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도 구동이 만져보고 싶다, 지은아. 언제 놀러 가면 돼?]
PC 앞에 앉아서 <혼자서도 잘 살아요> 너튜브 반응을 확인하던 중. JE는 전화하자마자 불쑥 용건을 말하는 지헌에게 단호히 대답했다.
“안 돼요. 구동이 스트레스받아.”
-[그럼 보기만 할게. 나 토끼 가까이에서 본 적 없단 말이야.]
“형 지금 촬영 중 아니에요? 한가해요?”
-[힐링이 필요하다, 막내야.]
“형의 힐링이 구동이에겐 스트레스에요.”
-[와, 치사한 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저는 우리 부모님이 키우셨거…든요?”
마우스 휠을 굴리던 JE의 손이 멈췄다.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끊을게요, 형.”
-[어? 야, 지은아아….]
뚝. 통화를 끊은 JE는 책상에 팔꿈치를 세우며 댓글 하나를 유심히 읽었다.
-이 토끼 혹시 앞발 발톱이 다람쥐처럼 툭 튀어나오고 구부러져 있지 않나요? 우리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산에 갔다가, 앞발이 이상하게 생기고 귀가 처진 작은 토끼가 산삼 꼭 안고 있는 거 보고 쫓아갔다가 놓쳤었는데, TV 보시더니 그때 그 토끼랑 닮았다고 하시네요. 50년 가까이 지났으니 새끼의 새끼일 수도 있고
‘산삼?’
고개를 돌려 구동을 보았다. 구동은 서한율이 선물해준 화분 옆 쿠션에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앞발 특징을 정확히 아는 걸 보면 구동이 맞는 것 같은데.’
마법 학교 사람들은 지금껏 구동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고 했다.
JE는 해당 댓글에 질문을 달았다. 팬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부계정으로 접속했으니, JE 본인이란 건 꿈에도 모를 것이다.
ㄴ어느 산에서요?
댓글 알림 설정을 해놓았는지, 곧 답변이 달렸다.
ㄴ관악산이요.
ㄴ감사합니다.
JE는 [관악산 토끼]를 검색해보았다. 79년도에 행해진 토끼 방사 뉴스, 토끼 바위 관련 영상이 떴다.
‘검색으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면 이미 나리 씨가 찾아냈겠지.’
달칵. JE는 검색창에다 커서를 댔다. 그러곤 ‘토끼’ 단어를 지우고 ‘미스터리’를 대신 넣었다. 왜냐하면 구동이 마물이니까.
[관악산 미스터리] 검색.
“……?”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영상 하나가 떴다.
[엠마 에커먼과 미국인 실종자, 섬뜩한 미스터리]
영상 소개글엔 이런 해시태그가 걸려 있었다. [#관악산미스터리 #엠마에커먼]
‘이거….’
틀림없었다. 작년에 미국으로 스케줄을 갔을 때, 멤버가 참 이상하고 섬뜩하다며 JE에게 보여주었던 그 영상이었다.
‘이게 관악산에서 있었던 일이었어?’
작년, 미국 배우 엠마 에커먼이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60년대 중반, 한국에서 실종된 텍사스 출신 로건 워커를 찾습니다.]
이 글은 한국의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에 기사로 뜨기도 했다.
몇 달 뒤. 누군가의 제보를 받은 엠마 에커먼이 실제로 한국을 찾았다. 이 영상은 당시 엠마 에커먼의 동선을 그대로 따라간 너튜버가 올린 것이었다.
‘무슨 내용이었더라?’
멤버가 영상을 보여줬을 때 JE는 별 흥미가 들지 않아서 딴짓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Do you believe in magic?]
저장되지 않은 복잡한 번호로 이런 문자메시지가 들어왔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계나리 혹은 교장이 보낸 것 같다.
‘그 메시지에 대해선 나리 씨한테 물어보고, 일단.’
JE는 영상을 클릭했다.
[…1960년대 중반 한국. 아무리 서울이라지만, 험하고 가파른 산길을 구불구불 오르는 외국인은 단연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날, 로건으로 추정되는 외국인 남성을 본 목격자는 걱정되는 마음에 그 뒤를 따라갔다.]
너튜버가 직접 촬영한 것 같은 관악산 사진이 흑백 처리되어 나왔다. 나름대로 옛 분위기를 내려고 그런 듯했다.
[왜냐하면 외국인 남성은 등산에 적합하지 않은 복장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관악산은 지금처럼….]
쓸데없는 부가 설명은 재생 바를 옮겨서 패스.
[…목격자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외국인 남성은 금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그가 간 곳으로 추정되는 험준한 곳에서 아주 강렬한 푸른빛이 번쩍이며 나무와 바위, 바닥의 이름 모를 풀. 모든 것을 물들였다고 한다. 목격자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 동안 꿈쩍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불러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영상 속 사진이 쓸쓸한 산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엠마 에커먼에게 제보했던 이는 목격자의 손자였다. 목격자는 작고한 지 오래.
-이거 제보자가 엠마 한번 만나보려고 지어낸 소설이라니까ㅋㅋㅋ
‘우연치곤 신기하네.’
계나리도, 서한율도 마나를 다룰 땐 눈이 푸른빛으로 물들던데.
‘혹시 이 로건 워커란 사람도 마법사인가? 아니, 애초에 증거가 하나도 없는 이야기잖아. 미국인이 왜 서울 관악산까지 와서 사라지냐고.’
내친김에 JE는 엠마 에커먼의 SNS를 찾았다. 그러곤 영어로 이렇게 물었다.
-[로건 워커의 행방을 찾으셨나요?]
솔직히 답변이 오리라곤 기대하진 않는다. 어마어마한 팔로워 수에, 게시글 하나에 달리는 댓글은 천 개가 기본이니.
뀨웅…. 마침 구동이 힘껏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계나리가 구동에게 선물한 펜던트 목걸이가 노을빛에 반사되었다. 펜던트에는 ‘구동이’ 이름과 계나리의 연락처가 새겨져 있었다. JE는 사생 스토커들 때문에 번호를 자주 바꾸는 까닭.
‘내일 저 녀석 데리고 관악산에 가볼까?’
그 산에 있었구나
<뮤직뮤직> 생방송이 끝난 후. 어스래빗 대기실은 멤버들이 1위 트로피를 안고 인증샷을 찍거나 퇴근 준비를 하느라 어수선했다.
“야, 라이언.”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정민솔이 고개를 내밀었다. 길우성과 트로피를 들고 놀란 표정의 셀카를 찍던 라이언이 고개를 돌렸다. 평소 정민솔을 대할 때마다 뚱해지던 표정 변화도 없이.
“왜?”
정민솔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와 핸드폰을 내밀었다.
“번호 좀 알려주라.”
“왜?”
“너한테 따로 조용히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응.”
라이언이 선뜻 정민솔의 핸드폰을 받아 번호를 입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우웅. 라이언의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다.
“전화 전엔 톡부터 해.”
“…그래.”
라이언이 이렇게 순순히 나올 줄은 몰랐는지, 정민솔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돌려받았다.
“1위 축하한다.”
“응.”
“1위 축하합니다. 1위 축하해.”
정민솔은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에게도 축하 인사를 건네곤 대기실을 나갔다.
차남석이 라이언의 팔을 툭 쳤다.
“너 무슨 생각이야?”
라이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 기회?”
숙소로 돌아온 건 tv Mu 채널에서 <뮤직마켓>이 한창 방송될 때였다. 그러나 3시간 후 SBC 음방 리허설을 하러 가야 하는 터라, 멤버들은 나중에 보자며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한율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멤버들이 옆에 있어서 바로 확인하지 못했던 계나리의 톡.
-[손지은 씨가 구동이 데리고 관악산에 가보고 싶대요.]
-[(이미지)]
할아버지가 TV에 나오는 구동을 보더니, 관악산에서 산삼을 끌어안고 있었던 이상한 토끼와 닮았다고 말씀하셨다는 댓글 캡처. 묘사한 발톱 특징이 들어맞는 걸 보니 구동이 맞는 듯했다.
‘그 녀석, 관악산에 있었구나.’
‘로건 워커’로서 마지막으로 마법을 사용한 장소가 그곳이었다. 50년이 훌쩍 지나 마법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남았을 터라, 구동을 찾을 땐 관악산을 둘러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에 치일 뻔했던 장소와 거리도 멀고, 사이에 한강도 있어서.
[잃어버릴 수 있으니 안 된다고 해.]
관악산은 ‘서한율’이 된 뒤로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늘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래도 구동을 그곳에 데려가면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른다.
‘내가 직접 데려가서 어떤 곳에서 살았는지 확인해봐야겠어.’
[구동인 언제 맡긴대?]
계나리의 답변은 목욕하고 나온 뒤 확인했다.
-[15일에 1박 2일 동안 집 비운다고, 아침에 센터에 맡기기로 했어요.]
-[그리고 오늘 1위 축하드려요!]
-[(이모티콘)]
어스래빗은 내일 음방 스케줄을 끝내자마자 부산으로 날아가 팬 사인회를 진행하고, 그곳에서 하룻밤 묵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15일은 오후에 콘서트 연습을 제외하곤 스케줄이 없다.
‘부산에서 새벽에 출발하면 되겠지. 아니면 다음 주말에 느긋하게 다녀와도 되고.’
급할 건 없다.
[그래, 고마워.]
다음 날 새벽. 어스래빗이 SBC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쪽잠을 자던 시각.
JE는 등산하기에 좋은 옷을 걸친 채 구동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곤 구동을 위해 마련한 대형 케이지 안에 넣었다.
“나 잠깐 산에 다녀올 테니까, 혼자 잘 놀고 있어. 금방 올게.”
…쿵, 삐릭.
쫑긋쫑긋. 구동은 집을 나간 JE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문 쪽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케이지 내부의 계단을 오르고 올라 3층에 도착, 동굴형 하우스로 들어가 편안한 모습으로 잠을 청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 혹시 한국인이신가요?]
지난달 구매한 중고차를 조심스럽게 몰면서, JE는 어젯밤에 온 SNS DM을 떠올렸다.
스타믹스 JE가 아닌, 팔로워가 0인 부계정으로 댓글을 달아서 답변이 오리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건만.
‘아니, 본 계정으로 보냈어도 답변이 올 거란 보장도 없었지만.’
어쨌든 엠마 에커먼이 답장을 보냈다.
-[작년에 로건 워커로 추정되는 사람을 본 것 같다는 목격담 제보를 받고, 로건 워커의 가족과 서울을 찾았습니다. 제보를 준 목격자의 손자 ‘홍’과 관악산에 함께 올랐지만 우린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어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도시는 발전했고, 인근에 살던 사람도 많이 떠나서 더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지요. 혹시 달리 아는 단서가 있으신가요?]
긴 답장에서는 꼭 로건 워커를 찾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연치곤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어, 단순한 호기심에 물어본 것이었으므로.
정말로 답장이 올 줄도 몰랐고.
어쨌든 그가 새벽부터 관악산에 가는 이유는 특별히 없었다. 그냥, 가보고 싶어졌다.
계나리가 구동을 데려가지 말라고 해서 혼자.
본래 산은 이상한 걸 볼 확률이 높아서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일요일. 등산객이 많이 올 테니 조금 안심이었다.
우웅.
관악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거치대에 둔 핸드폰에 ‘계나리 선생’ 이름이 떴다.
“네, 나리 씨.”
-[지은 님, 관악산엔 왜 가셨나요.]
이제야 막 일어났는지 착 가라앉은 졸린 목소리였다.
마법사 제자들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위치 추적 앱을 통해, 그가 관악산에 온 걸 확인한 모양.
“혼자 등산 겸 왔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구동인 집에 잘 있어요.”
-[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맑은 공기 잔뜩 쐬시고요.]
“네. 쉬어요.”
통화를 마친 JE는 핸드폰과 선글라스, 작은 가방을 챙기고 차에서 내렸다. 등산로 입구엔 예상대로 많은 등산객이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JE도 가볍게 몸을 풀었다.
‘온 김에 엠마 에커먼이 갔었던 곳 근처도 둘러보자.’
* * *
SBC 어스래빗 대기실.
사녹을 마친 어스래빗 멤버들은 1위 후보 인터뷰 대본을 한 명씩 돌려보았다. 오늘 1위 후보에 오른 팀은 어스래빗과 원제로, 그리고 솔로 가수 진사랑이었다.
“원제로 팬덤 화력 정말 장난 아니다. 우리도 금요일에 컴백 쇼케 하고 나서 일요일에 1위 하긴 했지만.”
“우린 일주일이나 더 지나서 집계될 점수가 떨어졌을 테니… 오늘 1위는 힘들 것 같은데? 진사랑 선배님도 컴백하셨고.”
“음.”
는 음반 판매량보다 음원 점수와 너튜브 조회 수 점수 비중이 높다. 그리고 현재 각종 음원 차트에선 진사랑의 이번 앨범 타이틀곡이 주말 내내 1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상황.
“그래도 혹시 몰라. 너튜브 M/V 조회 수는 우리가 제일 높잖아.”
“너튜브는 해외 팬들도 보니까.”
“그런데 진사랑 선배님, 이번에도 음방 활동 전혀 안 하실까? 데뷔한 지 3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방송국에서 한 번도 못 뵐 수가 있지?”
“지욱이한테서 톡 왔다. 그럼 우린 잠깐 챌린지 찍으러 갔다 올게.”
원제로와 서로 안무 커버 챌린지를 하기로 했던 길우성과 이건우, 차남석이 대기실을 나갔다.
한율은 소파에 편히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며칠 내내 자다 깨는 걸 반복한 터라 몸이 찌뿌듯했지만,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어스래빗(EarthRabbit)] 미랑 - 바다를 사랑한 아이 Dance Cover/200609 락뮤닷 1위 공약]
-8명 전원이 커버 댄스하는 건 진짜 드문 일인데 역시 선배님의 체면과 위엄을 살려주는 어스래빗
-미랑이 고고하게 자란 바다 왕국의 인어 공주 느낌이면 이쪽은 그 인어 공주의 오빠랑 남동생들 느낌
-[어스래빗 제발 멕시코에도 콘서트하러 와 줘]
-이 와중에도 치고 빠지면서 동선 정리한 거 보니 확실히 프로는 프로네
-곡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커버하려면 연습도 많이 했을 텐데 이렇게 바쁜 시기에ㅠㅠ 공약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는 이 성실하고 진지한 애들을 대체 왜 몰라주는 거야
ㄴ알아요
-제목에 맞춰서 단체로 상어 가방 멘 거 너무 귀엽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보이밴드♡]
“한율아.”
“네.”
조유찬이 한율의 옆에 앉았다.
“<락뮤닷> 쪽에서 연락 왔는데, 2주 후 <락뮤닷> 상반기 결산 특집방송 있잖아. 그때 경연 1등 팀이 무대에 올라가기로 했는데, 잠깐 도와줄 수 없겠냐고 하더라. 따로 안무나 노래할 필요는 없고, 연기만 살짝.”
“어떤 연기요?”
“속을 통 알 수 없는 썸남.”
조유찬이 사과패드에 콘티를 띄워 보여주었다. 컷이 많은 것도 아니고 어려운 연기도 아니었다. 출연자들과 일절 접촉이나 눈빛 교환도 없고.
“당일에 맞춰도 무방하겠네요.”
“응. 그쪽도 그렇게 말하더라.”
“그런데 왜 저한테?”
출연자들의 무대이니, 원제로 멤버 중 한 명이 맡아도 됐을 텐데.
조유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경연 1등 팀한테 <락뮤닷> 출연 기회와 더불어서 몇 가지 소원 상품이 걸려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한율이 너를 남주로 섭외하는 거였대.”
“아아.”
“참고로 그 팀에 우리 회사 연습생도 있어.”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그래. 그럼 바로 전달할게.”
“네.”
생방송 시작 전. 어스래빗과 원제로는 서로의 타이틀곡 안무 커버 영상을 너튜브에 올렸다. 후렴구 부분만 짧게 한 터라 영상 또한 짧았지만, 두 팬덤은 사이 좋아 보인다, 훈훈하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생방송 SBC !]
어스래빗은 오늘 마지막 순서였던 터라, 1절까지만 제대로 노래를 부르다가 무대로 올라오는 출연자들을 향해 꾸벅꾸벅 인사했다.
사전 녹화분 송출이 끝나고 생방송으로 전환, MC들이 양쪽에 나란히 선 원제로와 어스래빗을 돌아보고 난 뒤 멘트를 이었다.
[이번 주 영광의 주인공은?!]
프롬프터 옆 모니터에 어스래빗과 원제로, 진사랑의 점수 집계표가 떴다. 다른 모니터에는 기대로 가득 찬 원제로 멤버들의 얼굴이 살짝 비쳤다.
합산되던 숫자가 멈췄다.
[진사랑 님, 축하합니다!]
장내에 진사랑의 노래가 크게 흘러나왔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축하의 의미를 담아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MC들이 활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트로피는 저희가 진사랑 님에게 꼭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말 하면 좀 못난 것 같은데, 난 오늘 진사랑 선배님이 1위 하신 게 다행인 것 같아.”
부산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길. 박가람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에 진사랑 선배님이 없었다면, 원제로 팬들이 우리한테 얼마나 난리 쳤겠냐? 왜 너희들이 또 1위냐! 납득 못 한다!”
오늘 어스래빗은 근소한 차이로 원제로를 이기고 2위가 되었다.
“이프림이 작년보다 더 많아졌다는 사실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이야.”
“지금도 게시판에 점수 산정 기준 정확히 밝히라고 따지는 글 올라오는데요?”
“그것도, 그나마 오늘 서로 챌린지 영상을 찍어서 덜 따지는 거 아닐까.”
우웅. 한율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JE로부터 톡.
-[언제 쉬냐.]
어스래빗의 이번 활동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걸 잘 알 텐데, 웬일일까.
[내일 오전이요. 다음 쉬는 날은 20일 토요일 오후.]
-[그럼 내일 오전에 잠깐 보자.]
[선배님 내일 스케줄 있지 않으세요?]
-[12시에 나가도 돼. 괜찮으면 센터에서 보자.]
중요한 용건인가?
한율은 의아했지만, 어차피 내일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다음 날. 한율은 JE와 만날 겸, 구동을 데리고 관악산에도 다녀올 겸 부산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짐을 정리한 뒤, 씻고 나서 명상센터로 향한 건 11시가 가까워질 무렵.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래 기다리셨어요?”
명상센터에는 이미 JE가 구동일 데리고 먼저 와 있었다. 로비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JE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로. 바빠서 피곤하지?”
“아니요,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혹시 구동이 일이에요?”
“…….”
“……?”
JE가 말없이 한율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짐작 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한율은 보채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서한율 너.”
이윽고 JE가 입을 열었다.
의심과 경계심으로 날이 선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며.
“대체 정체가 뭐야?”
제가 교장이에요
바로 어제. JE는 무릎과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관악산을 올랐다. 등산객이 많아 주변엔 늘 사람이 있었으나, 간혹 잡것 특유의 느낌이 나도 무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
‘저기구나.’
JE는 예전에 팬에게 선물 받은 쌍안경을 꺼냈다. 살펴본 곳은, 엠마 에커먼의 동선을 그대로 따라갔던 너튜버가 카메라에 담았던 장소. 너튜버는 엠마에게 제보했던 홍 씨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생각보다 더 먼데?’
등산로와 한참 떨어진데다, 경사가 가파르고 험해 보인다. 그러나 제보 하나만 믿고 미국에서 여기까지 온 엠마 에커먼 일행이라면, 직접 저 안까지 들어가 보지 않았을까. 엠마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등산로에서 기다리게 하고, 로건 워커의 가족만 움직였을지도.
‘그래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으니, 여기에서 뭔가가 보일 린 없겠지.’
그렇게 JE가 한숨을 쉬며 쌍안경을 내릴 때였다. 휙. 렌즈 너머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
경험상 잡것들은 무심코 지나친 시야 가장자리, 힐끗거리는 곁눈질에 더 잘 보인다. 그러나 멀리 있던 원혼과 눈이 마주친 직후, 그것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오는 일도 많이 겪었다.
JE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쌍안경을 들어, 조금 전 그곳을 다시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봤나?’
내심 안심한 JE는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아, 깜짝이야!”
대체 언제 다가왔는지,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중년 여성과 눈이 마주쳐 어깨를 크게 떨었다.
그녀가 미안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학생. 대체 저쪽에 뭐가 있기에 젊은 사람들이 자꾸 저기를 살피는지 궁금해서요.”
“아….”
관악산을 관리하는 사람, 혹은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주우러 오는 등산객일까. 그녀의 한 손에는 50리터짜리 쓰레기봉투와 집게가 들려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엔 별로 없었지만… 작년엔 조금 많았죠? 카메라 들고 저쪽을 확대해서 살피더라고요. 학생처럼.”
[엠마 에커먼과 미국인 실종자, 섬뜩한 미스터리] 영상 조회 수가 높기는 했지.
JE는 핸드폰을 꺼내서 직접 영상을 보여주었다.
“유명한 해외 배우가 실종자를 찾으러 여기를 왔었거든요. 그 실종자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가 저기라고 알려져서요.”
“아아, 이 너튜븐가 뭔가 때문이구나? 언제 실종됐는데요?”
“50년은 훌쩍 지난 것 같아요.”
쯧쯧. 여성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산에서 돌아가셨으면 백골 겨우 남았겠구먼.”
“하하. 그러게요….”
JE는 실없이 그런 거나 찾아다니는 사람으로 보이겠다고 생각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나 여성은 말없이 JE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그런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관악산에서 유달리 귀신이 많이 목격된다는 거 알아요?”
“네. 야간 산행하다가 본 사람이 많다더라고요.”
이것도 ‘관악산 미스터리’를 검색했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저어기, 저 지점 보여요? 나뭇잎이 막 떨어지는 계절에 저쪽까지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학생이 가리키는 곳 안쪽이 조금 보이거든요? 그런 계절의 밤에, 가끔 저 부근에서 귀신 비슷한 게 보인다는 얘기가 오래전부터 있었어요. 사람이라 보기엔 흐느적거리고, 짐승이라 보기엔 길쭉한 그런 게.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 같다더라고.”
JE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보이지는 않아도, 다른 잡것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모이는 느낌.
“관악산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아주 잘 알죠. 내가 여기를 20년 가까이 다녔는데.”
“안녕하세요.”
정말 이곳에 자주 오는 사람인지, 지나가던 등산객이 그녀에게 친근하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아무튼 그런 거 너무 찾아다니지 말아요. 이상한 게 붙으면 어쩌려고 그래.”
“네.”
“그럼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
“네, 감사합니다.”
JE는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하곤 다시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그녀가 가리켰던 곳에 다다랐을 때, 주변을 살피곤 쌍안경을 꺼내서 아래를 살폈다. 녹음이 우거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대체 뭘 하는 건지.’
JE는 작게 한숨을 쉬곤 쌍안경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관악산 정상을 찍고 다시 돌아온 주차장.
‘최근에 바뀐 밤낮을 돌리려고 잠을 제대로 안 자서 그런가.’
이상하게도 차에 타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오래간만에 산을 오르락내리락했더니 피곤하기도 하고.
차를 몬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졸음운전까진 할 수 없다. JE는 20분 후로 알람을 맞추곤 운전석을 뒤로 조금 젖혔다.
‘잠깐 눈 좀 붙이자.’
그렇게 눈을 감고 막 잠이 들 무렵이었다.
쿵!
‘……?!’
육중한 무언가가 차를 있는 힘껏 들이받는 듯한 소리와 충격에, JE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뭐야….’
주위는 어느새 새카만 밤이었다. 다른 차로 가득 찼던 주차장엔 JE의 차만 덩그러니 남아있었고, 가로등은 고장 난 것처럼 꺼져 있거나 깜빡거렸다. 알람을 맞춘 뒤 거치대에 두었던 핸드폰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둥! 이번엔 차창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듯한 소리와 충격.
‘하….’
JE는 고개를 돌렸다가 깊은숨을 토해냈다.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들은 탓일까. 아니면 조금 전 스리슬쩍 들러붙어 따라온 것일까.
인간치고는 흐느적거리고 긴 그림자 같은 형상 여럿이 서로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차를 몸으로 들이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순간 동작을 멈추곤 가만히 JE를 응시하는 듯하더니, 하나둘 몸을 돌려 꾸물꾸물 움직였다.
‘따라오라는 건가?’
산으로 올라가려던 그것들이 멈춰서 JE를 바라본다.
‘현실치고는 너무 기이하니, 꿈이겠지?’
JE는 홀린 듯이 차에서 내렸다.
다시 시간은 현재.
“자각몽인지 유체 이탈을 한 건지는 몰라. 내가 영험한 무속인인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것들을 따라간 곳에, 네 등 뒤에 붙은 거대하고 시커먼 불덩이의 ‘찌꺼기’ 같은 게 있더라. 그것들은 찌꺼기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고. 그리고….”
JE가 한율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전에 사진으로도 본 적 없었던 로건 워커까지 있었어.”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듣던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신기한 꿈을 꾸셨네요, 선배님.”
“작년 4월, 너희가 첫 번째 월드투어로 미국에 갔을 때.”
아직 안 끝났다는 듯 JE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댈러스 콘서트 다음 날에 엠마 에커먼이 너희 콘서트를 관람했다는 기사가 났었지? 그 기사엔 엠마가 SNS에 쓴 이런 글도 실렸었어. 1960년대 중반, 한국을 방문했다 실종된 텍사스 출신의 로건 워커 씨를 찾습니다. 크리스티나가 기다려요.”
“…….”
“서한율. 너 왜 그때 다른 멤버들보다 하루 늦게 귀국했냐? 엠마 말로는 하필 기사가 나간 그날 밤, 네가 일행과 떨어져 혼자 하루를 더 머문 그날 밤에, 할머니인 크리스티나가 꿈에서 로건 워커를 만나 기뻐했다고 하더라?”
“…….”
한율은 솔직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JE가 엠마 에커먼과 연락이 닿은 것도 놀랍고. 그러나 평정을 가장한 채 여전히 JE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JE가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이며 한숨을 쉬었다.
“넌 또 왜 하필 로건 워커처럼 텍사스 영어를 사용하는 건데?”
“그러니까 선배님 말씀은.”
한율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로건 워커의 환생이다?”
“아니, 환생이면 거기에 귀신이 있을 리가 없…. 아이 씨, 이러니까 내가 꼭 이상한 음모설에 심취한 망상증 환자 같잖아.”
“요지는 비슷한 것 같은데요.”
JE가 관악산에서 본 로건 워커는, 마법 사용 후 남은 잔재가 소멸한 육체의 형상을 띠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애초에 로건 워커의 영혼이 남아있었다면 그의 몸에 들어갈 수도 없었을 테니. 커다란 불꽃을 이뤘다는 그림자들도 당시 일부 떨어져 나간 것들이고.
‘어쨌든.’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가 자신과 ‘로건 워커’를 연결 짓는다는 건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JE의 기억에 환영 마법을 덧씌우고 싶진 않았다. 씌운다 해도, 이해하기 힘든 그 이상한 힘으로 진실이 떠올라 혼란을 겪으면, 그땐 이쪽을 향한 의심과 경계심만 더 짙어질 게 뻔하다.
끼웅? 열린 방문 사이, 구동이 두 발로 서서 문을 잡은 채 고개를 갸웃한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자, 괜히 복잡하게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한율은 가방 안쪽 주머니에서 JE의 피어싱을 꺼냈다.
“이걸 전해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그건….”
여전히 복잡한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던 JE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분명히 나리 씨가 교장한테 전달한다고, 새로 보호 마법을 새겨야 한다고 가져갔는데 왜 네가….”
한율은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교장이니까요.”
“……?!”
지구 멸망을 방조할 다른 세상 사람이란 사실만 들키지 않으면, 뭐든 상관없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