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7화 (217/427)

* * *

[어스래빗, 오늘 5일 새 앨범 [Balance] 컴백 쇼케이스]

[어스래빗 리얼리티 <런던래빗> 마지막까지 담은 진솔함]

[<런던래빗> 어스래빗, 런던의 마지막 밤 자체 최고 시청률]

[어스래빗 라이언, 아픈 가정사와 충동조절장애 고백… 눈물]

[어제 4일 방송된 어스래빗 단독 리얼리티 <런던래빗>에서 라이언이 아픈 가정사와 가지고 있던 충동조절장애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진=뮤닷 <런던래빗> 방송 화면)

같은 팀 멤버인 서한율에게 ‘그날, 같이 구내식당 가서 밥 먹자고 해줘서 고마워.’라고 쪽지에 적은 라이언은…(중략).

2015년 아림 엔터테인먼트 미국 뉴욕 오디션에 합격해 그해 10월 한국으로 온 라이언은, 아림 엔터에서 3개월 동안 연습생으로 생활하다가 현재 소속사인 WB래빗 엔터로 옮겼다.

익명을 요구한 아림 엔터 관계자는 “실제로 라이언에게 피해를 본 아이는 없다. 라이언은 낯선 타국 생활과 문화 차이, 다른 연습생들 간의 오해로 많이 힘들어했으며, 회사(아림)는 본인과 충분한 대화 끝에 그를 더 잘 케어해줄 수 있는 WB래빗 엔터로 보냈다.”라고 말했다.

WB래빗 엔터 관계자는 “라이언은 WB래빗 엔터로 이적 후 좌기훈 대표의 도움으로 정신과 상담 및 치료를 꾸준히 받았으며, 현재는 몇 달에 한 번 심리상담만 받을 정도로 상당히 호전된 상태다”라고 밝혔다. 아울러 “라이언은 실제 범죄는커녕 잘못된 일을 저지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오해나 억측 또한 삼가 달라”라고 덧붙였다.

한편 방송을 본 일부 시청자들은 라이언의 “고모는 늘 화가 나 있었고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라는 말을 두고 그가 어릴 적 아동학대를 당한 것이 아니냐 조심스레 추측하고 있다.]

-어제 방송 보면서 막 끅끅거리면서 웃다가, 라이언 얘기 듣고선 급오열ㅠㅠ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이언 어릴 때 학대당한 거 맞는 것 같네요. 예전에 배고파서 강아지 사료를 우유에 타 먹으려 했다고 말했었거든요. 그냥 먹으면 텁텁하다고

ㄴ헐

ㄴ미친... 진짜 육성으로 욕 나왔다 ㅅㅂ

ㄴ미국이 겉으론 화려해 보여도 실제론 가난한 사람 많음

ㄴ집에 개밥은 있어도 사람 먹을 밥은 없었다는 거잖아

ㄴ일부러 안 줬을 수도 있지.

ㄴ더 끔찍한데

-내가 아는 사람이 ㅇㄹ에 잠깐 있었는데, 라이언 연습생 시절에 돈이랑 물건 훔친다는 소문 돌아서 따돌림당했었다던데

ㄴ본문에 아림 관계자가 ‘실제 피해 본 사람 없다’라고 적은 거 안 보이냐

ㄴ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면 원카운트 찬형하고 친하게 지낼 리가 없죠.

ㄴ따 시킨 거 들킬까 봐 뒤늦게 친한 척하는 걸지도 모르지

ㄴ너는 너 따 시킨 놈이랑 사이좋게 밥 먹고 술 먹고 가로수길 놀러 가고 피방가고 그럴 수 있냐?

-멤버들이 명절에 라이언 데리고 갔다는 얘기 듣고 와 진짜 친하구나 생각했었는데 이런 사정이.. 너희들이 어스래빗으로 한 팀이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 정말 호 말대로 너희 아닌 너희는 상상이 안 가ㅠㅠ

-아무리 지금 많이 나아졌다곤 해도 방송에서 병적도벽이 있었다는 고백은 진짜 웬만한 용기 없인 하기 힘들 텐데.. 앞으로도 늘 건강하게 잘 활동했으면 좋겠다.

-손버릇 나쁜 검머외 거지란 거잖아

ㄴ그런 충동으로 저도 모르게 잠깐 손에 쥐었었다는 거지 실제론 안 훔쳤었다잖아 난독증 ㅅㄲ야

ㄴ거지ㅋㅋㅋㅋ 그 거지가 지금 네가 사는 집값보다 더 큰 액수를 통장에 쌓아두고 있단다ㅋㅋㅋㅋ

-솔까 다들 초딩이나 중딩 때 가게에서 작은 거 뭐 하나 슬쩍 한 적 있지 않냐? 재미로?

ㄴ그거랑은 조금 다른 듯..

ㄴ응 너만 그랬어

-먹는 모습 볼 때마다 참 맛있게 잘 먹는다고 흐뭇하게 봤었는데 그게 다 아픔 있는 과거 때문이었구나..ㅜㅜ

-사랑해 우리 사자톢♡라이언♡

-어스래빗 영원하자!

“찬형, 너 알고 있었어?”

원카운트 숙소. 리더가 거실에서 TV를 보던 찬형에게 사과패드를 내밀었다. 라이언의 기사가 떠 있었다.

“라이언 집안 얘기랑 병적도벽 얘기 말이야.”

“아니요. 가정 형편이 안 좋았다는 건 얼추 짐작하고 있었지만.”

“와…. 나 아침부터 기사 보고 놀라서 바로 VOD로 구매해서 봤잖아.”

“우리 얘기라도 나올까 봐요?”

리더가 펄쩍 뛰었다.

“아아니? 라이언 뒷말했던 애들, 지금 우리 팀에 한 명도 없잖아. 난 그냥… 기사 보니까 자세한 얘기가 궁금해져서.”

“네.”

하아. 리더가 한숨을 푹 내쉬며 옆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신나게 뒷말했던 애들, 지금 다 어디에서 뭐 하고 있을까? 결국 데뷔조 떨어지고, 시기 놓칠까 봐 하나둘 다른 곳으로 옮겼잖아. 아, 몇 명은 이미 데뷔한 거 알지만.”

“…….”

“그나저나, 찬형이 너도 우리가 라이언 따 시켰다는 소문 돌까 봐 걔한테 잘해주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

찬형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언제요?”

“허? 이놈 봐라? 분명히 다른 애한테 말하는 거 내가 들었거든? 라이언이 손버릇 나쁜 게 사실이라면 떠비가 왜 데려가서 데뷔까지 시켰겠냐, 안티들이 이걸 알면 아림 연습생들이 걜 따돌렸던 걸로 몰고 갈 수 있다, 그거 방지 차원에서 사이좋은 모습 보이는 거다, 이렇게.”

찬형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대충 갖다 붙인 핑계였는데.”

“어?”

“나는 라이언한테 사과받고 오해도 풀었는데 ‘넌 그런 일 당하고 왜 쟤랑 친하게 지내냐, 호구냐?’ 뭐라 말하기에 그냥 귀찮아서 둘러댄 핑계였어요.”

“그러냐…. 어쩐지 시간 날 때마다 만나서 논다 했다. 아니, 우리랑도 좀 놀아달라고, 막내야아.”

“징그럽게 왜 이래요.”

“형한테 징그럽다니! 팬들한테 이를 테다!”

그때 방에서 나오던 나기혁이 두 사람을 보곤 미간을 찡그렸다.

“형, 뭐 해요?”

“우리 집 고양이 흉내. 툭하면 내 팔에다 이렇게 박치기하거든.”

“네에. 아, 찬형.”

리더의 머리를 잡아 밀어내던 찬형은 대답 없이 나기혁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어스래빗이랑 원제로의… 누구야, 걔. 사이 안 좋냐?”

“그건 왜요?”

“그냥. 어쩌다가 이야기를 들어서.”

“무슨 이야기요?”

“무슨 이야기?”

리더까지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슥슥 빗질하며 묻자, 나기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걔, 리얼 엔터로 간다더라. 지금 계약서 세부 조항 조율 중이라는 거 보면, 금방 기사도 뜰 것 같던데?”

“너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친구의 친구?”

“눈 피하는 거 보니 여자한테 들었구먼. 누구야?”

“그냥 여사친이에요, 여사친. 형은 심심하면 나랑 같이 헬스나 가요. 동생 팔에 박치기하지 말고.”

“싫어!”

“…….”

찬형은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집었다.

그놈 있었으면

관객 2,500명이 들어올 수 있는 YY라이브홀.

어스래빗은 어제도 리허설, 오늘 아침에도 최종 리허설을 진행하고 낮엔 기자 쇼케이스를 가졌다. 현재는 공식 쇼케이스를 앞두고 밥을 먹으며 쉬는 중.

“실검에서 라욘 형이랑 런던래빗, 그리고 우리 이름이 내려올 생각을 안 한다.”

“너 진짜 후회 안 하냐? 불행을 도구 삼아서 이슈 끈다고 욕하는 놈들이 있을 텐데.”

라이언이 도시락에 담긴 돼지갈비를 포크로 콕 찍었다.

“후회 안 해. 남의 불행도 아니고 내 이야기, 내가 떠드는 게 뭐 어때. 다음 달에 노래도 나오는데.”

“대체 무슨 가사를 어떻게 쓴 거냐.”

“안 가르쳐줘.”

우웅. 라이언의 핸드폰에 [찬형]이 떴다.

“응, 찬형. …응, 괜찮아.”

식사를 마친 한율은 깨끗하게 비운 도시락을 정리했다.

“써한, 민준 선배님이랑 희우 선배님 오늘 오는 거 맞지?”

“어.”

“관계자용 초대권 너무 좋다. 흐.”

“너희 부모님도 오신댔지?”

“응. 엄마랑 아빠랑 누나랑….”

신나게 말하던 길우성의 목소리가 작아지며 표정도 뚱하게 변했다.

“박현우 씨.”

“설마….”

박가람이 진지한 얼굴로 외쳤다.

“벌써 사위 취급을?!”

“싸우자, 박가람!”

“이놈이 형한테?!”

그때 반갑게 찬형의 전화를 받았던 라이언이 뚱해진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포크까지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다.

“왜 그래요, 형? 무슨 안 좋은 이야기라도 들었어요?”

“하뉼, 리얼 엔터테인먼트에 대해서 알아? 좋은 곳이야?”

“진사랑 선배님 소속사요?”

“거긴 왜?”

조심조심 커피를 들고 오던 유호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진사랑 선배님을 위해서 설립된 작은 회사야. 대표는 예전에 스엔 엔터에 있었던 심 프로듀서님이고.”

함께 이야기를 듣던 이건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사랑 선배님도 스엔에 있었나?”

“아니, 거기보다 훨씬 작은 곳. 그곳에서 독립하기 전에 대박 난 앨범이 심 프로듀서님이랑 작업했던 거거든. 그때의 인연으로 심 대표님이 스엔을 나와서 만든 게 바로, 리얼 엔터.”

“진사랑 선배님만 믿고?”

“선배님이 걸어 다니는 기업이잖아.”

“하긴.”

“괜찮은 곳이란 거지?”

“응. 진사랑 선배님부터가 인지도 탑급인데다, 이미지도 깨끗하고 평판도 좋잖아. 작곡이랑 작사, 노래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 대표님도… 음, 좋은 분이셔.”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후 6시. 어스래빗 네 번째 EP앨범 [Balance] 컴백 쇼케이스가, 이번에도 물살을 가로지르는 고래의 희미한 울음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와….”

무대 아래. WB래빗에 입사한 지 석 달째 된 매니저들이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앞서 드림래빗 컴백 쇼케이스에도 갔었지만, 어스래빗의 쇼케이스는 그보다 더 웅장한 느낌이었다. 공연장 규모도 그렇고, 이곳을 가득 채운 팬들의 일사불란한 응원봉 움직임이나 눈빛도 그렇고.

“뮤닷에서도 동시 방송되는데, 너튜브 접속자 수도 어마어마하네요.”

“쉿.”

꺄아아아악! 오프닝 영상이 끝나고 어스래빗 멤버의 실루엣이 드러나기 무섭게, 공연장이 팬들의 환호성으로 울렸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인트로 음악이 온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허진영은 저도 모르게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멋있다.”

그는 어스래빗의 무대를 실제로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스래빗 연습실에도 갈 일이 없었고, 리허설을 할 때는 밖에서 다른 일을 돕느라 보지 못했다.

‘어떻게 춤을 저렇게 잘 추지? 무대 연기는 또 어떻고…. 차에서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웃던 애들이 맞나?’

WB래빗 입사 전후에 어스래빗의 영상을 보기는 했지만, 현장에서 느껴지는 박력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한심하게도, 이런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쩐다.’

인트로에 이어 곧바로 두 번째 무대 시작. 음원이 공개된 지 고작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팬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노래를 따라불렀다. 응원봉 박자까지 딱딱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번엔 전율이 일었다.

“와….”

툭툭. 그때 옆에 있던 조유찬이 허진영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곤 생글생글 웃으며 핸드폰을 내민다.

액정에 큼지막하게 적힌 물음.

[끝내주죠?]

허진영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조유찬이 빠르게 다음 말을 적었다.

[콘서트는 몇 배 더 끝내줘요.]

“……!”

허진영의 눈이 기대로 가득 찼다.

* * *

어스래빗의 이번 앨범 타이틀곡 은 래퍼들의 강세가 두드러진 상당히 힙하고 세련된 곡이었다. 음악과 파트에 맞춰 촘촘한 구성으로 짜인 안무엔 어스래빗 특유의 흥과 칼군무가 담겼다. 후렴구 부분은 메인 댄서들이 돋보이도록 멤버들을 이끄는 형태.

은근히 고음도 많고 랩이나 보컬이 비는 부분도 거의 없어, 전체적으로 꽉 찬 노래였다.

[아니, 어떻게 이 격한 노래를 라이브로…. 다들 숨은 잘 쉬고 있죠?]

어느덧 컴백 쇼케이스가 시작된 지 50분. 마지막 순서인 타이틀곡 무대를 마쳤다.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웃는 멤버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크게 잡혔다.

[잘 쉬고 있습니다!]

[이번 활동도 대박 날 것 같아요, 우리 어스래빗! 처음부터 전주가 흘러나오고, 보배 씨가 묵직한 랩을 그냥 막 리드미컬하게 쏟아내는 순간 딱 드는 생각이, ‘아, 게임 끝이다. 이건 끝났다.’ 크으!]

MC는 호들갑스러운 칭찬에 이어서 멤버들에게 오늘 컴백 쇼케이스에 대한 감상과 이번 활동에 대한 포부를 물었다. 이제 곧 뮤닷 채널을 통해 나가는 방송이 끝나는 까닭이었다.

[…자, 이번엔 우리 한율 씨가 말해볼까요?]

[네. 우선 오늘 컴백 쇼케이스를 찾아준 이프림, 방송을 통해 보고 있는 이프림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아니야아! 괜찮아아!

[그만큼 더 열심히 할 테니까, 앞으로도 꼭 지켜봐 주세요!]

마이크는 옆에 있던 라이언에게 넘어갔다.

[이프림! 우리 앞으로도 같이 행복해요! 사랑해!]

이프림이 목청껏 외쳤다. 몇몇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우리도 사랑해, 라이언! 행복하자!

무대 맞은편 프롬프터에 뜬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데뷔 4년 차. 멤버들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소감을 마무리하고 씩씩하게 인사했다.

[지금까지!]

[어스!]

[래빗!]

[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뮤닷에서 생중계되던 어스래빗 컴백 쇼케이스 방송이 끝났다.

“와….”

원제로의 연습실.

라일이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원제로도 컴백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어스래빗의 컴백 쇼케이스를 처음부터 보진 못했다. 그래서 타이틀곡 무대가 최초 공개되는 타이밍 즈음에 TV를 켰었다.

“어스래빗 이번 타이틀곡 진짜 역대급이네. 어떻게 매번 역대급이야? 와…. 저걸 또 라이브로 해?”

“커버해보고 싶다. 우리, 어스래빗이랑 서로 안무 커버 챌린지 하자고 제안해볼까?”

변지욱이 신난 얼굴로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멤버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음….”

“그건 좀.”

“어스래빗도 우리도 이번 활동 끝나자마자 콘서트 있잖아. 더 중요한 연습을 우선시해야지.”

“아니, 짧게 후렴만.”

“분명히 1위 후보로 만날 텐데….”

“그래, 하자.”

“어?”

변지욱은 놀란 눈으로 정민솔을 바라보았다. 정민솔이 가볍게 웃었다.

“두세 명만 대표로 해도 되잖아. 1위 후보로 붙든 안 붙든, 서로 안무 커버하면서 곡 홍보해주는 거, 훈훈하게 보여서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크으! 우리 민솔 씨가 달라졌어요, 여러분…!”

“까분다, 변지욱.”

“자자, 지원자 더 없으십니까?”

현강희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

“오, 현강. 넌 꼭 낄 줄 알았다. 그럼 호 형한테 톡으로 물어볼게.”

“그래.”

“…….”

임승준은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몇 시간 후. 임승준은 개인 연습을 위해 WB래빗으로 나왔다.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늦은 시간이라, 회사 내부엔 최소한의 조명만 드문드문 켜져 있었다.

임승준은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어스래빗은 쇼케 끝나고 바로 <뮤직뮤직>으로 출근했겠지?’

이틀 전 방송된 <런던래빗> 마지막 화. 1화는 원제로 멤버들과 다 같이 시청했으나, 2화부턴 스케줄 때문에 본 방송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제 아침에 뜬 기사.

[어스래빗 라이언, 아픈 가정사와 충동조절장애 고백… 눈물]

기사를 보고 놀란 임승준은 4화를 VOD로 봤다. 그리고 라이언이 방송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를 듣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라이언은 본인이 입을 다물어, 의심하는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안 좋은 소문만 듣고서 처음부터 색안경을 끼고 그를 대한 건 잘못이었다.

차남석이 라이언을 스피커 도둑으로 의심하고 다퉜을 때도, 라이언이 평소 그런 의심을 살 만한 행실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차남석의 편을 들었다. 자신은 훔치지 않았다며 강하게 부정하는 라이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지금은 차남석과 오해를 풀고 화해하여 잘 지내곤 있지만, 그건 둘 사이의 문제.

‘나와는 별개지.’

정말로 도둑질한 범인이 박고영이란 사실이 밝혀졌을 때, 연습생들은 라이언에게 그동안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때 묻어가듯 함께했던 사과가 마음에 걸린다.

‘한 번 더 제대로 사과하긴 해야 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냐는 뚱한 얼굴로 쳐다보겠지. 분명.’

타닥, 타닥.

“……?”

2층에 도착, 보컬 연습실 쪽으로 난 복도로 향할 때였다. 임승준은 3층에서 내려오는 경쾌한 발소리를 듣곤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그러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멈췄다. 3층에서 내려오던 라이언도 멈추며 고개를 기울였다.

“응?”

“너 왜 여기에 있냐? 음방은.”

“리허설 끝내고 온 건데.”

“아, 그래…. 안 피곤하냐?”

“피곤해.”

“그러면 숙소에 가서 잠이나 자지, 여기에서 뭐 해.”

“작업. 조금 수정할 게 있어서.”

“어, 그래.”

라이언이 마저 계단을 내려왔다.

“…야.”

임승준은 평소처럼 별다른 인사 없이 지나치던 라이언을 불러세웠다. 라이언이 뚱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

“……그.”

“불렀으면 말을 해.”

제대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바로 몇 분 전인데, 막상 기회가 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임승준은 괜히 뒷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미안했다.”

“뭐래, 이제 와서.”

“…….”

“내가 불쌍한 놈이었단 걸 알고 보니, 옛날의 본인이 더 나쁜 놈이었던 것 같아 새삼 미안해서 그래?”

임승준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너 한국말 진짜 많이 늘었다?”

“그런데 나도 그때 잘못한 거 있으니까 사과 안 해도 돼. 그리고 너 전에도 사과했었잖아. 왜 또 해?”

“그땐….”

순순히 대답하려던 임승준은, 문득 라이언의 페이스에 말리는 기분이 들어서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화제를 바꿨다.

“지욱이가 어스래빗이랑 원제로, 서로 신곡 안무 커버 챌린지하는 거 어떠냐고 말하더라. 두세 명씩 해서.”

“우리 안무 어려운데.”

“싸비 부분만. 일단 지욱이랑 강희랑….”

임승준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정민솔이 하겠다더라.”

라이언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젠 시간도 많이 지나서 우리랑 있었던 일을 걸고 늘어지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혼자 참 끈질기네.”

“나도 그놈이 왜 이렇게까지 어스래빗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데뷔조에 뽑혔던 것도 아니고, 아주 며칠만 잠깐 들어갔다 탈락했으면서.”

하. 말하다 보니 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원래 있었던 자기 자리를 뺏긴 사람처럼.”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라이언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놈 있었으면 어스래빗은 진작에 망했어.”

선물은 현금이 최고란다

KBC <뮤직뮤직> 어스래빗 단독 대기실.

“얘들아, 다시 잠들면 안 된다. 얼굴 부어.”

어스래빗은 어제 컴백 쇼케이스가 끝나고 난 뒤,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고 <뮤직뮤직>으로 출근했다. 리허설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건 자정께. 씻고 잠자리에 들었을 땐 1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그러곤 4시에 재출근했다.

가볍게 세수한 한율은 토너로 피부결을 정돈한 뒤 마스크팩을 붙였다. 옆에서 비슷하게 마스크팩을 붙인 박가람이 손끝으로 제 얼굴을 톡톡톡 두드렸다.

“길 비서,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네, 한 시간 후에 첫 번째 사녹, 세 시간 후엔 두 번째 사녹이 잡혔습니다. 상황에 따라 시간은 얼마든지 딜레이 될 수 있으며 사녹이 끝난 뒤엔 SBC 라디오 홍보, 다시 <뮤직뮤직>으로 돌아와 선배님들에게 앨범 들고 인사, 생방송이 끝나면 곧장 팬 사인회 장소로 이동하고, 사인회가 끝나면… 쉴 수 있을 것 같으냐? 두 시간만 자고 SBC 리허설이다. 음하하핫.”

“잘 정리해줬는데 왜 쟤 때리고 싶지?”

“얘들아.”

매니저 현장전이 대기실로 들어오며 크게 물었다.

“미랑이랑 댄스 커버 챌린지 짧게 할 사람?”

지난주, 크리스탈 래빗의 미랑이 데뷔 6년 만에 솔로 앨범을 냈다. 인어 공주가 연상되는 몽환적이면서 독특한 분위기에, 곧게 뻗어나가는 시원한 음색과 아름다운 춤 선이 어우러진 노래를 가지고.

반응은 대박. 독보적인 미모와 7년 차를 증명하는 탄탄한 무대 실력, 아우라까지 더해져, 미랑은 솔로 데뷔 일주일 만에 <뮤직뮤직> 1위 후보에 올랐다.

“너튜브에 올릴 거래. 토끼 선후배의 의리 댄스 챌리지.”

길우성이 손을 들었다.

“내가 할 것이오.”

“미랑이가 제주 남매는 식상할 것 같다던데.”

“아니, 이 누나가?!”

길우성이 충격받은 얼굴로 덥석 핸드폰을 집었다.

“나만큼 같이 찍어도 안전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강보배가 소심하게 항의했다.

“우리는 위험한 거야…?”

“위험하지, 그럼!”

“…….”

“왜 우리 보배 기를 죽이고 그래. 소속사 선배님이랑 댄스 챌린지 한 번 했다고 엮는 애들이 요즘 어디에 있다고.”

“아직도 많아요, 형.”

“그런가?”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이 차이라도 크게 난다면 모를까, 우리랑 고작 한두 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요.”

그새 미랑과 전화 연결이 됐는지, 길우성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들었지, 누나? 챌린지는 나랑 하자. …엉? …엉, 당연히 안 잊었지. …엉, 이따가 봐.”

길우성이 전화를 끊더니 멤버들을 휙 돌아보았다.

“어쩌지?! 오늘 곰순이 생일인 거 깜빡했어!”

“아직 새벽이야. 침착해, 우성아. 선물 준비할 시간은… 없구나.”

“현우가 어련히 알아서 잘 챙길까.”

“마카롱이나 케이크 같은 거 사서, 꽃다발이랑 같이 퀵으로 보내면 될 것 같은데?”

“어제 컴백 쇼케로 초대한 것 자체가 미리 주는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우성아, 가족 간의 선물은.”

이건우가 진지한 얼굴로 조언했다.

“현금이 최고란다.”

“아.”

[길우성 님이 10,000,000원을 입금하셨습니다.]

이놈이 미쳤나.

이른 아침. 핸드폰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길미현은, 새벽에 왔던 은행 앱 알림을 확인하곤 미간부터 구겼다.

뜬금없이 이런 큰돈을 왜 나한테 보내.

툭. 알림을 클릭해 앱에 접속하자 함께 보낸 메시지가 떴다.

[생선ㅎ 알바ㄴㄴ 공부해라 4학년ㅎ]

“…후.”

메시지를 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생일 선물로 거액을 받았다는 기쁨보다는, 어릴 적부터 ‘누나, 누나.’ 하면서 졸졸 따라다녔던 동생이 어느새 누나의 학비를 보태줄 만큼 자랐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했다.

난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덕분에 단번에 잠에서 깼어.”

몇 시간 후. 내내 학원에서 공부하던 길미현은 점심을 먹으러 세 명의 친구와 분식집으로 왔다.

길미현의 동생이 아이돌그룹 어스래빗 멤버 길우성이라는 사실, 그리고 남자친구가 배우 박현우란 사실을 잘 아는 친구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얼마를 보냈는데 그래?”

“액수를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이번 방학엔 알바 대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실 길우성이 길미현에게 돈을 보낸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작년 여름, 드디어 정산을 받기 시작했다면서 길미현에게 더는 알바를 하지 말라고 돈을 보냈다. 월세와 남은 등록금, 학원비로 쓰라고.

『알바 때문에 성적이 안 나온다는 핑계를 차단해버리겠다!』

친구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런데, 어제 어스래빗 쇼케이스는 어땠어? 난 아이돌 콘서트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해.”

“다른 연예인도 봤어? 가수들은 공연할 때 친한 사람도 초대하고 그런다던데.”

“쇼케이스는… 대단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더라. 그리고 객석이 어두워서 다른 연예인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사실은 바로 옆자리에 블블 민준과 배우 이희우 커플이 있어서 인사를 나눴지만, 이들에겐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정말 부럽다, 미현아. 하…. 나는 동생한테 만 원짜리 상품권이라도 받아봤으면 좋겠어.”

“그런데 미현이 너 왜 SNS 안 해? 팔로우 장난 아니던데.”

“그거 다 동생이랑 남친 때문에 오른 거라… 뭘 올리기가 부담스럽더라. SNS보다 공부에 더 집중하고 싶기도 하고.”

“얘가 무슨 소리야. SNS 팔로워 수도 스펙으로 치는 시대에.”

“너 정도면 막 광고 협찬 같은 것도 들어오지 않아? 미현이 넌 예쁘니까, SNS 잘만 활용하면 딱히 취업하지 않아도….”

“…….”

“…아, 미안.”

저도 모르게 살짝 표정이 굳었던 길미현은 살며시 입가를 올렸다.

“아니야.”

우웅. 길미현은 울리는 핸드폰을 꺼냈다. 박현우가 직접 입력했던 이름이 떴다.

[♡현우♡]

“얘들아, 나 잠깐 통화 좀.”

“응.”

“…어, 현우야.”

길미현이 전화를 받으며 분식집을 나갔다. 친구들은 그런 길미현의 뒷모습을 보다가, 저마다 크고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진짜 부럽다. 얼굴 예뻐, 몸매 좋아, 공부 잘해, 남친은 잘나가는 배우고 동생은 인기 많은 아이돌….”

“난 돈 걱정 안 하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얘기가 제일 부럽더라.”

“그런데 생일 선물로 용돈 많이 받았으면.”

한 명의 시선이 테이블에 있는 음식을 향했다.

“한번은 우리한테 쏠 수도 있지 않아?”

“동생이 보내준 돈이라 미안해서 막 쓸 수 없는 거겠지. 난 이해되는데? 미현이, 작년이랑 재작년에 알바했을 땐 종종 쐈었잖아.”

“아니, 그래도. 그리고 조금 전에 농담으로 한 얘기 가지고 표정 굳는 거 봤지? 아무튼, 가진 애들이 더 해.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데.”

“전에 미현이네 가정사가 기사로 나왔었잖아. 반대를 생각하면, 미현이가 조심성 없이 게시글을 올리면 현우 씨랑 동생한테도 불똥이 튄다는 건데… 당연히 부담스럽지 않겠어?”

“기사 얘기 들으니 생각났는데.”

툴툴거렸던 친구가 힐끗 밖에서 통화하는 길미현을 살폈다.

“미현이네 아빠 말이야. 미현이네가 태어난 뒤에 엄마랑 재혼한 새아버지라 그랬잖아.”

“야, 넌 무슨 그런 얘길….”

“아니, 더 들어봐. 왜,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뒤늦게 친아빠나 친엄마가 성공한 자식들 앞에 나타나서 뭔가 막 요구하잖아. …괜찮을까?”

“…….”

친구들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가, 분식집 통창 너머로 보이는 길미현을 향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박현우와 통화하는 그녀의 얼굴엔 잔잔하면서 행복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쟤네 엄마 그런 곳에서 일했었다며. 친아빠가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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