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화 (194/427)

* * *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율은 막 만들었을 때처럼 깨끗하게 반짝거리는 8개의 반지를 받았다. 케이스에 넣어서 가게를 나오려 하자, 밖에서 통화 중이던 조유찬이 대신 문을 열어주었다.

“그럼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수고해요. …깨끗하게 잘 됐어?”

“네. 그분이랑 통화했어요?”

“응.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흐. 조유찬이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차 운전석에 올라탔다. 한율은 편하게 대본을 볼 겸 뒷자리에 탔다.

“그런데 반지 세척 정돈 다른 멤버들에게 맡겨도 되지 않아?”

“이동 중에 잠깐 들르면 되지 않나 생각해서요. 혹시 번거로웠….”

“아니, 아니, 아니? 고작 이 정도로 뭐가 번거로워. 다른 팀 매니저에 비하면 난 아주 편하게 일하는 건데. 너희들이 새벽에 클럽 가서 술 먹고 사고를 치기를 해,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특정 가게에 가서 뭐 좀 사 오라고 떼를 써? 다른 회사 아이돌 매니저 이야기 들어보면, 너희는 정말 천사야, 천사. 그러니까 우리 평생 같이 일하자.”

말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다. 한율은 소리 내어 웃으며 안전띠를 착용했다.

팀 반지는 드라마 촬영 중, 오랫동안 대기할 때마다 하나씩 소소하게 마법을 새겼다. 길우성의 반지에 새겨진 보호 마법은 조금 더 강화했다.

다음 날 아침.

“오, 진짜 깨끗해졌어.”

“고마워, 한율아.”

멤버들이 반지 안쪽에 새겨진 이니셜을 보곤 자기 것을 찾아갔다.

“거의 3년 동안 매일 끼다가 어제 하루 안 끼니까 진짜 허전하더라.”

“이거 원래 이렇게 반짝거렸었나?”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문가분이 특별한 약품으로 광택 처리를 한 것 같아요.”

“입에다 물면 안 되는 거지?”

“그걸 왜 물어, 보배야.”

“달냥이가 핥을 수도 있잖아.”

우웅. 조유찬에게서 도착했다는 톡이 왔다.

“그럼 전 촬영하러 갈게요.”

“응. 오늘도 수고해, 한율아.”

“써한, 올 때 메론빵.”

“네가 직접 사다 먹어.”

므앙. 한율은 달냥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숙소를 나섰다.

삐릭.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유호가 입을 열었다.

“한율이 보면 참 대단한 것 같아. 드라마 촬영도 힘들 텐데, 시간 날 때마다 꼬박꼬박 회사 나와서 연습하고, 운동도 하잖아. 그러면서 이런 것까지 다 챙기고.”

“내가 봤을 때 한율이는, 시간을 허투루 멍하니 날리는 걸 본인 스스로 못 견디는 것 같아. 그러니까 본받아라, 박다람이.”

“왜 이래? 나도 하루하루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거든? 잘 알지도 못….”

박가람이 돌연 말을 멈추며 고개를 기울였다.

“으응…?”

“왜?”

박가람은 손가락에 끼우던 반지를 도로 쏙 뺐다. 그러곤 다시 끼웠다.

“음….”

“왜 그러냐고.”

“아니, 반지에서 뭔가 쎄한 느낌이 손가락을 훅, 훑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뭔 소리야.”

박가람은 다시 반지를 뺐다가 끼우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순간 혈액순환에 이상이 생겼었나 보다. 이럴 땐 어느 병원에 가야 하죠, 아저씨?”

“너는 동물병원이요.”

“싸우자, 이건우!”

그날 밤, <서울 구미호> 4화 방송 직후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한율은 리뷰 기사에 달린 댓글을 훑었다.

-최슬호가 냉철하고 날카롭게 인간 범죄자를 분석하면 민해솔이 날아다니면서 범인 쫓고ㅎ 환상의 팀이다

-교복 입고 사람 홀리지 마라 최형호

-최슬호 멀쩡한 허우대로 금방 헉헉거리는 설정 연기 너무 실감 나는 거 아닌가요? 형호랑 있을 때는 아주 발끝 하나 손짓하나 섬세하게 화려하던데ㅋㅋ

-형호가 괜히 한대그룹 회장 손자로 둔갑한 게 아닌 것 같음. 슬호가 왜 하필 최 머시기 가문에 들어갔냐고 묻는 거 보니

-빨리 다음 주 빨리 빠ㄹ리

-그런 예고를 보여주고 지금 다음 주까지 기다리라는 거? 당장 내놔 이 방송국 놈들아ㅜㅜ

-다음 주 대체 뭔 일이기에 슬호가 형호 다니는 학교에 나타나냐

ㄴ형호 괴롭히러 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ㅋㅋㅋ

-예고 머야 과거 형호 왜 우는데ㅜㅜ

-슬호와 형호는 형제다!!!!!!!!!!

한율은 마지막 댓글에다 답글을 달았다.

[ㄴ아닙니다.]

똑똑.

“한율아.”

이제설이 한율이 탄 차를 두드렸다. 한율은 문을 열었다.

“네, 선배님.”

“잠깐 옆에 앉아도 될까?”

“네.”

한율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쪽으로 옮겼다. 운전석에 있던 조유찬은 슬그머니 차에서 내리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이제설이 옆에 앉으며 따뜻한 유자차를 건넸다.

“자, 유자차 좋아하지?”

“감사합니다.”

“전에 네가 얘기했던 <달리는 예능>이랑 <뮤직마켓> 말이야.”

타악. 이제설이 뒷문을 닫고선 제 몫으로 챙겨온 커피 뚜껑을 열었다.

“방송도 찾아서 보고 출연에 대해 곰곰이 생각도 해봤는데… 한율이 네가 같이 나가면, 한 번쯤은 출연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정말이요?”

“응.”

이제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덧붙였다.

“영아가 그러더라고. 본업을 열심히 잘하는 것도 좋지만, 결국 배우도 대중의 관심과 사랑이 있어야지만 존재하는 직업이니까, 이참에 배우를 하는 인간 이제설을 살짝 보여주고 오라고.”

참 여전히 사이좋은 연인이다.

“영아 선배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언제 한번 시간 날 때 같이 밥 먹자더라. 그때 만나면 직접 해.”

“네. 시간이 맞는 날이….”

둘은 <서울 구미호> 촬영 일정표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쉬는 날이 드물고, 휴일에도 다른 스케줄이 잡혀 있어 좀처럼 날짜를 맞추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드라마 촬영 다 끝난 뒤에 만나는 게 낫겠다. 아니면 촬영 일찍 끝나는 날에 만나든가.”

“영아 선배님 스케줄은 괜찮을까요?”

“그때그때 상황 봐서 조율해야지.”

이제설이 소리 내어 웃었다.

“셋 다 쉬는 날이 들쭉날쭉하니까 날짜 맞추는 것도 일이네.”

“그러게요.”

이제설의 예능 출연 결정은 이틀 후인 월요일, 이제설의 소속사를 통해 SBC <달리는 예능>과 tv Mu <뮤직마켓>으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두 프로그램 PD들은 WB래빗으로 연락, 한율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 * *

[어스래빗 건우, 초콜릿 지옥이 된 생일 파티 현장]

[인기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건우가 어제 10일, 24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그린라이브 방송을 통해 어스래빗 팬덤 이프림의 아름다운 선행을 생일 선물로 받아 기쁘다고 말한 건우는…(중략).]

뮤닷 <락뮤닷> 퍼플아워 단독 대기실.

하아.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던 송의연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이것 때문에 일부러 지난주에 부탁한 건데, 은수 언니 진짜… 도움이 안 돼.”

옆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루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은수는 다른 멤버와 스페셜 영상을 촬영하러 간 터라 이 자리에 없었다.

“난 참 네가 이해가 안 간다. 대체 이건우 어디가 그렇게 좋아? 어스래빗이 다른 남돌 평균보다 반반하고 키 큰 건 인정하지만, 그 외는 잘 모르겠던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송의연이 눈동자만 굴려 루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언니가 왜 그 오빠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가거든?”

“미안. 네 취향을 깎아내리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되게 잘해줄 것 같잖아. 얘기도 잘 들어주고.”

하. 송의연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면서 웅얼거리듯 말했다.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 저 사람은 자기 여자한테 참 잘할 스타일이다, 가정적이다’라는 게 느껴져. 언니는 모르지? 아스대 때, 건우 오빠한테 눈빛 주던 애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거?”

“그래?”

“응. 이쪽 애들한테 은근히 인기 많아. 동생 멤버들 대하는 모습도 보면, 툭툭 장난치는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잘 챙겨주고. 매니저랑 스태프들한테도 항상 예의 바르게 대하는데, 가정 교육 잘 받은 티가 나더라. 난 그런 점이 너무 좋아.”

“그래….”

“솔직히 다른 남돌 보면 대부분 좀, 초딩이나 중딩 같지 않아? 내가 신경 써서 챙겨줘야 하는 그런 스타일은 의지도 안 되고 믿음도 안 가고, 그래서 싫거든?”

“그래에….”

“언니, 지금 딴생각하고 있지?”

“어.”

하지만 송의연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가, 재차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섯 살 연하도 봐주려나….”

“…….”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의지하고 싶은 적임자로 이건우를 선택하고 거기에 몰두하는 것 같은데.

루아는 말없이 송의연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른 것 같으니, 내버려 두자.’

사실은 지난번 연말 특집 방송에서 라이언과 마주쳤을 때, 이건우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라이언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일단 너희 팀엔 없어.』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가는 말이기도 했다.

‘나야 기혁 오빠가 있어서 상관없지만, 나 빼곤 다들 썩 의지할 수 있을 만한 애들이 아니니. 연인이 보호자도 아닌데, 왜 일방적으로 의지하고 기대려고만 하는지 참 이해가 안 가.’

반대로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과연 상대를 좋아해서일까?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본인’ 그 자체에 심취한 건 아니고?

‘좋아해서 챙기는 거랑 챙기는 걸 좋아해서 사귀는 거랑은 아주 다르니.’

“언니, 그런데 스타믹스의 JE 말이야. <뮤직뮤직> MC.”

루아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송의연을 바라보았다.

“은수 언니한테 마음 있나 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니, 지난주에 <뮤직뮤직>에서 봤는데, JE가 은수 언니 붙잡고 진지하게 뭐라고 말하더라? 은수 언니는 멍하니 고개 끄덕끄덕하다가 또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무튼 그러다가 한 번 웃고, JE도 씩 웃고. JE, 평소에 여돌한테 철벽 장난 아니라며. 그런데 더 대박인 건.”

슥. 송의연이 손을 세워서 벽을 표현했다.

“그 모습을 유린이 이렇게 심상치 않은 얼굴로 훔쳐보는데, 와. 나 그 자리에서 팝콘 배달시킬 뻔.”

송의연의 이야기는, 그들과 한 공간에 있었음에도 공기처럼 가볍게 취급당하던 스태프들을 통해 슬금슬금 퍼졌다.

마법 학교에 입학할 생각 없어요?

“학생이 그… 해커라고요?”

이해원은 얼떨떨한 얼굴로 앞에 있는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교복에다가 두툼한 패딩, 목도리, 마스크로 중무장한 계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해원 씨.”

이해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그의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그는 떨어진 물티슈를 사러 가기 위해 병실을 나온 참이었다. 그리고 맞은편 복도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여학생과 마주쳤다. 여학생은 대뜸 ‘이우그룹이 방공호를 짓게 한 게 저예요.’라며 이해원을 붙잡았다.

계나리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TV로 봤을 때보다 키가 참 크시네요. 조금만 줄여주실래요? 고개 아파요.”

‘기껏해야 고1 정도로 보이는데.’

자기소개도 믿기지 않지만, 진짜든 아니든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도 의문이다.

이해원은 다시 주변을 살핀 뒤 말했다.

“저기에 앉아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그리로 갈래요?”

“네.”

이해원은 앞장서서 걷다가 계나리를 힐끗 돌아보았다. 면회 허용 시간이 아니라서 보호자 출입증이 없으면 여기까지 못 들어올 텐데.

그러자 이해원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계나리가 주머니에서 보호자 출입증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몰래 들어온 거 아니에요.”

“네….”

모퉁이를 돌자 자판기와 테이블이 갖춰진 작은 휴식 공간이 나왔다.

“뭐 좀 마실래요?”

“코코아요.”

곧 이해원은 자판기에서 뽑은 코코아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사이 계나리는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옆 의자에 두고, 사과패드를 꺼내 이해원에게 내밀었다.

“이건 제가 그 협박범이란 증거예요.”

“…….”

사과패드를 살핀 이해원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정원그룹 정이장의 핸드폰에서 빼낸 듯한 문서와 은밀한 내용이 담긴 이메일 캡처, 해커가 요구한 루트를 통해 이우그룹이 보낸 듯한 방공시설 설계도 파일 등이 담겨 있었다.

정말 두 대기업을 협박한 해커, 혹은 가까운 관계자가 아닌 이상 갖고 있기 힘든 자료였다.

‘애초에 나한테 ‘이우그룹’을 운운한 것도 그렇고.’

놀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이해원을 향해 계나리는 씨익 웃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그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해원 씨가 이우그룹의 이채현과 연을 끊으려다가 부당한 일을 당한 것도 알고 있어요. 누구패치의 정 기자 신고로 엉겁결에 풀려난 것도요. 아무리 이채현이 대단한 개망나니처럼 보여도, 집안의 더 높은 분들에겐 거스를 수 없는 법이죠. 이채현이 지금 누리는 것들 모두, 그들에게 받은 것에 불과하니까.”

“…….”

“하지만, 그래도.”

계나리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호호. 코코아를 살짝 식혀서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왜 지금껏 이해원 씨에게 아무 짓도 안 하는지, 왜 더는 집적거리지 않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앳된 외모와 달리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말투에서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해원은 계나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 사람도 늘 한가한 건 아니라서….”

“제가 막았어요. 이채현이 이해원 씨에게 허튼짓 못 하도록.”

“네?”

“놀랄 거 없어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한 행동이니까. 잠깐 저기 창문 좀 보시겠어요?”

이해원은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저 까마귀는….’

웬 까마귀가 창가 바로 앞에 앉아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었다. 이우그룹 별장에서 본 까마귀와 같은 개체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연치곤 너무나 공교로웠다.

“이해원 씨.”

슥. 계나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이해원을 내려다보면서 씩 웃었다.

계나리의 눈이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마법 학교에 입학할 생각 없어요?”

“……?!”

* * *

-[:D]

한율은 계나리의 메시지를 보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은 건 JE.

[선배님,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으세요?]

-[ㅇ?]

한율은 JE에게 톡으로 사진을 보냈다. 지난번에 한율이 SNS에 올린 플리마켓 판매 물건 사진 중, JE가 갖고 싶다고 말한 손목시계 사진이었다.

[안 사실래요?]

-[그때 안 팔았어?]

[네.]

당시 JE의 말을 듣고 혹시나 해서 빼두기를 잘했다. 대신에 딱히 팔 생각이 없던 다른 손목시계를 팔기는 했지만.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나온 거라, 막상 팔려니까 아깝더라고요. 그런데 잘 쓰지도 않게 돼서.]

-[얼마?]

[직접 물건 보고 결정하시죠.]

-[콜.]

다음 날 저녁. 한율은 JE와 만나기로 약속한 가게로 들어갔다. 예약된 개별실에는 벌써 JE가 나와 있었다.

“왔냐?”

그런데 메뉴판을 내려놓는 JE의 얼굴이 심각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메뉴가 전부 마음에 안 드세요?”

“그건 아니고, 술을 시킬까 말까 고민 중이었어.”

한율은 외투와 모자를 옷걸이에다 걸어놓곤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JE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운 채 이마를 짚었다. 그러곤 미간을 구긴 채 깊은 한숨.

“내가 은수 씨 좋아한단다.”

“……?”

“지난주에 퍼플아워가 컴백해서, 마침 잘 됐다 싶어서 은수 씨한테 작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제대로 사과했거든? 그런데 누가 그걸 보고 내가 은수 씨한테 작업 걸었다는 식으로 퍼뜨린 거야. 하…. 나 정말 어이가 없어서. 내가 미쳤다고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그것도 이제야 갓 고등학교 졸업한 어린애한테 집적거리겠냐고.”

한율은 눈만 깜빡거리며 물티슈 포장지를 뜯었다.

“분명히 헛소문이라고 딱 잘라 말했는데도, 멤버들은 아무리 그래도 막 고등학교 졸업한 애한테 그러는 거 아니라면서 놀려대고….”

하아. 재차 한숨을 내쉰 JE가 지친 얼굴로 메뉴판을 넘겼다.

“그냥 술 한잔해야겠다.”

“그때 선배님이 말했던 향기요. 몇 달 동안 다른 사람한테서 느낀 적은 없어요?”

“없어, 길우성이 마지막이야. 그런데 대체 무슨 향기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체를 모르겠단 말이지.”

“그래도 굉장히 좋은 향기로 느껴진 거 보면, 나중에 선배님에게 크게 도움 될 사람이라는 암시? 그런 비슷한 촉 아니었을까요?”

“그 두 사람이? 나한테?”

정확히는 JE에게만이 아닌, 지구인들에게 여러모로 도움 될 예비 각성자들이지만.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냥 해본 추측이에요.”

JE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다, 주문이나 하자. 넌 뭐 먹을래?”

음식을 주문하고 난 뒤, 한율은 손목시계 케이스를 꺼내 JE에게 내밀었다. 시계를 이리저리 살피는 JE의 눈이 조금 전과 달리 초롱초롱 빛났다.

“차봐도 돼?”

“물론이죠.”

찰그락.

“……?”

손목에다가 시계를 차던 JE의 동작이 멈췄다.

“왜 그러세요?”

“…재질 탓인가. 많이 차갑네.”

그러나 신경에 거슬릴 정도는 아닌지, JE는 마저 시계를 차곤 조명에다가 여러 각도로 비추며 살폈다.

그가 테이블에 가볍게 손을 올리곤 슥 웃었다.

“산다. 얼마냐?”

한율은 시계의 보증서 카드를 내밀며 미소 지었다.

“선제시요.”

“나 그 말 진짜 싫은데.”

2월 14일 금요일 아침, MBS <뮤직센터>.

유호는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오늘은 며칠 동안 연습했던 밸런타인데이 특집 스페셜 MC 무대를 선보이는 날이었다.

‘해원이 없이 은수랑 둘만 하는 첫 스페셜 무대니, 허전하지 않게 잘 채워야지.’

“하이, 유호.”

막 대기실에서 나오던 풀썸의 효운이 손을 들었다. 유호도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작년, 뮤닷 를 함께 촬영하는 동안 친해진 사이라 편하게.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늘은 일찍 출근했네? 스페셜 무대 때문인가?”

“네. 사녹 가세요?”

“아니. 사녹은 아까 끝냈고, 그레7 대기실에 놀러 가려고. 친한 애들이랑 활동이 겹치니까 이런 점이 좋다?”

“나중에 제 대기실에도 놀러 와요.”

“아, 해원이가 없으니까 호 너 혼자 쓰고 있겠구나. 알았어, 그럼 나중에 애들이랑….”

쾅!

“……?!”

“깜짝이야…. 뭐야?”

저 앞 복도 모퉁이 너머에서 소리가 났다. 유호와 효운은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기다려, 의연아. 언니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잖아…!”

“시끄러워! 따라오지 마!”

“의연아…!”

“이름 부르지 마! 짜증 나, 진짜….”

불쑥.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즈음, 퍼플아워의 송의연이 씩씩거리며 튀어나왔다. 하마터면 부딪칠 뻔하여 놀라 멈췄는데, 송의연도 유호와 효운을 보곤 잠시 멈칫했다가 그대로 옆을 지나쳤다.

“하아….”

송의연을 부르며 따라오던 루아가 속상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유호와 효운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우리 팀 막내가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많이 예민해져서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활동 시즌엔 다 그렇죠, 뭐. 하하….”

“그럼.”

루아는 재차 고개를 숙이곤 두 사람을 지나쳤다. 방향을 보아하니 진은수가 있는 MC 대기실로 가는 듯했다.

쯧쯧. 효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막내분이 한창 반항기인가 보다. 꼭 예전의 내 동생 보는 것 같네.”

잠시 후, 스페셜 무대 사녹이 진행될 별도의 스튜디오.

달달한 커플 노래에 걸맞게 예쁘게 꾸미고 온 진은수가 입장, 사람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

카메라 감독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너무 예쁜 거 아냐, 은수 씨?”

흐. 진은수가 쑥스럽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유호는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괜찮아? 아까 너희 팀 멤버들, 살짝 트러블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진은수가 웃는 낯 그대로 대답했다. 자주 겪어서 해탈한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알아서 풀겠죠. 그나저나 선배님, 오늘은 팀 반지 끼셨네요?”

“응. 깨끗해졌지?”

“네.”

어스래빗 팀 반지를 보는 진은수의 눈에 살며시 부러움이 스쳤다. PD가 큰소리로 외쳤다.

“리허설부터 갈게요!”

곧 스튜디오에 두 사람이 미리 녹음한 AR이 흘러나왔다. 유호와 진은수는 정해진 위치에 서서 표정 연기에 몰입하다가,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이동했다.

“표정 좋고, OK….”

한편, <뮤직센터> MC 진은수 대기실.

루아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주인 없는 대기실을 차지한 송의연은, 스태프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나가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진은수의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뭐야, 지문 인식이야?’

이번엔 사과패드를 꺼냈다. 홈 버튼을 누르자, 사용자 등록 지문과 맞지 않는다면서 비밀번호 창이 떴다. 진은수의 생년월일을 눌러봤지만, 실패. 서한율의 생년월일을 눌러 봐도 실패. 그리고 몇 번 이상 잘못 입력할 시, 일정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없다는 경고가 떴다.

“아, 재미없어.”

송의연은 둘 다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대신 이번엔 지갑을 꺼내 구경했다. 가족사진, 신분증, 은행 체크카드, 매니저 명함, 카페 스탬프 쿠폰, 7천 원. 이게 다였다.

‘이 언니는 지갑도 재미없네.’

우웅. 진은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

꺼내 보니,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걸려온 전화였다. 사생일 수도 있기에 송의연은 거절 버튼을 눌렀다. 진동 소리가 시끄럽기도 하고.

우웅. 그러자 다시 또 걸려오는 전화.

“후.”

사생이면 욕이라도 퍼부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겠다. 송의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이 ㄱ….”

그러나 상대방의 말이 더 빨랐다.

-[나 유린이야. 끊지 마.]

“……?”

-[톡이랑 메시지는 아무리 보내도 읽지 않는 것 같아서 전화 걸었어. 지금 통화 괜찮아?]

송의연은 잠시 폰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언니 지금 사녹 갔는데요. 어쩐 일이세요?”

-[어…. 혹시 의연이야?]

유린이 당황해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송의연은 씨익 웃었다.

“네. 설마, JE 선배님 때문에 은수 언니한테 따지려고 전화한 건 아니죠?”

-[너하곤 할 얘기 없어. 끊을게.]

“선배님, 이번 기회에 한마디만 할게요.”

-[…뭔데?]

“은수 언니한테 친한 척 좀 하지 말아줄래요?”

-[뭐?]

“선배님은 잘 숨긴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송의연은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댔다.

“이미 이 바닥에 선배님 남자 편력 장난 아니라고 소문 쫙 퍼졌거든요? 우리 은수 언니가 좀 멍청하고 착해서 받아주니까 아무것도 모른다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같은 팀 멤버로선 저렴한 사람이랑 가깝게 지내도록 두고 볼 수가 없거든요.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끼리끼리라고 지껄이니까.”

-[…송의연.]

“그럼 내일 <뮤직뮤직>에서 만나요, 안녕~.”

-[야, 송의…!]

뚝. 송의연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곤 숨을 훅 내쉬었다.

“발성 완벽, 딕션도 완벽. 이제야 조금 속이 풀리…. 뭐야, 통화 자동 녹음?!”

[너한텐 꼭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tv Mu와 글로벌 OTT에서 동시 방영 중인 <서울 구미호>. 5화에선 현대에 벌어진 장기 미제 사건과 흡사한, 3백여 년 전 사건이 그려졌다.

[북쪽에서 여우가 울면 초상이 난다 그러잖아…!]

[아이고, 어린애 하나만 두고 몽땅…. 쯧쯧.]

당시 형호와 슬호의 모습도.

[인간의 짓이 아니야. 동족의 짓이다.]

[지금 이 한양에 너와 나 말고 다른 구미호가 있던가?]

그리고 민해솔의 전생인 어린 민해진과 만나는 형호.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인간 아이한테 따뜻하게 웃어주던 구미호가 이젠 시체 보면서 차갑게 비웃는 애가 된 거지ㅠㅠ

-아역 너무 귀엽당

-이제설 무관 복장 와 무관 와 무관 와

-미쳤다;; 민해진 첫사랑이 형호였음??? 대반전ㄷㄷ

-저리 고운 선비 오빠한테 안 반하는 게 이상하지

-서한율 실제로도 아역이랑 실뜨기하면서 잘 놀아주던뎅ㅎㅎ

-빨리 현대에서 민해솔이랑 형호 재회했으면 좋겠다 왜 자꾸 아슬아슬하게 엇갈리면서 못 만나냐 감질나게ㅜ

-만약 연쇄 일가족 살인사건 범인이 진짜 형호면 개충격일 듯

-자꾸 쎄하게 웃지 마 헷갈리잖아

-서한율 로맨스 사극 하나만 찍어주라

-아 그러고 보니 형호랑 민해솔이랑 현대에서 직접 마주친 적 아직 한 번도 없구나

-어스래빗 동양풍 콘셉트 기원 1037일째..

-진짜 본업이 아이돌이라고 무시하면 안 되는 배우

‘반응도 좋고…. 연기도 정말 잘하긴 하네.’

초코톡 웹드라마 촬영 현장. 연기를 참 못하는 아이돌들과 신인 배우들의 NG 때문에 강제로 대기시간이 길어지는 와중, 보이그룹 원카운트의 나기혁은 핸드폰으로 <서울 구미호>를 보았다.

‘무대 연기 잘한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연기 레슨 선생부터 시작해 주변 사람 모두 ‘아이돌이 쉽게 배역 따낸다고 욕먹지 않으려면 서한율의 반 정도라도 해야 한다’라며 떠들어대는 통에 호기심이 생겨 보기 시작했는데, 정말 잘한다는 게 느껴졌다.

연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전에 봤다면 ‘저 정도 하는 게 어렵나?’라고 생각했겠으나, 놓치기 쉬운 사소한 동작이나 눈빛, 발성과 호흡 조절, 가장 중요한 몰입도까지.

대한민국 젊은 남자 배우 중, 연기력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제설과 함께 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연기 재능은 물론이고, 스스로 연습 영상을 수십 번 돌려보면서 다듬은 게 아닌 이상 나올 수 없는 연기 아닌가? 그냥 천재보다 노력하는 천재가 넘사라더니, 이놈이 그 짝이네.’

<서울 구미호> 5화가 끝났다. 나기혁은 예고까지 다 챙겨 본 뒤에 <서울 구미호>보다 늦게 방송되는 KBC 드라마로 넘어갔다. 이쪽도 아이돌 출신 배우가 주연이었는데, 서한율보다 6년 먼저 연기를 시작한 선배였다.

-서구 보고 왔당

-서울구미호 보고 온 사람들은 제발 좀 닥치고 조용히 봐주세요^^

-방금 대사 뭐라고 한 건가요?

-꿋꿋하게 줏대 있는 표정 연기

-너희 집 애들 연기 잘하는 거 충분히 잘 아니까 오자마자 비교 좀 하지 마라 진짜ㅜㅜ

-아 뜬금 PPL 진짜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잘 못 들음;;

-나 이런 연기해욧>.

-치킨이랑 도넛 좀 그만 먹어... 여주랑 알콩달콩하기 전에 고혈압에 당뇨 걸리겠다ㅠㅠ

-남주 원래 연기하던 분 맞나요? 왜 이렇게 과했다가 굳었다가 그러지

프로그램 톡창을 살핀 나기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홈 버튼을 눌렀다. 그나마 웹드라마는 시청자들이 연기력에 관대한 편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 여자 주인공을 맡은 신인 배우가 살며시 다가왔다.

“선배님, 뭐 하세요?”

최대한 예쁘고 귀엽게 보이려고 표정이나 몸짓을 꾸미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들이대는 타입은 별로기에, 나기혁은 적당히 선을 그었다.

“<서울 구미호> 봤어.”

“재밌어요? 전 얘기만 듣고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내 작품 들어갈 때 다른 작품 보면, 알게 모르게 영향받게 되더라고요.”

“<서울 구미호>에 너랑 비슷한 연령대 배우는 단역밖에 없으니까, 봐도 딱히 영향받진 않을걸?”

“정말요? 선배님 정말 1화부터 다 챙겨 보셨나 보다.”

신인 배우가 살갑게 웃으며 옆에 나란히 앉았다. 반대로 나기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극중에서 커플이라 해도, 대기시간까지 붙어 있으면 어떤 루머가 생길지 환했다.

“난 잠깐 통화 좀 하러 갈게.”

“아… 네, 선배님. 다녀오세요.”

대놓고 거리를 두는 나기혁의 태도에 신인 배우의 표정이 살짝 흐려지기는 했으나, 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촬영장을 나갔다.

그때, 누군가의 핸드폰에서 동영상 촬영 종료 알림음이 희미하게 났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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