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9화 (239/427)

“마침 애들이 우리 곡 챌린지하려던 차에 내가 간 거라, 얼떨결에.”

길우성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도 드림래빗 신곡 안무 아는데….”

“따로 연습실에서 커버 찍어서 올리는 건 어때?”

“그럴까? 내일 같이할 사람!”

“완곡? 아니면 싸비만?”

“싸비만 가볍게.”

라이언이 손을 들었다.

“저요.”

“그럼 내일 회사 가서 점심 먹고 하자.”

“응.”

유호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차로 태워다 줄게. 나도 어차피 내일 회사 가야 하니까.”

“옙. 써한, 내일 달냥이 데려올 거지?”

“어.”

“히히.”

숙소에 도착했을 땐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낮에 점심을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라, 멤버들은 야식을 시켜 먹기로 했다.

“어차피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휴가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먹자. 서한율 넌 뭐 먹을래?”

“바나나요.”

“…….”

“숙소에 바나나가 있었어?”

“요즘은 별의별 게 다 배달되던데요. 편의점에서도 팔잖아요.”

“저건 살도 잘 안 찌는 체질이면서.”

“자기 전에 많이 먹으면 부담스럽잖아요.”

“한율이가 이래서 살이 잘 안 찌는 거 아닐까, 가람아?”

이건우가 한숨을 쉬며 냉장고로 향했다.

“난 냉동실에 있는 다이어트 도시락이나 먹으련다. 우리 다음 주에 화장품 광고 촬영 있잖아.”

“저도 그거 먹을래요.”

“그럼 저도.”

차남석과 한율이 이건우를 따라 냉장고 앞으로 향하자, 박가람이 충격받은 얼굴로 외쳤다.

“이런 자기관리 철저한 놈들 같으니!”

“뭐? 놈? 너 지금 22개월 먼저 태어난 형한테 놈이라고 했냐?”

“덤벼, 22개월 먼저 태어난 이건우!”

“그러면서 왜 내 뒤로 숨니, 가람아.”

“…어휴.”

다음 날, 공식 휴가 첫날인 11월 2일.

암막 커튼으로 외부 빛을 차단해 어둠에 잠긴 방. 곤히 자던 한율은 어느 순간 깨서 눈을 끔뻑거렸다.

“…….”

자느라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지개 켜곤, 무음으로 둔 핸드폰을 확인했다. 13시 14분. 14시간을 내리 잤다.

한율은 모르는 번호로 걸려왔던 전화, 사생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메시지를 모두 차단하고 삭제했다. 그러고 나서야 가족 단톡방이나 회사와 팀 단톡방, 지인들의 톡을 확인하고 답장했다.

포털사이트에 접속, 날씨와 주요 뉴스까지 훑고 나서 일어났을 땐 어느덧 2시. 일어나서 답답한 암막 커튼을 걷자 부슬비 내리는 정원이 보였다. 빗물이 들어올 정도는 아니라, 창을 활짝 열어 환기하곤 흐트러진 침구를 정리해 나왔다.

숙소는 고요했다.

누가 그러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멤버들은 따로 외출할 때마다 단톡방에다 알리는 습관이 있었다. 현재 유호와 길우성, 라이언은 어제 이야기한 대로 회사에, 이건우는 친구 만나러 외출, 차남석은 남양주의 집, 박가람과 강보배는 아직 자는 건지 조용했다.

오늘은 가사도우미가 오지 않는 날이라, 한율은 청소기로 자신의 방과 드레스룸, 거실까지 싹 청소했다.

“밥은 뭐 먹을까, 서한율아.”

툭툭. 전원 스위치를 끄고 먼지 통을 비우는데, 언제 나왔는지 박가람이 소파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전 나가서 먹을 건데요.”

“어디에서? 누구랑?”

한율은 청소기를 정리하며 다른 말을 했다.

“모처럼 쉬는 날이니까, 형은 차분히 명상하면서 시간 보내는 게 어때요? 나중을 위해서.”

박가람이 툴툴거렸다.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거든?”

방에 있는 욕실에서 씻고 외출 준비를 하고 다시 나왔을 때, 거실엔 여전히 박가람이 있었다. 그새 씻었는지 말끔해진 모습으로.

“차 가지고 나갈 거지? 나 센터까지 태워다 줘.”

명상 센터까진 걸어서 3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지만, 숙소 주변을 서성거리는 사생이 따라붙을지도 모른다.

“네.”

“그런데 넌 어디 갈 건데?”

“오늘 고재영이랑 시즈닝 극단 배우랑 만나서 공연장 계약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펜션이랑 별장에도 들렀다가, 집에 가서 달냥이 데리고 오려고요.”

“펜션? 그럼 나도 갈래. 해원이 형도 지금 거기에 있잖아.”

“명상으로 시간 보낸다면서요.”

박가람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어제까지 참 바쁘게 보내지 않았니? 그래서 서울 시내 드라이브도 하고, 양평의 맑은 공기도 쐬고 싶구나, 아우야. 돌아올 때는 너 피곤하지 않도록 내가 운전할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재영이 속한 연극 동아리와 시즈닝 극단이 합동 공연할 공연장은 대학로에 있었다. 공연 날짜는 12월 18일부터 27일.

공연업계에선 워낙 성수기 시즌이라, 어떻게 이렇게 좋은 날짜에 뒤늦게 대관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대부분은 최소 공연 석 달 전에 심사와 승인을 거치고 대관료를 선납해야 하므로.

그러나 고재영으로부터 사정을 듣자 바로 이해가 갔다. 원래 이 날짜를 포함해 공연하기로 한 극단이 있었는데, 해당 극단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공연이 전부 취소되었다고.

공연장의 유료 주차장. 그곳에서 기다리던 고재영은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떠들었다.

“그래도 처음엔 우리 연락에 많이 망설이더라? 그런데 서한율 네가 후원하는 자선 공연이라고 하니까 바로 OK 하더라. 고맙다, 친구야. 네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

“어.”

그들은 공연장 대표와 만나 인사를 나누곤 곧바로 계약서를 검토했다. 이미 이들이 할 공연에 대한 심사와 승인이 끝난 단계라, 고재영이 대표로 도장을 찍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대관료는 계약금 건너뛰고 바로 내일까지 완납을….”

띠링.

“보냈습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한율이 선뜻 말하자, 공연장 대표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팸플릿이나 포스터는 언제쯤 나올까요?”

고재영이 자랑하듯 말했다.

“늦어도 다음 주엔 완성될 것 같아요. 여기 이 친구가 좋은 스튜디오를 소개해줬거든요.”

“아이돌 화보 전문 스튜디오라, 어떻게 나올지는 장담 못 한다고 했다.”

사무실에서 준 유자차를 홀짝홀짝 마시던 박가람이 물었다.

“혹시 김 쌤 소개한 거야?”

“네. 자선 공연 포스터가 필요하다고, 좋은 곳 소개해줄 수 없냐고 하니까 왜 본인 놔두고 딴 곳 찾냐 하시더라고요. 저렴하게 해주겠다고.”

“크으.”

“그럼 나오면 저희 쪽에도 보내주세요. 홈페이지랑 인터넷 예매처에도 올려야 하거든요.”

“넵!”

계약이 마무리되어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대표가 한율과 박가람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우리 딸이 어스래빗 팬이라서요.”

두 사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연장을 나온 후엔 고재영, 시즈닝 극단 배우와 인사를 나눴다.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한율 씨.”

“아니에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시간 되면 보러 갈게.”

“어. 포스터 나오면 연락할게. 진짜 고맙다!”

아무리 시즈닝 극단과 함께한다곤 해도 아마추어 배우도 껴있는 공연이다. 그렇다 보니 티켓 값을 비싸게 책정할 수 없는 데다, 한꺼번에 미리 내야 하는 대관료도 가난한 배우들 처지로선 퍽 부담스럽다. 그래서 그런지 고재영과 시즈닝 극단 배우는 거리가 멀어져도 고맙다고 외쳤다.

“진짜 진짜 고맙다!”

“감사합니다!”

박가람이 환하게 웃으며 대신 생색냈다.

“다음에 봐요오!”

잠시 후, 경기도 양평.

펜션 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집 앞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이해원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랜만이야, 얘들아. 방송 3사 1위 축하해.”

얼마 전, VEL 엔터테인먼트의 시궁창 관계자들이 이해원에게 보복하고자 그의 집에 침입했다. 그 일로 이해원은 스타믹스 JE의 집에서 신세를 지다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우그룹 측이, 대피소를 짓도록 협박한 해커가 이해원도 도왔었단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아서 겸사겸사.

“흐. 이건 해외에서 사 온 선물.”

“고마워, 가람아. 배고프지?”

박가람이 한율을 가리키며 고자질했다.

“숙소에서 나올 때부터 간단히 뭐 좀 먹자고 했는데, 서한율이 계속 무시해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쫄쫄 굶었어. 벌써 오후 여섯 시가 다 되어가는데!”

“형 일어난 지 몇 시간 안 됐잖아요.”

“아. 그런가? 그런데 이 집, 예전 펜션 소유주가 살았던 곳이랬지?”

“네.”

박가람이 두리번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집은 푸릇한 잔디 마당이 깔린 2층짜리 단독주택으로, 마당에는 이전에 살았던 집주인이 설치한 어린이용 그네가 세워져 있었다. 커다란 개집이나 펜스도.

“아래 펜션 보니까 운영 잘 되는 것 같던데. 이 집까지 포함해서 인수 자금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안 좋은 사건,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서 그런지 급매로 싸게 나왔더라고요.”

멈칫. 이해원을 따라 현관으로 들어가려던 박가람이 한율을 돌아보았다.

“사건? 무슨 사건?”

“모르는 게 좋을 거예요.”

“…밑에 펜션 말고, 이 집에서?”

“모르는 게 좋을 거예요.”

“…….”

앵무새처럼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자 박가람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이해원이 박가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 이곳에서 지내면서 가위눌리거나 이상한 거 본 적 한 번도 없어, 가람아. 그러니 여기는 아닐 거야.”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데요, 형님. 그런데 이렇게 넓은 데서 혼자 지내는 거 안 무서워? 지도 보니까 다른 집도 수십 미터 간격으로 한 다섯 채? 정도만 있고 길도 산으로 막혀서 끝나던데.”

“응. 그래서 항상 방범에 신경 쓰고 있어.”

“어, 그래…. 오, 맛있는 냄새 난다.”

식탁에는 이해원이 마트에서 사 온 반찬과 그가 끓인 찌개, 그리고 전기 그릴과 돼지고기가 준비되어있었다.

그들은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집을 둘러보았다. 이해원과 계나리가 창고에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물품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사면 의심받지 않아?”

“인터넷으로 주문할 땐 받는 장소를 여기저기 분산하고, 직접 많이 돌아다녔어. 그래도 여기를 가득 채워야 하나 걱정했는데, 나리 씨가 그러더라. 재앙이 찾아오면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지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인프라는 돌아가게 되어있다고. 그리고….”

이해원이 머뭇거렸다. 한율이 대신 박가람에게 말했다.

“우리는 인류에게 도움 되는 능력자로 치부될 테니, 최소한 굶어 죽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

그런 식으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박가람이 입을 벌리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율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오늘부터 두 사람은 체내 마나가 아닌, 외부 마나를 인지하고 그걸 정제해 마력으로 만드는 수련에 들어갑니다.”

“…서한율. 너 솔직히 말해.”

멍하니 있던 박가람이 주춤거리며 큰소리로 물었다.

“네가 마법 학교 교장이지?!”

한율은 시치미를 뚝 뗐다.

“아닌데요.”

난 원래 제자한테 친절해

어스래빗 단톡방.

본가에서 키우는 삽살개, ‘찹쌀떡’을 프사로 해놓은 박가람의 톡이 올라왔다.

-[나랑 서한율 오늘 외박함.]

이어서 기본 프사 서한율.

-[누가 내 방 창문 좀 닫아주세요.]

숙소. 강보배와 TV를 보던 길우성이 올라온 톡을 보곤 호들갑을 떨었다.

“뭐어? 외에바악?!”

마찬가지로 단톡방을 확인한 강보배는 서한율의 방으로 들어가 창을 닫아서 잠갔다.

[ㅇㅇ잠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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