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서 굳은 극단 배우를 대신해, 박가람이 음료가 담긴 쟁반을 가져왔다.
“마시면서 이야기 합시당.”
“예전에 강덕심 선생님이 있는 극단에 방문한 적이 있었어.”
박가람이 해설자처럼 끼어들었다.
“강덕심 선생님은 <객귀, 해>에서 서한율의 어머니 역을 맡았던 분이십니다. 지금도 종종 안부 인사를 드리고 있죠.”
“그때 거기 배우 분들이랑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연기에 대한 열정 그리고 실력과는 별개로 그걸 선보일 기회가 너무 한정되어 있더라.”
한율은 한 호흡 쉬고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왕 돕기로 한 거, 적어도 좋은 취지가 무색해져 민망해지지 않도록 지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너 이 자식….”
고재영이 감동한 얼굴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 멋진 자식…!”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뭔데?”
“뭔데요?”
멍하니 서 있던 배우까지 자리에 앉아 한율에게 집중했다.
“아무리 연기 실력이 좋아도, 과거에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던 배우, 인성에 문제 있는 배우는 무대에 올리지 말아주세요.”
“……!”
“제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제가 인기가 많아지면서 절 억까하는 데에 자존심을 건 바보들도 늘어났거든요. 분명히 제가 홍보하면 좋든 싫든 이목을 끌 텐데, 문제 있는 사람이 주연을 맡으면 그걸 엮어서 온갖 루머를 뿌릴 게 뻔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결국 여러분도 피해를 보게 될 거고.”
설명을 들은 네 사람의 표정이 비슷해졌다.
고재영이 정신을 바짝 차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해 완료.”
잠시 후, 그들과 헤어진 한율과 박가람은 저녁을 먹기 위해 경양식 돈가스 전문점을 찾았다.
다른 손님들에겐 잘 보이지 않는 칸막이 테이블 자리. 박가람이 수저를 챙겨주며 말했다.
“난 가끔 네 마음 씀씀이에 놀란다, 아우야.”
“……?”
“안타까워서 그런 거지?”
“무슨 소리예요?”
“시치미 떼기는.”
박가람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끝이 찾아오면 제일 먼저 필요 없다고 사라지는 게 우리 직종일 거 아냐. 그래서 미련이 남지 않도록 좋은 기회를 주고자 한 거 아냐?”
“아닌데.”
“응?”
직원이 따뜻한 수프와 간단한 반찬을 내려놓고 갔다. 한율은 숟가락으로 수프를 천천히 휘저었다.
“미리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사둬야, 나중에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받기 수월하잖아요.”
“내 감동 돌려내.”
* * *
[어스래빗 신곡 사과튠즈 49개 지역 1위, M/V 10시간 만에 천 만뷰 돌파]
[23일 오후 6시, 어스래빗의 세 번째 디지털 싱글 가 발표되었다.
는 일본,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총 해외 49개 지역 사과튠즈 송 차트 정상에 올랐으며 국내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도 실시간 차트 1위와 상위권을 차지했다.
멤버들이 매력적인 딜러와 악동 해결사로 변신한 M/V는 10시간 만에 천 만뷰를 돌파, 어스래빗 자체 최단 기록을 달성했다. 아울러 작년에 발표한 정규 1집 앨범 타이틀곡 M/V는 2억 뷰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미국 인기 토크쇼 <크리스 라터쇼>에서 무대를 최초 공개한 어스래빗은 27일 <락뮤닷>에서 컴백하며, MBS <괴담>과 <매니저의 하루>, SBC <너의 집>과 <달리는 예능> 등 여러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예정이라고 알려졌다.]
-얘네 진짜 뜨나 보다. 은근히 좋은 노래 많아서 플리에 꼭 한두 곡은 넣고 듣는데ㅎㅎ
-날아랏, 지구토끼!
-뭔가 이상하다. 서한율이 KBC 국장 아들에다가 tv Mu 드라마 두 작품이나 나가서 대박 났는데 정작 두 방송사에서만 섭외가 없다.
ㄴKBC야 아이돌 나갈만한 예능이 적기도 하고 말 나올까 봐 오히려 섭외 안 하는 거 이해하는데 tv Mu는 좀 의외
ㄴ뮤직마켓 출연한 지 얼마 안 지나서 그런 듯?
-<스타학교> 완전체로 나간다고 기사 뜨지 않았나요? 왜 없지?
ㄴ어스래빗 일정이랑 안 맞아서 불발됐대요.
ㄴ어스래빗이 깐 게 아니라 스타학교가 말 바꿨다던데요. 아림 소속사 배우가 새 드라마 홍보차 나와야 해서
ㄴ루머 유포하지 마세요.
ㄴ루머라뇨. 이미 해당 배우 스케줄에 떡하니 <스타학교> 기재됐어요
ㄴ<스타학교> 제작사가 아림 엔터 레이블이잖음. 지들 가족부터 챙기는 게 당연한 거지. 거기랑 <뮤직마켓> 고정 출연자 절반 이상이 아림 소속인 것처럼
ㄴ컴백 시즌에 맞춰서 방송 내보내려면 최소한 2주 전엔 귀국했어야 했음. 그런데 떠비가 컴백 일정을 타이트하게 잡은 데다가 크리스 라터쇼까지 나가게 되면서 힘들게 된 거ㅇㅇ
ㄴ그냥 섭외하기 싫어져서 안 한 거죠. 다른 예능도 얘네 활동 다 끝나서 방송 나가는데 무슨
ㄴ<뮤직마켓>도 아림이 제작하는 거임?
ㄴㅇㅇ
-매니저의 하루 기대된다ㅎㅎ
ㄴ똘똘이 ㅅㅁㅍ 닮은 팔불출 매니저 또 볼 수 있는 건가
앗싸일보 연예부 사무실.
이 기자는 자신이 작성한 기사 댓글을 확인했다. 대부분 축하한다, 사랑한다는 팬들의 댓글이었지만, 개중엔 섭외 얘기를 먼저 꺼냈다가 번복한 <스타학교> 관련 논쟁도 있었다.
‘큰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이대로 승승장구할 팀이기는 해. 하지만 엔터계는 대형기획사 입김이 센 데다, 직접 제작하는 프로그램도 있으니….’
그나마 어스래빗에 KBC 국장 아들이 있어서, 타 방송 출연까진 교묘히 방해하지 못하는 것일 터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되레 방송국의 자존심을 건드려 역공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내용은 다르지만, 이쪽도 비슷해.’
이 기자는 얼마 전 만난 김다우를 떠올렸다. 한때 어스래빗 사생 스토커였던 그녀는, 어스래빗이 자신에게 복수하고자 돈을 써서 스토킹을 고용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 주장을 그대로 기사로 썼다간, 앗싸일보는 가뜩이나 사생 스토커들에게 시달리는 아이돌을 공격하는 모양새가 될 터다.
설령, 김다우의 말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 스토커가 실재하는지도 확인되지 않았고.’
김다우는 경찰에 신고했으나, 그녀가 스토커라고 지목한 사람이 매번 달라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그들 모두 고용된 사람들이라고 우겼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서한율은 돈이 많으니까 가능하잖아요!』
이 기자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히 시간 낭비만 한 것 같다. 사생 스토커의 자의식 과잉에 의한 피해망상이 분명해.’
그는 어스래빗과 관련된 새로운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물론 김다우 이야기는 아니었다. FJ그룹의 하 부장이 서한율의 팬이라서 이것저것 밀어준다는 의혹 기사도 아니었다.
[어스래빗 서한율, 교육방송 <일일멘토>에서 배우 지망생 만날까]
10월 27일. 뮤닷 <락뮤닷>의 어스래빗 단독 대기실.
막 사녹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다.
“저기, 얘들아.”
조유찬이 멤버들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할 말이 있는데….”
평소답지 않게 쭈뼛거려, 멤버들은 소파에 널브러지거나 핸드폰을 찾던 동작을 멈추고 조유찬을 바라보았다. 매니저 윤승우, 허진영을 비롯한 다른 스태프들도.
“나.”
조유찬이 목 뒤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내년 2월에 결혼해.”
……!
조유찬을 바라보는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율도 살짝 눈으로 조유찬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축하해요, 형.”
“축하해요, 유찬이 형!”
“우오오! 유찬이 형 장가간다!”
“박수, 박수!”
짝짝짝. 대기실은 이내 멤버들과 스태프들의 박수 소리, 축하 인사로 시끌벅적해졌다. 조유찬은 쑥스러운 얼굴로 연신 고맙다고 화답했다.
“날짜 언제예요? 상견례는 대체 언제 했는데?”
“얼른 돈 많이 벌어서 유찬이 형 장가보내자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흑. 우리가 성공하긴 성공했다.”
“그분 만난 지 얼마나 됐죠?”
조유찬이 배우 이제설을 통해 지금 여자친구를 소개받았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다. 이제설 담당 스타일리스트의 언니의 친구.
“작년 11월에 처음 만났으니까 곧 1년이지? 결혼식은 2월 21일에 올리기로 했어.”
“OK, 저장 완료. 다들 이날 일정 빼야 해.”
“당연하지.”
‘서한율’이 된 이후 가까운 사람의 결혼은 처음이었다. 한율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신혼집은 어디에 마련하기로 했어요?”
“아직. 다음 주부터 우리 일주일 동안 휴가잖아. 그때 본격적으로 발품 팔아서 알아보기로 했어.”
“아. 다음 주….”
모의 훈련을 계획한 시기. 한율은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부동산 소개해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예산이 적어서, 오히려 소개해준 네게 미안해질 것 같거든.”
“섭섭하게 무슨 소리예요. 10억까진 무이자로 빌려드릴 테니까, 튼튼하고 좋은 전세 구하도록 해요.”
“……!”
“와우….”
“보셨습니까, 선생님들? 얼른 시집 장가들 가십시오!”
길우성이 스태프들을 향해 불끈 쥔 두 주먹을 위로 흔들었다.
“우리에겐 써한이 있습니다!”
와아아!
멍하니 입을 벌렸던 조유찬이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큰돈은 안 돼. 못 받아. 지난번에 받은 차도 정말 과분한데…. 안 돼, 한율아. 그런 큰 금액은 내가 부담스러워서 못 버틸 것 같아. 지금 관계가 망가질 거야.”
다시 떠들썩해지려던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조유찬이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건 싫어, 한율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3억.”
“안 돼.”
“1억 5천.”
“안 돼.”
“1억.”
“…안 돼.”
“네, 1억 무이자로 빌려드릴게요.”
“…너 진짜 왜 이러니.”
조유찬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라이언이 강보배에게 속닥거리듯 물었다.
“지금 이거 무슨 대화야?”
“강제 소매 넣기 현장?”
박가람이 짝짝 손뼉을 치며 주의를 끌었다.
“자자, 어스래빗 멤버분들, 선물 의견 받습니다.”
“양문형 냉장고 어때? 요즘 똑똑 노크하면 저절로 열리는 거 좋아 보이던데.”
“오, 그거 좋다. 그거랑 홈시어터 세트도 해주자. 집에서도 우리 방송 모니터링 하도록.”
“집에서도 일하란 소리냐. 그리고 홈시어터는 인테리어에 맞춰야 하잖아.”
“요즘은 건조기도 필수야. 공기 청정기도.”
“적어, 적어. 양문형 냉장고, 홈시어터 세트, 건조기, 공기 청정기.”
“형수님 뭐 좋아하세요, 형?”
“…….”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던 조유찬이 돌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보배야, <괴담> 현장 녹화 가야지! 메이크업 수정하고 옷 갈아입자!”
“그거 3시간 후인데요, 형. 그리고 우리, 미니 팬미팅부터 하러 가야죠.”
이건우와 유호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예비 새신랑이 정신이 없구먼.”
“그러게.”
길우성이 재차 다른 스태프들에게 외쳤다.
“보셨습니까? 얼른 시집 장가들 가십쇼! 선물로 혼내줄 테다!”
뭔가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짧은 미니 팬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대기실. 이건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유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좋은 일이면 좋은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