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 (230/427)

* * *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후우. 무거운 한숨 소리가 울렸다.

미간을 깊게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던 좌기훈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날 밝는 대로 로펌에 연락하겠습니다. 아직 스토킹 범죄에 대한 처벌이 약하지만, 그래도 민·형사 가리지 말고 되는 데까지 싸워봅시다. 진영 씨는 좀 어때요?”

넘어진 사생은 허진영을 폭행죄로 고소하겠다며 적반하장으로 굴었다. 다른 사생들은 사진과 영상을 찍으며 비웃었다. 평소 자신들을 방해한 매니저에게 통쾌한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적 충격을 조금 받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당분간 쉬라고 했습니다.”

“애들 공연에 반해서 B팀에 지원했다고 들었는데… 안타깝네요. 오 팀장님이 잘 살펴주세요. 심리상담소에도 데려가 보시고.”

“네.”

“애들은요?”

“일단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표정으로 드러날 테니까요.”

좌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2020 추석특집 아이돌 스포츠 대회> 녹화가 진행되는 실내종합운동장. 차남석과 강보배는 볼링장, 이건우와 박가람, 유호는 e스포츠 경기장으로 떠나 어스래빗 자리는 한산했다.

“써한, 아까 차 타고 올 때 건우 형 좀 이상하지 않았냐? 기분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설마 어제 병원에서 이상한 이야기라도 들은 건 아니겠지?”

“나중에 직접 물어봐.”

“그래야겠당.”

길우성이 쭈욱 기지개를 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슬슬 몸을 풀었다. 곧 그가 본선에 오른 70m 남자 육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이번엔 승준이 형이 없으니! 무조건 메달 딴다!”

원제로 해체 이후 임승준은 WB래빗 새 보이그룹 데뷔조에 들어가 재데뷔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이번 아스대엔 불참했다. 변지욱과 현강희도 마찬가지.

“자빠져서 다치지나 마.”

“알았다!”

힘차게 외친 길우성은 이프림을 향해서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우워어어!”

이프림도 화답했다.

우워어어! 우성아, 다치지 마!

“네에에!”

길우성은 지난 앨범 타이틀곡 의 포인트 안무를 코믹 버전으로 덩실덩실 추다가, 스태프의 부름을 받고선 폴짝폴짝 이동했다.

“…….”

한율은 다른 아이돌과 줄 맞춰 서는 길우성을 보며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밤바람을 쐬고자 옥상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대문 쪽이 소란스러워서 내려다보니, 이건우가 탄 것으로 추정되는 밴의 운전석이 열려있고 그 앞엔 웬 여성이 쓰러진 채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여기에 경찰들까지.

어쩌다 그런 상황이 펼쳐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필시 사생이 사생다운 짓을 했을 터다.

언젠가 스카이러너 하신이 한 푸념이 떠올랐다.

『내년에 스토킹 범죄 처벌을 강화한다고 하는데 우리한텐 당장, 매일 벌어지는 범죄잖아. 그런데 사람들은 인기가 많으면 당연한 거다, 돈 많이 버니까 감수하라고만 하고, 안티들은 사생 범죄자랑 진상 팬 보고 무섭고, 당황해서 굳은 우리한테 빠혐한다고, 인성 드러난다고 함부로 떠들고…. 진짜 감수해야 하는 게 맞냐, 이거?』

예전, 비뚤어진 집착과 광기로 엉뚱하게 이희우를 해코지하려 했던 사생 스토커가 떠오른다. 얼굴 한번 보려고, 대화 한번 나눠보려고 일부러 접촉 사고를 냈던 이들도.

‘조치를 취하긴 취해야 하는데.’

앞으로 모의 훈련을 포함해 마력을 사용해야 할 일이 많아서, 솔직히 조금 고민이 되었다.

‘일단 이건우한테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사람 무섭게.”

스타믹스의 JE가 한율과 라이언 사이에 앉았다. 그가 가지고 온 호두과자 상자를 라이언에게 넘겼다.

“자. 올라가서 팬이랑 같이 나눠 먹어.”

“감사합니다아.”

잠깐 자리 좀 비켜달라는 뜻을 알아챘는지, 라이언은 순순히 호두과자를 들고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너희 LA 콘서트 후기 보니까 호평 일색이던데. 미국 공연 끝나면 미국 토크쇼에도 초대되는 거 아냐?”

“그러면 좋겠지만, 일정상 힘들 것 같네요. 미국 마지막 도시인 뉴욕 콘서트 다음 날 바로 캐나다로 가야 하거든요.”

JE가 주위를 둘러보며 가까이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 본론으로 들어갔다.

“애들한텐 모의 훈련 끝나면 사실대로 말할 거지? 네가 교장이고, 나리 씨처럼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거.”

“네. 다른 세 사람과 대화할 때마다 마음 불편하죠?”

“당연하지. 표정으로 드러날까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그럼 지난주에 광고 촬영 있다고 센터로 오지 않은 것도.”

“그건 진짜였어. …아이템은?”

한율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 가져왔어요. 이제 태국에서 벌어질 것도 있고, 당분간은 멈추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럼 난 수련에만 집중하면 돼?”

“네.”

JE는 조금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사실은 중국이랑 태국 다녀왔을 때, 매니저 형이 집요하게 묻더라고. 혹시 썸녀랑 해외에서 만나기로 한 거냐고. 팬들도 쟤 왜 뜬금없이 혼자 해외여행 가냐, 내가 본 게 JE 같던데, 맞지? 누구 만나러 가는 거 아니냐, 이러면서 수군거리고.”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힘들겠네요.”

“너만 하겠냐. 그나저나 곧 생일이지? 선물 뭐 필요한 거 있냐?”

필요한 거라.

한율은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안마 의자?”

“그런 건 네 돈으로 사라. 돈도 많으면서.”

“농담이에요.”

장내에 아스대 MC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곧 남자 70m 육상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수들은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JE가 일어났다.

“그럼 난 우리 팀 응원이나 해야겠다. 나중에 톡으로 말해.”

“네.”

“호두과자 잘 먹었어요, 선배님!”

라이언이 내려오며 그에게 인사했다. JE는 대충 손을 흔들곤 스타믹스 자리로 향했다.

풀썩. 라이언이 한율 옆에 앉으며 남은 호두과자를 내밀었다.

“이프림이랑 내가 하뉼 주려고 남긴 거야. 맛있어.”

“감사합니다.”

길우성은 남자 70m 육상 3위를 하고, 동메달을 목에 건 채 돌아왔다.

“이예에에!”

아스대 녹화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건 새벽 2시경.

한율은 이건우를 찾아가 사생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옥상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소란이 벌어진 걸 보았다고 하니, 그는 처음부터 소상히 말해주었다.

“진영이 형은 괜찮다고 하는데, 그게 진짜 괜찮아서 하는 말이겠냐.”

하. 이건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 사생들을 다 잡아다 혼낼 수도 없고. 아니, 훈계해도 좋다고 실실 웃으며 영상으로 찍는 애들을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중엔 우리를 좋아…한다는 표현은 쓰기가 싫지만 어쨌든, 좋아해서가 아니라 썰이든 영상이든 팔려고 따라다니는 애들도 있을 테니까.”

재차 한숨을 쉰 이건우가 괴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러다 선량한 팬들까지 의심하게 되고, 또 그게 겉으로 드러나게 될까 봐… 그게 더 무서워.”

한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물한 번째 생일

8월 28일. 공항에는 지난번처럼 기자나 극성팬, 사생들이 바글거리지 않았다. 어스래빗의 목적지인 미국 댈러스 직항은 오후 5시께에 있었으나, 회사가 일부러 직항이 아닌 경유 노선, 그것도 훨씬 빠른 시간대의 비행기로 급히 바꾼 까닭이었다.

그 결과 어스래빗은 새벽 6시에 인천국제공항을 찾아,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소수의 연예 기자들 앞에서만 여유롭게 인사했다. 환한 웃음으로 씩씩하게.

“어스!”

“래빗!”

“잘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후, 출국장 안.

길우성이 코를 훌쩍거리며 유호의 옷을 잡았다.

“형님…. 춥고 배고프고 졸려요….”

유호는 길우성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어제 새벽 4시에 일어나 오늘 새벽 2시에 귀가해서 고작 한두 시간만 자고 나왔으니. 힘든 게 당연했다.

“잠은 라운지랑 비행기에서 자자.”

어스래빗은 20시간 넘는 여정을 거쳐 미국 댈러스에 도착했다. 이건우는 호텔로 가는 버스 안에서 허진영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멤버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진영이 형이 나중에 온다고 그런 거구나. 어쩐지….”

“걔네 진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나?”

“그런 사람들은 본인이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모를걸요.”

한율은 말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당해봐야 알겠지.’

굳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세상엔,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참 많았다.

“당해도, 우리가 당하는 건 당연한 거고 본인이 당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여기겠지. 어쨌든 나중에 진영이 형 오면 힘내라는 의미로 거하게 환영해주자.”

“진영이 형이 뭐 좋아하지?”

“후드티?”

“그럼 진영이 형한테 줄 옷이랑 형이 효도할 수 있도록 형네 부모님 선물도 준비하자.”

“그것참 좋은 생각이오. 선물로 혼내줄 테다.”

한편 그 시각, 서울의 한 신발매장.

“안녕하세요. 이제 출근하세요?”

“네? 네….”

이곳 사장의 조카이자 알바생인 김다우는, 매장 앞에 선글라스를 쓰고 서 있는 여성의 인사에 어설픈 미소로 대답했다. 여성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제가 회사에 신고 갈 구두를 사야 하는데, 예전에 이곳 사장님이 굉장히 친절하게 응대해주신 게 기억에 남아서요. 그런데 미처 오픈 시간을 확인하지 못하고 일찍 와서 어쩌나 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네요.”

“아, 그러시구나….”

오픈 전부터 찾아온 손님이라니. 참 부담스럽지만, 김다우는 티 내지 않으며 열쇠로 가게 문을 활짝 열었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어스래빗 콘서트, 그리고 며칠 전 LA에서 열린 콘서트에 다녀오면서 쓴 돈이 적잖았다. 어스래빗을 따라 왕복 비행기 좌석을 모두 비즈니스석으로 끊느라 더더욱. 여기에 한 홈마가 만든 비공굿 세트가 말도 안 되게 환상적이라 또 그걸 3세트씩 사느라, 이번 달 생활비 역시 위험했다.

이건우의 세컨 핸드폰 번호도 알아내려면 의뢰비도 많이 들 텐데.

‘삼촌한테 또 선급이랑 용돈 받으려면 한 켤레라도 더 팔아치워야지.’

그런 간절한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이것저것 귀찮을 정도로 묻고, 신발도 여러 켤레 신어보고 오랫동안 고민하던 여성이 이렇게 물었다.

“혹시 제가 신발을 사면 선생님께도 인센티브가 떨어지나요?”

“어…. 조금… 은?”

사실 이 매장에 인센티브 제도는 없지만, 비슷한 게 떨어지기는 하니.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 미안함에 한 켤레라도 사지 않을까?

김다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끝맺었다.

“떨어집니다. 네.”

여성이 환한 얼굴로 웃었다.

“그럼 저거, 이거, 그리고 또 이거, 처음에 신었던 저 구두랑 여기 이 운동화까지. 다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김다우는 손님의 마음이 변할까, 얼른 신발을 품 안 가득 안고 계산대로 향했다.

“멤버십 카드 있으세요?”

“아니요. 이참에 하나 만들어야겠네요.”

“네. 여기 신청서 작성해주세요.”

“오픈 전부터 와서 솔직히 귀찮았을 텐데, 참 친절하시네요.”

“손님이신데, 당연히 친절해야죠.”

김다우는 신청서와 펜을 건네곤 신이 난 얼굴로 신발을 포장했다. 여성은 그런 김다우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어스래빗 서한율, 스물한 번째 생일 기념 3억 기부]

[오늘 30일,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스물한 번째 생일을 맞이한 기념으로 ○○어린이재단과 ○○대학병원 어린이병원에 각각 1억 원, 유기 동물보호소 두 곳에 각각 5천만 원씩 총 3억 원을 기부했다.

어스래빗의 국내외 팬덤은…(중략).

(사진=WB래빗 엔터테인먼트)

(사진=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 걸린 서한율의 생일 축하 광고)

지난 5월 어린이날에도 ○○어린이재단과 미혼모 보호시설에 각각 1억씩, 총 2억 원을 기부한 서한율은 현재 어스래빗 월드투어 ‘The CARNIVAL’로 전 세계 팬들과 만나는 중이다.]

-외쳐 갓한율

-3억ㄷㄷㄷ

-아무리 부동산 재산이 6백억이라고 해도 그 건물을 판 것도 아닌데.. 이렇게 현금이 많음?

ㄴ드라마 출연료랑 광고 수익금만 수십억 될걸요

-형 나 5천 원만....

-아무리 생각해도 딴따라들 하는 일에 비해 너무 벌어

ㄴ그 생각엔 나도 동의하지만 기부했다는 좋은 기사에다 굳이?

ㄴ개발연기해놓고 회당 몇천만 원씩 벌어가는 것들도 있지만 서한율은 태생이 원래 금수저임ㅋ

ㄴ꼬우면 님도 하세요. 누가 보면 본인 돈 뜯어 가는 줄?

ㄴ딴따라들은 외화도 벌고 한국 알리는 데에 조금 기여라도 하지ㅋ 넌 뭐하냐?

ㄴ한국을 알려? 망신이나 안 시키면 다행^^ 아 서한율 제외

ㄴ급태세전환ㅋㅋㅋ

-어릴 땐 예쁘면서도 잘생긴 얼굴이었는데 점점 곱상한 귀공자 스타일로 변하는 중

-실력도 마음도 예쁜 연예인^^

-이대로 계속 꽃길만 걷자 서한율♡♡♡

-기자님 사진 잘 뽑으셨네요. 눈과 마음 모두 힐링하고 갑니다ㅎㅎ

-IOMU 서우 남친

ㄴ아닙니다...

ㄴ그거 처음 퍼뜨린 너튜버 사과 영상 올렸고, 현재 떠비랑 아림한테 허위사실유포 혐의로 고소당한 상태입니다.

ㄴ진짜 사겼으면 좋겠다. 둘이 비주얼적으로 너무 잘 어울림

ㄴ망상은 머릿속으로만 하세요.

-팬들도 기부하고 당사자도 기부하고. 참 마음이 뜨듯해지네요ㅎㅎ

-고마워 한율아, 생일 축하해♡♡♡♡♡

하루가 지나 미국 날짜로 30일. ‘EarthRabbit 2020 WORLD TOUR [The CARNIVAL] in DALLAS’가 열리는 공연장에선 소소한 이벤트가 벌어졌다.

무대 하나를 끝내고 멘트 타임. 한율이 마이크를 들어서 이야기하려던 순간, 돌연 무대 위 조명이 꺼졌다.

[Happy birthday~.]

박가람이 낮은 목소리로 생일 축하 노래를 선창, 객석을 가득 채운 팬들의 응원봉이 커다란 하트 모양으로 빛났다. 대형 전광판엔 당황하고 놀란 표정을 짓는 한율이 크게 잡혔으며, 고깔모자를 쓴 매니저들이 무대 위로 대형 케이크를 가져왔다.

[to you~.]

멤버들의 아카펠라에 맞춰, 이번엔 수천 명의 팬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Happy birthday to you~.]

반주 하나 없는 생일 축하 노래가 공연장 가득 울린다.

“…….”

한율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감격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어, 팬들의 생일 축하 노래에 천천히 박자를 타며 감상했다.

곧 노래가 끝나고, 한율은 케이크 상단에 놓인 촛불을 끄는 시늉을 했다. 툭. 21 숫자가 환하게 빛나던 LED 글라스 캔들이 타이밍에 맞춰 꺼졌다.

[…라이브 방송을 켜놓고 멤버들끼리 생일 파티를 할 때도 팬분들이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잔뜩 보내주셨었지만, 어…. 바로 이렇게 직접 축하 노래를 선물로 받으니까… 정말 기쁘고, 정말, 감사합니다.]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생일을 맞이해, 현지인 뺨치는 텍사스 사투리로 감사 인사를 전하는 한국 아이돌. 객석을 가득 채운 팬들은 즐거운 얼굴로 저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어떡하지. 나도 벌써 떨리기 시작했어.”

콘서트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버스 안에는 월드투어 비하인드 기록을 위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강보배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미리 영어 소감 생각해두고 외워야겠다. 도와줄 거지, 라이언?”

“응.”

강보배의 생일은 시카고 콘서트가 열리는 9월 3일이었다.

한율은 생일 선물로 받은 롱혼 인형을 품에 안은 채, 뒤늦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낸 사람들에게 일일이 답장했다.

“한율아, 이따가 라방할 거야?”

“네. 어제 못했으니까 자기 전에 잠깐 하려고요.”

“같이 하자.”

“괜찮아요. 이제 자정도 지나니까, 혼자 하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요. 형, 내일 우리 몇 시 비행기에요?”

앞에서 조유찬이 돌아보며 대답했다.

“12시 45분. 다들 적어도 9시엔 일어나야 해.”

“네에.”

“그런데 있잖아.”

길우성이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객실을 혼자 쓰니까 뭔가 막 허전하지 않아?”

“전혀.”

“너만 그래요.”

“왜? 무서워?”

이건우가 금방이라도 놀릴 것처럼 장난스럽게 물었다.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그렇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고. 오늘은 피곤해서 눕자마자 바로 뻗을 것 같기는 한데….”

“그렇게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는 거란다, 막내야.”

“쟤도 벌써 스물하나야, 가람. 어린애 아냐.”

“그래봤자 미국에선 술 마셔선 안 되는 만 19세!”

“그래, 나보다 두 살이나 많아서 좋겠수.”

“엣헴!”

“다들 조용. 큰형님 주무시는 데에 방해된다.”

두 사람이 유호를 향해 상체와 고개를 숙였다.

“네, 형님.”

잠시 후. 한율은 호텔 객실로 들어오자마자 말끔하게 씻은 뒤, 어제와 오늘 받은 생일 선물들을 테이블 옆에다 두었다. 익숙하게 노트북과 카메라 세팅을 마치고 나서, 그린라이브에 접속.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최종 리허설을 하고, 팬미팅을 하고 다시 3시간 넘게 공연하느라 굉장히 피곤했지만, 생일은 절대 그냥 넘겨선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돌이므로.

내년 생일엔 이렇게 속 편히 라방을 할 수 없을 테고.

한율은 카메라를 응시하다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이프림~.”

-한율아, 하루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사랑해

-♡♡♡♡♡♡♡♡♡♡♡♡♡

-제목이 서한율 세 글자에서 뭔가 많이 늘었다!

-[오늘 댈러스 콘서트 수고했어]

-외쳐 갓한율

-제목 ‘생일 주인공이었던 서한율’ㅋㅋㅋㅋㅋㅋ

-[매력적인 텍사스 사투리 소유자]

-생일 축하해 한율아!!! 네가 우리에게 선물 그 자체야!

-어머니께 감사 인사를 대신 전해주길 바란당

-[귀여워 잘생겼어 짜릿해]

동시 접속자 수는 단숨에 만 단위로 뛰어 곧 10만을 돌파했다. 이제 몇 분 더 지나면 20만을 넘을 것이다.

아이돌 서한율만이 아니라, 배우 서한율의 팬으로서 어스래빗 계정을 팔로우한 팬이 많은 까닭이었다. 작년에 드라마 <별☆일없는 집>이 해외에서 방영됐을 때도 늘었지만, 최근 <서울 구미호>가 OTT 서비스로 동시 방영되자 유입이 부쩍 더 늘었다.

“여기서도 자정이 지나서 생일이 완전히 지나갔지만, 그래도 꼭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켰어요. 제 생일을 축하해주신 이프림, 모두 고마워요.”

영어와 일본어, 독일어로도 이야기했다. 덕분에 채팅창엔 온갖 외국어가 잔뜩 섞여 올라왔다.

-우리 서한율이 언어 천재다잉 몇 개 국어를 하는 거야

-[멤버들에게도 선물 받았어?]

“멤버들에게 생일 선물… 받았죠. 자랑하려고 미리 옆에다 준비해뒀어요. 우선 우리 맏형, 호 형이 준 선물은… 짠. 가방입니다.”

브랜드 로고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가린 채 가방을 보여주었다.

“제가 코디를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항상 사복 입을 때 주로 손에 익은 거, 얼추 거슬리지 않는다 싶은 가방만 가지고 다니거든요. 그런데 형이 이참에 다양하게, 옷에 맞춰서 가지고 다니라는 의미로 주셨습니다. 참 마음에 들어요. 한동안 이것만 들고 다닐 것 같아요.”

-그렇다. 그저 애착 가방이 저걸로 바뀌었을 뿐

-호 센스 엄지 척

-[예쁘다]

-우왕 명품이당

“다음으로 건우 형이 준 선물은.”

라방은 50분가량 진행하고 마쳤다. 멤버들이 준 선물뿐만이 아니라, 스태프들에게 받은 선물들까지 자랑하고 오늘 콘서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빨리 흘렀다.

우웅.

“……?”

널려놓았던 선물을 정리하는 중, 핸드폰이 울렸다. 계나리가 초코톡으로 너튜브 링크를 보냈다.

[[Live] 태국 에라완 국립공원 상공 미스터리 홀 출현!]

오늘따라 혼자 두기가 싫네

생중계되는 영상. 금방이라도 미스터리 홀에서 뛰쳐나올 것 같은 크고 작은 마물들의 모습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거나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유명한 관광지인데다 환한 대낮에 발생해서 목격자도 많고, 이렇게 각종 동영상 플랫폼에다 라이브로 영상을 내보내는 사람도 많아서 이번엔 정보 통제가 쉽지 않을 거예요.]

-[우리나라의 눈치 빠른 사람들은 벌써 이우그룹과 정원그룹이 지은 대규모 대피 시설을 미스터리 홀과 연관 짓고 있고요. 두 그룹 내부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고.]

[정부에서 널 추적할 가능성이 커지겠네. 조심해.]

-[ㅎㅎ]

-[넵!]

한율은 사과패드에 태국의 미스터리 홀 생중계 영상을 켜둔 채, 마저 선물들과 짐을 정리하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세상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태국 에라완 국립공원에 생겼던 미스터리 홀도 발생 약 7시간 만에 감쪽같이 사라졌으나, 사람들이 받은 충격의 강도가 지난번보다 훨씬 높은 까닭이었다.

정체 모를 괴물이 있는 미스터리 홀이, 미국 뉴욕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생겨났다는 것. 앞서 중국에서도 미스터리 홀이 생겼었다는 소문까지 재조명되며 공포감이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에도 미스터리 홀이 생길지 모른다!

“뉴욕 미스터리 홀이랑 크기, 그 안에서 포착된 괴물의 윤곽이 태국 거랑 다르다는 분석 탓에 더더욱 혼란에 빠진 것 같아.”

한율의 객실로 찾아온 유호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도망치다가 다친 사람들, 정신적 충격을 받아서 쓰러진 사람들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착잡하더라. 인근에 살던 주민들도 터전을 버리고 대피하느라 난리라던데….”

후우. 유호가 크게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조금 전에야 막 씻고 나온 한율은 기초화장품을 마저 바르며 대답했다.

“그래도 당분간은 전조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했으니, 점차 진정될 거예요. 짐은 다 정리했어요?”

“아니, 아직.”

“가서 정리하고 있어요. 10분 후에 객실로 가서 한 시간 정도 마나 유동 봐 드릴게요.”

유호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세상은 난리가 났지만, 어스래빗은 예정대로 12시 45분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로 향했다. 그러나 오후와 저녁에 도심에서 찍기로 했던 자체 콘텐츠 촬영은 취소되었다.

시카고의 한 호텔. 오 팀장이 매니저들이 사용하는 객실로 어스래빗 멤버들을 불렀다.

“어제 태국에서 미스터리 홀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뉴스, 다들 봤을 겁니다. 인터넷이 온통 그 얘기로 가득하니까요. 그런데 그와 관련해 온갖 이상한 소문과 음모론이 퍼지면서, 이 지역 소셜미디어에 대규모 폭동과 약탈을 계획하는 글들이 올라온다고 하네요.”

“네?”

“사실 지난달에도 이곳 시카고에서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헛소문이 퍼져, 수백 명의 폭도가 자정부터 몇 시간 동안 명품 판매장과 백화점, 은행 등의 유리창과 문을 박살 내면서 약탈하고, 경찰에게도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었거든요.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이고요.”

“갑자기 미스터리 홀이 생겨서 괴물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는데, 폭동을 일으켜요?”

박가람에 이어 강보배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왜 백화점을 털지?”

라이언이 고개를 흔들었다.

“명품이랑 돈 되는 것들 훔치고 싶어서 아무 이유나 갖다 붙이는 거야. 이해하려 하지 마.”

“그럼 우리 콘서트는요?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일단은 예정대로 준비를 진행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쉬세요. 혹시 모르니 핸드폰과 노트북, 사과패드 모두 가득 충전해놓고.”

“네.”

그날 저녁.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뒤 유호와 박가람이 한율의 객실로 찾아왔다.

“혼자 하려니까 괜히 헷갈리더라.”

“수련해서 빨리 강해질 테다.”

한율은 몇 시간 동안 두 사람의 마나 유동을 봐주었다.

하루가 지났다. 다행히 밤사이 시카고는 안녕하여, 어스래빗은 예정대로 리허설을 진행했다. 다음 날. 본 공연에 앞서 최종 리허설과 팬미팅이 진행되었다.

[당장 머리 위에 미스터리 홀이 나타나 괴물이 쏟아지면, 그땐 내가 너희를 지켜줄게.]

[그러지 말고 우리, 서로서로 지켜줘요.]

[보배, 우리 보물! 생일 축하해!]

[언젠가 돌아올 이프림의 탄생도 미리 축하합니다! 와줘서 고마워요!]

콘서트도, 중간에 짧게 진행된 강보배의 생일 파티도 큰 문제 없이 성료. 호텔로 돌아왔을 땐 다들 녹초가 되어, 모니터링만 하고 나서 각자 객실로 향했다.

“형, 생일 축하해요.”

“우리 보배, 생일 축하한다.”

“흐. 고마워.”

그래도 강보배에게 생일 선물을 건네는 건 잊지 않았다.

강보배는 한율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전에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그는 며칠이 지난 지금도 불안에 떠는 태국 팬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디 태국 분들 모두 안전하기를 바랍니다. …정말 별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지구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상하고 위험한 일, 나쁜 일은 영화 속에서만 벌어지고 현실은 늘 평화로웠으면 좋겠는데, 참… 속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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