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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금요일. 어스래빗이 ‘EarthRabbit 2020 WORLD TOUR [The CARNIVAL] in JAKARTA’ 공연을 시작하던 시각, 한국에서는 ‘2020 소리구름어워즈’가 시작되었다.
지난 3월, MOHE의 안인섭이 스폰서를 통해 수상자를 바꿨었다는 이해원의 폭로에 소리구름은 사실무근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소리구름 대표가 참고인 조사를 받고 나서 사퇴, 소리구름은 이후 해당 이슈에 대해 침묵했다.
그리고 오늘 소리구름어워즈 라인업에서는 아림 엔터와 WB래빗 엔터 소속 아이돌이 대거 빠졌다. 사람들은 수상자 바꿔치기의 피해자가 두 엔터 소속 가수가 아니냐 추측했다.
소리구름어워즈가 끝나고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
[권위 추락 소리구름어워즈, 사실상 출연팀 상 나눠주기]
-1년 동안 히아신스랑 어스래빗 활동 대박이었는데 무관ㅋㅋㅋㅋ
-아림이랑 떠비 소속 아이돌 상 하나도 안 주는 거 보면서 진짜 그 찌질함에 감탄했다
-어째 상 받는 애들이 더 민망해 보이더라;
-아림이랑 떠비 돌들 없는 자리 대신 채운다고, 무대 열심히 준비해서 올라간 망돌들 기특하고 짠했음ㅜㅜ
ㄴ망돌이라뇨ㅡㅡ
ㄴ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 망돌 맞지 않나? 나 돌 노래 자주 듣는데, 이렇게 모르는 애들 많이 나오는 K-POP 시상식 처음 봤음;;
ㄴ대형기획사 애들만 파니까 그렇죠. 중소에도 실력 좋고 노래 좋은 애들 많아요ㅠㅠ
-AC.. 뭐라던 애들 호명되자마자 펑펑 울면서 무대 올라가는 거 레알 짠하던데. 처음 보는 애들 같았는데 데뷔 4년 차라 그래서 조금 놀랐음.
ㄴACCOM입니다! ㅎㅎ 예쁘게 봐주세요!
ㄴ그런데 수상 소감으로 어스래빗 유호한테 좋은 곡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해서 내년엔 못 나올 듯
ㄴ그만큼 고맙다는 거지
다음 날 아침엔 어스래빗의 자카르타 콘서트 성료를 알리는 기사가 떴다. 다음 투어 장소인 싱가포르로 가기 위해 공항에서 찍힌 사진도 함께.
[월드투어 중 어스래빗, 자카르타 콘서트 성료!]
[K-POP 대세 아이돌 어스래빗, “싱가포르 이프림 만나러 가요”]
[[포토뉴스] 어스래빗 우성, 애교 가득 손하트]
[(사진=WB래빗 엔터테인먼트)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의 멤버 우성이 애교 가득한 손하트와 윙크를 선보이고 있다.]
-데뷔 초반엔 솔직히 조금 촌스러웠는데 젖살도 빠지고 관리도 받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점점 고와지고 특히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쁜 우리 천재 메댄 길우성 사랑한다♡♡♡
길우성의 누나, 길미현이 자취하는 원룸.
길미현은 동생 기사에 달린 호의적인 댓글에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 나란히 침대에 편히 기대어 앉은 미랑이 피식 웃었다.
“정작 본인한테는 왜 팬들이 널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묻더니?”
“대놓고 칭찬하면 버릇 나빠지잖아.”
“그나저나. 어제 통화할 때 고민 있다 그랬잖아. 뭐야?”
“…….”
길미현이 어두워지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미랑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았다.
“박현우 문제야?”
“아니….”
“그럼… 집안일?”
“응.”
길미현이 한숨을 푹 내쉬며 핸드폰 속 길우성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잠시 머뭇거리다가 미랑을 바라보았다.
“어제… 할머니한테서 연락이 왔었대.”
“할머니?”
“지금 우리 아빠네 말고….”
미랑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갑자기? 무슨 일로?”
길미현이 속상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성이 만나고 싶다고 하셨대. …우성이 태어났을 때 얼굴 한번 비춘 적 없었으면서.”
내가 만든 건데 무서울 리가
나의 이름은 길우성. 수많은 팬의 환호성 속에서 월드투어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니는 K-POP 대세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의 메인 댄서다.
어렸을 때부터 난 춤에 대한 소질이 있었다. 아이돌이 꿈이었던 누나 친구를 따라 추다 보니 잠재되어 있던 나의 천부적인 재능이 만개했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가슴 아픈 과거가 있었으니, 바로 마음이 순수하고 여린 아이 앞에서만 강해지는 못난이 집단의 괴롭힘이다. 어른들의 ‘불쌍하다’라는 평가와 손가락질은 괴로움 축에도 못 낀다.
친부의 얼굴을 모르는 게 불쌍한 건가?
엄마가 한때 어긋난 길을 걸었던 게 불쌍한 건가?
본인들은 그러지 않아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나는 행복하다.
부모님이 사실 좋은 집 장만에 보탤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으며, 내 곁엔 형제처럼 든든한 멤버들,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이프림이 있다.
“백 년 후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
싱가포르의 한 호텔. 새하얀 노트를 펼쳐놓고 사색에 잠겨 있던 길우성이 돌연 만족스러운 미소를 씩 지었다. 차남석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가사 쓰다 말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잠시 나는 어떤 존재인가 되짚어 보고 있었소, 형님. 작사는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거 아니오.”
“팬송에 쓰일 가산데 내면부터 돌아봐야 하는 거냐?”
길우성이 진지한 눈으로 차남석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됐소.”
“…….”
쟨 어쩌다 저렇게 자랐을까.
차남석은 말없이 길우성을 바라보다가 노트북을 열었다.
싱가포르 콘서트를 마친 다음 날인 8월 10일. 어스래빗은 LA로 가기 위해 공항을 찾았다.
“경유지에서 대기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17시간 가까이 하늘을 날 예정입니다. 괜찮아요. 이젠 비행기에서 자는 것도 익숙해졌거든요. …크으, 이러니까 지구 대스타 같당.”
“진짜 지구 대스타는 전세기나 전용기를 타고 날아다니지 않을까?”
히. 길우성이 셀캠에 대고 바보 같이 웃었다. 아직도 어제의 콘서트 여운이 가시지 않은 건지, 상당히 들뜬 모습이었다.
“옆에서 들리는 친구의 팩트 발언은 무시하겠습니다.”
우웅. 길우성은 셀캠을 끄고선 핸드폰을 꺼냈다.
“하이, 곰순. 웬일로 이 시간에 전화했대? …응, 지금 공항이야. …엄마한테서 전화? 안 왔는데, 왜? …엉.”
길우성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전화를 끊고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무니, 저예용. 별일 없으시죵?”
길우성의 통화를 듣자, 크게 이동할 때마다 소식을 들려달라던 모친의 당부가 떠오른다.
한율은 핸드폰을 높이 들어 셀카를 찍었다. 찰칵. 항공권 사진도 찍어서 가족 단톡방에 업로드.
[대만 경유 LA행 비행기 탑승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래~^^]
-[우리 아들 오늘도 잘생겼다♡]
-[(이모티콘)]
-[밥은 먹었어?]
[네. :)]
모친에 이어서 이번엔 부친.
-[영양제는 잘 챙겨 먹고 있지? 건강이 우선이다.]
[네. 두 분도 잊지 말고 잘 챙겨 드세요.]
-[오냐.]
-[(사진)]
한율은 모친이 올린 달냥의 근황 사진을 핸드폰에 저장했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진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우성이 어두워진 얼굴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응, 괜찮아. …응.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응.”
후우. 통화가 끝나자마자 깊은 한숨.
“왜. 집에 무슨 일 있대?”
길우성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할머니한테서 연락이 왔대. 나랑 만나고 싶다고.”
“외가?”
길우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예전엔 어땠는지 몰라도, 현재 친가와는 그리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그러니 새삼 아버지의 모친을 만난다고 이렇게 심각해질 리 없을 터.
한율도 목소리를 낮췄다.
“친아버지 쪽?”
끄덕.
“응….”
한율이 조사한바, 길우성의 친부는 길우성이 태어나기 전 사고로 사망했다. 그리고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속사정이 있었던 건지. 그쪽 집안과는 남남으로 살았다. 그런데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만나려는 이유가 뭘까.
“평소에 왕래가 있었어?”
“아니. 외가랑 마찬가지로 한 번도 뵌 적 없어. 얘기를 들은 적도 거의 없고. 그런데 예전에… 누나가 그랬었어. 아주 어렸을 때 친할머니를 딱 한 번 본 기억이 있는데, 그때 할머니가 누나를 쳐다보던 눈빛이 굉장히 싸늘해서 무서웠다고. 그래서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고.”
“…….”
“아. 친아빠는 나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길우성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두서가 엉망이네. 아무튼… 할머니랑 엄마 사이가 무척 안 좋았었나 봐.”
사적이고 무거운 주제였으나, 길우성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멤버들이라 괜찮다는 듯 말을 이었다. 멤버들은 이어폰을 낀 채 영상을 보거나 서로 대화 중이었다.
“혹시 돈 때문에 나타난 거면 어림없다고, 애 발목 잡으면 당신이라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대.”
“제삼자인 내가 봤을 때도 ‘돈 때문인가?’ 이 생각부터 드는데, 너희 어머니는 오죽했을까.”
하. 길우성이 재차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다. 어떤 사람인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써한 너였다면 어떡할래?”
“일단 만나서 무슨 저의인지 확인해야지. 이쪽은 상시 언론에 노출되는 직업이라, 무작정 무시할 수도 없잖아.”
말하면서 한율은 차남석 쪽을 바라보았다. 길우성도 한율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끄덕였다. 차남석은 예전, 아버지의 채권 문제로 인해 가정사까지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적이 있었다.
연예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지….”
“그렇다고 아무 대책 없이 달랑 만나진 말고.”
“엉.”
길우성이 핸드폰 달력을 살폈다.
“우리가 아스대 예선 녹화로 19일에 귀국하지?”
* * *
어스래빗이 LA행 비행기에 탑승해 하늘을 날고 있던 시각, 미국 뉴욕의 한 호텔.
‘엄마한테 드릴 선물도 챙겼고…. 뭐 더 빠진 건 없겠지?’
정민솔은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언제까지 계속 이렇게 놀 수만도 없고, 무엇보다 외로웠다.
‘2년 넘게 징그럽게 붙어 지냈던 게 뭐라고….’
호텔 객실엔 적적함을 물리치려 켜놓은 TV만 혼자 떠들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즐겁게 이야기하던 영화 속 배우의 목소리가 뚝 끊기더니, 딱딱하고 급박한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무심코 고개를 돌린 정민솔은 멍하니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곤 홀린 듯이 TV 앞으로 다가갔다.
“저게 뭐야…?”
뉴욕 도심 한복판. 건물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의 영상 일부가 시커멓고 거대한 무언가에 의해 가려졌다. 립스틱 광고 속 여성 모델이 그것을 향해 가만히 눈을 감는 모습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렌즈에 뭐가 묻은 거라고 보기엔….’
일그러진 타원 형태로 가장자리가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그것’은, 누군가 필름에다 검은색 잉크를 떨어뜨린 듯 세상이란 울타리 바깥에서 들어온 침투로 느껴졌다.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영화… 일부 장면인가? 방송 사고겠지?’
그러나 해당 건물 아래에서 놀라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오늘 낮 뉴스에서 봤던 현장 기자가 흥분한 어조로 떠드는 건 결코 영화 속 장면 같지 않았다.
긴급 속보 자막이 큼지막하게 떴다.
[뉴욕 한복판에 정체불명의 현상!]
카메라가 전광판 일부를 가린 ‘그것’을 확대했다. 새카맣게만 보이던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그때, 아주 빠르게 스치는 낯익은 형상.
“……!”
정민솔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 엄청나게 큰 눈이 보였던 것 같은데…?’
두두두. 창밖에서 희미하게 헬기 소리가 났다.
기자가 떠들었다.
[경찰은 일단 인근의 시민을 모두 대피시키기로 하고….]
* * *
[홀로그램을 이용한 테러?! 뉴욕 시민, 정체불명 현상에 밤새 공포에 떨어]
[외계인의 침공인가? 지구 멸망의 신호인가? 뉴욕 한복판 미스터리 홀]
[뉴욕 한복판에 생긴 기이한 현상, ‘접근 어려워’]
[[속보] 뉴욕을 공포로 몰아넣은 정체불명의 홀! 발생 7시간 만에 사라져]
[(사진=뉴욕 시민 제보)
현지 시각으로 9일 밤 자정 무렵, 뉴욕 도심 한복판 건물 위에 나타나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은 정체불명의 홀이 발생 약 7시간 만에 자취를 감췄다.]
-영화 프로모션인 게 뻔하지ㅋㅋㅋㅋ 이거 실제라고 믿는 개ㄸ멍청이들 있냐ㅋㅋㅋㅋㅋ
ㄴ특수 부대 군인들까지 투입됐는데?
ㄴ응 전부 배우들이야 쫄보야^^
ㄴ지금 저거 생겼던 건물 주변이랑 바로 옆 타임ㅅ퀘어 전부 셔터 내리고 접근 금지 구역 됐는데 프로모션이라고? 도랐냐? 어떤 미친 제작사가 피해보상금만 수천억 토해낼 짓을 하냐
-ㅅㅂ 대체 뭐였는데
-해 뜨니까 사라진 거 보니 빼박 홀로그램ㅋㅋㅋㅋ
ㄴ새벽이랑 아침에도 있었는데?
-너튜브 영상 보니까 허공에 생긴 그 홀 안에서 엄청나게 큰 짐승 눈깔 같은 게 스치듯 보이던데ㄷㄷㄷ
ㄴㅇㅇ그 안에서 막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았음
ㄴ보는 내내 ㅈㄴ 소름ㅜㅜ
-경찰이랑 무슨 특수 부대 군인들이 헬기 타고 접근하려고 하니까 눈에 안 보이는 막 같은 게 찌릿찌릿하면서 막았다더라
-진짜 누가 장난친 거였으면 좋겠다..ㅠㅠ
“아니, 우리가 하늘에 떠 있던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미국 현지 날짜로 8월 10일 오후 5시. 어스래빗은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들이 탄 버스 곳곳에는 자체 콘텐츠 촬영을 위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멤버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부터 들여다보았다.
“여기, 얼마 전에 우리가 갔던 거기 아냐?”
강보배가 경악한 얼굴로 차남석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기사 속 사진을 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출국하기 전에 우리가 다녀왔던 거리.”
“으, 소름 돋아….”
“…….”
유호와 박가람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한율은 말없이 기사를 훑다가 설치된 카메라를 보았다.
“…얘들아.”
유호가 눈치껏 짝짝 손뼉 치며 주의를 끌었다.
“그건 나중에 보고 일단 촬영하자. 우리는 우리 일 해야지.”
박가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래. 다양한 전문가들이 조사 중이고, 또 미국이 세계 최대 강국이잖아. 별일 있을까. 다들 핸드폰 집어넣읍시다.”
“하지만 진짜 외계인의 침공이면 어떡해?”
길우성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영화처럼 지구 아래에 잠들어있던 외계인이 깨어난 거면?!”
“그래서, 조사 결과 나올 때까지 핸드폰만 들여다보겠다고?”
“아니, 무섭잖아…. 넌 안 무섭냐, 써한?”
내가 만든 건데 무서울 리가.
한율은 시치미를 뚝 뗀 채 덤덤히 대답했다.
“불안에 떤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미주투어 취소되는 게 더 무서운데, 난.”
“…….”
길우성이 존경과 불안이 혼재한 복잡한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어스래빗의 자체 콘텐츠 영상 제작을 맡은 PD 쪽을 돌아보곤, 어깨를 들썩거리며 일하기 시작했다.
“왜 벌써 카메라가 설치된 걸까요, PD니임?”
한편 그 시각, 한국의 인천국제공항.
인기 아이돌그룹 스타믹스의 JE는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채, 작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로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로비에 설치된 대형 TV에서는 뉴욕에 생겼던 정체불명의 홀에 대한 추측성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그 앞에 모여 떠드는 사람들.
“엄마가 뉴욕 가지 말라고 난리야. …하, 모르겠어. 그런데 이제 와서 취소하면 돈 아깝잖아….”
“거기 출입 통제시키려고 미국 정부에서 수작 부린 걸 수도 있어. 미국이 가끔 별 희한한 짓을 할 때가 있잖아.”
“그렇다고 해도 장소 선정이 이상하잖아. 하필 뉴욕에서? 거기 하루만 멈춰도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이 어마어마할 텐데?”
우웅. 그들 틈에 끼어 잠시 뉴스를 보던 JE는 핸드폰을 꺼냈다. 계나리가 톡을 보냈다. 제 몸통만 한 물병을 끌어안고선 빨대를 물고 나무 수액을 마시는 구동의 사진도 함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네.]
JE는 답변을 보내곤 구동의 사진을 핸드폰에 저장했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두 쌍이 환한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환영으로 사람들을 패닉에 몰아넣는 게 썩 마음이 편하진 않지만….’
JE의 시선이 다시 뉴스를 향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뉴욕 한복판 건물 위에 생겼던 거대한 홀. 시커멓게 일렁거리는 공간 안쪽에선 금방이라도 정체불명의 괴물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JE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내년에 벌어질 진짜 상황은 저것보다 더 심각하다고 하니.’
침착하세요
LA의 한 호텔. 자체 콘텐츠 촬영을 마치자마자, 한율은 박가람과 유호에게 잡혀 그들의 객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뉴욕에 생겼던 그게 재앙의 전조일까?”
“그 나리 씨라는 사람하곤 연락됐어?”
한율은 태연히 거짓말했다.
“아니요. 내내 폰이 꺼져 있네요. 톡도 안 읽고.”
“해원이 형한테 전화해 보니까 형도 당혹스러워하던 눈치더라. 센터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도 않고, 집은 모르고, 학교는 방학 중이고.”
“너희들, 다가올 재앙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들은 적이 없는 거야?”
“네. 사람이 많이 죽고 다치게 된다는 것 외에는요.”
“미리 알아봤자 불안하고 초조해지기만 할 테니 모르는 게 나을 거라고 얼버무리더라고. 국가적인 힘을 동원해도 찾아오는 걸 막을 수도, 절대 피할 수도 없다고.”
박가람이 겁에 질린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너튜브 영상 보니까 엄청나게 큰 괴물 같은 게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오려는 것 같던데. 그리고 미국에서 막을 수 있는 정도였다면 나리 씨가 그렇게까지 말했을 리도 없을 것 같고. 우리나라에 대규모 방공시설을 두 군데나 짓는 것만 봐도….”
“어쨌든 나리 씨라는 사람하고 연락이 닿아야 뭐든 물어보고 그나마 대책을 마련하든가, 방향성을 잡을 수 있을 텐데.”
“재앙에 대비해 우리를 모았으니, 조만간 연락이 오겠죠.”
“으음….”
박가람의 앓는 소리를 끝으로 객실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런데….”
한참 동안 불안한 얼굴로 제 손을 만지작거리던 박가람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계속 이렇게 태평하게 지내도 되는 걸까? 수련에 더 집중해야 그만큼, 조금이라도 더 나중에 도움 되지 않을까? 사람들에게도 재앙이 찾아오니 대비하라고 알려야 할 것 같은데….”
“이미 뉴욕 시민들은 패닉에 빠진 것 같아. 조금 전에 기사 보니까 벌써 생필품 사재기 조짐이 보인다고 하더라. 외계인을 믿거나 이상한 종교에 빠진 집단도 뉴욕으로 모이고.”
“언젠가 나리 씨가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두 사람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무슨 말?”
“지금 이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을 하루라도 더 만끽하고 싶다는 말이요.”
한율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LA의 야경은 반짝반짝 예쁘고, 평화로웠다.
“아직 실제로 인명 피해, 물리적인 피해가 발생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벌써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당장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집에다 온갖 생필품과 구급 물품을 쌓아놔야 하는 거 아닌가, 가족들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죠. 초조해지고.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한율은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진짜 재앙이 시작되는 건 내년 여름이거든요.”
“내년?!”
“내년이라니…. 서한율 너 그거 언제 들었어? 난 처음 듣는데? 아니…!”
박가람이 충격받은 얼굴로 외쳤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주는 건데?!”
“부탁을 받았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유호가 일어나 박가람이 어깨를 감싸 두드렸다.
“가람아.”
“나리 씨가 말한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지금 이 일상을 하루라도 더 머리와 가슴에 새기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나지막한 한숨. 한율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분기점을 넘는 순간, 지금 누리는 이 평화로운 나날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
씩씩거리며 화내려던 박가람의 얼굴이 흐려졌다.
“서한율 너…….”
우웅. 한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언제 오시오?]
오늘 함께 라방을 하기로 한 길우성의 톡이었다.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과 마음이 복잡하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이만 쉬어요. 내일도 촬영 있잖아요.”
유호가 박가람의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수고해, 한율아.”
“그냥 이프림하고 대화하는 건데요, 뭘. 그럼 가볼게요.”
“…….”
한율은 말없이 고개를 돌리는 박가람을 힐끗하곤, 유호에게 가볍게 손을 들었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응. 너도.”
달칵. 객실엔 유호와 박가람만 남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박가람이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개를 꺼냈다. 그러곤 테이블에다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처음 서한율한테서 마법 얘기 듣고, 마나를 느꼈을 때만 하더라도 그저 신기해서, 솔직히 재앙 얘기를 들어도 실감이 잘 안 났어.”
하아. 의자에 앉으며 무거운 한숨.
“너무 평화로웠거든. 서한율도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나리 씨도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고, 명상 센터로 위장한 아늑한 마법 학교엔 귀여운 마물이 끼웅거리면서 굴러다니고. 그런데 1년밖에 남지 않았다니….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야.”
맞은편에 앉아 캔맥주를 집던 유호가 고개를 들었다.
“마물?”
“구동이. 지은이 형이 차로 칠 뻔했던 녀석.”
“그거 토끼 아니었어?”
“아직 다 들은 건 아니구나.”
딸칵. 박가람이 캔맥주를 땄다.
“구동이, 마물이래. 지은이 형한테서 마법의 기운을 느끼고 뛰쳐나왔다가 차에 치일 뻔했던 거라더라.”
“원래 지구 생명체야?”
“모르겠어. 그냥 교장이 마물이라고만 말했대. 나리 씨도 처음 본 눈치였고.”
“…….”
“사실은 뉴욕 미스터리 홀 영상 보자마자… 저 안에서 꿈틀거리는 거 혹시 마물 아닐까? 구동이도 저런 홀에서 나온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살짝 들더라. 게임이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설정의 단서잖아. 아주 먼 외계 행성과 차원 통로가 연결돼서 어쩌고저쩌고.”
“그렇다면 나리 씨보다는 그 교장을 먼저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인지 들어본 적 있어?”
“아니. 아주 바쁘다는 것 외엔.”
유호가 턱과 입술을 매만지며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
“수상한데.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며. 한율이가 팀 반지 세척한다고 가져갔다가 하루 만에 마법을 새기고 돌려준 걸 보면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은데.”
“수상해도….”
박가람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면 방공시설도 짓고, 우리한테 이런 반지도 주고 마법도 가르쳐주려 하겠어?”
그러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맥주와 함께 삼켰다.
‘사실은 서한율이 교장인 것 같지만.’
계나리는 미래에서 교장에게 마법을 배웠다고 했다. 서한율은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마나를 느끼고 다뤘다고 했고. 그러니 서한율이 계나리에게 마법을 가르쳐준 스승이자 교장일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서한율이라면 마법 학교를 준비할 만큼 돈도 많고, 무엇보다 센터와 지금 숙소와의 거리가 의도한 것처럼 아주 가까워. …등 뒤에 보였던 커다란 파충류 눈알도 마음에 걸리고.’
선녀보살의 이야기도.
『아까 걔랑 떨어지지 마. 걔가 너희 생명줄이야.』
만약 서한율이 교장이라면, 정체를 숨기는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을까.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지금 이 일상을 하루라도 더.”
“응?”
유호가 의아한 눈으로 박가람을 바라보았다. 박가람은 미간을 찡그린 채 웃었다.
“조금 전에 서한율이 했던 말. 그냥… 생각나서.”
“그래….”
고개를 끄덕인 유호는 생각에 잠긴 채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시무룩해진 박가람에게 말했다.
“난 아직 마법이니 뭐니 잘 와닿지 않아서 얼떨떨해. 하지만 한편으론… 한율이가 구체적인 시기를 언급하지 않은 심정도 이해가 가. 지금도 이렇게 초조한데, 더 일찍 알았다면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었을까?”
“…….”
“물론 한율이의 판단이 무조건 옳다는 건 아니야. 어쩌면 우리가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시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방해받은 거니까. 그래도… 오늘이라도 말해줬잖아. 아직 1년 남짓 남았어.”
“나도 서한율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가족이랑 팬들을 생각하니까 조금 초조해져서.”
하. 박가람은 속상한 얼굴로 맥주를 들이켰다. 유호도 캔을 입가에 댔다가, 멈칫하곤 도로 내려놓았다.
“가람아. 너 혹시… 한율이가 숙소 이사 얘기 처음 꺼냈을 때 기억나?”
“음방 대기실에서?”
“아니. 우승 축하 회식 자리에서, 남석이가 언젠가는 독립하지 않겠냐고 했을 때. 그때 한율이가 이렇게 말했었잖아. 집을 알아볼 거면 튼튼한 고급빌라나 단독주택이 좋을 것 같다. 고층 아파트는… 재난 상황이 벌어지거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난감해지지 않겠냐고.”
“…아.”
“그러고 나서 구한 게 지금 숙소잖아. 여덟 명의 멤버가 다 같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튼튼한 단독주택. 한율이도 나름… 멤버들의 안전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게 아닐까?”
박가람은 멍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가, 힘없이 다물었다.
“응….”
유독 길게 느껴진 밤이 지나고 다음 날.
마법 학교 단톡방에 계나리의 톡이 올라왔다.
-[침착하세요!]
-[(사진)]
유명한 공룡 소재 영화에서 주인공이 흥분한 공룡을 차분하게 저지하는 짤, 그리고 미스터리 홀이 생겼던 뉴욕 건물 앞에서 찍은 셀카도 함께.
-[(사진)]
-[미국으로 날아오느라 그동안 연락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초조해하지 마시고 본업과 수련에 집중해주세요! :D]
-[(이모티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