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7월 11일 포털사이트 실검은 어젯밤 뮤닷 에서 탄생한 프로젝트 걸그룹, ‘IOMU’와 멤버 열 명의 이름으로 채워졌다. 연예뉴스란 메인도 관련 기사가 대부분.
“이번에도 우리 회사에서 두 명의 연습생이 무사히 순위권에 들어가 IOMU로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박수.”
공연장으로 향하는 어스래빗의 차 안. 소소한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울렸다. 와아. 짝짝짝.
“크리스탈 래빗이랑 드림래빗은 두 연습생에게 축하 선물 주기로 했다던데. 너희는 어떻게 할래?”
“우리도 당연히 줘야죠. 그런데 뭘 준비하지?”
“실용적인 게 가장 좋을 것 같아요.”
“연습용 신발?”
“그거 좋다. 미랑이 누나한테 어떤 모델이 좋은지 추천해달라고 할까?”
“응. 사이즈도 물어봐.”
“사이즈 알까?”
순식간에 선물이 결정되었다.
우웅. 한율은 핸드폰을 꺼냈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자, 같은 대학 연영과에 재학 중인 고재영이 톡을 보냈다.
-[이 톡은 주변에서 하도 보내보라고 성화를 부려서 보내는 것이다.]
“……?”
-[크리스마스에 국내 소외계층 아동을 위한 기부금 마련 연극을 하기로 했는데 잠깐이라도 와서 도와줄 수 없냐는 말을 전해달란 혀ㅂ박ㄱㅇㅣ]
-[협박...]
-[ㅜㅜ]
[12월은 우리도 굉장히 바쁠 거라 연극 참여는 힘들 것 같고, 다른 방법으로 도와줄게.]
-[(이모티콘)]
OK 글자가 크게 적히는 캐릭터 이모티콘.
-[콘서트 수고!]
[ㅇㅇ]
잠시 후, 어스래빗을 태운 차가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콘서트를 할 공연장에 도착했다. 콘서트는 오후 6시 시작이었지만, 주변에는 이미 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아직 아침 9시밖에 안 됐는데.”
꺄아악! 누가 봐도 어스래빗이 탄 새카만 버스가 등장하자 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어스래빗 관련 굿즈나 슬로건 등을 흔들었다.
“이프림 안뇽~.”
박가람도 창에다 대고 손을 흔들었다. 선팅이 진하게 되어 있어 밖에선 전혀 보이지 않겠지만.
“서울 콘서튼데 외국에서 온 이프림 짱 많다.”
길우성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두근두근, 첫 서울 콘서트, 두근두근.”
10여 분 뒤. 즐겁게 흥얼거렸던 길우성은 대기실 바닥에 누운 채 한심한 비명을 질렀다.
“으각, 으가가각.”
리허설 전, 스포츠마사지를 받으면서 내는 소리였다. 다른 멤버들 또한 다치지 않도록 스트레칭을 꼼꼼히 했다. 한율은 모두에게 따뜻한 레몬생강차를 나눠주었다.
오전 10시. 리허설 관람권을 지닌 관객 앞에서 최종 리허설이 3시간가량 진행되었다. 리허설을 끝낸 뒤엔 점심을 먹고 헤어 메이크업 단장을 받았다.
오후 2시. VIP 티켓 소지자들과 미니 팬미팅 진행.
[오늘 정말 덥죠. 밖에서 기다리느라 고생했겠다.]
[열사병에 걸린 것 같아, 남석. 지금 현실이 아니라 꿈 같아.]
서울 콘서트였지만 찾아온 팬의 절반 이상은 외국인이었다. 멤버들은 지금껏 열심히 공부한 외국어를 사용하며 팬들과 다정하게 대화하고 사진도 찍었다.
경호원들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데도, 멤버들에게 스킨십을 시도하거나 성희롱, 몰카 촬영 등 무례한 짓을 저지르려다 퇴장당하는 사람도 몇 명 발생했다. 이런 미니 팬미팅을 할 때마다 종종 생기는 일이라, 멤버들은 그러려니 하면서 오히려 놀란 다른 팬들을 달랬다.
“저분 말고 날 봐줘요, 누나. 시간 아깝잖아요.”
오후 4시 30분. 날씨가 너무 더워, 예정보다 관객 입장이 일찍 시작되었다. 멤버들은 대기실에서 간식을 먹거나 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들 곁에는 이번 월드투어의 모든 것을 기록하기 위한 VJ가 떠나지 않았다.
오후 6시. 응원봉의 푸른빛이 잔잔한 파도처럼 물결치는 공연장 내부. 삐이이…. 물살을 가로지르는 고래 울음소리와 함께 2020 월드투어 ‘The CARNIVAL’ 서울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세트리스트는 작년 월드투어 이후 발표된 곡이 대부분이었으나, 지난 앨범에 수록된 곡의 새로운 버전이나 어스래빗 멤버 전체가 부르는 트레리안의 기존 곡도 포함되었다.
그렇게 총 25개의 곡. 유닛 무대와 솔로 무대, 중간에 VCR 재생과 멘트 타임, 팬 서비스 이벤트 타임까지. 3시간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흘렀다.
[오늘 처음으로 서울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는데.]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엔딩 멘트 타임.
퍼포먼스를 하면서 호흡이 힘든 부분을 제외하곤 대부분 라이브로 부르다 보니, 어느새 목소리에서 미약한 흠이 느껴졌다. 한율은 아랑곳없이 환하게 웃으며 공연 소감을 말했다.
[이번 월드투어 시작을 우리나라에서 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평생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간을 만들어준 우리 이프림과 멤버들 모두에게 정말 감사해요.]
[자, 그럼 다 같이 미리 인사드리겠습니다!]
돌출무대에 나란히 선 여덟 명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 울렸다.
[지금까지 어스!]
[래빗!]
[이었습니다!]
[이프림, 사랑해!]
그러나 콘서트는 세트리스트만 채우고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텅 빈 무대를 향해 앙코르를 외치는 팬들. 암전되었던 조명이 환해지며 공식 MD 옷과 아이템을 걸친 어스래빗 멤버들이 재등장, 을 장난스럽게 부르며 무대 여기저기를 활보했다.
3,500명의 팬도 함께 불렀다.
[보석과 꿈이 반짝이는 지구 CARNIVAL!]
그날 밤. 인터넷 여기저기엔 오늘 어스래빗의 콘서트를 관람한 사람들의 후기가 올라왔다.
[실제로 보면, 왜 작년엔 괜찮나 기웃거렸던 유럽 애들이 이번 월드투어 소식 듣자마자 회차 늘려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는지 바로 알게 됨. 컴백 쇼케는 그냥 맛보기고 콘서트가 진짜였는데 우리는 한국인이라서 몇 년을 손해 본 거였음 (괜찮은 공연장이랑 일정 못 잡아서 그런 거 알지만ㅠㅠ) 진짜 실제로 봐라. 예매 못 했으면 다른 나라라도 가서 봐 아직 티켓 예매 오픈 안 된 곳 있잖아 당장 항공권부터 예약해]
[!!!차남석 실제로도 개잘생겼으니까 마음 준비 잘하고 가라!!! 박가람이랑 서한율 고음 더블링은 진짜 온몸에 전율 쫙 돋고 서한율은 무대 위 모습 보자마자 딱 느껴진 게 ‘아 얘는 천상 연기자이자 연예인이구나’ 느껴짐. 차남석 목소리는 개간지에 완전 무게감 있으면서도 고급스럽게 움직이는 악기 그 자체고 유호는 피지컬 뿐만이 아니라 성량에 진짜 개놀람 은근 표정 맛집이었고 박가람은 무슨 다람쥐의 화신인 것처럼 귀여운데 노래할 땐 정말 이것저것 다 장난 아니다 조심해라 강보배는 진짜 실물로 봐야 할 넘버원111 애가 랩할 땐 섹시하다가 멋있다가 그러는데 말하면 귀엽고 순해서 아주 사람 홀리게 한다. 길우성은 날이 갈수록 미모에 물이 오르는데 서한율한테 표정 연기 강습받는지 하운팅 무대 ㅅㅂㅠㅠ 나도 울뻔했잖아 그리고 웃는 거 진짜 예쁘게 웃어 라이언은 진심 사랑스러운데 영어 쓸 때 왜 카리스마가 있지? 왜 누나 설레게 해? 마지막으로 이건우는 나랑 결혼해주라]
[어스래빗 처음 영업한 친구한테 고맙다는 의미로 치킨 쿠폰 쏘면서 사랑한다고 했더니 나보고 미쳤냐? 이럼ㅋㅋㅋㅋ]
[8명 전원 무대 천재라서 진심 좋은 의미로 욕이랑 비명이 막 나오더라ㅋㅋㅋㅋ 아니 근데 얘네가 더 미친 것 같음. 3시간 동안 텐션이 올라가서 안 떨어져]
[다른 아이돌 콘서트는 집에 오면 후.. 뭔가 현타도 오고 좀 그랬는데 어스래빗은 그냥 속이 꽉 찬 왕만두 같아서 아직도 배부름]
[비싼 티켓 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8명의 개성이 다 다른데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다들 웃는 게 예쁘고 개잘생김]
[존나 빡센 연습량이 그대로 드러남. 강보배는 발음 하나하나 생생히 다 들리는데 런던에서 길 잃고 멍청한 얼굴로 멍하니 있던 애가 맞나 내 기억의 오류인가 아무튼 사람 진짜 미치게 만드는 토끼들임]
[서한율 드라마 찍을 동안 다른 멤버들 한가해서 연습이랑 트레이닝 더 열심히 했다고 하던데 진짜였나 봄ㅋㅋㅋ 그래서 서한율이 더 괴물 같음. 아 근데 시큐 너무 카메라 빡세게 잡는 거 아니냐고]
[앞으로 어스래빗 보고 서한율한테 묻어서 뜬 팀이라 말하는 ㅅㄲ1들은 나 만나면 뒈질 줄 알아라. 이건 서한율이 영화드라마 안 했어도 백퍼 대박 났을 팀이다.]
콘서트를 보기 위해 서울까지 온 해외 이프림의 후기 또한 호평 일색이었다. 너튜브에는 가드들의 감시를 피해 팬들이 몰래 촬영한 직캠 영상이 올라왔다.
-얘네도 사람인 이상 격한 퍼포먼스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라이브로 부를 순 없지만 진짜 딱 필요한 부분만 AR로 넘기고 나머지는 라이브하는 거, 애드리브 진짜 다 경이롭다.
-[중동에도 와주세요, 어스래빗. 이곳에도 당신들을 기다리는 이프림이 많습니다.]
-탄탄한 기본기가 느껴지는 퍼포 남돌은 오래간만에 보는 듯
-[느껴진다. 싱싱한 폐활량.]
다음 날, 서울 2일 차 공연이 끝난 뒤엔 더 많은 호평이 올라왔다. 화제성이 사그라진 포털사이트 실검에는 이프림의 총공으로 [어스래빗 서울앙콘]이 상위권에 올라오기도 했다.
[어스래빗, 2020 월드투어 ‘The CARNIVAL’ 서울 공연 성료]
[인기 보이그룹 어스래빗이 2020 월드투어 ‘The CARNIVAL’ 첫 번째 도시인 서울에서 11일과 12일 이틀간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중략).
뛰어난 퍼포먼스와 안정적인 라이브 실력에 매료된 팬들은 ‘티켓 값이 정말 아깝지 않았다’, ‘한 번 더 봤으면 여한이 없겠다’ 호평을 쏟아내며 ‘어스래빗 서울앙콘’을 실검에 올리기도 했다.]
-늦어도 좋으니까 서울 앙콘 제발ㅠㅠ
ㄴ앙콘이 뭐임?
ㄴ앙코르 콘서트요. 콘서트 한 번 더 해달라는 뜻이에요.
-우리 톢이들 제발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와♡♡♡
-님들, 어제 어스래빗 콘서트에 배우 이제설이랑 온더로즈 영아 커플도 왔었다는 거 앎?ㅎㅎㅎ
-다치지 말고 외화 많이 벌고 와요. :)
-나도 어스래빗 콘서트 가고 싶다!!!!!!!
우리도 오늘 콘서트 잘했는데
7월 15일 수요일 밤.
한율은 방에다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펼쳤다. 가볍게 지니고 다닐 가방도.
“내일 출국하게 되면, 중간에 잠깐 들어오는 거 제외하곤 10월까지 해외에서 지내게 되거든요. 그래서 싸야 할 짐이 많아요.”
자체 콘텐츠를 위해 셀캠 촬영 중.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달냥이 캐리어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달냥이도 투어 갈 거야?”
므앙.
“같이 가고 싶다네요. 하지만 안 됩니다.”
한율은 달냥을 한쪽 팔로 안아서 꺼냈다. 달냥의 몸이 쭈욱 길게 늘어났다. 므아앙.
“위험해요.”
한율은 드레스룸에서 여름옷과 가을옷, 신발과 액세서리를 잔뜩 챙기고 와서 고르는 척했다. 팬들이 이런 류의 영상에서 기대하는 게 바로 ‘내 아이돌은 어떤 소지품을 가지고 있을까?’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이므로.
“아니지. 옷이나 신발 같은 건 현지나 공항에서도 살 수 있잖아요? 그러니 미리 많이 챙겨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밖에 자주 나가지도 못할 거고. …아, 레몬생강차가 들어갈 자리는 확보해놔야 합니다. 이게 가장 중요해요. 어머니 표 레몬생강차는 해외에선 절대 구할 수 없으니까요.”
한율은 카메라를 향해 씩 웃었다.
“오늘 멤버들이랑 우리 집에 가서 다 같이 저녁을 먹었거든요? 그때 이만한 걸 두 병 받아왔어요. 일단 하나만 챙겨갔다가, 중간에 잠깐 돌아왔을 때 나머지 하나를 가져갈 생각입니다.”
셀캠 촬영을 마친 뒤엔 카메라가 잘 꺼졌는지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또 다른 물건을 화장품 파우치에 챙겼다.
므앙. 달냥이 무언가를 느낀 듯, 파우치를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한율은 달냥의 머리를 쓰다듬곤 캐리어를 닫았다.
다음 날 오후. 어스래빗은 김포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 오사카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한 건 7시가 조금 지날 무렵.
“오사카에 온 건 거의 1년 만인가?”
“응. 갑자기 태풍 온다고 그래서 한국으로 못 돌아가면 어쩌나, <락뮤닷> 펑크내면 어쩌나 걱정했던 기억 난다.”
“맞아. 그때 기껏 준비한 호러 버전 연습한 것도 다 날아갈까 봐 조마조마했었지.”
한율도 작년, 오사카에서 본 광경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미니라이브&하이터치회 1부를 끝내고 잠깐 쉬기 위해 호텔로 갈 때였다. 거센 비바람이 불던 거리. 샛노란 우비를 걸치고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 앞에 세워진 ‘반짝반짝 유치원’ 버스. 그리고 그 버스에서 내린 남자.
‘마력 차단’ 능력을 각성했음에도, 거둬서 돌보던 고아들을 위해 그 능력을 감추고 살다가 죽은 남자와 퍽 닮았었다. 현재 추정되는 나이대와 맞지 않아 이내 다른 사람이란 걸 깨달았지만, 그래도 순간 놀랐던 기억이 났다.
‘본인이었어도, 이번엔 ‘그쪽’으로 넘어갈 수 없을 테니 각성해봤자 하등 쓸모없는 능력이지만.’
한율과 같은 마법사를 만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므로, 한율은 머릿속에서 그에 대한 기억을 밀어냈다.
“가람이 형.”
“응?”
객실 복도에 서서 방을 고르던 박가람이 한율을 돌아보았다.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투어 기간에도 박가람이 마나 유동을 잘 할 수 있도록 봐주는 일.
“저랑 객실 같이 써요.”
“으익?”
한율과 같은 방을 사용하면 마음대로 쉬지 못할 걸 알았는지,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박가람.
길우성이 키득거렸다.
“웬일이요, 형님? 평소 해외만 나오면 써한이랑 같은 방 쓰려던 사람이?”
“서한율 은근히 잔소리 많아서….”
한율은 꿍얼거리는 박가람의 캐리어를 대신 들고 객실로 들어갔다.
“뭐해요, 안 들어오고.”
“흐잉.”
* * *
7월 17일. 2만 명의 관객이 들어올 거대한 돔구장.
최종 리허설이 끝난 뒤, 원제로 멤버가 넓은 공연장을 둘러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여기에서 다시 단독 콘서트를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진짜 최정상 그룹이 아니면 힘든 곳이잖아.”
오늘은 뮤닷 을 통해 만들어진 프로젝트그룹, 원제로의 마지막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 말은 지금 네가 최정상 아이돌이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우리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지.”
변지욱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일단, 어스래빗 잡는 것을 목표로 달릴 거야.”
“갑자기?”
“어스래빗 연습실에 잠입해 형들의 노하우를 훔쳐서!”
“혼나려고.”
“그래, 혼날 테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서!”
“민솔, 오늘은 목 상태 좋은데?”
떠들썩하게 아무 말이나 하는 멤버들 사이에서, 라일이 웃으며 정민솔의 팔을 토닥거렸다. 정민솔도 씩 웃었다.
“다행이죠.”
미주투어 초반에는 컨디션이 엉망이었던 터라 리허설 때 녹음된 라이브 AR을 사용했었다. 그리고 뉴욕 콘서트부터는 콘서트용 MR에다 라이브를 하는 중.
“그런데 다음 주에 정말 같이 안 갈 거야?”
원제로는 오늘을 끝으로 해체하지만, 시간이 되는 멤버들끼리 모여 짧게나마 여행을 가기로 했다.
정민솔은 고개를 저었다.
“할 일이 많아서 힘들 것 같아요.”
리얼 엔터와의 계약 불발 기사가 나간 이후, 이전부터 러브콜을 보냈던 회사를 포함해 여러 회사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그중 괜찮은 회사 몇 군데와 미팅을 잡았다.
“응. 그래도 나중에 마음 바뀌면 언제든 연락해. 해체했다고 바로 번호 바꾸고 그러면 나 삐친다.”
“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형.”
대기실로 돌아온 후, 정민솔은 핸드폰부터 찾았다. 그리고 아무도 액정을 볼 수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인터넷에 접속했다. [정민솔] 검색.
별다른 기사는 뜨지 않았다. 이번엔 [정민솔 논란]을 검색했다. 결과물은 오늘 아침에 살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
정민솔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이마와 눈가를 손으로 덮으며 울컥 올라오는 또 다른 감정을 숨겼다.
‘짜증 나.’
누군가 고의로 계약을 방해한 것 같다는 의심이 든 뒤로, 저도 모르게 수시로 포털사이트나 SNS, 너튜브 등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게 되었다. 다시 누군가 다른 방향에서 수작을 부리진 않을까, 불안한 마음에.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모든 상황에 짜증이 났다.
‘피해망상이고 과민 반응이야. 계약에 대한 스트레스로 예민해진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자꾸 라이언이 떠올랐다. 만약 누군가가 고의로 훼방을 놓는다면 그건 그만큼 이쪽에 악감정이 있다는 뜻인데,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을 만한 인물이 라이언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정민솔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이번엔 [어스래빗 라이언]을 검색했다. 어제 일본으로 출국한 기사가 줄줄이 떴다.
[어스래빗 보배·라이언 유닛 트레리안, 24일 자작곡으로 채운 새 믹스테이프 공개!]
이런 기사도.
‘꼴에 작곡은. 분명히 메인 작곡가가 따로 있고, 미디 몇 마디 살짝 얹은 뒤에 작곡가로 같이 이름을 올린 거겠지.’
“민솔아.”
정민솔은 핸드폰을 뒤집곤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스태프가 주위를 살피더니 조용히 물었다.
“이따가 공연할 때도 라이브로 할 거지?”
“네.”
“그래. 조금 전에 쓴 MR 그대로 갈게.”
“네.”
오후 6시. 원제로의 마지막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받은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원제로 멤버들은 에너지를 아끼지 않으며 공연에 임했다.
[…아.]
비록 중간에 소소한 문제 하나가 스치듯 지나가기는 했지만, 그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늘이 원제로의 마지막 날이었으므로.
[지금까지 완전한 하나!]
[원 없는 무대!]
[원! 제로였습니다!]
원제로 멤버들은 공연장을 가득 채운 팬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다음 날 18일. 포털사이트 실검과 연예뉴스란은 어제 마지막 콘서트를 하고 해체한 원제로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원제로 마지막 콘서트, 각자의 다음 챕터를 향한 쉼표]
[화려한 시작과 끝… 원제로 멤버들 향후 거취는?]
[원제로 임승준·변지욱·현강희, WB래빗 새 보이그룹으로 재데뷔 예정]
“에휴….”
일본. 어스래빗이 머무는 오사카의 한 호텔.
박가람이 인터넷을 보며 땅이 꺼지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젖은 머리카락에 수건을 얹고 침대에 걸터앉은 모양새가 꼭 지친 복서 같다.
“우리 얘기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네. 우리도 오늘 콘서트 잘했는데. 서울 콘보다 관객이 훨씬 많았는데. 내일도 하는데.”
“우리 이름으로 검색하면 기사 나올걸요?”
“나는 메인에서 우리 기사를 보고 싶은 거란다, 동생아.”
“오늘 해체한 팀이잖아요. 양보해요.”
박가람은 눈을 일자로 가늘게 뜬 못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원제로 팬들이 우리더러 인기 많은 척은 다 하고 1등도 뺏어가더니, 정작 콘서트는 엄청 작은 곳에서 했다고 무시하잖아. 투어 일정에 맞춰서 좋은 공연장 잡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것도 요즘 같은 성수기에.”
“저 씻고 올 테니까 마나 유동하고 있어요.”
박가람이 침대에 드러누워 반대쪽으로 굴렀다.
“싫은뎅.”
“마음대로 해요. 안 하면 나중에 후회밖에 더 하겠어요?”
“…….”
부스스. 박가람이 입을 오리처럼 삐죽 내민 채 도로 일어났다. 그리고 마나 유동을 위해 자세 잡는 척하다가, 한율이 욕실로 들어가자 슬쩍 눈치를 살피곤 핸드폰을 집었다.
‘5분만 더 놀다가 해야지.’
-정민솔 라이브 왜 실검 떴다가 빛삭됨?
ㄴ별일 아님.
ㄴ6번째 곡이었나? 본인 파트 들어갈 때 화면에 얼굴 크게 잡혔는데 나오는 소리랑 입 모양이 안 맞아서 미리 녹음한 라이브 AR이란 거 들킴. 그래서 다른 곡도 전부 라이브 AR 아니었나 의심 중.
ㄴ전부는 아님. 호흡이랑 애드리브 보면 다른 건 다 라이브 맞는데 6번째 곡만 뭔가 착오가 생긴 모양
ㄴ솔직히 콘서트라고 해도 목 상태 안 좋으면 이전에 라이브 했던 걸로 사용할 수 있음. 아이돌 쪽에선 흔한 일임. 더구나 원제로 이번 투어 일정 엄청 빡빡했던데다가 안무가 좀 빡셈? 그런데 스물 몇 곡 중에서 딱 한 곡 라이브 AR 사용된 것뿐이고 표정 보니 본인도 놀란 것 같던데 정민솔 안티들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거 조금 추함.
ㄴ정민솔 LA랑 댈러스 공연에서 미세한 숨소리까지 다 똑같던데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 해외 팬들 가뜩이나 라이브에 민감한데 라이브 MR도 아니고 라이브 AR은 기만이지. 와 우리 오빠 힘든 안무에도 라이브 열심히 한다! 감탄했는데 다 구라ㅋㅋㅋ
ㄴ이게 다 평소 정민솔 악개들의 만행 탓에 미운털 박혀서 그런 거지 뭐
ㄴAR은 뭐고 MR은 뭐임; 누가 쉽게 설명 좀;
ㄴMR-보컬없는반주(코러스는포함)/AR-우리가흔히듣는깨끗하게녹음된음원/라이브AR-라이브하면서부른것처럼녹음한거/라이브MR-중간중간보컬살짝들어간AR과MR그사이. 그래서 아이돌의 진짜 노래 실력 알고 싶으면 앙코르 무대를 보라는 거임. 그땐 MR만 내보내거든.
탈탈. 박가람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뒤로 가기를 눌렀다.
‘앞으로 3분. 재밌는 거 봐야지.’
19일. 어스래빗은 오사카에서 2일 차 공연을 끝내고 요코하마로 이동, 22일과 23일 이틀 동안 콘서트를 가졌다.
[어스래빗, 일본 첫 단독 콘서트 4만 명 집결!]
[지난 11일 서울을 시작으로 2020 월드투어 ‘The CARNIVAL’을 떠난 어스래빗이, 일본 오사카와 요코하마에서 총 4회 차의 공연으로 4만여 명의 팬을 집결시키며 일본에서 첫 번째로 연 단독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중략).
어스래빗은 월드투어 4번째 도시인 필리핀 마닐라 콘서트를 위해 출국했으며 오늘 밤엔 어스래빗의 보배와 라이언으로 구성된 유닛 트레리안의 새 믹스테이프가 너튜브와 SC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국내 콘서트는 이틀 동안 관객이 7천 명밖에 안 됐다던데
ㄴ공연장 ㅈㄴ 작은 데로 빌려서 그럼ㅋ
ㄴ어스래빗이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기 많음
-그래봤자 서한율 덕 아님?ㅋㅋㅋㅋ
ㄴ입덕 계기를 서한율이 제공했어도 그룹의 팬이 되는 건 다른 문제지 이 일차원적인 놈아
ㄴ배우 좋아하면 작품을 보지, 몇 분 만에 매진되는 경쟁 심한 비싼 아이돌 콘서트 티켓을 끊겠냐
-님들 빨리 트레리안 새 믹테 3번째 트랙 들어봐바바바
한국 시각으로 24일 23시 50분.
너튜브와 글로벌 음악 공유 서비스 SC에 트레리안의 새 믹스테이프가 공개되었다. 그중 세 번째 트랙 <자존감>은 순식간에 SNS 실검 1위에 올랐다.
-#트레리안_자존감 (링크) 이거 ㅈㅁㅅ 디스곡 같은데?
네 자존감엔 네가 없어
[꼭꼭 숨어라 어디 있나 자존감
꼭꼭 숨죽여 살기 위한 자존심
날 살려라 벽장 속 그림자를 끄집어
난 날아와 비행 중 MASK를 끄집어
호흡해
자존감도 몰라 자존심도 몰라
범 소굴에 도착
바보 같은 라이언
..옳다구나 잘하는구나 찾아내던 자존감
거지새끼 네 짓이구나 뭉개놓던 세 치 혀
여기서나 손버릇, 밖 나가면 도둑 새끼
개나소나 아이돌, 봐 네 가면 거지새끼
빵값 없어 훔쳤잖아 No 훔치지 않았어
병적도벽 그래 맞아 But 훔치지 않았어
엄마 없는 가난 맞아 But 사랑해요 Mom
실력이 부족하면 인성이라도 좋았어야지
자존감 부족하면 존심이라도 있었어야지
나를 때려 비뚤어진 네 자존감 채워
나를 욕해 비뚤어진 네 자존감 채워
네 자존감엔 네가 없어
네 가면에도 네가 없어
..솔을 쓸어 날렵하게
과걸 쓸어 민첩하게
가면을 써 다정하게
안녕 라이언 나의 자존감 배터리
안녕 용서해 나를 위해, 뱉더니
What?
꼭꼭 숨어라, 어디 있나 자존감
네 자존감엔 네가 없어
네 가면에도 네가 없어]
-솔을 쓸어 날렵하게 과걸 쓸어 민첩하게 <빼박 ㅈㅁㅅ 가리키는 것 같은데
-자존감 배터리.. 이걸로 끝났다.
-타인 공격하는 쾌감에 본인 자존감이 올라간다고 착각하는 유형의 인간들이 있지. 예를 들면 악플러들
-진짜 ㅈㅁㅅ 디스곡이면 개충격인데
-아이돌이 같은 아이돌 디스하는 건 완전 드문 일 아닌가?
ㄴ디스가 아니라 당한 걸 밝힌 거죠. 엄연히 다름.
-그러니까.. 정말로 어머니 안 계시고 가난하고 힘들게 살다가 병적도벽이 생겨서 꾸준히 상담받던 애한테 너 빵 사 먹을 돈 없잖아 도둑질 의심에 패드립까지 해놓고 데뷔해서 만나니까 용서해달라고 했다는 내용인 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ㅇㅅㄹㅂ 애들이 ㅈㅁㅅ하고만 서먹서먹했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네 인성이 이랬으니 피하지
-이런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까는 건 정말 비열한 행동 아닌가요?
-당했으면 당했을 때 따졌어야지 애 잘나갈 것 같으니까 발목 낚아채서 패대기치는 거 보면 얘도 정상은 아닌 듯
ㄴ의심받을 짓을 했으니 의심의 대상이 된 거지 이제와서 이러는 거 추잡스럽다. 그럼 뭐 무릎이라도 꿇고 싹싹 빌었어야 했나?
-멘탈 ㅈㄴ 약한 건 알겠다. 뒤끝도 쩌네
----------뒤늦게 좌표 찍고 온 ㅈㅁㅅ 빠순이들
-어째 ㅍㅁㄷ에서 막 착한 척하고 그러는 거 볼 때부터 가식인 것 같더라
-누가 누구 더러 거지ㅅㄲ래ㅋㅋㅋㅋ 지는 인성 거지 주제에ㅋㅋㅋ 아, 주어는 없습니다.
-잘 가.
-애먼 사람 잡게 하지 말고 누군지 확실히 말해주세요, 라이언 씨.
-스케일 엔터랑 리얼 엔터가 갑자기 계약 엎은 것도 이거랑 관련 있는 거 아님?
-ㅈㅁㅅ 처음 인성 폭로 나왔을 때 ㅇㅅㄹㅂ이 쉴드 한마디 안 해준다고 악개들 개ㅈㄹ 했던 생각나네ㅋㅋㅋ 그래도 끝끝내 한마디 안 해줬지
-원제로 해체하고 정확히 일주일 뒤에 올린 이유가 뭐겠냐. 본인들 투어로도 한창 바쁠 땐데ㅋ 멀리 안 나간다 민솔아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해, 신인으로 보기 어려운 이례적인 성적과 인기로 온갖 상을 휩쓸고 각종 예능에서 활약했던 인기 아이돌 원제로.
정민솔은 그중 존재감이 단연 돋보였던 메인 보컬이었다. 그리고 익명의 누군가가 아닌, 함께 WB래빗에 있었던 현직 아이돌이 직접 발표한 곡이기에 파장은 매우 컸다.
트레리안의 <자존감> 관련 이슈는 포털사이트 실검과 연예뉴스란 메인까지 번졌다. [트레리안 자존감], [라이언 정민솔], [정민솔 인성], [정민솔 자존감].
[트레리안 <자존감>, 2년 전 정민솔 인성 루머 사실이었나]
[콩콩 엔터, “정민솔과 계약 종료된 지 오래… 할 말 없어”]
[라이언 자작곡 <자존감>, 원제로 정민솔 향한 디스곡?!]
정확한 사실 여부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높은 곳에 있던 인기 아이돌의 추락을 환영하는 뒤틀린 사람들부터 정민솔을 믿고 지지하는 팬들까지.
인터넷 곳곳에선 언쟁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