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화 (193/427)

* * *

-[매니저 형한테 들었어.]

-[바쁜데 괜히 걱정시켜서 미안해..]

자정이 넘은 시각. 촬영 중 잠깐 휴식 시간이 주어져서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이해원으로부터 부재중 전화와 초코톡이 와 있었다.

한율은 답장을 보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아직 안 자고 있었는지, 금세 답장이 왔다.

-[응. 고마워^^]

이해원의 매니저를 통해서 알아낸 그의 마지막 행적은 이우그룹이 소유하고, 이채현이 자주 사용하는 별장이었다.

재력가의 별장이 모인 곳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CCTV가 설치되어 있는지 알기가 힘들다. 그래서 일단 까마귀로 이해원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는데, 마침 그곳에 기자로 추정되는 여성이 알짱거리고 있었다.

‘이해원을 어떻게 빼낼지 고민했었는데,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지.’

방법은 간단했다.

훈련한 까마귀를 보내 결계를 치고, 그 안에서 환영을 보게 했다. 정말로 사람이 떨어졌다고 착각한 기자는 여기저기 신고한 뒤 도망쳤다.

그녀의 현실감 넘치는 신고 덕분에 경찰은 무난하게 별장 안으로 진입, 그곳에 있는 이해원과 만났다.

이우그룹 측은 이채현의 의사가 어떻든, 쓸데없는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해원을 무사히 내보낼 수밖에.

‘어디의 누구 기자인지 알아야 은혜라도 갚을 텐데, 미처 거기까진 살피지 못했네.’

놀란 건 차치하고, 지금쯤 상당히 억울해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같이 군대나 가요

‘그 까마귀는 대체 뭐였을까?’

띠링. 이해원은 핸드폰에 충전기를 꽂으며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침대에 무기력하게 앉아있는데, 누군가 그가 있던 2층 방 창문을 두드렸다. 커튼을 걷어 젖히자 웬 까마귀가 부리로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까마귀는 은은한 푸른빛이 서린 눈으로 그를 갸웃갸웃 바라보다가 날아갔다.

‘꼭 날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난번 혼수상태 때 꿨던 꿈. 그 꿈에서 서한율이 내던 빛과 까마귀의 눈 색이 같은 것도 신기하고.

똑똑, 벌컥.

안인섭이 노크 직후 대답도 듣지 않고 들어왔다.

“아직도 안 자고 뭐 하냐?”

“이제 자려던 중이에요.”

달칵. 안인섭이 문을 닫고는 의자를 끌어와서 앉았다.

“할 얘기 있어요?”

“너야말로 할 얘기 없냐?”

“저 독립 취소하기로 했어요. 내일이면 제 짐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거 말고.”

하. 안인섭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물었다.

“너, 이채현 깠지?”

“…….”

“돌았냐? 아직 정산받으려면 먼 놈이 그 좋은 줄을 왜 놔. 만약에 이채현이 너 쫓아내라고 하면, 대표 새끼가 온갖 트집거리 만들어서 네 잘못으로 계약 파기된 거라고 소송 걸 거 뻔한데. 그뿐이야?”

안인섭이 문 쪽을 힐끗하곤 말을 이었다.

“네가 찍은 광고에서도 제품 이미지 손상 어쩌고 딴지 걸게 만든 다음에, 위약금소송으로 너 완전히 빚더미에 올릴 수도 있어. 지금까지 네가 찍힌 영상이 하나도 없겠냐고. 이 바닥에서 영원히 매장되고 싶어?”

“왜요? 그 사람 줄까지 끊어지면 형도 바닥에 나앉게 될까 봐 그래요?”

“그래, 새끼야.”

아주 솔직하고 당당하게 대답한다. 이해원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안인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른 놈들 봐라. 진작에 스폰한테 지겹다고 버림받아서 여기저기 밥값 벌려고 뛰어다니는 거. 존나 안쓰럽지 않냐? 대표는 씨발, 별 거지 같은 노래나 들고 오고. 오죽하면 리더가 군대나 가야겠다는 소리를 지껄이냐고.”

“군대….”

이해원은 조용히 따라 읊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네요.”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같이 군대나 가서 정신 좀 차리고 와요, 형.”

“새끼야, 너 퇴원한 지 얼마 안 됐거든? 이 새끼가 머리 한번 깨지더니 진짜 돌았나.”

안인섭은 질색하며 일어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타악!

이해원은 닫힌 문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저 형은 몇 년이 지나도 참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

그러나 웃음은 이내 한숨으로 바뀌었다.

정말 안인섭의 말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농후한 까닭이었다. 그래도 후회는 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이 목숨 놓으면, 그동안 네가 보낸 시간이 전부 헛수고가 되는 거잖아.』

금요일, 이채현과 만나기 전 들른 병원. 진실을 들은 어머니는 한바탕 울고 불며 화를 내다, 한참이 지난 후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빨리 이겨낼게. 그리고…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 무사히 이렇게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 …우리 아들, 이젠 엄마가 지켜줄게.』

스윽. 이해원은 다시금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닦았다.

‘다 내가 잘못된 길을 선택한 벌이야.’

이제 마음을 더 강하게 먹어야 한다. 무슨 일이 닥쳐도 쓰러지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자.’

* * *

“나.”

스케일 엔터테인먼트, 스타믹스 연습실.

“군대 갈까 해.”

……?!

지헌의 조용한 선언에, 안무 연습에 지쳐서 뻗어있던 멤버들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봐.”

“재계약이고 뭐고 우리만 버리고 튀시겠다?”

“튀기는. 어차피 가야 할 거, 더 나이 들기 전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든 거지. 제대로 하지도 않는 공부 핑계 대면서 더 미루는 것도 민망하고.”

“형, 그래서 최근에 들어오는 대본 전부 안 보고 미루는 거야?”

팀의 메인댄서인 에이플이 벌떡 일어났다.

“지헌이 형 가면 나도 갈래. 같이 가자.”

“야야, 너까지 왜 그러냐.”

“서로 간의 입대 시기가 멀면, 완전체 활동도 그만큼 늦춰지잖아. 그걸 최소로 줄이는 게 팬들을 위해서도, 서로를 위해서도 좋지 않아?”

“지금 개인 활동하는 멤버들은 어쩌라고요.”

JE는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수건으로 땀을 대충 닦았다.

“특히 저 형은 이제 막 예능에 고정으로 들어갔는데.”

“그럼 지은이 너랑 쟤랑 꼴찌로 동반 입대하면 되겠다.”

“친구끼리 동반 입대 신청하면 전방으로 갈 확률이 높다던데, 사실일까?”

“어. 동반 입대는 강원도나 경기도 지역으로만 가니까, 전방으로 갈 확률도 높대. 대신에 자대 배치도 같이 받고, 같은 생활관 쓸 확률도 높아서 군 생활하는 데에 의지도 되고… 그래, 그렇다고 하더라.”

다른 멤버가 경악하는 얼굴로 지헌을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자세히 알아, 형? 설마…!”

“후….”

지헌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혼자 가기엔 무서워서 알아봤지?”

“무슨 리더가 저래.”

“물귀신이야, 뭐야….”

입대라. JE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사실 JE는 지난주 매니지 팀장과 개인 면담 시간을 가졌다. 팀장이 아주 조심스럽게 운을 뗀 이야기는, JE가 2016년부터 고정으로 출연 중인 KBC <뮤직뮤직> MC 하차 건.

JE는 덤덤히 받아들였다.

『솔직히 4년이면 오래도 해 먹었죠.』

그렇게 JE는 3월을 마지막으로 <뮤직뮤직> MC에서 하차하기로 했다. 이는 4년간 함께 MC를 한 아이허니의 유린도 마찬가지.

‘내가 올해 스물여섯이니까, 만약 지금 입대하면….’

아이돌로선 참 애매한 나이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무대에 한 번이라도 더 오르고 방송에 출연하는 게 수익 면에서나 커리어를 쌓는 면에서나 더 유리하기에, 입대는 많은 고민과 계산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난 딱히 다른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문득 배우 이제설이 했던 ‘지은 씨는 이쪽으로 언제 넘어와요?’ 이 질문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연기 도전은 조금 더 실력을 쌓은 뒤에 하고 싶다.

“내가 지헌이 형이랑 같이 간다니까?”

에이플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내 나이 스물일곱. 들어갈 때도 20대, 나올 때도 20대이고 싶다.”

“…야. 나는 나오면 서른이거든? 같이 가겠다면서 약 올리는 거냐?”

“사랑해, 형.”

“꺼져. 너랑 안 가.”

“친구끼리 동반 입대했다가 오히려 사이 나빠지는 경우도 많다던데.”

“일찍 가면 아슬아슬하게 서른 되기 전에 나올 수 있어, 형.”

JE는 가만히 대화를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참에 입대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난 먼저 숙소로 돌아갈게.”

지헌이 입대를 입에 올린 건 다음 날, 한율의 귀에도 들어갔다. 에이플에게 이야기를 들은 박가람이 고스란히 한율에게 전해주었다.

한율은 날짜를 세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스타믹스 컴백은 4월 초 예정. 활동이 끝난 직후인 5월에 간다 쳐도, 빨라도 2021년 가을에나 전역 예정이다. 하지만 그 전에 게이트가 열리므로, 지헌은 군인으로서 사지로 몰렸다가 사망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

“…….”

“왜 그래, 서한율. 지헌 선배님 입대 선언이 그렇게 충격받을 일이야?”

지금 가까이 지내는 누군가가 게이트로 인해 하루아침에 비명횡사할 수 있다.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일.

“…아니에요. 그런데 형은 머리도 안 감고 어디 가려고요?”

박가람은 휴일에 할 일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학생처럼 후줄근한 트레이닝 바지에다 후드티, 모자, 검은색 롱패딩을 걸쳤다.

“헬스 갑니다요. 요즘 살 오르는 거 보인다고 이건우가 엄청 구박해. 이프림도 라면 먹고 잤냐고 물어보고.”

박가람이 가늘게 뜬 눈으로 한율을 째려보았다.

“전에 누구 때문에 편의점도 못 가고 호빵도 못 먹었는데 말이지.”

“그 칼로리만큼 더 운동해야 하는 거, 제가 미리 방지해준 거잖아요.”

“그래, 아주 고오맙다.”

“어쨌든 헬스장 가는 거면 같이 가요.”

패션 잡지 커버 촬영 직전에 벼락치기로 몰아서 운동하느니, 시간을 두고 꾸준히 관리하는 게 더 편하다. 건강을 위해서도.

“엉. 5분 준다.”

“형 혼자 택시 타고 갈래요?”

“기다릴게, 서한율아.”

그날 오후, <서울 구미호> 촬영장으로 가는 길.

한율은 이해원과 통화하며 그에게 있었던 일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어제 한율이 만든 환영을 보고서 경찰과 119에 신고한 기자가 어디의 누군지도.

“사고를 유발한 사람이 준 거라면, 그냥 받아도 괜찮지 않아요?”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사장님이 어떻게 그 사람에게 받아냈을지, 그 과정이 어땠을지 환히 상상이 가니까. 그리고 더는… 그쪽과 엮이고 싶지도 않고.]

이해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독립해서 지낼 뻔한 아파트는, 이채현이 정원그룹의 정지호에게서 받아낸 것이었다.

정작 이해원의 진로를 방해하던 차는 사고의 직접 원인이 아니라며 고작 벌금 몇만 원만 물었는데 말이다. 그것도 정지호가 아닌, 정지호 운전기사의 아내가.

“형 생각이 그렇다면야. 그래도 크게 상한 곳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럼 형, 통원 치료 잘 받고, 도움 필요하면 주저하지 말고 연락해요.”

-[응. 고마워, 한율아. …내가 너무 시간 뺏은 건 아닐까 모르겠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동 중엔 한가하거든요. 그럼 쉬어요.”

-[응. 촬영 수고해.]

통화를 마친 한율은 ‘누구패치’ 이름으로 올라온 인터넷 기사를 훑었다. 다른 기사를 베끼고, SNS나 커뮤에 떠도는 글을 진위 확인 없이 긁어와 기사화하는 대다수의 인터넷 언론사와 비슷하지만, 그래도 가끔 직접 발로 뛰어 취재하는 곳이었다.

『알고 보니 어제 신고한 사람, 은훤이 찾아가서 나랑 사장님 관계 물어보고, 열애설 단독 기사 터뜨린 기자라고 하더라.』

한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형 언론사에서도 잘 건들지 않는 이우그룹 회장 손녀의 사생활을, 작은 인터넷 언론사 기자가 캔다고? 위험하게 별장까지 따라가면서 집요하게?

‘이채현이나 이해원을 노리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의아했지만, 한율은 일단 정 기자가 작성한 기사에서 이메일주소를 캡처해 저장했다. 나중에 소소하게나마 은혜를 갚기 위해.

‘그나저나.’

그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슬슬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앞으로 1년 5개월 남았다.

다른 마법사가 이끌어주지 않는 한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소질을 지닌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부터 마나를 깨우치도록 도와줘야, 게이트가 열렸을 때 제 한 몸이라도 건사할 수 있을 텐데.’

본래 세상을 지키기 위해 지구의 멸망을 적극적으로 방조할 계획이기는 하나, 나서서 사람들을 사지로 몰고 죽일 정도로 그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특히나 몇 년 동안 가족처럼 지낸 아이들을….

‘아니, 마음 약해지면 안 돼. 어차피 지금 보내는 ‘서한율’의 삶은 휴식이자 유희야. 진짜 내 목표를 잊지 마.’

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알고 있었다.

정작 그들이 눈앞에서 위험에 처하는 걸 보면, 자신은 주저 없이 그들을 구할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능력 혹은 아주 강한 각성자가 아닌 이상, 약한 인간 한둘 살린다고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길까?

이딴 무른 생각이나 하며.

“한율아, 무슨 고민 있어?”

힐끗. 조유찬이 룸미러로 한율을 살피며 물었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심각해.”

한율은 태연히 대답했다.

“스타믹스의 지헌 선배님이 입대를 생각 중이라고 해서요. 전 언제쯤 가는 게 좋을까, 이참에 생각해보고 있었어요.”

“한율이 네 아이돌 인생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거든? 입대는 적어도 7년 정도 지난 후에 생각하자? 응?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낮에 스타믹스 매니저랑 통화했는데.”

“형, 스타믹스 매니저분이랑 연락해요?”

“전에 카메오들 촬영했을 때 연락처 교환했어. 아무튼, 한숨 푹 내쉬면서 이런 말 하더라.”

“무슨 말이요?”

툭, 투둑.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유찬이 와이퍼를 작동시키며 스타믹스 매니저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읊었다.

“지헌이에 이어서 에이플도 입대하겠다고 해서 난감한데, JE까지 나서서 ‘나도 이참에 입대할까 하는데, 형 생각은 어때요?’라고 물어보더라니까요? 하…. 어쩌죠?”

“……!”

밸런타인데이엔 조심해

우웅. JE는 진동 소리를 듣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서한율이 톡을 보냈다.

-[입대는 최소 내후년에나 생각하시죠.]

왜 명령이야.

JE는 미간을 찡그리곤 핸드폰을 도로 가방에 넣었다.

“누구야? 여친?”

앞에서 스트레칭하던 유린이 물었다.

현재 이곳은 아이허니 소속사 연습실로, 다음 주 <뮤직뮤직> MC 스페셜 무대 연습을 함께 하기 위해 찾아왔다. 연습실 한쪽에선 아이허니 매니저와 스타믹스 매니저가 나란히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는 중.

“여친이면 답장도 안 하고 도로 넣겠냐?”

“나한텐 그러잖아.”

“넌 여친이 아니잖아.”

“너 친구 톡도 읽씹하지?”

“어.”

“어휴, 그러니까 친구가 없지.”

“그 말, 조금 전에 한 말이랑 완전히 모순되는 거 알지?”

“응.”

둘이 시시하게 티격태격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닌지라, 두 매니저는 그러려니 하며 핸드폰 게임에 열중했다. JE도 아무렇지 않게 주제를 돌렸다.

“몸 다 풀었으면, 일단 음악에 맞춰서 안무만 쭉 가보자.”

“OK.”

안무가 그렇게 어려운 곡도 아니고, 함께 호흡을 맞춘 기간도 있어서 연습은 2시간 만에 끝냈다.

“그럼 토요일에 보자.”

“기다려, 손지은.”

“……?”

유린이 가벼운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아이허니 매니저가 잠깐 자리를 비운 걸 확인한 그녀가 모니터 뒤에서 종이가방을 꺼냈다.

“가져가.”

“이게 뭔데?”

“으이리이 선물.”

“……?”

JE가 미심쩍은 표정만 짓고선 가만히 있자, 유린이 한숨을 푹 내쉬며 다가와 그의 손에 강제로 쥐여주었다.

“주면 좀 순순히 받아라, 진짜.”

“독 넣은 건 아니지?”

“나가.”

JE는 차에 타고 나서야 종이가방 입구를 봉한 투명 테이프를 뜯어냈다. 안에 든 내용물은 예쁘게 포장된 상자. 상자를 열자, 면세점에서나 살 수 있는 외국 초콜릿이 나왔다. 지난번 해외 공연을 다녀오며 사 온 모양.

“벌써 발렌타인 선물 챙겨준 거야? 유린도 참, 이벤트마다 잊지 않고 꼬박꼬박 잘 챙긴다.”

“그러게요.”

JE는 [스타믹스 JE씨, 컴백 미리 축하]라고 적힌 카드를 보며 생각했다.

난 한 번도 챙겨준 적이 없는데.

“저기….”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은이 넌 정말로 유린한테 아무 감정 없는 거야? 4년 동안 매주 만나는 데도?”

“처음부터 비즈니스 동료라고 강하게 인식해서 그런지, 그냥 편한 동생 같아요.”

유린에게 진지하게 고백받은 적도 있지만, 그때 JE가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유린을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었기에.

‘그리고 그때는….’

그의 마음을 흔들던 다른 사람이 있었다. 한 번도 따로 만난 적도,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눈 적도 없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시선이 가고, 기사나 동영상을 찾아보게 되었던 짧은 짝사랑.

지금은 마주쳐도 덤덤하지만, 그땐 그랬다.

“혹시 군 문제 때문은 아니지?”

매니저의 말이 빨라졌다.

“<뮤직뮤직> MC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어서 많이 심란해진 건 알아. 그런데 군 문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지은아. 4년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출근하느라 하지 못했던 일이 한두 개가 아닐 거 아냐. 그리고 여덟 명 중 두 명이 함께 빠지는 것도 큰일인데, 지은이 너까지 간다고 그러면 팬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어.”

JE는 20여 분 동안 매니저의 반대 의견 및 잔소리에 시달리다가, 회사에 도착하고 나서야 간신히 해방되었다. 그러나 연습실로 들어가자, 이번엔 지헌이 그를 잡았다.

“팀장님한테 들었어. 아무리 MC를 그만두게 되었어도 그렇지,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입대하려고 해. 네가 우리 스타믹스 기둥인데, 나랑 에이플이 다녀올 동안 네가 딱 지키고 있어야지. 응?”

“난 그냥 생각만 해본 건데.”

덥석. 지헌이 JE의 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시선을 맞췄다.

“하지 마! 하려거든 적어도 2년 뒤에나 해. 기둥이랑 벽이 같이 움직이면 무너지잖아.”

JE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어디에서 어떻게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냥 고민 한번 해본 거지 확실히 결정된 건 아니야.]

-[그리고 왜 명령이야ㅡㅡ]

-[혼날래?]

드라마 촬영 중 대기시간. 한율은 한참 후에야 돌아온 JE의 답변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이 어디로 기울었는지 확인했다.

‘그럼 남은 문제는, 아이들을 어떻게 이해시키고 마법을 익히게 하느냐.’

마나를 감지할 수 있도록 기초 중의 기초만 닦게 한 뒤, 게이트가 열린 직후의 상황을 이용해 가르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될까.

대다수 인간은 아주 큰 재앙이 닥치면 자신의 안전보다는 소중한 사람, 가족을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다.

그럴 만한 아이들이고.

‘그리고 그때는 늦어.’

그나마 유호와 박가람은 같은 팀이라서 마나 유동을 도울 기회가 많다. 하지만 JE와 이해원은 다르다.

한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계나리의 연락처를 찾았다.

* * *

2월 6일 목요일.

공익 광고 촬영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 한율은 회사로 향했다. 그리고 회사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기 전,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을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늘 크리스탈 래빗과 어스래빗, 드림래빗의 극성팬이 나란히 앉아있던 창가 쪽 테이블. 평소엔 남녀성비가 3:7 정도였으나, 오늘은 웬일로 남자가 더 많았다.

‘별일이네.’

이유는 회사 로비로 들어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막 지하에서 올라오던 연습생이 들뜬 얼굴로 인사하더니, 목소리를 확 낮췄다.

“지금 아래에, 퍼플아워 진은수 선배님이 오셨어요. 호 선배님이랑 <뮤직센터> MC 무대 연습하러 오신 것 같아요.”

“B연습실에요?”

“아뇨, C연습실이요.”

“네. 알려줘서 고마워요.”

“넵! 오늘도 잘생기셨어요, 선배님!”

“감사합니다.”

한율은 후배의 아부를 덤덤한 미소로 넘겨준 뒤 지하로 내려갔다.

인사를 하러 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가지 않기로 했다. 그쪽도 바쁜 시간 쪼개서 연습하러 왔을 텐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퍼플아워 매니저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고.

“일찍 왔네? 촬영은 잘했어?”

어스래빗 전용인 B연습실로 들어가자, 음악 없이 안무 연습을 하던 멤버들이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그럭저럭이요.”

“써한, C연습실에….”

“알아.”

“인사는 했어?”

“방해되잖아.”

“이런, 매정한 녀석.”

삐릭, 철컥.

그때 문이 열리며 유호가 들어왔다.

“다들 있네? 자.”

쿵. 유호가 웬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뭐에요?”

“초콜릿 과자. 퍼플아워가 광고하는 상품인데, 곧 밸런타인데이라고 광고주가 잔뜩 보내줬나 봐. 퍼플아워 매니저분이 연습실 사용료라고 한 박스 주시더라.”

“이거 전부 우리가 먹어도 돼?”

“당연히 안 되지. 적당히 한두 개만 챙겨. 나머진 연습생 애들이랑 회사 분들에게 나눠드릴 거야.”

“쳇.”

“그럼 은수 씨는 간 거예요?”

“응, 조금 전에.”

불과 몇 초 차이로 엇갈린 모양.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과자 두 개를 챙겼다. 내일 만나는 아역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나저나 밸런타인데이라…. 조심하쇼, 리더.”

과자 세 개를 꺼낸 박가람이 하나를 슥 제 뒤로 감췄다.

“다음 주 <뮤직센터> 방송 날짜가 14일이잖아.”

“그게 뭐. 뒤로 숨긴 거나 내놔. 나중에 후회하기 싫으면.”

“그날 리더한테 초콜릿 주면서 고백하는 여자 아이돌이 있다에, 내 핸드폰 새 케이스 건다.”

“맞지도 않는 네 폰 케이스를 누가 가져. 과자 하나나 이리 내라니까?”

유호가 박가람의 품에서 과자 하나를 쏙 빼갔다.

“리더뿐만이 아니야, 우리 모두!”

박가람이 호들갑을 떨었다.

“작년보다 인기가 많아졌다는 걸 자각해야 해! 다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이 형님이 새삼스레 왜 이래?”

“박다람이, 누구한테 고백받았냐?”

“전 대충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알 것 같은데요.”

“응?”

차남석의 말에 모두가 놀란 시선을 던졌다. 동감을 얻은 박가람까지도.

“남자든 여자든, 세상에 순수한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차남석이 과자 하나를 까며 말을 이었다.

“좋아해서가 아니라, 조금 잘나간다 싶은 상대만 만나고 싶은 과시욕, 상대를 언플용 도구로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 그리고 우리 지금 다 정산받고 있잖아요. 올해 투어까지 다녀오면 통장에 억 단위로 쌓일 텐데, 그거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요?”

“내 말이 이 말이야!”

덥석! 박가람이 차남석의 과자를 한 움큼 쥐었다.

“그리고 다들 연애 경험이 없거나 적어서 이성에 대한 면역력도 약하잖아? 잘못 걸리면 다 털려요, 이 순진한 님들아. 무써우운 세상이야.”

바삭와삭.

“…….”

“그러면서 동생 과자를 터냐, 이 못난 놈아.”

“남석 씨 눈으로 욕하는 거 오래간만에 본다.”

한편, 퍼플아워 스케줄 차량.

운전석에 앉자마자 매니저가 진은수에게 말했다.

“딱히 기대는 안 했는데, 중소치곤 나쁘지 않더라. 그리고 간 김에 서한율이랑도 마주쳤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지 않아?”

가볍게 떠보는 듯한 질문.

더순한화장품 마지막 일정에서 참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묻는 걸 보면, 여전히 마음 정리가 되지 않은 게 눈에 보이는 건 아닐까?

진은수는 이런 소심한 걱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네, 아쉬워요.”

“뭐?”

“샵 언니들이랑 치즈 케이크 걸고, <서울 구미호>에 나오는 사건 범인이 누군지에 대해서 내기했거든요. 선배님 만나면 살짝 힌트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매니저는 룸미러를 통해 진은수를 힐끗거리며 살피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요즘에 너한테 관심 보이는 남자는 없어? 앨범에다가 연락처 적은 쪽지를 넣는다던가, 복도에서 오며 가며….”

“없어요. 그리고 앨범은 언니도 다 살펴보시잖아요.”

“유호랑도 뭐 별일 없지? 사이 너무 좋아 보이던데.”

진은수는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네,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은수 네가 아무 감정이 없어도, 상대방까지 그러리란 법은 없으니까 늘 조심해. 언니가 따로 폰 검사 안 해도 되지?”

“네, 믿어주세요.”

“그럼 됐어. 너도 이제 스무 살이니, 슬슬 알아서 앞가림해야지. 괜히 라움처럼 한창 인지도 올라가는 좋은 시기에 팬들 배신하지 말고. 지금 걔 봐. 엄청 후회하잖아.”

진은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움은 같은 아림에 소속된 히아신스의 멤버로, 3년 전부터 보이그룹 블랙블러드 멤버인 티스트와 공개 연애 중이다.

“라움 언니가 왜요? 티스트 선배님이랑 잘….”

“모르는구나? 둘이 깨진 지 조금 됐어.”

“네?”

“힘들고 외로울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하는 남친이 무슨 소용이야. 있다 없으니까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거고, 그렇게 눈이 다른 데로 돌아가는 거지.”

진은수는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며 매니저의 말을 두 번 정도 되짚었다.

“라움… 언니가 바람피운 거예요? 티스트 선배님이 군대 간 사이에?”

“바람까지는 아니고, 남사친이랑 여자애들이랑 어울려서 술을 좀 마셨는데, 그거 보고 티스트가 화냈나 보더라. 그런 식으로 사소하게 다투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서서히 애정이 식어간 거겠지. 참 여러 사람한테 상처 주고, 피해 입히고, 본인들 수입에도 직격탄 맞아가면서까지 서로 죽네 사네 할 땐 언제고 정말… 한심해.”

매니저가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남친이 군대 간 사이에 헤어졌다고 알려지면 사람들이 누구 탓이라고 수군거리겠니? 하물며 티스트랑 같은 팀의 민준? 그 커플은 여전히 사이좋다는 증거가 이희우 SNS에 올라오잖아. 비교당하기 딱 좋지. 역시 아이돌이라 헤프다, 어쩌고저쩌고 더 떠들어 댈 거 뻔한데. 그러니 최대한 헤어진 티를 안 내는 거지.”

“아….”

“어쩌면 그쪽도 비슷한 이유로 위장 커플 행세 중일지도 모르지만.”

진은수는 핸드폰을 꺼냈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민준 이희우]를 치자, 자동으로 [민준 이희우 결별]이 함께 떴다.

실제로 결별해서가 아니라, ‘얘네 아직도 사귀나?’ 결별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검색한 이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예전에 결별설이 한 번 돈 적도 있고.

진은수는 가장 맨 위에 뜬 기사를 클릭했다.

[‘이희우♡’ 블블 민준, 전역까지 앞으로 3개월!]

혈액순환에 이상이 생겼나

2월 8일 금요일, MBS <뮤직센터> 출연자 대기실 복도.

화장실을 다녀오던 유호는 아무것도 없는 왼손 검지를 만지작거렸다. 3년 전부터 끼고 다녔던 팀 반지는 오늘 아침, 서한율이 꼼꼼하게 세척할 시기가 되었다며 전부 수거해갔다.

‘항상 끼다가 없으니까 허전하네.’

“선배님…!”

“……?”

유호는 목소리가 들린 옆 통로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이번 주에 컴백한 걸그룹, 퍼플아워의 막내 멤버 송의연이 살짝 손을 들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 다가갔더니, 송의연이 대뜸 유호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건우 선배님한테 전해주세요, 꼭이요!”

“어? 잠….”

송의연이 후다닥 도망쳤다.

건우한테? 유호는 받은 물건을 확인했다. 포장지와 리본으로 단단히 봉인된 작은 상자였다.

‘으음….’

음악방송 MC가 된 지 벌써 1년 하고도 반년.

그동안 유호는 종종 여자 아이돌에게서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전해달라며 쪽지나 선물 전달을 부탁받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런 부탁은 곤란하다’라며 바로 그 자리에서 거절했었지만, 송의연처럼 일방적으로 냅다 넘기고 도망가버리면 난감해진다. 쫓아가거나 대기실에 찾아가 돌려주면 순식간에 엉뚱한 소문이 생겨나므로.

하는 수 없이 유호는 진은수의 대기실을 찾았다.

“의연이가요?”

“응. 그리고 이런 부탁은 곤란하다고 전해줘. 미안해. 중간에 너만 곤란하게 해서.”

진은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실은 오늘 아침에 저한테 먼저 부탁했었거든요. 선배님 통해서 전달해달라고…. 죄송해요. 의연이한테는 제가 잘 말할게요.”

“응, 고마워.”

유호가 나간 뒤, 진은수는 속상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명히 아침에 거절하면서 이런 부탁은 서로 곤란해진다고 말했건만, 기어이 유호를 찾아가다니.

‘아무리 남자친구랑 헤어진 지 조금 됐어도 그렇지. 더구나 이번엔 상대도 아이돌인데.’

작년 연말, JE와의 일을 소문으로 듣자마자 바로 매니저에게 이른 것만 생각하면 똑같이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비슷한 부류가 될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

진은수는 사과패드를 꺼내 다이어리 앱을 실행했다.

톡, 토독.

[2020년 2월 7일.]

[의연이가 호 선배님에게 건우 선배님에게 주고 싶은 선물 전달을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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