봐.”

“아아…. 그런데 언니, JE 선배님보다 한 살 아래잖아. 그렇게 막 이름으로 불러도 돼?”

“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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