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KBC <뮤직뮤직> 생방송 2시간 전. 어스래빗은 SBC 라디오 스케줄을 마치고 다시 <뮤직뮤직>으로 돌아와 새 앨범을 챙겼다.
“올 때마다 점점… 우리가 인사하러 가는 선배님들이 줄어드는 것 같아.”
“그만큼 이 바닥이 살아남기가 힘들다는 거지.”
오늘 출연팀 중 어스래빗보다 선배는 고작 네 팀. 그중 대선배는 바로 크리스탈 래빗의 미랑이었다.
“일동, 선배님에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인사.”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미랑의 단독 대기실에 어스래빗 멤버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미랑은 가슴에 손을 살며시 올린 채 다소곳하게 화답했다.
“컴백 축하드립니다. 지난주에 솔로로 데뷔한 미랑입니다.”
“와, 중고 신인이다.”
미랑이 길우성을 향해 상냥하게 웃었다.
“우성아, 까불래?”
“아니영. 여기, 저희 앨범 한 장을 드립니다. 선배님은 여덟 장을 내놓으세요.”
“뭐지, 이 손해 보는 기분은?”
미랑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준비한 앨범을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나눠주었다. 같은 소속사라, 앨범을 담은 종이가방이 똑같았다.
“감사합니다. 1위 후보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축하드립니다.”
“아, 나 한율 씨 만나면 묻고 싶은 거 있었는데.”
“……?”
미랑이 조금 서운한 얼굴로 물었다.
“드림래빗 애들한테 구미호 인형 줬다면서요?”
“아. 하나 드릴까요?”
“네!”
“그러고 보니 그 인형, 몇 개 남았어?”
“두 개요. 크래 선배님에게 드리면 이제 하나 남았네요.”
글로벌 OTT 측에서 선물 받은 구미호 인형은 총 열 개. 그중 세 개는 본가와 현재 숙소, 연습실에 하나씩 뒀다. 그리고 드림래빗에 하나, 라이언에게 하나, 한네모의 딸 생일 선물로 하나, 사촌 동생인 쌍둥이들에게도 하나씩 나눠줬더니 어느새 두 개만 남았다.
“그거 되게 많이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벌써?”
유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대표님에게도 드렸지?”
“…아.”
“안 드렸구나….”
크래 매니저가 씩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대표님, <서울 구미호> 종영 뒤로 한율 씨가 언제 찾아오나 오매불망 기다리셨었는데.”
“곧 인형 들고 찾아뵈어야겠네요.”
큭큭. 멤버들과 미랑이 작게 웃었다.
“그럼 저희는 다른 분들께 인사드리러 가 보겠습니다. 쉬세요, 선배님.”
“네, 수고하세요.”
“이따가 한 3, 40분 뒤? 그때 즈음 또 올게, 누나.”
“응. 나중에 봐.”
미랑의 대기실을 나온 멤버들은 다음 선배 출연팀의 대기실로 이동했다. 인사를 모두 마치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을 땐, 후배들이 문 앞 복도에 나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컴백 축하드립니다!”
잠시 후, 생방송 <뮤직뮤직>이 끝나고 팬 사인회 장소로 이동 중. 어제부터 잠을 제대로 못 잔 까닭에 멤버들 모두 곯아떨어져, 차 안은 고요했다.
팬 사인회장에 도착하고 나선 피곤한 기색을 감추곤 환하게 웃었다. 멤버들과 만나겠다는 일념만으로 앨범을 최소 수십 장에서 수백 장을 사고 사인회에 당첨된 팬들이었다.
“한율아, 짠!”
“어?”
정해진 시간에 따라 차례차례 자리를 옮기는 팬들. 한 팬이 한율 앞에 앉자마자 종이가방에서 앙증맞은 한복 두 벌을 꺼냈다.
“달냥이 주려고 만들었어!”
“와,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누나. 달냥이가 좋아하겠다. 제가 꼭 인증샷 올릴게요.”
“정말? 고마워, 한율아. 나 벌써 감동할 것 같아.”
“감동은 제가 해야죠. 누나 옷 만든 솜씨, 와….”
한율은 감탄한 얼굴로 고양이 한복을 살피곤 물었다.
“이쪽 전공이세요?”
“응, 의상 디자인.”
한율은 엄지를 척 들면서 씩 웃었다. 팬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헤헷. 나중에 너희들 무대 의상을 만드는 게 내 꿈이야.”
“기다릴게요, 누나. 홧팅!”
“홧팅!”
“여기엔 뭐라고 적어드릴까요?”
“마음껏 써 줘.”
한율은 사인지에다 팬의 이름을 적곤 강한 필체로 ‘꼭 다시 만나요!’라고 적었다.
그다음 팬.
“응? 누나, 재작년에도 왔었죠?”
“헉. 나 기억해, 율아…?”
“네. 그때 저한테 선물해주신 머그컵,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어요. 작년에 제 방에서 라방하면서 그걸로 차도 마셨었는데.”
“어, 나 봤어!”
놀란 팬이 의자에 앉은 채 펄쩍 뛰더니 돌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흐읍.
“왜 울어요, 누나. 뚝.”
“네가 나 울렸잖아…. 흐윽.”
팬들과 대화 및 사인 시간이 끝난 뒤엔 작은 무대에서 타이틀곡을 포함해 세 곡을 불렀다.
팬사인회가 끝난 건 밤 9시. 멤버들은 다시 차에서 기절하듯 잠이 든 채 이번엔 SBC로 이동했다. 한 시간 전인 오후 8시에 MBS K <주말아이돌> 어스래빗 편이 방송됐지만, 당장 모니터링할 정신이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SBC 에 도착한 후엔 PD와 스태프들을 찾아가 앨범과 함께 인사를 드리곤 대기실에 도착. 돗자리나 소파에서 한 시간 정도 잔 뒤 세수만 하곤 리허설을 했다. 그리고 2시간 쪽잠 뒤 사녹과 스페셜 영상 녹화 준비.
짝짝. 현장전과 교대로 투입된 조유찬이 손뼉을 치며 힘을 북돋워주었다.
“녹화 다 끝나면 숙소 가서 편히 잘 수 있어, 얘들아. 더 힘내자.”
“몇 시간이요?”
조유찬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두 시간 정도? 아, 그리고 너희 오늘 1위 후보다. 축하해.”
내가 연애 중이라니
“컴백하자마자 1위 후보!”
오늘 생방송 큐시트 순서를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으나, 비몽사몽이었던 터라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한율과 차남석, 라이언을 제외한 멤버들이 기쁨의 탄성 혹은 환호성을 질렀다.
“우오오…!”
“컴백하자마자 1위 후보에 오른 게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 좋다.”
어스래빗은 작년, 컴백 첫 주 만에 뮤닷, MBS K, MBS, KBC에서 1위를 받았었다.
“이러니까 우리 꼭 대세 그룹 같다.”
“너희 대세 반열에 오른 거 맞아요. 6일 자정에 실시간 음원 차트 1위 찍은 거 기억 안 나니, 얘들아? 사과튠즈에서도 1위 싹쓸이해놓고선?”
매니저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샵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어스래빗 1위 후보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단장을 마친 어스래빗 멤버들은 첫 번째 사녹을 위해 대기실을 나섰다. 백스테이지에는 어스래빗 다음 순서인 ACCOM이 먼저 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 안녕하세요.”
“의상 엄청 멋지신데요?”
“노래 콘셉트랑 분위기에 맞추느라…. 하하.”
두 팀 모두 오늘 컴백 무대였으나, 두 곡을 부르는 어스래빗과 달리 ACCOM은 한 곡만 부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ACCOM 멤버들의 얼굴엔 어스래빗을 향한 시기나 질투가 보이지 않았다.
김형수가 머쓱하게 웃으며 유호의 팔을 툭 쳤다.
“팬들이 호 너 만나면 꼭 고맙다고 전해달라더라.”
다른 ACCOM 멤버들이 일렬로 서서 유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호 선배님!”
며칠 전, ACCOM의 신곡 이 공개되자, ACCOM의 팬들도 유호의 SNS에 찾아와서 좋은 곡을 줘서 고맙다는 댓글을 잔뜩 달았었다. 그들이 이러는 건 단순히 곡을 줘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낸 노래보다 이 가장 좋은 반응을 얻어서인 듯했다. M/V 조회 수 오름세도 그렇고.
유호가 멋쩍게 웃었다.
“보배도 많이 도와줬는데.”
“감사합니다, 보배 선배님!”
“엇, 아닙니다! 전 숟가락 얹는 정도만 도왔어요.”
“1위 후보 되신 것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첫 번째 사녹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갈 때도, 스페셜 영상 촬영과 두 번째 사녹을 다녀올 때도 어스래빗은 마주치는 다른 가수들에게 컴백과 1위 후보 축하 인사를 받았다.
이제 웬만한 불미스러운 사건·사고가 없는 한, 이대로 쭉 순항할 그들을 향한 부러움과 질투의 눈빛도.
* * *
[저희가 오늘 만약 1위를 하게 된다면!]
SBC 생방송 중, 어스래빗의 컴백 기념 인사 및 인터뷰 시간. 박가람이 대표로 나서서 1위 공약을 외쳤다.
[보컬 라인이 랩과 퍼포먼스 멤버들을 업은 채 노래 부르겠습니다!]
[오오!]
MC들이 과장된 리액션을 보였다.
[그럼 이 자리에서 시범 한번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원래 대본에 없던 요구일까. 서로를 바라보는 멤버들의 시선이 어지러워졌다.
차남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업겠습니다. 자.]
덥석. 라이언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차남석의 등에 업혔다. 그러곤 신난 얼굴로 손을 위로 뻗어 흔들었다.
[예에~!]
[…무거워!]
[노래해야지, 남석아.]
[네가 가둔 꿈속 Garden, 빗장 열어억!]
서한율이 활짝 웃으며 컷했다.
[네, 여기까지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남석이 상체를 곧게 펴며 라이언을 떨어뜨렸다. MC들이 활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범을 보니, 공약이 지켜졌을 때의 무대 모습은 과연 어떨지 정말 기대되는데요?]
[그럼 어스래빗의 무대는 잠시만 기다려주시고! 다음 무대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다음 무대는…!]
명상센터로 위장한 마법 학교.
끼웅. 두 발로 선 구동이 TV 속 서한율을 향해 가냘프게 울었다. 계나리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구동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구동이, TV 속 사람 얼굴도 다 구별할 줄 알고. 똑똑하네?”
구동을 명상센터로 데려온 JE는 다른 방에서 문을 닫은 채 마나 유동 중이었다.
이해원은 얼마 전에 집으로 들어갔다.
VEL 엔터와 안인섭 관련 사건 수사가 진행된 지 몇 달. 더는 그쪽에서 이해원을 찾는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우그룹의 이채현도 해외 지사로 발령받아 한국을 떠난 상태. 언제까지고 명상센터에 숨어 지낼 수도 없는 법인데다, 마침 어머니도 퇴원하여 간호를 위해 겸사겸사.
그래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서한율은 교장의 선물로 포장한 아이템 몇 가지를 그에게 챙겨주었다.
‘겉으론 안 그런 척해도, 우리 오빠가 제자를 참 아낀다니까?’
문득 서한율에게 처음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의 일들이 떠올랐다. 계나리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우리 오빠들, 1위 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더는 TV에서 서한율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몸을 기우뚱 숙인 구동이 앞발로 바닥을 짚었다. 툭. 그러곤 방석 위로 올라가 몸을 웅크리며 잠을 청했다.
“아, 나도 앱으로 투표해야지.”
계나리는 핸드폰을 집었다. 옆에는 어떤 장소의 CCTV 영상과 문서창을 띄운 두 대의 노트북이 활짝 열려있었다.
[게이트 모의 훈련 계획서]
우웅.
“……?”
막 앱을 통해 어스래빗 노래에 투표했을 때였다. 학원에서 만난 어스래빗 팬 동료, 자칭 서한율·차남석 1호 팬인 이아름이 톡을 보냈다.
-[나리나리]
-[이것 좀 봐봐ㅜㅜ]
-[(링크)]
-[(이모티콘)]
링크는 한 커뮤 게시글로 이어졌다.
[제목: ㅅㅎㅇ 연애 중인 증거]
[(사진)
ㅅㅎㅇ이 키우는 고양이.
(사진)
똑같이 생긴 고양이 데리고 한밤중에 공원 산책 나온 남자. 모자하고 안경, 마스크 써도 팬들은 누군지 딱 알 거임.
(사진)
얼마 전에 ㅅㅎㅇ이 입었던 겉옷 일치, 신발 일치.
뭐 혼자 고양이 데리고 산책 나올 수도 있음. 그런데.
(사진)
웬 여자랑 만나서 대화 나누고 같은 방향으로 걸어감.
(사진)
(사진)
그리고 올해 초에 찍힌 사진. 공원에서 만난 여자랑 키랑 체형 비슷한 여자가 ㅅㅎㅇ 팔 잡고 신발 고쳐 신는데도 뿌리치기는커녕 넘어질까 봐 매너 손 준비. 심지어 이 여자가 든 가방까지 들어주고 웃으면서 이야기 나눔.
(사진)
이건 ㅅㅎㅇ이 작년에 해외에서 입국할 때 들고 온 명품 로고 찍힌 종이가방. 여자가 든 가방이랑 브랜드 일치.
너희 오빠 연애한 지 최소 몇 달 됐어, 얘들아^^]
-두 여자가 동일 인물은 맞음?
-고양이랑 공원 산책하는 게 더 충격적인데
ㄴ나도
ㄴ3333333
-그래서 연애 중이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음?
-아래는 스타일리스트나 샵 직원이겠지. 돈 잘 버는 아이돌들, 같이 오래 일한 스태프들한테 명품 선물하는 일 흔함. 그리고 매니저한테 차까지 선물하는 앤데ㅋㅋㅋ
-ㅅㅎㅇ은 연애할만하지 않나? 당장 아이돌 때려치워도 배우로 승승장구할 거고, 돈도 많은데 무서울 게 뭐 있음?
-여자가 동일 인물이란 증거를 가져와라. 저런 체형이랑 스타일 당장 집 밖만 나가도 널렸어.
-위는 모르겠고 아래는 빼박 같은데? 하필 면세점에서 산 브랜드랑 같은 명품 가방을 가지고 저렇게 친근하게 스킨십 한다고?
“…….”
고양이와 공원 산책을 나온 남자는 서한율이 맞을 것이다. 구동을 찾으러 다닐 때 달냥을 대동했다고 했으니. 아래에 찍힌 사진은 아예 얼굴이 고스란히 다 나왔고.
그러나 상대 여성 얼굴은 토끼 스티커로 가려져 누군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우웅.
-[아니겠지ㅜㅜ?]
계나리는 작게 한숨을 쉬곤 조용히 웃었다. 서한율이 연애할 심적 여유가 없다는 건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으므로.
[아닐 거야. 오빠 인기 많아지니까 그럴싸하게 짜깁기해서 어그로 끄는 거다에 떡튀순 세트 건당ㅎ]
-[역시 믿음직해 나리나리]
-[(이모티콘)]
‘그나저나 이 글, 조회 수를 보니 이미 여기저기 퍼졌겠는데?’
그래도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왜냐하면 서한율이므로. 소속사도 법적 대응이 취미인 WB래빗 엔터고.
‘금세 가라앉겠지.’
잠시 후, 계나리는 구동을 안은 채 제자리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TV 속에서도 컴백하자마자 1위를 거머쥔 어스래빗 멤버들이 서로 업거나 업힌 채 엉거주춤 노래를 불렀다.
서한율에게 업힌 길우성이 자신의 파트 도중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이프림, 감사합니다악!]
그날 밤. 서한율이 연애 중이라는 루머는 이런저런 살집과 추측, 예전에 돌았던 오다리 루머까지 곁들여져 기사로 떴다.
[어스래빗 서한율, 비연예인 여성과 몇 달째 교제 중?!]
실검 3위엔 [서한율 공원데이트], 10위엔 [서한율 고양이산책]이 올라갔다.
-고양이 데리고 산책해도 되나여?
-산책냥이 개부럽다
-님들 서한율 따라서 고양이 데리고 산책하지 마세요. 겁에 질려 도망쳐서 사라지거나 큰 스트레스를 받아서 아프거나 둘 중 하나임ㅠㅠ
한율은 2차 팬 사인회를 마치고 밤 10시가 훌쩍 지나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곤 느긋하게 씻고 나서 라이브 방송을 켰다. 내일 회사가 공식 입장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그 전에 직접 말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
-어스래빗 1위 축하해♡♡♡♡♡
-한율아아아아아
-이제야 막 퇴근했을 텐데ㅜㅜ 안 피곤해?
-여전히 빛나는 우리 연예인의 민낯
-어떤 한심한 인간이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루머를!!!
-싹 다 고소하자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은 얼굴로 톡창을 보다가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달냥을 데리고 공원 산책을 하긴 했지만, 그곳에서 대화를 나눈 여성은 산책냥이 신기해서 말을 걸었던 사람이며, 이름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사진 있죠? 제가 가방 대신 들어주는 사진.”
-웅웅8ㅅ8
-이 와중에 한율이 나른한 목소리 너무 좋다
-그렇게 웃지 마 심장 뽀사져
“그분은 우리 사촌 누나예요. 설날에 다른 친척 집으로 이동할 때 찍힌 것 같은데, 누나가 한창 취업 준비로 고생하던 때라 기운이 없었거든요.”
그러곤 자연스럽게 옛날얘기를 꺼냈다. 팬들이 이런 소소한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므로.
“제가 외동이잖아요. 그래서 어렸을 때 누나가 우리 집에 놀러 오면 항상 저한테 동화책도 읽어주고, 같이 블록 쌓으면서 놀아주고 그랬었는데… 서로 그렇게 막 살가운 성격이 아니다 보니까, 이젠 명절에만 만나네요.”
-허위사실 유포자 이 자식, 취준생한테 무슨 짓을
-누나랑 몇 살 차이양?
-루머 퍼뜨린 애 진짜 지옥에나 가라
-피곤한 애한테 라방으로 해명까지 하게 만들고 나쁜 사람들
-사촌 동생이 서한율이면 무슨 기분일까
-누나 기사 보고 놀랐겠다
-누나한테서 연락 왔어?
“연락이요? 네, 왔어요. 톡으로….”
한율은 핸드폰을 꺼내, 서한림이 보낸 톡을 읽었다.
“너한테 정말 그 명품 가방 받고 오해받았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흑흑. …아, 그 가방 때문에 많은 분이 오해하셨죠? 제가 작년에 입국할 때 든 종이가방 로고 브랜드가 같아서. 그때 그거 양가 할머니께 드릴 선물로 사 온 거였는데…. 할머니가 누나 보더니 너무 안쓰럽다고, 취업 될 때까지 누나한테 쓰라고 빌려주신 거거든요.”
-!!!!!
-서한율 진짜 루머 퍼뜨린 사람들 고소하자
한율은 멋쩍게 미소 지었다.
“뭔가 좀 구구절절 해명하게 된 것 같은데,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저는 현재 연애는커녕 썸도 전혀 타지 않는다는 사실. 이것만 알아주세요. 아, 그리고 고양이 산책은 여러모로 위험하니까, 섣불리 따라 하시면 안 돼요.”
이렇게 한율이 하루도 안 되어 직접 해명하자, 비연예인과 몇 달째 교제 중이라는 둥, 공원에서 데이트한다는 둥 루머는 금세 사그라드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또 다른 스캔들 기사가 터졌다.
[어스래빗 박가람, 히아신스 호수와 1년째 열애 중]
“……?”
며칠 만에 잠을 푹 자고 일어난 박가람은 연예뉴스란 메인, 실검을 장악한 [호수 박가람 열애]를 보곤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 연애했었어?”
그야 막 치고 올라오는 대세 그룹이니까
기사의 발단은 한 너튜버가 올린 영상이었다. 너튜버는 평소 인기 많은 아이돌을 상대로 악의적이거나 억측 짜깁기 영상을 만들기로 유명한 사이버 렉카였는데, 이번엔 뜬금없이 박가람과 호수를 겨냥했다.
음성을 변조한 너튜버가 덤덤하게 설명한다.
[박가람과 호수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닌 동갑내기로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 두 사람은 학교에 다닐 때 접점이 없었습니다. 반이 다르기도 했고, 호수는 고1 때 이미 대형기획사 데뷔조에 있어서 인기가 어마어마했거든요. 함부로 다가가기엔 격차가 존재했죠.]
무대 위, 화려하고 예쁘게 꾸민 호수. 그와 대비되는 박가람의 수수한 졸업사진.
[그러나 2017년 4월, 박가람이 어스래빗으로 성공적으로 데뷔하며 두 사람은 아이돌 선후배 사이로 연예계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때도 격차는 존재했죠. 왜냐하면 대형기획사랑 중소잖아요. 하물며 남돌은 데뷔 초반에 연애의 ‘연’자가 나오면 바로 망돌 루트를 탈 확률이 높아서 엄두를 못 냈겠죠. 그래서일까요?]
주관적인 추측.
[두 사람은 어스래빗이 막 성공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때부터 슬슬 썸을 타기 시작합니다. 2019년 설특집 아육대에서 만나 팬들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네요.]
두 사람이 친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에 대해서도 떠벌렸다. 이 또한 너튜버의 추측이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제가 올린 퍼플아워 진은수 실체 영상 기억하시죠? 진은수가 서한율 좋아했잖아요. 그런데 서한율이 진은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언니인 호수로선 얼마나 어이가 없겠어요. 네가 내 동생을 차? 그런데 당사자에게 따지기엔 체면이 있으니 동창인 박가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걸 계기로 서서히 가까워진 게 아닐까요?]
너튜버는 두 사람이 비슷한 아이템을 착용한 걸 보며 커플 아이템이라고, 이게 두 사람이 비밀 연애 중이란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3년 전, 박가람이 숙소에서 라방할 때 함께 찍힌 이 다람쥐 인형. 그런데 작년, 호수가 똑같은 인형을 가진 게 포착됩니다. 심지어 옆에는 토끼 인형이랑 어스래빗 앨범도 있어요. 확대해볼까요? 그리고 박가람은 걸그룹 안무 커버를 자주 했었는데, 유독 히아신스 노래 비중이 높….]
“그만!”
그제야 잠에서 완전히 깼는지, 박가람이 리모컨의 음성 검색 버튼을 눌렀다.
“어스래빗의 뮤직비디오!”
사이버 렉카의 영상 대신 M/V가 재생되었다.
박가람이 씩씩거렸다.
“진짜 엮으려고 작정하면 못 만드는 게 없다더니…. 따로 만나는 사진이나 영상이 하나 없는데, 아이템 몇 개 우연히 겹친 거 가지고 1년 동안 사귀었다고? 그리고, 그걸 또 믿는 사람들은 대체 뭐야?”
“사석에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배우가 곧 결혼한다는 기사까지 뜨는데, 뭘.”
“그 기사 되게 황당했었지. 심지어 그때 당사자가 본인 결혼 기사 보곤 ‘나 결혼해?’하면서 놀랐었잖아.”
“나도 서한율처럼 당장 라방해야겠다.”
유호가 방으로 들어가려는 박가람의 뒷덜미를 잡았다.
“유찬이 형 10분 후에 도착한다니까 다들 나갈 준비해. 대응은 회사에서 알아서 할 거야.”
한편 그 시각, 아림 엔터테인먼트.
히아신스의 호수는 매니지 사업 본부장과 대면 중이었다.
본부장이 펼친 노트북에선 작년 RMMA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뛰어난 무대 연기와 몰입도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어스래빗의 . 넋을 놓고 멍하니 무대를 보는 히아신스 멤버들이 잡힌 순간, 본부장이 영상을 정지시켰다.
탁.
“이때 이미 뮤닷 측이 둘 사이를 알고 있어서, 일부러 연달아 잡은 거란 억측까지 나온다.”
“진짜 갖다 붙이기 선수들이네요. 번호도 모르고, 따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랑 어떻게 1년 동안 연애한다는 건지.”
“정말 아니지?”
“네, 아니에요.”
너튜버가 커플 아이템이라고 주장한 것도, 우연히 협찬이 겹쳤거나 비슷한 걸 끼워 맞춘 것에 불과했다. 다람쥐 인형은 작년에 팬에게 선물 받은 인형이었으며, 호수는 박가람도 같은 인형을 갖고 있단 사실을 전혀 몰랐다.
토끼 인형과 어스래빗 앨범 옆에는 다른 팀에게 선물 받은 앨범도 진열되어 있었으나, 너튜버가 악의적으로 그 부분을 잘라냈다.
팬들이 당시 해당 라이브 방송 풀버전을 확인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며 열심히 설명했지만, 너튜버는 팬들의 댓글을 삭제, 동영상에 혹한 이들의 댓글만 두는 둥 댓글 여론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그쪽이 착각할 만한 여지를 줬다거나.”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일터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하고 안부만 묻는 정도라고요.”
본부장이 이렇게 집요하게 묻는 건, 지금껏 소속사 아이돌에게 뒤통수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까닭이었다.
정 연애하고 싶으면 차라리 같은 회사 아이돌을 만나라고, 솔직히 말해야 회사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하는데도, 꼭꼭 숨어서 비밀 연애하다가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일이 종종 발생해서.
“그래. 그럼 믿고, 기사 내보낸다.”
“네.”
호수는 본부장에게 꾸벅 인사한 뒤 사무실을 나왔다. 그러곤 속에서 끓어오르는 억울한 마음을 한숨으로 푹 내쉬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두고 만들어진 온갖 악의적인 루머에 비하면 별것 아닌 수준이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대체 왜 갑자기 나랑 가람이를 엮은 거지?’
실제로 친한 남사친 남돌도 아니고, 왜 하필?
“그야 어스래빗이 막 치고 올라오는 대세 그룹이니까.”
연습실로 돌아와 다른 멤버들에게 의견을 묻자, 바로 그럴싸한 대답이 나왔다.
“조회 수 좀 뽑으려고 그런 거겠지. 타이밍을 봐. 어스래빗이 컴백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올렸잖아.”
“어스래빗 해외 팬들은 아주 난리 났더라. 어제는 서한율, 오늘은 가람이랑 호수 너. 이렇게 연달아 두 건이 일어나니까 하나는 진짜 아니겠냐고.”
국내에서는 히아신스가 더 대중성도 있고 인기가 많지만, 해외에서는 어스래빗의 인기가 훨씬 많았다. 투어 개최 도시, 동원된 관객 수나 인터넷 반응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는 보이그룹과 걸그룹의 소비층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차이였다. 가끔 잘나가는 보이그룹 못지않게 월드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는 걸그룹도 있지만, 그건 정말 드문 케이스.
“아까 매니저 오빠한테 들었는데, WB래빗에서도 가람 씨가 절대 아니라고 부정해서 비슷하게 기사 내기로 했대.”
“어차피 사실이 아니니까 빠르게 가라앉을 거야, 호수야. 너무 걱정하지 마.”
리더가 호수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속상한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물었던 호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 때문에 또 은수가 거론되니까….”
박가람과 호수의 열애설을 터뜨린 너튜버는 이전에 진은수를 악의적으로 공격한 바 있었다.
서한율에게 꼬리 치다 안 되니까 그와 같은 팀이자, 함께 <뮤직센터> MC를 했던 유호에게 들러붙었다느니, 비슷하게 서한율과 친한 JE에게도 치근덕거렸다느니. 해당 영상 섬네일에는 친오빠와 사이좋게 걸어가는 사진을 교묘하게 편집해 ‘정말 남자 없인 못 사는 듯ㅉㅉ’ 이런 자막을 달기도 했다.
“대체 왜 우리 회사는 그런 사람을 가만히 두는 건지 모르겠어. 진작 고소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너튜브 본사가 미국에 있다 보니까 협조 구하는 것도 복잡하고, 또 고소 자체가 오래 걸리잖아.”
“답답해, 정말. 그사이에 거짓 영상으로 정산받는 것도 괘씸하고.”
호수는 한참 동안 멤버들에게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다가 진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진은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나한테 먼저 괜찮냐고 전화나 톡을 줬을 텐데, 이상하네.’
무음으로 두거나 방해금지로 설정했을 수도 있기에, 호수는 톡을 보냈다.
[은수야, 바빠?]
진은수의 답변은 3시간이 지나야 돌아왔다.
-[언니, 미안ㅜㅜ]
-[폰 꺼놓은 거 깜빡하고 게임 하다가 이제야 알았어. 통화 괜찮아?]
-[(이모티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