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427)

* * *

“아, 크레용박스 인수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구나?”

차남석과 용맹, JE와 고은훤은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한적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 회사가 무슨 돈이 있다고 다른 기획사를 인수하겠냐.”

“하긴. 그 소문 듣고 나도 많이 의아하긴 했어. 아무리 크레용박스에 강희가 있기는 해도, 인수는 재정적 부담이 상당하니까.”

“래빗즈 팬들도 극구 반대하면서 반발하겠지. 다른 회사 인수할 돈 있으면 지금 있는 애들 케어에나 신경 쓰라고.”

JE의 말에 용맹은 고개를 끄덕끄덕, 공감을 표하며 고기를 집어 먹었다. 테이블은 잠시 대화가 끊기며 조용해졌다.

반면, WB래빗, 스케일, 스카이러너 매니저들이 앉은 옆 테이블은 내내 시끌벅적했다. 콘서트 공연 업체가 어쨌다는 둥, 모 프로덕션 아무개 씨 참 재수 없지 않냐는 둥, 사생 대비 보안에 취약한 호텔 정보 교류 등등.

“그런데 이거 묻기 조금 조심스러운데….”

용맹이 문득 고은훤에게 물었다.

“형은 이제 아이돌 할 생각… 없는 거예요?”

고은훤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여전히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게 좋기는 하지만, 직업으로 삼으면 싫어질 것 같더라고요. 연기하는 게 더 재밌기도 하고.”

“형 아까 보니까 연기실력 많이 늘었던데, 학원 바꿨어요?”

“아니. 아무래도… 제설 선배님에게 집중 특강 받은 덕분인 것 같아.”

“제설 선배님한테요?”

“대박.”

차남석과 용맹이 부럽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고은훤은 힘없이 하하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대본 리딩 때 선배님을 처음 뵀는데, 그날 바로 선배님이 같이 밥 먹자고 하시는 거야. 난 내가 뭐 잘못했나 잔뜩 겁먹었거든? 그리고 며칠 동안 선배님한테 붙잡혀서, 가르침 받았어.”

“혼났어요?”

“혼내거나 화내진 않으셔. 대신, 만족할 만한 연기가 나올 때까지 무한 반복시키시더라.”

“그거.”

차남석이 미간을 구겼다.

“서한율도 그러는데.”

“응?”

“우리 노래 중에 랑 이란 곡이 있거든요?”

“어, 알아. 둘 다 무대 연기 예술이잖아.”

“그거 연습할 때 서한율이 감정 연기, 표정 연기를 중점적으로 봐줬는데, 본인 마음에 들 때까지 무한 반복시켜요. 어떻게 하면 더 좋은지 설명하기는 하는데 워낙 추상적이라, 알아서 감 잡느라 더 힘들기도 하고.”

JE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래 천부적으로 잘하는 애들은 설명 잘 못 해. 왜? 자기들은 그냥 나오니까. 그냥 나오는 걸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게 더 어려운 거야. 그림 잘 그리는 사람도 그러잖아. 있는 그대로 그리면 되는데 왜 못해? 왜 그게 안 돼?”

“오우, 얄미워.”

“그래도 서한율, 그림은 못 그려요.”

“그런 것 같더라.”

점심을 다 먹고 나선 서로 잘 가라며 인사하곤 각자의 매니저 차에 올라탔다. 고은훤은 현장전이 운전하는 WB래빗 차에 함께 탑승했다.

차남석은 고은훤이 가방에서 꺼내는 대본을 보며 물었다.

“그게 이번에 형이 나간다는 드라마에요?”

“응, 초코톡 웹드라마.”

“주연?”

“그럴 리가. 주연은 원카운트의 나기혁이야. 나는 조금 비중이 많은 조연이고.”

“대본 리딩 했어요?”

“응, 지난주에.”

“어땠어요? 나기혁 연기.”

“음….”

고은훤은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운전석에 있는 현장전의 눈치를 살폈다. 차남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OK. 알았어요.”

“하하…. 아직 웹드는 화제성 싸움이잖아. 아주 못하는 정도만 아니면 됐지. 나도 그렇게 다른 사람 연기를 평가할 만큼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아까 잘하던데요, 왜.”

“그건 그 역할만 집중 특강 받아서 그런 거라니까.”

서울로 돌아온 뒤, 고은훤은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대로변에서 내렸다.

“태워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집 앞까지 안 가도 괜찮겠어요?”

“골목이 좁고 복잡해서요. 편의점도 들러야 하고. …그럼 남석아, 나중에 연락할게!”

“네, 형. 조심히 들어가요.”

고은훤은 현장전과 차남석에게 인사하곤 몸을 돌렸다.

연예인이 타고 다닐 법한 새카만 밴에서 내린데다, 그의 훤칠한 외모 탓일까.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고은훤에게 박혔다. 그러나 그는 시선에 개의치 않으며 시원시원하게 걸었다.

‘알바 시간까지 많이 남았으니까, 집에 가서 메이크업 지우고 대본 보다가 나오면 되겠다. 저녁으론 뭐 사지? 돈도 아낄 겸 간장 계란밥이나 해서 먹을까? 오늘은 점심도 든든히 먹었으니까….’

후득, 후드득.

그 순간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비. 고은훤은 깜짝 놀라 근처에 있는 가게 처마 아래로 가서 섰다.

‘새 우산을 사기엔 돈이 아깝고… 집까지 뛰어갈까? 전력으로 질주하면 5분 안에 도착할 것 같기는 한데.’

뛸까, 말까. 내리는 비를 멀거니 보며 고민할 때였다.

“저기요?”

그때 안경을 쓴 여성이 우산을 든 채 다가왔다. 그러곤 살갑게 미소 지으며 묻는 말.

“배우 고은훤 씨 맞으시죠?”

“네, 그런데….”

그러나 팬이라서 알아봤다고 보기엔 낌새가 조금 이상하다.

“누구세요?”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고.”

여성이 안심하라는 듯 입가를 올리며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누구패치의 정 기자라고 합니다. 시간 괜찮으면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여분 우산도 하나 빌려드릴게요.”

* * *

새벽부터 시작된 별장에서의 촬영은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끝났다. 한율은 주차장에서 이제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차에 탔다.

“저녁은 어디에서 먹을래?”

“숙소요.”

“그럼 가다가 음식 포장할까?”

“네, 제가 폰으로 주문할게요. 형도 먹고 갈래요?”

“아냐, 괜찮아. 내비에 주문하는 가게 주소 찍어줘.”

조유찬은 한율보다 더 이른 새벽부터 나와 운전하고, 종일 촬영하는 걸 지켜보고 기다리느라 고생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쉬고 싶을 테니,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후, 한율은 도시락이 든 봉투를 들고 숙소로 들어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 샛노란 한 쌍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다가왔다. 므아앙.

달냥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거실 조명을 켰다. 숙소엔 고양이 말곤 아무도 없는 듯했으나, 보일러가 켜져 있어 공기가 훈훈했다.

“밥은 먹었어?”

므앙.

한율은 말끔하게 샤워부터 하고 나서 거실 소파에 앉았다. TV로 뉴스를 보며 도시락을 먹는데, 달냥이 닫혀있는 한 방문을 앞발로 벅벅 긁었다.

므앙.

“왜 그래, 달냥?”

달냥이 점프하며 문손잡이를 앞발로 퍽, 찰지게 아래로 후려쳤다. 철컥. 문이 열렸다.

므아앙.

“……?”

유호와 이건우, 박가람이 함께 사용하는 방이었다. 의아한 얼굴로 가보니, 애벌레처럼 이불을 몸에 돌돌 감은 채 자던 박가람이 칭얼거리며 반대쪽으로 굴렀다.

“므야아….”

웬일로 이 시간에 숙소에서 자고 있을까, 했더니 책상에 감기약과 생수병이 놓여 있다.

“감기 걸렸어요?”

박가람이 눈을 감은 채 웅얼거렸다.

“옮는다, 가라…. 너 오니까 춥다…. 싸늘하다….”

한율은 박가람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를 짚었다. 뜨끈했다.

“형이 감기에 걸린 건 처음 보네요. 밥은 먹었어요?”

“죽 먹었엉…. 아니, 옮으니까 나가라고요, 서 배우님아….”

“저 면역력 강해서 괜찮아요.”

“그래도… 아잇, 깜짝야!”

그제야 눈을 뜨고 한율을 돌아보던 박가람이 흠칫 떨었다.

“……?”

“너, 그, 등 뒤…. 아으, 몰라, 잘 거야….”

또 파란색을 띤 파충류 눈이 보인 모양.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박가람이 중얼거렸다.

“왜 춥나 했다….”

훌쩍.

“…….”

한율은 달냥을 안고선 문을 닫으며 나왔다.

지난번, 박가람도 JE처럼 자신에게 붙은 걸 봤다고 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어쩌면 박가람도 마법사의 소질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고.

그런데도 당장 확인하지 않았던 건, 괜히 신경이 쓰일 것 같아서였다. 정말로 소질을 갖고 있다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더 갈 테니.

문득 계나리의 말이 떠올랐다.

『한 명이라도 더 미리 힘을 갖도록 하는 게, 나중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몇 년 동안 함께 붙어 지내는 동안, 농도가 짙은 한율의 마나에 종종 노출되어 그쪽 감각이 활성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애초에 전혀 없던 소질이 마법사와 함께 살았다고 생기진 않는다. 그러나 아주 미약하게나마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슬슬 확인해봐야겠어.’

새벽. 한율은 곤히 잠든 멤버들의 몸에다 살며시 손을 대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 결과, 체내에 깃든 마나가 꿈틀거리며 활발하게 반응하는 인물 둘을 찾았다.

한 명은 예상대로 박가람이었다.

“한율아, 어제 카메오들이랑 촬영했다며. 어땠어?”

다음 날 아침.

또 다른 한 명이 한율에게 아침 인사 대신 물었다.

한율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았어요.”

그는 어스래빗의 맏형이자 리더, 유호였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보이그룹 MOHE 숙소.

-[저녁 6시까지 아래 주소로 와.]

“…….”

잠에서 깨자마자 확인한 이채현의 톡. 이해원은 어제 고은훤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나한테 아는 거 없냐고 집요하게 캐묻더라. 계속 모른다고 잡아떼기는 했는데…. 정말, 진지한 관계는 아니지?』

어제, 인터넷 언론사 ‘누구패치’란 곳에서 나온 기자가 고은훤을 찾았다. 그리고 그에게 물어본 건, 이해원과 이채현의 관계를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고은훤은 이해원이 안인섭의 손을 잡게 된 사정부터 시작해, 이채현의 스폰을 받고 있단 사실도 다 알고 있었다. 모두 2년 전, 고은훤과 화해하고 다시 만났을 때 이해원 스스로 솔직히 다 털어놓았다.

굉장히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시궁창에 고립되어 썩어가는 것처럼 막혀오던 숨이, 친구를 다시 마주한 순간 희미하게 트였다. 다 털어놓지 않으면 다시금 또 숨이 막힐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고은훤은 ‘야, 이 미친 새끼야.’를 시작으로, 10분 넘도록 온갖 쌍욕을 퍼부었다. 그의 격정엔 이해원을 향한 걱정과 서운함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 뒤로 고은훤에겐 웬만한 일은 다 이야기하고 있었다.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되는 은밀하거나 지저분한 이야기, 이채현과의 세세한 일은 제외하고.

『그 사람이 무서워서 먼저 떨어지지 못하는 건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이해원 네가 그랬잖아. 요즘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 자꾸 불러낸다고. 이대로라면 그 찌라시가, 더는 찌라시가 아니게 될 수도 있어. 너, 진짜 그래도 괜찮아?』

“하…….”

이해원은 감은 두 눈 위에 팔을 올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이채현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찌라시가 돌도록 방치하는지, 자신을 진심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아직 돈이 필요했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지금도 병원에서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선.

“후.”

이해원은 마음을 다잡고선 팔을 내렸다. 그리고 이채현에게 답톡을 보냈다.

[네,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 * *

12일 일요일.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난 길우성은 머리카락도 빗지 않은 채 서한율의 방부터 찾았다. 똑똑. 달냥이 들락거리느라 열려있는 문을 두드리곤 고개를 내밀었다.

“써한, 일어났…, 잉? 어디 갔어?”

이불이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엔 달냥이 팔자 좋게 누워있었다.

“달냥, 너희 오빠 어디 갔어?”

므앙.

뒤를 지나가던 차남석이 대신 대답했다.

“걔 아침에 등산 장비 챙기고 나가던데.”

“뭣이?! 같이 댄스 커버 영상이나 찍으려고 했는데!”

“애 좀 쉬게 둬라. 간만의 휴일인데.”

“간만의 휴일에 룰루랄라 등산 가는 게 더 빡세지 않소, 형님?”

그 시각, 도봉산 신선대.

“하….”

한율은 앞서 누군가 눈을 털어낸 바위에 걸터앉아 산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눈 냄새를 품은 시린 바람을 들이마시니 폐까지 훅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가슴 한편에 쌓인 답답한 고민은 꿈쩍도 안 하지만.

‘유호, 박가람, JE.’

현재 파악된 마법사의 소질을 가진 자.

그러나 이 소질은 다른 마법사가 마나를 깨우치게 돕고, 마력을 정제해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무용지물이다. 게이트가 열리며 각성하는 능력과는 전혀 다른 힘이기도 하고.

‘고작 마법사 한두 명 키운다고 당장 문제 되진 않겠지. 하지만 10년, 20년이 지나면?’

그땐 어정쩡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보다 더 강해져 나중엔 그의 계획을 어그러뜨리는 변수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지구인이므로.

‘차라리 지구인을 보낼 수 있는 다른 게이트 너머 세상이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본래 세상에서 수집한 정보에도, 계나리가 준 정보에도 그런 게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히 찾아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닫혀있어서.

길우성의 게이트 코팅 능력을 이용해 찾아보는 건 어떨까. 이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나, 오히려 그가 감당하기 힘든 아주 위험한 곳과 연결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지구 멸망을 적극적으로 방조하려는 내가, 지금 인연을 맺은 이들의 안전까지 돌보는 건 우습지 않나?’

기만도 그런 기만이 없다.

‘하지만 미래의 내가 JE를 일찍이 마법사로 키우지 않은 걸 후회한 걸 보면….’

“저기… 학생?”

한참 동안 바람을 쐬며 고민하는데, 뒤에서 한 중년 여성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괜찮으면 사진 한 장 부탁해도 될까요?”

같이 사진을 찍자는 건가?

순간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직업병. 눈 보호를 위해 스포츠용 고글을 쓰고 있어서 못 알아볼 텐데 말이다.

“네.”

한율은 흔쾌히 대답하며 일어났다.

사이 좋아 보이는 중년 부부는 ‘신선대 정상’이라고 적힌 비석을 사이에 두고 서서, 카메라 앱을 켠 핸드폰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부탁할게요.”

“네. 두 분, 조금 더 자연스럽게 웃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찍을게요. 하나, 둘….”

찰칵.

“이번엔 서로 비스듬하게 마주 보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는 의미로 웃을게요.”

“어….”

“아니, 그….”

부탁한 한 장만 찍어줄 거로 생각했는지, 난데없는 추가 포즈 요청에 당황해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순순히 한율의 말대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색하면서도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나, 둘.”

찰칵.

두 사람은 한율이 이런저런 필터 도구를 사용해 사진을 더 예쁘게 꾸며주자, 어린 학생이 센스가 좋다며 잔뜩 칭찬하곤 에너지 바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고마워요, 학생.”

“핸드폰 줘봐요. 우리도 찍어줄게.”

“아, 감사합니다.”

고민과는 별개로, 지금은 아이돌이다.

‘스타아이에나 올려야지.’

그리고 산에서는 셀카보단 남이 찍어주는 사진이 더 낫다. 한율은 카메라 앱을 실행한 핸드폰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부탁드릴게요.”

“최선을 다해서 찍어볼게요, 학생.”

한율은 비석에다 손을 얹고선 고글을 벗었다.

“어이구, 뉘 집 자식인지 몰라도 연예인처럼 자알 생겼네.”

“하나, 둘, 김치~.”

찰칵.

사진은 산에서 내려와,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타고 나서 스타아이에 올렸다.

[휴일이라 도봉산 가볍게 다녀왔습니다. 사진은 마음씨 좋은 분들이 대신 찍어주셨어요! :)]

금세 달리는 수많은 댓글. 태반이 외국어였다.

한율은 몇몇 팬들의 게시글에도 댓글을 달아준 뒤,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SBC 연말 특집방송을 했던 돔구장으로 향해, 그 주변을 한 바퀴 빙 돌고 나서 회사로 향했다.

“너도 참 대단하다, 써한.”

짝짝. 회사 연습실. 바닥에 지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던 길우성이 손뼉을 쳤다.

“어떻게 아침부터 등산 갔다가 안무 연습하러 오냐.”

“그래서 가볍게 한 시간만 하고 갈 거야.”

“예전에 수재 선배님이, 어? 젊을 때 연골의 소중함을 알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어?”

한율은 길우성의 잔소리를 무시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PC를 만지작거리던 차남석이 한율을 보더니, 핸드폰을 들고 다가왔다.

“야, 서한율. 너 이 기사 봤어?”

“무슨 기사요?”

“이해원 기사. 아주 난리 났던데.”

“……?”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단독]MOHE 이해원, 재벌 3세와 4년째 열애 중!]

‘누구패치’라는 인터넷 언론사가 터뜨린 단독 기사였다. 증권가에 돌던 찌라시를 취재하던 중, 이해원이 대기업 회장의 손녀 A씨와 함께 A씨의 지인 B씨 생일파티에 참석하는 걸 확인했단 내용이 실려있었다.

[(중략) 두 사람의 지인이라고 밝힌 C씨는 두 사람이 4년째 만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해원의 소속사 VEL 엔터테인먼트는 아무 입장 발표 없이 침묵 중이다.]

-이게 무슨 소리야 MOHE가 2016년 데뷘데.. 그럼 데뷔할 때부터 만났다는 소리잖아ㅋㅋ 팬들 충격 어쩔

-MOHE가 데뷔 초부터 여기저기 잘 나오던 게 보컬3 이슈 덕분만이 아닐 수도 있겠네

-듣보 소속사 아이돌이 뜨면 그건 백퍼 스폰의 힘이라지

ㄴ스폰이랑 사귀는 거랑 같냐 멍청아

ㄴ돈이랑 대가 보고 사귀는 게 스폰이나 다름없는 거다 멍청아

ㄴ멍청이들은 여기서 놀아! 형아는 갈 거야!

-얘 걔 아닌가? 원래 보컬3 본선 진출자만 찍기로 한 음료 광고 CF에 낀 팀

ㄴ그때부터였던 거면 ㅈㄴ 소름인데

ㄴ그때 같이 팀했던 ㄱㅇㅎ이란 애는 지금 원룸 월세 살면서 알바도 뛰고 단역 배우 일 한다던데요

-기사 내려면 제발 당사자한테 직접 확인부터 하고 내세요;; 찌라시니, 주변 지인이 그랬다느니, 몰래 따라가서 사진 하나 찍고 뇌피셜 기사 쓰지 말고

“알고 있었어?”

2년 전, 우연히 샵에서 만난 배우 최가을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한 기자가 이우그룹 회장 손녀 이채현과 아침부터 데이트하는 남성을 보았는데, 남성이 이해원과 닮았다고.

그때부터 찌라시가 돌았다고 치면, 기사는 아주 늦게 터진 셈이었다. 아마 이우그룹에서 막고 있었던 거겠지만.

‘이해원도 이채현과의 관계가 이렇게 오래갈 거라곤 생각지 않은 눈치였지.’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키스 후 얼굴에 담배 연기를 훅 내뱉고, 손목에 담뱃불이나 지지며 괴롭히는 사람과 계속 만나고 싶을 리가.

그런데도 먼저 끊어내지 못하는 건, 후환 때문에.

한율은 핸드폰을 돌려주며 고개를 저었다.

“사적인 이야기는 잘 안 해서요.”

“그래. …뭐, 진짜든 아니든 앞으로 묘한 꼬리표가 달리긴 하겠지만.”

그러나 2시간 뒤.

“……?”

안무 연습을 마친 뒤 휴게실에서 씻고 나와 확인한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에 걸려있던 단독 기사가 사라졌다. 실검 상위권에 올라갔던 이해원의 이름도 10위권 아래로 내려갔다.

[한 시간 만에 끝난 열애설…. 이해원 “당황스럽네요”]

[오늘 12일 재벌 3세와 4년째 열애 중이라고 알려진 MOHE의 이해원이 SNS에 손편지를 올리며 입장을 밝혔다.

이해원은 우선 기사를 접하자마자 너무 당황스럽고 머릿속이 멍해져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 당장 답변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그리고 기사에 나온 대기업 회장 손녀는 지인 A씨를 말하는 것 같다며, A씨가 장난과 스킨십이 과격한 편이라 그렇게 오해를 살 순 있으나 연인 사이는 절대…(중략).]

-그럼 그렇짘ㅋㅋㅋ 구멍가게 손녀도 아니고 대기업 회장 손녀가 미쳤다고 격 떨어지게 지저분한 딴따라 따위를 만나냐? ㅋㅋㅋㅋㅋ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왜 말 안 함?ㅎㅎ

-ㅅㅍ받는 거 확실

-역시 잘생긴 놈이랑 열애설 날 정도로 과격한 장난이랑 스킨십 가능한 지인 되려면 최소 대기업 회장 손녀 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기사엔 온통 이해원을 의심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댓글뿐이었다. 팬들이 열심히 믿는다, 사랑한다, 응원한다는 댓글을 올리곤 있지만, 화력이 약했다.

한율은 이해원에게 톡을 보냈다.

[괜찮아요?]

이해원의 답장은 몇 시간이 지나 자정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ㅎ]

그러나 다음 날인 13일.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

[[속보]MOHE 이해원, 교통사고로 중상… 의식 없어]

[오늘 13일 새벽, 인기 아이돌그룹 MOHE 멤버이자 배우 이해원이 몰던 차량이 가드레일과 충돌했다. 이 사고로 중상을 입은 이해원은 급히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으나 아직 의식이 없으며, 경찰은 차량이 블랙아이스에 미끄러져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중략).

한편, 이해원은 어제 대기업 회장 손녀 A씨와 4년째 열애 중이란 보도 기사에 연인이 아닌 단순 지인이라고 해명했으며, 그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는 현재 병원에서 암 투병 중이라고 알려졌다.]

그날 밤, 한율은 드라마 촬영이 끝나자마자 이해원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삑…, 삑….

규칙적인 기계 소리가 작게 울리는 적막한 병실.

한율은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누워있는 이해원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많은 모욕을 감수하는 시간을 보내던 아이였다. 그래서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힘들었던 시간이 참 허망하지 않나.

‘어차피… 게이트가 열리면 다들 높은 확률로 죽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무언가 꺼림칙해서.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날 수도 있는 게 인생이라지만, 재벌 3세와의 열애설이 터진 뒤 하루 만에 이런 큰 사고를 당한다고?

사아. 은은한 푸른빛을 띤 한율의 손끝이 이해원의 이마와 가슴팍을 가볍게 어루만지다 떨어졌다.

‘작별 인사는….’

한율은 집중하느라 찡그렸던 미간을 반듯하게 폈다.

‘나중으로 미뤄도 되겠네.’

아마 가드레일을 들이받았을 때 속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머리와 가슴에 붕대를 칭칭 감곤 있지만 다른 곳은 타박상 정도로 그친 것 같고.

하지만 이것도 단순히 체내의 생명력을 가늠해 본 거라, 뇌에 문제가 생겨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건 어쩔 도리가 없다.

“빨리 일어나. 너희 어머니, 걱정 많이 하시겠다.”

…또각, 또각.

“……?”

그때, 멀리서 구두 소리와 다수의 인기척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이 시간엔 가족도 면회가 안 될 텐데, 누굴까.

한율은 천천히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어차피 환영 마법을 두르고 있어 들킬 염려는 없다.

또각. 병실 문 앞에 짙게 화장한 여성이 멈춰 섰다.

이우그룹 회장의 손녀이자, 이해원의 스폰서인 이채현이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서인지, 그녀는 입술을 콱 깨문 채 부릅뜬 눈으로 이해원을 노려보았다.

“살려요.”

“네?”

자다가 급히 호출받은 듯, 부스스한 몰골의 의사가 이채현의 눈치를 살피다가 놀라 반문했다.

이해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채현이 또박또박 강하게 말했다.

“멀쩡히 살리지 못하면, 당신이 내 손에 죽어.”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사가 그녀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휙. 이채현이 몸을 돌렸다.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의사를 비롯한 그녀의 수행원들도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한율은 간호사들까지 그쪽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이는 틈을 타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

의사는 이 병원 원장인 모양이었다.

그들을 원장실까지 안내한 원장이 자리를 피해줄 때, 한율은 그의 옆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블랙박스 영상은.”

“여기 있습니다.”

습관일까. 이채현은 제 왼쪽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수행원이 내미는 사과패드를 낚아챘다. 그리고 사고 당시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했다. 한율도 이채현의 소파 뒤에 서서 함께 봤다.

새벽 3시경, 어두운 도로를 달리는 차량. 희미하게 들리는 라디오 소리 외엔 조용하다. 그러다 갑자기 오른쪽 차선에서 나타나, 이해원의 차 앞으로 끼어들고선 속도를 줄이는 검은색 차량.

이해원은 속도를 줄이며 차선을 옮겼다. 그러자 같이 차선을 옮기며 또 앞을 막는 검은색 차량.

왼쪽 차선으로 다시 옮기자, 이번에도.

명백한 시비였다.

그제야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해원이 다시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차를 갓길에 세우려는 듯 속도를 크게 줄였다.

사고는 그때 일어났다.

경찰 조사대로 블랙아이스에 미끄러진 걸까. 돌연 차량이 크게 휘청거렸다. 당황해하는 이해원의 짧은 외마디 비명이 이어지고, 차는 그대로 가드레일과 충돌했다.

쾅.

“……!”

영상을 보던 이채현이 어깨를 크게 떨며 고개를 돌렸다.

삑, 삑, 삑, 삑.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리는 와중, 저 멀리 검은색 차량이 도망치듯 멀어진다.

그제야 이채현이 다시 영상을 똑바로 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새끼 누구야.”

“사고 당시 실제 운전한 사람이 누군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차량 소유주는 정원그룹 정지호의 운전기사 부인이었습니다.”

“씨발, 정지호 그 개새끼…!”

이채현이 사과패드를 집어던졌다. 타악!

한율은 이채현이 내뱉는 온갖 험한 쌍욕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미간을 구겼다.

재수 없게 블랙아이스에 미끄러진 게 아니라, 일부러 사고가 나도록 유도한 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해자는 이채현과 아는 사이.

이채현이 벌떡 일어났다.

“정지호 지금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

“네.”

“그리고 이해원 병실에 경호원들 배치해서 치료 제대로 하는지, 사진 찍거나 이상한 수작 부리는 년 없는지도 감시하고.”

“네.”

이채현이 씩씩거리며 원장실을 나갔다.

“이 씹새끼, 내가 죽여버리고 만다. 감히 내 걸 건드려?!”

쾅! 문이 닫혔다.

“……하.”

한율은 작게 한숨 쉬었다.

이해원이 정말 누군가의 악의로 인해 사고당한 것도 놀랍지만. 이채현의 언행을 보니 그동안 참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정원그룹의 정지호라….’

한율은 병원과 떨어진 곳에 세워둔 자신의 차에 오른 뒤, 핸드폰으로 ‘정지호’를 검색했다.

이쪽도 이채현처럼 재벌 3세였다. 정원그룹 회장 장남의 둘째 아들. 나이는 스물아홉.

지난번 아이돌 화보 전문 포토그래퍼 김 쌤을 폭행하고, 계나리에게 핸드폰이 털려서 협박받는 정이장의 조카이기도 했다.

‘의도적으로 블랙아이스에 차가 미끄러지도록 유인했을 가능성은 적지만, 진로방해를 하며 위협을 가하고, 사고가 난 이해원을 방치하고 도망쳤어.’

이채현도 블랙박스 영상을 확보한 이상, 경찰을 매수한다든가 하며 죄를 완전히 덮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높은 확률로 가해자를 바꿔치기할 터.

‘감히 자기 것에 손댔다고 버럭버럭 화내며 나갔으니, 일단 어떻게 정리하는지 지켜볼까.’

한율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틀 후 15일. 이해원이 무사히 의식을 회복했다는 기사가 떴다. 다음 날인 16일엔 일반병실로 옮겼다는 기사가.

“해원이 형 상태는 어땠어요?”

드라마 촬영 중 휴식 시간. 한율은 오늘 이해원의 병문안을 간 유호에게 전화로 물었다.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막 걱정할 정도는 아니래. 사고 전후 순간이나, 지난주 같이 방송한 내용도 생생히 다 기억하더라. 말하는 데에도 문제없고.]

“다행이네요.”

-[천만다행이지. 그리고 사고 직전에 해원이 차 앞으로 끼어들면서 진로를 방해한 이상한 차 한 대가 있는데, 지금 경찰이 그 차주 상대로 조사 진행 중이래.]

“네. 그나저나 거기 오늘 사람 많았겠어요.”

-[말도 마. 병원 앞에 기자들이랑 해원이 팬들까지 잔뜩 몰려와서 아주 난리였어. 그나마 VIP 병동에 입원한 데다, 병실 앞에도 경호원들이 있어서 안까진 못 들어오더라.]

“다른 MOHE 멤버들은요?”

-[나랑 은수가 도착하기 전에 왔다 갔대. 그리고 지금은 해원이 친구가 보호자로 옆에 있어. 은훤이란 애. 알지?]

“네.”

-[연락하려면 되도록 전화 말고 톡이 좋을 것 같아. 약 때문인지 자꾸 졸린다고 하더라.]

“네. 고마워요, 형. 나중에 봐요.”

유호와 통화를 끝내자 조유찬이 물었다.

“호가 뭐래? 그 친군 괜찮대?”

“네.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지만요.”

“다행이네. 당분간 방송 활동도 쉬어야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우선이잖아. 기사 보니까 어머니도 어디 아프신 것 같던데. 그런데 정말 가족이 어머니밖에 없는 거야?”

“아뇨, 아버지도 계세요. 하지만 형이 어릴 때 이혼한 뒤로 따로 재혼 가정을 꾸리셔서 기사가 그렇게 난 것 같아요. 이모랑 외할머니도 집에 자주 오시는 모양이던데.”

“그렇구나. 그래도 왠지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렇네…. 올해 겨우 스물네 살인데.”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원에게 톡을 보냈다.

[호 형에게 얘기 들었어요. 나중에 시간 나면 꼭 병원에 들를게요. 빠른 쾌유 바랍니다!]

금세 답장이 왔다.

-[응, 고마워^^]

-[그리고 서울 구미호 예고 영상 뜬 거 봤어! 엄청 재밌어 보이더라ㅎㅎ]

[감사합니다. :)]

“너 은근 인싸다? 이번엔 누구야?”

이해원의 병실. 이해원이 웃으면서 누군가의 톡에 답장하자 고은훤이 물었다.

“한율이.”

“아하. 뭐래?”

“시간 나면 오겠대. 요즘 드라마 촬영 때문에 바쁘잖아.”

“한율이가 미안해하도록, 걔 오기 전에 퇴원하자.”

“그게 내 마음대로 되냐.”

큭큭. 낮게 웃던 이해원은 곧 인상을 쓰며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웃었더니 늑골 부근이 울리며 아팠다.

“그런데 아까 하려던 얘기는 뭐였어? 의식 잃었을 때 꿈에서 무슨 목소리 들은 것 같다며. 설마…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부르는 것 같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 그건 아니고.”

이해원은 핸드폰 화면에 뜬 ‘서한율’ 이름 석 자를 힐끗하곤 대답했다.

“한율이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

“그렇게 보지 마, 나도 왜 하필 한율이 목소리가 들렸는지 좀 이해가 안 가니까.”

“한율이가 뭐라 그랬는데?”

음. 이해원은 잠시 기억을 더듬곤 꿈결에 들은 말을 그대로 읊었다.

“빨리 일어나. 너희 어머니, 걱정 많이 하시겠다.”

“반말한 거 보니까 한율이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가?”

그리고 의식이 없었을 땐 중환자실에 있었기에, 진짜 서한율이 들어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이해원은 그래도 신기하지 않냐며 웃다가, 살며시 입을 다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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