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8화 (228/427)

* *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형.”

오늘도 콘텐츠 촬영이 있어, 한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나서 헤어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준비 중인 객실을 찾았다. 그리고 먼저 와서 메이크업을 받는 박가람에게 인사했다.

박가람이 거울로 한율을 보며 화답했다.

“…엉. 아침은?”

초조함과 섭섭함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어도,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한율은 옆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한율의 앞 머리카락을 넘겨서 핀으로 꽂았다.

“받고 나서 먹으려고요. 형은요?”

“나도 아직. 혼자 먹는 건 쓸쓸하니까 너 끝날 때까지 기다려줄게.”

“네.”

“그… 톡 봤어?”

“네. 확인차 왔나 봐요.”

“엉….”

대화는 메이크업용 붓이 얼굴을 스치며 자연스럽게 끊겼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마음 편히 할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잠시 후, LA 서북쪽에 있는 할리우드 거리.

어스래빗 멤버 여덟 명이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섰다.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눈들이 여기저기 정신없이 움직였다.

불과 이틀 전 뉴욕에서 발생한 미스터리 홀이 많은 사람을 패닉으로 몰아넣었지만, 이곳은 TV로 봤을 때처럼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어스래빗 멤버들도 들뜬 얼굴로 떠들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그 할리우드…!”

“사람 진짜 많다.”

“여러분 혹시.”

PD가 소리 높여 물었다.

“지난주 <뉴욕 K-POP 콘서트> 때 대기실에서 작성한 설문지 기억나세요?”

“네에!”

라이언이 손을 들었다.

“제일 철없는 멤버로 가람 적었어요!”

“라욘 너 이 자식…?!”

걱정은 잠시 미뤄두고 촬영에 집중하기로 한 걸까. 박가람이 평소처럼 장난기와 활기가 가득한 얼굴로 라이언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차남석도 담담하게 손을 들어 말했다.

“저도 가람이 형 썼어요. 제일 철없는 멤버.”

“그거 익명 아니었어요? 말해도 돼?”

“그때 했던 설문 결과를 차근차근 알려드릴 건데요. 먼저, 무인도에 절대 같이 갇히고 싶지 않은 멤버 순위부터 발표할게요.”

“미션 팀 정하려나 보다.”

“눈치 빠른 이거누거누.”

PD가 웃으며 큐카드를 내밀었다.

“눈치 빠른 건우 씨가 발표해주시겠어요?”

“넵! …큽.”

이건우가 큐카드를 받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강보배와 길우성, 유호가 불안한 얼굴로 수군거렸다.

“뭐야, 불안해….”

“설마 내가 1위인가?”

“아니, 내가 1위일 것 같아. 내가 생존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라.”

“하긴. 형은 키만 컸지.”

“발표해주시죠, 이건우 씨.”

“무인도에 절대 같이 갇히고 싶지 않은 멤버 순위. 3위부터 발표할게요.”

3위는 유호, 2위는 라이언.

1위는 한율이었다.

“이유는, 무인도에 갇혀도 잔소리할 것 같아서. 칼질 말곤 손재주 없음. 쓸데없이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가만히 해안가에 앉아서 구조 기다리자고 할 것 같음.”

한율은 헛웃음을 지었다.

후회하게 될 것 같아

마법 학교 단톡방. 계나리가 장문의 글을 올렸다.

재앙의 구체적인 정보와 시기, 그리고 미스터리 홀이 발생했던 곳을 둘러본 개인적인 생각 등.

-[뉴욕에서 전조 현상이 일어날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겪었을 땐 아무런 힘도 없던 때였고 저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 여겼던 터라, 이번엔 직접 와서 확인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조 현상은 앞으로 세계 여기저기에서 나타날 거예요.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거란 걸 느끼고 대비할 것이고, 물가는 폭등할 겁니다.]

-[너무 늦게 알려주는 것 아니냐 저를 원망하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냉정히 말씀드리면, 저희에겐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어요. 생판 남을 구하려고 신경 쓰다, 정작 본인의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있는 재앙입니다.]

-[그리고 재앙과 함께 작은 희망 또한 찾아옵니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이비 교주가 된 기분인데^^;;;]

-[어쨌든 학교는 유통기한이 넉넉한 비상식량과 약품, 각종 물품을 상당수 확보해 비밀 창고에 쌓아두었으며 여러분의 소중한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어 시설 또한 마련 중입니다. 부디 이 사실이 자그마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각자의 선택이며 저희는 그 뜻을 존중합니다. :)]

계나리의 톡이 온 건 콘텐츠 촬영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쉴 때였다. 박가람은 같은 객실을 사용하는 유호에게 톡을 보여주었고, 유호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뉴욕에 나타났던 그게 다른 나라에서도? 그리고 그 안에서 온갖 괴물이 쏟아져 나올 거라니….”

“어젯밤에 형이 그랬잖아. 벌써 뉴욕에서 사재기가 일어나고 있다고. 그럼 나리 씨가 적은 것처럼….”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찾아온 한율도 한마디 말했다.

“우리가 굳이 나서서 경고하지 않아도, 사람들 스스로 대비하겠네요. 그 과정에서 혼란도 빚어질 테고.”

“음….”

한율은 생각에 잠긴 두 사람에게 조용히 물었다.

“지금이라도 투어 그만두고 돌아가실래요?”

“…어?”

“형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저 역시 존중할게요. 재앙이 찾아오는 시기를 알면서도 미리 말하지 않은 것도 죄송하고.”

“…….”

“…한율이 넌 어떻게 할 생각인데?”

유호가 물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대로 계속 지낼 거야?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는 듯… 평범하게?”

“네.”

한율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인간은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원동력 삼아 시련과 절망을 견디고 극복한다잖아요.”

“…….”

“그럼 두 분, 내일 아침에 봐요.”

한율이 객실을 나갔다.

박가람은 닫힌 문을 보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저 녀석도 혹시 인생 2회차인 거 아냐?”

“…….”

* * *

현지 날짜로 8월 15일. 어스래빗은 버스를 타고 FJ그룹 주관 리허설을 위해 공연장으로 향했다.

“빰빠밤빠밤 빰~.”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낀 채 노래를 흥얼거리던 길우성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한율을 보았다. 글로벌 팬덤 플랫폼인 스타아이에 접속, 이프림의 메시지에 심심한 답글을 달던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길우성의 시선이 통로 건너편에 앉은 박가람을 향했다가, 다시 한율에게로 돌아왔다.

“수상하다.”

“뭐가.”

“요 며칠 이상~하게 분위기가 차분하단 말이지.”

뒷자리에서 차남석이 말했다.

“서한율은 원래 차분하잖아.”

“써한 말고, 어스래빗에서 제일 철없는 멤버로 꼽히신 분.”

멍하니 차창 밖을 보던 박가람이 고개를 돌렸다.

“…나? 나 왜?”

“형님 어디 아파? 요새 잘 떠들지도 않고, 놀지도 않고 그러는 것 같아서.”

“아아, 어쩐지. 요즘 휴식 시간이 돼도 조용하단 느낌이 들었는데, 박다람이가 얌전해서 그런 거였구나? 우성이 말처럼 어디 안 좋냐?”

“몸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부담 갖지 말고 솔직히 말해, 가람아.”

이건우에 이어서 매니저 조유찬까지 그를 주목하자, 박가람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나 멀쩡해. 나는 뭐, 차분하게 사색에 잠기면 안 되나?”

“응.”

“…방금 ‘응’이라고 대답한 사람 누구야.”

“라이언.”

“가람이 우리 팀의 활력소잖아. 활력소는 죽으면 안 돼.”

박가람이 감동한 얼굴로 라이언을 돌아보았다.

“나 라이언한테 인정받았어…!”

“히.”

앞자리에 앉은 유호는 살며시 미소 띤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난 며칠 동안 두 사람은 다른 멤버들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고민으로 끙끙 앓았다. 한율을 따로 찾아와 불안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둘은 같은 결심을 내렸다.

적어도 이번 월드투어는 끝까지 무사히 마치고 싶다.

『지금 이 평화로운 나날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 말은, 이번 월드투어가 해외 이프림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단 소리겠지. 그러니 지금 불안하다고 그만두면… 나중에 100% 후회하게 될 것 같아.』

『생각해보니까, 지금 당장 돌아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물품 비축밖에 없겠더라. 아직 마나 유동밖에 안 배운 내가 뭘 하겠냐?』

빠르면 보름, 늦어도 한 달 후면 다른 나라에서도 게이트의 환영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 지금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 월드투어, 후회 남지 않도록 끝까지 잘해봐요.』

“와, 우리 포토 현수막 잘 나왔다.”

버스는 어느새 목적지인 공연장에 다다랐다. 길우성이 건물에 걸린 어스래빗 대형 포토 현수막을 보며 감탄했다.

길우성과 박가람의 말이 겹쳤다.

“특히 나.”

“왜 막내가 안 보이냐.”

“…싸우자, 박가람!”

“너 저거 찍을 때 어디 갔냐! 왜 딴 놈이 있는 거냐!”

두 사람이 한율과 통로를 사이에 두고 두 손을 휘적거리며 싸우기 시작했다.

“백 텀블링하면서 봐도 나잖아! 덤벼! 형이라고 안 봐준다!”

“언제는 봐줬냐?!”

“…….”

그들의 투덕거림에 몸을 좌석에 바짝 붙인 한율은 미간을 구겼다가, 카메라 앱을 실행했다.

찰칵, 찰칵.

찍은 사진을 둘에게 보여주며 경고.

“계속하면 이 사진들, SNS에 올립니다.”

“…….”

“…….”

둘은 언제 싸웠냐는 듯 바로 얌전해졌다.

잠시 후, 공연장.

어스래빗은 다른 팀과 인사를 나눈 뒤 준비된 간이 의자에 앉았다. 아직 그들의 리허설 예정 시간까지 30분. 멤버들은 다른 팀의 리허설을 구경하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한율은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았다.

[뉴욕, 미스터리 홀 거리에 몰린 인파]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미국은 미스터리 홀이 나타났던 곳에 여러 전문가를 파견해 조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아무런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동안 손실되는 경제적인 가치를 고려한 건지, 하루 만에 해당 거리의 통제를 풀었다.

미스터리 홀이 나타난 건물은 사흘이 지나서야 사람들의 출입을 허용했으며, 홀과 일부 겹쳤던 대형 전광판은 깨끗하게 떼어갔다.

‘마력의 잔재를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고서야, 아무것도 얻지 못할 텐데.’

스윽. 그때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옆에 앉았다.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 한율은 반가운 얼굴로 웃었다.

“왔어요, 선배님?”

“응. 오래간만이다, 한율아.”

올해 데뷔 9년 차인 보이그룹 블랙블러드의 멤버, 민준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둘은 짧게 악수했다.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만나는 건 더 오래간만인 듯?”

“그러네요. 선배님,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은데요?”

민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관리 좀 했지. 언제까지고 계속 퍼져서 놀 순 없겠더라. 몸이 막, 근질근질하기도 하고.”

“컴백 준비 중이신 건 아니고요?”

“어허.”

민준이 살짝 엄한 표정을 지었다. 한율은 웃으며 다른 걸 물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온 거예요?”

“심심하기도 하고, PD님이랑 스태프분들이랑 미리 인사도 나눌 겸, 겸사겸사.”

“안녕하세요, 선배님.”

민준이 살금살금 한율에게 다가오는 걸 조용히 지켜보던 어스래빗 멤버들이 뒤늦게 인사를 건넸다. 민준도 화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내일 MC를 맡게 된 블랙블러드의 민준입니다.”

“내일 소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넵.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장난스럽게 인사를 나눈 뒤엔 편히 안부를 물으며 잡담을 나눴다.

“아.”

민준이 문득 생각났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 사람 자수했다며?”

“누구요?”

“아니, 자수라는 말은 틀렸구나. 경찰한테 한 게 아니니.”

“……?”

마침 무대 위 리허설이 끝나 음악이 멈추고 조용해졌다. 민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너랑 후배 스캔들 냈던 사이버 렉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는지, 지금까지 본인이 만든 허위사실 영상 아이돌 소속사에 본인 인적 사항을 메일로 보냈다던데? 고소해달라는 듯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이런 메시지까지 적어서.”

“정말요? 고소하고 싶어도 너튜브가 협조를 안 해줘서 애먹고 있었는데. 잘됐네요.”

공연 스태프가 어스래빗 쪽에다 크게 외쳤다.

“어스래빗, 리허설 스탠바이할게요!”

“그럼 수고하고, 내일 보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율은 민준과 짧게 인사를 나누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준은 리허설 조끼와 인이어, 마이크 팩 등을 착용하는 어스래빗 멤버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공연장 내부를 크게 둘러보고 나서 일어났다.

‘이렇게 큰 공연장에서 완전체 무대를 마지막으로 했던 게 언제였더라.’

작은 공연장에서라도 완전체 무대를 할 수 있는 날은 또 언제가 될는지.

팬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멤버들끼리 상의해서 입대 시기를 나눴지만, 이런 점은 참 아쉬웠다. 완전체 컴백이 너무 늦어진다는 것.

‘수재 형한테 전화나 해야겠다.’

민준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무대를 뒤로 한 채 관계자 전용 통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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