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2/427)

* * *

<서울 구미호> 2화는 폐건물에서 죽은 형사가 발견되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범인에 대한 단서가 남아있진 않을까 주변을 샅샅이 살피는 경찰들.

[저기 공원에서 여기를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도망쳤다가 살해당한 것 같습니다.]

[핸드폰 신호는?]

[이 안에서 마지막으로 잡힌 뒤 지금까지 전원이 꺼진 걸로 봐선, 범인이 가져간 것 같습니다.]

경찰청은 형사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되자 발칵 뒤집혔고, 해당 형사가 소속된 강력계와 같은 사무실을 사용하던 장기미제팀에도 당연히 정보가 흘러 들어갔다.

살해된 형사가 발견된 폐건물을 포함한 부지가, ‘한대그룹’ 회장의 손자인 ‘최형호’ 소유란 사실도.

그러나 민해솔과 최슬호는 어젯밤 현장을 찾은 사건이, ‘1999년 강남 일가족 살인사건’과 유사점이 많을 뿐 전혀 별개 사건이란 걸 밝히고 난 뒤에야 해당 정보를 들었다.

[한대그룹이요?]

[네. 원래는 그곳에 호텔을 짓던 건설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방치되었던 골치 아픈 땅이었는데, 10년 전에 한대그룹 회장이 사서, 손자인 최형호에게 증여했어요.]

바로 어제 ‘2017년 강남 일가족 자살사건’이 일어난 57번지에 관해 들었을 때도 나왔던 ‘한대’란 이름.

민해솔의 미심쩍은 표정에 최슬호가 묻는다.

[왜 그러세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민해솔은 최슬호에게 대답을 미루곤 동료에게 되물었다.

[이 형사님이 조사하던 사건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왜 물어요! 장기미제팀이 그렇게 한가합니까?!]

그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는 강력계 1팀 팀장. 살해당한 이 형사의 상사이자, 바로 어제 민해솔의 옆을 지나쳤던 남자였다.

[그러잖아도 가뜩이나 울화통이 터지는데!]

[아뇨, 전….]

[신 팀장님! 이러실 겁니까?!]

[미안해요, 강 팀장. …민 경장, 잠깐 이리로.]

민해솔이 강 팀장과 조용히 면담하는 사이, 최슬호는 자리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한대그룹 최형호]를 검색했다. 그러곤 결과물을 보자마자 큭, 고개를 숙이며 터지는 웃음을 감췄다.

[형식적인 조사에 불과하지만, 귀찮으실 테니 변호사와 건물 관리인을 보내겠습니다.]

차 뒷좌석에 편히 앉은 형호는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며 대충 대답했다.

[그렇게 해. 그런데 죽은 사람이 형사라고?]

[네, 강력계 형사라고 합니다.]

형호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거기서 죽었대?]

[인근 공원에서부터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우연히 그곳으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피 많이 튀었어?]

운전기사 겸 수행원의 시선이 힐끗 룸미러 속 형호를 살폈다.

[경찰의 현장 감식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라….]

[표면에 스며들면 골치 아픈데. 시간 지나면 잘 지워지지도 않잖아.]

[…….]

[아니다. 어차피 무너뜨릴 거니 상관없겠네.]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웬만한 사람이 제 발밑으로 보여도 그렇지, 사람이 죽었다는데 고작 한다는 걱정이.

[…현장 보존이 끝나는 대로 업체를 불러 깨끗이 청소하겠습니다.]

형호는 수행원의 얼굴에 스친 감정을 눈치채고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다. 형호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그를, 이해한다는 듯. 그런 태도엔 태어날 때부터 뼛속 깊이 새겨진 ‘계급’의 우월감이 깃들어 있었다.

[됐어, 범인이 잡힐 때까지는 둬. 자칫하면 경찰이 발견하지 못한 증거를 우리가 날리게 될 수도 있잖아. 정의로운 일을 하는 분들인데,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협조해야지.]

[네.]

형호가 탄 차는 한대 백화점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이내 남성 컨템포러리가 위치한 층을 여유롭게 둘러보는 형호.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하고, 손님들은 놀란 눈으로 형호를 훔쳐보았다.

짝짝.

그때 박수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감탄.

[야아, 역시 재계의 아이돌.]

멈칫. 당연하다는 듯 사람들의 인사와 시선을 받던 형호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쳤다.

명품 판매장에서 태그가 붙은 선글라스를 쓴 슬호가 천천히 나와 형호의 앞을 막았다. 환하고 부드러운 조명 아래, 통로에 대치하고 선 두 사람의 모습.

[한대그룹 오너 일가에다 외모와 키까지 연예인처럼 아주 훤칠하시니, 꼭 현대판 왕자님 같으시네요.]

슬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이거 너무 현실성 없는 설정 아닌가?]

[…….]

[누구시죠?]

수행원이 앞으로 나서며 슬호를 경계했다. 슬호가 두 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백화점의 VIP 고객입니다. 내일부터. …아니, 모레? 장난이 심한 못된 친구가 제 지갑을 아주 멀리 날려버렸거든요. 이것저것 새로 발급받으려니, 이거 참 어찌나 복잡하던지.]

한 마디로 지금은 빈털터리란 소리 아닌가.

수행원은 이쪽 상황을 주시하는 보안요원들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검은색 정장을 걸친 보안요원들이 달려와 슬호가 쓴 선글라스를 친절히 벗겨주곤, 엘리베이터 쪽으로 안내했다.

[다른 고객님들께 방해가 되니, 잠깐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보안요원들에게 잡혀 반강제로 끌려가면서, 슬호는 형호를 향해 천연덕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또 봐요, 왕자님!]

[…….]

tv Mu <서울 구미호> 톡창.

-서한율 표정 봐ㅋㅋㅋㅋㅋ

-톰과 제리냐고ㅋㅋㅋㅋ

-어쩐지 첫 화부터 싸우더라니 둘이 천적이구나

-민 형사님이랑 있을 때는 세상 멋있고 날카롭게 현장 분석하며 전문가 포스 뿜뿜하더니

-형호가 슬호 쪽을 더 싫어하는 건 확실함

-현실성 없는 설정ㅋㅋㅋㅋ 이거 돌려까는 거 맞죠? ㅋㅋㅋ

-와 이제설이랑 서한율 서로 떨어지자마자 눈빛 싹 바뀌는 거 개소름ㄷㄷㄷ

2화는 이 형사 사건 현장에서 ‘미지의 짐승 털’이 발견되고, 민해솔이 이 형사 살인사건은 1999년부터 시작된 ‘강남 일가족 살인사건’과 연계된 사건이라며 미제팀이 가져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데에서 끝났다.

예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다른 사건들이 있을 거예요. 분명히.]

[이 사건들이 모두 이 털을 가진 미지의 짐승 짓이란 소리예요?]

[인간을 증오하며 인간을 잔인하게 죽이는 건 인간뿐이에요.]

[내 영역에서 당장 나가.]

방송이 끝난 직후엔 이제설이 모델로 나오는 정수기 광고가 떴다. 실시간 TV 앱으로 드라마를 모니터링한 한율은 그제야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차는 어느새 숙소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한율아. 내일은 밤 촬영이니까, 푹 자.”

“네, 형도 수고하셨어요. 내일 휴일도 잘 보내고요.”

“응. 내일은 승우 씨가 동행할 거야.”

“네, 들어가세요.”

한율은 조유찬과 작별 인사를 나누곤 가방을 챙겼다. 조유찬이 차를 엘리베이터가 있는 공동 출입문 바로 앞에 세웠기에, 내리자마자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유찬의 차는 한율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나서야 슬슬 움직였다.

한율은 엘리베이터가 21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내일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모처럼 일요일인데다가 촬영도 밤에 있으니 오후는 자유시간이나 다름없다.

‘일단은 아이들과 4월에 녹화할 리얼리티에 관한 논의를 나누고…, 아.’

시간이 나면 차남석과 남양주에 가보기로 약속했었다. 리모델링 공사 마무리 단계인 주택도 둘러봐야 하고.

‘할 일이 많네.’

딩동.

2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오잉?”

“……?”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박가람, 라이언과 마주쳤다.

“어디 가요?”

“편의점이요.”

“오늘도 일하느라 수고했어, 하뉼. 같이 갈래?”

“이 밤에 무슨 편의점엘 가요. 뭐하러.”

한율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두 사람의 팔을 잡았다. 그러곤 현관문 앞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박가람과 라이언이 버둥거렸다. 그 와중에도 둘은 앞집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그야 맛있는 야식을…. 놓아랏!”

“호빵 하나만 살 거야, 하뉼…!”

스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더니 숫자가 내려갔다.

“아앗, 가지 마…!”

한율은 그제야 잡고 있던 두 사람의 팔을 놓았다.

“호 형 아직 안 들어왔죠?”

“어떻게 알았지…?!”

살아만 있어라

“정말 맡겨도 괜찮겠어요?”

“그래, 넌 편히 쉬어.”

일요일 낮. 차남석이 한율의 차 운전석에 올랐다.

“호 형 차로 연습 많이 했고, 지난주에도 직접 몰고 갔다 왔어.”

한율이 드라마 촬영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차남석이 드디어 운전면허를 땄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것 좀 뒤에 붙여주고.”

한율은 차남석이 준비한 ‘초보운전’ 자석 스티커를 차 뒤에다 부착한 뒤 조수석에 올랐다.

“조금 불안하다 싶으면 중간에 교대할 거예요.”

뒷좌석에 앉은 이건우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아냐, 교대하게 되면 내가 운전할게.”

그 옆에서 길우성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어스래빗 절반의 목숨이 차남석 씨 손에 달렸다.”

“부담 주지 마.”

“남석아, 호 형 차보다 높고 크니까 그 점 유의해.”

“네. 다들 안전띠 착용해요.”

차남석이 모는 차는 느릿느릿, 신중하게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길우성이 고민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도 면허 따야겠지?”

“따면 좋지. 이번 달은 조금 한가하니까 이참에 따 둬. 연습이야 호 형 차 빌리면 되고.”

“호 형 차 우리 팀 공공재 된 거야? 막 써도 돼?”

“한율이 너도 호 형 차로 연습하면서 몇 번 긁어먹었었지?”

“네, 세 번이요. …형, 정면만 보지 말고 시야를 넓혀서 전체를 살펴야죠.”

“알았어. 내비나 좀 켜 봐.”

“남석 씨, 신나는 음악 틀어줘.”

“안 돼. 정신 사나워.”

남양주에 있는 차남석의 본가에 도착한 건, 예상 시간보다 20분이 더 소요된 뒤였다. 사생 스토커들이 아주 여유롭게 따라오는 걸 본 한율이 중간에 차남석과 교대, 일부러 복잡한 길로 접어들어서 이리저리 따돌리느라 늦었다.

“몇 명은 목적지를 눈치채고 먼저 이쪽으로 왔을지도 모르지만, 계속 우르르 달고 가는 것보다야 낫겠죠.”

“…미안하다.”

“형이 미안할 게 뭐 있어요.”

“한율이 너 다른 차 따돌리는 기술은 어디에서 배운 거야? 택시까지 따돌릴 정도면, 와.”

“따로 배우지는 않았고, 예전에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따라 해봤어요. 그 뒤로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늘던데요?”

철컥. 길우성이 안전띠를 풀며 중얼거렸다.

“익히고 싶진 않지만, 꼭 익혀야 할 것 같은 씁쓸한 기술이구먼.”

마당에서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린 걸까. 그때 대문이 열리며 차남석의 조부가 나왔다.

“어서들 와요.”

길우성이 두 팔을 위로 휙휙 흔들며 촐싹거렸다.

“할부지! 맛있는 집밥 축내러 또 왔습니다아!”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안녕하십니까! 이건우라고 합니다!”

차남석의 조부는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길우성과 한율의 어깨를 감싸듯 두드려주곤, 처음 만나는 이건우와는 악수하며 인사했다.

“다들 잘 왔다. 만나서 반가워요.”

“추운데 왜 나와 계세요.”

“계속 움직여서 안 춥다. 자, 다들 들어와요.”

“실례하겠습니다~.”

집안은 작년에 왔을 때처럼 여전히 깔끔하고 아늑했으며,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요?”

“출근했지. 국이랑 찌개만 잠깐 다시 데우면 되니까, 다들 편히 앉아요.”

“할부지, 저도 도울게욥!”

“손부터 씻자, 우성아.”

외투를 벗고 손부터 깨끗이 씻은 뒤, 그들은 차남석의 조부가 준비한 점심을 먹었다. 최근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는데, 후식으로 과일을 먹을 땐 차남석의 조부가 한율에게 물었다.

“드라마에서 구미호로 나온다지?”

“네. 보셨어요?”

“봤지. 아주 멋있던데? 실제로 여우를 보거나 만진 적은 있고?”

“아뇨. 어렸을 때 동물원에 가서 본 것 외엔….”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다가 물었다.

“할아버님은요?”

“나야 어릴 때 자주 봤지. 닭 잡고 도망가는 걸 빗자루 들고 쫓아간 적도 많았어. 그땐 참 얄밉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젠….”

한국 여우가 멸종 직전으로 가기 전, 여우를 직접 겪은 사람이다. 너튜브에서도 한국 여우에 관한 생생한 경험담은 잘 찾아볼 수 없었기에, 한율은 나중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수첩을 꺼냈다.

“진작 할아버님을 찾아뵐 걸 그랬네요.”

한율이 차남석의 조부로부터 여우에 관한 경험담을 듣는 동안, 길우성과 차남석은 설거지를 하고 이건우는 차남석의 방을 구경했다.

잠시 후, 그들은 외투를 챙겨입었다.

“그럼 슬슬 땅 좀 보러 갈까?”

“왜 내가 다 두근두근 떨리지?”

작년, 멋대로 이 집을 들락거리면서 물건을 훔치고 살림에도 손을 댔던 범죄자가 잡혔다. 그 일 이후 차남석은 더 위험한 사생 스토커가 할아버지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보안이 좋고 튼튼한 집을 새로 짓기로 했다.

그리고 지난달, 은행 대출을 받아서 땅을 샀다.

“한율이 네가 소개해준 건축사, 정말 일 꼼꼼하게 하는 분이더라. 사실 네가 지은 별장에 비하면 그리 마진이 많이 남진 않을 텐데, 이것저것 신경도 많이 써주고.”

집 바로 근처라, 그들은 걸어서 이동했다.

“의뢰인이 형이라서 그럴걸요? 나중에 사무소 홍보하기에도 좋고.”

“아, 그런 거야?”

집을 새로 지을 터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빈집이 있던 곳으로, 현재는 모두 깨끗하게 철거한 상태였다. 그들은 건축사가 보낸 설계도 샘플을 확인하며 여기저기 밟고 다녔다.

“여기가 현관, 여기가 거실?”

“저기가 차고 부지. 이쪽은 텃밭이겠네?”

조금 떨어진 곳에는 10대 소녀들이 핸드폰을 들고 알짱거렸다. 사생인지, 그들이 왔다는 걸 듣고 온 동네 아이들인지.

네 사람은 못 본 척, 모른 척했다.

“너희 할아버지 진짜 뿌듯하시겠다. 할아버지 눈엔 아직도 한참 어린 손자일 텐데, 벌써 할아버지를 위해서 새집을 짓는 거잖아.”

차남석은 머쓱하게 씩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꺄악! 그 순간 멀리 모인 소녀들이 감탄 섞인 환호성을 질렀다. 개잘생겼어! 이런 호들갑도 들렸다.

길우성이 슥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지 않아?”

“동감.”

결국 그들은 땅을 둘러본 지 몇 분 만에 다시 차남석의 본가로 돌아가, 조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서울로 돌아온 뒤엔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인 집에 들렀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인 터라, 세 사람은 신기한 얼굴로 집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찰칵찰칵. 차남석은 내부 마감재와 맞춤 가구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진을 찍었다.

“이런 건 얼마나 해? 집에 맞춰서 주문 제작하는 거니까 오래 걸리지?”

“아무래도요. 특히 해외에서 들여야 하는 자재의 경우엔, 현지 사정에 따라서 몇 달이 걸리기도 하더라고요.”

“난 언제 이런 집 지어보냐.”

“건우 형은 서울 아니면 도전해볼 만하지 않아? 그런데 써한, 저 천장 아래에 있는 벽 선반, 혹시 고양이 전용 통로야?”

“어.”

“멋지다.”

찰칵찰칵. 길우성과 이건우도 다른 멤버들에게 보여줄 참인지,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한율은 넌지시 말했다.

“도어락 비번 알려줄 테니까, 나중에 다른 멤버들도 데려와서 봐요. 이건 대문이랑 차고 열쇠.”

찰랑.

길우성이 두 손을 모아 받았다.

“감사합니당!”

주택을 나온 후엔 이건우와 길우성을 WB래빗까지 데려다주곤 숙소로 향했다. 둘만 남게 되자 차남석이 조용히 말했다.

“공사 계약금 빌려줘서 고맙다.”

“다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 빌려준 건데요, 뭘.”

“그렇게 말해주는 것도 고맙고.”

한율은 힐끗, 운전대를 잡은 차남석을 보곤 웃었다.

“웬일이에요?”

“웬일은. 그냥, 고맙다거나 기쁘다거나 하는 말은 그때그때 표현하는 게 좋은 것 같아서.”

하지만 말하는 표정이나 눈빛엔 조금 힘이 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

차남석은 입을 다물고 운전에 집중하다가,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우고 나서야 대답했다.

“나 예전에 찍었던 <집도> 기억나냐? MBS 드라마.”

“네.”

“그때 잠깐 같이 촬영했던 단역배우가… 얼마 전에 멀리 떠났다고 하더라.”

“어쩌다가요?”

“병으로. 사람들 말에 따르면, 워낙 형편이 어려워서 평소에 어디가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참았었나 봐. 그러다가 증상이 크게 나타난 뒤에야 병원을 찾았는데, 그땐 이미 손 쓰기엔 늦은 상태였다고 하더라. 그 얘길 들으니까 작년에 칠레에서 사고 날 뻔했던 일이 다시 떠오르는데.”

하. 짧은 한숨.

“당장 쑥스럽다고 미룬 말이 나중에, ‘아, 진작에 할걸.’ 이런 후회조차 못 하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좀 속물 같기는 한데.”

차남석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괜히 바깥쪽을 두리번거렸다.

“필요할 때 아무 조건 없이 금전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인이 있다는 것도 복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돈 더 빌려드려요?”

“됐어, 충분해. 아 참. 너 혹시 박세은이랑 따로 연락….”

우웅. 그때 한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동시에 신호도 풀려, 차남석은 입을 다물곤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

핸드폰을 확인한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고은훤의 톡.

-[한율아, 혹시 해원이랑 같은 팀 멤버 번호 알아? 얘 그제부터 연락이 안 된다..]

한율은 이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정말로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었다.

“왜 그래?”

“은훤이 형이 그제부터 해원이 형이랑 연락이 안 된다고 톡을 보냈는데, 정말로 폰이 꺼져 있어서요.”

“걔 퇴원했다고 하지 않았어? 몸이 다 낫지도 않은 환자라, 또 핸드폰을 압수한 건 아닐 거 아냐.”

안 좋은 예감이 든다.

한율은 이번엔 안인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전에 유상호 사건 이후 핸드폰이 압수되었다고 듣긴 했지만, 그 뒤로 몇 달이 지났으니 돌려받았을지도 모른다.

-[……왜.]

긴 신호음 끝에 안인섭이 겨우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도 돌려받고, 번호도 바꾸지 않은 모양.

“해원이 형 좀 바꿔주세요.”

-[걜 왜 나한테서 찾아.]

“숙소에 없어요?”

-[……하.]

안인섭이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걔 독립했어. 병원에서 퇴원하기 이틀 전에 짐 싹 뺐다고. 몰랐냐?]

독립? 이해원과 퇴원을 축하한다는 톡을 주고받았을 때도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주소는요?”

-[몰라.]

“같은 팀 멤버가 모르면 누가 알아요.”

-[…씨발.]

부스럭거리는 소리, 문을 닫는 소리가 이어졌다. 안인섭이 잔뜩 목소리를 죽인 채 대답했다.

-[걔 목줄 쥔 여자가 마련해준 집으로 들어갔으니, 매니저랑 대표만 알겠지. 어쨌든 이것도 전에 네가 나 병원까지 데려다줘서 알려주는 거니까, 그렇게 알아.]

뚝. 통화가 끊겼다.

‘설마.’

한율은 차남석에게 말했다.

“형, 운전 교대해요.”

잠시 후. 차남석을 숙소 지하 주차장 공동 출입문 앞에다 내려준 뒤, 곧바로 차를 돌려 다시 나왔다.

조금 전 차남석이 말한 이야기. 그리 가깝지는 않았지만, 한때 같이 일했던 배우의 죽음을 겪고, 본인도 큰일이 날 뻔한 사고를 떠올린 차남석의 진솔한 생각.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이해원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해원에게 부족한 건 이채현의 횡포, 그리고 대중의 비난을 감당할 용기였다. 하지만 자기 죽음 이후 벌어질 일들을 현실적으로 예상하고, 죽으면 무엇이든 후회할 기회조차 사라진다는 걸 강하게 깨닫곤 마음을 굳게 먹지 않았을까?

‘하물며 이번 독립이 이채현의 독단으로 갑작스럽게 이뤄진 거라면.’

더는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벗어나고자 하는 결심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연락이 끊길 리가.

한율은 이해원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했던 악수를 떠올렸다. 카페에서 악수했을 때와 달리, 그의 체내 마나는 한율의 마나에 아주 활발하게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아마 혼수상태였을 때 짙은 농도의 마나에 노출되어, 아주 미약했던 그쪽 감각이 활성화된 것일 터.

한율은 ‘VEL 엔터테인먼트’를 목적지로 설정한 내비를 살폈다.

‘살아만 있어라.’

헛것이라도 봤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누구패치의 정 기자는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누구에게 발견될 새라, 몸을 한껏 낮춘 채 슬며시 이동한 그녀는 목적지인 별장 담에 바짝 붙었다. 그러다 디딤돌로 삼을 만한 돌을 발견, 그걸 밟고 올라가 안을 살폈다.

겨울에도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과 물이 빠진 풀장이 보였다. 정원사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 검은색 슈트에다 코트를 걸친 젊은 남녀 두 명도.

‘다른 길로 나갔다고 보기엔… 이채현이 두고 간 경호원들이 아직 있는 게 마음에 걸려. 이건 경호가 아니라 꼭… 가둬놓고 나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 같잖아.’

지난번 이해원의 열애설을 터뜨렸을 땐 겁이 많은 부장 탓에 이채현의 실명을 밝히지 못했다. 그리고 이해원은 ‘열애설이 난 상대는 스킨십이 과한 친한 지인일 뿐이다’라며 직접 해명했다.

‘하! 대체 어떤 사람이 지인과 몇 년 동안, 몇 번이나 같이 하룻밤을 보내? 웃기는 소리!’

여기에 스캔들 기사 바로 다음 날 벌어진 이해원의 사고.

정 기자는 이 사고가 우연이 아닌, 이채현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괜히 신경에 거슬리면 가차 없이 담뱃불로 상대를 지지거나 무자비하게 폭행하던 인간쓰레기였다. 그런 인성이, 과연 나이를 먹었다고 쉽게 변할까?

‘이해원, 설마 어설프게 이채현 협박했다가 오히려 잘못된 거 아냐? 그래서 저기에 갇힌 거고?’

이해원이 매니저의 차를 타고 도착, 혼자 이 별장에 들어간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분명히 그날 밤에 이채현이 들어갔다가, 두 시간 뒤에 나와 서울의 자택으로 돌아간 걸 확인했다. 하지만 이해원의 모습은 그 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을 찾은 것도 이 별장으로 오기 전 들른 게 마지막인데다, 핸드폰 전원도 내내 꺼진 상태.

‘그렇다고 섣불리 경찰에 신고했다간 나만 X될 수 있어.’

정 기자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내일 이해원의 병원 진료 예약 시간이 아침 10시. 일단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였다.

“……!”

정 기자는 황급히 한 나무 뒤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검은색 SUV가 천천히 별장으로 다가오더니 대문 앞에서 멈췄다. 정 기자는 놀라 입을 벌린 채 핸드폰 카메라를 실행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건 다름 아닌,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었다.

‘왜 서한율이 여기에?’

사아아…. 그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별장 맞은편 수풀 위로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까악, 까악! 까마귀는 요란스럽게 울면서 별장 쪽으로 날아갔다.

‘깜짝이야.’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뜬 정 기자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조심스레 핸드폰으로 서한율의 모습을 촬영하며 살폈다.

‘이해원을 찾아온 건가? 여기는 어떻게 알고?’

서한율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듯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선 별장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서한율과 경호원의 대화가 희미하게 들렸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해원 씨 여기에 있나요? 도통 연락이 안 돼서 매니저분께 물었더니, 그저께 이곳으로 데려다줬다고 해서요.”

“죄송하지만 그런 분은 안 계십니다.”

“주소는 여기가 맞는데….”

“뭔가 잘못 알고 오신 것 같습니다.”

“네….”

단호한 경호원의 말에, 서한율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수고하세요.”

“안녕히 가십시오.”

서한율이 다시 차에 탔다.

곧 서한율의 차가 정 기자가 숨은 나무 옆을 지났다. 정 기자는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요즘 한창 드라마 촬영으로 바쁠 텐데, 연락이 안 된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이해원이랑 그렇게 친한 건가? 왜? 왜 서한율이 이해원 같은 애랑? 혹시 이해원이 스폰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

그 순간이었다.

챙그랑! …쿵.

깜짝. 정 기자는 담 너머에서 들린 소리에 놀라, 다시 조금 전에 밟았던 커다란 돌 위로 올라가 안을 훔쳐보았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건물 모퉁이 쪽, 검은색 옷을 입은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2층 창이 깨져있고 사방에 유리 파편이 널린 걸로 보아, 저곳에서 떨어진 모양.

정 기자는 잔디 바닥에 서서히 번지는 검붉은 액체를 보곤 기겁하여 몸을 웅크렸다.

‘설마… 이해원?!’

정 기자는 우선 119에 신고했다.

“119죠? 사람이 2층에서 떨어졌어요…! 주소는….”

누구에게 들킬세라, 목소리를 잔뜩 죽인 채 신고를 마친 정 기자는 호흡을 가다듬곤 다시 담 안을 살폈다.

“…어?”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던 사람이 사라졌다. 대신, 건물 모퉁이 너머로 무언가가 쓸려간 검붉은 흔적만 길게 남았다.

두 손이 벌벌 떨렸다.

보통은 사람이 떨어지면, 함부로 잘못 만졌다가는 자칫 더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대로 두고 119부터 부르는 게 상식 아닌가?

정 기자는 이번엔 경찰에 전화해 주소를 말하고, 2층에서 아이돌 이해원이 떨어졌는데 누군가가 응급처치는커녕 질질 끌고 갔으니 빨리 와 달라고 재촉했다. 그러곤 카메라 앱을 실행해서 핸드폰을 담 위로 들었다.

까악!

“꺗!”

푸드덕! 조금 전에 봤던 커다란 까마귀가 별안간 정 기자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타악.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거기 누구요!”

비명을 들은 것일까. 담 안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외쳤다.

조금 전 떨어진 사람을 끌고 간 범인일지도 몰라.

정 기자는 덜컥 겁에 질려, 떨어진 핸드폰을 간신히 챙기곤 차를 세워둔 곳으로 필사적으로 달렸다.

끼익. 대문이 열리는 소리, 사람들이 나오는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당장 여기에서 도망쳐야 해!’

만약 조금 전에 떨어진 사람이 죽었다면, 자신은 이우그룹이 저지른 살인사건의 목격자가 된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엄청나게 큰 사회적 파장이 일어날 테니, 이우그룹은 무슨 짓을 해서든 자신의 입을 막으려 들 터.

끼기긱! 정 기자는 차를 타자마자 이우그룹 별장과 반대쪽 길로 차를 몰았다.

10여 분 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차와 구급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별장에 도착했다.

“부장님!”

인터넷 언론사 ‘누구패치’. 정 기자가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자, 부장이 벌떡 일어나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까, 허억, 전화로 말씀드린 사건이요…!”

사무실에 부장의 노성이 쩌렁 울렸다.

“너 뭐 하는 자식이야?!”

“……네?”

부장이 성큼성큼 다가와 당황해하는 정 기자의 팔을 잡았다.

“왜 그러세요, 부장님! 부장…!”

쾅. 부장은 회의실로 정 기자를 데려온 뒤 문을 닫고, 블라인드까지 쳐서 안을 가렸다. 그러곤 잔뜩 내리깐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뭐? 이우그룹 별장에서 이해원이 떨어져서 죽은 것 같다고? 이우그룹 사람들은 그 흔적을 치웠고? 너 떨어진 사람 얼굴 봤어, 못 봤어.”

“아뇨, 얼굴은 못 봤지만 정황상….”

“잘 들어. 그 별장에선 사람 떨어진 적 없어. 쓰러진 사람을 누가 질질 끌고 간 일은 더더욱 없고.”

정 기자는 기가 막혔다.

“무슨 소리세요!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신고까지 했는데! 분명히 사람이 떨어졌고, 건물 안쪽으로 핏자국이 쓸린 흔적까지 나 있었다고요!”

“증거는.”

“그게, 전화로 말씀드렸듯이 찍으려던 순간에 웬 까마귀 때문에 놀라서….”

부장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보여? 사지 멀쩡한 거?”

“……?!”

타악! 정 기자는 부장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화질이 안 좋기는 하지만, 사진 속 이해원은 뺨과 입가에 반창고 몇 개를 붙인 걸 제외하곤 큰 외상이 없었다.

“아뇨, 뭔가 잘못된 거예요. 이거, 예전에 찍은 사진이 분명해요.”

“영상통화 캡처야, 이 자식아.”

“…….”

“그쪽에서도 얼마나 황당했으면 나한테, 어? 영상통화를 걸어, 어?”

“아뇨, 그러면 이해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후. 부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말했다.

“경찰들도 다 확인했어. 깨진 창도 없고, 핏자국도 없고, 별장 외관에 설치된 CCTV 그 어디에도 사람이 떨어지는 장면, 사람이 끌려가는 장면이 하나도 찍힌 게 없다고.”

“그럴…. 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다 봤다니까요?!”

“꿈에서 봤겠지! 아니면 헛걸 봤거나!”

“아니…!”

“너 이우그룹에서 어떻게 나한테 연락했는지는 아냐? 그저께부터 네 차가 주변에 있는 거 보고도, 괜히 건들면 시끄러워질까 봐 그냥 봐주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난데없이 사람이 떨어졌다느니, 누가 그걸 끌고 갔다느니 신고하고 도망쳤으니… 그쪽에선 얼마나 황당하겠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하니 있던 정 기자가 버럭 외쳤다.

“그, 래도 이해원이 거기에 있었던 건 맞잖아요! 이틀 내내 핸드폰도 꺼놓고! 얼굴에 난 상처를 보면, 분명히 이채현이….”

휙. 부장이 정 기자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갔다.

“그게 뭐.”

“…네?”

“그래, 둘이 아주 그렇고 그런 사이란다. 이해원이 거기에 며칠 묵은 것도 맞고. 그런데 그게 뭐. 아이돌이 재벌 여자친구 별장에 며칠 묵었는데, 얼굴에 상처가 났어요. 뭐 이런 기사 쓰시게요?”

“…….”

“아무리 연예인과 재벌 스캔들이 어그로 끌기 좋은 소재라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남녀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집요하게 파고들고 싶냐? 너 그러려고 여기에 들어왔어?”

“…….”

“혼자서 머릿속으로 뭔 소설을 그렇게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팩트 좀 보자. 응? 어쨌든 이번 일은 이해원이 거기에 있었다는 이야기만 나불거리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 준다니까, 한동안은 이채현이나 이해원 주변에 얼쩡거리지 마라. 알았냐?”

쯧. 부장이 혀를 차며 회의실을 나갔다.

“…….”

정 기자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곳에서 찍은 거라곤 이틀 전 이해원이 별장으로 들어가는 모습, 이채현이 들어갔다가 두 시간 뒤에 나오는 모습, 그리고 조금 전에 서한율이 왔다 간 모습뿐이었다.

119나 경찰에 전화했던 통화 녹음을 확인해봤지만, 이건 저 혼자 일방적으로 주장했을 뿐이라 사람이 떨어졌단 증거가 되지 못한다.

“…하.”

정 기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부장의 말처럼 헛것이라도 본 걸까. 꼭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하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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