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화 (204/427)

* * *

“네, 병원은 이우그룹 쪽이…. 네, 네. 선생님께 큰 피해 없도록 조속히 찾아내서…….”

뚝. 말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통화가 끊겼다. 전화 상대방을 향해 굽신거렸던 VEL 엔터 대표는 화를 버럭 냈다.

“아오, 썅!”

책상에 있던 모니터나 사내 전화기는 박살 낸 지 오래라, 그는 애꿎은 서류 더미를 집어 내리치고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쾅, 쾅!

“아악!”

소리까지 꽥 지른 그의 핏발 선 눈이 MOHE 매니저를 향했다. 매니저는 죄인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씨발,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애 하나를 못 찾아?! 내가 그랬지! 어떻게 해서든, 이해원 그 새끼 엄마를 협박해서라도 찾아오라고!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새끼야?!”

매니저는 상당히 억울했다. 조금 전 대표 본인도 이우그룹 때문에 병원엔 얼씬조차 못 한다고 해놓고선.

“죄송합니다.”

“넌 매니저라는 새끼가, 네가 관리하는 애가 평소에 어디를 돌아다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도 체크 안 해? 분명히 옆에서 이 새끼 도와주는 것들이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전국적으로 얼굴이 팔린 새끼가 털끝 하나 안 보일 리가 없다고.”

“…….”

“뭘 멍하니 찌그러져 있어?! 빨리 나가서 찾아와!”

“네!”

또 재떨이가 날아올까, 매니저는 벌떡 일어났다. 순간 다리에 찌릿찌릿한 통증이 퍼져, 절뚝거리며 대표실을 나왔다.

‘이해원 이 자식 진짜 어디로 숨은 거야?’

MOHE 멤버 중 그나마 착하고 얌전해서 좋게 봐줬더니, 이렇게 거하게 뒤통수를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생각할수록 이해가 안 가네. 대체 뭐가 아쉬워서? 얼굴 잘생겨, 키 커, 돈 많은 여자가 좋다고 매달려. 몇 년만 더 참으면 아주 돈을 물 쓰듯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멍청했을 줄이야.’

이해원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나. 여전히 전원이 꺼져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음성과 메시지를 보내곤 있지만, 이해원은 SNS를 통한 폭로 이후 사흘째 잠잠했다.

‘병원은 이우그룹 놈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어. 이해원과 이채현이 스폰 관계가 아닌, 정말로 연인 사이였다고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이것까지 계산한 거면 멍청한 건 아닌데…. 아니, 대체 누가 도와주는 거냐고. 안인섭 말대로….’

매니저는 슬며시 걸음을 멈췄다.

‘서한율 쪽을 한번 파볼까?’

이해원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온 걸 보면 친한 사이였던 것 같긴 하다. 그러나 이해원과 MOHE의 실상을 알고도 그를 도와준다고? 왜? 서한율이 뭐가 아쉬워서?

‘왠지 헛수고일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현재로선 달리 찾아볼 곳이 없었다.

매니저는 친한 연예부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접니다. 뭐 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날 저녁. 한율은 경기도 별장의 보안업체 측으로부터 당혹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어떤 남자가 별장 담을 넘었는데, 온 집안에서 경보음이 울리자 허둥지둥 다시 담을 넘어 도망치려다 잘못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야기였다.

-[본인 말로는 여기에 아는 사람이 감금된 것 같아서 찾으러 왔다느니 횡설수설하는데…. 고객님께서 직접 와주셔야겠습니다. 경찰들도 아주 난감해하는 눈치에요.]

“그분 성함이?”

돌아온 대답은 MOHE 매니저 이름이었다.

“잠깐 경찰 선생님 좀 바꿔주시겠어요?”

한율은 경찰에게 오해의 소지를 남기고 싶지 않으니, 보안업체 직원들과 함께 별장을 둘러봐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별장엔 사람이 지냈던 흔적을 비롯해 아무 이상도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사람은 법대로 처리하도록 할게요.”

다음 날,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단독]MOHE 매니저, 어스래빗 서한율 개인 별장 무단침입]

[어제 23일 보이그룹 MOHE 매니저 A씨가 보이그룹 어스래빗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소유한 경기도 별장에 무단침입했다가 보안업체 직원들에게 붙잡혀 경찰에 인계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A씨는 2m 높이의 담을 넘어…(중략).]

-여기 소속사 ㅈㄴ 골 때리네ㅋㅋㅋㅋㅋ 이해원 잡으려고 애먼 서한율 별장 담 넘었다가 다리 부러져서 119도 부르곸ㅋㅋ

-이해원을 왜 서한율 별장에서 찾음?

-서한율도 진짜 황당하겠다.. 얼마나 어이없으면 연락받은 그 자리에서 바로 경찰한테 직접 둘러보라고 하겠냐고

-이해원한테 법적 대응 할 거라더니 왜 남의 집 담 넘어서까지 난리일까? 응? 뭐가 무서워서?

-이쯤 되면 다른 MOHE 멤버들도 하루빨리 솔직히 입 여는 게 더 신상에 좋을 것 같은데ㅋ

-역시 대표가 조폭 출신이라 매니저도 꼴통이네ㅋㅋㅋ

-이 와중에 서한율 SBC에 <달리는 예능> 제작진 미팅하러 왔다고 해맑게 웃는 포토 뉴스 보니까, 정말 아이돌이 극한 직업이긴 한 것 같다..

ㄴ떨어지는 조명에 죽을 뻔한 사고 겪고도 바로 또 무대에 선 것만 봐도

ㄴ그만큼 벌잖아

-이해원 엄마가 입원한 병원에 이우그룹이 경호원 쫙 깔아놓은 것도, 다 이런 조폭ㅅㄲ들이 허튼짓할까 봐 그런 거라던데. 대체 이해원이 뭘 어디까지 알고 있기에 이 난리냐?

ㄴVEL 엔터랑 관계된 스폰서 중에 이름 거론되면 안 될 거물이 한둘이 아닌가 보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SBC <달리는 예능> 제작팀 회의실.

한율이 <달리는 예능>에 출연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라, 미팅 자리는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율 씨 정말 괜찮아요? 어제 별장에 MOHE 매니저가 무단침입했었다면서요.”

미팅이 마무리될 때 즈음, PD가 슬며시 물었다. 한율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네. 담만 넘었을 뿐이라 크게 해를 입은 건 없는데….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어요.”

“그것참.”

PD가 다른 스태프들을 둘러보았다. 스태프들이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흰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곧 회의실에는 한율과 조유찬, PD만 남았다. PD는 조유찬에게도 짧게 시선을 보냈지만, 조유찬은 눈치를 못 챈 건지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건지, 미팅 서류를 정리하며 메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PD가 어색하게 한번 웃곤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한율 씨, 이해원 씨랑 연락돼요?”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서 저도 걱정이에요. 어제 있었던 일도 그렇고, 대표가 조폭이었다느니 이런 이야기도 들려서요. 그런데 그건 왜….”

“아, 저도 좀 걱정이 돼서요. 예전에 MOHE 매니저가 우리 팀에 인사하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느낌이 좀 싸했거든요. 하하…. 그럼 오늘 수고하셨어요, 한율 씨. 녹화 때 봐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SBC 예능국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 엘리베이터에 둘만 탑승하게 되자 조유찬이 조용히 말했다.

“방송국도 난리인 모양이야.”

“해원이 형 폭로 때문에요?”

“사람들은 MOHE 멤버들이 남자니까 스폰서라고 하면 돈 많은 사모님부터 떠올리겠지만, 안인섭이 여자 아이돌이나 연습생을 스폰과 연결해주는 브로커 짓도 했었잖아. 그런 종류의 접대를 받은 사람 중에 방송국 사람이 전혀 없을까? 그나마 요즘 젊은 PD들은 그런 걸 꺼리는 사람이 많지만, 불과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휴.”

조유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윗선엔 그런 거 좋아하는 양반이 많을걸.”

“…….”

“아, 당연히 한율이 너희 아버지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아주! 머시겠지만!”

말없이 조유찬을 바라보던 한율은 싱긋 입가를 올렸다. 하하. 조유찬은 소리 내어 웃다가 화제를 돌렸다.

“별장엔 지금 가볼 거야?”

“네. 저 혼자 갔다 올게요.”

“괜찮겠어? VEL 엔터 쪽 사람이 또 그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는데.”

“오늘 아침에 기사가 났는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또 올까요.”

“하긴. …아냐, 역시 나도 같이 가는 게 좋겠어. 너 혼자는 불안해서 못 보내.”

“거기에서 혼자 조용히 할 것도 있어서요.”

“혼자 조용히…?”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조유찬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렸다.

“그래, 한율이 너도 성인이니까.”

“…무슨 생각을 한 거예요, 형.”

숙소로 돌아온 한율은 자신의 차를 끌고 경기도 별장으로 향했다.

별장은 아무 이상 없었다.

정기적으로 전문 관리 업체에서 관리하는 터라 정원과 내부 모두 깨끗했다. 어제 경찰과 보안업체 직원이 둘러봤지만, 특별히 어지럽히거나 뒤진 흔적도 없었다. 서재에 숨겨진 비밀 공간은 아예 발견조차 못 한 모양이고.

띠링, 띠링.

“……?”

한율이 별채를 둘러볼 때였다. 초인종이 울리더니 인터폰 화면에 사유지 출입문 앞에 선 여성이 잡혔다.

‘이 사람은….’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누구시죠?”

-[아, 안녕하세요! 누구패치의 정선지 기자라고 합니다! 서한율 씨… 맞으시죠?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서울에서부터 따라온 건가? 아니면 여기로 올 걸 예상하고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인터뷰는 회사 통해서 연락해주세요. 안녕히 가세요.”

-[아, 저, 잠시만요! …이해원!]

“……?”

-[이해원 씨에 관한 이야기에요, 서한율 씨. 지금 저 보내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실지도 몰라요…!]

한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출입문 개폐 버튼을 눌렀다.

“들어오세요.”

영상 속 정 기자가 환하게 웃었다.

“커피 괜찮으세요?”

잠시 후. 별장 안으로 들어온 정 기자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거실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율은 테이블에다 커피 캡슐 상자를 펼쳤다.

“고르세요.”

“아…. 네! 그럼 전 이걸로….”

“금방 되니까 소파에 편히 앉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정 기자는 삐걱삐걱 움직여 소파 끝자락에 아주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그러더니 한율이 커피를 가지고 올 때까지 눈으로 거실을 살폈다.

한율은 커피를 티 테이블에 내려놓곤 가까운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조금 더 편히 앉으셔도 괜찮아요. 안 무너져요.”

“하하…. 제가 <고양이 난로>랑 <서울 구미호> 팬이거든요. 그래서 한율 씨를 가까이서 보니까 좀… 긴장이 돼서요.”

아닌 것 같은데.

이우그룹 별장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때, 정 기자는 망설임 없이 핸드폰부터 꺼내 촬영했었다. 그리고 지금 슬며시 피하는 시선과 표정에서 읽힌 건, 한율을 향한 모종의 두려움.

“얼굴이랑 손이 하얗게 질리셨네요. 밖에 오래 계셨나 봐요.”

“네, 좀. 커피, 잘 마실게요.”

한율은 입가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마시는 정 기자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자신도 컵을 입가에 댔다.

대놓고 관찰하는 시선이 퍽 불쾌할 법도 한데, 정 기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내려놓았다.

“집이 참 예쁘고 좋네요.”

“바로 용건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제가 오늘 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네.”

정 기자가 가방에서 사진 두 장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2월 24일과 3월 16일에 찍힌 이해원 씨 사진이에요. 보면 아시겠지만 같은 건물로, 혼자 여기를 자주 드나들었어요. 그리고 3월 17일 새벽.”

힐끗. 한율의 눈치를 살핀 정 기자는 이번엔 핸드폰에다 저화질 사진을 띄워 내밀었다.

“이해원 씨가 SNS에 폭로 예고 글을 올리기 30분 전, 캐리어와 커다란 종이가방을 들고 이곳에 들어가는 블랙박스 영상이에요.”

“해원이 형 스토커세요?”

사진 속 이해원은 모두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알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이건….”

정 기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진을 띄웠다. 한율이 같은 건물로 들어가는 사진이었다.

“21일 아침, 같은 건물 편의점 바깥 CCTV에 찍힌 한율 씨고요.”

“…….”

“이해원 씨, 한율 씨가 도와주는 거 맞죠?”

정말 이 나라는 곳곳에 카메라가 너무 많아.

한율은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미소로 가렸다.

“네, 맞아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아뇨, 문제 될 건 없죠. 이해원 씨가 흉악한 범죄자도 아닌데. 그냥… 확인을 좀 하고 싶었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우그룹의 이채현을 캐고 있거든요.”

“알고 있어요. 은훤이 형 찾아가서 해원이 형과 이채현 씨의 관계를 묻고, 해원이 형 열애설을 터뜨린 게 정 기자님이시잖아요. 그리고 해원이 형이 이우그룹 별장에 갇혀 있을 때, 형이 그곳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도 하고.”

정 기자가 크게 심호흡하더니 한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번 더 이해원 씨를 돕고 싶어요.”

“무슨 뜻인지 자세히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 원하는 건, 이채현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죗값을 받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이해원 씨의 도움이 필요해요.”

한율은 웃음을 터뜨렸다.

“참 어이없네요. 열애설을 터뜨렸던 정 기자님이요? 형이 왜 하필 기사 바로 다음 날 사고가 났는지….”

“알아요. 그래서 이해원 씨를 돕겠다는 거예요. 나중에 제가 원하는 도움을 못 받아도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이해원 씨에게 말이라도 전해주세요.”

정 기자가 한율을 향해 고개 숙였다.

“부탁드릴게요.”

“이해가 안 가네요.”

한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내려놓았다.

“그런 얘기라면 본인을 직접 찾아가서 해도 되지 않나요? 형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주 잘 아시잖아요.”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얼마 전까지 이채현 뒤를 캐던 기자가, 그 건물에 있는 사무실 문을 다 두드리고 다녀도?”

“…….”

한율은 가만히 정 기자를 응시하다가 슥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좋아요, 형한테 전해드릴게요. 하지만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올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네. 고마워요, 한율 씨.”

활짝 웃은 정 기자는 남은 커피를 한꺼번에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곤 다시 입가를 올렸다.

“커피, 잘 마셨어요.”

정 기자는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바삐 별장을 떠났다.

그녀가 진입로에서 거실까지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차가 출입로를 벗어나는 것까지.

한율은 그 모든 모습이 담긴 CCTV를 돌려보았다. 딱히 수상한 행동은 포착되지 않았다. 녹음기 혹은 카메라를 숨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문제가 될 법한 언행은 하지 않았으니 상관없다.

‘하지만 뭔가 더 감추는 게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뭘까.’

-[으으…. 제 실책이에요.]

계나리에게 조금 전 있었던 일을 간단히 전하자, 계나리는 괴로워하며 자책했다.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어쨌든 정 기자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봐. 이상하게 날 무서워하더라고.”

-[넵! 그런데요, 오빠. 다른 학생은 언제쯤….]

“내일 학교 가기 전에 잠깐 들러. 박가람 데려갈게.”

-[넵! …헤헷.]

그날 밤. 단체 안무 연습과 개인 보컬 연습을 끝낸 한율은 박가람을 찾았다. 박가람은 다른 보컬 연습실에서 길우성과 나란히 모니터 앞에 앉아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서한율이 왔습니다.”

“방송 중이에요?”

“네, 방송 중이에요. 들어와서 이프림에게 인사하세요.”

한율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방해금지 설정을 깜빡하고 해제하지 않아, 라방 시작 알림을 듣지 못했다.

‘이 두 사람, 한번 시작하면 기본이 한 시간인데.’

현재 시각 밤 11시 45분. 내일 아침 일찍 박가람을 명상 센터로 데려가, 계나리와 인사시키려던 계획이 어그러질 가능성이 커졌다.

한율은 라방을 빨리 끝내도록 유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이프림.”

-라방에서 보는 게 얼마 만이신가, 서 배우!!!!

-구미호다!

-안녕 형호야 오랜만이야

“무슨 얘기 중이었어요?”

길우성이 여분 의자를 가지고 오며 슬쩍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자연스럽게 한율이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깻잎 얘기ㅎ

-깻잎ㅎ

-깻잎 논쟁

-깻잎

웬 깻잎. 한율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박가람과 길우성을 번갈아 보자, 박가람이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최근에 다시 핫해진 깻잎 논쟁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한율 씨.”

“그게 뭔데요?”

“자, 써한 너랑 네 여친이랑.”

“나 여친 없는데?”

“마안야악에야, 서한율아.”

“어.”

길우성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방긋방긋 다정하게 웃는다. 라이브 방송 중인 까닭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나 여친 없는데? 나 여친 없는데? 나 여친 없는데?

-서한율 완전 자연스럽게 본래 말투 나온 거 왤케 웃기짘ㅋㅋㅋㅋ

-단호하다 역시ㅎㅎㅎ

“너랑 네 여자친구랑 다른 네 동성 친구랑 셋이서 같이 밥을 먹고 있었어. 그런데 네 친구가 깻잎 반찬을 집으려는데, 이게 두 장이 붙어서 안 떨어지는 거야. 그런데 그걸 본 네 여자친구가 젓가락으로, 붙어 있는 깻잎을 떼어줬어. 그럼 넌 기분이 어떨 것 같아?”

“내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 깻잎 붙은 걸 떼어준다….”

가정을 되짚은 한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논쟁까지 할 일인가 싶어서.

-두근두근

-과연 서한율의 대답은?!

-제발 싫다고 해 질투한다고 해

-율톢은 되게 쿨할 것 같음

-그게 왜? 라고 할 것 같ㅇ

한율은 솔직히 미간을 찡그렸다.

“생각만 해도 싫은데. 다른 남자 걸 왜 떼 줘.”

-사랑해 서한율♡

교장 선생님이 부자거든요

길우성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떼어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냥 도와주는 거잖아. 딱히 젓가락이 부딪친 것도 아니고.”

“떼어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누구 걸 떼주냐 이게 문제지.”

“여자친구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게 싫다? 고작 깻잎인데?”

한율은 단호히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남자. 고작 깻잎은 알아서 먹으라고 해.”

“그래도 몸에 밴 배려처럼 자기도 모르게 나온 행동일 수도 있잖아. 가족끼리 밥 먹다가 자연스럽게 떼주는 것처럼.”

“그래도 싫을 것 같은데.”

“네 여자친구인 이상, 배려는 너에게만 보여라?”

“적어도 다른 놈… 아니, 다른 남자한텐 안 돼.”

-놈ㅋㅋㅋㅋ

-율톢 질투나 독점욕 없게 생겨놓고선 반전이네

-서한율 입에서 놈 나왔다

-진짜 싫은가 봐ㅎㅎ

-귀여워

박가람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그럼 여자친구가 떼어준 깻잎을 친구 밥 위에까지 얹어주면?”

“…….”

-서한율 표정ㅋㅋㅋㅋㅋㅋ

-대충 미친 거냐고 묻는 시선

-율톢에 대한 캐해석이 실패했다 근데 더 좋다

-합격

-저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표정이다

-율토끼 상상만으로도 질색하는 거 봐ㅋㅋㅋㅋㅋ

라방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을 땐 어느새 새벽 1시가 될 무렵이었다. 한율은 박가람에게 아침 7시에 일어나라고 통보했다.

“6시간밖에 안 남았잖아…!”

“어차피 3분 거리고, 잠깐 인사만 하면 돼요.”

“으음….”

진짜일까.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한율을 째려보던 박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엉. 진짜 잠깐이다.”

다음 날 아침. 한율은 아직 잠이 덜 깨서 퉁퉁 부은 박가람을 데리고 명상 센터로 향했다.

“아니, 왜 하필 3층…. 왜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을 오르는 동안 잠에서 깬 박가람은 투덜거리다가, 막 부스스 일어나는 이해원의 이불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으, 따뜻해서 좋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이해원이 시간을 확인하고선 한율에게 물었다.

“나리 씨는 8시에 오기로 하지 않았어?”

“뭣이?!”

이해원의 베개까지 슬쩍하던 박가람이 두 눈을 부릅떴다. 한율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형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요.”

“……?”

이해원이 세수를 마치고 말끔한 모습으로 방석에 앉았다. 한율은 어제 정 기자가 별장으로 찾아와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알고 보니, 이채현 씨에게 학폭을 당했던 피해자이자 정 기자의 사촌이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더라고요. 사인은 단순 교통사고였는데, 정 기자는 근본적인 원인을 중학 시절 당한 학폭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한율은 천천히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사건이 공론화된 뒤 이우그룹에서 합의금을 건네고, 이채현 씨도 유학으로 떠났지만, 피해자는 그 뒤로도 이채현 씨의 다른 친구들에게 심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다가 중학교는 자퇴. 검정고시로 졸업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정신과 치료는 못 받았던 것 같아요. 피해자의 아버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에서 해고당한 바람에 가정 형편이 안 좋아졌거든요.”

“아….”

“물론 우연일 수도 있어요. 모든 불행의 원인을 한 사람에게서 찾는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피해자가 만약 학폭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심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지 않았더라면 피해자는 그날 그 시각, 그런 곳에서 사고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피해자는 내내 불행하게 지내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는데, 가해자는 언론 매체를 통해 아주 화려하게 잘 지내는 모습이 나오니… 피해자 유가족으로선 분노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이해원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신 분껜 미안하지만, 나와는 방향성이 맞지 않아.”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채현에게 모욕적이고 부당한 일을 당하기는 했으나, 둘은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뉘는 사이보단 서로 대가를 주고받은 부도덕한 관계에 가까웠다. 정선지가 이채현에게 품은 복수심이나 분노와는 다른 감정일 수밖에.

“내가 미친놈처럼 보일 수 있단 거 잘 알아. 스폰 관계였다고, 그 사람에게 당한 걸 다 폭로하고도 감싸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그런데….”

이해원은 한 입도 대지 않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운 정도 정이고, 몸 정이란 것도 참 무서운 거거든. …좀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아니에요. 형은 형 나름의 선을 지키는 거잖아요. 좋든 싫든 4년 가까이 만난 사람이기도 하고. 이해해요.”

“…….”

이불에 들어간 박가람이 눈만 슬쩍 내밀곤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한율은 화제를 바꿨다.

“나리 씨한테 아침이나 부탁할까요? 뭐 먹을래요?”

잠시 후, 계나리가 두 손 가득 묵직한 봉투를 들고 왔다. 이해원과 한율이 다가가 손을 내밀자, 도시락이 든 봉투를 넘기며 하는 말.

“비연예인 학생이 있으면 좋겠어요.”

“미안해요, 나리 씨. 번번이 대신 수고를 끼쳐서….”

“해원 씨에게 한 말은 아니고, 넹, 혼잣말이었어요. 흐.”

“…나리 씨는 밥 먹었어요?”

“아니욥. 어? 안녕하세요.”

한율을 향해 배시시 웃은 계나리가 박가람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박가람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계나리, 정확히는 계나리가 입은 교복을 빤히 바라보다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어스래빗의 박가람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곳 마법 학교의 기초반 선생이자 학생 케어를 담당하고 있는 계나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방에서 함께 아침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패치 정 기자에 관한 또 다른 정보, 다음 폭로 내용에 관한 이야기와 소속사와의 계약 해지를 도와줄 변호사에 관한 이야기 등등.

“변호사 수임료나 어머니 병원비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학교, 돈 많아요. 교장 쌤이 부자거든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일인데….”

“교장 쌤이 학생들 케어도 학교의 의무라고 하셨어요. 마법사 인재가 참 귀하거든요. 그러니 수련 열심히 해서, 얼른 무럭무럭 성장해주세요.”

박가람이 슬며시 손을 들어 질문했다.

“그럼 혹시 용돈도 줍니까?”

계나리와 한율의 시선이 잠시 얽혔다.

“그건….”

“장학금 제도.”

한율은 계나리의 대답을 가로챘다.

“…에 관해 건의하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요, 형? 학생이 겨우 셋이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 그럼 그 교장 쌤은 언제 뵐 수 있는 거죠.”

“글쎄요…. 워낙 바쁜 분이라. 그래도 다 지켜보고 계세요.”

박가람의 시선이 계나리의 손가락을 따라 CCTV 카메라를 향했다.

“마법의 수정구슬도 아니고 CCTV라니. 참으로 현대적인 분이시군요. 그런데 나리 씨, 지금 고등학생인 거죠?”

“넵.”

박가람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요즘 학교에선 어떤 아이돌이 제일 인기가 많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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