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1일 오후,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VEL 엔터 실상 폭로 이해원, 전속 계약 해지]
[지난달 25일 소속사인 VEL 엔터테인먼트의 실상을 폭로한 MOHE 前멤버 이해원이 VEL 엔터와의 전속 계약을 해지했다.
(중략).
경찰은 이해원이 VEL 엔터 대표 A씨와 안인섭의 성 접대 및 브로커 행위에 가담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이채현이 그의 연예계 활동에 개입한 정황 또한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해원이 A씨와 안인섭의 범죄 행위가 기록된 증거물을 입수하자마자 제출한 점을 들어…(중략).]
-그럼 계약금은 어떻게 되는 거? 억 단위로 받았다며
ㄴ이미 3년 넘게 중국이랑 동남아 오가면서 활동하면서 거의 차감한 상태였다고 함. 다른 멤버들은 몰라도 이해원은 드라마도 찍고 CF도 몇 개 찍었으니까
ㄴ계약금 먹튀 개꿀ㅋㅋㅋ 쓰러 왔다가 댓글 보고 물러난다.
ㄴㅋㅋㅋㅋㅋㅋ
-그럼 얜 잘못이 하나도 없다는 소리임?
ㄴㅇㅇ법적으론
-처음부터 좋은 소속사 만났으면 느렸어도 결국엔 성공했을 텐데 그놈의 돈이 뭐라고ㅠ
ㄴ이채현한테 명품 잔뜩 받았을 테니 걱정ㄴㄴ
-뮤직센터 MC 복귀해
-VEL 엔터 뒤 봐주던 조폭들이랑 접대받은 놈들이 앙심 품고 이해원 찾아다닌다고 하던데 별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계약 해지ㅊㅊ
-몇 년 후에 좋은 음악으로 보답한다면서 다시 나온다에 내 건빵을 걸지
-잘생기긴 존나 잘생겼네
-방송에 다시 기어 나올 생각 하지 마라
ㄴ신고로 비공개된 댓글입니다.
“나 왔소, 형님.”
철컥, 삐릭.
인터넷 기사를 보던 이해원은 노트북을 덮고 로비로 나갔다.
“어서 와, 가람아. 영국은 잘 다녀왔어?”
박가람이 양손 가득 들고 온 걸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둘은 박가람이 명상센터에서 마나 유동 훈련을 시작하며 편하게 말을 놓기로 했다.
“응. 이건 형이랑 나리 씨 주려고 나랑 서한율이 산 선물. 서한율은 오늘 무슨 약속 있다고, 이따가 잠깐 들른대.”
“고마워. 풀어봐도 돼?”
“옙.”
선물은 홍차와 비스킷, 초콜릿이었다.
“먹고 살 좀 찌라고 많이 사왔징. 흐. 그런데 형, 안 본 사이에….”
“……?”
박가람이 이해원을 빤히 쳐다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왜 이렇게 피부가 좋아졌지? 뭐야, 왜 더 잘생겨졌어?!”
이해원은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마나 유동을 꾸준히 한 덕인가 봐.”
“피부가 좋아진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단 소리네…?”
“나리 씨도 피부 굉장히 좋잖아. 그러니까 가람이 너도 열심히 해. 정신도 맑아지고 몸도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 좋더라.”
박가람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았어, 당장 시작한다!”
잠시 후, 명상센터로 온 한율은 고개를 갸웃했다. 웬일로 박가람이 사람이 들어온 것도 모를 정도로 마나 유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
“30분 정도 됐어.”
이제 곧 단체 안무 연습 시간인데. 한율은 시계를 힐끗하곤 박가람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댔다.
“…….”
지켜보던 이해원의 눈이 살며시 커졌다.
곧 한율이 손을 뗐다. 박가람도 천천히 눈을 뜨더니 끔뻑끔뻑.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돌렸다.
“방금 도와준 게 너였냐?”
“네. 속도가 너무 느려서요.”
“꼼꼼히 구석구석 돌리느라 그런 거거든? 그것도 평소보다 아주 잘 되고 있었는데!”
“반지.”
한율은 박가람의 왼손에 끼워진 팀 반지를 가리켰다.
“그걸 끼고 했으니 평소보다 잘 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죠.”
“앗차! 어쩐지!”
“한율이 너 마나 운용할 때마다 정말 놀랍다. 은은히 전달되는 마나의 농도나 느낌이 달라.”
이해원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한율은 시치미를 뚝 떼고 웃었다.
“어릴 적부터 마나를 느껴서 그런가 봐요.”
그날 저녁. 한율과 이제설이 함께 출연한 tv Mu <뮤직마켓>이 방송되었다. 귀신이나 구미호, 강시, 흡혈귀 등으로 분장한 고정 출연자들 사이에 둘만 멀쩡한 차림으로 앉았다.
[지난번에 어스래빗 노래가 퀴즈로 나왔었는데, 한율 씨 혹시 봤어요?]
[네. 약속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PD님.]
[응? 이게 무슨 말이에요?]
[PD님이 제설 선배님 섭외 도와주면 저희 노래를 퀴즈로 내주신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열심히 설득했어요.]
모든 출연자 머리 위로 [!!!] 느낌표 자막이 동시에 떴다. 이제설은 충격받은 얼굴로 한율을 휙 돌아보았다.
[너 그래서…!]
한율은 카메라를 향해 검지 두 개를 세운 채 웃었다. 애교를 담아.
[실검 1위 감사합니다!]
[쟤, 쟤 레알 구미호였네.]
[어쩐지 비싼 와인을 선물로 주더라니….]
[와인을요?]
[네. 며칠 전에 드라마 촬영 끝나고 우리 집에서 저녁 먹자고 초대했는데, 비싼 와인을 선물로 가져왔더라고요.]
MC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남자 둘이서 저녁 먹으면서 와인이요?]
[영아 선배님도 같이요.]
이번엔 하단에 큰 자막.
[아…!]
슥 미소 짓는 이제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뮤직마켓> 프로그램 톡창.
-승자의 미소
-미치겠다 개설레
-영아 진짜 부럽다 남친이 이제설이야ㅜㅜ
-작년에 유호랑 길우성 출연했을 때 좋은 활약 펼치면 어스래빗 노래 퀴즈로 내주겠다고 예전부터 약속했습니다. 그러니 조금 전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아티스트를 공격하는 행위는 없길 바랍니다.
-방송에서 이렇게 언급하면 나중에 헤어졌을 땐 흑역사 될 텐데
-이제설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둘이 아직도 사귐?
-이제설이랑 영아는 이미 해외여행에서 같은 호텔 묵었던 것까지 기사 다 떠서 못 헤어짐
[두 사람이랑 같이 저녁 먹으니까 어땠어요? 사이 좋은 커플 보니까 부럽진 않았어요?]
[글쎄요. 사이 좋은 커플은….]
한율은 고개를 갸웃하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봐서요.]
워후우! 오오!
이제설을 포함한 출연자들이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부모님이 정말 사이좋으신가 보다.]
-역시 아이돌ㅎ 연애 얘기의 ㅇ자만 나와도 교묘하게 피해가죠?ㅋㅋㅋㅋ
-※서한율의 외가는 부동산만 수천억이며 서한율의 엄마는 러시아로 발레 유학까지 다녀온 적 있는 미인대회 수상자다.
-어쩐지 평화로운 가정에서 자란 티가 나더라
-엄마가 돈이 많아 아빠가 지면서 살아서 평화가 유지될 수도 있지만, 스무 살 넘은 아들 입에서 부모님이 사이좋은 커플이다, 이 얘기 나올 정도면 찐임
-자식은 부모 따라가는 법이라던데, 얘도 나중에 장가 잘 가겠네
근황 토크가 대충 끝나고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한율은 진지한 태도로 퀴즈에 임했다. 도중에 힌트를 얻기 위해 짤막하게 댄스를 선보여야 할 때도.
-내가 예고 실용무용과 출신이다!
-좀 추네
-역시 4년 차 아이돌
-이제설 율톢 따라 둠칫둠칫ㅋㅋㅋㅋ
-키가 큰데도 춤선이 깔끔하네
방송이 끝난 뒤, 한율은 <뮤직마켓> 대기실에서 이제설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SNS에 올렸다. 그러자 오늘 SNS 팔로우를 한 가수 겸 예능인, <달리는 예능> 출연자 한네모가 곧바로 ‘좋아요’를 눌렀다.
연예뉴스란에는 <뮤직마켓> 리뷰 기사, 한네모가 SNS에 올린 게시글 관련 기사가 올라왔다.
[어스래빗 서한율, 한네모의 딸 생일 파티에 참석]
[인기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한네모의 딸 생일 파티에 참석해 <서울 구미호> 구미호 인형을 건네는 사진이 한네모의 SNS에 올라와 화제다.
(사진=한네모 개인 SNS)
한네모는 해시태그로 ‘#약속지키는의리토끼 #정말고마워한율아’를 적어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실검에 뜬 [서한율], [서한율 뮤직마켓]은 밤 11시가 지날 무렵 순위가 더 올라갔다. 새로운 검색어까지 등장했다. [서한율 매니저].
MBS 인기 예능 <매니저의 하루>에 한율과 조유찬이 깜짝 등장한 까닭이었다. 개그우먼 홍지설이 샵에 방문했다가 우연히 한율을 발견한 것부터.
-CF에서 트럭 들어 올리시던 분ㅋㅋㅋㅋ
-메이크업 안 해도 저 정도
-누구예요? 아이돌은 잘 몰라서
-화면이 환해졌다
-살아계셔서 참 다행이에요 뭔데ㅋㅋㅋㅋ
-예고에 대세 아이돌 배우 나온다 그랬는데 진짜네
-이프림은 자랑스럽다 그냥 막 서한율이 자랑스럽다
-어스래빗 서한율입니다! 드라마 <서울구미호> 주연!
-얘 아까 뮤직마켓에서도 봤는데 또 나오네
홍지설이 조유찬을 붙잡고 짧게 인터뷰한 것도 방송에 나왔다.
[자기소개 좀 해주시겠어요?]
[네, 안녕하세요. 2014년도 크리스탈 래빗을 시작으로, 2016년부터 한율이랑 남석이, 그리고 어스래빗 매니저를 하는 조유찬이라고 합니다.]
-똘똘이 스○프 닮았다
-아이돌 매니저는 3개월도 못 버티고 도망가는 사람이 태반이라던데 6년ㄷㄷㄷ
-와 이분 아직도 매니저로 일하는구나 반갑다ㅎㅎ
[그럼 한율 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겠네요. 유찬 씨가 보기에 한율 씨는 어떤 아이돌, 어떤 배우인가요?]
[네, 우리 한율이는요…!]
-매니저 갑자기 눈 반짝거려
-팔불출이다
-팔불출
-조금 전까지 긴장했던 사람 맞나요ㅋㅋㅋㅋ
-래퍼인 줄
[최근에 한율 씨에게 감동한 적 있나요? 고마운 일이나.]
[늘 고맙죠. 항상 저희가 서포트하는 것 이상으로 잘해주고, 또 열심히 하니까.]
홍지설이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조금 더 솔직히, 속물적으로 말한다면?]
[그게….]
조유찬이 막 머리 손질을 받는 한율의 모습을 확인하곤 대답했다.
[드라마 <서울 구미호> 마지막 촬영이 끝난 날에, 한율이가 저한테도 수고 많았다면서 큰 선물을 줬어요.]
[어머, 뭐 받으셨어요?]
홍지설의 영상을 보던 출연자들이 끼어들었다.
[되게 궁금하다.]
[뭐 받았을까? 한율 씨 엄청 부자라고 소문났잖아요.]
[4년 동안 곁을 지켜준 매니저에게 준 선물은 과연?]
조유찬이 머뭇거리다가 쑥스럽게 웃었다.
[자동차 선물 받았습니다.]
놀라서 입을 쩍 벌리는 출연자들의 얼굴과 자막.
[!!!!!!]
-플렉스.
데뷔 3주년
[서한율, 매니저에게 7천만 원 상당 자동차 선물]
-저 진지하게 WB래빗에 입사하고 싶습니다.
ㄴ여기 마지막 채용 게시물이 작년이던데
-이래서 매니저들이 노예처럼 온갖 갑질 당하고 잡일 하면서도 버티는 거지ㅋㅋㅋ 콩고물이 존나 달달하거든
ㄴ노예처럼 부리거나 갑질한 적 없습니다.
-잘 키운 아이돌이 차를 사줘요
-오늘부터 내 목표는 서한율 매니저다.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도 매니저들에게 에어컨이나 TV, 노트북, 한정판 신발이나 명품 선물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차가 참 크긴 하네요ㅎㅎ
-행여 이런 거 보고 매니저 꿈꾸지 마세요. 콩고물 바라고 매니저 된 사람을 어떤 연예인이 좋아합니까. 그 힘들다는 아이돌 매니저로 6년 버틴 거 보면 원래 뚝심 있고 성실히 잘하는 분 같은데, 그렇게 믿음을 주니까 그만큼 좋은 선물도 받는 겁니다.
-이분 서한율 자랑 늘어놓을 때 진짜 팔불출 같아서 좋더라ㅎㅎ
-유찬 님 항상 지구톢톢이들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매니저분들도 감사드려요! :D
-이 기사를 다른 아이돌이 싫어합니다.
ㄴ싫어하기 보다는 그냥 와 하고 말지 않을까. 아이돌 대부분은 정산받으면 부모님께 드리거나 관리 맡기는 게 보통이잖아
ㄴ듣고 보니 그렇네? 아무리 잘나가도 7천만 원을 맘대로 유용할 수 있는 스물한 살이 흔하진 않지ㅋㅋ
ㄴ잊지 말자. 서한율은 부동산 재산만 6백억이다.
ㄴㅋㅋㅋㅋㅋㅋ한율이 형 나 만원만ㅜㅜ
아이러니하게도 다음 날엔, 한 아이돌의 매니저 갑질 논란이 터졌다. 현직 아이돌 매니저라고 밝힌 익명의 누군가가 커뮤에 작성한 글 때문이었다.
[제목: 매하루보다가분통터져서쓴다]
[나름 좀 잘나가는 아이돌그룹 매니저다. 누구네처럼 선물은 바라지도 않는다. 수시로 말 바꾸거나 거짓말하면서 사람 ㅂㅅ만들고 숙소로 여자 데려와서 놀아놓고 뒷정리시키고, 새벽에 술이랑 담배 사다 달라고 전화하고 스케줄 때문에 일찍 깨우면 쌍욕하는 건 다반사에 먹고 싶은 거 사다 주면 갑자기 다른 게 당긴다고 또 사 오라고 똥개훈련 시키고ㅋㅋ 최소한 인간 대접이라도 받고 싶다.]
해당 게시글은 작성 10분 만에 삭제됐지만, 이미 일파만파 퍼진 뒤였다.
“시대가 어느 땐데 아직도 매니저를 이렇게 부리는 애들이 있나? 아니, 있기야 있을 테지만….”
WB래빗 엔터테인먼트 회의실.
매니지 A팀의 유 팀장이 기사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B팀의 오동식 팀장은 그의 사과패드를 힐끗했다.
“우리 아이들이 유달리 순한 편이라 그렇지, 보통은 애들 관리하는 게 쉽지 않죠. 좁은 사회에 고립된 채 레슨과 경쟁만 반복하다가, 데뷔 후엔 일상에서도 타인 의식하며 연기하느라 어딘가 일그러진 애들이 태반인데.”
“하긴. 크래 애들도 데뷔 초엔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돌발 행동을 곧잘 했었죠. 새벽에 숙소에서 사라진 애를 한강에서 찾았을 땐 정말…. 날 보자마자 어린애처럼 대성통곡하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짠해요.”
오 팀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옛날이야기를 나누려고 일요일 아침부터 출근한 건 아니기에, 화제를 돌렸다.
“막상 현장에서 구르면 못 버티고 그만두는 사람이 나올 테니, 넉넉하게 다섯 명 뽑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스래빗 컴백 준비 현장에도 데려가실래요?”
“아니요. 지난번에 어떤 아이돌그룹 새 매니저가, 앨범 재킷 촬영 세트장이랑 뮤비 세트장에서 셀카 찍곤 친구한테 보낸 게 쫙 퍼졌다고 하더라고요.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이고, 저런.”
두 사람은 관련 업체와 학교를 통해 모집한 매니저 업무 지원자들의 서류를 살폈다. 올해 하반기, WB래빗은 새 보이그룹을 런칭할 계획이었다. 그때를 위해 미리 새 매니저들을 뽑아 교육하기로 했다.
“어쨌든 <매니저의 하루> 방송이 나가기 전에 지원 마감을 해서 다행이네요.”
오 팀장은 동감을 표했다.
“네. 안 그랬다면 온갖 속물이 너도나도 서류부터 던졌을 테니.”
한편, 어스래빗 연습실.
한율은 같은 고등학교 졸업생이자 대학 동기인 고재영의 톡을 받았다.
-[나 네 매니저 하고 싶다. 시켜주라ㅜㅜ]
[안 돼.]
-[그럴 줄 알았다. 계속 오디션 떨어져서 징징거려봤다ㅜㅜ]
-[그런데 님 학교 언제 나옴]
-[신입생들이 나만 보면 너 진짜 우리 학교 학생 맞냐고, 언제 오냐고 물어본다.]
[내일 오전에 잠깐 갈 거야.]
-[무슨 수업? 몇 시?]
한율은 고재영과 내일 점심을 먹기로 약속하곤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써한.”
괴상한 자세로 스트레칭을 하던 길우성이 물었다.
“너 황성연 기억나지?”
“당연히 기억나지. 졸업한 지 2년도 안 됐는데.”
“나한테 시간 나면 같이 밥 먹자 그러더라.”
“나도?”
“아니, 네 얘긴 안 하던데.”
길우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은근히 와줬으면 하는 티는 나긴 했음.”
“동창 얘기야?”
데굴데굴. 요가 매트를 깔고 폼롤러로 등을 마사지하던 강보배가 물었다.
“응.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닌데, 3년 내내 같은 반에다가 우리보다 2년 먼저 데뷔한 선배라서 잡다한 팁 같은 거 알려준 애야. 고2 땐가… 회사가 망하면서 조금씩 의기소침하게 변하기는 했지만.”
데굴.
“저런. 지금은 어떻게 지낸대?”
“대충 성적에 맞는 대학 들어간 것까지만 아는데… 잘 모르겠어. 만나보면 알겠지.”
차남석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년 만에 갑자기 만나자고 연락하는 사람은 조심해라. 다단계, 이상한 종교 권유, 돈 빌려달라는 용건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에이, 그럴 녀석은 아니야.”
“다들 그렇게 본인 안목 믿다가 뒤통수 맞더라. 티모 사건 잊었냐?”
“…….”
길우성의 어깨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왜 아이 기를 죽이고 그래, 남석아.”
“내가 뭘.”
다음 날 13일 오전.
한율은 오래간만에 차남석과 함께 등교했다.
차에서 내리며 차남석이 말했다.
“우리 오늘 학교 온다니까, 박현우가 점심 같이 먹잔다.”
“이미 친구랑 먹기로 약속했는데.”
불쑥.
“친구 누구?”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뒤에서 박현우가 조용히 끼어들며 물었다. 한율은 놀란 기색 없이 고개를 꾸벅였다. 차 사이드미러를 통해 그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형. 오래간만이네요.”
“그래, 아주 오래간만이다. 너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
박현우가 돌연 상처받은 얼굴로 외쳤다.
“어떻게 날 카메오로 안 부를 수가 있냐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진심으로 상처받았다고 믿을 만큼 실감 나는 연기였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무슨 일 있나?’ 수군거리면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형도 그때 드라마 찍고 있었잖아요.”
“아, 그랬지.”
휙. 박현우의 표정이 시큰둥하게 변했다.
“너 어제 베개 싸움하다가 떨어지는 거 웃기더라. 짤도.”
어제 방송된 <달리는 예능>. 한율은 얼굴만 동그랗게 드러난 병아리 인형 탈과 옷을 입고선 통나무에 앉아 베개 싸움을 했다. 그러다 중심을 못 잡고 떨어지던 순간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한율의 얼굴 위로, 비슷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살짝 입을 벌린 고양이 얼굴 짤이 겹쳤다.
시청자들은 닮아서 더 웃겼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그 짤 속 고양이, 어디에서 본 것 같단 말이지.”
“유명한 짤 아니었어?”
“아니, 닮은 고양이를 다른 곳에서 본 것 같아.”
“고양이들은 품종 같으면 다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어? 색이랑 무늬까지 같으면 아예 구분 못 하겠던데.”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달라요.”
“아, 생각났다.”
차남석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보여주었다.
“자, 너랑 닮은 고양이.”
“…….”
“오, 진짜 닮았는데? 누구네 고양이야?”
“드림래빗의 박세은.”
박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뜬금없이 TMI를 떠들었다.
“개랑 나랑 8촌이더라.”
“그 정도면 남 아니야?”
“서한율, 점심 같이 먹기로 한 친구가 누구라고?”
“아직 대답 안 했는데요. 고재영이라고, 우리랑 같이 대한예고 나온 연영과에요.”
“나 걔랑 친해. 같이 먹으면 되겠네.”
잠시 후. 점심시간에 만난 고재영은 차남석과 박현우에게 꾸벅 예의 바르게 인사하곤 한율에게 속닥거렸다.
“정말 나 같은 쩌리가 껴도 되는 자리냐…?”
“현우 형은 너랑 친하다던데?”
“기억났다.”
박현우가 고재영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었다.
“지난번 연극에서 의자 쿠당탕탕 쓰러뜨리면서 등장해서 실수 연발한 후배. 맞지?”
“허억! 잊어주세요, 선배님…!”
“친하다면서요.”
“넌 박현우 말을 믿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