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월 5일 오후. 교육 방송 채널에서 라이언과 길우성이 출연한 <일일 멘토>가 방송되는 시간.
마침 대기시간이라, 한율은 히터를 틀어놓은 따뜻한 차에서 핸드폰으로 방송을 보았다.
<일일 멘토>는 MC와 게스트가 아동 심리상담사의 도움을 받아, 초등학생 신청자의 일일 멘토가 되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장래 희망이 아이돌인, 곧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오늘 나오는 두 명의 멘티는 아이돌이 꿈인 초등학생.
첫 번째 멘티는 어릴 적부터 춤추는 걸 아주 좋아했다는 소개 내레이션과 더불어, 학교 행사 무대에서 아이돌 노래 커버 댄스를 추는 영상이 흘러나왔다. 곧잘 췄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꿈을 이대로 좇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 아이돌 지망생이 100만 명이라고 하잖아요.]
좁은 일자식 부엌과 작은 방 두 개. 밥상을 펼쳐놓고 학교 숙제를 하는 어린 멘티의 모습.
[그중에서 기획사 오디션에 합격하고, 다시 몇 년 동안 연습해서 데뷔하고, 성공하는 확률까지 따지면 아주 희박하고…. 그래서 내가 저기에 들 수 있을까? 그런 걱정도 앞서고, 당장 부모님에게 힘이 되어드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어요.]
두 번째 멘티는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와서 아직 한국말이 서투르고, 명백한 혼혈 외모로 받는 차별과 문화 차이로 힘들어하는 상황이었다.
[부모님은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자꾸만 자신이 없어져요…. 아이돌이 되고 싶은데, 한편으론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도전해도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요….]
이윽고 그들의 일일 멘토가 될 길우성과 라이언이 등장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라이언!]
[길우성, 인사드립니다!]
이프림이 꼽은, 두 사람의 가장 멋진 무대 영상과 함께.
그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멘티와 만났다. 그러나 멘티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굉장히 놀라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만 끔뻑끔뻑.
길우성을 만난 첫 번째 멘티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저 우성이 형 진짜 팬이에요…! 형 너튜브 영상만 정말 수백 번 돌려봤을 정도로, 안무 연습할 때도 형 영상만 주로 보고….]
길우성은 평소엔 보기 힘든 진지한 얼굴로 고민을 직접 듣고, 멘티가 찍은 춤 영상도 보았다.
[형도 예전에 너랑 같은 고민을 했었어. 그런데… ‘포기할까?’ 이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막 눈물이 나는 거야. 집안 형편이 안 좋은 걸 뻔히 알면서 내가 좋아하는 걸 하려는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나쁜 아이 같다는 죄책감도 들고.]
“…….”
본인의 경험담과 생각을 차분히, 나름대로 신중히 말을 고르며 풀어놓는 길우성. 그 모습을 보며, 한율은 길우성이 가지고 있던 집단 따돌림 트라우마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저를 비웃던 또래 가해자들로 인해 만들어진 트라우마. 그 탓에 길우성은 멤버들에게도 오랫동안 진지한 모습을 보이길 꺼렸다. 슬프거나 무거운 연기도 굉장히 집중하지 않는 이상, 좀처럼 몰입하지 못했다.
또 비웃음을 살까 봐 무서워서.
‘‘본래’ 시간대의 길우성은 어땠을까.’
문득 드는 의문.
게이트를 건너왔을 때도, 어릴 적 깊이 새겨진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극복한 상태였을까?
‘당시 27살이었으니 어느 정도 무뎌지긴 했겠지만….’
세월에 쌓여 무뎌지는 것과 극복하는 건 아주 다르다.
똑똑.
조연출이 한율이 탄 차량 문을 두드렸다.
“한율 씨, 잠깐 씬 상의 좀 할게요.”
한율은 핸드폰 전원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네.”
그날 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
[<일일 멘토> 어스래빗 라이언·길우성, 진솔하고 따뜻한 멘토]
-길우성은 집단 따돌림 속에서도 바르게 잘 큰 거 보고 정말 강한 아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방송에서 멘티한테 하는 말 보니까 생각도 많고 속도 깊네ㅜㅜ
-애들 떠비 오디션이라도 보게 해주든가ㅋ 그게 진짜 도움 주는 거 아님?
ㄴ방송 대충 봤죠? 일단 부모님 동의랑 본인의 강한 의지가 먼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내내 말했는데 대뜸 오디션 기회부터 던져주면 뭐 어쩌라고
ㄴ떠비 지금 연습생 새로 안 뽑습니당 그리고 거긴 애초에 소수정예로 뽑아놓고 집중 케어하는 스타일이에용
-라욘이 편하게 영어로 말해도 된다고 따뜻하게 안아줬을 때 아이 울컥하는 거 보고 왠지 나도 울컥ㅜㅜ 한국어 빨리 익히면 좋겠지만, 그래도 스스로 괴로워하면서까지 몰아붙이는 건 좋지 않아
-길우성 춤추는 거 보는 아이 표정=내 표정
-어스래빗 소속사 가면 저 형들 만날 수 있어요??
ㄴ아뇨. 평범한 방법으론 만나기 힘듭니다. 어스래빗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아이돌은 쉽게 만나기 힘들어요.
ㄴ전에 파주 한 편의점 앞에서 단체로 한복 입고 호빵 먹고 있던데요..
-애들아, 늘 행복하자♡♡♡
실검에는 [일일멘토 아이돌]이 떴다.
“방송 효과가 크긴 크다. 방송 끝나니까, 우리 회사 오디션 보고 싶은데 어떡하면 되냐고 묻는 문의 전화가 막 빗발치고 있대.”
차를 타고 다음 촬영 장소로 이동 중. 한율은 핸드폰으로 방송 반응을 보면서 대답했다.
“오디션 서류 접수 버튼이 닫혀서요?”
“응.”
WB래빗은 당분간 새 연습생을 뽑을 계획이 없다.
크리스탈 래빗이 롱런하고 있고, 어스래빗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드림래빗 또한 분발 중이지만, 연습생은 거두는 순간 적잖은 투자금이 들어가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임승준과 변지욱이 돌아올 날이 머지않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두 사람이 원제로에서 완전히 돌아오는 즉시, 둘을 포함한 새로운 보이그룹 데뷔조가 만들어질 예정.
우웅.
“……?”
웬일로 변지욱이 개인 톡을 보냈다.
-[대체 맛있는 건 언제 사줄 건데..!]
-[RMMA에서 했던 약속 잊은 건 아니지??]
-[(이모티콘)]
한율은 핸드폰 달력을 띄워 스케줄을 확인했다.
[다음 주 12일 휴일.]
-[우리 스케줄ㅜㅜ]
[그다음 휴일은 미정.]
-[(이모티콘)]
-[(이모티콘)]
-[ㅡㅡ]
한율은 멀뚱히 우스꽝스러운 캐릭터 이모티콘을 보다가,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러고 보니 모레지? 카메오 대거 출연 날짜.”
“네.”
이틀 후로 잡힌 구미호 회담 씬 촬영. 본래 1화에만 출연하기로 했던 고은훤을 비롯해, JE와 용맹, 차남석이 카메오로 나온다.
“그런데 왜 남자 구미호들만 모이는 거야? 여자 구미호는 다 어디 가고?”
“수컷들의 유치한 서열 싸움이나 허세 같은 거 꼴 보기 싫다고 안 오는 거래요.”
“아.”
한편, 원제로 숙소.
“…….”
가만히 서한율의 반응을 기다리던 변지욱은 침대에서 몸부림쳤다.
“으아아, 심심해에….”
현재 변지욱은 실수로 발목 인대가 다치는 바람에, 안무 연습에서 빠지며 쉬는 중이었다.
TV에선 목소리 큰 출연자들이 깔깔 시끄럽게 웃고 있었지만, 늘 10명이 북적거리던 숙소에 혼자 덩그러니 있으니 소음과 적막 사이에 낀 것 같았다.
‘뭐 재밌는 일 없나?’
핸드폰 대신 사과패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인터넷 여기저기를 클릭해보다가 그만 자신의 기사를 누르고 말았다.
변지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뒤로가기’를 눌렀다.
‘또 무슨 댓글이 달려 있을지.’
분명 좋은 댓글이 베스트를 차지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항상 좋은 말만 골라 듣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지라도, 앞뒤 다 자른 외모 비하나 행동 과대 해석에 따른 비난, 억지 깎아내리기, 맹목적인 미움과 저주의 말을 연속으로 들으면 무너지는 법이다.
그러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악플러를 향한 분노와 혐오감.
변지욱은 심호흡하며 십자성호를 그었다.
‘이건 모두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것이니.’
우웅.
“아잇, 깜짝이야.”
변지욱은 놀란 소리를 내면서도 냉큼 핸드폰을 확인했다. 뒤늦게 서한율로부터 답톡이 왔다.
-[설날엔 놀아.]
“…….”
[그날은 나 집에 가야 해, 형….]
-[ㅇ]
참 은근히 싱거운 형이야.
변지욱은 어깨를 으쓱이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리모컨을 들어서 TV 채널을 돌리는데, 다시 우웅 진동 소리가 들렸다.서한율인가 싶어서 핸드폰을 확인.
이번엔 촬영 당시 친하게 지냈던 다른 소속사 친구였다.
-[떠비가 크레용박스 인수한다는 게 사실이야?!]
“……?”
크레용박스 엔터테인먼트는 같은 원제로 멤버인 현강희가 소속된 곳이었다. 그러나 인수한다는 소리는 금시초문.
변지욱이 어리둥절한 사이, 톡 하나가 더 도착했다.
-[그래서 강희도 너랑 승준이 형이랑 같이 겨울에 재데뷔하게 될 거라던데??]
“으잉?”
친구들끼리 많이 닮았네
변지욱이 들은 소문은 다음 날 아침, WB래빗 소속 아티스트와 연습생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우리 회사가 크레용박스를 인수한다는 게 사실이에요?”
유호는 좌기훈 대표를 찾아가 직접 물었다. 이미 많은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들었는지, 좌 대표는 힘없이 웃었다.
“인수가 아니라, 거기에 소속된 강희를 이쪽으로 데려오려는 논의가 진행 중이야.”
“크레용박스에서….”
유호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제일 인지도가 높은 게 강희 아니에요? 그런데 강희를 데려오면 거긴 뭐 먹고 살아요?”
크레용박스 엔터는 아직도 대표가 직접 발로 뛰는 소형 기획사다. 지금 현강희가 벌어들이는 수익을 나눠 가지며 간신히 운영되고 있을 텐데, 돈줄이나 다름없는 현강희를 과연 다른 엔터에 넘기려 할까?
“크레용박스 김 대표가 먼저 제안해왔어. 그게 우리가 크레용박스를 인수한다는 식으로 소문이 와전된 거고.”
“대체 왜…. 대표가 무슨 사고라도 크게 친 거예요? 아니면 목돈이 필요해서?”
“강희의 원제로 활동이 종료되면, 다 정리하고 엔터 업계를 완전히 떠나겠대.”
좌 대표가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 바닥에 아주 진절머리가 난 것 같더라.”
“아…. 그래도 강희가 원래 연기 전공이라, 원제로 활동이 끝나면 못해도 조연급으로 섭외가 쏟아져 들어올 텐데….”
소형 소속사의 폐업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내 손으로 발굴하고 키워낸 스타가 성공하는 것을 보는 성취감. 그것만 보고 달려들기에 엔터 업계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수십억을 쏟아 앨범을 제작해도, 음방 무대 자리 하나 따내는 것도 힘든 게 현실.
하지만 배우는 아이돌처럼 많은 투자금이 필요하지 않다. 이미 현강희에게 투자했던 돈도 회수하고도 남았을 터.
대체 얼마나 이 바닥에 환멸을 느꼈으면.
“강희도 동의한 거래요?”
“김 대표가 설득할 거래.”
“본인은 거부하고 있단 거네요?”
“회사를 배신하는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드나 봐. 김 대표가 그러더라. 그래서 더더욱 강희를 좋은 회사로 보내주고 싶다고. 그리고… 우리 회사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어쨌든 WB래빗으로선 아주 좋은 제안이었다.
변지욱, 임승준과 함께 데뷔조에 드는 걸 목표로 열심히 노력 중인 연습생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지만 말이다. 어스래빗 데뷔조가 만들어지기 직전, 좌 대표가 강보배를 데려왔을 때처럼.
설령 현강희가 다시 아이돌 일을 하지 않아도 최소 조연급으로 연기 활동이나 예능에서 활약하게 될 테니, 전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그러면 남은 크레용박스 연습생들은…. 아니에요.”
떠오르는 의문을 입 밖으로 내던 유호는 하던 말을 회수했다. 좌 대표에게 또 다른 부담을 줄 수 있으므로.
“이제 장 쌤이랑 작업할 시간이라 가봐야겠네요.”
“그래.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다른 애들한텐 말하지 말고.”
“네.”
유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대표실을 나왔다.
* * *
1월 7일. 드라마 <서울 구미호> 속 한대그룹 오너 일가가 소유한 초호화 별장 주차장. 스엔 엔터, WB래빗 엔터, 스케일 엔터에서 나온 밴이 나란히 섰다.
“안녕하십니까! 스카이러너의 용맹이라고 합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의 차남석이라고 합니다!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스타믹스의 JE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른 씬을 촬영하느라 일찍 나온 한율은 여성 스태프들의 입가가 흐뭇하게 올라가는 걸 목격했다. PD도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하하, 다들 훤칠하시네요! 눈도 내리는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용맹과 차남석도 JE를 따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한율은 조용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대기실은 이쪽이에요.”
“와, 한율이 너…!”
한율을 발견한 용맹이 인사 대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차 몇 대를 몸에 두르고 있는 거야?”
“다 협찬이에요. 하나라도 흠집 나면 큰일 나니까, 빨리 가서 갈아입고 싶네요.”
“제설 선배님은?”
“대기실에 계세요.”
“안녕하십니까,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그들은 한율을 따라 이동하면서 지나치는 스태프들에게 꾸벅꾸벅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별장 내부로 들어가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두리번거렸다.
“여기… 단순한 세트장 아니지?”
“네. 실제 L그룹 오너 일가가 소유한 별장이에요.”
“어쩐지…. 한눈에 봐도 럭셔리하다 했다.”
“그래서 2층은 출입 금지, 1층도 촬영이랑 사용 허락받은 구역 외엔 절대 들어가면 안 돼요. L그룹 쪽 사람이 지키고 있거나 문이 잠겨있긴 하지만.”
“진짜 재벌 별장은 차원이 다르구나. 저 그림은 강남 아파트 한 채 가격이랑 맞먹을 것 같은 느낌인데?”
내부는 비싼 걸 죄다 꺼내 놓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깔끔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꾸민 느낌이었다.
“그런데 진짜 재벌이 본인 집을 촬영장소로 내어주는 경우는 거의 드물지 않아? 아무리 사방에 CCTV가 설치되어 있다곤 해도, 수십 명의 외부인이 들락거리는 건 불안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할 텐데.”
“집 아니고 별장이요.”
“아무튼.”
“기업 홍보를 위해서가 아닐까? <서울 구미호>가 글로벌 OTT로 동시 방영될 예정이잖아.”
떠드는 동안, 주연배우 대기실로 사용 중인 방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응, 안녕. 오랜만이다, 남석아.”
차남석은 숙소 아파트에서 종종 이제설과 마주쳤던 터라 편히 인사했다. 용맹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스카이러너의 용맹이라고 합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JE는 비교적 덤덤하게.
“보이그룹 스타믹스의 JE로, 본명은 손지은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설은 씩 웃으며 두 사람에게 화답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RMMA에 시상자로 초대되어서 갔을 때 멀리서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대화 나누는 건 처음이네요. 아, 이쪽은 1화에도 나왔던 다른 구미호 친구.”
“안녕하십니까, 배우 고은훤이라고 합니다.”
고은훤이 용맹과 JE에게 꾸벅 인사했다. 아! 용맹이 반가운 얼굴로 알은체했다.
“예전에 한율이랑 남석이가 나갔던 <보컬리스트 시즌3>랑 드라마 <별☆일없는 집>에 나왔던 그분 맞으시죠?”
“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최근에 별일 드라마를 정주행했거든요. 스카이러너의 용맹이라고 합니다.”
“스타믹스의 손지은입니다. 반갑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선배님.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차남석과는 서로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하이.”
“오랜만이네요, 형.”
“분장차는 밖에 있어요. 옷 다 갈아입고 나서 다른 배우분들이랑 인사 나누는 게 좋겠어요.”
오늘 촬영할 구미호 회담 씬엔 이들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이제설과의 친분으로 나오는 또 다른 카메오 두 명이 더 있었다.
“OK, OK.”
잠시 후, 회담 장면이 촬영될 응접실에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구미호들이 모였다. 스태프들도 최소 필요한 인원만 들어와 촬영을 준비했다. 이제설과 한율은 그들이 준비한 연기를 우선 본 뒤, 조언하며 도와주었다.
“구미호이기는 해도 오랫동안 한 인간의 신분으로 살아왔잖아요. 그래서 알게 모르게 그 습관이 뱄을 거예요. 그러니 다른 구미호들과의 관계에 따라 표정이나 눈빛은 달라지더라도, 이 장면에선….”
“선배님 작년 하반기 타이틀곡 M/V에서 사람을 하찮게 보는 듯한 표정 연기했었잖아요. 그때보다 살짝 힘을 빼서 조금 나른하게 보이도록, 손이나 자세도 내 집에 온 것처럼 편하게요. 몇천만 원짜리 소파든 뭐든 개의치 않고, 더 편하게 몸 기대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아요.”
“이렇게?”
“네, 멋있네요.”
차남석과 고은훤은 알아서 잘하는 터라 내버려 두었다.
“리허설 갈게요!”
그 시각, 별장 주차장.
어스래빗 팬들이 보낸 커피차 앞에선, 내부 출입을 허락받지 못하거나 쉬는 시간인 스태프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 진짜 스타믹스 팬인데…. 나중에 사진 부탁하면 들어줄까요?”
“타이밍 잘 맞추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나도 안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은데….”
의상팀의 젊은 스태프가 건물 쪽으로 간절한 시선을 던졌다.
“진짜 들어가면 안 되는 거예요?”
“오야지들도 바닥 훼손될까 봐 거실 슬리퍼 신고, 덧신 신고 조심조심 움직이는 저 안에 들어가겠다고? 실수로 장식품 하나 깨잖아? 그 순간 그쪽은 몇 년 내내 무급으로 일해야 해.”
“비싸고 위험한 건 진작 다 치웠다고 하던데요? 일부 구간은 아예 접근도 못 하도록 L그룹 쪽 사람이 막아서고 있고.”
“그래도 오얏나무 아래에선 갓끈도 고쳐매지 말라고 하잖아.”
“그런데 저기요….”
그들과 조금 떨어져서 커피를 마시던 스태프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이 별장…. 지금 지내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죠?”
“왜요?”
“아까 해 뜨기 전 새벽에, 2층 오른쪽 방에서 주황색 조명 같은 게 잠깐 켜졌다가 꺼지는 걸 봐서요. 저기, 우리는 못 들어가는 곳이잖아요.”
“L그룹 쪽 사람이 살펴보느라 불을 켰던 거겠죠.”
“아닌데?”
그때 연출팀 막내가 코를 훌쩍이며 다가왔다. 그러곤 커피차 사장에게 주문했다.
“캐러멜 마키아토 한 잔 주세요.”
“네엡.”
“뭐가 아니란 거예요?”
훌쩍. 연출팀 막내가 다시 코를 훌쩍거리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오기 전에, 사용 허락한 곳 외의 방문은 다 잠가놨대요. L그룹 쪽 사람도 열쇠는 안 갖고 있다던데요? 그냥 혹시 모르니 출입 통제하고, 우리가 허튼 거 건들진 않을까 감시만 하는 건데?”
“그럼 제가 새벽에 본 건….”
훌쩍.
“귀신이거나, 진짜 L그룹 오너 가족이 있는 거겠죠.”
“하지만 저기 L그룹 쪽 사람들이 타고 온 승합차 한 대 빼곤….”
스태프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차장을 둘러보았다.
“우리랑 배우들 차밖에 없잖아요….”
“수고하셨습니다!”
구미호 회담 씬 촬영이 끝났다. 용맹이나 JE도 나름 소속사에서 연기 레슨을 받고, 이번 카메오 출연이 결정되면서 따로 또 잘 준비하고 와서 그런지 무난하게.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내가 더 고맙지. 대박 날 드라마에 잠깐이나마 출연할 수 있게 해줘서.”
이제설이 JE를 향해 물었다.
“지은 씨는 이쪽으로 언제 넘어와요?”
“네?”
“사람 시선 끌어당기는 묘한 분위기가 있던데. 발음이나 대사 전달력, 시선 처리도 퍽 자연스러운 게, 딱 이쪽 재목이던데요?”
“아…. 감사합니다.”
“남석아, 이다음에 스케줄 있어?”
“아뇨. 형도 이제 갈 거죠? 같이 밥 먹어요. 서한율 넌 언제 끝나?”
그들은 함께 현관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조유찬이 차남석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었다. 분장차까지 지척이라도, 날씨가 몹시 추우므로.
“전 남은 촬영이 많아서. 나중에 제가 보답으로 맛있는 거 살게요.”
“그래, 수고해.”
“수고하세요, 선배님.”
“나중에 톡할게.”
“오늘 만나서 다들 반가웠어요.”
현관 앞에서 배웅을 마친 한율은 이제설과 다시 응접실로 이동했다.
이제설이 조용히 웃었다.
“친구들끼리 많이 닮았네.”
“닮아요?”
“다들 선한 점이. 태도나 말투, 눈빛 같은 걸 보면 대충 이게 적당히 꾸민 가식인지, 어릴 적부터 올바른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서 몸에 밴 건지 딱 티 나잖아.”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기본적으로 착한 아이들이긴 하지.
한편, 돌길을 따라 주차장의 분장차로 향하던 JE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별장 2층 오른쪽 끝방 창문을 빤히 응시했다.
“……?”
“왜 그래요, 형?”
“저기서 누가 쳐다본 것 같아서.”
“2층은 출입 금지라고 했으니까, 별장 주인 쪽 사람 아닐까요?”
“그렇겠지?”
JE는 한번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딱히 꺼림칙하거나 불길한 느낌은 들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슬슬 확인해봐야겠어
‘하…. 이것들 내일까지 있는 건 아니겠지?’
유상호는 거칠게 커튼을 쳤다. 그러곤 술과 향수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젯밤에 눈이 너무 내린다는 핑계로 여기에서 잔 게 실수였다. L백화점의 강수희 사장이 이 별장을 드라마 촬영 장소로 빌려줬을 줄이야.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2층엔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람’이 뒤늦게 사실을 알고선 L그룹 쪽 사람들에게 언질을 준 건지, 아니면 애초에 1층에서만 촬영하도록 제한을 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반대로 나도 갇혔지만.’
또 다행인 건, 이 방에 화장실과 욕실이 따로 있다는 사실.
털썩. 그는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서 어제 먹다 남은 안주를 깨작거렸다.
‘혹시 강수희, 나랑 그 사람 약 올리려고 일부러 <서울 구미호>에 이것저것 협찬해주는 거 아니야?’
하. 작년에 있었던 그 일이 다시 떠오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디션으로 보란 듯이 주연으로 뽑혀, 드라마틱하게 대세 배우로 거듭나 성공 가도를 달리려던 계획. 그 계획이 웬 잡놈 하나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그 새낄 내가 직접 조져버렸어야 했는데.’
유상호는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들어갔다. 문득 그놈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저도 가진 것들에게 기생하며 사는 시궁창 인생인 주제에, 감히 누구 일을 방해하고 얼마나 잘 먹고 잘사는지.
[안인섭] 검색.
일주일 전 작성된 기사가 떴다.
[MOHE 안인섭, 귀여운 눈사람 사진으로 근황 전해]
스폰서에게 버림이라도 받은 걸까. 안인섭은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핑계를 대며 오랫동안 연예계 활동을 쉬고 있었다. MOHE란 팀도 한 명을 제외하곤 있는 듯 없는 듯 인지도가 낮았다.
이번엔 그 한 명인 [이해원]을 검색.
유상호는 이해원의 프로필 사진을 보자마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더 잘생겼는데, 왜 이채현은 날 까고 이런 새낄 데리고 다니는 거야? 누구는 할망구 비위 맞추느라 역겨운 향수 냄새도 참아 가며 고생하는데…. 복에 겨운 새끼.’
혹시 밤일을 기가 막히게 잘하나? 그래서 이채현이 4년째 계속 옆에 두는 건가?
최근에는 지인들과의 파티에도 종종 데려와 소개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쯤 되면 단순한 스폰 관계가 아니라, 연인 사이라고 해도 믿을 수준.
실제로도 그런 찌라시가 증권가에 돌고 있었다. 이우그룹 회장의 손녀가 아이돌과 4년째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고.
그래봤자 결혼은 집에서 정해준 남자와 하겠지만 말이다.
‘결국 너나 나나, 여자한테 버림받으면 끝장이야. 있는 것들이, 우리 같은 오점을 가만히 둘 것 같냐? 약으로 폐인으로 만들거나 멀리 해외로 내쫓아버리지?’
그렇게 험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도록 이것저것 보험을 들곤 있지만.
“하….”
거기까지 생각하던 유상호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혹시 몰라 TV 볼륨도 높이지 못하고 가만히만 있으니, 온갖 잡생각이 다 들었다.
‘이거론 배도 안 차는데… 괜히 나갔다가 날 모르는 놈들이랑 마주치면 상황만 더 복잡해질 테고. 그러다 드라마 스태프들이나 배우들하고도 마주치면 그건 또 무슨 개망신이야.’
핸드폰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상호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어차피 여기까진 사람도 오지 않고, 방문도 잠갔다. 어제 여기에 올 때도 ‘그 사람’의 기사 차를 타고 왔으니, 다른 누군가가 별장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터.
‘잠이나 더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