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4화 (224/427)

* * *

25일 오후. 필리핀 마닐라의 한 공연장.

“야.”

대기실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차남석이 라이언을 불렀다. 라이언이 뚱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

“네 핸드폰 멀쩡하냐? 지금쯤 폭발하고도 남았어야 할 것 같은데.”

“꺼놨어.”

“그래, 잘했다.”

“대신에 매니저 형들 폰에 불이 났지.”

길우성이 매니저들을 가리켰다. 업무상 핸드폰을 끌 수 없는 까닭에, 매니저들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미리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하나같이 덤덤한 표정으로.

“아까부터 나한테도 모르는 번호로 전화 와.”

“받지 마. 높은 확률로 기자겠지만, 네 번호 알아낸 안티일 수도 있어.”

라이언이 시무룩한 얼굴로 길우성에게 말했다.

“미안해. 내 일에 휘말렸어.”

“괜찮아, 괜찮아. 형이 그동안 민솔 씨한테 얼마나 진심으로 사과할 기회를 많이 줬는데. 형은 잘못한 거 없어.”

옆에서 이건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언아. 생각보다 파장이 커서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나도 놀랐어. 기사까지 뜰 줄 몰랐거든.”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라이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아무것도?”

“응. 묵혀뒀던 화를 쏟아내서 속 시원해.”

“그런데 왠지….”

박가람이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공개 처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 물론 민솔이가 라욘 네게 백번 천번 잘못한 건 맞아. 그런데….”

“이대로라면 너무 과하다고, 사람들이 오히려 라이언을 비난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왜 공개적으로 끄집어내냐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박가람과 한율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고민 많이 하고, 가사도 마지막까지 고쳤어.”

“가사 자세히 보면 민솔이를 특정할 만한 게 없어. 라이언이 민솔이 이야기가 아니다, 이 한마디만 하면 언제든 소란이 멈춘다는 소리지.”

이건우의 말대로였다.

정민솔의 인성 논란이 나왔을 때 그가 라이언에게 했다던 ‘거지 같은 검머외 새끼’라는 폭언. 그걸 아는 사람들이 ‘솔을 쓸어 날렵하게 과걸 쓸어 민첩하게’ 이 부분과 평소 두 사람 사이가 서먹하다는 걸 연결 지어 확신에 차 떠벌리고 다닌 게 사실처럼 퍼졌을 뿐, 가사에는 정민솔을 가리키는 뚜렷한 단서가 없었다.

“우리야 자초지종을 다 아니까 민솔이란 걸 확실히 알지만.”

“나도 그놈을 절벽 끝에서 밀어버릴 생각까진 없어. 이 바닥에서 완전히 매장할 생각도.”

천천히 고개를 저은 라이언이 눈으로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곤 미안한 얼굴로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해, 형제들. 싸움이 참, 기네.”

“괜찮아.”

“괜찮아요, 형.”

한율은 가볍게 라이언의 어깨를 감싸듯 두드렸다.

히. 라이언이 바보 같이 웃었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트레리안 <자존감>과 정민솔에 관한 논란은 이틀이 지나자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WB래빗 측에서 ‘트레리안의 믹스테이프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법한 내용이 아니라면 노 터치가 원칙’, ‘소속 아티스트를 향한 무분별한 비난 및 루머 유포엔 법적으로 강경 대응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힌 까닭이었다.

정민솔과 새롭게 전속 계약을 맺은 회사에서도 비슷한 공식 입장을 내놓았고.

그래도 여전히 트레리안의 믹테가 올라간 너튜브와 어스래빗, 원제로 커뮤는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두 팬덤 간의 전쟁으로까지 번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원제로가 해체하며 원제로 팬덤 또한 가뭄이 난 땅처럼 쩍쩍 갈라진 까닭이었다.

-뭐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돌 챙기기에도 바쁘다. 같은 팀 멤버까지 공격했던 잘난 악개 분들이 알아서들 하시겠지^^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

[어스래빗, 필리핀 마닐라 콘서트 성료! 다음 도시는]

[인기 보이그룹 어스래빗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25일과 26일 양일간 ‘EarthRabbit 2020 WORLD TOUR [The CARNIVAL] in MANILA’를 개최해 총 2만 명의 팬들과 만났다.

(중략).

어스래빗은 쉬지 않고 다음 투어 도시인 대만 타이베이로 향했으며 8월 2일에는 FJ그룹이 주관하는 ‘2020 미국 뉴욕 K-POP 콘서트’에 참여할 예정이다.]

-지구토끼 개바빵

ㄴㅋㅋㅋㅋ

ㄴ부지런히 지구 곳곳으로 외화 벌러 다니는 토끼들ㅎㅎ

-사진 합성 아님? 이런 듣보가 2만 명? ㅋㅋㅋㅋ

ㄴ요즘 아이돌 특히 남돌은 하나도 모르겠음

ㄴ남돌은 국내보단 해외 팬이 주 타깃이니까 충분히 모를 수 있지만, 본인이 관심 없어서 모른다고 듣보라고 후려치는 건 참 옹졸하네요.

-2년 전 처음 아시아 팬콘으로 마닐라 갔을 땐 천여 명 관객이 모인 작은 공연장에서 했었다던데 왠지 내가 다 뿌듯^^

-어스래빗 흥해라♡♡♡

-작성자가 삭제한 댓글입니다.

ㄴ야ㅋㅋㅋㅋ 댓글모임 가관이네ㅋㅋㅋ

ㄴㅈㅁㅅ 팬님, 여기에서 이러시면 안 돼요ㅎㅎㅎ

ㄴ꼭꼭 숨어라 어디 있나 자존감

“하….”

타악. 기사 댓글을 보던 정민솔은 입속으로 쌍욕을 중얼거리며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어느새 걷힌 이불을 다시 잡아 뒤집어썼다.

25일 새벽부터 내내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일어나서 방 밖으로 나가면 현실이란 게 체감되어,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씨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다 사과했잖아! 뭘 더 어떻게 해야 했던 건데!’

딱 한 번 들었을 뿐인 <자존감>의 한 소절이 귓가에 맴돌았다.

[꼭꼭 숨어라 어디 있나 자존감]

25일 새벽. 그날은 새로운 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인들로부터 톡과 전화가 빗발치듯 쏟아졌다. 당장 너튜브에서 트레리안의 <자존감>을 검색해 들어보라는 내용이었다.

꼭 널 겨냥하고 만든 노래 같다, 네티즌들이 그렇게 떠든다.

<자존감>을 들은 정민솔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여기에서나 손버릇이지 밖에 나가면 도둑 새낀데….』

『너 이런 거 사 먹을 돈 없잖아.』

WB래빗 데뷔조에 테스트 기간으로 들어갔을 때, 모두가 있는 앞에서 라이언에게 지껄였던 말이 가사가 되어 있었다. 라이언에게 조용히 했던 비아냥과 모욕도.

더 큰 문제는, 어스래빗과의 루머를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떠올리게끔 ‘솔을 쓸어 날렵하게 과걸 쓸어 민첩하게’란 가사를 집어넣었다는 사실이었다.

‘제대로 사과할 기회를 줄 것처럼 해놓고… 이딴 식으로 사람을 갖고 놀아?!’

처음엔 몹시 화가 나 라이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응답.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유호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유호는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다행히 하루 차이로 계약한 소속사에서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나서서 악플러는 줄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선 라이언이 직접 ‘정민솔 디스곡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자존심 다 버리면서까지 사과했는데…. 씨발, 이래서 없이 자란 새끼는….’

그때였다.

벌컥.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당장 안 일어나?!”

하. 정민솔은 짜증이 담긴 한숨을 내쉰 뒤 일어났다. 아버지가 이불을 거칠게 휙 걷었다.

“한심한 놈. 아이돌 되겠다고 기획사에 들어가서 한 짓이 고작, 다른 나라에서 와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집안 환경 어려운 애한테 그딴 소리나 지껄이는 거였어?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아니라고요! 나 아니라고!”

정민솔은 침대에서 내려와 아버지와 마주 보고 섰다.

“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그딴 말을 했다는 건데요! 아버지가 들었어요? 봤어요?!”

“지금 네 꼬락서니! 이게 증거 아니면 뭐냐! 네가 정말 떳떳했으면 당장 회사 통해서 그쪽에 항의하고도 남았지!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까, 당장 널 두고 쓴 가사가 아니라고 한마디 해달라고!”

“……!”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정말 사람들 보기 창피해서 원.”

“…….”

“대표가 그러더라. 이런 이슈는 당사자랑 직접 매듭짓는 게 빠르다고.”

정민솔은 헛웃음이 나왔다.

“찾아가서 싹싹 빌기라도 하란 소리예요?”

“그럼, 몇 달 동안 계속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 있겠다는 거냐? 아무것도 안 하고?”

“…….”

“그동안 너 고생한 거 안다. 그러니 눈 딱 감고 빌어. 너 고생한 몇 년, 앞으로 할 수 있는 많은 일들! 어릴 때 친구한테 한 실수로 전부 날릴 셈이냐? 그깟 자존심이 중요해?”

타악. 아버지가 봉투 하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뉴욕행 항공권이다. 짐부터 싸.”

다 지긋지긋해

[어스래빗, 2020 소리구름어워즈 불참]

[인기 보이그룹 어스래빗이 월드투어 ‘The CARNIVAL’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콘서트 일정으로 ‘2020 소리구름 어워즈에 불참한다.

어스래빗과 같은 소속사인 크리스탈 래빗과 드림래빗 또한 스케줄 문제로 불참하게 되었으며, 아림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들 또한 작년에 이어 올해도…(중략).]

-MOHE 안인섭이 스폰서 통해서 수상자 바꿨었다며ㅋㅋㅋ 그것 때문 아님?

-아림이랑 떠비 아이돌 죄다 불참ㅋㅋㅋㅋㅋ 소리구름 원래 권위 바닥이었지만 더 밑으로 떨어지는구나ㅋㅋㅋㅋ

-소리구름 지들이 자초한 일이지.

-어스래빗 투어 도중에도 FJ그룹이 하는 뉴욕이랑 LA K-POP 콘서트는 다 참석한다던데. 이 정도면 명백히 몇 달 전부터 작정하고 배제한 거네

-소리구름어워즈 동네잔치 된 지 오래임. 출석만 하면 상 줘

ㄴ그 상이라도 간절한 팀 많아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ㅜㅜ

“본래 2주 후로 잡혔던 홍콩 콘서트는, 현지 정세가 너무 좋지 않아 안전상의 이유로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29일 밤, 대만 타이베이의 한 호텔.

오늘 콘서트의 모니터링을 끝내고 각자 객실로 돌아가기 전이었다. 오동식 팀장의 말에 멤버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홍콩 공연은 투어 일정이 공개됐을 때부터 팬들이 우려를 표했었다. 현지 정세가 너무 안 좋아, 많은 인원이 모이는 콘서트는 위험하지 않겠냐고. 멤버들 또한 내심 불안했었고.

“어쩔 수 없죠. 공연 보러 오는 팬들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

“그래. 그리고….”

오 팀장이 콧잔등으로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썼다.

“남미 쪽 팬들의 강한 요청으로, 멕시코 공연 추가를 검토 중입니다.”

“멕시코는 남미 아니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남미 지역으로 가기엔 여러 사정이 있어서, 멕시코로 타협을 보려 합니다. 하게 된다면 날짜는 10월 16일.”

“우리 컴백 예정 날짜가 27일이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모레까지….”

길우성이 번쩍 손을 들었다.

“한다!”

“나도.”

“며칠 조금 더 고생하죠, 뭐.”

“궁금하다, 멕시코!”

“저도 찬성이요.”

“강하게 요청한다는데, 가야죠.”

“나도 찬성.”

“…….”

한율도 조용히 손을 들었다.

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모레까지 이견이 없다면 준비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에.”

“그럼 오늘은 이만 해산. 놓고 가는 물건 없도록 짐 잘 정리하세요.”

객실로 돌아온 한율은 오 팀장의 당부대로 짐을 꼼꼼하게 챙겼다. 함께 객실을 사용하는 라이언도 캐리어를 활짝 연 채 뒤적거렸다.

우웅. 라이언이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응, 찬형. …응, 내일 아침 비행기 타. 도착하면….”

라이언이 뒷말을 흐리며 한율을 바라보았다.

“샌프란시스코 경유해서 뉴욕에 도착하면, 현지 시각으로 오후 5시 정도 될 거예요.”

“들었지? …응, 호텔은 몰라. 안 알려줬어. …응, 알았어.”

라이언이 통화를 끊으며 한율에게 말했다.

“내일 도착하면 저녁 같이 먹자는데, 하뉼도 갈래? 인원 많을수록 안전할 것 같아.”

“봐서요.”

“응.”

기분이 좋은지, 라이언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저 캐리어를 정리했다. 며칠 전 트레리안의 새 믹스테이프 발표 뒤로, 그는 부쩍 홀가분해진 모습이었다. <런던래빗> 4화가 방송되었을 때처럼.

“오늘은 민솔이 형한테서 연락 안 왔어요?”

“응, 잠잠해. 포기했나 봐.”

인터넷에서 일어났던 논란도 어느 정도 잠잠해진 상황이었다.

아직도 몇몇 언론사에서 <자존감>으로 정민솔을 저격한 것 아니냐 집요하게 묻고, 사이버 렉카 너튜버들도 온갖 그럴싸한 추측 영상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WB래빗은 여전히 ‘믹테는 노 터치. 몰라요. 애들 투어로 바빠.’라는 태도로 응수 중이었다.

정민솔의 새 소속사가 ‘모 아이돌이 노래로 정민솔을 저격한 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기사를 낸 데에도 이쪽이 반응하지 않자, 진흙탕 싸움을 기대한 사람들이 급격히 흥미를 잃은 것.

라이언은 이렇게 말했다.

『다 같이 정민솔을 물어뜯어 달라고 낸 노래가 아닌걸. 정민솔, 머리 한 대 강하게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을 거야. 그러니 앞으로 더 신중히 행동하겠지? 조금이라도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착한 이미지를 열심히 챙기면서. 그거면 됐어. 그래도 정신 못 차리면 그땐…. 히.』

정말 그렇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까.

“형도 참 마음이 여린 것 같아요.”

“응? 아닌데. 차남석이 들으면 웃겠다.”

다음 날, 뉴욕의 JFK 국제공항.

털썩. 버스에 탑승한 멤버들이 하나둘 힘없이 좌석에 쓰러지듯 앉았다.

“오늘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았지? 평소보다 더 심해서 압사당하는 줄 알았어….”

“아직도 귀가 먹먹해.”

유호가 뒤통수를 매만졌다.

“누가 내 머리 토끼 인형으로 때렸어.”

“남들보다 키가 커서 타깃 잡기 쉬웠나 보다.”

“오늘 도착하는 팀이 많다 보니까, 겸사겸사 많이 모이신 거 아닐까.”

“스카이러너랑 우리 슬로건 같이 든 분도 계시더라.”

“팀장님, 우리 호텔 어디예요? 이따가 친구랑 저녁….”

우웅. 오 팀장에게 말하던 라이언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

액정을 확인하자마자 뚱해지는 표정.

“왜 그래요?”

“정민솔이 만나재.”

“잉? 민솔 씨 지금 뉴욕에 있어?”

“원제로 활동 끝난 기념으로, 한동안 누나가 유학 중인 뉴욕에서 쉰다는 기사를 본 것 같아.”

“걔한테 누나가 있었어? 처음 듣는데?”

“정민솔, 사적인 이야기는 잘 안 했었잖아요. 나도 그놈 데뷔하고 방송에서 가족관계 말하는 거 보고 처음 알았어요.”

“언제 어디에서 만나재?”

라이언이 메시지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여기에 있는 동안 편한 시간이랑 장소 말해주면 맞추겠대.”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마음이 생긴 걸까. 어쩌면 과잉 보복을 당했다는 억울한 마음에, 허튼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봤을 땐 휴식은 핑계고, 너 만나려고 일부러 뉴욕에 먼저 온 것 같은데.”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엔 안 피하고 만날 거야.”

-[내일 낮에 맨해튼에서 만나. 정확한 장소는 11시까지 정해서 톡으로 보낼게.]

뉴욕 브루클린의 한 아파트.

정민솔은 라이언에게 알았다는 답장을 보냈다. 거실 한쪽에 서서 정민솔의 눈치를 살피던 누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호텔은… 잡은 거지?”

“왜?”

“왜냐니. 여기는 침실도 하나뿐이고… 여러모로 불편하잖아.”

정민솔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노트북을 만지작거렸다.

“이 아파트, 내가 번 돈으로 빌린 건대.”

“그럼 내가 당분간 친구 집에서 지낼게. 그럼 되겠다. 나 잠깐 짐 좀 챙기고…. 아, 저녁은 어떻게 할래?”

“야.”

정민솔은 허둥지둥하는 누나를 바라보았다. 한 살 차이라 어릴 적부터 ‘누나’라는 호칭보다는 ‘야’ 혹은 이름으로 불렀었지만, 누나는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크게 덜컥거리며 멈췄다.

“…어?”

“너 공부는 제대로 하냐?”

“하지, 그럼. 여기 학비가 얼마나 비싼데. 열심히 하고 있지. 설마하니 동생이 고생해서 번 돈을 허투루 날릴까.”

불안정한 시선과 표정을 보니 썩 믿음이 가지 않는다. 정민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한테 용돈 더 보내달라고 그랬다며?”

“그건… 알바를 못 하니까 다음 달 용돈을 미리 당겨달라고 한 거야. 여기 내 운동화 봐. 아껴 신는다고 신었는데 금방 헤지더라.”

“아직 아버지랑 엄마한테서 얘기 못 들었나 보네. 내가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알아?”

“뭘… 했는데?”

정민솔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눈치를 살피는 누나를 향해 웃었다. 몇 년 동안 연습생 생활, 아이돌을 하면서 익힌 환한 미소였다.

“내 통장 비밀번호 죄다 바꿨어. 아버지한테 드린 카드도 전부 정지시켰고.”

“……!”

“누나 너, 나한테 불만 많았던 거 알아. 부모님이 항상 심부름이나 집안일 전부 누나한테 시키고, 학원도 나만 보내줬었잖아. 난 아직도 누나가 울면서 ‘너 같은 거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고 소리 질렀던 기억이 생생해.”

“민솔아, 그땐.”

“알아, 누나도 아주 힘들었었다는 거.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누나가 유학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찬성한 거고,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액수가 필요 경비 이상으로 점점 늘어나도, 처음엔 이해했어.”

“…….”

“아버지 시야에서 벗어나지니까 숨이 트였겠지, 지금까지 부모님 눈치 보느라 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일들을 다 하느라 신나서 그러는 거겠지. 그런데….”

정민솔은 천천히 거실을 둘러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더는 안 되겠어.”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던 누나가 정민솔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야?”

“누나 너도 최근 한국 포털사이트 실검에 내 이름 뜬 거 봤지? 그때 무슨 생각 들었어? 꼴좋다? 아니면… 지금 내 자유로운 유학 생활에 지장이 생기면 어떡하지?”

누나가 놀란 얼굴로 다가오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그거 보고 걱정 많이 했거든? 주변 사람들한테도 내 동생이 그럴 리 없다고 얼마나 말하고 다녔는데.”

하. 정민솔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사람이 나한테 ‘괜찮냐? 사실이냐?’ 이런 문자 하나 안 보내?”

“미안해. 나는 오히려 네 속을 긁을까 봐…. 그래도 엄마한테 물어봤어. 너 어떻게 하고 있냐고, 괜찮냐고….”

“그래, 참 고맙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누나를 향해, 정민솔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버지는 그러더라? 사실 여부는 묻지도 않고, 왜 그랬는지도 묻지 않고, 무조건 상대방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빌라고. 그래야 계속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러면서 뉴욕행 항공권을 내미는데…. 하.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여전히 미소 짓는 정민솔의 눈가가 붉어졌다. 목소리도 점점 떨렸다.

“그 몇 시간 전에, 잠깐 꺼놨던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 결제 메시지를 본 기억이 났거든. 내 앞날을 걱정하는 척,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척하면서 결국 항공권도 내 카드로 긁었던 거지. 웃기지 않아?”

“민솔아….”

“네까짓 게 무슨 아이돌이냐, 때려치워라. 그런 말씀을 하셨어도 결국 내가 데뷔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셨으니까, 집 대출금 갚아드리고, 차도 사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그랬는데….”

급기야 정민솔은 북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떻게 이틀 동안 한 끼도 안 먹은 자식한테 괜찮냐고 묻기는커녕….”

“미안해, 민솔아.”

누나가 울먹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러곤 정민솔의 눈물을 닦아주며 사과했다.

“누나가 미안해….”

“짐을 싸는 동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라이언 그 자식이 쓴 가사대로 내 자존감엔 내가 없고, 내가 만든 가면에도 내가 없더라.”

정민솔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끊어버리려고. 이미지를 위한 화목한 가정? 그딴 거 이제 필요 없어.”

누나의 손을 잡아떼어내고, 직접 제 눈물을 거칠게 닦으며 말을 내뱉었다.

“다 지긋지긋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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