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5화 (205/427)

* * *

[어스래빗, 이태원 고급 단독주택으로 이사! 시세는]

[인기 보이그룹 어스래빗이 지난 23일 이태원에 있는 고급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어스래빗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작년 12월에 매입한 해당 주택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중략).

한편 서한율은 해당 주택 외에도 이촌동 아파트와 경기도 별장을 소유하고 있으며 최근엔 부모님으로부터 강남과 영등포에 있는 빌딩 두 채를 증여받았다고 알려졌다.]

-언제 알려졌죠...? 처음 듣는데요...?

-다른 기사 보니까 얘 부동산 자산만 6백억 추정된다던데. 엄마가 갖고 있던 제일 비싼 빌딩 두 개 넘겼다고

ㄴ미친;

ㄴ더 놀라운 건 뭔 줄 앎? 대출 1원도 안 받은 순수 자산이란 거임ㅋ

ㄴ이젠 박탈감도 안 느껴진다

-멤버들은 진짜 좋겠다 거의 공짜로 좋은 집 살아서

-임대료 수익으로 한 달에 몇천만 원씩 통장에 찍히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ㄴ돈이 아니라 그냥 숫자로 보일 듯

-돈이 그렇게 많으면 자랑 그만하고 기부나 해라 어린노므ㅅㄲ가ㅡㅡ

ㄴ많이 합니다. 세금도 착실히 다 내고요.

-멤버들이랑 같이 살고 싶어서 일부러 큰 단독주택 사서 리모델링까지 했다는 거 보고 얘는 진짜 서민이랑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걸 느낌ㄷㄷㄷ

-서한율 사위 삼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ㄴ따님이 비슷한 수준의 재산과 미모를 겸비해야 합니다.

-만 19살 재산이 6백억;

-은행 돈으로 건물 사서 시세 차익으로 부자 된 자칭 톱스타들은 얠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ㄴ부모 잘 만나서 좋겠다?

ㄴ별 생각 안 듦.

ㄴ나한테 주면 저거 담보로 다른 건물 사서 리모델링하고 존나 비싸게 되팔 텐데.. <이 생각부터 하겠지.

-애들아, 건물은커녕 용돈도 넉넉히 못 줘서 엄마 아빠가 미안해ㅜ.ㅜ

ㄴㅠㅠ

ㄴㅜㅜㅜㅜㅜ

ㄴ아이돌 기사 보고 댓글 달 시간에 일이나 하세요.

-형호 현실에서도 찐 부자였네

-난 얘 보면 오다리 루머 밖에 생각 안 나

ㄴ진짜로 그중에서 사귄 애 한 명은 있지 않을까?

-이제 웬만한 여자애들은 돈 노리고 접근한다 이 소리 들을까 봐 서한율한테 친한 척도 함부로 못 할 듯;

“남석 씨, 써한 재산이 6백억이래.”

어스래빗 숙소. 차남석은 길우성이 내민 핸드폰을 힐끗하고선 다시 프라이팬으로 시선을 옮겼다. 치이익.

“그런데?”

“빌딩 받은 기념으로 피자 사달라고 하자. 이번에 도레미에서 나온 신제품 되게 맛있어 보이던데, 포장하면 30%까지 할인해준대.”

“네 돈 주고 사 먹어.”

“이건 몇 인분이야?”

“2인분?”

“앗싸아.”

“너 준다곤 안 했다.”

“국은 없어?”

“…….”

“써한이랑 가람이 형은 아직도 자나?”

길우성은 어슬렁어슬렁 서한율의 방으로 향했다. 달냥이 드나드느라 열린 문 사이로 조용히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활짝 열었다.

“잉? 어디 갔어?”

이번엔 박가람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가 살며시 열었다.

“…잉? 이 형님은 또 어디 갔어?”

욕실에서 나와 뒤를 지나던 강보배가 대답했다.

“가람이 형? 아침 일찍 한율이랑 대충 차려입고 나가던데?”

“둘이서만?”

“응, 7시쯤에. 남석이 넌 뭐 만들어?”

강보배가 주방에 있는 차남석에게 다가갔다.

“닭가슴살 볶음밥.”

“나도 먹어도 돼?”

현재 9시 32분. 시간을 확인하던 길우성은 휙 고개를 돌려 외쳤다.

“안 돼, 내 거얏!”

“넌 나가서 피자나 사 먹어.”

잠시 후, WB래빗 엔터테인먼트.

한율은 인사를 하며 어스래빗 연습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안녕, 한율아. 한집에 사는데 여기에서 아침 인사를 하는구나.”

“한두 번인가요.”

“그나저나 아침부터 뭐 그런 기사가 나냐. 아이돌 숙소 이사 정보는 알아도 안 내보내는 게 암묵적인 룰 아니었나?”

“조회 수가 고팠나 보죠.”

한율은 캐비닛으로 향하며 이건우에게 물었다.

“운동기구는 언제 온대요?”

“오늘 오후에. 도착 한 시간 전에 연락해준다고 그랬으니까, 내가 숙소로 가서 받을게.”

“네. …넌 뭘 그렇게 빤히 봐.”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율을 위아래로 훑던 길우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냐?”

“왜?”

“완언이랑 하신이랑 저녁 먹기로 했거든. 너도 99즈 멤번데,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끼었잖아.”

“아아. 너무 늦게까지 노는 거 아니면 괜찮아.”

“흐. 드디어 보드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되겠군. 2대 2로 편도 가를 수 있게 되었어.”

이건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 애들이지만 참 건전하다.”

한편 그 시각, 인터넷 언론사 누구패치 사무실.

“정 기자님, 손님 오셨는데요?”

“네? 손님이요?”

정 기자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는데.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 정 기자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사무실에 있던 다른 기자들도 무심코 그쪽을 바라봤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슥. 이해원이 쓰고 있던 모자와 마스크를 벗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정선지 기자님. 이해원이라고 합니다.”

작은 사무실이 술렁거렸다.

이해원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오늘 아침, 명상 센터에서 서한율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별장에 갇혔던 내가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니, 은혜는 갚아야겠지?』

자신과 이채현 사이의 일은 이미 폭로를 통해 잘못을 밝혔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의 복수를 도우며 그 이상 공격하고 싶진 않았다. 자신 또한 이채현에게 스폰을 받으며 부당한 특혜를 받는 등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그래서 다른 걸로 은혜를 갚고자 한다.

“VEL 엔터테인먼트 실상에 관해 제보할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시간 괜찮으신가요?”

둔해서 못 느끼나?

‘잠깐이면 된다더니.’

박가람은 입을 내밀며 툴툴거렸다.

아침에 계나리와 인사하고 밥을 먹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계나리가 박가람의 마나 유동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기초반 선생의 말이라 박가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좀… 헤매는 감이 있네요. 다시 해보실래요?』

『집중.』

『자, 차근차근히 따라오세요.』

이렇게 한 번이 두 번 되고, 시범 따라 세 번 되고.

『옳지, 좋아요. 지금 거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다섯 바퀴 연속으로 해볼게요.』

마지막 유동을 마치고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정오였다. 명상센터에 남은 것도 서한율뿐이었고.

『이렇게 집중할 수 있으면서 그동안 왜 안 했어요, 형.』

그러고서 서한율은 잠깐 쉬었다가 출근하라며 박가람만 두고 가버렸다.

‘그래도 내가 두 살 위 형인데, 어? 형을 막, 어? 서한율 그 녀석, 은근히 형들을 아무렇지 않게 부리는 그런 게 있단 말이지.’

박가람은 따뜻한 방바닥에 편히 드러누워서 TV를 보다가 허기를 느끼곤 일어났다. 자신이 어질러놓은 걸 간단히 정리하고 난 뒤 센터를 나왔다. 서한율의 당부대로 문을 이중으로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삐리릭, 철컥. 서늘한 복도에 자물쇠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여기 3층엔 다른 사람이 없나?’

이곳에 온 건 이번이 고작 두 번째지만, 3층에서 다른 인기척을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았다.

호기심이 생겨, 박가람은 계단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쪽엔 IT업체로 보이는 사무실과 미용실이 비스듬하게 마주 보고 있었는데, 둘 다 철제방화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조심스레 귀를 대봐도 조용했다. 명상센터 맞은편에 있는 디자인 공방도 마찬가지.

‘간판은 붙어 있는데, 폐업한 건가? 아니면 교장이 여기 3층에 있는 사무실을 전부 빌렸나? 대체 어떤 사람이지?’

의문을 품은 채 건물을 나온 박가람은 숙소로 향했다. 숙소 앞엔 사생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모여서 경찰에게 설교를 듣고 있었다.

아무리 연예인이 좋아도 사는 집까지 찾아오는 건 올바른 팬심이 아니다, 좋아한다고 따라다니면서 정작 상대방에게 폐를 끼치는 건 너희들의 이기심이다, 부모님이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으냐 등등.

‘죄송합니다, 경찰 아저씨.’

박가람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

잠시 후,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박가람은 유호의 작업실을 찾았다.

“리더, 점심 먹었어?”

“아니, 아직. 같이 먹자고?”

“아니? 그냥 물어본 건데. 나 아직 배 안 고픔.”

“그래.”

유호는 박가람에게서 고개를 돌려 잠시 멈췄던 미디를 재생했다. 박가람은 뒤에 놓인 소파에 앉아서 유호가 작업하는 걸 구경했다. 그러다 유호가 쌀 음료를 집었을 때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님.”

유호가 박가람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어.”

“혈액순환 안 되는 느낌 받은 적 없어?”

“혈액순환?”

“특히 왼손.”

“왼손?”

유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왼손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멤버들처럼 유호 역시 왼손 검지에 팀 반지를 끼고 있었다.

유호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싸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는데? 왜?”

분명히 리더도 마법사의 소질을 지니고 있다 들었는데. 그리고 저 반지에도 주변에서 흡수한 마나를 착용자가 잘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는데.

‘혹시 둔해서 못 느끼나?’

유호가 미간을 구겼다.

“왜 그런 이상한 얼굴로 쳐다봐.”

그날 오후,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과 사회뉴스란 메인.

[[단독] MOHE 이해원, VEL엔터테인먼트 실상 폭로]

[지난 20일 개인 SNS를 통해 이우그룹 회장 손녀 이채현과 부적절한 관계였다고 고백한 이해원이 이번엔 현 소속사인 VEL 엔터테인먼트의 실상에 관해 구체적으로 폭로했다.

(중략).

익명의 누군가가 이해원에게 보냈다는 파일에는 2018년 각종 언론 매체에 퍼진 주인결, 장원길, 2019년 정원그룹 정이장 영상을 포함해 유흥업소와 클럽 등에서…(중략).

파일에는 기사에 차마 담지 못한 엄청나고 충격적인 내용이 많았으며 이해원은 이를 모두 경찰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이돌 연습생, 데뷔했지만 빚만 잔뜩 지고 망한 아이돌을 유흥업계로 알선하거나 스폰서와 연결해주는 브로커 일을 했던 안인섭의 실체, 그리고 그의 뒷배였던 A씨와 A씨 밑에서 일했던 현 VEL 엔터 대표.

기사엔 한율이 안인섭의 클라우드에서 빼돌린 파일 내용이 요약되어 실렸다. 계나리가 이해원에게 ‘교장’의 선물이라며 메일을 통해 넘겼다.

무수한 파일 중 이해원이 등장하는 건 하나도 없었는데, 이에 대해선 이해원이 직접 언급하고 해명했다. 이채현이 이해원을 ‘그런’ 자리로 절대 나가지 못하게 한 까닭에, 애초부터 찍힐 일 자체가 없었다고.

이외에도 기사에는 안인섭이 스폰서와 연결한 아이돌 연습생 혹은 아이돌과 나눈 통화 녹취록을 포함해 이해원이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도 담겼다.

VEL 엔터 대표의 직원 상습 폭행, 매니저가 MOHE 멤버들에게 한 폭언, 안인섭이 스폰서 B씨를 통해 소리구름어워즈 수상자를 바꾸었다고 떠벌렸던 것 등등.

-기사 졸라 긴데 다 읽었다... 어질어질하다...

-그럼 이해원은 이채현 덕에 본인만 진짜 지저분한 자리에서 다 빠졌던 거네??

ㄴㅇㅇ

ㄴ그래서 폭로가 가능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해원한테 파일 보낸 사람의 정체가 더 궁금하다. 찍은 놈이 보낸 건 아닐 거 아냐

-찍는 거 걸리는 순간 목이 날아갈 텐데 모으기까지 한 거 보면 아주 작정한 건데?

-대체 얼마나 충격적이기에 기사에 못 싣고 경찰에다 넘기냐ㄷㄷ

-그랬구나^^ 소리구름어워즈 가끔 수상 ㅈ같았던 게 그래서였구나^^

ㄴ원래 받아야 할 팀이랑 잘못 받은 팀 이름은 왜 안 밝힘?

ㄴ둘 다 VEL과 전혀 관계없는 곳이라 괜히 이 일로 피해가 갈까 봐 일부러 밝히지 않은 거라고 나왔잖음ㅡㅡ

-스폰 받고 뜬 애들 실명 다 밝혀라. 애꿎은 잘못된 피해자 양산하지 말고

ㄴ통화 녹음 파일만 있는 거라서 정확히 누구랑 통화한 건지 특정하기 힘들다고 나왔잖음ㅡㅡ

ㄴ너튜브에 올리면 누구 목소린지 주변인이나 팬들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ㄴ안인섭한테서 스폰 소개받은 애들 이 기사 보자마자 알아서 몸 사릴 듯

-여긴 완전히 끝났네

-이참에 싹 뿌리 뽑자, 더러운 것들

“이래서 오디션 합격했다고, 스카우트 받았다고 무조건 좋다고 도장부터 찍으면 절대 안 돼. 특히 중소나 신생 같은 경우엔.”

“…….”

“왜 째려보고 그래, 길우성. 너희는 크래 선배님들이 딱 자리 잡은 좋은 회사잖아. 대표님도 스엔 레이블 대표 출신이고.”

이태원에 있는 큰 고깃집. 한율과 길우성, 스카이러너 하신과 그레이트7 완언은 개별실에 자리 잡았다.

길우성이 울컥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래, 나 스엔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아니,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치이익. 기본 반찬 세팅을 마친 직원이 달궈진 불판에 고기를 올려놓았다. 한율과 완언은 둘이 떠들거나 말거나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음료는 뭐 마실래?”

“술이 고프기는 한데…. 한율이 넌 술 마시면 안 되지?”

“어. 대리 부르기는 조금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내 차에 타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럼 사이다?”

“어.”

“그럼 난 이거. 너희도 그만 싸우고 마실 거 골라.”

“이거 먹고 너희 숙소에 놀러 가도 돼?”

한율과 길우성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외부 방문객 허용은 이삿날 딱 하루였어.”

“하필 그날 스케줄이 있어서…. 누구누구 왔어?”

“많이는 안 왔어. 낮엔 스타믹스 지은이 형이 잠깐 왔다 갔고, 저녁엔 우리 백업 댄서분들이랑 레몬사이다 쌤, 원카운트 찬형 선배님, 또….”

“배우 박현우. 얘네 누나 남자친구.”

“아, 그분.”

찰칵.

“우성이 못생기게 나왔다.”

“원래 못생겼어.”

“이프림한테 이를 테다.”

“왜, 길우성 정도면 우리 쪽에서도 평타 이상인데. 콧대도 잘생겼고. 원래 네 거 맞지?”

“그럼 내 거지 남의 거겠냐. 흐. 엄마가 빚어준 거다?”

“좋아한다.”

“음료 고르라니까.”

직원이 퇴장하고 나서도 그들은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다. 지난주부터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안 좋은 이슈에 대해선 피했다. 아무리 개별실이라 하더라도, 어디에서 누가 들을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완언은 다음 주부터 일본 활동이고, 너희도 리얼리티 찍으러 유럽 가고. 나 혼자 국내에서 뭐 하냐.”

“스카이러너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휴식기에도 바쁜 건 인기 많은 멤버들 한정이고, 난 한가해. 이렇게라도 나올 일 없으면 매일 숙소에 처박혀서 게임만 한다고. 아니면 물리치료 받으러 다니거나.”

“취미라도 만들어. 면허는 땄어?”

“아….”

하신이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쌌다. 그가 우울한 얼굴로 하는 말.

“우리 팀은 올해까지 운전면허 취득 금지야.”

“뭐?”

“왜?”

“면허 따면 자연스럽게 차 사고 싶어지고, 차 사면 딴생각 많아진다고 안 된대. 교통사고 위험도 있고.”

“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희는 땄어? 서한율 빼고.”

“후.”

길우성이 씨익 웃더니 지갑을 꺼냈다. 하신이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땄네, 땄어.”

“짠.”

“봐도 돼?”

“그럼!”

길우성은 운전면허증을 자랑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 신분증 보여주세요~ 라는 얘기 들으면 면허증 내밀 거다? 후후.”

“그렇게 좋냐.”

길우성이 느끼하게 웃으며 나름 멋진 포즈를 취했다.

“진짜 어른이 된 기분? 멋있잖아.”

“…….”

“으아…. 나도 따고 싶다….”

“나도.”

“완언, 나랑 같이 학원 다닐래?”

“면허 취득 금지라며.”

“몰래 다니는 거지. 너희는 학원 어디 다녔냐?”

“써한이 다녔던 곳.”

“거기가 어딘데?”

“호 형이 다녔던 곳?”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알아….”

저녁을 먹고 나서 그들은 보드카페에서도 한 시간 정도 놀았다. 한율의 차는 그레이트7 숙소와 스카이러너 숙소를 들른 뒤 WB래빗으로 향했다.

“일찍 만나서 그런가. 그렇게 먹고 놀았는데 10시도 안 됐네.”

“연습은 몇 시까지 할 거야?”

“1시. …야, 써한. 아침에 가람이 형이랑 어디 갔다 왔냐?”

힐끗. 한율은 길우성에게 짧게 시선을 던지곤 대답했다.

“명상센터.”

“…무슨 센터?”

앞으로 수시로 드나들 장소다. 함께 사는 멤버들에게 숨기거나 거짓말로 둘러대는 게 더 피곤한 일이라, 반만 솔직히 말하기로 박가람과 사전에 입을 맞췄다.

“명상센터. 차도 마시고 명상도 하면서 조용히 생각 정리하는 곳이야.”

길우성은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거길 왜 가람이 형이랑 가?”

“안 될 건 또 뭔데.”

“아니, 안 될 이유는 없는데… 좀 뜬금없이 느껴져서?”

“형이 차분하게 마음 다스리는 방법을 물어봐서 겸사겸사 데려간 거야.”

길우성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람이 형과 차분이라니. 쉽게 매치가 안 되는 단어구먼?”

“형이 겉으론 까불대도 속은 여리잖아. 툭하면 울고.”

“아, 그건 인정. 아냐? 전에 형, <서울 구미호> 보면서도 울었던 거? 민해진이 여우 구슬로 슬호 살리고 대신 죽었을 때, ‘형호 저놈은 왜 안 우냐! 그런 표정 지을 바엔 차라리 울어!’ 이러면서 본인이 울더라.”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차는 WB래빗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남석이 형한테 들은 것 같다.”

“그 센터, 나도 가도 돼? 궁금하당.”

“안 돼.”

“왜지?!”

“소수 회원제로 운영되는 작은 곳인데 이미 정원이 다 찼어. 센터장도 부업으로 하는 거라 자주 자리를 비우거든.”

정말일까. 옆에서 길우성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한율을 바라보다가 볼멘소리를 냈다.

“넌 그런 곳 어떻게 알았는데.”

“아는 선배님 통해서.”

“수상한데.”

“그만 쳐다보고 내릴 준비나 해.”

평화로운 퇴근길이었다

이해원의 제보로 작성된 기사는 앞서 터뜨린 고백과 폭로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두 연예인과 대기업 회장 아들의 만행 영상이 포함된 자료. 거기에 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대중의 호기심을 제대로 자극한 까닭이었다.

이해원에게 파일을 받은 경찰은 과도하게 쏟아지는 대중의 관심 탓인지, 하루 만에 안인섭과 VEL 엔터 대표를 불러 조사했다.

[성접대 브로커 혐의 안인섭, 오늘 경찰 조사받아]

[VEL 엔터테인먼트 대표 오늘 경찰 소환 조사]

그러나 모든 일이 올바르게 풀리진 않았다. MOHE 멤버와 친분이 있어 보였다는 이유로, 억측이나 악플러의 짜깁기로 인해 스폰서 소개를 받았다는 ‘카더라’ 루머 피해자가 나오기도 했다.

-당당하면 고소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임

-얼굴도 실력도 별론데 갑자기 뜨면 뭐다?

-얘 ㅇㅇㅅ이랑 같은 학원에 다닌 적 있음

-누나, BJ로 전향해서 썰 좀 풀어줘 웬만한 아이돌보단 수입 더 좋을걸? 늦기 전에 홧팅!

-잘만 활동하다가 어떻게 딱 이 타이밍에 아프실까?ㅋㅋㅋ

악성 루머는 당연히 크리스탈 래빗과 드림래빗에게도 스멀스멀 기어 왔지만, WB래빗은 언제나처럼 누구보다 빠르게 ‘악플 및 허위사실 유포 시 강경 법적 대응’ 공식 입장을 내놨다.

27일 오후, 명상센터.

계나리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안인섭이 통화 녹음 파일은 자기 거라고 인정하되, 영상 촬영은 절대 본인 짓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고 있어요.”

“찍힌 사람들 증언을 대조하면 쉽게 밝혀질 텐데?”

의문을 표한 한율은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이해원을 의식하곤 존댓말로 덧붙였다.

“무서워서 일단 잡아떼고 보는 걸까요?”

“그런 것 같아요. 정원그룹의 정이장이 안인섭을 죽여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거든요. 처음 영상이 퍼졌을 때 의심 대상에 안인섭이 있기도 했고, 장원길과 주인결 쪽과도 연락해 확인까지 마쳤나 봐요. 영상이 찍힌 자리에 늘 안인섭이 있었다는 걸.”

“…….”

이해원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상황이 이렇게 될 걸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으나, 안인섭이 합당한 처벌 이상으로 크게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해원이 형 계약 해지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VEL 엔터 실상이 만천하에 까발려진 이상, 재판으로 끌어봤자 질 게 뻔하니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까요?”

“자료 파일 중에….”

이해원이 입을 열었다.

“저랑 사장님, 이우그룹 관계자가 나오기는커녕 언급되는 파일이 하나도 없던데. 우연 아니죠?”

“물론이죠. 그나저나 노트북 압수당해서 어떡해요?”

“검사만 하고 금방 돌려준다니 괜찮겠죠.”

“지금까지 그 노트북으로 검색했던 거, 들어갔던 페이지, 설치했던 프로그램, 다운 받았던 파일 죄다 낱낱이 살필 텐데요?”

계나리가 걱정되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었다. 제 나름대로 이해원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한 번도 이상한 걸 설치하거나 받은 적 없으니 괜찮아요. 드라마나 영화 볼 때만 썼었거든요.”

“아니, 그럼 그 비싸고 좋은 노트북을 산 보람이…?”

“제가 산 건 아니고… 팬분이.”

“아. 팬분이.”

이해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의 연예인 생명은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가 모델로 활약하던 광고는 SNS 폭로 당일 모두 내려갔으며 MOHE와 개인 팬 대부분은 충격을 받고 등을 돌렸다. 팬 커뮤나 카페에선 탈덕 인증 영상 또는 사진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용기 내어 진실을 밝힌 이해원을 응원하는 소수의 팬이 남았으나, 그들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형이 이채현 힘으로 광고나 프로그램, 드라마에 섭외되었다는 건 형의 추측일 뿐이라, 그 건에 관해선 경찰조사가 들어가도 이우그룹 측이 나서서 부정할 거예요. 그러니 너무 크게 걱정하지 말아요.”

“응. 앞으로 남은 일들이 있지만… 두 사람과 교장 선생님 덕분에 큰일은 일단락된 것 같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해원이 고개를 숙였다. 계나리가 두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이게 다 미래를 위한 투자인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주 필요할 때 외엔 외출을 자제하는 게 좋겠어요. 이번엔 앙심을 품고 형을 찾아다닐 것 같거든요.”

“그렇게 할게.”

“슬슬.”

계나리가 자신의 노트북을 꺼내며 말했다.

“병원에서도 이우그룹 경호원들을 철수시키도록 하는 게 좋겠어요. 이채현 덕분에 지저분한 자리에서 다 빠졌으니 진짜 둘이 사귄 거 아니냐, 이채현만 진심이었고 해원 씨가 철저히 이용한 거 아니냐로 여론이 기울고 있거든요. 이 이상 정말 이용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 같네요.”

“믿을 만한 경호업체는 알아봤어요?”

“네. 첫 번째론 여기에요.”

타닥. 노트북 모니터에 한 경호업체 홈페이지가 떴다. 한율은 홈페이지에 나온 경호업체 대표와 직원들의 이력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이해원을 돌아보았다.

“…….”

이해원이 고마움과 여러 감정이 담긴 얼굴로 한율과 계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형이 더 잘 살펴야죠.”

이해원이 미소 지었다.

“응.”

한편 그 시각, 다른 손님과 직원이 없는 2층 카페.

[안녕하세요! 생방송 <뮤직센터> MC 유호!]

[은수입니다! …와! 오늘따라 정말 화사하시네요! 따뜻한 봄 향기도 물씬 나는 것 같은데요?]

핸드폰 속, 파스텔 톤으로 꾸며진 작은 세트장에서 음악방송 MC들이 활발하게 떠든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들과 함께 미소 짓던 이해원의 빈자리는 이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 정선지 기자, 도착했습니다.”

“…….”

이채현은 핸드폰 전원 버튼을 누르곤 고개를 들었다. 입구 앞. 인터넷 언론사 누구패치의 정선지 기자가 굳은 얼굴로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서 기다려. 경호원들 전부 데리고.”

“안 됩니다. 회장님 지시입니다.”

“그럼 좀 떨어지기라도 해. 답답해.”

“네.”

비서가 경호원들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는 동안,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곧장 다가온 정 기사가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안녕하세요, 이채현 씨. 제가 그렇게 보고 싶으셨다고요.”

“긴말하지 않고 물을게. 너.”

이채현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정선지의 눈을 직시했다.

“이해원하고 무슨 사이야.”

“하!”

정선지가 크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바쁜 사람 불러내서 고작 한다는 말이, 전 남친 여자관계….”

촤악!

…툭, 투둑.

“…….”

난데없이 물세례를 받은 정선지는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얼굴과 상의가 흠뻑 젖었다.

이채현이 빈 컵을 내려놓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정선지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지만, 이채현은 태연하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곤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다, 멈칫. 담배와 라이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너랑 잡담할 시간 없으니까 묻는 말에만 간단명료하게 대답해. 너도 내 얼굴 오래 보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이채현을 노려보는 정선지의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

“이해원이 너한테 보여주고 경찰로 보낸 파일. 누가 보낸 건지 들었어? 아니면 짐작 가는 단서는?”

“내가 그걸 왜 대답해야 하는데?”

“그래, 알 리가 없지. 찌라시나 양산하는 기레기 따위에게 정보 출처가 뭐가 중요하겠어. 그렇지?”

“이보세요, 이채현 씨!”

“아는 거 없으면 꺼져. 너랑 더 볼일 없어.”

“아니? 난 당신한테 볼일이 넘쳐흐르는데? 너! 13년 전에….”

까딱. 이채현의 손짓에 경호원들이 움직였다.

“이거 놔요! …야! 이채현…!”

정선지가 끌려가며 바락바락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채현은 그 소리를 깨끗하게 무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우그룹의 기밀 자료를 담보로 협박해 대규모 방공시설을 짓게 한 해커가, 이해원을 건들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그것도 이상한데, 이번엔 이해원의 폭로를 도울 파일까지 보냈다.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 그 안엔 이해원이 곤란해질 법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파일을 보낸 자가 해커와 동일 인물이란 사실은 이해원의 노트북 분석을 맡은 경찰, 그리고 이우그룹이 고용한 해커들을 통해 확인했다. 메일을 보낼 때 사용한 경로나 도중에 판 함정 등에서 나온 시그니처가 그와 유사하다고.

여기에 마치 투명 인간처럼 삼엄한 경비를 뚫고 경고나 요구사항 자료를 직접 놓고 가거나, 정이장 영상을 까마귀를 통해 제보하는 등 미스테리한 행동까지.

‘대체 어떤 인간일까. 지금 이해원을 꼭꼭 숨겨주는 것도 그 작자겠지?’

이해원이 25일, 누구패치에 도착했을 때의 동선을 CCTV와 블랙박스 등을 통해 역추적했다. 그러나 도중에 여러 대의 CCTV가 연속으로 전원이 꺼져 있거나 오류를 일으켜 찍히지 않아 놓쳤다. 경찰서를 나와 어딘가로 향하던 동선의 CCTV 또한 마찬가지.

‘이번 일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면 알아서 나오겠지만….’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

이채현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곤 선글라스를 꼈다.

‘이해원. 내 손에 잡히기만 해.’

그녀가 떠난 자리엔 피우지 않은 담배와 라이터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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