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후우….”
명상 센터와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새 예비 숙소. 박가람은 차가운 봄바람을 맞으며 정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혼자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는 이유로 서한율을 보낸 지 벌써 5분.
박가람은 2년 전, 선녀보살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너희들, 아까 걔랑 떨어지지 마. 걔가 너희 생명줄이야.』
영험한 무속인의 신점을 방해할 정도로 기가 센 서한율, 귀신 쫓는 인간 부적 서한율, 서한율 뒤에 붙은 커다란 파충류 눈, 초보 마법사, 마력, 미래에 다가온다는 재앙.
‘선녀보살님은 특히 우성이랑 차남석한테 이렇게 경고했어.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서한율 영역 밖으로 벗어나지 말라고.’
비명횡사. 순식간에 목숨이 날아가는 뜻밖의 사고. 그런 사고를 평범한 인간이 쉽게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서한율이 귀신 퇴치뿐만이 아니라 안전 부적도 겸하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 안 좋은 예감 혹은 판단으로 피할 수 있게 하는 쪽이라고.
‘하지만 ‘마나’란 것을 느끼고, 마법을 배우고 있다고 하니….’
떠오르는 사건 하나.
‘칠레에서 차남석이 떨어지는 조명에 맞을 뻔했을 때, 설마 그 마나란 힘으로 차남석을 구했던 건가?!’
그렇다면 서한율은 안전 부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비명횡사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자다.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한 능력자, 마법사로 거듭날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그 신기한 힘을 느꼈다고 했으니까…. 으아, 대박 소름….’
부르르. 하필 차가운 바람이 쌩하고 불어, 박가람은 두 팔로 제 몸을 감쌌다. 그러다가 더는 못 견디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우, 추워.”
그러는 동안에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정말 사람들이 비명횡사할 수 있는 재앙이 닥친다고 가정했을 때, 이대로 멍하니 있어도 괜찮은 걸까? 사람들에게 알려서 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아니, 미친놈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지. 그런데 정말 나도 그런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리더한테도, 스타믹스 JE에게도 소질이 있고?
그리고 이 엄청난 일 모두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고?
박가람은 두 팔을 위로 활짝 펼치며 외쳤다.
“꿈이면 깨라…!”
한편, 운전 중이던 한율은 긴 신호에 걸리자 무료함에 라디오를 켰다. 심심해서 이 채널, 저 채널 돌려보는데, 마침 계나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에 오빠가 알아보라던 거 알아봤어요.]
계나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보고했다.
-[오빠 말이 맞았어요. 그 티모란 사람, 개인 홈마 통해서 일본에서 약을 구하고 있었어요. 사귀는 것도 사실 같아요. 폰에 이런저런… 커험! 영상이랑 사진이 있더라고요.]
“그래, 수고했어. 고마워.”
누군가의 악의로 약을 시작하게 된 건 참 안 된 일이다. 그러나 티모는 오랫동안 병원에 다니며 중독에 대한 위험성, 마약 범죄의 심각성을 강하게 배웠을 터다.
그런데도 이번엔 본인의 의지로 약을 하고 있다.
같은 팀 멤버들이 진작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사실이 밝혀지면 팀 전체에 큰 피해로 돌아올 게 뻔하므로. 그만큼 티모는 멤버들에게 전혀 들키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게 범죄를 저지른다는 뜻이다.
‘무슨 생각으로, 어떤 뜻으로 길우성에게 도와달라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 어수룩하고 이용하기 좋아 보이니 타깃으로 삼은 거겠지. 뻔해.’
어쨌든 마약 범죄자를 가까이 둬봤자 좋을 거 하나 없다.
한율은 DJ의 활발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끄곤 내비게이션을 터치했다.
[누구패치] 검색.
그날 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
[MOHE 前 스타일리스트, 인성 폭로 가세… “만나면 인사하는 건 한 명뿐”]
[폭로 사실이었나? MOHE 안인섭, 팀 탈퇴 결정!]
[[공식] 안인섭, “더는 팀에 피해 끼치기 싫어…” MOHE 탈퇴 결정]
[MOHE 소속사 VEL 엔터테인먼트 측이 안인섭의 팀 탈퇴 사실을 알렸다.
15일 새벽,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중략).
안인섭은 “장난삼아 한 말이 실제 범죄로 이어지자 너무 당황하여 잡아뗀 게 일이 커졌고, 저는 두려워서 숨느라 급급했습니다.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분(폭로자)과 사귀었다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친한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냈을 뿐입니다”라며 폭로자와의 교제 사실은 부인했다.
또 안인섭은 “그때 피해를 본 후배 아이돌그룹과 팬분들에겐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덧붙이며…(중략).]
-잘 가시게 개꼴초 듣보여
-생긴 건 존나 착하고 순하게 생겼는데ㅋ 이래서 관상은 믿으면 안 돼
-와 이ㅅㄲ 장난으로 한 말을 다큐로 받아서 사고 칠 줄 몰랐다고 슬쩍 발 빼는 거 보소?ㅋㅋㅋㅋㅋ
-미친 악개ㄴ 하나가 날뛴 것까지 아이돌이 책임져야 함? 딱 보니 끝까지 들이대도 이성으로 안 봐주니까 존나 이 악물고 통수친 거 뻔히 보이는데??
ㄴ진짜 그랬다면 이렇게 탈퇴까지 하면서 물러날까? 변호사 선임하고 억울하다고 버티지?
ㄴ다른 멤버들까지 진흙탕 싸움에 휘말리게 되니까 피해 안 주려고 탈퇴하는 겁니다. 뭘 알고 말하세요.
-얘 같은 팀 멤버들도 논란이 한두 개가 아니던데ㅋ 다 같이 손잡고 군대나 가라 나라가 부른다
ㄴ인성ㅆㄹㄱ랑 같이 입대하는 애들은 뭔 죄냐
-이놈이 진짜 소름 돋는 게 뭔 줄 앎? 어스래빗 서한율하고 <감성 푸드트럭>이란 예능 찍으면서 진짜 친한 척, 착한 척 완전 가식 떨면서 대했다는 거임
-난 솔직히 폭로자보다 이걸 보는 어스래빗 멤버들 심정이 더 궁금함
ㄴ거기 팬들이랑 같이 반야심경 외우고 있던데요
ㄴㅋㅋㅋㅋㅋㅜㅜ
ㄴ(대충 목탁 두드리는 단체 토끼 그림)
우웅.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보컬 연습실. 잠깐 쉬는 동안 기사를 보던 한율은 이해원의 톡을 확인했다. 안인섭이 조금 전, 숙소에서 모든 짐을 다 빼고 나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 내일 <뮤직센터> PD님 찾아뵙기로 했어. 호 형이랑도 내일 만나기로 했고.]
[호 형한텐 마지막인 것처럼 이야기하지 말아요. 조만간 센터로 데려갈 테니까.]
-[ㅇㅇ]
-[ㅎㅎㅎ;]
중요한 전력이 될 동료잖아요
이해원은 핸드폰 전원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MOHE 숙소에는 우울한 정적만 감돌았다. 어제 새벽, 대표가 화가 잔뜩 나 들이닥쳤던 게 꼭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게임 중이던 안인섭을 다짜고짜 두들겨 패려던 대표와 얼굴은 때리지 말라며 필사적으로 말리던 매니저와 멤버들. 소란은 박살 난 모니터 파편을 밟은 매니저가 바닥에 피를 묻히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그 뒤 안인섭이 회사로 끌려가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나가기 전 중얼거린 말이 마음에 걸린다.
『이 미친년이 지 인생도 끝장내려 작정했나.』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폭로자는 본인이 원하는 걸 위해 아무 죄의식 없이 타인에게 큰 폐를 끼쳤던 사람이다. 안인섭을 향한 마음이 식은 이상, 그 또한 이용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안인섭 또한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가 아무 대비도 없이 폭로 당할 만한 짓을 저질렀을까. 그리고 ‘파성줌마’와의 줄이 끊겼더라도, 지금껏 브로커 역할을 하며 만든 인맥이 여전히 살아있을 터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선은 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우웅, 우웅.
이해원은 작게 한숨을 쉬며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E]
“…….”
지난달, 이우그룹의 별장에서 헤어지고 난 뒤 처음 걸려온 전화.
몇 년 동안 무조건 받아들여야 했던 상대여서 그럴까. 고작 ‘E’ 한 글자인데도, 여러 감정이 올라와 가슴을 답답하게 옥죄었다.
이해원은 천천히 심호흡하고 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해원?]
받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자, 이채현이 먼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피곤한 상태에서 술과 담배를 잔뜩 했을 때의 목소리였다.
-[…야.]
“…….”
-[왜 대답을 안 해.]
“…….”
-[왜 대답을 안 하냐고, 나쁜 새끼야!]
건조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쨍하니 귀를 괴롭혔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내가 얼마나 널 예뻐했는데! 그딴 식으로 일방적으로 날 밀어내고, 그딴 개 같은 방법으로 또 날 엿 먹여?!]
격앙되어 소리 지르던 그녀의 목소리에 점점 울음이 섞였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버티질 말든가…! 평생… 흐윽, 평생 옆에 있어 줄 것처럼 다 받아줘 놓고선… 이딴 식으로 날 버려? …야. 뭐라고 말 좀 해 봐…. 말 좀 해보라고, 이 나쁜 새끼야…!]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걸까.
옆에서 말리던 사람도 없던 건가?
이해원은 그녀가 흐느끼는 걸 듣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 돈 때문이었던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 찾으세요. 사장님이라면 쉽게….”
-[네가 아니잖아!]
흐윽. 소리를 지른 이채현이 울음을 삼켰다.
-[…다른 새낀 필요 없어. 당장 튀어와. 안 그러면 나.]
챙그랑.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이채현이 갈라진 목소리로 또박또박 내뱉었다.
-[무슨 짓 할지 몰라.]
“……!”
쿵. 이해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으응?”
타닥타닥.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계나리는 물을 마시려 고개를 돌렸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첫 번째 모니터. 위치 추적 프로그램을 심어둔 대상자 한 명이 지정 범위를 벗어난다는 알림이 떴다. 속도나 방향을 보아하니 택시 승강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듯했다.
‘이 시간에 어디 가?’
계나리는 의아한 마음에 이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나리 씨.]
“이 시간에 안 자고 어디 가세요?”
-[그건 어떻게….]
“편의점은 지나친 지 오래고. 설마 이채현 만나러 가는 건 아니죠? 아무리 팀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곤 해도….”
…하. 이해원이 핸드폰을 떼어놓고 거칠어진 숨을 몰아 내쉬었다. 계나리는 그 안에 섞인 한숨에서 불안한 감정을 느꼈다.
“이해원 씨. 일단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설명해줄래요?”
그로부터 한 시간 후.
한율은 계나리를 통해 이해원에게 있었던 일을 보고 받았다.
-[…이렇게, 일단락했어요.]
“그래, 수고 많았어.”
-[아니에요. 해원 씨도 우리의 중요한 전력이 될 동료잖아요. 당연히 챙겨야죠. 그나저나 조금 걱정이네요.]
계나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채현 같은 타입은 본인이 잘못됐다는 걸 좀처럼 인정하지 않잖아요. 이 사람, 중학생 때도 친구가 자기 말 무시하고 다른 애랑 어울렸다고 아주 사람을…. 어으. 어쨌든 다음에 또 이러진 않을까 걱정이에요. 그래도 명색이 회장님 손녀니까 당분간 주위에서 지켜보기는 하겠지만…. 아, 제가 말이 너무 많았네요. 그럼 오빠,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쉬어. 나중에 보자.”
-[넵!]
통화를 끊은 한율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누구패치는 지난번 일로 이우그룹에 단단히 찍혔을 테니, 이번 건까지 던져주면 은혜 갚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가 되겠지.’
그렇다고 가만히 두자니, 계나리의 말처럼 다음엔 더 심한 협박으로 이해원을 괴롭힐 수도 있다.
‘일단 내일 이해원과 얘기 나눠보고 결정하자.’
그러나 다음 날 아침. 포털사이트 경제뉴스란과 사회뉴스란에 비슷한 내용을 담은 기사들이 올라왔다.
[이우그룹 이채현, 이별한 前연인 아이돌 A씨 감금 및 협박 사실 드러나]
[재벌 3세의 비틀린 집착… 전 연인 A씨에 “당장 안 오면…”]
연예뉴스란 메인에는 이런 기사가 올라왔다.
[MOHE 이해원, “시작부터 잘못된 모든 걸 바로 잡으려 합니다.”]
[바로 어제 前멤버 안인섭이 불미스러운 일로 탈퇴한 가운데, 오늘 17일 새벽 이해원이 개인 SNS에 4년 전 출연한 뮤닷 <보컬리스트 시즌3> 당시 프로필 사진과 “시작부터 잘못된 모든 걸 바로 잡으려 합니다.”라는 의미심장한 글을 올렸다.
(사진=VEL 엔터테인민트)
(사진=이해원 개인 SNS)
이를 본 네티즌들은 이해원이 어마어마한 폭로를 예고한 것 아니냐란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중략).]
-이채현 전 아이돌 남친이 어째 얘 같은데
ㄴ기사 뜬 시기가 공교롭기는 함
ㄴ얘 얼마 전에 대기업 회장 손녀랑 사귄다고 기사 떴었잖아. 빼박이네
-이채현 전 남친 이해원 맞음ㅇㅇ 너튜브에 ‘야! 우리 멍멍이 ㅈㄴ 잘생겼지?!’ 이러면서 끌어안고 같이 수영장 빠지는 영상 떴음.
ㄴ키햐 대기업 회장 손녀를 걷어찬 남자
ㄴ멍멍이ㅋㅋㅋ 사람을 대놓고 개 취급을 하는데 아무리 재벌 3세라도 사귀고 싶겠냐고ㅋㅋㅋ
ㄴ그냥 스킨십 과한 지인이라며ㅡㅡ
ㄴ나라면 가능
ㄴ얼굴이 안돼서 불가능
ㄴ이채현 성질머리 알면 그런 소리 안 나올 텐데.. 이채현 초딩 땐 운전기사한테 반말하고 갑질하고 중학생 땐 동급생 담뱃불로 지지고 폭행하고 장난 아니었음ㅋ 더 크게 사고 칠까 봐 바로 유학 보냈는데 거기에서도 매일 술 처먹고 명품 사치하면서 논 걸로 유명함.
ㄴ영상 어디에 가면 볼 수 있어요?
ㄴ이미 삭제됐어요.
-머야 궁금해 빨리 터뜨려죠
-이 팀엔 정상인이 한 명도 없었던 건가?
ㄴ전 스타일리스트 폭로에 따르면 얘가 유일한 정상인이었음..
-보컬3 끝나자마자 원래 소속사 버리면서 고은훤이랑도 사이 틀어진 거 같다고 말 좀 많았었는데.. 단순히 소속사 이적 문제만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 같네요.
-뮤센 MC 복귀한 지 얼마나 됐다고ㅜㅜ
-이해원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던 것도 전 여친 소행 아니냐 혹시?
ㄴ그러면 ㅆ소름인데ㄷㄷㄷ;
ㄴ설마요. 본인이 죽이려 해놓고 다시 만나자고 매달린다고?
ㄴ그건 이미 블랙아이스 현상 때문에 미끄러진 거라고 경찰이 발표했는데용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 고우면서도 잘생기기 쉽지 않은데 꼭 조각 같네
-헤어졌으면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말고 쿨하게 보내주면 안 되는 거냐 진짜?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일까. 아침에 일어나 씻고 나서 인터넷에 들어왔는데, 실검 1위가 [이채현 이해원]이었다.
한율은 기사와 댓글을 빠르게 훑은 뒤 이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혹시나 하는 생각에 노트북으로 명상 센터 CCTV에 접속했다.
“…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캣타워가 있는 방. 이해원이 이불로 몸을 둘둘 감싼 채 방석을 베개 삼아 자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그가 MOHE 숙소에서 챙겨온 듯한 커다란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핸드폰은 회사 사람들이나 기자들의 연락을 피하려고 꺼놓은 모양.
원래 이해원은 <뮤직센터> 제작진들과 유호에게 인사부터 하고, 차근차근 잘못된 일을 정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룻밤 새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한 걸로 봐선, 어젯밤 일이 그의 마음에 적잖은 상처를 입혔거나, 정신적 충격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이채현이 병원으로 실려 갔으니.
‘생명엔 전혀 지장 없는 작은 상처에 불과했지만….’
좋든 싫든 몇 년 동안 만난 사이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이채현 관련 제보도 이 아이가 한 건가?’
똑똑.
한율은 영상을 끄고 노트북을 덮었다.
“네.”
옆에 조용히 붙어 있던 달냥도 함께 대답했다. 므앙.
문이 열리더니 유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막 일어났는지 머리카락이 새집처럼 엉망이었다.
“일어났네?”
“좋은 아침이에요, 형.”
“응. 날씨는 영 좋지 않지만.”
벌써 8시가 지났는데, 창밖은 비를 뿌리는 먹구름으로 어두컴컴했다.
유호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한율아, 혹시 인터넷 봤어? 실검이랑 메인에 뜬 기사.”
“해원이 형 기사요?”
“응.”
유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기사 보고 놀라서 전화해봤는데 폰이 꺼져 있더라고. 그래서 혹시 그전에 해원이랑 연락한 적 있나 해서.”
“어제 만났어요.”
“그래? 어때 보였어?”
“어젠 괜찮아 보였어요. 듣기론 오늘 뮤센 PD님이랑 형이랑 만나기로 했다던데. 약속 시간 되면 연락 오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걔가 말없이 약속 어길 애는 아니니까…. 그래도 걱정된다. 그쪽 회사 사람들이 좀 그렇잖아. 기자들도 잔뜩 몰려갔을 테고.”
평소 이해원의 뒤를 밟지 않고서야, 그가 지금 명상 센터에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터다.
한율은 시치미를 뚝 뗐다.
“기자들이 걱정이긴 하네요. 그 사이 뭐라고 기사를 써댈지.”
“상처를 많이 받지 말아야 할 텐데. 어쨌든 나중에 해원이한테서 연락 오면, 한율이 너한테도 말해줄게.”
“네.”
유호는 슥 웃곤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달칵.
“아, 깜짝이야!”
“……?”
자리에서 일어나던 한율은, 놀란 소리를 내며 그대로 주저앉는 유호를 바라보았다. 문 바로 앞엔 얼굴이 퉁퉁 부은 박가람이 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박가람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한율과 유호를 훑었다.
“뭐야. 둘이 아침부터 문 닫아놓고 무슨 얘기 했어.”
“야잇, 놀랐잖아!”
“실검에 해원이 형 이름이 올라와서요.”
“응?”
박가람이 고개를 기울였다.
“선배님 이름이 왜?”
한편 그 시각, FJ그룹 계열사인 스케일 엔터테인먼트.
컴백이 코 앞이라, 오늘도 연습을 위해 아침 일찍 출근한 JE는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마주치는 직원들 얼굴이 하나같이 우중충했다.
‘무슨 일 있나?’
마침 매니저와 상의할 일이 있어 JE는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노크를 하기 전,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고성을 들었다.
“어떻게 한 명도 모를 수 있습니까! 대체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평소 점잖기로 유명한 대표의 목소리였다.
“그게… 정말 상담도 착실히 받고 그래서….”
“일단 애들 외부 연락 수단 압수하고, 티모 짐 다 빼세요. 이 시각부터 그 녀석, 우리 회사 소속 아닙니다.”
“네.”
벌컥. 사무실 문이 열리며 대표가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
본의 아니게 엿들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JE는 대표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대표는 말없이 JE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툭툭 감싸듯 두드리곤 옆을 지나쳤다.
JE를 발견한 매니저가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어…. 들었어?”
“네. 어떻게 한 명도 모를 수 있냐고 호통치시는 것부터요. 그놈 또 사고 친 거예요?”
“그게….”
매니저가 사무실에서 나오며 문을 닫았다. 그러곤 JE를 구석진 곳에 있는 조용하고 작은 회의실로 데려갔다.
JE는 매니저가 문을 닫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요. 이번엔 누구한테 속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처먹었대요?”
“……?!”
매니저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중얼거렸다.
“너 그냥 점집 차려라, 지은아.”
“…….”
“네가 걔 느낌 안 좋다고 했을 때 V12 매니저한테 주의 줬어야 했는데…. 어휴…. 그런데 사무실엔 웬일로 온 거야? 설마… 마음 바뀐 건 아니지? 그렇지?”
스타믹스는 멤버들 전원 찬성으로 스케일과 재계약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건 아니고, 저 숙소에서 독립하려고요.”
술버릇이 저랬나
“독립? 집은 알아봤어?”
“아뇨. 제가 부동산에 대해 뭘 알아야 말이죠. 외워야 할 주의사항만 잔뜩 있고, 정작 믿을 만한 곳 소개해달라 그러면 순 광고만 해대던데요.”
“집 구하는 건 참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서… 아.”
매니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너랑 친한 후배 있잖아. 서한율. 걔네 부모님이 강남에 빌딩 여러 채 갖고 있다며. 그러니 좋은 매물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믿을 만한 공인중개사나.”
“고작 집 하나 구하는데, 후배한테 도움을 청하라고요?”
“고작 집이라니. 까딱 잘못하면 몇백만 원부터 억 단위까지 손해 볼 수 있는 게 바로 부동산이야. 예전에 어떤 가수가 전세 사기당해서 몇억 날린 사건, 몰라?”
“…….”
단순히 겁을 주려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JE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머뭇거리자 매니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다. 경험 삼아 직접 돌아다녀 보는 것도 좋을 거야. 그래야 좋은 집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소 깨닫게 될 거다.”
JE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엄마한테 전화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