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191/427)

* * *

1월 31일. <서울 구미호> 첫 방송이 나가는 날.

오후 2시부터 너튜브 tv Mu 채널을 통해 <서울 구미호> 제작발표회 라이브 방송이 진행될 예정이라, 한율은 오래간만에 샵에 들렀다. 단장을 받는 동안엔 미리 받은 인터뷰 대본을 살폈다.

“<별☆일없는 집> 끝나고 2년 만의 드라마 복귀네? 소감이 어때요, 서 배우님?”

4년 전 <보컬리스트 시즌3>에 나갈 때부터 한율의 메이크업을 담당하고 있는 아티스트가 물었다.

“시청률이 잘 나와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잘 나올 거야, 걱정하지 마. 그런데 더순한화장품 광고는 계약이 끝난 거야? 얼마 전에 인터넷에 광고 뜬 거 봤는데, 다른 모델이 나오더라.”

“네. 작년 12월 부로 계약이 끝났어요.”

12월도 본래 계약 만료인 8월에서 6개월 더 연장해 늘어난 기간이었다. 사실 더순한화장품 측은 1년 더 연장하고 싶어 했으나, 그동안 한율의 몸값이 높아지는 바람에 포기했다.

<서울 구미호> 방송이 목전으로 다가오자 다른 광고주들이 러브콜을 보내오기 시작했는데, 계약금 시세를 비슷하게 맞춰줘야 하는 까닭이었다.

“우리 조카가 아쉬워하겠다. 중학교 입학하면 한율이 네가 광고하는 화장품 사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저는 모델 기간이 끝났지만, 그래도 순하고 좋은 제품이니까 애용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응, 그럴게.”

드라마 제작발표회는 tv Mu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서울 구미호>와 tv Mu, 글로벌 OTT 앱 로고가 적힌 널찍한 포토월. 그 앞에 주연배우와 PD를 위한 의자 4개가 나란히 놓였다. 사회자는 조금 떨어진 우측에 따로 의자를 두고 앉았다.

방식은 2년 전 겪었던 <별☆일없는 집> 제작발표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이번엔 너튜브 실시간 채팅을 볼 수 있는 커다란 모니터가 세워졌다.

가장 먼저 오준기 PD가 마이크를 들어 인사했다. 그의 시선이 정면에 설치된 카메라와 기자들 사이를 어지럽게 오갔다.

“안녕하십니까. <서울 구미호> 연출을 맡은 오준기라고 합니다.”

-PD님 우리 백수 삼촌 닮았어

-누가 PD 바로 옆에 이제설 앉혔냐

-PD님 의자 조금만 더 뒤로 빼서 앉으심이

-[어스래빗 서한율 사랑해♡♡♡♡♡]

-아닌데 PD님 우리 동네 피방 사장님 닮았는데

-PD님 긴장했나보다 팝핀하는 동공이 카메라를 찾아 헤매네

이제설은 미소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서울 구미호>에서 미제사건 전담팀의 자문을 맡은 범죄심리학자이자, 구미호 ‘슬호’ 역을 맡은 배우 이제설입니다.”

-존잘

-영아 님이랑 언제 결혼해요?

-드디어 한율이랑 같이 드라마 찍으셨네ㅜㅜ

-히아신스 영아 남친

-앉아있는데도 비율 예술인 게 느껴진다

-배우 포스

-나 이분 산책로에서 비글한테 끌려가는 거 봐써

-아직도 안 헤어짐???

한율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다가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서울 구미호>에서 구미호 ‘형호’ 역을 맡은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역시 아이돌이라 카메라 훑는 시선이 노련하다.

-보통 배우들은 카메라에 찍혀도 아이컨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이런 자리에선 좀 헤매거나 하나만 뚫어져라 직시하는데, 역시 무대에서 춤추면서도 카메라 찾아내는 아이돌이라 다르네ㅋㅋㅋ

-서한율 손 크기랑 핏줄 봐 머리 쓰담쓰담 당하고 싶다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있어서 여전히 예쁜데 잘생겼다ㅜㅜ

-피부랑 머릿결 와

-얘가 벌써 스물한 살이야ㄷㄷ 머리 위로 토끼 귀 까딱까딱하면서 꽃을 단 토! 끼!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ㅜㅜ

“안녕하세요. <서울 구미호>에서 미제사건 전담팀 형사 ‘민해솔’ 역을 맡은, 배우 현미나입니다.”

-눈나!!!!!!!!!!!!

-초면이지만 사랑합니다.

-레알 연기구멍 하나 없네

-형사 역할 소화하려고 일부러 운동으로 근육 증량하셨다던데 진짜 카리스마가

-나 이분 카메라에 예쁘게만 잡히기보다는 연기를 제대로 보여주는 데에 중점을 두는 분이라 너무 좋음

PD와 주연 배우들의 인사가 끝나자 너튜브에는 <서울 구미호> 공식 티저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인터뷰 시작. 인터뷰는 제작진이 사전에 검토한 기자들의 질문, 배우들이 스태프와 함께 작성한 답변대로 이뤄졌다.

처음 대본을 봤을 때의 감상부터 시작해서, 오디션 일화와 촬영 도중 있었던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너튜브 채팅창에 올라오는 네티즌의 질문을 받는 시간도 있었는데, 사회자가 직접 골라서 대신 질문했다.

“촬영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씬을 꼽으라면 어떤 게 있냐고, ‘순두부찌개에누가당근넣었냐’님이 질문해주셨네요. 먼저 한율 씨가 대답해볼까요?”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건 많은 사람과 동시에 촬영했던 액션 씬이고, 정신적으로 조금 힘들었던 씬은….”

한율은 잠시 말을 끌다가 눈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홀리는 구미호처럼.

“스포가 되니 비밀입니다.”

-서한율 포획해도 되나요?

-평소엔 토끼인 척하더니 급할 땐 구미호의 힘인가

-불법 포획입니다.

-여기 로스트○크 유저가 있는 것 같아

드라마 제작발표회는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끝났다.

스튜디오에서 퇴장한 뒤, 대기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촬영장에서 뵙겠습니다.”

“내일 촬영장에서 봐요, 한율 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율은 PD와 현미나, 이제설을 먼저 보내고 나서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tv Mu 예능국 스태프가 잠깐 할 얘기가 있다며 조유찬을 찾아온 까닭이었다.

두 사람이 복도에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핸드폰으로 <서울 구미호> 제작발표회 반응을 살폈다.

-기승전 로맨스만 아니면 된다.

-결국 한국 드라마라서 나중엔 PPL 범벅이 되겠지. 뜬금없이 죽을 먹고, 뜬금없이 치킨을 뜯고, 존나 부자라면서 국산 차를 몰고, 이야기 나누는 장소는 특정 프랜차이즈 카페만 고집하고, 마지막엔 분식집엘 가겠지. 내 여우 입맛에도 딱인 곳을 찾았다! 이러면서

ㄴㅋㅋㅋㅋㅋㅋ

ㄴ서한율 매운 거 못 먹고 튀김류(치킨 포함)도 안 좋아하는데

ㄴ부자라도 자본주의 공격엔 못 당합니다.

ㄴOTT 쪽에서도 적잖게 투자해서 PPL이 과도하게 나올 것 같진 않아요ㅎㅎ

-난 어설픈 CG가 다 망칠까 봐 걱정이다...

한율은 한 기사에 달린 마지막 댓글을 보며 속으로 동감을 표했다.

CG는 나도 조금 걱정이다.

그때 조유찬이 들어왔다.

“한율아, 가자.”

“네.”

예능국 스태프가 조유찬을 찾은 이유는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들을 수 있었다.

“지난번에 <달리는 예능> 제작진이 한율이 너한테 했던 부탁 있지? 제설 씨 섭외하고 싶으니 출연 설득 좀 해달라고. 그거랑 똑같은 부탁 하더라.”

“무슨 프로그램이요?”

“<뮤직마켓>.”

“아아…. 딱히 들어주고 싶진 않네요.”

“작년 일 때문에?”

“네.”

작년 9월 말. 유호와 길우성이 <뮤직마켓> 녹화를 위해 아침 일찍 나갔을 때였다. <뮤직마켓> 제작진은 두 사람이 도착하고 나서야 녹화 순서가 뒤로 밀렸다며 일방적으로 통보하곤, 몇 시간 동안 하염없이 기다리게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자정이 되어서야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컴백까지 고작 나흘 앞둔 중요한 시기였던 터라, 멤버들은 갑질에 제대로 당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아. 조유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탁 들어주면, 어스래빗 노래를 퀴즈로 내주겠다고 하더라. 거기에 퀴즈로 나오면 바로 실검에 노래 제목 올라가잖아.”

“최선을 다해서 선배님 설득해볼게요.”

“하하….”

그날 밤 9시 5분.

모니터링도 할 겸 조용히 방에서 첫 방송을 보려던 한율은, 멤버들에게 강제로 잡혀 거실 소파 한가운데에 앉았다.

“드라마 첫 방송이니 다 같이 봐야지.”

“<별☆일없는 집> 첫 방송 땐 안 그랬던 것 같은데요.”

“써한 너 그때 부모님 집에 가서 봤잖아.”

아, 그랬던가?

“우리가 뭣 때문에 오늘 이렇게 일찍 퇴근한 것 같냐?”

“아직 시작하려면 5분 정도 남았으니까, 인증샷부터 미리 찍자.”

강보배가 핸드폰을 짐벌에 끼우곤 높이 들었다.

“다들 들어왔지?”

“프로그램 로고도 보이게 각도 조금만.”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하나, 둘.”

찰칵.

“달냥이 눈 게슴츠레하게 떴다. 다시.”

“하나, 둘.”

찰칵.

잠시 후, <서울 구미호> 첫 방송이 시작되었다.

꼬리 어디에다 숨겼어?

가느다란 초승달이 누워있는 검푸른 새벽.

바스락바스락. 한 남자가 바싹 말라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제멋대로 자란 긴 수풀을 헤치며 도망친다. 이내 도심 불빛이 반짝거리는 공터로 튀어나오는 남자.

우우…. 갯과 짐승의 희미한 울음소리가 남자의 등을 훑는다.

“허억, 허억…!”

털썩! 발이 뒤엉킨 남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오래전 건설이 중단된 을씨년스러운 폐건물을 향해.

탁탁탁… 휘청! 계단을 오르는 와중에도 남자는 몇 번이나 넘어졌다. 몸을 일으키느라 손을 댄 벽과 난간 곳곳에 피가 묻는다.

거칠게 흔들리던 시야는 이윽고 사방이 환히 뚫린 층을 담았다. 털썩. 기둥 뒤로 쓰러지듯 숨은 남자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끅끅거리며 호흡을 진정시키다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데, 함께 안쪽에서 나온 경찰 신분증이 흔들렸다.

피 묻은 손이 덜덜거리며 핸드폰을 터치했다. 그러곤 [팀장님]이라고 적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

“……!”

남자는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공포로 새하얗게 질린 채 천천히 돌아가는 남자의 고개.

파삭. 스산한 색으로 물든 바닥과 기둥에 무수한 피가 튄다.

우우…. 폐건물 너머 숲에서 다시금 희미하게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린다.

검푸른 새벽의 빛이 옅어지고 서울의 하늘이 밝았다.

서울지방경찰청. 활동하기 편한 운동화를 신은 여성이 경찰 로고가 새겨진 큼지막한 상자를 품에 안은 채 로비를 가로지른다.

“아, 씨발,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출입증으로 잠긴 문을 열어 형사과가 있는 복도로 진입하는데, 한 중년 남성이 신경질을 내며 옆을 지나쳤다.

“……?”

여성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잠깐 돌아보곤 다시 걸음을 옮겨 사무실로 들어갔다. [장기미제사건팀] 팻말이 달린 자리에는 사복을 입은 형사 한 명이 서류 더미에 파묻힌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쿵. 일부러 소리 내어 상자를 내려놓자 형사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벗어둔 안경을 집어서 썼다.

“누구…?”

여성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파티션으로 분리된 장기 미제팀 자리 곳곳을 살폈다. 그러다 시선이 멈춘 곳은 [1999년 강남 일가족 살인 사건] 자료가 부착된 보드.

“…….”

“혹시 오늘 새로 오신다던….”

여성이 주섬주섬 일어나는 형사를 돌아보았다.

“오늘부터 장기미제사건팀에서 근무하게 된 민해솔 경장입니다. 팀장님은 어디 계시죠?”

* * *

드라마는 짐승 비슷한 무언가에 쫓기는 어린 여자아이의 영상으로 이어졌다. 차칵차칵. ‘1999년 강남 일가족 살인 사건’을 기록한 흑백 신문. 차칵차칵. 컬러로 뒤바뀌며 2017년 10월 달력이 찍힌, 비슷하지만 다른 사건 현장.

과거 영상 속 민해솔 역 현미나가 중얼거린다.

[대체 왜 이런 짓을….]

띠리리.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 소리로 바뀌는 장면.

책상에 걸터앉아 두 사건 자료를 신중히 살피던 남성의 시선이 전화를 향한다. 영문 서적이 잔뜩 꽂힌 책장, 온갖 사건 자료와 사진이 부착된 이동식 보드가 슬며시 비친다. 보드에 적힌 글자도 온통 영어였다.

수화기를 집어 드는 남자의 금빛 홍채가 스르륵 검은색으로 돌아온다.

유창한 영어로 전화를 받는 이제설의 모습이 온전히 잡혔다.

[네, 최슬호입니다.]

그리고 2019년 현재. 고풍스러운 외관을 지닌 고등학교 풀샷에 이어 [영화제작 동아리 <빠밤!>] 종이가 부착된 작은 부실.

한율이 처음 촬영한 씬이 나왔다.

tv Mu <서울 구미호> 프로그램 톡창.

-셋 다 같은 사건으로 얽히는 거구만

-현미나 2017년 사건 담당 형사였나 봄?

-이제설 슈트 ㅎㅇㅎㅇ

-서한율서한율서한율서한율서한율서한율

-교복 입은 모습 너무 반갑다ㅜㅜ

-서한율 흑발은 진리다

-무슨 낙서하닝

-최형호

-고딩이 4천만 원짜리 롤ㄹ스 차고 있네..

-낙서의 정체는 개인가 곰인가

-진짜 재벌가 도련님 같다

-4천????????

-짝퉁이겠죠. ㄹㄹㅅ는 드라마 협찬 안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손목시계 예쁘네 했는데 4천....ㅋㅋㅋ;;

-개나 곰 아니고 여우 그린 거예요..

-사건 현장 좀 잔인한데.. 15금 맞지?

-제작사에서 돈 주고 빌린 거겠죠. 명색이 재벌 3세인데 그렇게 보이게끔 입혀 놔야지

-계속 쭉 차고 나오면 본인 거일 확률 높음. 본인 거라고 해도 안 놀랄 자신 있다

[좋아. 그럼 촬영장 섭외는 나한테 맡겨.]

[예쓰, 역시 한대그룹 최형호! 감사합니다, 형호 님!]

[그럼 최형호, 나 본격적으로 대본 집필 들어간다?!]

‘1999년 강남 일가족 살인 사건’과 ‘2017년 강남 일가족 자살 사건’에 흥미를 보이던 한율의 선언에 기뻐하는 부원들.

영상 속 한율이 입가에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일어났다.

-진짜 구미호가 어떻게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구미호가 웃는 것 같다

-눈웃음 좀 요사스러운데 귀엽넹

-서한율 귀걸이 정보 아시는 분?

-요즘 학생들은 저렇게 티 나는 피어싱 해도 됨?

-부실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사건 자료 힐끗하는 거 뭔가 의미심장해 보이는데

-범인은 서한율

이야기는 다시 민해솔의 시점. 장기 미제 팀으로 발령받자마자, 민해솔은 현재 팀이 재조사 중인 ‘1999년 강남 일가족 살인 사건’ 현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당시 사건이 일어났던 주택은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바뀐 상태.

동료 형사가 자료가 담긴 사과패드를 든 채 건물을 살폈다.

[부지를 뚝 잘라서 정원이 있던 자리엔 카페를 만들고, 집은 싹 철거하고 나서 새로 지은 모양이네요.]

[소유주는 누구예요?]

[음…. 1999년 사건 이후 집을 산 고정만 씨가 소유하다가, 작년에 딸한테 물려줬네요.]

[뒷집은요?]

동료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뒷집이요?]

[미제팀으론 넘어오지 않았지만, 1999년에 김권숙 씨가 물려받았던 또 다른 집에서 2년 전, 비슷한 사건이 하나 벌어졌었어요. 바로 여기 뒷집인 57번지에서요.]

[비슷한 사건이요? 처음 듣는 이야긴데….]

한참 동안 사과패드를 만지작거리던 동료 형사가 ‘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네, 맞네요. 김권숙 씨 소유였다가, 2년 전에 법인이 사들였어요.]

[법인이요? 어디요?]

동료가 화면을 직접 보여주었다.

[‘한대 백화점’이요.]

[……!]

민해솔의 시선이 카페 뒤로 보이는 57번지 집을 향했다. 씬도 자연스럽게 2017년 강남 일가족 자살 사건이 벌어진 57번지 주택으로 넘어왔다.

2년 전부터 시간이 멈춘 듯한 집안.

그곳에서 가족을 모두 죽이고 자살한 남자가 ‘한대그룹’ 사람이란 흔적을 살피는 ‘최형호’의 눈빛이 모호하다.

함께 TV를 보던 박가람이 덥석, 한율의 어깨를 잡았다.

“너냐, 범인?!”

“스포는 안 합니다.”

“서한율 분위기 보소.”

잠시 후, 한율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하이라이트 장면.

따로 ‘이유’가 있는 듯 폐건물을 찾은 형호가, 그곳에서 죽은 남자의 시신을 발견하는 씬.

정말 인간으로 둔갑한 구미호처럼 요사스러운 눈빛과 몸짓으로 피 맛을 할짝거리는가 하면, 시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소름 끼치도록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다. 그러면서 전화 상대방을 향해선 천연덕스럽게 웃는다.

-연기 개소름;;

-항상 고등학생 연기를 하는데도 매번 이렇게 캐릭터가 다를 수 있나

-뭐야 우리 츤츤 윤우 돌려줘요ㅜㅜ

-아까 잠깐 비친 귀랑 꼬리 CG ㅋㅋㅋㅋㅋㅋㅋ

-여우처럼 조용히, 과하지 않게 걷는당

-구미호 꼬리 한번 만져보고 싶다

그리고 1화 말미.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1999년과 2017년에 발생한 두 건의 사건과 유사한 사건 하나가 더 드러났다는 소식에 현장을 찾은 슬호가 형호와 마주쳐 다짜고짜 싸우는 씬.

CG가 어설프게 들어가 되레 엉망이 되진 않았을까 걱정했던 씬이었으나, 다행히 결과물은 무난했다.

[…최슬호?]

화려한 도술 싸움, 접근전 이후 떨어진 슬호의 지갑을 펼친 형호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왜 하필 또 최 씨야, 짜증 나게.]

[왜 또 성 가지고 시비야, 어린놈이.]

[형제 같잖아! 가뜩이나 이름도 비슷한데!]

[하! 내가 알게 뭐람?]

-죽일 듯이 이 드러내면서 싸우다가 아옹다옹하는 거 왤케 귀엽냨ㅋㅋㅋㅋ

-이제설 태연하게 얄미웤ㅋㅋㅋ

-와 둘 다 비율이랑 핏 보소;;

[그 지갑 이리 내기나 해. 그거 커스텀오더라 세상에 하나뿐인…. 야!]

반대편으로 있는 힘껏 지갑을 던지는 형호. 그러곤 슬호가 놀라 방심하는 사이, 가차 없이 그의 몸을 걷어찼다. 콰앙, 쾅! 건물과 부딪치는 충격으로 정신없이 날아가는 슬호의 몸에 내리꽂는 검붉은 도력 한 줄기.

[……!]

파직! 아슬아슬하게 결정타를 피한 슬호가 뒤늦게 반격하려 했지만, 이미 형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와…. 저 자식 성질머리 진짜.]

하. 커다란 나무에 걸쳐진 슬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3백 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

툭, 뚜둑.

[어…?]

슬호의 몸을 지탱하던 굵은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쿵.

현장으로 차를 몰고 가던 민해솔은, 나무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걸 보곤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다.

-분위기 너무 무겁지 않고 개그코드 있는 거 너무 좋다

-뜬금없이 한밤중에 나무에서 떨어진 남자(범죄심리학자)를 발견한 형사의 심정을 서술하시오(5점)

-어떻게 나무에 엉망으로 걸쳐져 있는데도 섹시할 수가 있지

달빛도 희미한 스산한 밤, 처음으로 마주치는 슬호와 민해솔.

민해솔이 슬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왜 나무에서…. 괜찮으세요?]

[…….]

슬호의 시점이 따뜻한 색감으로 채워진다.

하얀색 꽃잎이 흩날리는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 화려한 비단 한복을 입고 머리엔 꽃 모양 장식을 단 ‘민해진’이 다정하게 미소 짓는다.

[너는 늘 느닷없이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괜찮니?]

황금빛 눈의 새하얀 여우는, 제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주고 쓰다듬어주는 그녀의 손길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그 모습이 따뜻한 수채화 빛으로 물들며 1화가 끝났다.

-로맨스였구요ㅠㅠ

-현미나 한복입은 거 진짜 예쁘다...

-전생에 애완동물이랑 주인이었던 거?

-2화까지 보고 난 뒤에 계속 볼지 말지 결정할 듯

다음 화 예고는 1화 마지막 장면과 판이했다. 검고 칙칙한 사건 현장과 긴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

한율은 광고가 뜬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라이언이 덥석 한율을 잡더니 이리저리 살폈다.

“꼬리 어디에다 숨겼어?”

“원래 없어요.”

“써한. 너 설마 이제설 선배님이랑 연적이거나 그런 건 아니지?”

“형사 아저씨는 누가 죽인 거야? 다른 구미호가 있는 거야?”

“사람 간 빼먹는 설정은 아니지?”

“진짜 ‘최형호’는 어디로 간 거야? 한율이 네가 잡아먹었어? 아니면 원래 없었는데 네가 막 사람 현혹해서 끼어든 거야?”

“액션 씬 촬영 찍는 데에 얼마나 걸렸냐? 엄청 빡세보이던데.”

“파란색 피어싱, 그거 혹시 여우 구슬 들어있는 거 아냐?”

한율은 질문 세례가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먼저 잘게요.”

“대답은 해주고 가…! 하나만이라도!”

달냥이 앞장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한율은 문을 닫고 나서 가방에서 대본을 꺼냈다. 내일 촬영할 씬을 재차 훑고, 동선과 동작을 취해보면서 조용히 연습하다가 자정이 되어서야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조명을 끄기 전엔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확인했다. 드라마 첫 방송을 잘 봤다는 부모나 지인들의 톡에 일일이 고맙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다가 평소 이런 일엔 늘 축하한다는 톡을 보내던 이해원이 오늘은 잠잠하단 걸 깨달았다. 바로 어제도 퇴원해서 축하한다는 톡을 주고받았었는데.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 약 기운 때문에 빨리 잠들었겠지.’

한율은 괜찮겠거니 여기며 인터넷에 접속했다.

인터넷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드라마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하지만, 일단 배우들 연기와 외모, 연출되는 장면이 예쁠 땐 참 예쁘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전개가 조금 더 스피디하면 좋을 듯

-로맨스보단 사건에 중점을 뒀으면 좋겠다.. 일단 주인공이 구미호라 인간사가 가볍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ㅜ

-60분 동안 눈요기 잘했습니다.

-예고 보니까 다음 화부터 본격적으로 사건 풀이 시작일 듯 기대기대

-서한율이 찬 4천만 원짜리 ㄹㄹㅅ 시계 누구 거냐 난 이게 제일 궁금하다

-배우들 연기 진짜 굿X10000

-방송되면 제작사에서 주연 오디션 영상 공개한다고 하지 않았나?

한율은 실검 1위에 올라간 [서울구미호]를 캡처, 개인 SNS에다 첫 촬영 때 찍은 셀카와 함께 올렸다.

[tv Mu와 글로벌 OTT 동시방송 <서울 구미호> 실검 1위 감사합니다! 내일 2화도 잘 부탁드립니다! :D #191028첫촬영날셀카 #서울구미호]

-진짜로 이제설 님 걷어찬 건 아니지? ㅋㅋㅋㅋㅋㅋ

-진짜 구미호라도 상관없어. 사랑한다 서한율

-그는 늘 우리에서 놀라움을 선사한다.

-우리 식은 언제 올릴까?

-연기하는 너도 좋고 무대 위 너도 좋고 너란 사람이 다 좋다.

-2화도 꼭 본방 사수 할게!

-범인은 서한율이다!!!!!!!!!!!!!!!! 이프림 마음에 불을 지른 방화범이다!!!!!!!!!

한율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팬들의 주접 댓글을 보다가 핸드폰 전원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곤 함께 베개에 머리를 올린 달냥을 쓰다듬었다.

“잘 자, 달냥.”

므앙.

평온한 하룻밤이 지나갔다.

호빵 하나만 살 거야

2월 1일 오전. 경기도에 있는 <서울 구미호> 실내 스튜디오로 향하는 동안, 한율은 조유찬이 건넨 바인더를 살폈다. 바로 다음 주에 촬영할 새로운 공익 광고 콘티였다.

“우리나라 패션 잡지랑 일본 패션 잡지에서 커버 모델 섭외도 들어왔어. 인터뷰 요청도. 자세한 건 뒷장에 같이 끼워놨으니까 봐.”

“네.”

꼼꼼히 살펴봐도 딱히 걸리는 부분은 없었다.

“이상한 옷만 입히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런 건 회사가 알아서 자르지. 어쨌든 디자인 나오는 대로 알려줄게. 그리고 이건 원래 멤버들이랑 같이 듣는 게 좋은데… 시간이 안 맞으니까 지금 설명할게.”

“……?”

한율은 바인더를 덮으며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작년 뮤닷 에서 우승 상품으로 단독 리얼리티 프로그램 촬영권 따냈잖아. 촬영 날짜가 잡혔어.”

“언제요?”

“4월 3일부터 최대 일주일. 방송은 너희 컴백 직전으로 맞춰서.”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구미호> 촬영이 끝나는 예상 시기는 3월 중순. 6월 컴백과 7월 월드투어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전이라 딱 적절했다.

“장소는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닥을 잡고 있어. 아무래도 국내는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사생들도 쉽게 따라붙을 가능성이 크잖아. 어쨌든 가서 깜짝 길거리 공연도 하고, 미션 수행 겸 여행도 하면서 힐링하는 내용이 될 것 같아.”

“유럽 쪽으로 가면 좋겠네요.”

“왜?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는 문화유산이 많잖아요.”

게이트가 열리면 태반이 파괴될 테니.

“팀장님에게 참고해달라고 말씀드릴게. 그리고 오늘 제설 씨한테 부탁하는 거 잊으면 안 돼.”

“<뮤직마켓> 출연이요?”

“응. 그런데 만약 OK 해서 거기에만 나가면 <달리는 예능> 쪽에서 서운해하니까, 둘 다 설득하는 걸 목표로 삼자. 제설 씨 출연에 어스래빗 노래 실검 1위가 달렸다.”

“네.”

한편 그 시각,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보컬 연습실에서 막 목을 풀던 길우성은 기지개와 함께 늘어지게 하품했다.

“흐므으으, 심심해에에….”

작년 연말 특집 무대를 끝으로, 이렇다 할 공식 스케줄 없이 쭉 한가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벌써 다음 EP앨범, 디지털 싱글 앨범에 수록될 곡이 나오기는 했지만, 컴백이 한참 멀어서 연습 시간도 여유롭게 잡혔고.

회사에선 쉴 수 있을 때 쉬라고 말했지만, 함께 막내 라인을 맡은 서한율이 매일 드라마 촬영과 광고 미팅으로 바쁜 걸 보니 괜히 조바심이 났다.

나도 팀에 도움이 되는 뭔가를 하고 싶은데.

‘너튜브에 올리는 안무 커버 영상은 나 혼자 춤 실력 자랑하는 거에 가깝고.’

길우성은 의자에 두 다리를 올리고 쭈그려 앉았다. 그러곤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초코톡에 접속했다.

우웅. 마침 들어오는 초코톡 메시지.

스카이러너의 하신이었다.

-[길우]

-[00즈 남돌 모임 하나 안 만들래?]

[??]

-[나 최근에 웹예능 하나 찍었는데 거기에서 그레7 완언 만났거든? 우리랑 동갑이고 성격 괜찮더라?]

[오 그 친구 알지]

[우리랑 같이 리디스 찍음]

-[ㅇㅇ 친구 먹었는데 이참에 00즈 용띠 모임 만들면 어떨까 싶어서]

-[너랑 서한율이랑 나랑 완언이랑]

[모이면 머하는데?]

-[맛있는 거 먹으러 다녀야지 술도 마시고 놀러도 가고]

[술은ㄴㄴ]

-[그럼 술 빼고]

-[어쨌든 이런 모임 하나 있으면 좋잖아 정보 공유도 하고 고민도 나누고 회사 뒷담도 까고]

동갑내기 남돌 모임이라.

길우성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변을 보냈다. 어차피 하신과는 지금도 종종 시간이 맞으면 만나서 노는 사이다. 그레이트7의 완언과는 따로 이야기를 자주 나눠보진 않았지만, 함께 리디스를 촬영하며 지켜본바, 성격이 괜찮은 것 같았다.

[써한한텐 내가 말해봄]

-[ㅇㅇ]

-[혹시 괜찮은 다른 동갑 친구 있음?]

“…….”

그 순간 V12의 티모가 떠올랐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쌀쌀맞은 대화나 그가 후배를 때린 일도 생각이 나, 길우성은 머뭇거리다가 답장을 보냈다.

[아니.]

-[ㅇㅇ]

-[서한율한테 말해보고 톡 줘]

[ㅇㅋㅇㅋ]

길우성은 하신과 나눈 톡 내용을 그대로 캡처해 서한율에게 전송했다. 그러곤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인터넷에 들어가 [V12 티모]를 검색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조금 궁금해져서.

[[포토뉴스] V12 티모, 설레는 출국길]

[V12 티모, 일본 컴백 쇼케이스 성료 후 환한 미소]

길우성은 기사를 보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는구나.’

우웅. 서한율로부터 답장이 왔다.

초코톡을 눌러 화면을 전환했다.

-[모이는 건 상관없는데, 모여서 뭐 해?]

[밥도 먹고 놀러도 가고]

[전에 갔었던 VR 겜방 또 가고 싶다ㅜㅜ]

-[ㅇ]

길우성은 ‘ㅇ’ 자음 뒤로 뭐가 더 올라오진 않을까 잠시 기다리다가 홈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촐랑거리며 보컬 연습실을 나갔다.

‘가람이 형이 한가하니까, 같이 라방이나 하자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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