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234/427)

“글쎄요. 저도 금방 잠들어서 잘 모르겠네요.”

“어제 공연이 다른 곳보다 더 힘들기는 했지. 보배 넌 괜찮아?”

“응. 푹 잤더니 많이 나아졌어.”

찰칵. 한율은 셀카를 찍어서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2시 30분 비행기 타고 뉴욕으로 갑니다.]

[도착하면 또 올릴게요.]

-[그래.]

-[우리 아들, 오늘도 참 잘생겼다^^]

옆에서 한율의 핸드폰을 함께 들여다보던 박가람이 흐뭇하게 웃었다.

“효자로다. 꼬박꼬박 보고도 다 하고.”

“부모님이랑 그러기로 약속했거든요.”

“하…. 빨리 한국 돌아가서 집밥 먹고 싶다. 너도 그렇지?”

“네. 하지만 집에 갈 수 있는 건 활동이 끝나고 난 뒤가 아닐까요?”

박가람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나, 우리 엄마가 해준 밥 먹고 나면 그때 결정하려고.”

무엇을 결정하겠다는 건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한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좋으라고

뉴욕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어스래빗은 회사가 빌린 연습실로 이동해 <크리스 라터쇼>에서 선보일 무대들을 연습했다. 다음 날도.

미국 날짜로 19일. <크리스 라터쇼> 스튜디오를 찾아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눈 뒤 리허설을 진행했다.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고 나선,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 현지 언론사 세 곳과 인터뷰.

밤 11시, <크리스 라터쇼>의 게스트 대기실. 진행자 크리스 라터가 VJ와 함께 찾아왔다. 그는 상당히 풍채가 좋았다.

[대세 K-POP 아이돌 어스래빗! 만나서 반가워요! <크리스 라터쇼> 진행자, 크리스 라터입니다!]

[만나서 영광이에요, 라터. 꼭 TV에서 불쑥 나오신 것 같네요.]

[그럼 우리, 지금 마음속에서 일어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볼까요? 하나, 둘.]

넉살도 좋았다. 크리스 라터와 멤버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가, 웃으며 한 명씩 인사했다. 그는 멤버들의 이름과 포지션, 특징까지 다 꿰고 있었다.

[오, 무슨무슨 K-POP 남자 아이돌 미남 3위! 목소리도 아주 매력적이던데, 조금 더 들려줄 수 있어요?]

지금 촬영 중인 영상은 나중에 편집을 거쳐 비하인드로 풀릴 예정이었다.

[오늘따라 뉴욕 지상의 은하수가 한층 더 아름답던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라터.]

[……!]

[으아아!]

차남석의 능글맞은 멘트와 산뜻한 미소에, 박가람이 작게 괴성을 지르며 빙글빙글 돌았다. 놀라서 입을 쩍 벌렸던 크리스 라터가 카메라를 향해 속닥속닥 경고했다.

[상당히 위험한 미남입니다, 여러분. 정신 바짝 차리세요! 그리고 여기… 또 다른 위험인물이 있습니다.]

크리스 라터가 한율 앞으로 다가왔다.

[글로벌 OTT 상반기 드라마 상위권! 한국 드라마 <서울 구미호>의 어린 구미호 친구도 함께 모셨습니다!]

[함께라니요. 어스! 래빗의 보컬,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라터.]

[사람을 홀리는 구미호가 아니에요?]

[평범한 사람입니다.]

[오우! 매력적인 텍사스 사투리를 사용하는 평범한 토끼 사람이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모두와 인사를 마친 크리스 라터는 멤버들에게 짧게 안무를 배워보기도 하면서 분위기를 띄우다, 나중에 만나자며 대기실을 떠났다.

“우리에 대해 조사 꼼꼼하게 하셨나 봐. 특히 안무 포인트 따는 거 보니까, 미리 한두 번 연습해본 게 아니시던데?”

“응. 덕분에 긴장이 좀 풀린 것 같다. 그나저나 너희, 영어 실력 정말 많이 늘었다.”

“3년 동안 깡충깡충 영어 극장으로 단련한 덕이지.”

“흐.”

얘기를 나누면서도 멤버들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23시 55분. <크리스 라터쇼>가 시작되었다. 방송은 너튜브 <크리스 라터쇼> 공식 채널을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되었다.

어스래빗은 다소 어두운 분위기와 강렬한 퍼포먼스, 어려운 무대 연기를 요구하는 + 편곡 버전으로 오프닝을 열었다.

-[세상에]

-애들 무대 연기 진짜 미쳤다.. 심지어 라이브야ㅠㅠ

-[친구가 열광해서 어떤 팀인가 궁금해서 보고 있는데, 저도 오늘부터 열광하게 될 것 같네요. :)]

-퍼포 장인들

-[미친 쇼맨십! 이런 K-POP 아이돌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이들은 정말 다재다능한 소년들입니다.]

-[어스래빗을 <크리스 라터쇼>에서! 제 비명을 들은 파파가 총을 들고 달려왔어요. 미안해요, 파파.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는 어스래빗에게 첫 1위를 안겨준 뜻깊은 곡입니다! 이 무대를 생방송으로 다시 보게 되다니 참 기쁘네요☺]

채팅창에 올라오는 언어는 대부분 외국어. 간혹 한국 이프림의 주접 가득한 댓글도 올라왔지만, 순식간에 위로 올라가 사라졌다.

-[마지막은 역시 한율의 아련하면서도 몽환적인 눈물 연기!]

-크으

오프닝 무대가 끝났다. 카메라는 입을 쩍 벌린 채 넋이 나간 표정을 짓는 크리스 라터를 클로즈업했다.

[…….]

조명이 환해졌다. 크리스 라터가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멤버들에게 다가왔다. 하하!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이런 미친 토끼들 같으니!]

간단한 자기소개 후, 본격적인 토크 타임.

크리스 라터는 어스래빗의 활동 성적으로 감탄과 칭찬을 늘어놓곤, 미국에 처음 왔을 때의 감상, 미국 콘서트를 주제로 토크를 이끌었다. 미국 시청자들에게 잘 어필될 수 있도록.

[그런데 한율. 당신은 텍사스 출신인가요?]

[아니요. 제가 지금 이렇게 텍사스 사투리를 사용하곤 있지만, 텍사스는 태어나서 딱 두 번. 콘서트 때 외엔 가본 적이 없습니다.]

크리스 라터가 목을 길게 뺀 채 어깨를 으쓱, 어리둥절한 얼굴로 관객을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죠? 이렇게 유창하게 말하면서 실제론 딱 두 번밖에 안 가봤다고요?]

한율은 적당히 둘러댔다.

[전화 영어 선생님이 텍사스 분이셨어요. 그런데 제가 전생에 텍사스 사람이었는지, 아주 입에 착 잘 붙더라고요. 그래서 쭉 사용하고 있습니다. 텍사스를 배경으로 한 옛날 영화나 드라마도 아주 좋아하고요.]

길우성이 짝짝 손뼉을 치며 말했다.

[어스래빗의 7대 미스터리 중 하나가 풀렸습니다! 지금까진 대체 영어를 어디에서 배웠냐, 팬들이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주더니 데뷔 3년 만에 이 자리, 크리스 라터 쇼에서 드디어.]

[영광이로군요! 그런데 7대 미스터리 중 하나가 풀렸다면, 나머지 여섯 개는 뭔가요, 우성?]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팬들이 그런 게 있다더라고요. 그래서 아, 있나 보다. 이러고 있습니다.]

[우성은 영어를 누구에게서 배웠죠?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길우성이 쑥스럽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영어가 너무 늘지 않아서, 룸메이트인 호 형에게 둘이 있을 땐 영어를 사용해달라고 했거든요.]

강보배가 놀란 눈으로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그랬어? 난 처음 들었어.]

[저 뒤에서 조용히 노력하는 남자입니다.]

겸손한 말과 달리, 길우성은 멤버들에게 한번, 관객을 향해서도 한번 양쪽 눈을 찡긋하며 귀여운 척했다.

[여러분, 처음 이 친구들이 보여주었던 소름 끼치는 무대 연기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토크는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중간 광고가 나가는 동안엔 백스테이지에서 재빠르게 준비하고선 을 선보였다.

오프닝 무대와는 전혀 다른 밝은 분위기. K-POP 남돌 특유의 칼군무, 그리고 관절이 걱정되는 파워풀한 퍼포먼스에, 관객들과 크리스 라터는 무대가 끝나자마자 크게 환호했다.

이후 짧은 토크와 미니 게임이 이어지고 방송이 끝나기 전, 어스래빗은 크리스 라터와 작별 인사를 나누곤 신곡 무대를 최초 공개했다.

한국의 대형 포털사이트 실검 1위, 미국 SNS 실시간 트렌드 중위권엔 [어스래빗 크리스라터쇼]가 올라왔다.

* * *

[어스래빗, 美 <크리스 라터쇼> 출연! 뛰어난 퍼포먼스로 무대 장악… 신곡 최초 공개]

[최근 월드투어 ‘The CARNIVAL’로 22개 도시를 방문한 어스래빗이 미국 인기 토크쇼 <크리스 라터쇼>에 출연했다. 와 편곡 버전 무대로 미국 시청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어스래빗은…(중략).

섭외 이야기가 나온 후에야 어스래빗을 처음 알게 됐다고 솔직히 말한 크리스 라터는 어스래빗의 M/V와 무대 영상을 찾아보는 동안 이프림(어스래빗의 팬덤 이름)이 되었다며 내내 흐뭇한 미소로…(중략).]

-애들 전부 통역 없이 영어로 대화하는 거 보니 괜히 내가 다 뿌듯하더라. 조금 어렵다 싶으면 바로 영어 잘하는 멤이 알려줘서 흐름도 끊기지 않고

ㄴ진짜 해외 공략 준비 많이 한 느낌

-몸값 올라가겠네

-Shuffler 벌써 대박 조짐

-크리스 끝날 때까지 지구토끼 응원봉 소중히 든 채 진행하는 거 보고 내내 웃었네요ㅎㅎ 우리 딸이 좋아하겠네요 하니까 그럴 줄 알고 크리스 라터 가족이랑 스태프들에게 줄 선물까지 다 챙겨왔다며 박스째 건네는 애들이나ㅋㅋㅋ

ㄴ재고떨이하는 거 아니냐는 크리스의 의심에 나중에 계좌번호 알려주겠다는 호

ㄴ애들 되게 능청스럽게 잘했음ㅎㅎㅎ

-아 제발 능력자분들 번역 좀 해주세요 궁금해 미치겠어요ㅠㅠ

ㄴ팬클럽 게시판이랑 너튜브에 번역 올라왔어요

ㄴ감사합니다ㅠㅠ

-10월 23일 오후 6시, 어스래빗 신곡 디지털 싱글 발매! 27일 <락뮤닷>에서 컴백합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D

-<스타학교> 완전체 출격 기대된다ㅎㅎ

ㄴ그거 확정 아니래요. PD가 섭외하고 싶다고 말만 했을 뿐

“어스래빗 인지도 상승세가 심상치 않은데요?”

아림 엔터테인먼트. 진지한 얼굴로 어스래빗 기사를 들여다보는 실장을 향해,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적당히 견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직 국내 팬덤 규모나 인지도는 원카운트가 더 높지만.”

“당연히 우리 애들이 더 높죠. 우리가 괜히 대형기획사입니까? 제아무리 해외 성적이 좋아봤자, 결국은 이 정도에서 그칠 겁니다. 국내에서 안 알아주면 계속 해외로만 맴돌다가 군대 갈 나이나 맞이하고 하행선을 타겠죠.”

“그럼 <스타학교> 섭외는….”

J본부의 예능 <스타학교>는 아림 엔터의 레이블이 제작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고정 출연자 절반도 아림 엔터 소속이고.

실장이 심드렁한 얼굴로 직원을 바라보았다.

“이미 섭외 안 하기로 이야기 끝났다더군요. 서한율 혼자면 몰라도, 우리 회사랑 아무 접점 없는 중소기획사 돌을 왜 밀어줍니까. 누구 좋으라고.”

“이미 섭외 기사가 나갔는데도요?”

“홍보팀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죠.”

10월 21일. 인천국제공항에는 어스래빗을 기다리는 기자들과 팬들로 북적거렸다. 유호의 생일 축하 메시지를 담은 슬로건도 여럿 보였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경호원들과 매니저들에게 둘러싸인 채 로비로 나왔다. 동시에 크게 울리는 환호성. 꺄아악! 호야 생일 축하해! 사랑해! 얘들아, 수고했어!

연예 언론사 몇 곳은 어스래빗의 입국 현장을 너튜브 생중계로 내보냈다.

“…후우. 오늘도 무사히 탑승!”

별다른 표정 없이 묵묵히 이동하던 박가람이 버스 좌석에 타자마자 촐싹거렸다.

“배고프당, 배고프당, 호 형 생일 케이크 뺏어 먹자아.”

“일단 사주고 나서 뺏어 먹지 않을래, 가람아?”

월드투어 짐은 멕시코시티 공연이 끝난 뒤, 스태프 몇 명이 챙겨서 먼저 한국으로 가지고 왔다. 덕분에 버스에 짐을 싣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들 안전띠 맸죠? 출발합니다.”

잠시 후,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좌기훈 대표는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어스래빗 멤버들을 한 명씩 안아주었다. 여기에 명품 가방 선물까지.

“곧바로 컴백 준비를 해야 해서 피곤하겠지만, 이번 활동만 끝나면 당분간 푹 쉴 수 있으니 조금만 더 힘내자.”

“네, 감사합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기분 좋은 얼굴로 연습실을 찾았다. 회사 직원이 미리 청소해놓았는지 연습실은 여전히 깨끗했다.

박가람과 길우성이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흐엉, 우리 연습실이다아.”

“아, 역시 우리 연습실이 최고야.”

삐릭. 오 팀장이 문을 닫으며 들어왔다.

“스케줄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앉으세요.”

유호가 구석에 쌓인 방석을 들고 와서 멤버들에게 나눠주었다. 드러누웠던 박가람과 길우성이 주섬주섬 일어나 방석에 앉았다. 한율도 방석에 앉아, 조금 전 좌 대표에게 받은 선물 상자를 옆에 내려놓았다.

“우선 안 좋은 소식입니다. J본부 예능, <스타학교>의 완전체 출연이 불발되었습니다. 당초 23일 녹화하기로 이야기가 오갔으나, 프로그램 제작사 내부 사정으로 인해 어렵게 되었다더군요.”

“아….”

“이제 좋은 소식입니다. 우선, 화장품회사에서 어스래빗 전원에게 광고 모델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일본에서도 음료 광고 모델 제안이 들어왔으며, MBS <매니저의 하루>와 <괴담>, SBC <너의 집>, <달리는 예능>에서 출연 섭외가 왔습니다. 교육 방송의 <일일멘토>와 뮤닷 <뮤직카페>에서도요. 그리고 12월에 열리는 RMMA의 MC로 한율이를 섭외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일상을 조금 더 보내고 싶어

유호가 놀란 얼굴로 한율을 한번 바라보곤 오 팀장에게 되물었다.

“화장품 광고요? 그것도 단체로?”

“네. 더순한화장품 계약 종료 이후로 1년. 동종업계 광고 출연 금지 기간이 지나, 다시 한율이의 화장품 광고 모델 활동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 모두를 기용한다는 게 더 놀라운데요…. 아니, 그렇게 피부가 나쁜 사람은 없지만.”

“내일 <락뮤닷> 스페셜 영상 녹화 끝나면 다들 피부 관리받으러 갑시다.”

<스타학교> 완전체 출연이 불발되었다는 것은 아쉽지만, 다른 스케줄이 많이 잡혔다.

멤버들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에!”

어스래빗 숙소 앞엔 지난번처럼 사생들이 잔뜩 모였다. 멤버들이 탄 두 대의 차량은 대문과 담 앞에 바짝 붙어서 섰다. 우선 앞차에 탄 멤버들이 곧장 대문 안으로 내렸다.

지난번 발생한 트러블 때문인지, 앞차에 붙어서 슬슬 대문 앞으로 이동하는 허진영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다행히 별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형.”

“응. 오늘 생일 축하해, 호야.”

“감사합니다! 내일 봐요!”

“내일 봐영!”

“내일 봐요,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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