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09/427)

* * *

4월 3일 금요일. 유호와 길우성을 제외한 어스래빗 멤버들은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뮤닷 우승으로 획득한 리얼리티 촬영장소로 떠나기 위해.

유호는 오늘 MBS <뮤직센터> 스케줄이 있어서 밤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기로 했다. 길우성은 이참에 맏이와 막내의 케미를 보여주는 게 좋겠다고 하여 그와 함께.

-[와, 어떻게 나를 안 깨우고 그냥 가버릴 수가 있지? 어? 이 매정한 사람들아!]

항공사 라운지. 어스래빗 멤버들 곁에는 숙소에서부터 따라온 리얼리티 프로그램 VJ와 스태프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이건우가 영상통화 속 길우성을 향해 웃었다.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안 깨웠지.”

차남석이 이건우의 핸드폰을 슥 가져갔다.

“네가 좋아하는 소고기미역국 끓여놨으니까 그거 먹고, 설거지 깨끗하게 해놔. 문단속 잘하고.”

-[고오맙다요, 행님.]

“아알았다. 서한율 너도 한마디 해.”

차남석이 한율 쪽으로 핸드폰을 돌렸다.

“연습실에 있는 내 캐비닛 열어보면 옷 몇 개 있거든? 그거 숙소 빨래 바구니에 넣어놔.”

-[그럼 넌 뭐 해 줄 건데?]

“맛있는 거 사줄게.”

-[흐흣. 콜.]

박가람이 불쑥 끼어들었다.

“막내야, 고추참치 몇 개 챙겨와. 깜빡했다.”

-[형은 뭐 해 줄 건데?]

“같이 맛있게 먹어줄게.”

-[응, 알았엉.]

핸드폰은 강보배와 라이언에게로 넘어갔다.

“이따가 조심해서 와. 여권 챙겼지?”

-[옙!]

“리더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리더도 잘 챙겨.”

-[걱정 붙들어 매십쇼, 형님!]

“걱정을 붙…? 뭘 해?”

그들은 영국 히스로 공항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에 탑승, 약 12시간을 날아 현지 시각으로 오후 5시 30분 즈음에 도착했다.

호텔로 가는 버스 안. 강보배가 감회에 젖은 얼굴로 차창 밖을 보며 말했다.

“작년 투어 생각난다. 우리 그때 뉴욕이랑 런던에서 이틀 연속으로 M/V 촬영했었잖아.”

“그때 정말 정신없었지. 첫 유럽 투어였는데 오자마자 M/V 촬영하고 공연 리허설 하고…. 공연 바로 다음 날엔 파리로 날아가서 뭐 어디 제대로 보지도, 가지도 못했잖아.”

리얼리티라 해도 정말 카메라나 분량을 의식하지 않을 순 없기에, 그들은 알아서 생각을 말로 표현했다. 이 프로그램으로 어스래빗을 처음 접하게 될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지만 이번엔!”

박가람이 제자리에서 두 팔을 번쩍 들고 까불었다.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다! 놀 수 있다! 이예에!”

…….

“반응 좀 해 줘, 이 사람들아!”

박가람이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울적한 얼굴로 입가에 두 손을 모아 작게 외쳤다.

“막내야, 빨리 와아…!”

“한국은 반대쪽이에요, 형.”

“괜찮아. 지구는 둥그니까 언젠간 닿을 거야.”

천둥소린가?

6명의 어스래빗 멤버들이 영국에 도착하기 몇 시간 전, 한국.

MBS <뮤직센터> 출연자 대기실 앞.

“은수야, 안녕?”

“어?”

진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호를 바라보았다.

“선배님 오늘 영국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유호가 머쓱하게 웃었다.

“출근하고 가라더라.”

“어쩐지…. 아무도 선배님 대신에 나올 스폐셜 MC에 대해 이야기해주질 않더라고요. 저는, 나 혼자 해야 하나? 어떡하지? 이러고 겁먹었었는데.”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말 안 했지. 여행 조심히 잘 다녀오란 인사 받고 얼마 안 돼서 ‘아, 다음 주 스케줄도 하고 갈 거야.’라고 말 바꾸기도 조금 민망하고.”

진은수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따가 또 인사해드릴게요.”

남자 MC 대기실로 들어간 유호는 큐시트와 진행 대본부터 확인했다. 대본을 중얼중얼 외우며 테이블에다 노트북을 올려놓곤 작곡 프로그램을 실행, 헤드셋을 썼다.

“호야, 옷 갈아입자.”

“네.”

그렇게 잠깐 곡 작업을 하다가, 스태프의 말을 듣곤 정리해서 가방에 넣었다.

“응, 우성아. 어디야?”

옷을 갈아입고 잠깐 짬이 났을 땐 길우성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어딜까~요?]

길우성이 폰을 든 채 한 바퀴 돌았다. 아주 낯익은 장소가 보였다.

“연습실이야?”

-[응. 서한율이 캐비닛에 있는 옷을 숙소에 가져다 놓으라고 부탁해서, 들어주러 왔어. 나 너무 착하지 않아?]

“그래, 착하다. 짐은 다 쌌어?”

괜히 자신 때문에 함께 남겨진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인다. 그러나 길우성은 평소처럼 활발하게 떠들었다. 멤버들이 비행기 혹은 방송국에 있으니, 넓은 연습실을 혼자 독차지한 것 같다고.

-[내가 아주 깜짝 놀랄 만한 안무를 만들어서 보여주겠엉.]

“응.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큰형도 일 수고해!]

“오냐. 이따가 보자.”

-[옙!]

유호는 기분 좋은 얼굴로 통화를 끊었다.

오늘 <뮤직센터> 스케줄을 끝내면 오래간만에 영국으로 가서 쉴 수 있다. 순수 여행이 아닌 리얼리티 촬영이니 아주 편하진 않겠지만, 곡 작업도 완전히 손 놓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국내처럼 사람들의 시선, 팬들의 시선, 사생 스토커들의 미행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터.

‘얼른 애들이랑 합류해서 내가 자주 가던 빵집이랑 힐링 장소 소개해주고 싶다.’

뮤닷 측 스태프가 가볍게 손짓했다.

“컷. 저흰 여기에서 잠깐 물러났다가, 공항 갈 때 합류할게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나중에 뵐게요.”

뮤닷 측 VJ와 스태프가 대기실을 나갔다. 유호도 진행 리허설을 하러 큐시트와 대본을 챙겨서 나왔다.

“어? 안녕, 친구?”

그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 아이돌이 유호를 향해 인사했다. 어스래빗보다 한참 전에 데뷔한 까마득한 선배로, 지난주에 1년 만에 컴백한 팀의 멤버, 강은인이었다.

유호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이제야 출근한 거야?”

“아뇨, 2시간 전에….”

“섭섭하다, 호야.”

강은인이 말을 자르며 과장된 리액션을 보였다.

“2시간 전에 출근했는데, 우리 대기실엘 안 온 거야?”

“네?”

내가 너희 대기실에 왜 가요. 용건도 없고 친하지도 않은데.

유호의 어리둥절한 반응에 강은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주위를 살피더니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지난주에 대기실로 놀러 오라 그랬잖아. 선배 말이 우스워?”

이건 대체 무슨 트집일까.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선배 대기실을 일일이 찾아가 인사하는 문화도 없어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마당에, 아무 용건이 없어도 후배라면 응당 선배에게 인사하러 와야 하지 않냐는 뉘앙스를 풍기다니.

유호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미처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강은인의 표정이 휙 환하게 바뀌었다.

“하하, 장난이었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사과하니까 내가 더 미안하다. 그럼 수고해.”

“네, 나중에 뵙겠습니다.”

유호는 고개를 꾸벅이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장난인지 진심인지, 그 진의를 추측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음방 MC 3년 차. 몸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 바닥엔 상식과 인성이 덜 되었거나, 혹은 성격 자체가 이상한 아이돌이 적지 않다.

아이돌은 무식하다.

아이돌은 개념이 없다.

아이돌은 사회성이 모자란 관종이다.

사람들이 아이돌에 대해 가진 부정적인 인식.

유호 자신도 아이돌이니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정말로 그런 인식을 심어주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괜히 걱정하거나 화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같은 팀 멤버들에게 말하지 않은 일화들까지 떠올리면, 자신보다 음방 MC를 오래 한 사람들이 존경스러울 지경.

‘어쨌든 이제 뮤센 MC로 서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JE처럼 끝까지 무사히 마쳤으면 좋겠다.’

몇 시간 후, 생방송 <뮤직센터> 방송 10분 전.

유호는 진은수와 함께 스튜디오 한쪽에 설치된 MC석으로 올라갔다. 일부러 근처에 자리한 두 사람의 팬들이 작게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다. 꺄아악.

유호는 와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웃으면서 그쪽에다 꾸벅였다.

그 순간이었다.

스륵.

“……?!”

움찔. 유호는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뭐였지?’

바로 지난주 퇴근길에 목격한 교통사고. 차에서 내리던 순간 온몸을 휘감았던 서늘한 바람. 그때처럼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세진 않지만, 비슷한 느낌을 품은 바람이 왼손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다 사라진 듯했다.

실내인데도.

“왜 그러세요, 선배님?”

유호가 놀란 얼굴로 왼손을 감싸자 진은수가 작게 물었다.

유호는 저를 향한 시선들을 의식하곤, 들고 있던 큐카드를 정리했다.

“아냐, 아무것도.”

MC석과 가까운 객석.

계나리는 환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슬로건을 더 힘차게 흔들었다.

[나의 호 너의 호♡유호♡]

* * *

영국 날짜로 4월 4일 토요일 오후, 런던. 유호와 길우성이 먼저 온 멤버들과 무사히 합류했다.

어스래빗은 며칠 동안 스스로 세운 계획에 따라 런던을 중심으로 여행과 휴식을 즐겼다.

유호가 어릴 적에 살았던 동네를 함께 돌아보기도 하고, 직접 요리해서 먹기도 하고, 밤에는 룸메이트 정하기 게임도 하고, 술을 마시며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카메라가 돌고 있어서 정말 적나라한 모습까지 보일 순 없지만, 그래도 가식을 많이 벗고자 노력했다.

아이돌 리얼리티를 보는 팬 대부분은 무대 위 멋진 모습만이 아닌 진솔한 모습,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마음이므로.

그렇게 한국 날짜로 4월 10일.

너튜브의 한 연예뉴스 전문 채널.

[[LIVE] 200410 어스래빗(EarthRabbit), 뮤닷 리얼리티 촬영 마치고 귀국]

[인기 보이그룹 어스래빗이 영국에서 뮤닷 리얼리티 프로그램 녹화를 마치고 오늘 10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고정 댓글] 어스래빗 리얼리티는 뮤닷에서 5월에 총 4부작으로 방송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D

“얘네 리얼리티 촬영하러 영국 갔었어?”

MBS <뮤직센터> 스타믹스 대기실.

에이플이 너튜브에서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어스래빗 귀국 현장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뮤닷 단독 예능은 데뷔 초 빼곤 못 찍었는데, 무려 유럽에서 촬영이라니. 부럽다.”

“뮤닷 예능 섭외는 자주 됐었잖아.”

“만약에 우리도 에 나갔으면.”

JE가 무심한 얼굴로 툭 말했다.

“양심 없단 소리 들었겠지.”

“큭.”

“그런데 지은아, 그 피어싱 안 불편해? 아까 잘 때도 끼고 있던데.”

지헌이 JE가 낀 피어싱을 보며 물었다.

서한율이 액막이 부적이라며 선물한 피어싱으로, 한번 꼈더니 좀처럼 빼고 싶지 않아서 필요할 때 외엔 꼭 끼는 중이었다. 피어싱 자체를 오래 껴서 그런지, 자다가 눌려도 별로 아프지도 않고.

“딱히?”

“흐음.”

에이플이 스윽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JE를 바라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혹시 여자한테 선물 받은 거야?”

“아닌데.”

“그래, 그래. 우리 막내도 이제 연애란 걸 해볼 때가 되긴 했지.”

“아니라고.”

“그럼 이번에 독립하려는 것도 다…?!”

JE는 에이플의 멱살을 잡았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으힛힛.”

지난달, 서한율에게 부동산 자료를 넘겨받은 JE는 꼼꼼히 검토하고 멤버들과 가족에게도 의견을 구한 뒤 집 하나를 전세로 계약했다.

“차는 뭐로 살 건지 정했어?”

“첫 차는 무사고 중고차를 사야 한다, 지은아. 그래야 이런저런 부담이 덜해.”

똑똑.

“네.”

문이 열리더니 <뮤직센터> MC 유호와 진은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컴백 축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하이.”

“은수 씨 안녕?”

“어? 호 네가 왜 여기에서 나와? 지금 막 너튜브에서 너희 입국하는 모습 나오는데…?”

“저만 몇 시간 일찍 귀국했어요. 그나저나 밖에 날씨 장난 아니던데요?”

“그래? 우리 출근할 땐 바람만 조금 세게 불었는데.”

반갑게 인사와 잡담을 나누고 나선 컴백 기념 인터뷰 리허설을 간단히 진행했다. 그 뒤엔 스타믹스 멤버들이 두 사람에게 앨범 선물을 건넸다. 다른 어스래빗과 퍼플아워 멤버들에게 나눠줄 것까지 챙겨서 양이 많았다.

“오늘 소개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들을게요, 선배님.”

“무겁지 않아요, 은수 씨?”

“네, 괜찮아요! 저 힘세요!”

그 씩씩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스타믹스 멤버들의 얼굴이 마치 귀여운 동생을 바라보듯 슬며시 풀어졌다.

“…….”

JE 한 사람만 빼고.

‘또.’

진은수에게서 지난번에 느낀 아주 좋은 향기가 화악 느껴졌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주 순식간에.

‘대체 조건이 뭘까. 지난번에 은수 씨한테 사과할 땐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JE는 소파에 놓인 에이플의 핸드폰을 힐끗했다. 현재 이곳에 있는 유호를 제외한 어스래빗 멤버들이 공항을 떠났는지, 어느새 라이브 방송이 꺼져 있었다.

“그럼 이따가 심심하면 놀러 와.”

“네, 나중에 뵙겠습니다.”

“쉬세요.”

유호와 진은수가 인사하곤 대기실을 나갔다. JE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서한율에게 톡을 보냈다.

[네 덕에 좋은 집 찾아서 계약했다. 고맙다.]

바로 답장이 왔다.

-[잘됐네요. 어디로요?]

[너희 숙소랑 걸어서 3분 거리ㅋ 이사하면 놀러 와]

-[네. :)]

[그런데 아까 대기실에 호랑 은수 씨 왔다 갔는데..]

[또 나더라.]

[여전히 다른 사람은 전혀 못 맡은 눈치고.]

이번 답장은 잠깐의 시간을 두고 돌아왔다.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참 신기하네요.]

쏴아아. JE와 톡으로 대화를 마친 한율은 무심코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센 비바람이 창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어, 바깥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한율은 그걸 가만히 보다가 인터넷으로 이전 날씨를 검색했다.

‘분명히 SBC 연말 특집방송이 있던 날도 오늘처럼 비가 많이 내렸던 것 같은데.’

처음 JE가 진은수에게 향기를 맡은 게 바로 그 전날이었는데, 그날은 눈이 펑펑 쏟아졌다.

‘날씨가 궂은 날에만 예비 각성자의 향을 느끼는 건가?’

비바람 혹은 눈이 내리는 날은 평범한 사람에겐 여러모로 불편한 날씨다. 그러나 마법사에겐 마나 유동을 하기에 참 좋은 날씨였다. 대기에 섞인 마나가 평소보다 짙은 까닭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마법사의 소질 때문에 향이 느껴지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나도 진작 느꼈을 테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율은 길우성을 돌아보았다. 길우성은 금방이라도 의자 아래로 흘러내릴 것처럼 대충 앉은 모양새였다.

“비오니까 늘어진다아….”

“야.”

“엉?”

“너 이따가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비가 이렇게 억수로 쏟아지는데 어디 가아.”

“약속대로 맛있는 거 사줄게.”

슥. 길우성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눈을 빛냈다.

“뭐 사줄 건데?”

잠시 후. 한율은 길우성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어딘가로 향했다. 저 멀리 작년 SBC 연말 특집방송을 했었던 돔구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내년에 게이트가 열리는 장소 중 하나.

“맛있는 걸 먹으러 어디까지 가는 것인가, 친구!”

“금방 도착해.”

한율의 차는 돔구장이 바로 코앞인 식당 주차장에서 멈췄다. 맛집으로 소문난 돈가스 전문점이었다.

후웅! 쏴아아.

굵은 빗줄기가 거센 바람을 타고 차창을 때렸다.

“까딱 잘못하면 홀딱 다 젖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날씨로구먼. 시트 젖어도 괜찮냐?”

“빨리 내려서 빨리 닫으면 돼.”

“크.”

그때였다.

그그그긍….

육중한 무언가가 뒤틀리는 듯한 불쾌한 소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작년, 바로 저 돔구장에서 들었던 그 소리였다.

길우성이 어깨를 떨며 겁에 질린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천둥소린가…?”

선물 받았습니다

게이트가 열리는 날이 점점 다가오자 대기의 마나 농도가 짙어지는 날, 그 징조가 소리를 통해 예비 각성자들에게 전해지는 것일까. ‘촉’이 좋은 JE는 그들에게서 좋은 향기를 느끼게 된 거고?

‘그렇다면 JE는 본래 시간대에서도 그 향기를 맡았을 거야.’

그 말인즉슨, 조건이 맞지 않아서 아직 각성하지 않은 사람, 각성자란 사실을 숨기는 사람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단 소리다.

‘어쩌면 미래의 내가 JE에게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걸 후회한 것도….’

각성자를 감지하는 것과 별개로, JE는 마물 하나 감당하기 힘든 평범하고 약한 인간.

‘스케줄로 바빠지기 전에 명상센터로 데려가야겠어.’

툭툭.

길우성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치즈돈가스랑 대화하냐? 심각한 얼굴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한율은 태연히 대답했다.

“뭔가 깜빡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생각이 안 나.”

“달냥이?”

“내가 달냥일 깜빡할 리 있냐. 돌아가는 길에 픽업할 거야.”

비바람이 치는 궂은 날씨에다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맛집으로 소문난 돈가스 전문점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이쪽을 힐끗거리는 사람이 몇 명 있기는 해도, 다가오진 않았다.

“야, 그런데 너 혹시 샵에서 <매니저의 하루> 제작진이랑 마주친 적 있냐?”

“어. 아마 내일 방송에 잠깐 나올 거야. 유찬이 형 인터뷰랑.”

“어쩐지. 방송 예고편에 우리가 가는 샵에다, 너랑 유찬이 형 닮은 실루엣이 잠깐 나오더라. 대세 아이돌 매니저와 깜짝 만남! 이렇게.”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화제를 돌렸다.

“JE 선배님, 우리 숙소 근처에 있는 전셋집 구했다더라.”

“오, 진짜? 형 혼자 독립한 거?”

“어. 이사하면 놀러 오래.”

“그럼 이사 선물을 생각해둬야겠구먼? 뭐가 좋을까….”

그그긍. 하늘이 울렸다.

길우성이 미간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으, 저놈의 천둥소리. 오늘따라 소름 끼치게 무섭네.”

“…….”

우웅. 이번엔 한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달력에다 저장한 메모가 떴다.

[내일 11일 한네모 선배님, 구미호 인형 선물.]

‘아.’

정말로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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