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427)

* * *

밤 9시. 어스래빗 멤버들이 <서울 구미호> 마지막 화를 보기 위해 안무 연습실로 모였다.

강보배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드라마는 한 편도 빠짐없이 다 봤어, 한율아.”

“현미나 선배님이 나와서요?”

강보배는 어릴 적부터 배우 현미나의 팬이라고 밝히며, <객귀> 종방연에 참석하는 한율에게 현미나의 사인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강보배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닌데?”

이건우가 웃으며 놀렸다.

“반응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어?”

들어오자마자 선반 쪽을 기웃거리던 길우성이 큰소리를 내더니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누구야!”

“뭐가.”

“……?”

“낮에 써한이 가져온 빵. 나중에 먹으려고 두 개 따로 빼서 여기에 뒀는데 하나가 없어졌어!”

부스럭. 길우성이 남은 빵 하나를 든 채 두 눈을 부릅떴다.

“누구야. 누구냐고.”

“저놈의 막내가 왜 날 보면서 묻는 거지? 응?”

시선이 마주친 박가람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일어났다. 그가 두 손을 허리에 얹으며 당당히 대답했다.

“그래, 내가 먹었다!”

“아니, 이 형님이?!”

“봉지에 이름이라도 써두지 그랬냐! 난 거기에 있기에 ‘아, 남은 빵이구나!’ 해서 먹은 것뿐이다!”

쿵탕쿵탕.

“아니, 뭐 이런 뻔뻔한 사람이 다 있지?! 남의 걸 먹었으면 사과부터 해야 할 것 아니요!”

“내일 내가 세 개 사주마!”

“다섯 개!”

“알았다!”

“둘이 뭐하냐….”

“이제 시작한다. 앉아.”

한율은 예전에 팬에게 선물 받은 방석을 깔고 편히 앉았다. 유호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낮에 VOD로 15화 봤는데, 액션 씬 장난 아니더라. 촬영할 때 다치진 않았어?”

어제자 방송 마지막 즈음, ‘형호’는 ‘진호’와 다시 크게 맞붙었다. 껍데기만 진호인 줄 알았던 그자는 진호의 기억까지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수백 년 전, 구슬을 빼앗겼을 당시의 기억을 제외하곤.

“약간 타박상을 입긴 했지만 괜찮았어요. 그것보다 아픈 척하면서 딕션이랑 딜리버리 잡는 게 더 힘들더라고요. 호흡은 흐트러지되 그 두 개가 우스꽝스러워지면 안 되니까. 그렇다고 너무 연기 티가 나도 안 되고.”

유호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그렇게 격하게 싸우다가 다치면 너무 아파서 한마디도 제대로 안 나올 텐데. 드라마는 참 어렵구나.”

“그래서 드라마잖아요.”

광고가 끝나고 <서울 구미호> 마지막 화 방송이 시작되었다.

흑호로 전락한 진호를 자신의 손으로 소멸시킨 형호.

민해솔과 똑같이 생긴 또 다른 흑호에 의해 함정에 빠졌다가, 민해솔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벗어난 슬호.

어릴 적 사고로 헤어진 쌍둥이 동생이 사실은 흑호였다는 것, 아버지 역시 친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란스러워했으나 슬호를 도와 흑호를 처리한 민해솔.

“여기 창덕궁 맞지? 그림 진짜 예쁘게 나왔다. 이제설 선배님 코트도 한복 느낌 나고.”

“두루마기 코트래요.”

“그런 것도 있구나.”

“멀리서나 위에서 구도 잡았을 때 서울 야경까지 쫙 보이니까 더 멋있다. 조명팀이랑 카메라팀 진짜 고생했을 듯.”

“네, 다들 고생하셨죠.”

한율은 촬영 당시를 떠올렸다.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다, 글로벌 OTT를 통해 전 세계에 동시 방영되는 작품이다 보니 제작사에서 욕심을 부렸다. 배경으로 나오는 서울의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서울 여기저기에서 한밤중에 액션 씬을 찍었다.

“닷새 내내.”

“히익.”

타앙. 총성이 울렸다. 흑호를 부리는 자를 향해 결정타를 날리려던 슬호가 무릎을 꺾으며 쓰러진다.

[크흑…!]

“…헉, 안 돼!”

“아…. 꼭 저런다니까….”

조용히 TV에 집중하던 멤버들이 동시에 탄식했다.

슬호의 뒤에 서 있는 건, 얼굴의 절반이 여우처럼 시시각각 일그러지는 민해솔.

[쿨럭.]

민해솔도 크게 흔들리더니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던 흑호의 타다만 그림자가 피에 섞여 나왔다. 치이익…. 그제야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진다.

“조금 전 그 흑호구나. 진호처럼 완전히 재가 되지 않아서 뭔가 싸하다 했어, 내가.”

“아이고, 민 경장님…!”

[민 경장님…!]

흑호가 파고들었던 충격 탓에 연신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는 민해솔. 바닥에 피가 흥건히 번지고, 그녀의 흐려지는 눈빛이 슬호를 향한다.

[…, …….]

민해솔의 눈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는 슬호, 슬호의 목을 뒤에서 금방이라도 내리칠 듯한 거대하고 날카로운 발톱이 비친다.

“형호야, 뭐 하냐!”

박가람이 한율의 팔을 두드리며 TV를 가리켰다.

“빨리 들어가서 도와주란 말이다!”

“저기까지 도착하려면 시간 좀 걸리지 않을까? 형호도 다친 상태잖아.”

“오, 슬호가 스스로 막았어.”

“역시 어른 구미호. 레벨 무시 못 하죠?”

“…….”

말 많은 멤버들이 떠들어대서 도통 집중이 안 된다.

한율은 제대로 된 모니터링은 혼자 조용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비웠다.

“형호 왔다.”

[…….]

상처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형호가 죽어가는 민해솔을 바라본다. 수백 년 전, 슬호를 살리고 죽어가던 민해진의 모습이 투영된다.

[‘죄송해요…. 절 용서하지 마세요…’.]

형호가 천천히 민해솔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괴로워하는 민해솔의 머리와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어린 민해진을 바라보던 눈빛으로.

“설마.”

박가람이 한율의 덥석 팔을 잡았다. 그가 <서울 구미호> 프로그램 톡창을 도배하는 말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네 구슬로 살리려는 거야?! 꼬리는 왜 죄다 꺼냈어!”

-안 돼 형호야

-안 돼ㅜㅜ

-설마 자기 구슬로 민 경장 살리려는 건 아니지?

-안 돼에에에에에ㅠㅠㅠㅠㅠ

형호는 조용히 민해솔의 눈을 감겨주었다. 민해솔의 눈물이 얼굴에 튄 피와 섞여 눈가 옆으로 흐른다.

반짝. 형호가 끼고 있던 파란색 피어싱이 은은하게 빛났다.

<서울 구미호>의 결말 과정은 여느 장르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힘든 싸움, 함정, 지금까지 복선처럼 뿌렸던 단서를 이용한 반전, 엿보인 희망, 절망, 분노, 사투… 주연의 죽음을 암시한 뒤 이뤄낸 악연의 끝.

오랫동안 수많은 구미호의 목숨을 앗았던 악귀는, 빌런답게 그럴싸한 저주의 말을 남기곤 소멸했다.

밤이 물러난다. 서울의 하늘이 새벽빛으로 옅어진다.

그들이 걸었던 곳, 머물렀던 곳, 지금껏 흑호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람들이 발견된 장소, 간밤에 있었던 싸움의 흔적들 역시 환하게 물들었다.

기적처럼 다시 눈을 뜬 민해솔과 슬호. 두 사람의 모습도.

“형호 어디 갔어?”

“형호… 죽은 거야…? 구슬 넘기고?”

“민 경장님은 살아났는데 형호가 없어….”

박가람이 이번엔 한율의 멱살을 살짝 잡았다.

“너 어디 갔어!”

“…계속 보면 나와요.”

드라마는 3개월 후, 에필로그로 넘어갔다.

하나 가지실래요?

서울지방경찰청.

저벅저벅. 민해솔이 경찰 로고가 새겨진 큼지막한 상자를 품에 안고선 로비를 가로지른다. 바쁘게 움직이는 경찰 동료들 사이를 지나 사무실에 도착. 쿵. 최슬호가 사용했던 책상에다 상자를 내려놓았다.

책상엔 최슬호의 명패나 책 등 그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가 미국에서부터 가져와 장식했던 작은 여우 인형은 이제 민해솔의 책상에 놓여 있었다.

장기 미제 사건은 과거 작성된 사건 자료를 처음부터 세세하게 검토하는 게 주된 일. 그런 까닭에 장기미제사건팀은 다른 형사팀보다 조용했다.

민해솔이 깨끗한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펜을 들었다.

[2006년 ○○아파트 시체 유기 사건].

팀원은 캐비닛을 열어 관련 자료를 꺼냈다. 그 아래에 진열된 수사 종결 바인더 사이, ‘1999년·2017년 강남 일가족 연쇄살인 사건’ 파일명이 잠시 화면에 잡혔다.

끼익, 철컹.

캐비닛이 닫혔다.

씬은 봄맞이 단장에 나선 한대 백화점으로 바뀌었다.

슬호, 형호가 진호와 마주했던 점장실.

죽은 남편의 뒤를 이어 한대 백화점 사장직에 취임한 최형호의 모친이 방문했다. 점장과 인사를 나누던 그녀의 시선이 잠시 방에 장식된 여우 조각상에 머무른다.

그때 걸려오는 한 통의 전화. 짧은 통화를 마친 그녀는 차분히 점장에게 양해를 구하곤 백화점을 나섰다.

병원 장례식장. 복도는 끊임없이 도착하는 근조 화환을 정신없이 옮기는 사람들과 조문객, 안을 기웃거리려는 기자들과 그들을 막는 직원들로 어수선했다.

저벅저벅. 새카만 정장을 걸친 키 큰 남자가 누구의 시선도, 제지도 받지 않으며 그들을 지나쳐 빈소로 들어갔다.

영정 사진 속 고인은 한대 그룹 회장.

들어오는 조문객을 본 상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슬호와 형호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본다.

<서울 구미호> 프로그램 톡창.

-형호야아아아아

-살아있을 줄 알았어ㅜㅜ

-오

-형호 파란색 피어싱 없다

-자, 이제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줘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수백 년 전, 형호는 민해진이 숨을 거둔 자리에서 영롱한 빛을 내는 자그마한 구체를 발견했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여긴 진호의 여우 구슬이었다. 그건 파편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작고,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약했다.

형호는 그걸 보석 안에 가두고 가공했다.

변해가는 시대에 따라 옷 장식으로, 반지로, 목걸이로, 피어싱으로. 그렇게 계속 몸에 지니고 다녔다.

[아주 작았지만, 순수한 인간의 정기와 구미호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기에 민해솔 몸속에 퍼지던 흑호의 독을 몰아낼 수 있었지.]

[그래도 아주 조금만 늦었어도 돌이킬 수 없었을 거야.]

장례식장 옥상. 평화로운 도심 풍경을 바라보던 슬호가 형호를 돌아보았다.

[고맙다.]

형호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슬호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슬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형호의 손바닥에다 제 손을 턱하니 올렸다. 그러곤 살며시 잡아서 악수.

형호가 미간을 구겼다.

[이거 말고 조의금.]

[…….]

-손 내밀면 앞발 주는 강아지냐곸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아까 조의금 따로 안 받는다고 빈소에 적혀있지 않았음?ㅋㅋㅋㅋㅋㅋ

-여우는 개과다

-ㅋㅋㅋㅋㅋㅋㅋㅋ둘이 표정 왤케 웃기냐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우리 백화점에서 망가뜨린 물건은 언제 배상할 거지? 그게 다 얼마짜린지 알아? 지금 네가 타고 다니는 고물차 열 대를 팔아도 부족해.]

탁. 슬호가 기가 막힌 얼굴로 잡았던 손을 놓았다.

[와, 나도 재벌 3세로 둔갑할걸. 서민 구미호는 이거 뭐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그래, 낸다, 내! 내가 치사하고 더러워서…!]

-형호 웃는 것 봐ㅜㅜ

-형호 유죄 암튼 유죄

-너 누가 또 그렇게 웃으래

-슬형호 케미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슬프다

드라마는 마지막으로 슬호와 민해솔의 만남을 담았다.

슬호가 장기미제사건팀 자문을 그만두긴 했으나, 두 사람의 대사와 행동에선 지금껏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 조금 더 깊어진 연인 특유의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서울 구미호> 대표 OST와 함께 촬영 비하인드 컷이 이어졌다. 악귀를 연기한 배우, 한율과 이제설, 현미나가 사이좋게 커피를 마시며 웃는 모습, 한율과 진호 역 배우가 함께 셀카를 찍는 모습, 이제설이 악귀 역 배우와 장난처럼 합을 맞추는 모습 등등.

제작진과 배우들이 모인 단체 사진과 인사 자막이 떴다.

[지금까지 <서울 구미호>를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짝짝짝. 어스래빗 멤버들이 작게 박수 쳤다.

“정말 고생 많았다, 한율아.”

“종방 축하축하.”

“드라마 재밌게 잘 봤…. 어?! 쿠키 영상!”

“…….”

“허얼. 뭐지?”

잠시 TV를 보던 멤버들이 다시 한율을 돌아보았다.

“수고했어, 하뉼.”

“감사합니다.”

우웅, 우웅. 가방에 두었던 핸드폰이 울기 시작했다. 지인들이 보낸 드라마 시청 소감이나 축하 인사가 잔뜩 들어왔다.

한율은 벽에 편히 기대어 앉아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 길우성이 조금 전 빵을 들고 옆에 와 앉았다.

“써한, 너 내일 오전에 뭐 하냐?”

“스케줄.”

“그랭.”

부스럭부스럭. 길우성이 빵을 먹으며 대놓고 한율의 핸드폰을 보았다.

“너도 진짜 인싸다. 대체 몇 명한테서 연락이 온 거야?”

“…….”

말없이 눈을 흘기자 길우성이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가람이 형, 내일 몇 시에 사줄 거야? 빵.”

막 연습실을 나가려던 박가람이 두 걸음 후진했다.

“출근 전에 사 올게.”

“같이 갈까?”

“아니, 나 아침에 갈 데 있어서. 거기 들렀다가 올 거야.”

“그랭….”

우걱우걱. 길우성은 얌전히 빵을 먹다가, 이번엔 개인 안무 연습을 하려 몸을 푸는 차남석에게 말을 걸었다.

“남석 씨, 내일 오전에 뭐 해? 일요일이잖아.”

“성당 간다.”

“라욘 형은?”

“얘랑 같이 가.”

“그랭….”

“나한테도 물어봐, 우성아.”

“보배 형은 내일 오전에 뭐 해?”

“놀아.”

길우성이 냉큼 강보배를 향해 무릎으로 걸어갔다.

“나랑 드라이브 가자! 호 형이 차 마음껏 써도 된댔어!”

“아, 미안. 생각 좀 해보고.”

“…크흡.”

“난 아마 내일 낮에 일어날 거야.”

유호가 선수 쳐서 말했다. 이건우도.

“우성아, 드라이브보다 운동이 우선 아닐까? 아니면 헬스장까지 드라이브할래? 올 땐 내가 운전할게.”

“…흐윽.”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서울 구미호> 최종화 리뷰 기사와 주연 배우들의 종영 소감 기사가 메인을 장식했다.

한율의 종영 소감은 회사의 피드백을 받아 인터뷰 형식으로 작성된 터라 아주 길었다. 기사엔 촬영장에서 최종화 대본을 들고 찍은 셀카도 함께 실렸다.

[<서울 구미호> ‘형호’ 서한율, 솔직담백한 종영 소감]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tv Mu·OTT 동시 방영 드라마 <서울 구미호> 종영 소감을 전했다.

(사진=WB래빗 엔터테인먼트 제공)

<서울 구미호>에서 구미호 ‘형호’ 역을 맡은 서한율은…(중략).]

-형호 외전 한 편 더 찍자. 제목은 <재벌 3세가 된 구미호 고등학생의 평범한 하루> 어떠냐

-우리 아기 구미호 못 잃어ㅜㅜ

-진짜 뜬금없지만 슬호랑 민 경장이랑 셋이서 놀이공원 좀 가주면 안 될까? 어떻게 놀지 개궁금해

-형호를 연기한 게 서한율님이라 더 푹 빠져서 본 것 같네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 활동 부탁드립니다! :)

-좀 어둡고 무서운 장면도 많았지만 그래도 매주 금토마다 행복했다.

-내 생애 최고의 구미호 배우

-벌써 끝나다니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형호야ㅠㅠ

-정말 수고했어, 서한율! ♡♡♡♡♡

-<달리는 예능>이랑 <뮤직마켓> 출연 기대합니다!

29일 아침. <서울 구미호> 단체 인터뷰 녹화 스케줄이 있어, 한율은 조유찬과 함께 샵으로 향했다.

“여기저기에서 인터뷰 요청이랑 대본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 한율아. 그런데 일본 팬미팅은 정말 안 할 거야? 너무 아까운데.”

“지금 제가 제일 연습량이 떨어져서 안 돼요. 이 이상 개인 스케줄로 팀 활동에 지장을 주고 싶지도 않고.”

“크으, 우리 애가 이렇게 팀을 아껴요.”

“팀에서 저만 부족해 보이면 자존심 상하잖아요.”

“…그래.”

샵에 도착하자 원장과 직원들이 드라마 종영 축하 인사를 건넸다. 때마침 샵에 있던 다른 손님들도.

“드라마 대박 난 거 축하해요.”

“드라마 재밌게 잘 봤어요, 한율 씨.”

“감사합니다.”

한율은 일일이 예의 바르게 꾸벅이곤 직원이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조유찬이 메이크업과 헤어 담당 직원에게 요청했다.

“인터뷰 동영상 찍을 거라, 단정하게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네, 맡겨 주세요.”

“한율아, 그럼 난 아침 사 올게. 음료는 커피?”

“네, 아메리카노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응.”

조유찬이 샵을 나갔다. 한율은 직원들과 편히 대화를 나누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잠든 건 아니… 죠? 자는 거로 보기엔 자세가 너무 반듯하신데?”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한율은 눈을 떴다. 거울에 비친 여성이 화들짝 과장되게 놀라더니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율 씨.”

한율도 엉겁결에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내가 오늘 샵을 온 보람이 있다! <서울 구미호> 형호 님이랑 이렇게 마주치고!”

무언가 촬영 중인지, 수선을 떠는 그녀 곁엔 VJ와 스태프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VJ의 카메라에 부착된 MBS 로고가 시선을 끈다.

“저 누군지 아시겠어요? 아, 지금 MBS <매니저의 하루> 촬영 중인데 괜찮으실까요?”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은데다가, 한율이 잘 보지 않는 프로그램 쪽 사람이라서 솔직히 이름은 모른다. 그래서 목소리와 특유의 톤으로 정보를 떠올렸다.

“네. CF에서 트럭 들어 올리시던 분 맞으시죠?”

그녀가 감격한 얼굴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그우먼 홍지설이라고 합니다. <서울 구미호> 정말 재밌게 잘 봤습니다. 살아계셔서 참 다행이에요.”

한율도 웃으며 화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매니저분은 어디에 계세요? 실례가 안 된다면 매니저분이랑 인터뷰하고 싶은데. 한율 씨를 케어하는 분에게, 우리 매니저가 노하우를 좀 배워야 할 것 같거든요.”

그때 마침 조유찬이 카페 로고가 새겨진 종이가방을 들고 등장했다. 웬 카메라가 한율을 찍고 있어서 그런지, 그의 얼굴에 경계심이 깃든다.

“저기… 어디에서 나오셨죠?”

“어머, 안녕하세요! 혹시 한율 씨 매니저분 되시나요?”

“네. 그런데….”

그러나 곧 홍지설의 얼굴과 카메라에 붙은 MBS 로고를 확인하곤 조심스럽게 변한다.

“무슨 일로….”

“어디 다녀오셨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네?”

잠시 후, 샵을 나와 스케줄 장소로 가는 길. 조유찬이 아직도 얼떨떨하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나 말실수한 건 없겠지?”

“옆에서 보기엔 잘하던데요?”

“아니, 좀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 것 같아서…. 그래도 방송 나가기 전에 컨펌 겸 보여준다고 그랬으니 괜찮겠지?”

“괜찮을 거예요.”

도착한 스튜디오엔 다른 배우들이 먼저 와 있었다. 몇 달 동안 함께 고생하고, 오늘 저녁 종방연 자리에서 다시 만날 사람들이라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단체 인터뷰는 글로벌 OTT와 너튜브에 올라갈 서비스 영상으로, 배우들은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은 촬영 비하인드를 이야기했다. OTT 측에서 특별 제작한 상품을 받기 위해 간단한 퀴즈를 풀기도.

상품은 한복을 입은 구미호 인형이었다. 크기는 30cm 정도에 꼬리도 9개씩 달려있어 부피가 컸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다들 이따가 봬요.”

“네, 나중에 뵙겠습니다.”

“다들 나중에 봅시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녹화는 두 시간 만에 끝. 한율은 구미호 인형 다섯 개를 품 안 가득 안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몇 개는 대신 들어줄까?”

“고마워요, 형.”

한율은 조유찬에게 냉큼 두 개를 넘겼다.

“이거 진짜 귀엽다, 털도 부드럽고. 한복 재질도 좋고 예쁜데?”

“하나 가지실래요?”

“괜찮아. 이미 한율이 네게 아주 큰 선물을 받았는데, 여기에서 더 욕심부리면 안 되지. 어디로 갈까? 회사? 숙소?”

“회사요.”

회사에 도착하고 나선 인형을 모두 가지고 로비로 들어갔다. 연습실에 뒀다가 숙소로 갈 때 챙겨가기 위해.

‘두 개는 집이랑 숙소에 두고, 나머지 세 개는….’

“안녕하세요, 선배님!”

마침 2층에서 내려오던 드림래빗 멤버들이 한율을 보곤 활발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와, 인형 귀엽다! 선물 받으신 거예요?”

“구미호가 한복 입고 있어.”

“귀엽당….”

드림래빗 멤버들의 시선이 한율이 품 안 가득 안고 있는 인형에 집중되었다. 눈들이 하나같이 초롱초롱 빛난다.

드림래빗 막내 멤버, 신혜란이 한율에게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선배님, 그거 한 번만 만져봐도 돼요? 꼬리만이라도 살짝.”

은보람이 먼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때 타, 안 돼.”

“네.”

한율은 괜찮다는 얼굴로 웃으며 인형 하나를 내밀었다. 신혜란이 기뻐하며 덥석 받았다.

“감사합니다! …와, 꼬리 엄청 부드러워!”

“팬분이 직접 만들어서 준 거… 예요?”

박세은이 어색한 존댓말로 물었다.

방송국도 아니고 회사에서 새삼.

“아니, OTT 쪽에서 종방 기념 겸 퀴즈 상품으로 줬어.”

박세은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구나….”

한율은 구미호 인형을 강아지처럼 살살 쓰다듬는 드림래빗 멤버들에게 말했다.

“그 인형, 드림래빗 분들에게 드릴게요.”

“진짜요?!”

“감사합니다!”

“드라마 잘 봤어요!”

“그럼 전 이만 내려가 볼게요.”

“넵!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율은 그들과 대충 인사를 나누곤 어스래빗 연습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선물 받았어?”

연습실로 들어가자 라이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조금 전 드림래빗 멤버들처럼 인형에다 시선을 고정한 채.

“귀엽다.”

“…….”

한율은 말없이 그에게 인형 하나를 넘겼다.

별일이네

30일 아침, SBC <달리는 예능> 촬영장.

<달리는 예능> 리더 격인 유기원이 아주 빠르고 정확한 발음으로 소개했다.

“아주 뛰어난 연기 실력으로 ‘어? 진짜 사람으로 둔갑한 구미호 아냐?’ 많은 시청자를 헷갈리게 했던 서울 구미호, 슬호와 형호 역을 맡은 이제설 씨와 서한율 씨, 그리고 장기미제사건팀의 카리스마 넘치는 민 경장님 역의 배우 현미나 씨 모십니다!”

한율은 이제설, 현미나와 함께 출연자들과 카메라를 향해 꾸벅꾸벅 인사하며 등장했다.

출연자들의 정신 사나운 질문 공세와 잡담이 이어지고 게스트 소개 겸 인사 시간.

“우리 제작진이 이제설 씨 섭외하려고 작년부터 노력을 많이 했대요. 올해 초에 우리가 아이돌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었잖아요?”

유기원이 자료 영상이 들어갈 법한 틈을 살짝 번 뒤 말을 이었다.

“그때 설문 패널이랑 카메라를 설치하러 간 스태프들이, 막 공연 끝내고 퇴근하려던 한율 씨 붙잡고 이제설 씨 섭외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대요. 그런데 한율 씨가 듣자마자, ‘안 될 것 같은데?’ 고개부터 저었다던데. 사실이에요?”

“네. 예전에 선배님께 물어본 적이 있었거든요. 선배님은 예능에 출연 안 하세요? 라고. 그때 선배님이….”

“아니, 그런데 한율이도 대단한 게 뭐냐면.”

다른 출연자가 끼어들었다.

“보통은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이 그런 부탁을 하면 일단 ‘네, 설득해볼게요!’라고 대답하기 마련이잖아? 그런데 듣자마자 바로 ‘안 될 것 같은데요? 힘들 것 같은데요?’ 이렇게 말했다는 게.”

“요즘 애들이 진짜 솔직해. 우리 때처럼 막 번지르르하게 말로만 이러진 않는다고.”

“같이 드라마 촬영한 제설 씨랑 미나 씨가 봤을 땐 어때요? 한율 씨가 평소에도 솔직한 편인가요?”

이제설과 현미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걸 본 출연자가 웃으며 말했다.

“봤어? 방금 제설 씨가 먼저 대답하라고 미나 씨한테 손 이렇게 하는 거?”

“아, 그러고 보니 제설 씨랑 미나 씨 동갑이죠? 서로 말은 놨어요?”

재작년 12월에 왔을 때와 다름없이 참 산만하다. 흐름에 따라 대화 주제가 휙휙 바뀌는 것도 여전하고.

“그나저나 어제 한율 씨랑 미나 씨가 SNS에 올린 사진 봤는데, 엄청 귀여운 구미호 인형을 잔뜩 안고 있더라고요. 그게 시중에 파는 게 아니라 OTT 쪽에서 특별 제작한 인형이라고 하던데.”

“네.”

제작진 쪽에서 구미호 인형이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나서서 인형을 받은 현미나가 그걸 그대로 고정 출연자 송혜지에게 건넸다.

“마침 내일이 혜지 언니 생일이라서 선물로 하나 가져왔어요.”

“와, 고마워…! 너무 귀엽다!”

툭툭. 다른 출연자 한네모가 한율의 팔을 두드렸다.

“한율이 넌 안 가져왔니? 다음 달에 우리 딸 생일이 있는데, 저거 받으면 참 좋아할 것 같거든. 정말로.”

그 얘길 들은 김중구가 바로 타박했다.

“이 양반이 지금 애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한율이랑 재작년에 처음 보고 오늘이 고작 두 번째면서.”

“괜찮아요. 회사로 하나 보내드릴게요.”

“헉, 진짜? 나 그냥 해본 말인데! 아니, 차라리 우리 애 생일에 네가 직접 와서 주면 안 될까? 그건 좀 힘들겠지?”

김중구가 팔을 걷어붙이며 또 나섰다.

“이 양반이 욕심도 정도껏 부려야지, 감히 우리 서 배우! 내가 아끼는 후배한테 무슨 짓이야!”

“선생님이 한율이 매니저세요? 차암나, 언제부터 아꼈다고!”

“얘랑 나랑 같은 헬스장 다녀! 한율아, 작년에 헬스장에서 마주쳤을 때 내가 건강 음료 챙겨준 거 기억나지?”

“네.”

“싸운다, 싸운다.”

녹화는 지난번 출연했을 때처럼 해가 질 무렵에서야 끝났다.

한율은 정말로 한네모와 연락처를 교환했다. 실은 어제 종방연 자리에 OTT 측에서 구미호 인형을 대량으로 보내주어, 5개를 더 가져왔다. 듣기론 <서울 구미호> 관련 이벤트 상품으로도 나갈 예정이라고.

“내일은 <뮤직마켓> 녹화 있는데. 숙소로 일찍 들어가서 쉬는 게 낫지 않을까, 한율아?”

한율의 요청으로 WB래빗으로 차를 몰며 조유찬이 물었다.

“어차피 내일 녹화는 오후에 하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으음…. 그래.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네.”

“아, 그러고 보니 그게 오늘이었을 텐데.”

“……?”

“호가 ACCOM에 곡 하나 줬잖아. 그쪽에서 굉장히 서둘러서, 오늘 우리 회사에서 녹음 진행한다고 들었거든.”

“곡 보낸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벌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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