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427)

* * *

이해원에게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한 차량이 고의로 진로를 방해했다는 사실이나 그 차주가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은 어느 매체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

익명 커뮤에서는 이해원의 열애설 상대 집안인 대기업, 혹은 열애설 상대의 정혼자, 혹은 열애설 당사자가 이해원을 죽이려 한 거라는 음모론이 흘러나왔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블박 영상 공개 안 하는 이유가 뭐겠냐? 걔 진짜 혼자 운전하다가 사고 난 거 맞음? 그 새벽에 대체 어디를 다녀오다가 사고 난 건지도 존나 의문인데?]

의혹과 음모론을 제기하는 게시글이 올라오는 족족 삭제되거나, 작성자 IP 차단 조치가 취해진 까닭이었다.

MBS <뮤직센터>는 이해원의 자리를 공석으로 둔 채, 유호와 진은수 2인 MC 체제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어느새 날짜는 18일.

‘2020 설맞이 WB래빗 플리마켓’과 ‘WB래빗 일일 굿즈 팝업스토어’가 열렸다. 두 가게는 각각 벽으로 분리된 별개 공간에 마련된 터라, 손님들도 양쪽으로 길게 줄을 서서 큰 혼잡은 벌어지지 않았다.

“부럽다…. 올해도 우리 톢톢이들 나왔을 것 같은데….”

팝업스토어 앞에 줄은 선 여학생들이 플리마켓 입장객들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다른 남학생 일행은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아쉽네. 내가 저기에 당첨됐어야 했는데.”

“저기 나온 물건 태반이 명품일 텐데. 너 돈 많냐?”

“아니지. 일단 돈을 끌어모아서 어스래빗 물건을 샀다가, 해외에 있는 어스래빗 팬한테 파는 거지. 아마 내가 산 금액의 두 배 이상은 더 줄걸? 실제 착용 샷이 있는 거면 더더욱?”

“와, 머리 좋은 새끼.”

“에이, 그렇게 팔린다고?”

“해외 팬들 화력 무시하지 마라. 생일 때마다 뉴욕 타임스퀘어에다 축하 영상 올리는 거 못 봤냐?”

올해 플리마켓 입장객 안내는 어스래빗과 드림래빗 멤버들이 4명씩 나와 맡기로 했다.

오픈 직전, 마지막으로 진열 상품 점검 중.

“한율인 드라마 촬영 갔어요?”

드림래빗의 박세은이 차남석에게 다가와 슬쩍 물었다. 차남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렇구나….”

“톡 안 해?”

“아뇨, 그냥… 얼굴 본 지 좀 된 것 같아서요.”

어설픈 웃음을 슥 지은 박세은이 다른 곳으로 종종걸음을 옮겼다.

‘새삼스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으나, 차남석은 중요한 일이면 직접 연락하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다음 날인 19일 일요일.

어스래빗은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팬들과 함께 유기 동물보호소로 향했다. 한율이 광고 모델로 활약하는 고양이 사료 브랜드 ‘캣앤프리’ 직원들도 동참했다.

일부러 오늘 휴일을 잡은 한율도.

한율은 오래간만에 직접 보는 팬들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드라마를 홍보했다.

“이번 달 31일, <서울 구미호>가 첫 방송 됩니다. 본방 사수 부탁드려요, 이프림~.”

옆에서 길우성이 대놓고 타박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 먼저 나와야지!”

아주 커다란데 귀여운 도마뱀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

[[선행하는☆]WB래빗 엔터, 대체 왜 이러나?!]

[인기 아이돌그룹 크리스탈 래빗과 어스래빗, 드림래빗이 소속된 WB래빗 엔터테인먼트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따뜻한 행보를 보이며 팬들을 훈훈하게 했다.

WB래빗은 지난 18일, 전 수익금을 아픈 취약계층 어린이를 돕는 ‘2020 설맞이 WB래빗 플리마켓’을 열어…(중략).]

-기부금과 봉사활동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 그곳...

-[<선데이 동물> 어스래빗 “우리의 선의는 무책임한 당신을 위한 게 아니다”] 이 기사 기억하시는 분?

-올해는 제발 얘네 선의 이용하는 놈들 안 나타났으면ㅜㅜ

ㄴ근처 팬들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본대요.

-어스래빗은 작년 초반까지 고양이 임시 보호도 하고 그러지 않았나? 그 후론 잠잠하네ㅋ 반짝반짝

ㄴ완전 바빴어영. 월드투어+방송녹화+컴백+미국K팝콘+컴백.. 이제야 좀 쉬려니까 2020이 되어버림. 임보했으면 무책임하다고 더 욕먹었을걸요.

ㄴ율톢 드라마 촬영 때문에 당분간 단체 활동 스톱이니 슬슬 한두 마리 데려오지 않을까 싶은데

“보아라.”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는 원제로의 차 안.

변지욱이 현강희에게 기사를 들이댔다.

“강제로 선행 이력을 쌓아주는 회사다, 우리 회사가.”

지난번, 친구에게서 WB래빗이 크레용박스를 인수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변지욱은 현강희에게 직접 물었다. 그리고 인수가 아니라 현강희의 이적 논의가 오간다는 사실을 들었다. 현강희가 크레용박스에 남으려 한다는 것도.

“동참하고 싶지 않나, 친구?”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너희 회사가 싫다는 게 아니야.”

“그럼 다른 곳이 더 좋다는 거냐…?! 어디야.”

“그게 아니라….”

현강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화살을 변지욱에게 돌렸다.

“넌 너희 회사 연습생 애들한테 미안하지 않아? 내가 가면 그 애 중 한 명의 자리를 뺏을 수도 있는데?”

“어….”

변지욱이 우물쭈물하다가 찌그러졌다.

“치사하게 양심 공격이냐….”

“지욱이 네 양심이 아플 일은 아니지.”

바로 옆에서 대화를 듣던 정민솔이 끼어들었다.

“어차피 아이돌그룹은 실력보다는 팀 컨셉에 맞는 멤버, 잘 팔릴 법한 멤버가 우선이잖아. 누가 들어와서 떨어질 사람이라면, 원래 어쩔 수 없던 일인 거야.”

“형, 왜 갑자기 본인의 아픔을 들쑤시고 그래….”

정민솔은 변지욱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현강희에게 물었다.

“스케일 엔터에서도 연락받았지?”

“…….”

“스케일? FJ그룹 계열사?”

다른 멤버들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민솔이 소리 없이 웃었다.

“왜 다들 놀란 척해? 본래 소속사랑 전속계약 맺은 몇 명 빼곤 다 연락받았잖아.”

“그 말은, 민솔이 너도 받았단 소리네?”

“받았지. 거절하긴 했지만.”

정민솔은 어깨를 으쓱이곤 미소 지었다.

“FJ잖아. 그래서 많이 흔들리기는 했는데, 그래도 지금 소속사를 등질 수가 없더라고. 오갈 데 없던 날 받아주고 열심히 케어해준 고마운 곳이니까. 우리 대표님이 날 믿어주지 않았다면 애초에 픽미돌도 나가지 못했을 거고.”

“그래….”

몇몇 멤버들이 흔들리는 시선을 감추려 고개를 돌리거나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정민솔이 황급히 두 손을 흔들었다.

“아, 내 생각과 선택이 그랬다는 거니까 다들 오해 금지요. 각자 사정이 다르잖아.”

“그래, 그래.”

“그런데 이렇게 계약 얘기하니까 정말 우리, 얼마 남지 않은 거 실감 난다.”

“그러게….”

멤버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현강희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

고입을 준비할 당시 연극영화과를 선택한 건, 단순히 연기실력이 노래와 춤 실력보다 조금이나마 더 나아서 승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돌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다면 에 참가하지도 않았을 거고.

『열심히 해서 인지도 팍팍 쌓고 돌아올 테니, 우리 같이 데뷔해요!』

원제로 프로젝트가 종료되어 크레용박스로 돌아가게 되면, 그동안 함께 고생한 다른 연습생들과 팀으로 재데뷔하고 싶다는 바람.

분명 원제로가 만들어진 초반에만 해도 대표도, 아쉽게 순위권에 들지 못해서 떨어진 장현우도 현강희의 목표를 응원하며 기대한다고 웃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표가 지쳐가는 게 보였다. 몇 명 없던 연습생들도 하나둘 조용히 짐을 싸서 다른 회사로 옮겼다. 분명히 회사 재정 상태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는데, 대표는 자신 없는 얼굴로 말했다.

『네 덕에 급한 채무를 해결할 수 있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해. 그런데… 더는 안 되겠다. 현실을 봐야 해, 강희야. 너 혼자 팀을 이끌어갈 수 있을 만큼, 여긴 절대 만만한 바닥이 아니야.』

투자자들이 현강희 혼자 솔로로 활동한다면 몰라도, 팀은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며 하나같이 고개를 흔들었다는 것이다.

『당장 혼자서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애를, 인지도도 없는 애들이랑 같이 굴리면서 오히려 적자를 보겠다고요? 미쳤어요, 김 대표? 벌써 지상파에서 OTT까지, 드라마 대본도 쏟아져 들어오는데?』

사실 현강희도 솔로로 활동하는 게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 연습실에서 고생한 다른 연습생들을 외면하기 싫었다.

저 형은 나보다 노래도 춤도 더 잘해. 흐름을 제대로 못 타서 못 보여준 것뿐이야.

쟤는 완전히 예능 캐릭터야. 데뷔만 하면 온갖 콘텐츠를 통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아낌없이 발산할 텐데, 이대로 묻히기엔 아쉽잖아.

그러니 내가 도와주고 싶어. 사실 내가 제일 평범한 실력인데, 나 혼자 잘나가는 건 이상하잖아.

그래서 말했다. 나는 팀에 끼지 않아도 좋으니, 차라리 내가 투자자가 되어서 지금 연습생들이 데뷔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그 말에 김 대표는 안 된다며 노발대발했고, 연락을 받고 온 부모님은 현강희의 등짝을 때렸다.

『그런 건 의리가 아니라 네 자기만족이고 고집이야! 다른 아이들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거라고!』

결국 대표는 원제로 프로젝트가 종료되는 시기에 맞춰서 회사 문을 닫겠다고 선언했다. 뒤늦게 개인 활동을 열심히 할 테니 서포트 해달라고 했지만, 대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 말씀하시진 않아도… 이 바닥 사람들에게 마음고생 참 많이 하신 것 같더라. 그런 분을 네 욕심으로 붙잡으면 안 돼, 강희야.』

현강희는 부모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 내 철없는 욕심인 걸까.’

그때, 변지욱이 현강희의 귀에다 속닥거렸다.

“우리 회사로 오면, 서한율 씨 연기 과외가 꽁, 짜.”

“…….”

나는 걱정과 고민에 치이는데, 친구란 게.

덥석.

“아야얏, 아팟! 놓아랏, 현강!”

* * *

1월 24일 설 연휴 아침.

한율은 직접 차를 몰고 이해원이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어서 와, 한율아.”

호텔 객실처럼 꾸며진 VIP 병실. 이해원이 링거대를 끌며 병실 문 앞까지 마중 나왔다. 사고 당일 밤, 중환자실에서 봤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많이 나아진 모습이었다. 머리에 감았던 붕대도 커다란 반창고로 바뀌었고.

“늦게 와서 미안해요, 형. 이제 걸어도 괜찮은 거예요?”

“응. 조금씩은 살살 걸어 다녀도 괜찮대. 경과 봐서 다음 주에 퇴원할 수도 있고.”

“다행이네요. 은훤이 형은요?”

“집에 보냈어. 처음으로 단역이 아닌 조연으로 드라마에 나가게 됐는데, 여기에선 준비하기가 힘들잖아. 이제 나도 혼자 있어도 괜찮고.”

“네. 이건 빈손으로 오기 조금 그래서.”

한율은 병문안 선물로 사 온 딸기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냥 와도 되는데. 고마워.”

“형 여기에 있는 동안 살 좀 찌겠는데요?”

테이블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선물로 놓고 간 과일 바구니나 간식, 음료수가 잔뜩 쌓여 있었다.

“괜찮아. 원래 병문안 선물은 다른 손님이나 고생하는 의료진분들과 나눠 먹는 거잖아. 뭐부터 먹을래?”

한율은 이해원과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다. 최근 대박이 난 영화나 연예인 이야기, 숙소에서 게임 삼매경에 빠졌던 안인섭이 돌연 모니터에 뜬 블루스크린을 보고 발작한 이야기 등등.

사고에 관한 이야기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이미 경찰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에게 수십 번은 들려주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안 물어봐? 어쩌다가 사고 났는지?”

그러자 이해원이 먼저 물었다.

“호 형에게 들었어요. 웬 이상한 놈이 앞에서 알짱거리는 바람에 차를 갓길에다 세우려 했는데, 그때 블랙아이스에 미끄러졌다고.”

“그렇긴 한데….”

“왜요? 뭐가 더 있어요?”

이해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었다.

“아냐. 나중에 정리되면 말해줄게. 그나저나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한율은 이해원 앞에 먹기 좋게 썬 멜론을 내려놓았다.

“혹시….”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일까. 의아한 얼굴로 가만히 기다리자, 이해원이 포크를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나 사고 났었던 날 밤, 한율이 너 여기 온 적 없지?”

“여기… 병원이요?”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라는 얼굴로 되묻자 이해원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율은 시치미를 뚝 뗐다.

“아니요? 사고 당일이면 형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그건 왜요?”

“아…. 내가 그때 꿈 비슷한 걸 꿨는데, 이게 참 기괴하면서도 생생했거든.”

이해원이 들려준 내용은 한율을 당황하게 했다.

“내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데, 네가 온몸에 은은한 푸른빛을 내면서 홀연히 들어오는 거야. 그러고 날 빤히 내려다보다가, 내 이마랑 가슴에 살짝 손끝을 대더니 이렇게 말하더라. 빨리 일어나. 너희 어머니, 걱정 많이 하시겠다.”

“…….”

“그런데 또 네 뒤엔, 아주 커다란데 귀여운 도마뱀 얼굴 같은 게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파충류 특유의 눈이 세로로 가늘어졌다가, 살며시 풀렸다가 하면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해원은 ‘꿈’에서 이채현이 사람들을 데리고 온 것, 의사에게 멀쩡히 살려내라고 말을 한 것과 한율이 그들을 따라 나가는 것까지 봤다고 했다.

“나중에 의식을 차리고 나서 다시 생각났을 땐 ‘유체 이탈이라도 한 건가?’ 했거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역시 꿈이었던 것 같아.”

“…네, 이상한 꿈이네요.”

잠시 후, 면회 시간이 끝나서 나가기 전. 한율은 이해원에게 빠른 쾌유를 바란다며 악수를 청했다.

‘머리를 다쳤던 데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은 환자의 기억에 환영을 덧씌우는 마법을 쓸 수도 없고.’

숙소 아파트로 향하는 길. 한율은 한숨을 푹 내쉬며 신호에 맞춰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나저나….’

아주 커다란데 귀여운 도마뱀 얼굴이라니.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지만, JE나 박가람이 목격한 감상과는 아주 판이했다. 두 사람은 질색했는데.

‘파충류 좋아하나?’

한율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다가, 거치대에 놔둔 핸드폰을 터치, 현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선배님!]

“어디쯤이야?”

-[도착했습니다! 라이언 선배님이랑도 만났어요!]

오늘은 작년 RMMA에서 한 약속을 지키는 날이었다. 한 달하고도 열하루 만에.

사실은 오늘도 <서울 구미호> 촬영이 있었으나, 오늘 새벽에 갑자기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세한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오늘 한율과 촬영하기로 한 배우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듯했다.

“알았어, 금방 갈게.”

-[네, 안전하게 천천히 오세요!]

현강희와 변지욱, 라이언이 기다리고 있는 곳은 어스래빗 숙소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산책로였다.

용케도 사생들을 잘 따돌리고 왔는지, 그들은 산책 중인 아파트 주민의 개와 한가롭게 놀고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흔한 디자인의 패딩에다 모자, 검은색 마스크를 턱 밑으로 살짝 내린 모습으로.

“미안해. 숙소엔 다른 손님을 들이지 않기로 규칙으로 정해서….”

“안녕, 한율아.”

가까이 다가가면서 말하는데, 개 리드 줄을 잡은 훤칠한 키의 남성이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이제설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쩐지 개가 낯이 익더라니, 그의 집에 종종 갔을 때 만났던 비글 ‘민초’였다. 민초는 한율을 보자마자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두 발로 서서 제자리 점프했다.

한율은 쭈그리고 앉아 민초와 포옹으로 인사했다.

“안녕, 민초.”

할짝, 할짝.

변지욱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에다 넣으며 웃었다.

“형은 개한테도 인기가 많구나.”

우리 회사로 와

네 사람은 한율의 차를 타고 예약한 가게로 향했다. 원래 오늘 약속엔 원제로의 라일도 함께 하기로 했으나, 그는 오늘 아침 일찍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어 불참했다.

“너희는 내일 집에 가?”

“응.”

“전 이따가 저녁에 출발하기로 했어요. 선배님은요?”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어.”

치이익. 세 사람 옆에선 라이언이 집중하며 고기를 구웠다.

“형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숙소에서 푹 잘 거야. 그런데 대표님이 내일 저녁에 집에 오래.”

“네.”

“우리 대표님, 라욘 형 많이 챙겨주는 것 같아. 대표님이 아림에서 형을 직접 데려왔다고 했나?”

라이언은 눈을 들어 변지욱을 한번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응. A&R 팀장님이 대표님에게 연락했대. 미국으로 돌려보내기엔 아까운 애가 있는데, 한번 보지 않겠냐고.”

“A&R? 신인 개발팀이 아니라?”

“응. 그래서 대표님이 아림으로 연락했고, 아림은 나한테 투자한 돈 회수하려고 나 팔았어.”

이 바닥에서 연습생이 빚을 안고 이적하는 건 흔한 일인데, 마치 사람을 사고파는 인신매매인 양 들린다.

“나는 계약 위반 안 했어. 그래서 미국으로 돌려보내면 나한테 쓴 돈도 날아가잖아.”

“그때 WB래빗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었어요?”

“크리스탈 래빗 소속사.”

“많이 불안했겠다. 라욘 형이 우리 회사로 왔을 때가 내가 중2 올라갈 때였으니까…. 회사가 만들어진 지 4년밖에 안 된 상황이었잖아.”

“응. 그런데 대표님이 좋은 분 같아서, 좋았어.”

한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실력이 좋고 외모가 빼어나도, 손버릇이 안 좋다는 소문을 가진 연습생을 데려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그러나 좌기훈 대표는 라이언을 데려온 뒤 그의 사정을 살피고,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 덕에 라이언은 병적도벽(kleptomania)이나 불안증이 많이 호전되어, 현재는 차남석과도 무난하게 잘 지내는 중이었다. 그래도 동갑이라 별것 아닌 일로 다툴 때도 있지만, 금세 서로 잊어버릴 만큼 가벼운 수준.

“들었느냐, 현강희? 원석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서 낚아채오는 우리 대표님의 눈썰미 일화를?”

현강희가 활짝 웃으며 변지욱에게 물었다.

“아예 동네방네 소문낼래? 확성기 가져다줘?”

“……?”

변지욱은 왜 좌 대표의 안목을 현강희에게 자랑하듯 말하는 건지, 그리고 왜 현강희는 저렇게 반응하는 건지.

한율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자, 변지욱이 헉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율이 형, 혹시 그 소문 못 들었어?”

“하뉼, 드라마 촬영하느라 바빴잖아. 우리랑도 연습 시간이 자주 엇갈려서 모를 거야.”

“무슨 소문이 있었어요?”

변지욱과 라이언의 시선이 현강희를 향했다. 현강희가 어설픈 웃음을 한번 짓더니 설명해주었다. 크레용박스 대표가 회사 정리 전 자신을 WB래빗에 맡기고자 논의한 게, 인수설로 소문이 와전되었다고.

“그래서 저도 그만 고집부리고, 다른 곳을 찾으려 해요.”

“그래, 현강. 레슨 쌤들한테 정산할 돈이나 직원들 월급 밀린 거, 다 네 덕에 해결한 거나 다름없잖아. 넌 충분히 할 만큼 했어. 실제론 대표님이 더 미안하고 면목 없다고 생각 중일걸? 그래서 아주 믿음직스러운 우리 회사에 먼저 연락하신 거고?”

“다 익었다, 먹어. 지욱은 강요 그만해.”

“넹.”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고기를 자르고, 뒤집고, 잘 익었는지 확인하던 라이언이 그들의 접시에 고기를 올려주었다.

“고맙습니다.”

“라욘 형이 구워준 고기의 맛은 과연?”

“고마워요, 형. 형도 먹어요.”

“응. 잘 먹을게, 하뉼.”

“네. 부족하면 마음껏 더 시켜요.”

라이언은 주저하지 않고 직원 호출 벨을 눌렀다.

“고기 2인분이랑 계란말이, 순두부찌개 하나 더 주세요.”

점심을 푸짐하게 먹고 나선 변지욱과 라이언을 각각 숙소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현강희는 따로 고민 상담을 하고 싶다고 하여, 카페에서 음료를 포장해 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현강희의 고민은 식당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소속사 이적 문제였다.

“우선 강희 네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정리하는 게 순서 같아. 그래야 널 잘 서포트해 줄 수 있는 회사를 찾을 수 있잖아.”

“그….”

현강희가 머뭇거리다가 슬며시 물었다.

“선배님이 생각하시기에, WB래빗은 어때요?”

“아직 배우 케어엔 약해. 그쪽 커넥션이나 실무 경험도 부족하고. 아이돌그룹 케어는… 내가 다른 회사를 겪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무난한 것 같아. 솔로 활동은 생각해 본 적 있어?”

“아뇨, 아뇨, 아뇨!”

현강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저 같은 어정쩡한 실력으로 감히….”

“다른 아이돌은 솔로 활동 한 번쯤 해보는 게 소원이라던데. 그럼 연기는?”

“연기는…. 어릴 적부터 학원에 다니기는 했지만 정말 본격적으로, 제대로 배워보기도 전에 원제로가 된 거라서요. 활동하는 동안 따로 레슨 받을 여유도 별로 없었고. 그리고 솔직히….”

현강희가 컵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연기는 언제라도 도전할 수 있지만, 아이돌은 할 수 있는 시기가 정해져 있잖아요.”

“그럼 결정됐네. 우리 회사로 와.”

“……!”

현강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은 가볍게 웃었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재데뷔할 수 있을 테니, 나이를 생각해도 딱 적당한 것 같은데? 같이 활동했던 멤버 둘도 있겠다, 호흡 맞추기도 수월할 테고.”

“하지만 제가 가면 기존 연습생 중 한 명의 자리가….”

한율은 단호히 말했다.

“그건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야.”

“…….”

“그리고 데뷔 직전에 끼어드는 거면 몰라도, 만약 지금 네가 오면 아이들은 너를 시기하고 미워하기보다는 함께 데뷔하려고 더욱 분발할 거야. 승준이 형, 지욱이에 이어서 강희 너까지 합류하는 건 그 팀의 성공 가능성 또한 올라간다는 소리니까.”

“아….”

“무엇보다 우리 회사, 팬들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고, 악플러들이나 허위사실 유포자도 경솔하게 날뛰지 못하도록 관리 잘해줘. 다른 기획사에 비해 이직률이나 퇴사율이 낮을 정도로 사내 분위기도 괜찮고.”

“왜….”

현강희가 목 뒤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지욱이한테 들었을 때랑 달리 마음이 혹할까요?”

“지욱이랑은 친구니까, 무슨 말을 들어도 일단 반발 심리가 생기잖아.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런가. 현강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곤, 부모님과 다시 상의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진지한 상담은 끝. 한율은 음료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현강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원제로 숙소 앞까지 그를 데려다주었다.

다음 날 아침.

한율은 부모와 함께 큰집으로 내려갔다.

“누나, 몰골이 왜 그래요?”

조부모의 집 거실. 구석진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서한림이 한율을 째려보았다. 평소처럼 화사하고 예쁘게 꾸미기는 했는데, 이상하게 우중충했다.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살도 좀 빠졌다.

“귀걸이도 짝짝이고.”

한율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는지, 서한림이 주섬주섬 귀걸이를 빼며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TV만 틀면 나오는 네가, 명절에 강제로 잡혀 끌려온 취준생의 마음을 알아?”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저 TV에 매일 안 나와요.”

“그래, 평생 모르고 살아. 넌 겪지 마….”

어째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모양.

한율은 서한림을 혼자 두기로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서한림이 덥석, 한율의 옷을 잡았다.

“가지 마, 나랑 놀아줘.”

“…….”

한율은 서한림 옆에 나란히 앉았다.

“달냥인 잘 지내?”

“네.”

“전에 임보했던 애들 소식은 들어오고?”

“네. SNS에 사진을 자주 올리시더라고요.”

“다행이네. 하…….”

서한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고민까지는 아닌데…. 얼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

“지난주에, 그다지 친하지 않은 대학 동기한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막 아픈 몰골로 빌빌거리던 새끼고양이를 구조했는데, 자기는 키울 형편이 안 되니까 나더러 맡아달라고. 보호소로 가면 안락사당하지 않냐면서. 그래서 나도 지금 키우는 고양이 하나 챙기기도 벅차다, 힘들다 그랬거든.”

하아. 재차 깊은 한숨.

“그랬더니 한율이 너한테 맡겨달라고 해줄 수 없냐고 하더라? 당연히 안 된다고 했지. 걔도 바쁘다, 무책임하게 섣불리 임보 안 한다. 그랬더니 병원비 후원 부탁하는 것도 힘드냐 당당히 요구하는데, 나 진짜 기가 차서….”

“…….”

“연예인이 무슨 ATM 기계도 아니고, 선행 몇 번 했다고 그게 꼭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아니 그 전에, 자기가 무슨 권리로 요구하는데? 그러면서 이 불쌍한 고양이가 죽어도 괜찮냐, 이 일 인터넷에 올려도 괜찮냐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는데 진짜… 쌍욕 날리려다가 참았다. 너한테도 그런 부탁 많이 오지?”

“많죠.”

조금만 도와줄 수 있으면 정말 똑바로 잘 살 자신 있다, 너 돈도 많고 착하지 않냐, 기부한다는 생각으로 좀 도와달라… 이런 요구부터 시작해서, 본인의 아이가 아프다며 대뜸 병원비 좀 보내달라는 사람, 아픈 동물 사진을 잔뜩 보내며 ‘당신 아니면 죽을 아이들입니다.’ 이런 식의 글과 계좌번호를 남기는 사람까지. 천차만별이었다.

“다 무시하지만.”

“나도 그래야 하는데… 왠지 막 그 고양이한테 미안해지는 거야. 아니, 잘못한 게 없는데 대체 내가 왜 그 고양이한테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설마, 그래서 취준생인 누나가 거뒀다는 얘기는 아니죠?”

서한림이 힘없이 입을 다물었다.

“…….”

“누나, 호구예요?”

“흐윽….”

서한림이 우는 소리를 내며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한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치렁치렁 길게 내려온 새카만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눈이 간절하게 빛났다.

“혹시 너희 회사에 알바 자리 하나 없니…?”

“없어요.”

“흐윽….”

잠시 후, 외조부모의 집에선 사촌 동생인 두 쌍둥이가 한율의 옆에 꼭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빠, 우리 학교에 놀러 오면 안 돼?”

“학교엔 왜?”

“친구들한테 자랑할 거야!”

“오빠, 우리 생일 파티할 때 오면 안 돼?”

“생일이 언젠데?”

“10월 9일!”

“한글날!”

한참 멀었다.

“갈 수 있도록 노력할게.”

“와!”

“꼭 와아. 약속!”

지난달 녹화한 <2020 설 특집 아이돌 스포츠 대회>도 함께 시청했다. 친척 어른들은 TV에 한율이 나올 때마다 ‘우리 집안 핏줄이라 잘생겼다’라며 뿌듯해했고, 부친은 ‘키랑 비율은 우리 집안에서 좀 보탰습니다’라며 소심하게 끼어들었다.

한율이 어스래빗으로 데뷔하기 전, 한율도 최은희처럼 연예계 사람들에게 다치진 않을까 걱정했던 이모도 TV를 보며 웃었다.

“우리 조카, 천생 연예인이었네.”

그날 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추천 동영상 코너.

어스래빗이 몇 주 전 파주 한옥 펜션에서 촬영한 그린라이브 영상 클립이 올라왔다. 주로 멤버들끼리 팀을 나눠서 전통 놀이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꺄하하하핫!]

가장 반응이 좋은 건, 길우성이 미친 것처럼 웃으며 연을 날리려 달리다가, 넘어질 뻔한 걸 성대한 앞구르기로 무마하고 벌떡 일어나 다시 달리는 장면이었다.

[…으하하하!]

[뭐야, 쟤 무서워…!]

자막.

[승부욕에 돌아버린 막내 토끼]

-이거 그린라이브에서 풀버전으로 보세요 진짜 웃김ㅋㅋㅋㅋ

-몸 개그도 잘하는 지구토깽이들

-무대 위 모습이랑 갭 차이 어마무시한 팀 1위ㅋㅋㅋㅋ

-10:25 서한율 자신만만하게 제기 차다가 지붕 위로 날린 뒤 표정 ( ╹ᗜ╹*) 롸?

ㄴㅅㅂ졸귀ㅠㅠ 진짜 납치하고 싶다ㅜㅜㅜㅜ

ㄴ아니 본인이 하늘 높이 뻥 차 놓고 왜 해맑게 놀라냐고ㅋㅋ

ㄴ지압 슬리퍼 신고 차다 보니 힘 조절이 안 되었던 것

<2020 설 특집 아이돌 스포츠 대회> 하이라이트 모음 코너에도 어스래빗 활약 영상이 적잖게 올라왔다.

기사도.

[어스래빗, MBS <아스대>에서 <서울 구미호> 홍보]

[어스래빗 서한율, 한복 차려입고 양궁 시범]

[<아스대> 양궁, 구미호와 꽃 선비로 나타난 어스래빗]

-1월 31일 금요일 밤 9시 10분. tv Mu와 글로벌 OTT 앱에서 <서울 구미호>가 동시에 첫 방송 됩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D

최선을 다해서 설득해볼게요

1월 30일 목요일. 병원에서 퇴원한 이해원은 매니저와 함께 낯선 집에 도착했다. 병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파트였다.

“앞으론 여기에서 지내도록 해.”

“여기가… 누구 집인데요?”

매니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이해원을 바라보다가 툭 내뱉듯 물었다.

“누구겠냐?”

“…….”

“그럼 난 갈 테니까 쉬어. 그 사람 허락 없이 사적인 외출은 절대 금지니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톡 보내고. 그리고 너 간호해 준 친구, 나랑 대표님 빼곤 아무도 들이지 말라니까 명심해. 나 잘리는 꼴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지만.”

일방적으로 떠든 매니저는 이해원만 남기고 집을 나갔다.

삐릭, 쿵. …철컥.

이해원은 저절로 잠기는 문을 멍하니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구패치’는 이해원의 스캔들 상대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스캔들과 교통사고 이후, 자신이 주제에 맞지 않는 비싼 아파트에 혼자 살게 된 게 알려지면 여론이 어떻게 수군거릴지 뻔히 예상 갈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어.’

이해원은 느릿느릿 집을 둘러보았다.

널찍하고 좋은 침대가 놓인 침실을 지나쳐 드레스룸. 그 안엔 숙소에 있었던 옷과 신발, 잡화와 액세서리가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서재로 꾸며진 방에도 숙소에 장식해두었던 팬들의 선물이나 앨범, 굿즈 등이 고스란히 옮겨졌고.

사실상 MOHE 숙소에서 독립한 것과 다름없었다.

‘언젠가 독립하기를 바라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냐.’

4년 전에 받은 거액의 계약금을 채우려면 아직 멀었다. 그리고 이 또한 다 빚이었다. 이 아파트의 실소유자가 이채현이라 하더라도.

이해원은 심호흡하고 난 뒤 이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하기 전에는 미리 메시지로 허락부터 받으라고 했을 텐데?]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

하지만 이전처럼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저 숙소로 돌아갈게요, 사장님.”

-[…뭐?]

이해원은 생활감이 전혀 없는, 보기 좋게 꾸며진 깔끔한 집안을 둘러보며 재차 말했다.

“MOHE 숙소로 돌아갈게요.”

-[하.]

기가 찬다는 듯 내뱉는 웃음소리에도 심장이 불안하게 덜컥거리지 않았다.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 변한다더니, 이런 걸까.

이해원은 며칠 전, 사고가 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모든 신경이 끊어진 것처럼 도통 말을 듣지 않는 신체. 삐. 머리를 울리는 이명에 잠식된 채 맞이한 죽음에 대한 공포. 하지만 희미해지던 의식 끝자락에 떠오른 건, 남겨질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었다.

이대로 내가 죽으면,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타인을 통해 듣게 될 것이다.

믿기 싫은 이야기도, 거짓도, 과장도, 대중의 도덕적 잣대로 잰 비아냥과 비난까지 모두 섞여, 어머니의 가슴을 찢어발기겠지.

‘적어도 내가 말씀드렸다면. 내 입으로. 그래야….’

대못을 박는 건 똑같다.

하지만 이대로 죽으면, 어머니는 가장 진실을 듣고 싶은 당사자에게 영영 아무 말도 들을 수 없게 된다. 타인이 떠들어대는 말에서 당신 자식에 대한 진실을 찾아 헤매게 된다.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제발 살려주세요. 엄마한테 직접 말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아니에요, 말까진 못해도 괜찮아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엄마를 보게 해주세요.’

그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이해원은 간절히 바라던 기회가 주어졌음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사장님.”

이해원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겨울이 끝나려면 멀었는데, 오래간만에 맑고 포근한 좋은 날씨였다.

“만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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