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5화 (235/427)

차에서 내리자, 사다리를 타고 담 안을 훔쳐보던 사생들이 이쪽을 보라는 둥, 선물 받으라는 둥 뭐라 뭐라 외쳤다. 멤버들은 시선 한번 주지 않고 빠르게 현관으로 들어갔다.

“히익. 이게 다 뭐야?”

“와…. 아까 회사에 있었을 때 와서 하셨나 보다.”

거실은 유호의 생일 파티로 꾸며졌다. 소파 뒤 벽면에는 ‘Happy birthday’ 금빛 풍선과 유호의 대형 포스터가, 티 테이블에는 생일 케이크를 비롯한 맛있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

“저기 쌓인 선물 상자도 전부 호 형 것…은 아니고 투어 동안 우리가 받은 선물들이구낭.”

“이거 리더네 엄마표 잡채야. 소고기미역국이랑 떡갈비도 있다.”

“호 형 감동했어?”

멍하니 거실 광경을 바라보던 유호가 미소 지었다.

“당연히 감동했지. 매니저 형들도 피곤했을 텐데 파티 준비까지 다 해주시고…. 다들 얼른 손 씻고 와. 식기 전에 먹자.”

“라방 켤까?”

“켜야지.”

멤버들은 각자 짐을 방에다 대충 두곤, 손을 씻은 뒤 거실로 모였다. 그린라이브에 접속, 라이브 방송이 켜진 카메라에 대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월드투어 ‘The CARNIVAL’을 마치고.”

“오늘 귀국한.”

“어스!”

“래빗!”

“의 장남! 큰형의 생일 파티 겸,”

“귀국 축하 파티를.”

“시작합니다!”

와아아! 짝짝 손뼉 치는 멤버들의 영상 옆으로, 라방에 접속한 팬들의 톡이 주룩주룩 순식간에 위로 올라갔다.

-얘들아 보고 싶었어ㅠㅠ

-[월드투어 수고했어요♡♡♡]

-숙소 거실에 있는 거 보니 괜히 울컥

-[사랑해 어스래빗♡♡♡♡♡]

-[크리스 라터쇼를 보고 팬이 되었습니다. 사랑합니다.]

-[독일 이프림 출석! :)]

-[호, 생일 축하해♡♡♡]

“……!”

톡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으로 라방을 켠 차남석이 놀란 눈을 하더니, 옆에 있던 한율에게 보여주었다.

미국 인기 토크쇼에 출연한 게 영향이 크긴 큰 모양이었다. 접속자 수가 예전보다 확 늘었고, 그러잖아도 많았던 외국어의 비중도 더 커졌다.

유호가 머리에 쓴 고깔모자를 매만지며 환하게 웃었다.

“오늘 생일을 맞이한 유호입니다. 생일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이프림~.”

라방은 투어 도중 있었던 소소한 에피소드를 푸느라 이야기가 길어져,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방송과 정리를 마쳤을 땐 어느덧 밤 10시.

한율은 거실 한쪽에 쌓인 상자 중, 자신의 이름이 적힌 상자를 하나씩 방으로 옮겼다. 한꺼번에 정리한 뒤 씻고 푹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소파에 드러누운 박가람이 말했다.

“참 부지런도 하지. 꺼내는 김에 형 것도 앞으로 내놔주지 않으련?”

“스스로 하시죠.”

“넹.”

선물은 다양한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종류가 많았다. 고가의 선물은 받지 않겠다고 공지로 명시했지만, 비싼 명품도 적잖이 섞였다.

‘세금으로 얼마나 나갔을까.’

건조한 의문을 떠올리면서 종류별로 분류. 무료해서 켜놓은 TV에선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배우 이강대가 주연이었다.

지난 6월, 이강대는 보이그룹 루트의 멤버이자 배우인 김종주에게 FJ그룹에 찍혀서 일이 끊긴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그리고 김종주의 소개로 앗싸일보 기자와 만난 뒤, 거짓말처럼 OSN 드라마 <우리 회사>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무난하게 잘하는데, 왜 쓸데없이 본인 평판을 깎아 먹도록 입을 놀리고 다녔던 건지.’

우웅. 어스래빗과 매니저들이 있는 단톡방. 현재 확정된 스케줄이 정리되어 올라왔다.

한율은 스케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고민되네.’

활동이 끝난 11월 2일부터 9일까진 공식 휴가였다. 한율은 그때 서울에서 모의 훈련을 진행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어차피 휴가가 끝나도, RMMA 연습이나 다음 앨범 준비로 조금 한가할 테니.

그런데 차남석은 예외로 7일에 스케줄이, 휴가 바로 다음 날인 10일부턴 예능과 광고 촬영 스케줄이 줄줄이 잡혔다.

만약 휴가 기간에 서울에 미스터리 홀이 나타나고, 그 안에서 나온 괴물이 건물이라도 하나 박살 낸다면 어떻게 될까.

한가하게 예능이나 찍을 시국이 아니라며 모든 일정이 취소될 가능성이 크다. 최소한 한 달, 더 길면 몇 달 동안은 아무 일도 못 하게 될 터.

‘RMMA 이후로 미룰까?’

‘서한율’로서의 일상을 조금 더 보내고 싶은데, 스스로 그 일상을 방해하는 격이 되는 것 아닌가.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거실에서 길우성과 박가람이 까불대는 소리가 들렸다.

“달리느은~!”

“예능!”

10일 녹화가 잡힌 프로그램명을 외친 둘은 그곳에 나가면 어떤 개인기를 보여야 하느니, 미리 고정 출연자들 연구를 해야 한다며 떠들었다. 12일 화장품 광고 촬영을 위해선, 당분간 트러블을 유발하는 간식을 끊어야 한다며 절망하기도.

‘…미룰까.’

망설임이 든다는 건, 이미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는 증거.

하아. 한율은 팬이 손수 만든 귀여운 토끼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토끼 인형이 입은 옷에는 ‘I♡Earth’가 새겨져 있었다.

‘이렇게 마음이 물러져서야.’

* * *

[서한율, <2020 RMMA in JAPAN>으로 첫 MC 도전!]

[서한율이 12월 11일 일본 나고야에서 열리는 <2020 RMMA in JAPAN> MC를 맡는다.

(사진=WB래빗 엔터테인먼트)

오늘 22일 뮤닷 측은 “진행 경험은 없으나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한데다 언행이 차분하고, 배우로서도 해외에서 긍정적인 인지도가 높아 MC를 제안했다”라고 밝혔다.

최근 어스래빗 월드투어를 마친 서한율은…(중략).]

-서울 구미호 형호 생각하면 뻔뻔하게 잘할 것 같다ㅎㅎ

-꼭 서한율이어야 함? 더 인기 많고 일본어 잘하는 아이돌 많은데?

ㄴ제목만 읽었냐? 배우로서 해외 인지도 높아서 제안했다잖아

ㄴ개인 인기만 놓고 보면 ㅅㅋㅇㄹㄴ랑 ㅇㅋㅇㅌ 멤버보다 서한율이 더 높음. 서울 구미호 방영 내내 일본이랑 다른 지역 글로벌 OTT 드라마 1위 아니면 2위였음. 어스래빗은 몰라도 서한율 아는 머ㄱ들 많을걸

-얘 너무 돈 자랑해대서 별론데

ㄴ스스로 자랑한 적 없습니다. 기자들이 캐서 까발린 거지

ㄴ설마 억 단위로 기부하는 걸 돈 자랑이라고 보는 건 아니겠지?

-인기만 많은 아이돌 세워두는 것보단 서한율이 훨씬 낫지. 뭉개진 딕션에다 수시로 큐카드랑 프롬프터 훔쳐보는 거 티 내는 어설픈 놈들보다

ㄴㄹㅇㅋㅋ

ㄴ웅얼거리고 발음까지 씹고 더듬는 MC 보면 최애 무대고 뭐고 채널 돌리고 싶음. 카메라는 안 보고 내내 큐카드로 시선 내리는데 진행이 장난이냐고ㅋ 수십만 명이 보는 무대에 서는데, 그것도 하나 안 외우고 뭐 했나 싶기도 하고

ㄴ겉만 멀쩡하지 머리 나쁜 애들 많잖아

-나 솔직히 ㅅㅋㅇㄹㄴ 팬이고 서한율 그다지 안 좋아하는데, 진행은 잘할 것 같음ㅇㅇ 드라마 대본도 기본적으로 다 외우고 촬영 들어갈 정도로 암기력도 좋다던데

-과연

-율톢 홧팅!

앗싸일보 연예부 소속, 이 기자가 운전하는 차 안.

-[서한율 인지도 높은 거 알아요. 배우로서 연기력도, 비주얼도 훌륭하고, 대표작도 대박이 났으니까 RMMA MC로 섭외된 거 이해합니다. 그런데 <달리는 예능> 완전체 출연은 너무 간 것 아닙니까?]

전화 상대방, 아림 엔터테인먼트 직원의 흥분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스엔의 스카이러너도 코너 속의 코너로 짧게 등장했었을 뿐인데, 어스래빗이? 누군 월드투어 안 했냐고요. 어디 빌보드200에도 든 적 없는 애들이….]

이 기자는 차분하게 정정해주었다.

“빌보드200, 두 번 들어갔었어요. 작년 월드투어 끝난 뒤 발매한 정규 1집이랑, 지난번 EP 앨범으로.”

-[아…. 그랬어요? 몰랐네. 어쨌든 빌보드200도 국내 상위권 애들이면 한 번 이상은 다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애들 다 제쳐두고, 멤버 몇 명 빼곤 인지도도 별로 없는 팀을 이렇게 띄워주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이 기자는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어스래빗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니, 슬슬 견제에 들어가려는 모양이었다. 히아신스를 위해 크리스탈 래빗을 적극적으로 견제했던 것처럼.

“글쎄요. 멤버 전원은 오프닝에만 잠깐 나오고, 두 명만 게스트로 뛰는 거라던데요. 그럼 다른 용건은 없으신 거죠? 지금 취재 장소에 도착해서요. 제가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네…. 수고하세요.]

통화가 끝났다. 이 기자는 주차하고 나서 카메라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약속 상대는 선글라스를 쓴 채 벤치에 홀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며칠 제대로 먹지 못한 사람처럼 뺨이 핼쑥하고 안색이 창백했다.

“안녕하세요, 앗싸일보의 이 기자입니다. 연락해주신 김다우 씨, 맞으시죠?”

쉿. 김다우가 기겁을 하며 입 앞에 손가락을 세웠다. 그녀가 주변을 불안하게 살피며 말했다.

“기자님 차에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이런 곳은 누가 볼까 봐 좀 불안해서….”

김다우는 소위 아이돌 사생팬이라 불리던 족속이었다. 정확히는 사생활 스토킹 범죄자. 그런 그녀가 이 기자에게 제보한 내용은 조금 황당했다. 어스래빗 사생을 역으로 스토킹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이 기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시죠.”

한편 그 시각, 한율은 오래간만에 자신의 차를 몰고 박가람과 외출 중이었다. 박가람이 차창을 열어 바람을 쐬었다.

“오래간만에 서울 시내 드라이브도 하고, 좋다. 나중에 내가 운전해도 돼?”

오늘 아침, 어스래빗은 다음 주 <락뮤닷>에 나갈 짧은 스페셜 영상을 촬영했다. 그 후 각자 병원이나 피부 관리를 받으러 흩어졌다. 박가람은 마나 유동 수련을 시작한 이후 피부가 굉장히 좋아져, 딱히 관리를 안 받아도 되겠다며 한율을 따라 나왔다. 심심하다고.

“아니요. 창 닫으세요. 오늘 미세먼지 수치 높아요.”

“그랭.”

박가람이 얌전히 창문을 올렸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온갖 크고 작은 공연장이 들어선 대학로였다. 유료 주차장에다 안전하게 차를 세운 뒤 걸어서 도착한 카페 앞.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 동기인 고재영이 두 사람을 발견하곤 반갑게 웃었다.

“서한율, 하이! 안녕하세요, 선배님!”

고재영 옆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세 사람도 함께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와아, 학교에서도 몇 번 뵀는데, 연예인 포스가….”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심심해서 따라온 사람입니다.”

그들은 한율이 다니는 대학교의 연극 동아리 ‘달달’, 그리고 ‘시즈닝 극단’ 소속 배우들이었다.

여섯 사람은 카페로 들어가 주문한 음료가 나올 동안, 가볍게 잡담을 나눴다.

“저 <객귀, 해> 정말 재밌게 봤어요. 특히 사라진 엄마를 찾아서 헤맬 땐 정말 몰입해서… 나도 모르게 막 안절부절못하게 되더라니까요?”

“<별☆일없는 집>이랑 <고양이 난로>, <서울 구미호>도 대박이었지. <장인>에 카메오로 출연했을 때도.”

“우리 동생이 가람 님 팬인데,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이쿠, 감사합니다.”

“그런데 진짜 얼굴도 작고 피부도 좋으시다.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흐. 스물 셋인뎅.”

“거두절미하고 말할게, 서한율.”

고재영이 본론을 꺼냈다.

“나중에 SNS로 홍보 한 번만 해줘.”

한율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공연장은 빌렸어?”

선물로 혼내줄 테다

크리스마스 시즌, 소외계층 아동을 위한 기부금 마련 연극은 본래 달달에서 기획했다. 한율에게도 도와달라는 연락이 왔었으나, 바빠서 참여가 힘드니 다른 방법으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달달은 두 가지 이유로 시즈닝 극단과 합동 공연을 하기로 했다. 첫 번째 이유는 공연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두 번째 이유는, 공연장 대부분이 대학 연극 동아리엔 대관을 꺼려서.

『한 마디로 아마추어 공연을 자기네 공연장에 올리기 싫다는 거지. 우리 동아리 배우 대부분 연기 경력 있다고, 드라마 데뷔해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는데도 건성으로 듣더라. 그래서 포기할까 생각했는데, 마침 시즈닝 극단에 있는 선배님이 합동 공연 제안을 주셔서.』

참고로 학교 내 공연장은 다른 과와 동아리가 사용하게 되었다고.

고재영에게 통화로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작은 곳 하나랑 이야기 진행 중이야.”

“그것도 간신히 잡은 거예요.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보니, 좋은 곳은 일찌감치 예약이 잡힌 상태거든요. 아니면 대관료가 비싸거나.”

박가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척했다.

“대관료가 비싸면 기부할 수익금도 줄어들죠.”

지잉. 주문한 음료가 완성되었다는 진동벨이 울렸다. 시즈닝 극단의 배우와 박가람이 함께 일어났다.

“제가 다녀올게요.”

“양이 많으니까 저도.”

한율은 지나가는 어조로 담담히 말했다.

“공연장 대관료, 제가 지원해드릴게요. 좋은 곳 찾으세요.”

“……?!”

막 걸음을 옮기려던 배우도, 자리에 앉아있던 이들도 덜컥 움직임을 멈추곤 한율을 바라보았다.

“…뭐?”

“고재영이 보내준 연습 영상 봤어요. 재밌던데요? 훈훈하고, 연기 잘하는 분도 많고.”

“아니, 우리는 그냥 홍보만 부탁하려고 한 건데….”

“SNS 홍보만 해줄 생각이었으면 굳이 만나자고 하지도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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