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31일 오후, 맨해튼의 한 작은 카페.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타난 정민솔이 라이언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가까운 테이블에 한율과 유호, 길우성과 경호원들이 있었지만, 이쪽으론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지금 내 꼴 보니까 어때. 속 시원하냐?”
“네 꼴이 뭐. 멀쩡한데.”
“난 정말로 네가 소문대로.”
정민솔이 라이언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손버릇도 나쁘고, 이상한 새끼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러기를 바라고 널 공격하고 의심하고 욕하고 비아냥거리고 무시했어. 네 말이 맞아. 그런 식으로라도 상대방을 짓밟아야 내 자존감이 올라간다고 여겼거든. 그냥 네가 싫기도 했고.”
정민솔이 다짜고짜 본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라이언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그런데 어떡하냐?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해도,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안 드는데? 없어. 안 생겨. 씨발,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라고. 나중에라도 진심으로 사과할 양심이나 올바른 사고방식이 머리에 박혀 있었으면, 애초에 너한테 그딴 말들을 지껄였겠냐?”
라이언은 살며시 입을 벌리며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 뭐가 이렇게 당당하지?”
내가 방패냐?
“지금까지 내 사과 다 무시한 게 그런 이유였잖아.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래서 솔직히 말하는 거야. 진심 없어도 무릎 꿇고 미안하다고, 내가 진짜 잘못했다고 외치기를 바라면 그렇게 하고.”
“너….”
라이언의 얼굴이 살며시 굳었다.
“무슨 일 있어?”
정민솔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은 네가 저질러놓고 왜 나한테 물어.”
“그럼 왜 갑자기 다 포기한 사람처럼 이러는데?”
하아. 정민솔이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라이언을 향해 입가를 올렸다.
“그러기를 바란 건 너 아냐? 그래서 원제로 해체하자마자 그런 곡 낸 거잖아. 그런데 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일본에서 주로 활동해 보려고. 그것까지 싫은 건 아니지?”
“시답잖은 이유로 날 괴롭힌 네가.”
라이언이 언성을 높였다.
“나를 핑계로 그런 결정을 내려? 왜 나를 가해자로 만들어?”
“그게 또 그렇게 되나….”
한숨 섞인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
정민솔이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미안하다. 거기까진 생각 못 했네.”
“…….”
계산하지 않은 진심이 담긴 사과. 처음 보는 태도였다.
그래서일까. 라이언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정민솔을 바라보았다. 한율이 보기에도 정민솔의 상태는 평소와 아주 달랐다. 일본에서 활동하겠다는 둥 말하는 사람치곤 눈에서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먹고 잘살아도 거슬릴 거 아냐.”
“너. 팬들 생각은 안 해?”
“…….”
“네가 그랬을 리 없다고, 만약 그랬어도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믿는, 네 팬들 생각은 안 하냐고.”
시종 담담하게 굴던 정민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가사엔 네 가면에 네가 없다고 적었어. 하지만 정말로 팬들 눈에 비친 네 모습에, 네가 전혀 없었을까? 그리고 내가 바란 건 네가 이대로 찌그러지는 게 아니라,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행동하지 말고 똑바로, 잘, 사는 거야.”
“…나.”
정민솔이 라이언의 시선을 피하며 일어났다.
“커피 주문 안 했다.”
“이딴 식으로 도망치지 마.”
라이언도 자리에서 일어나 정민솔을 쏘아붙였다.
“얼렁뚱땅. 이딴 식으로 너 좋을 대로 피하고, 너 좋을 대로 합리화하지 말라고.”
“…….”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외치지 않아도 돼. 지금처럼 남 탓, 남 핑계 삼아서 스스로 불쌍하게 여기는 상황으로 몰지 마. 짜증 나서 한 대 때리고 싶으니까.”
“…….”
정민솔이 입술을 깨물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자에 가려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라이언이 일행에게 말했다.
“가자. 얘기 다 끝났어.”
“…민솔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일행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호가 정민솔에게 다가가, 힘없이 늘어진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내일 같이 밥이나 먹자.”
“…….”
“알았지?”
정민솔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끄덕였다.
“…어.”
“톡으로 번호 보낼게. 내일 보자. 조심히 들어가고.”
길우성도 정민솔의 팔을 툭 쳤다.
“민솔 씨, 나중에 한국에서 봥. 그리고 라일 형한테 연락 좀 해. 연락 안 된다고 걱정 많이 하더라.”
“또 봐요, 형.”
한율도 정민솔에게 인사를 건네곤 옆을 지나쳤다. 그들을 지키던 경호원도 정민솔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걱정되는지, 걸음을 옮기던 유호가 정민솔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너 연락 제대로 받아!”
조금 떨어진 거리. 정민솔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며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호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언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쟤 원래 뻔뻔해서 금방 기 살아. 걱정 안 해도 돼.”
유호가 웃으며 라이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우리 라이언, 다 커서 이젠 장가가도 되겠다.”
“진짜 가도 돼?”
“응, 안 돼.”
다음 날. <뉴욕 K-POP 콘서트> 공연장은 내일 무대에 오를 팀들의 리허설로 분주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리허설 조끼를 착용하고선 무대 아래에서 몸을 풀었다.
“여~ 지구 토끼~ 대세 아이돌~.”
“투어 티켓 전부 매진됐다며? 축하해.”
스카이러너의 하신과 용맹이 큰소리로 인사하며 다가왔다. 그러곤 데면데면한 다른 멤버들과도 예의 바르게 인사.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어스래빗 멤버들도 뒤이어 도착한 다른 스카이러너 멤버들과 인사를 나눴다.
용맹이 한율의 등을 가볍게 툭 치며 웃었다.
“너희 콘서트 평 진짜 좋더라. 나도 보러 갈래.”
“그럴래요? 남은 관계자용 초대석이 있을 거예요. 항공권은 별도 구매하시고.”
“농담 아니고, 진짜로. 우리가 다음 달에 영국 스케줄이 있거든. 마침 너희 런던 콘서트 때 시간이 맞을 것 같아.”
하신이 끼어들었다.
“나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께 자리 있는지 물어볼게요.”
걸그룹 퍼플아워의 리허설이 시작되어 장내는 음악 소리로 가득 찼다. 한율은 무대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오동식 팀장에게 다가갔다. 목을 아끼기 위해 사과패드에다 메시지를 적어 묻자, 오 팀장도 메시지로 대답했다.
[9월 11일 런던 콘서트 두 자리 맞지? 빼둘게.]
[네, 감사합니다.]
한율은 오 팀장의 대답을 용맹과 하신에게 전달했다. 용맹이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우리 콘서트에도 초대할게!”
“네.”
퍼플아워의 리허설이 끝나고 어스래빗의 리허설.
무대로 올라간 한율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편히 발목을 풀었다. 어느새 아이돌 데뷔 4년 차. 제 모습이 이목을 끌든 말든,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무대 아래에서 그 모습을 보던 하신이 웃었다.
“우리 서 씨 친구, 몸짓 하나하나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한율인 천상 연예인이라니까. 그나저나….”
용맹의 시선이 박가람을 향했다.
“가람이 형 피부가 원래 저렇게 좋았었나? 아까 가까이에서 보니까 그 흔한 트러블 흔적도 하나 없더라. 꼭 한율이처럼.”
“원래도 나쁘진 않았는데, 확실히 몇 달 사이에 더 좋아진 것 같아.”
“비결이 뭘까? 투어 중이라서 피부과나 전문 샵에 관리받으러 갈 수도 없었을 텐데.”
“이따가 물어보자.”
장내에 <뉴욕 K-POP 콘서트> PD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스래빗 스탠바이. 3, 2….]
하신이 대형 전광판에 잡히는 한율을 보며 씨익 웃었다.
“크으, 눈빛 변하는 것 보소.”
후우. 조금 전 리허설을 끝낸 진은수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면서 무대를 바라보았다. 어스래빗이 작년에 발매한 정규 1집 타이틀곡, 이 시작되었다.
“언니, 리허설 끝냈으니까 이제 가도 되는 거 아냐?”
“아직 루트 선배님들 안 왔잖아. 여기에 있다가 선배님들 오면 인사하고 가야지.”
다른 멤버가 큰소리로 투덜거려도, 진은수는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선배님 정말 멋있다.’
무대 위의 서한율을 보고 있자니, 더순한화장품 CF 촬영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아주 오래된 일처럼 느껴진다.
‘다 같이 인사하는 거 말고… 마지막으로 따로 이야기 나눠본 게 언제였더라….’
이 또한 굉장히 가물가물했다.
만약 내가 좋아하는 티를 잘 감췄더라면 나았을까. 바보같이 톡 ID를 적은 쪽지만 건네지 않았어도,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안부 몇 마디 더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덥석.
“……?!”
진은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진은수의 어깨를 끌어안은 루아가 귓가에 대고 말했다.
“스캔들 의혹은 지금 네 태도가 만드는 거야, 은수야. 왜 이렇게 학습 능력이 없어.”
“…죄송해요, 언니.”
무대가 끝나며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던 음악 소리가 걷혔다.
루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농담이야,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 다른 팀 무대를 집중해서 보는 게 뭐가 큰일이라고.”
“네….”
은수는 입가를 올리며 옷의 구겨진 부분을 펴는 척,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막내 멤버 송의연의 나지막한 욕설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이씨, 진짜 꼴 보기 싫은 것들 왔네.”
송의연이 투덜거리며 보는 곳엔 지난달, 뮤닷 를 통해 만들어진 프로젝트그룹 ‘IOMU’가 입장하고 있었다. IOMU 멤버 열 명은 하나같이 휘둥그레 뜬 눈으로 공연장 내부를 둘러보다가, 사람들에게 일일이 꾸벅거리며 인사했다.
송의연이 이렇게 날이 선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원제로가 그랬듯, IOMU 또한 폭발적인 인기와 관심으로 출발한 팀인 까닭. 일각에선 IOMU의 초동 앨범 판매량이 퍼플아워를 뛰어넘을 거란 예측도 나오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린라이브 유료 팬클럽 회원 수가 벌써 퍼플아워와 비등한 상황이고. 아직 정식 데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송의연이 진은수를 힐끗하곤 들으라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한율이 저기 들어간 소속사 후배 위해서 지원 사격 나갔던 거고, 데뷔 축하로 따로 비싼 신발까지 선물했다던데.”
“…….”
“남자 잘 꼬시게 생기긴 했네. 키도 크고, 눈웃음에도 애교 가득하고. 이미지랑 콘셉트 때문에 압박 속옷으로 일부러 가슴 볼륨까지 죽였다는 거 보면….”
찰싹. 루아가 송의연의 팔을 때렸다.
“얘가 사람들 있는 데서 못 하는 말이 없어.”
“여기 우리 말고 누가 있다고…. 있네.”
대체 언제 왔는지, 바로 근처에서 원카운트의 찬형이 실장과 사과패드를 들여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송의연은 되레 찬형을 타박했다.
“오빠는 왜 소리 없이 오고 그래요, 사람 놀라게.”
찬형은 송의연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충 미안하다는 뜻으로 손만 휘젓곤, 실장과 이야기를 계속했다. 송의연은 그런 찬형을 마음에 안 든다는 시선으로 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어스래빗의 리허설이 끝났다.
어스래빗 멤버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가자, 일렬로 서서 기다리던 IOMU가 인사했다.
“하나, 둘.”
“안녕하십니까!”
“반짝반짝 빛나는!”
“뮤즈가 되고픈 열 명의 소녀들!”
“IOMU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IOMU 멤버들 곁엔 그들의 데뷔 리얼리티를 촬영 중인 VJ와 PD도 함께 있었다. 2년 전, 지금처럼 <뉴욕 K-POP 콘서트>에서 원제로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어스래빗도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IOMU 여러분, 데뷔 축하드립니다!”
IOMU 멤버들이 쑥스럽거나 잔뜩 긴장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눈치껏 잘 봤다느니, 우리 후배 두 명 잘 부탁한다느니 방송으로 쓸 만한 멘트를 해주었다. 특히 유호와 강보배, 라이언은 그들이 만든 곡으로 경연했던 멤버들에게 응원의 말을 한마디씩 더 건넸다.
“그럼 긴장하지 말고, 홧팅!”
“네,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무리하고 나선 어스래빗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리허설 조끼를 벗었다. 멤버들의 인이어와 마이크 등이 전용 캐리어에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이건우가 유호에게 물었다.
“이따가 민솔이 만난다며?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어?”
“민솔이가 우리 호텔로 오기로 했어. 그게 안전하지 않겠냐고.”
“철들었네.”
“민솔이도 아이돌이잖아. 오늘 같은 날 함부로 밖에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아는 거지.”
“카메라 있나 없나 잘 살펴봐요, 형. 여론전에 쓸 수 있으니까.”
길우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삐딱한 남석 씨는 어제 민솔 씨의 상태를 직접 봤어야 했다.”
“뭔 소리야.”
“그럼 우리는 먼저 갑니다요.”
길우성이 옆에 있던 스카이러너 멤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용맹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곧 루트 선배님들 온다던데, 인사 안 하고 그냥 가게?”
“어…. 기다려야… 하는 거야?”
데뷔 후 지금까지 합동 콘서트를 하는 동안, 오로지 인사를 위해 선배 팀을 일부러 기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리허설만 하는 날에.
“바쁘면 그냥 가도 되지만….”
용맹이 다가와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루트 리더 성격이 꽉 막힌 그, 뭐잖아.”
“꼰대?”
“응. 시간이 멀면 또 몰라, 본인들 금방 도착할 거 알고도 휙 가버렸다는 거 알면, 뒤끝 장난 아니게 굴걸.”
길우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우리한텐 써한이 있거든.”
“내가 방패냐?”
사람 관계는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아
결국 어스래빗은 루트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 팀장이 그러자고 한 까닭이었다.
“그리 바쁜 것도 아닌데, 몇 분 아끼자고 선배 아이돌에게 안 좋은 시선 받을 필욘 없죠. 이 바닥 좁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함께 일하게 될지 몰라요.”
루트는 리허설 큐시트에 적힌 시간보다 10분 늦게 도착했다.
국내에선 한물갔다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해외에선 여전히 그들을 좋아하는 팬이 많았다.
여기에 연차만큼 인맥도 화려하고 여러 방면에서 활동 중이라 그럴까. 스태프들은 그들의 지각에 전혀 불쾌감을 표하지 않았다.
루트 멤버들 또한 참 당연하다는 듯, 지각해서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이 후배들과 인사를 꼬박꼬박 나눴다.
“리허설 끝났는데도 우리한테 인사하려고 기다린 거야? 와, 감동이다. 역시 이 친구들, 예의가 발라.”
“투어는 다치지 않는 게 제일이야.”
루트의 김종주는 한율에게 살갑게 말을 건넸다.
“연락하려고 했는데 투어로 정신없을 것 같아서 안 했어. 이제 어디로 가?”
김종주는 배우 이강대에게 앗싸일보의 이 기자를 소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앗싸일보의 억측, FJ그룹의 하 부장이 한율의 팬이라서 이강대의 섭외를 막고 있었단 이야기는 전혀 못 들은 눈치였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요.”
“인도네시아, 좋지. 시간 되면….”
루트의 리더가 김종주를 강제로 끌고 갔다.
“종주야, 리허설 해야지.”
“나중에 봐…!”
리허설 준비도 어찌나 더딘지, 루트가 무대로 올라간 건 큐시트보다 30분 늦은 시간이었다. 그만큼 다음 팀들의 리허설이 30분씩 밀렸다는 소리였으나, 후배들 또한 불평은커녕 기대의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봐야만 했다.
30분 밀린 팀 중 하나인 스카이러너의 용맹은 영혼 없는 웃음을 지으며 한율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했다.
“하하하. 음방도 아니고 합동 콘서트 리허설에 지각하며 민폐라니. 난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호텔로 돌아온 어스래빗 멤버들은 각자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스타아이와 그린라이브에 올릴 자체 콘텐츠는 어제 다 촬영했고, 오늘은 멤버 몇 명만 밤에 라이브를 켤 예정이었다.
“그럼 나 민솔이랑 저녁 먹고 올게.”
“네, 맛있게 먹어요.”
오후 5시. 한율과 같은 객실을 사용 중인 유호가 나갔다.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데다 경호원도 함께 간다고 하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둔하긴 둔하네.’
유호와 같은 객실을 사용하면서 한율은 주변의 마나를 끌어모아 유호에게로 흘려보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때마다 유호는 팀 반지를 낀 왼손을 대충 긁적거리다가 핸드크림을 발랐다.
『여기 많이 건조한가 봐. 이상하게 자꾸 간지럽네.』
명상을 핑계로 마나 유동을 시켜보려고도 했지만, 작곡가이자 리더인 그는 참 바빴다. 찾는 사람도 많았고.
‘내일 스케줄을 위해 오늘은 그나마 일찍 자려고 할 테니, 강제로라도 시켜야지.’
호텔 내 레스토랑의 프라이빗룸.
유호는 약속 시간에 맞춰 찾아온 정민솔과 저녁을 먹으면서 소소한 이야기부터 나눴다. 해체 후 어떻게 지냈는지, 뉴욕에선 뭘 하고 지내는지.
두 사람은 정민솔이 데뷔조 테스트 기간으로 들어왔을 때, 정민솔이 속에 품고 있던 비틀린 생각을 공격적인 언행으로 토해낸 이후로 사이가 멀어졌었다.
라이언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크게 실망하기도 했고.
같은 콩콩 엔터로 이적할 정도로 친했던 김형수와 사이가 멀어진 이유에 대해서도 대충 짐작하고 있지만, 그런 것들도 잠시 뒤로 미뤘다.
그동안 퍽 답답했던 건지, 생각을 많이 하고 깨달은 바가 있었던 건지. 유호가 경청하는 태도를 보이자 정민솔은 조금씩 진심을 내비쳤다.
“그냥 다 싫었던 것 같아. 다들 내 데뷔를 방해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졌거든. 그게 그따위로 행동해도 된다는 정당성을 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내 실패의 원인을 남한테서만 찾았어. 저놈만 없었어도 내가 들어갔을 텐데, 아버지가 조금 더 타인에게 공감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나도 이렇게는 안 자랐을 텐데. …그래서 솔직히 겁이 나.”
“뭐가?”
“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핑계로… 이번엔 가족을 방해꾼 취급하면서 연을 끊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만약 내가 지금처럼 돈을 많이 벌지 않았어도, 감히 지금과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
“내 결정에 자신이 안 생겨.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고,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않고.”
조용히 한숨을 내쉰 정민솔이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해, 형. 나 진짜 뻔뻔하지? 형한테 그딴 말이나 지껄여놓고 이제 와서….”
유호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내가 형이잖아. 야, 내가 널 6년이나 봐왔는데. 그리고 너 아직 어려. 꼬인 건 앞으로 차근차근 풀면 되니까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 지난 2년 동안 제대로 된 휴식 없이 달리기만 했잖아. 긍정적인 생각도 일단 몸이 건강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나오는 법이거든.”
“응….”
“형수한테도 연락하고. 걔가 너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유일하게 감싸준 사람이잖아. 멀리하면 되겠어?”
“형수 형 힘든 거 뻔히 알면서 나도 바쁘고 힘들다고, 이런저런 일까지 괜히 형 탓하면서 외면해놓고… 다시 연락하기가 조금 그래서.”
유호는 단호한 어조로 조언했다.
“그래도 해. 그래야 달라지지. 사람 관계는 절대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아.”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유호는 로비까지 정민솔을 배웅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떠나는 걸 보고 나서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저 때문에 식사 제대로 못 한 거 아니에요, 형들?”
유호와 정민솔이 프라이빗룸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경호원 두 명도 프라이빗룸 근처 테이블에서 저녁을 먹었다.
경호원들이 씨익 웃었다.
“디저트까지 아주 배부르게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어요, 호 씨.”
“다행이네요.”
사실 호텔 레스토랑까지 경호원들을 대동하는 건 조금 오버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지만, 오 팀장의 지시였다.
‘아무리 미국이 한국보다 위험하다곤 해도, 과격한 극성팬은 없는 것 같은데.’
아직 어스래빗은 미국에선 K-POP 팬들에게만 알려진 팀이었다. 호텔 안까지 들어온 사생들도 호텔 경비원에게 쫓겨나거나 경찰에 신고당할까, 거리를 둔 채 조심스럽게 촬영하는 정도고.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나? 아직 투어 중이기도 하고.’
딩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유호는 습관적으로 내리는 사람을 위해 두어 걸음 옆으로 비켜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성큼. 조금 전까지 제 배를 두드리며 웃던 경호원이 정색하며 유호의 앞을 막아 보호했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소곤.
“물러나세요.”
“……?”
유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기울였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남자가 코피를 흘리며 비틀비틀 나오는데, 웬 고약한 냄새가 훅 풍겼다.
‘마약중독자인가?’
눈은 흐리멍덩하고 입에선 침까지 흘리고 있다. 코피를 아무렇게나 닦았는지 손과 옷은 피투성이.
꺄아악! 그때 로비에 있던 여성이 남성을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다른 사람들도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소리를 질렀고, 로비는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그에 덩달아 흥분한 걸까. 멍하니 걷던 남성이 돌연 두 팔을 번쩍 들어 괴성을 질렀다. 우어어! 그러곤 소리를 지른 이들이 아닌, 가까이에 있던 어스래빗의 경호원에게 달려들었다.
공격에 대비하던 경호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덥석 잡아 바닥에다 메어쳤다. 쿵!
“악!”
뒤늦게 호텔 경비원들이 달려와 버둥거리는 남성을 대신 제압했다. 저도 모르게 무기로 쓸 법한 물건으로 손을 뻗었던 유호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한율은 오 팀장과 함께 로비로 내려왔다. 그리고 객실에서 가져온 유호의 여권을 주인에게 건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나도 잘 모르겠어. 엘리베이터에서 이 사람이 비틀비틀 내리더니, 갑자기 소리 지르면서 경호원 형한테 덤비더라.”
유호는 출동한 경찰에게 여권을 보여주며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다. 오 팀장 또한 경호원들의 말을 영어로 통역하며 경찰에게 들려주었다. 그사이 남성은 다른 경찰들에게 붙잡힌 채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래도 별일 없어서 천만다행이네요.”
“엘리베이터가 큰일 났지.”
“아.”
남성이 탔던 엘리베이터는 피와 고약한 냄새로 지저분해진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호텔의 엘리베이터가 두 대라는 점.
경찰이 경호원들과 유호의 여권을 돌려주었다.
[협조 감사합니다.]
오 팀장이 유호와 한율의 등을 손으로 감쌌다. 차칵차칵. 멀찍이서 사생들의 셔터 소리가 들렸다.
“우린 이만 올라갑시다.”
그들은 멀쩡하고 깨끗한 엘리베이터를 탔다.
객실로 돌아온 뒤, 한율은 덤덤해 보이는 유호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 그리 놀란 것 같지 않네요? 무섭지 않았어요?”
“영국에서 살았을 때도 별꼴을 다 봤었거든. 몇 달 전엔 바로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는 걸 보기도 했고….”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체가 불분명한 귀신은 무서워해도, 현실적인 상황엔 강하구나.
‘칠레 조명 사고 때도 비교적 차분했었지.’
유호가 핸드폰과 여권을 침대로 툭툭 던지곤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그럼 난 좀 씻을게.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네, 그렇게 해요.”
유호가 욕실로 들어갔다.
“…….”
스륵. 한율의 눈동자가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