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5월 9일 토요일. 스타믹스 멤버 JE는 자신의 집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활동기가 끝나고 진정한 휴식기에 접어드니, 이제야 토요일마다 나가던 고정 스케줄이 없어졌단 게 실감 났다. KBC <뮤직뮤직> MC를 그만둔 지 벌써 한 달하고 며칠이 지났는데 이제야.
‘매주 토요일마다 출근하느라 하지 못했던 일이 뭐가 있었지? 해외여행? 가족여행?’
JE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뭐 하세요?”
-[친구들이랑 낚시 왔다.]
“다음엔 저도 데려가 주세요.”
-[너 물 많은 곳은 기분 나쁘다고 질색하잖냐. 백수 됐냐?]
“스케줄 없으면 백수죠.”
-[쯧쯧. …어?! 입질 왔다, 끊는다!]
뚝.
“…….”
이번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지은아.]
“엄마, 뭐 하세요?”
-[친구들이랑 가평에 있는 수목원에 놀러 왔지? 왜?]
“아니에요. 뭐 필요한 건 없어요?”
-[응, 없어. 엄마, 친구들이랑 사진 찍어야 하니까 용건 없으면 이만 끊자?]
“네.”
뚝.
부모님도 주말을 알차게 잘 보내시는데, 나는 할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네.
JE는 초코톡 친구 목록을 살폈다. 인간관계가 협소한 까닭에, 사적으로 친한 이들은 같은 팀 멤버들을 제외하고 어스래빗 멤버 몇 명뿐이었다. 그러나 어스래빗은 현재 컴백 준비로 한창 바쁜 시기.
‘어제부터 M/V 촬영이랑 해외 촬영이 쭉 잡혔다고 했지.’
그렇다고 같은 팀 멤버와 만나 놀고 싶진 않았다. 평일 단체 안무 연습 시간마다 보는 얼굴을 주말에도 봐?
생각만 해도 징글징글했다. 몇 년을 그렇게 붙어서 살았는데.
‘괜히 차를 예능 촬영할 때 사기로 했나?’
JE는 핸드폰을 내려놓곤 다시 빈둥빈둥 TV를 보았다. TV에선 뮤닷 2화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WB래빗 엔터 소속 연습생 출연자가 트레이너의 칭찬에 울먹거리며 말한다.
[소속사 선배님들이 저희 연습을 자주 봐주시고 격려해주신 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
그 말을 듣자 할 만한 일이 떠올랐다.
JE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회사 가서, 주말에도 열심히 하는 애들 있으면 맛있는 거라도 사주자.’
잠시 후, 스케일 엔터테인먼트. JE는 어슬렁어슬렁 회사안을 돌아다녔다. 조금 전 남자 연습생들이 사용하는 연습실을 찾아갔는데, 너무 열심히 연습하는 터라 흐름을 끊기가 미안해 조용히 물러났다.
‘온 김에 라방이나 할까. 그런데 무슨 얘길 하지. 짧게 안무 커버라도 해?’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러다가 후배 아이돌그룹, V12의 멤버 김찬과 마주쳤다.
“어, 안녕. 노트북 들고 어디 가?”
“사무실이요. 라방하려고 잠깐 빌렸었거든요. 연습실에 있는 노트북은 개인 안무 연습하는 멤버들이 쓰고 있어서.”
JE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 전, V12의 티모가 교제 중이던 개인 홈마를 통해 마약 범죄를 저질렀던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그 일로 티모는 죄를 인정하고 팀을 탈퇴, 스케일과도 전속 계약을 해지하고 떠났다.
V12는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남은 V12 멤버들은 멤버 한 명이 잘못된 길로 빠지는 걸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며 팬들을 향해 고개 숙이고 사과했다. 그러나 티모 일로 충격받은 많은 팬이 팬덤을 이탈했다.
‘V12? 아, 그 약쟁이가 있던 그룹?’ 대중의 이런 인식은 말할 것도 없고.
김찬은 티모와 같은 팀이었단 이유로 <락뮤닷> MC에서 하차하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일주일만 쉬곤 정말 하차하진 않았으나, 회사는 그를 제외한 V12의 활동을 모두 정지시켰다.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기까지 생각하자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티모가 망가뜨린 팀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구나.
JE는 자연스럽게 김찬과 함께 걸으며 물었다.
“밥은 먹었어?”
“아뇨, 아직.”
“약속 없으면 나랑 같이 먹을래?”
“정말요?”
“어.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배고프…. ……?”
말을 하던 JE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선배님?”
“저거… 왜 우리 회사에 있어?”
JE의 시선을 따라 멀리 기둥 뒤쪽을 살핀 김찬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요? 왜 저분이 여기에 있지…?”
JE는 살며시 미간을 찡그렸다가 그쪽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그사이 JE가 발견한 그는 마스크를 쓰며 누군가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어? 지은이 너 오늘 쉬는 날 아니야?”
조금 전 그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회의실. A&R팀 직원과 함께 나오던 매니저 실장이 JE를 발견하곤 물었다.
JE는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를 힐끗하곤 실장에게 반문했다.
“정민솔이 여기엔 어쩐 일로 온 거예요? 원제로 매니지 담당 회사는 다른 건물이잖아요.”
“아….”
실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JE와 김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잠깐 회의실로.”
달칵. 두 사람을 회의실로 안내한 실장이 문을 닫자마자 말했다.
“정민솔하고 전속 계약 논의 중이야.”
“네?”
“왜 그렇게 놀라. 노래도 잘해, 마스크도 준수해, 인기도 많아. 어렸을 때 다소 입을 함부로 놀린 게 문제처럼 떠오른 적도 있었지만, 까보니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니었고. 당사자들하고도 지금 잘 지내잖아.”
“…….”
“왜? 혹시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실장의 시선이 먼저 김찬을 향했다. 김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분, 예전에 <락뮤닷> PD님하고 무슨 일이 있었단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요….”
“그거 PD님이 마음 푼 지가 언젠데. 찬이 네가 MC니까 더 잘 알 거 아니야. 원제로 출연할 때, PD님이 정민솔 차별하는 걸로 보였어?”
“아니요.”
“너희도 나한테 서운한 일 있을 때 신나게 흉보잖아. 어릴 때 담임 선생님 의심하고 욕한 적 없어?”
듣고 보니.
귀가 얇은지, 바로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이는 김찬.
그러나 JE는 주관적인 감상을 솔직히 말했다.
“난 그냥 걔 느낌 별로던데요.”
“지은아….”
실장이 살짝 충격받은 얼굴로 제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난 네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심장이 철렁거린다….”
JE의 촉이 좋은 건 스케일 엔터 직원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했다. 특히 실장은 예전에 ‘저쪽 길 기분 나쁘니까 가지 마세요’란 JE의 말을 듣지 않고 갔다가 접촉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V12 매니저는 ‘JE가 티모 느낌 안 좋다고 얘기했을 때 너한테 전해줄 걸 그랬다’라는 스타믹스 매니저의 이야기를 듣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냐며 멱살을 잡기도.
“아무튼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건 아니니까, 다른 사람한텐 비밀. 알았지? 부탁한다.”
A&R팀 직원까지 불러서 면담해놓고?
JE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담담히 말했다.
“네. 저도 분명히 말했어요, 실장님.”
“어, 그래. 참고할게….”
무슨 꿍꿍이야
13일 오전. 어스래빗은 일본에서 M/V 촬영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멤버들은 사람들에게 잡힐까, 앞에서 대기하던 밴 두 대에 빠르게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멤버들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지난달에 입사한 매니저 허진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 안녕하세욥! 어스래빗 막내 길우성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진영 형님!”
같은 차에 탄 한율과 차남석, 이건우도 자기소개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조수석에 탄 조유찬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숙소에서 짐 정리하고 쉬다가, 나중에 회사 올 땐 호출해. 태우러 갈게.”
“네.”
길우성이 차남석에게 물었다.
“남석 씬 미팅 몇 시야?”
“2시. 숙소에 짐만 놓고 바로 가면 시간 맞을 것 같다.”
“올 때 그 근처에서 파는 슈크림.”
“간신히 뺀 지방을 도로 찾고 싶다고?”
“다음 뮤비 촬영까지 이틀 남았으니 조금은 먹어도 되지 않을까?”
“출발하겠습니다.”
허진영의 운전 실력은 안정적이었다.
한율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핸드폰으로 음악을 재생,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어스래빗, 뮤닷 단독 리얼리티 <런던래빗> 첫 방송 D-1]
지난달 영국에서 촬영한 <런던래빗> 기사가 메인에 떠 있었다. 첫 방송은 내일 14일 밤 10시 50분. 총 4부작으로, 마지막 4화가 방송되는 6월 4일 다음 날이 컴백 쇼케이스였다.
이어폰 너머에서 길우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달냥이 보고 싶다. 안고 싶다.”
한율은 한쪽 이어폰을 빼며 대답했다.
“달냥인 이번 뮤비 촬영 끝나고 데려올 거야.”
“왜지?!”
“숙소 비우는 시간이 많은데 데려와서 뭐 해. 혼자 심심하게.”
길우성이 손으로 눈을 덮으며 슬픈 척했다.
“일리 있는 말이라서 더 슬프다…. 그렇지…. 고양이가 외로움을 안 탄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지….”
“유찬이 형.”
“응?”
하아. 묵묵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이건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하는 말.
“저 가족이나 친척 명의 폰 따로 만들어서 써야겠어요.”
“그래. 만들면 얘기해줘.”
“네.”
사생 스토커들이 그새 또 바뀐 번호를 알아내서 연락해대는 모양.
길우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본인 명의 폰 아니면 이것저것 굉장히 불편한데.”
“내 명의로 된 거 하나, 타인 명의로 된 거 하나. 이렇게 두 개 들고 다녀야지 어쩌겠어.”
“고의로 개인정보 유출하는 사람, 그리고 스토커들을 향한 처벌이 약한 게 문제야. 처벌까지 가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유출자 잡는 건 힘들지 않아? 전에 어떤 뉴스 보니까, 공무원이 넘긴 대량의 개인정보를 중간 브로커가 사고, 그걸 또 다른 사람이 사서… 아무튼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던데.”
“그것도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야, 경찰이 조사해서 알려진 거였죠.”
“한율이 넌 괜찮아? 계속 같은 번호 쓰고 있잖아.”
“그러잖아도 오늘 바꾸려고요.”
조유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숙소에 도착한 뒤, 다른 밴을 타고 온 박가람이 말했다.
“우리 차 운전한 새 매니저 형, 진짜 무뚝뚝하더라. 처음엔 경호원인 줄 알았어.”
“그래? 그분은 성함이 뭐래?”
“김양우. 장전이 형처럼 해병대 출신이래.”
“오오.”
“다들 이따가 연습실에서 봐요.”
“어. 잘 다녀와, 차남석아.”
차남석은 방에다 자신의 가방만 대충 던져놓곤 MBS <너의 집> 제작진 미팅을 위해 다시 나갔다.
한율은 캐리어를 정리한 뒤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모친에게 전화를 걸며 통신사 홈페이지에 접속.
“네, 어머니. 방금 숙소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오늘 핸드폰 번호 바꾸려고요. …네, 초코톡은 그대로니까, 번호 바꾸면 톡으로 알려드릴게요. 네, 쉬세요.”
번호를 변경하면 기존에 가입한 사이트나 은행 등에 입력된 연락처 정보 또한 모두 바꿔야 해서 귀찮지만, 이젠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오는 사생들의 연락을 확인하고 차단하는 게 더 귀찮은 지경에 다다랐다.
번호 변경은 불과 몇 분 걸리지 않았다. 한율은 가장 먼저 가족 단톡방에다 바뀐 번호를 올렸다.
“저 번호 바꿨어요.”
멤버들에게 통보한 뒤, 매니지 B팀 직원들이 함께 있는 단톡방에도 알렸다. 자주 연락하거나 계나리나 이해원처럼 중요한 지인들에게도.
우웅. 곧 연락을 받은 이들의 답장이 연달아 도착했다.
JE도 그중 한 명.
-[ㅇㅋ]
-[나중에 5분 정도 통화 가능할 때 연락해]
무슨 일이 있나?
한율은 방문을 닫고 JE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지금 한가해?]
“네.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 말이지….]
JE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의구심이 깃든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준 피어싱, 이거 대체 정체가 뭐냐?]
“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내가 이거 덕분에 크게 안 다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JE의 말에 따르면 바로 어제, 운전에 대한 감을 찾을 겸 매니저의 차를 빌렸다고 한다. 그리고 골목을 천천히 이동하는데, 주차된 차량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에 놀라 급히 핸들을 꺾었다가 남의 집 담벼락을 들이받았다고.
“그럼 지금 어디예요? 병원? 많이 다쳤어요?”
-[아니. 아주 멀쩡하게 집에 잘 있어. 충돌하는 순간에 뭔가가… 화악 하면서 날 보호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멤버들이랑 매니저 성화에 못 이겨서 정밀 검사까지 받아봤는데 아무 이상 없었어.]
하. JE가 작게 한숨 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평소엔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싸한 느낌부터 드는데….]
“…….”
-[아무튼 이 액막이 피어싱, 어디에서 구한 거야?]
마법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적당한 계기를 만들어보라고 계나리에게 말하긴 했지만, 하필 차를 타고 있을 때 사고가 나도록 유도하다니.
한율은 계나리에게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선배님 집으로 갈게요. 괜찮죠?”
-[어? 어…. 그래.]
* * *
명상센터로 위장한 마법 학교.
이곳에서 지내는 이해원의 일과는 거의 일정했다.
아침 8시에 일어나 청소, 마나 유동 훈련을 한 뒤에 아침 겸 점심. 이후 사이버대학의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다 보면 계나리가 찾아와 수련 상태를 봐준다. 계나리가 간 후에는 저녁을 먹고, 다시 마나 유동을 하다가 2시간가량 운동 후 씻고 잠자리에 든다.
박가람도 시간이 날 때마다 와서 마나 유동도 하고 같이 밥을 먹기도 했지만, 현역 아이돌인데다 컴백 날짜가 가까워지자 점점 발길이 뜸해졌다. 어스래빗 숙소 앞에 죽치거나 따라다니는 사생 스토커들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고.
대신에 톡으로 참 신나게 떠든다.
‘한율이 폰 번호 바꿨구나.’
공부하느라 뒤늦게 확인한 서한율의 톡. 이해원은 현재 사용하는 핸드폰에다가도, 본래 핸드폰에도 서한율의 번호를 새로 저장했다. 그러곤 막 답톡을 보내려 할 때였다.
우웅. 서한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응, 한율아. 톡 이제야 봐서 막…. 응? 누구?”
-[JE 선배님이요. 곧 그쪽으로 갈 거예요.]
스타믹스의 JE도 마법사의 소질을 보유하고 있다는 건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네. 저는 이제 단체 안무 연습이 있어서요. JE 선배님에게 충분히 설명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나리 씨도 학교 끝나면 곧장 거기로 갈 거고.]
이해원은 스타믹스 JE와 따로 말을 나눠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실검과 기사를 통해 낱낱이 알려진 MOHE의 실체와 스폰서 일. 같은 남자 아이돌로서 굉장히 질색할 법한, 아이돌 전체의 이미지를 갉아먹는 짓을 한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벌써 공기가 어색해지고, 긴장되는 것 같다.
그러나 다 큰 성인이 동생에게 굉장히 어색할 것 같다며 징징거릴 수는 없는 법.
“그래, 수고해.”
이해원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때였다.
쿵쿵.
‘…깜짝이야.’
난데없이 들리는 문 두드리는 소리. 타이밍 좋게 찾아온 다른 사람일 수도 있기에, 이해원은 현관으로 나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손지은.”
이해원은 급히 문을 열었다.
철컥, 삐릭.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들어오세요.”
“네.”
JE가 무뚝뚝한 얼굴로 가볍게 꾸벅거리며 들어왔다.
잠시 후, 로비 테이블에 찻잔 두 개가 놓였다.
“…….”
“…….”
이해원과 JE 사이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해원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바로 조금 전에야 설명을 들었다고 했으니 아직은 많이 혼란스러울 것 같은데….’
JE는 눈으로 명상센터 내부를 살피고 있었다. 이해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다른 건 없지만, 직접 둘러보시겠어요?”
“네.”
그리고 정말 별다를 게 없어서 이내 다시 제자리. 그사이 차가 마시기 좋은 온도까지 내려갔다.
“그럼 해원 씨는 여기에서 지내고 있는 거예요? 실제로 그 마나… 움직이는 훈련을 받으면서?”
“네. 마나 유동이요.”
“네….”
JE가 차를 마시며 이번엔 책장에 꽂힌 책을 살폈다.
다시 찾아온 어색한 정적.
이해원도 차를 마시는 척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빨리 와요, 나리 씨….’
한편 그 시각, 한율은 다른 멤버들과 함께 WB래빗으로 가고 있었다.
『사고요?! 전 오늘 밤에 강도로 위장해서 집에 침입할 생각이었는데….』
대체 뭘까. 한율은 조금 전 계나리와의 통화, 그리고 JE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하얗고 작은… 강아지? 토끼? 비슷한 동물이었어. 크기는 한 이 정도. 블랙박스 돌려보니까 굉장히 빨라서 잔상처럼 찍혀 있더라.』
JE를 ‘이쪽’으로 안내할 타이밍을 재던 중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기회를 주겠다는 듯 벌어진 사고. 우연치곤 참 공교로워서, 처음 계나리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가 떠오른다.
어쨌든 이해원, 박가람에게 그랬듯이 JE에게도 차분하게 설명했다. 진지한 태도로 끝까지 경청한 JE는 이것부터 물었다.
『그 재앙이 닥치면, 사람들 많이 죽어?』
이야기를 순순히 믿어주는 것 같아 고맙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다른 걱정이 든다. 나중에 알량한 마법 실력만 믿고선 사람들을 구한답시고 사지로 뛰어들진 않을까.
‘한번 모의 상황을 만들어볼까?’
한율은 핸드폰으로 대한민국 지도를 살폈다.
‘서울이 인구밀도가 높아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울이 낫겠지. 단번에 현실감이 들 테니.’
모의 상황을 만드는 데엔 적잖은 마력이 소모될 터다. 그러나 초보 마법사들에게 진짜 마법의 위력과 쓰임새를 깨우치게 하고, 긴박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성향 등을 파악하고 훈련하기 위해선 꼭 필요하다.
하루하루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각심도 줄 겸.
“뭐냐, 써한?”
“……?”
옆에서 길우성이 한율을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은근히 신난 얼굴인데? 꼭 이상한 꿍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쓸데없이 눈치 빠른 놈.
한율은 시치미를 뚝 뗐다.
“내가 뭘?”
그날 밤, WB래빗 보컬 연습실.
한율은 다시 계나리와 통화했다.
-[손지은 씨, 소질 완전 대박이던데요? 차분하고 기억력도 좋아서, 꾸준히 하면 금세 가람이 오빠 따라잡을 것 같아요. 그런데 조금 의아한 말을 하던데….]
“무슨 말?”
-[저랑 해원 씨 가만히 보더니, ‘누구랑 달리 딱히 뭐가 안 붙어 있네.’ …라고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종종 귀신 비슷한 걸 보는 사람이거든.”
헉. 헛바람을 들이킨 계나리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그 사람, 그 미스터리한 소문이 사실이었어요…?]
“가람이 형도 종종 봐.”
-[……!]
“어쨌든 나 대신 훈련 잘 부탁해.”
-[네! 맡겨만 주세요, 스승님!]
통화를 끊은 한율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도 적당히 늦었고. 한번 가 볼까.’
우연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일단 확인해보는 게 마음이 편하다.
한율은 보컬 연습실을 정리하고 나왔다.
잠시 후, 인적이 드문 어두컴컴한 골목길.
한율은 JE가 사고를 겪었던 장소와 주변을 살폈다. 지구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진 않는지, 촉각을 곤두세운 채. 그러나 한 시간가량을 돌아다녀 봐도 딱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정말로 동물에 의해 우연히 벌어진 사고였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JE에게 톡을 보냈다.
[선배님, 사고 당시 블랙박스 영상 저한테 보내주세요.]
곧 답장이 왔다.
-[ㅇㅇ 시간 늦었으니 날 밝으면 매니저 형한테 말할게.]
런던래빗 첫 방송
14일 아침. 블랙박스 영상을 본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화질이 영 좋지 않아, JE가 봤다던 하얀 동물이 정말 잔상처럼 찍혀 있었다. 굉장히 천천히 돌리고 확대해봐도, 하얀 솜사탕이 날쌔게 달려가는 형상이었다.
‘꼭 내가 아는 그걸 닮기는 했는데….’
게이트가 열리려면 1년하고도 2개월이 남았다. 그것도, 본래 세상의 마물이 여기에 있을 리가.
한율은 가정집에서 탈출한 애완 토끼라고 결론 내리곤 핸드폰을 덮었다.
“…….”
그래도 한번 의심했더니 마음에 걸린다. 한율은 다시 핸드폰을 집어서 계나리에게 영상을 보냈다.
[이 영상 속 동물, 또렷하게 살릴 수 있어?]
-[전문업체에 의뢰해볼게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