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20년 1월 1일, WB래빗 엔터테인먼트.
한율은 스타일리스트팀에서 준비한 한복으로 갈아입고 로비로 나왔다. 평소엔 공휴일에도 근무하러 나오는 직원들이 종종 있었으나, 오늘은 신정이라 그런지 건물 안은 평소보다 훨씬 조용했다.
“한율이 넌 쉬는 날이 없어서 어떡해? 많이 피곤하지?”
뒤이어 스타일리스트팀 사무실에서 나오며 강보배가 물었다.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촬영 중간에 쉬는 시간이 많아서 괜찮아요. 그보다 제가 더 미안한걸요. 새해 첫날부터 일하게 해서.”
오늘은 설에 맞춰 올라갈 그린라이브 콘텐츠를 촬영하는 날이었다. 사실 매니지 팀에선 되도록 1월 1일 촬영은 피하려고 했으나, 가까운 시일에 잡힌 한율의 휴일이 오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첫날부터 일복이 있으면 쭈욱 일이 많다잖아. 우리, 올해도 아주 바쁘려나 보다.”
긍정적인 미소.
한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형도 사무실에 걸린 올해 스케줄 봤죠?”
“응. 대박이더라.”
어스래빗은 한율의 드라마 촬영이 끝나자마자 컴백과 두 번째 월드투어 준비에 돌입한다. 컴백 시기는 6월이나, 그전엔 우승 상품으로 받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촬영하기로 했다. 7월부턴 서울부터 시작해 몇 달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잠깐의 휴식 후 다시 컴백할 예정.
“오늘이 겨우 1월 1일인데 벌써 하반기 투어 준비라니…. 더구나 우리, 국내에서 컴백 쇼케 말고 단독 콘서트 하는 건 처음이잖아. 진짜 떨린다.”
“추워, 보배?”
그때 스타일리스트팀 사무실에서 라이언이 나오며 물었다.
“편의점에서 호빵 사줄까?”
“아냐, 괜찮아.”
“내가 먹고 싶어서 그래.”
“어….”
로비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조유찬이 끼어들었다.
“호빵은 가다가 한적한 편의점에서 사자, 얘들아.”
WB래빗 건물과 비스듬히 마주 보는 편의점에는, WB래빗 소속 아이돌그룹의 팬들이 점령 중이었다.
“네에.”
한율은 다른 멤버들을 기다릴 겸, 조유찬의 옆에 가서 앉았다. 조유찬이 핸드폰으로 보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원카운트 나기혁, 웹드라마 첫 주연 도전!]
실물보다 훨씬 더 잘 나온 나기혁의 사진을 보자, 며칠 전 계나리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네, 원카운트 나기혁도 각성자였어요. 그런데 기억이 잘 안 나는 걸 보면… 그리 강하고 눈에 띄는 능력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여기에 길우성의 말.
『아이허니 무대 때? 그거 그냥 스피커 잡음 아니었어?』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앞으로 1년 6개월.
전조가 시작되고 있었다.
네놈들 키가 큰 거예요
기억 오류를 확인하겠다는 이유로, 한율은 계나리가 알고 있는 게이트 및 각성자 정보를 요구했다. 계나리는 순순히 정리한 파일을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혹시… 오늘 그곳에서 징조를 느낀 거예요?』
SBC 연말 특집방송 공연이 있었던 돔구장. 그곳은 게이트 중 하나가 열리는 장소였다. 계나리가 준 정보에 따르면 아무것도 나오지도, 누구도 들어가지도 못했던 게이트.
사실 지구 곳곳에 생기는 게이트 태반이 그랬다. 무언가 조건이 맞지 않는다는 듯, 흉물스럽게 자리만 잡았다. 하지만 그러다 돌연 통로가 열리는 일도 있기에, 완전히 방심할 수도 없다.
어쨌든 한율이 사흘 전, 돔구장에서 들었던 소리는 게이트의 전조증상이었다. 같은 소리를 들은 이들은 이후 능력을 각성하게 될 인물들이었고.
계나리의 언행으로 짐작건대, ‘서한율’은 각성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뛰어난 마법 능력을 갖추고 있어, 그 징조를 함께 감지했던 게 아닐까.
『거기, 오늘따라 이상하게 기분 나쁘더라고. 가까이 가기도, 들어가기도 싫을 만큼.』
JE는 한율이 잘 모르는 미지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예외로 치고.
“얘 연기 잘했던가?”
나기혁의 기사를 보던 조유찬이 미심쩍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한율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자신 있으니 주연을 맡은 거 아닐까요?”
콘텐츠 촬영은 파주에 있는 한옥 펜션에서 진행되었다. 그곳에서 어스래빗 멤버들은 팀을 나눠 전통 놀이를 즐기고, 떡국을 직접 만들어 먹었다.
“우성이 아까 연 날릴 때 진짜 웃기더라. 어떻게 편집돼서 나올지 완전 기대 중.”
“목청은 또 왜 그렇게 좋아.”
“이래 봬도 가수잖습니까, 형님들.”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들은 서울로 돌아왔다. 회사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숙소로 귀가했을 땐 저녁 7시가 될 무렵.
“히익! 이게 다 뭐야…?”
멤버들은 거실에 펼쳐진 큰 상을 보곤 잠시 놀라 멈췄다. 8명이 모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상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여기 쪽지도 있는데?”
“어? 우리 아빠 글씨다!”
“이 음식들 전부 우리 멤버들 부모님이랑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거예요?”
“와…. 이러기 있기에요? 네?”
“…….”
한율은 갈비찜 옆에 놓인 포스트잇을 집었다. 카메라를 든 VJ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우리 아들! 올해도 언제나 건강하고, 늘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 사랑해♡ -엄마가.]
한율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옆에선 박가람이 훌쩍거리며 쭈그려 앉았다.
“그러잖아도 오늘 떡국 끓이면서 우리 엄마표 양념게장이랑 같이 먹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다른 멤버들도 저마다 감동한 반응을 보이거나 눈물을 훔쳤다. 라이언은 닭갈비와 오이소박이를 가리키며 자랑스레 말했다.
“이거 두 개, 나랑 리더 엄마랑 같이 만든 거다?”
“뭐…?”
“이언이 너,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 비밀로 했던 거야?”
“몰랐어. 어제 리더 엄마가 리더 몰래 도와달라 그래서, 그냥 가서 같이 만들었어.”
유호는 황당한 얼굴로 라이언을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잘 먹을게.”
“응.”
“어쩐지 당근이랑 오이가 삐뚤빼뚤 썰려있더라.”
멤버들은 일단 손을 깨끗하게 씻고, 옷도 편하게 갈아입고 나서 상 앞에 앉았다. VJ들은 그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촬영하다가 조용히 철수했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공개하지 않았던 제 설거지 실력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뽀득뽀득 씻는지, 한번 지켜봐 주세요.”
달그락. 설거지는 가위바위보에서 진 차남석과 한율이 맡았다. 강보배가 자발적으로 셀캠을 들어 두 사람을 촬영했다.
“설거지를 얼마 만에 해보는 거죠, 한율 씨?”
“몇 년 만에 해보는 것 같네요. 부모님과 함께 살 땐 종종 제가 했었거든요.”
“효자시네요.”
“당연한 일을 한 건데요. 형은 집에서 설거지 안 하셨나요?”
“컵이랑 그릇을 여러 번 깼더니 안 시키시더라고요.”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고?”
“아닙니다.”
강보배가 카메라 방향을 돌려 자기 자신을 찍었다.
“아니에요. 엄마, 아빠. 믿어주세요.”
“그런데 서한율, 싱크대가 너무 낮은 것 같지 않아?”
“네, 낮아서 좀 불편하네요.”
뒷짐 지고 어슬렁어슬렁, 설거지를 구경하러 온 박가람이 차남석과 한율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네놈들 키가 큰 거예요. 그만 커, 이 자식들아.”
잠시 후, 방에 딸린 욕실에서 씻고 나온 한율은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 므뫄왕. 거실에서 놀던 달냥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들어와, 무릎 위로 폴짝 올라왔다.
한율은 한 손으로 달냥을 쓰다듬으며 노트북을 펼쳤다.
똑똑. 차남석이 열려있던 문을 두드렸다.
“바빠?”
“아뇨.”
“몇 시에 잘 거야?”
“자정쯤? 왜요?”
차남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들어가도 되냐?”
지난번에 말한 집 건축 문제로 상의할 게 있는 걸까.
한율은 노트북을 도로 덮었다.
“네.”
차남석의 용건은 예상대로 집 문제였다. 그러나 그 전에, 한율이 드라마 촬영으로 바빠서 제때 듣지 못했던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 기사 본 적 있어?”
[아이돌 A군 본가 무단침입 상습 절도범 잡혀]
한율은 차남석이 핸드폰에 띄운 기사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핏 본 기억이 나는데… 이거 혹시 형 얘기였어요?”
“어.”
“저런. 범인은요?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미성년자에다 초범이었어.”
하아. 차남석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크게 한숨 쉬었다.
“그 부모가 딸한테 심한 우울증이 있다고, 할아버지 찾아가서 무릎 꿇고 울면서 선처를 빌었대. 그래서 훔쳐 간 물건 다 돌려받고, 두 번 다신 할아버지랑 집 근처에 접근하지 않기로 각서 받아서 합의해주기로 했어.”
“정말 우울증이 있었던 건 맞고요?”
“나도 그게 의심스러운데… 할아버지가 보기엔 그 부모가 너무 안쓰러웠나 봐. 아무튼, 할아버지가 나 때문에 그런 일을 겪었다니까 너무 죄송스럽기도 하고 불안해서. 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란 법도 없고.”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아도 한율도, 눈앞의 차남석이나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 회사와 이프림까지. 모두 어스래빗의 인기가 더 많아질 거란 강한 예감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인기가 많아질수록, 사생활을 침범하는 정신이상자 혹은 범죄자도 자연스레 늘어날 터.
“자금은 얼마나 있어요?”
차남석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은행에 예치된 잔액을 보여주었다.
“건축비, 만만치 않겠지?”
“설계비부터 시작해서 자재에 따라 들어가는 금액이 천차만별이라…. 차라리 지금 집을 리모델링하는 건 어때요?”
“그것도 생각해봤는데….”
한율은 별장을 지었을 때,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단독주택 리모델링 관련 서류와 자료를 보여주며 경험을 토대로 차남석과 상담해주었다.
“그리고 이왕 짓는 거, 보안에 신경 써서 튼튼하게 짓는 게 좋겠어요. 5억까진 무이자로 빌려줄 수 있으니까, 너무 금전 문제로 걱정하진 말아요.”
담담한 한율의 말에, 차남석은 소리 없이 웃었다.
“말만이라도 고맙다.”
* * *
1월 3일 금요일.
‘2020 설맞이 WB래빗 플리마켓’ 입장 응모가 시작되었다. 이번 플리마켓에는 WB래빗 엔터 소속 아티스트의 소장품 외에도 공식 굿즈도 함께 판매하게 되었다.
굿즈 팝업스토어는 플리마켓과 별개 공간에 마련되며, 당일 선착순으로 상시 한정 인원만 입장, 한정 물량만 구매할 수 있다. 단, 플리마켓 입장객은 1회 프리패스 가능.
‘굿즈는 온라인에서도 판매하는 것들이니,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몰리진 않겠지?’
MBS <뮤직센터> 남자 MC 대기실. 유호는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에 올라온 공지를 훑으며 커피를 집었다.
똑똑.
“네.”
열리는 문 사이로 진은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유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왔어? 오늘은 일찍 왔네?”
“네. 해원 선배님은 아직이에요?”
“응. 들어와. 밥은 먹었어?”
“네. 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진은수는 유호뿐만이 아니라 스태프들에게도 꾸벅꾸벅 인사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유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수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뭐 좀 마실래? 커피? 율무차 타줄까?”
진은수가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흐.
“괜찮아요.”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냈다. 유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가갔다.
“핸드폰 받았어?”
“네. 이제는 스페셜 무대 연습할 때, 직접 단톡방에서 시간 논의할 수 있어요.”
“잘됐네.”
두 사람은 번호를 교환해 저장했다. 유호는 이해원과의 단톡방에 진은수도 초대했다. [뮤직센터사회자방]
“아, 그리고….”
진은수가 잠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누군가의 초코톡 프로필을 핸드폰에 띄워 내밀었다.
“이 프사…. 누군지 아세요?”
“……?”
유호는 의아한 얼굴로 진은수의 핸드폰을 받았다. 프로필 사진을 클릭하자, 한껏 늘어지게 하품하는 고양이 사진이 크게 떴다.
“달냥이네?”
“그렇죠? 달냥이 맞죠?”
“응. 목걸이 보니까 달냥이 맞는데?”
“하지만 한율 선배님 프사는 아니죠?”
“응. 한율인 기본 이미지로 두거든.”
유호는 어스래빗 단톡방을 띄워 확인시켜주었다. ‘연기천재막내한율’이라고 표기된 이름을 클릭하자, 정말 기본 이미지가 떴다.
“맞지?”
“…후우.”
그러자 고개를 돌려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진은수.
“왜? 누가 한율이인 척 톡이라도 보냈어?”
“……?!”
진은수가 놀란 얼굴로 유호를 홱 돌아보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으음…. 그런 경우가 많거든. 사생이거나, 사생이거나, 사생이거나.”
“…….”
“폰이 망가져서 기기를 바꿨는데, 초코톡 ID랑 비번이 기억 안 나서 새로 만들었다. 급하게 다른 사람 폰을 빌렸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시도한 애들이 있었어. 그리고 달냥이 사진이야 우리가 스타아이나 SNS에 종종 올리니까, 아무나 쉽게 도용할 수 있겠지?”
진은수의 표정이 머리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벙벙해졌다.
“아….”
“무슨 대화 나눴어?”
“아무 대화도 안 했어요. 뭔가 이상해서.”
톡, 톡. 진은수가 달냥의 사진을 건 사람과의 톡창을 열어 보여주었다.
“한율 선배님은 절 ‘은수 씨’라고 부르지, 절대 ‘은수야’라고 편히 부르거나 말을 놓지 않거든요. 그리고… 제가 아는 선배님 성격상, 이런 식으로 대뜸 연락하지도 않을 것 같아서요.”
-[은수야, 안녕?]
-[나 서한율이야. :)]
-[많이 놀랐어?]
-[이렇게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
시간을 두고,
-[아주 바쁜가 보다. 괜찮아지면 전화 줘^^]
그리고 오늘.
-[오늘도 MC 홧팅! :D]
-[(이모티콘)]
톡 중간엔 핸드폰 번호 하나를 남겼는데, 유호의 핸드폰에 저장된 서한율의 번호가 아니었다.
서한율이 서브폰으로 연락했을 가능성도 떠올랐으나, 유호는 그 가능성을 0.5초 만에 삭제했다. 진은수의 말처럼, 서한율이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불쑥 연락할 성격이 아닌 까닭.
“기다려봐. 지금 본인한테 확인해볼게.”
“네? 아, 괜히 선배님에게 걱정 끼치고 싶진 않….”
그러나 유호가 서한율에게 전화 거는 게 더 빨랐다. 통화 연결음으로 설정된 풀썸의 노래가 흘러나오다, 뚝 끊겼다.
-[네, 형. 웬일이에요?]
“응, 한율아. 1분 정도 통화 가능해?”
-[네.]
“혹시 은수한테 톡 보낸 적 있어?”
-[아뇨?]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번호도 모르는데요.]
“응, 그래. 알았어, 수고해~.”
-[네, 형도요.]
통화 종료.
유호는 살짝 미소 지었다.
“당장 그 사람 차단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통화를 듣던 진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모르니까 대화 따로 저장하고, 번호도 사생인 것 같다고 회사에 알려.”
“네…!”
“그런데 누군지 몰라도 참 악의적이네. 왜 하필 한율이를 사칭한 건지….”
유호의 말대로 대화를 저장하던 진은수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 소문… 선배님도 아시잖아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
“그래서 악의적이라는 거야. 사칭까지 하면서 사람을 시험해본 거잖아. 그 번호 다시 보여줘. 우리 회사 블랙리스트에 오른 번호인지 한번 확인해볼게.”
서한율의 악개 혹은 사생 짓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진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요.”
그러곤 인사를 위해 유호와 시선을 맞췄다. 키가 30cm 가까이 차이나, 고개를 바짝 높이 들었다.
“고마워요, 선배님.”
“별말씀을.”
한편, 유호와 통화를 마친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나?
“계속 생각해봤는데.”
함께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고민하던 이제설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예능 출연은 힘들 것 같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은근히 싱거운 형이야
“내가 안 나간다고 한율이 너한테 불이익을 주진 않겠지?”
“조금 아쉬워할 뿐, 그렇진 않을 거예요. 드라마 촬영 도중 나가는 건 흐름이 깨지는 것 같아 싫으신 거죠?”
“10분, 20분 정도 잠깐이 아니라 종일 촬영하는 거잖아. 난 한 번도 예능에 나가본 적이 없어서, 자칫하단 드라마보다 그쪽에 신경을 더 쏟게 될 것 같아. 그렇다고 대충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솔직히….”
이제설이 머쓱하게 웃었다.
“재밌게 잘할 자신도 없고.”
한율은 이해한다는 얼굴로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난 후에는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싶어.”
“네. 생각해보니까 저도 첫 방송에 맞춰 나가는 것보다, 방송이 끝난 뒤에 출연을 검토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조유찬이 핸드폰을 꺼냈다.
“응. 팀장님에게 그렇게 전달할게.”
그날 밤. 회사 연습실로 온 한율은 유호와 만났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사칭해 진은수에게 톡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무 연습 전,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면서.
“우리 회사 쪽 블랙리스트는 확인해봤어요?”
“어. 그런데 일치하는 번호가 없었어. 승우 형이 시험 삼아 전화 걸어봤는데, 안 받더라.”
“누군지는 몰라도 참 쓸데없는 짓에 시간 낭비하네요.”
“그런데 은수가 폰을 받은 바로 다음 날 톡이 온 걸 보면… 주변에서 번호를 유출했거나, 아니면 그걸로 누가 장난치는 것 같아.”
한율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하지만 조만간, 그런 사칭 장난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되겠네요.”
유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히 핸드폰을 타인 명의로 두거나 며칠에 한 번 확인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니까.”
“며칠에 한 번 확인이요?”
“은영이가 그래. 걔, 톡 보내면 사나흘 지나야 확인한다? 전화는 한 번에 받으면 아주 기적 수준이야.”
“은영 선배님, 핸드폰 자주 떨어뜨리고 물건도 잘 잃어버린다면서요. 그것 때문 아니었어요?”
“원래 물건 잘 떨어뜨리고 자주 잃어버리는 건 맞는데, 스토커나 안티들이 거는 전화나 문자, 사진 같은 거에 놀라서 떨어뜨린 적이 더 많아. 이젠 어느 정도 무덤덤하게 넘기지만, 그래도 트라우마가 생겨서 그런지 핸드폰 확인을 잘 안 하더라. 한율이 너도 가끔 모르는 번호로 전화 걸려오거나, 친추 안 된 사람이 톡 보내면 경계부터 하게 되지 않아?”
“그렇긴 하죠.”
언제부턴가 잘 땐 저장된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와 알람 아니면 안 울리게끔, 방해금지 설정하는 게 습관이 됐다. 어쩔 땐 설정 해지하는 걸 까맣게 잊기도.
“그런데 형, 은수 씨 걱정 많이 하시네요.”
“은수 보면, 이 험하고 삭막한 연예계에서 잘 버틸까,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은 느낌이 들어서 걱정돼. 그나저나, 내일 몇 시 촬영인데 회사로 왔어? 피곤하지 않아?”
“오후 늦게부터 촬영이라서 괜찮아요.”
“일요일은? 그날 우성이랑 라이언이 녹화했던 <일일 멘토> 방송되는데.”
어느 정도 몸이 풀린 것 같아, 한율은 몸을 바로 하며 섰다.
“그날은 지방 촬영이 있어서 같이 보는 건 힘들 것 같아요.”
“그렇구나.”
“흐엉….”
그때 구석에 조용히 등 돌린 채 누워있던 박가람이 몸을 굴렸다. 철퍼덕.
“다 떠들었으면 나 좀 휴게실로 옮겨주오, 리더….”
“나도 지쳤어. 혼자 일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