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196/427)

* * *

22일 토요일. 강원도 K-POP 콘서트 공연장.

서한율을 제외한 어스래빗 멤버 7명이 리허설 무대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서한율의 파트는 라이언과 유호가 반씩 나눠서 불렀다. 안무 역시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수정해서 반복 연습한 터라 어색하지 않았다.

먼저 리허설을 끝내고도 남은 후배들이 저들끼리 떠들었다.

“괜히 형들이 어스래빗 리허설을 꼭 보라던 게 아니구나. 거의 본 무대처럼 하시네.”

“무대에 오르는 건 연말 특집 방송 이후로 두 달만 아냐?”

“저게 바로 데뷔 4년 차의 여유다.”

오늘 콘서트 아이돌 라인업은 RMMA처럼 큰 시상식이나 연말 특집 방송과 비교하면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대형기획사에서 나온 팀도 아림의 히아신스뿐. 다른 출연팀도 어스래빗보다 후배이거나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 팀이 대부분이었다.

“티모, 안 가?”

느릿느릿 인이어와 마이크를 제거하고 패딩을 걸치는 티모를 향해 V12 멤버가 물었다. 어스래빗 리허설 무대를 보던 티모가 고개를 돌렸다.

“어, 가.”

잠시 후, 어스래빗 단독 대기실.

“우성아, 손님.”

점심을 먹고 나서 후식으로 음료를 마시던 길우성은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사이에 선 티모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하이.”

“……!”

사람들이 수시로 지나다녀 어수선한 복도. 길우성은 티모와 벽에 나란히 기대어 섰다.

“지난번 아스대 녹화 때는 미안. 그땐 여러모로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괜히 너한테까지 짜증 냈어. 실은 DM으로 사과할까 생각했는데… 이런 건 직접 얼굴 보면서 사과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아니, 뭐…. 괜찮아. 그렇게 심한 말 들은 것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거든.”

티모가 씩 웃었다.

“이해해줘서 고맙다.”

“…….”

그러나 길우성은 쉽게 따라 웃지 못했다. 바로 그제, 하신과 완언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티모? 나는 걔 별로. 예전에 돌았던 루머도 그렇고, 예전보다 눈빛이 뭐라고 해야 하나… 조금 싸하더라고.』

『하울링 멤버한테 들은 이야기라 신빙성이 없기는 한데…. 요즘 티모가 개인 홈마랑 사귄다는 소문이 은밀히 돌고 있대. 물론 홈마랑은 자주 보는 사이인데다 이런저런 공생도 이뤄지니까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있지만… 둘은 정말 사적으로 따로 만나는 것 같다고.』

어린 시절, 과장 섞인 악의적인 소문과 맹목적인 비난에 시달리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연예계에 얼마나 허황한 루머가 많이 만들어지고 퍼지는지, 그 과정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길우성은 아무리 그럴싸한 소문이라도, 본인에게 직접 듣지 않는 한 믿지 않으려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이 더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딱히 이유를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왠지 모르게 티모와 둘만 있는 이 상황이 조금 불편했다.

“별게 다 고맙다. 어쨌든 지금은 괜찮다면 됐….”

“안 괜찮아, 우성아.”

“…어?”

티모가 입술을 콱 깨물더니,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나, 안 괜찮아.”

“…….”

“나 좀 도와주라, 길우성.”

덥석. 티모가 길우성의 팔을 잡았다.

“이 바닥에서 내가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어. 그러니까….”

그때였다.

“야, 길우성.”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대체 무슨 일로 이러는 걸까, 또 예전처럼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건가? 걱정하는 마음에 흔들리던 길우성의 신경이 그쪽을 향했다.

그곳엔 언제 왔는지, 차남석이 미간을 팍 구긴 채 티모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시선 탓일까. 툭. 티모가 길우성의 팔을 놓으며 슬며시 눈을 피했다.

까딱. 차남석이 길우성에게 고갯짓했다.

“당장 따라와.”

무언가 크게 잘못해서 단단히 혼날 것 같은 무서운 분위기.

차남석이 저렇게 정색하는 모습은 아주 오래간만이라, 길우성은 당황하여 티모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미안.”

그러곤 후다닥 차남석을 따라갔다.

“뭐야, 남석 씨…? 나 뭐 잘못했어…?”

남겨진 티모는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낮은 한숨을 쉬었다.

“하…….”

걸어서 3분 거리

“무슨 얘기 했어?”

“무슨 얘기긴. 아스대 녹화 때 나한테 심한 말 했던 거 사과….”

어스래빗 대기실 안쪽. 길우성은 순순히 대답하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설마 티모랑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화난 척 부른 거야, 형?”

차남석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어.”

“왜?!”

“라트 마약 사건 터졌을 때, 예전에 잠깐 친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민준 선배님이 되레 의심받고 공격당한 거 기억 안 나냐?”

“라트 사건이랑 티모랑은 상황이 많이 다르잖아.”

“우리한텐 크게 다르지 않아. 그리고 내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일단 거리 둬.”

길우성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왜 그 말을 들어야 하죠, 형님?”

“내가 너한테 해되라고 하는 말 같냐? 같은 팀인데?”

“그건… 그렇지만….”

“형 말 들어.”

“…….”

그래도 조금 전 티모의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길우성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차남석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뭐라 말하려던 그 순간, 박가람이 불쑥 끼어들었다.

“차남석. 왜 구석으로 막내 끌고 와서 괴롭혀.”

“안 괴롭혔어요.”

“그래, 앞으로도 괴롭히지 마. 형한테 혼난다. 이건우! 화장실 같이 가자!”

멀리서 이건우가 질색했다.

“혼자 가, 인마! 그리고 너 자꾸 형 이름 막 부를래? 혼난다!”

“힝, 안 무섭지렁~.”

박가람이 촐싹거리며 대기실을 나갔다. 이건우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 초딩이야, 초딩.”

대기실을 나온 박가람은 촐랑촐랑 뜀박질 동작 그대로 복도를 지나갔다. 오래간만에 무대에 올라 이프림의 환호성을 듣는다는 생각에 저절로 신이 났다.

‘역시 난 무대 체질이야, 음!’

“어? 안녕~.”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히아신스의 호수와 마주쳐서 스톱. 같은 고등학교에 다닐 땐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동창이지만, 데뷔 이후 앨범에 사인을 부탁하거나 오며 가며 자주 마주치다 보니 서서히 말을 트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손구호와 함께 꾸벅. 호수와 함께 있던 히아신스 멤버들이 작게 웃었다.

“아까 리허설 전에도 인사하셨잖아요.”

“옛날엔 웃어른께 아침, 점심, 저녁 인사를 꼬박꼬박 드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점심 인사를 드려보았습니다.”

호수가 어설프게 웃었다.

“그러지 마. 우리 완전 나이 든 것 같잖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히아신스와 이렇게 복도에서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누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건만. 박가람은 참 아이돌 생활도 오래 하고 볼 일이라고 생각하며 슥 미소 지었다.

“…….”

“아니, 여기에서 입을 다물면 진짜로….”

“앗차. 아직 정정하십니다, 선배님들.”

“…미랑이가 왜 너 보면 가끔 때리고 싶다는지, 그 이유를 좀 알 것 같아.”

“흐. 그럼 저는 이만, 화장실이 급하여.”

박가람은 재차 고개를 꾸벅이곤 히아신스 멤버들 옆을 지나쳤다. 촐싹촐싹. 히아신스 멤버들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분도 성격 참 특이한 것 같아.”

“그런데 저분이 그분 아냐? 그… 가끔 본다던.”

주어는 빠졌지만, 멤버들은 바로 알아들었다.

“언니도 그 영상 봤어? 어스래빗 데뷔 초반에 일본 귀신의 집 가서 찍은 거?”

“응.”

“어?”

라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어스래빗이 방송국 오면 오히려 귀신들이 도망간다고 들었는데?”

“둘 다야. 저분이 원래 그런 걸 본다는 소문이 있었거든? 그런데 같은 팀에 귀신 퇴치할 만큼 기가 센 멤버가 있는 거지. 어스래빗 팬들 말로는 그게 한율 씨 같다더라.”

“맞아. 귀신의 집에서 괜히 가람이가 한율 씨 애타게 부르던 이유가 따로 있는 거 아니라면서.”

“팀으로 잘 만났네. 그런데… 오늘은 한율 씨 안 왔잖아.”

히아신스 리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을까?”

“왜요, 언니?”

“나 전에 온더로즈 선배님한테 들었는데, 여기….”

한편, 박가람은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흠칫했다. 화장실 구석에 시커먼 그림자가 우두커니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박가람은 눈치 못 챈 척,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서 그림자와 아주 먼 칸막이를 두드렸다. 다른 화장실까진 거리가 있어서 그곳까지 가기 귀찮았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똑똑. …똑똑.

사람이 있네. 박가람은 게걸음으로 옆으로 옮겼다. 똑똑. 칸막이를 고집하는 이유는, 명색이 아이돌인지라 이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과 마주치는 것 자체가 민망한 까닭이었다.

‘아, 비었다.’

그렇게 볼일을 보고 나와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데, 후배 아이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욥.”

“선배님, 리허설 정말 잘 봤습니다.”

“하핫, 감사합니당. 그럼 전 이만!”

화장실에서 인사 나누는 것 자체도 민망하다. 여전히 구석에 코를 처박고 있는 그림자도 신경 쓰이고. 박가람은 일회용 티슈로 젖은 손을 닦는 둥 마는 둥 하며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오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벌컥.

조금 전 사람이 있었던 칸막이에서 V12의 티모가 나왔다.

“어? 안녕하세요, 선배님!”

리허설 하기 전에도 단체로 인사했었는데, 아주 오래간만에 만난 사이처럼 반갑게 인사한다.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이렇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할 만큼 친한 게 아니라서 조금 의아했으나, 박가람도 가볍게 손을 들었다.

“어, 하이.”

스스. 그때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림자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럼 난 먼저 갈게욥!”

박가람은 그것과 눈이 마주칠세라 후다닥 화장실에서 도망쳤다. 그러곤 한참 동안 잰걸음으로 복도를 빠르게 가로지르다, 슬며시 멈췄다.

‘가만.’

무언가 이상했다.

‘방금 티모…. 볼일을 본 게 맞나? 화장지를 풀거나 물 내리는 소리, 아무것도 못 들은 것 같은데?’

박가람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에이, 후배들 목소리에 가려서 못 들은 거겠지. 화장실에서 볼일도 안 보고 가만히 뭘 했겠어.’

* * *

“자, 지금 느껴지는 감각을 놓치지 않도록 계속 집중하세요. …OK, 좋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후우. 이해원은 천천히 숨을 내뱉으면서 눈을 떴다. 예쁜 화초와 다도 탁자가 놓인 깔끔하고 아늑한 방의 정경. 동시에 지금까지 좇았던 ‘마나’란 감각이 사라졌다.

“익숙해지면 TV를 보면서도 몸속 마나를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를 거예요. 그러니까 시간 날 때마다 마나를 인지하고 좇으세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계나리가 손을 펼쳤다. 창이 굳게 닫힌 실내인데도 어디선가 청량한 바람이 일어, 화초 잎사귀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자연의 마나까지 붙잡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언제봐도 참 신기했다.

처음엔 기 수련 같아 아리송하기는 했다. 그러나 눈이 파란빛으로 물든다거나 이렇게 바람을 일으키는 걸 직접 보니, 정말 ‘마법’이 실재한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한테도 마법사의 소질이 있다니.’

꼭 어릴 때 재밌게 본 판타지 영화 시리즈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비록 거기에 나오는 마법사 학교처럼 웅장한 성이 아닌, 도심 속 작은 빌딩의 명상 센터에서 일대일 가르침을 받고 있지만 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다른 학생은 없나요?”

계나리의 복장도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커다란 하얀 토끼가 그려진 핑크 후드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 여기에 커다랗고 두툼한 검은색 패딩을 걸치는 걸 보니, 휴일에 동네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아직 영입 중이에요.”

“네….”

계나리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내밀었다.

“정 연습할 곳 없거나 혼자 있고 싶으면 언제든지 여기 편하게 써도 돼요. 그리고 로봇청소기가 있으니까, 청소는 화장실이랑 현관만 따로 하시고. 교장 쌤이 지저분한 거 싫어하시거든요. 외부인은 절대 들여선 안 된다는 거, 굳이 말로 안 해도 아시죠?”

“네.”

“배달 음식 시키는 것도 절대 안 돼요. 뭐 먹고 싶으면 포장해서 가져와서 먹고, 잘 치우고, 그리고 또….”

계나리가 로비로 나가며 두리번거렸다.

“지금은 더 말할 게 없네요. 뭐 필요하거나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하시고요.”

“네, 그럴게요.”

“아, 여기 자물쇠 이중이니까 비번도 알려드릴게요.”

잠시 후, 계나리는 친구로 추정되는 이의 전화를 받고선 후다닥 명상 센터를 나갔다.

“그럼! 역시 떡볶이는 쌀떡이지!”

쿵, 삐릭.

이해원은 닫힌 문을 보곤 작게 웃었다.

저런 모습도 영락없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인데. 더구나 키와 체격까지 작아서, 두툼한 옷을 입고 행동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꼭 햄스터가 사부작사부작하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

‘그나저나 떡볶이는 밀떡인데.’

이해원은 심심한 생각을 하며 마법 학교 여기저기를 살폈다. 정말 본래 명상 센터로 사용했던 곳일까. 반투명한 중문 너머 현관 신발장에는, 갈아신을 수 있는 실내 슬리퍼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따뜻한 색감으로 꾸며진 로비엔 명상 관련 책이 책장에 진열되어 있고, 커피 머신, 작은 테이블과 의자, 미니 냉장고와 정수기도 갖춰졌다. 방 3개는 모두 앉아서 차를 마시기 좋을 법했다.

다용도실과 화장실까지 살핀 이해원은 고개를 들어 로비 천장에 달린 CCTV 카메라를 보았다.

‘교장이자 대마법사란 사람은 저걸 통해서 지켜보는 건가?’

이해원은 일단 좌측 방구석에 놓인 로봇청소기 상자 옆에 앉았다. 교장이 퍽 부자인지, 최근에 새로 나온 비싼 모델이었다. 방의 붙박이장에 정리된 방석이나 다도 세트 따위도 모두.

‘에어컨에다 공기 청정기, 가습기, 오디오, TV까지 모두 비싼 거야. 그런데 캣타워랑 고양이 화장실은 대체 왜 있는 거지? 고양이 데리고 다니나?’

우웅. 그때 매니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해원은 스피커 폰으로 돌려놓곤 새 로봇청소기를 꺼냈다.

“네, 형.”

-[당분간 편히 쉬라고 했어도 그렇지, 종일 어디 가서 코빼기도 안 보여. 오늘 멤버 생일인 거 까먹었냐?]

“라방은 밤에 하기로 했잖아요.”

-[잊었을까 봐 전화했다. 그리고 너 다음 주부터 <뮤직센터> 복귀인 거 알지? 괜히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면서 이상한 사진 찍히지 않도록 조심해.]

“네.”

뚝. 전화가 끊겼다.

이해원은 핸드폰을 힐끗하곤 로봇청소기 사용설명서를 살폈다.

이해원이 이채현과 연을 끊은 후, VEL 엔터 대표는 그를 크게 질책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안인섭처럼 ‘조금만 더 참지, 왜 그 좋은 줄을 자르냐’고 말로만 그럴 뿐.

오히려 지금은 그의 눈치를 슬슬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리 씨가 대체 어떻게 정리했기에.’

한편으로는, 지금껏 자신이 두려워했던 건 정말 뭐였을까 하는 허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결국 힘 있는 사람을 굴복시킨 건, 그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해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주 당연한 진리인데도.’

우웅.

이번엔 오늘 만나기로 한 서한율에게서 톡.

-[(지도 링크)]

-[여기에서 5시, 괜찮을까요?]

이해원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낮 1시였다.

[ㅇㅇ 이따가 봐^^]

-[네. :)]

그럼 슬슬 청소나 시작해볼까. 이해원은 사용설명서대로 로봇청소기 설치 작업을 끝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울 구미호> 서한율, 드디어 현미나와 만났다!]

[어제 22일 tv Mu와 글로벌 OTT 앱에서 동시 방영 중인 <서울 구미호> 8화에서 드디어 서한율과 현미나가 만났다.

3백여 년 전 현미나의 전생인 ‘민해진’과 특별한 인연을 쌓았던 서한율은, 현미나를 본 순간 인간사에 냉소적이었던 구미호 특유의 분위기가 깨지고 감정이 흔들리는 등 시청자들의 몰입을 최고조로 올리는 눈빛과 표정 연기를 선보이며…(중략).]

-애틋함과 혼란스러움과 끝나지 않은 원망이 섞인 눈빛

-서한율 섬세한 감정 연기는 진짜 일품

-이제설 님이 서한율 님이랑 꼭 같이 드라마 하고 싶다고 고집부린 이유가 있었네요ㅎㅎ

ㄴ예전에 별일 없는 드라마 캐스팅 들어갈 때도 이제설이 서한율 적극 추천했다고 했어요ㅜㅜ 결국 사고 때문에 이제설이 하차하게 되었지만

ㄴ그 당시에 친분 때문에 추천한 거 아닌가 했는데 알고 보니 일면식도 전혀 없던 상태에서 객귀 보고 필 딱 받아서 고집부린 거였고

-흑막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왜 너희들끼리 싸우냐ㅠ

-님들 너튜브에 <서울 구미호> 주연 오디션 영상 올라옴

-아이돌 그만두고 배우만 하자...란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ㄴ안 돼요ㅜㅜ

-야 어떻게 여기에서 끊을 수 있냐 잔인한 놈들아

-예고 눈빛ㄷㄷ

-서한율은 인간이면서 어떻게 인간 아닌 종족을 찰떡같이 소화하지

오후 5시. 리모델링 공사가 모두 끝나 깨끗하게 단장된 2층 주택.

띠리롱 띠리롱. <서울 구미호> 인터넷 기사를 훑던 한율은 초인종 소리를 듣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폰 화면에 모자를 깊게 눌러쓴 이해원이 잡혔다.

한율은 직접 문을 열고 나가 그를 맞이했다.

“시간 딱 맞춰서 왔네요?”

이해원은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산 커피를 내밀었다.

“걸어서 3분 거리에 있었거든.”

한 식구 된다

“여기가 너희가 새로 이사할 숙소구나. 와…. 구경 좀 해도 돼?”

“네.”

기본적인 가구 외엔 아무것도 없지만, 이해원은 들뜬 얼굴로 집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건물이 정원을 둘러싼 것도 신기하다. 밖에선 전혀 안을 볼 수 없는 거잖아.”

“가까운 높은 건물에서 보고자 하면 보일 거예요. 최근엔 드론으로 가정집을 촬영하는 범죄도 발생한다던데요?”

“나도 그 뉴스 봤어. 제발 그런 범죄는 처벌 좀 강하게 때렸으면…. 어?”

다락방까지 둘러보고 내려가는데, 이해원이 2층 거실 구석을 보곤 놀란 소리를 냈다.

“왜요, 형?”

“아…. 저 로봇청소기가 요즘 핫한가 봐. 아까 간 곳에도 저거랑 똑같은 게 있었거든.”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했다. 고르기 귀찮아서 똑같은 걸로 세 대 샀으니. 그중 두 대는 이 집의 1, 2층에. 하나는 명상 센터에 두었다.

“형이 말했던 그 이상하고 수상한 곳이요?”

이해원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시 1층 거실.

이해원은 오늘 명상 센터로 위장한 마법 학교에 간 이야기부터 시작해, 계나리가 ‘마나’란 걸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까지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정말 나도 직접 겪지 않았으면 믿기 어려웠을 거야. 한율이 너도 황당하지? 이런 이야기…. 무슨 소설도 아니고.”

“실은 그 계나리라는 사람.”

한율은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저도 만났어요.”

“뭐? 정말?”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한율은 생각을 정리하는 척,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작년 10월에 우리 팀 길우성이 제주로 내려갔다가 범죄에 휘말릴 뻔한 사건이 있었는데. 혹시 아세요?”

“기억나. 그 친구가 부모님 집에 내려갔는데, 옛날 동창생이 그 집 담 아래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던 사건 말하는 거지?”

“네.”

한율은 당시 사건 현장 근처에 세워진 차 블랙박스에서, 양상원이 담을 넘지 못하도록 저지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가 찍혔다는 걸 이야기해주었다. 왜소하고 작은 체구를 지닌 사람이었는데, 경찰이 아무리 애를 써도 끝내 행방을 찾지 못했다고.

“그때 양상원을 처벌할 방법을 찾기 위해 내려간 변호사 선생님이 계세요. 그 선생님이 나중에 묘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양상원이 파란 귀신 눈깔이 자기를 공격했다고 주장하더라.’”

“……!”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누군가가 제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한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별개의 일인 줄 알았는데… 형이 영화 속 마법 학교를 운운하는 메시지를 받았다니까 소름이 돋더라고요.”

한율은 핸드폰에 너튜브 동영상을 띄웠다.

“이것 좀 볼래요?”

“이게 뭔…. 어…?”

영상 제목을 본 이해원의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

[어스래빗 서한율, 미스테리한 그의 정체! -그는 정말 파랑 요정인가?!]

“파랑 요… 정?”

“예전에 한 너튜버가 만든 제 영상이에요.”

한율은 간단한 소개 이후 나오는 [1. 푸른색으로 물든 눈] 부분으로 재생 바를 이동시켰다.

3년 전 어스래빗 첫 팬 사인회에서 찍힌 사진. 한율의 눈이 푸르스름하게 반짝이는 모습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락뮤닷> 미니 팬 미팅 당시 찍힌 사진. 바람이 거세게 부는 사진 속에서도 한율의 눈이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다.

심각하게 영상을 보던 이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팬들은 우연의 일치라고 웃어넘겼으나, 이해원에게는 와 닿는 의미가 다를 터다.

한율은 태연히 거짓을 말했다.

“계나리를 만나고 나서야, 제가 가끔 느꼈던 힘이 마나란 걸 알았어요.”

“……!”

툭. 이해원의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이 테이블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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