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결코 무서워서 후퇴하는 게 아니다. 혼자 1층에서 뭐 할 건데.’
서한율 이 자식, 창문 블라인드라도 쳐주고 갈 것이지.
박가람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이해원의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둔 채 게임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딩동. …딩동.
“……?!”
깜짝. 집안에 울리는 커다란 초인종 소리에,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던 박가람은 놀라 어깨를 떨었다. 이해원도 그제야 눈을 떴다.
“……?”
박가람은 핸드폰을 내려놓곤 이해원을 바라보았다. 이해원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박가람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지금 몇 시야?”
“10시 넘었는데…. 어? 서한율 열쇠 없었나…?”
“한율이가 나갔어? 언제?”
“20분 전쯤에. 잠깐만.”
박가람은 서한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형.]
“야, 너 지금 어디야?”
-[저 지금 마트요. 이제 계산하고 갈 거예요.]
쏴아아. 조금 전보다 더 커진 빗소리. 다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딩동. …딩동, 딩동.
좀처럼 응답하지 않아 화가 난 것처럼 연달아서.
박가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럼 지금 초인종 누르는 사람은 누군데?!”
우웅.
이해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핸드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너 지금 집에 없어?]
스타믹스 JE였다.
-[있으면 빨리 문 열어, 추워 죽겠다! 하필 다 와서 히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
잔뜩 겁에 질려서 외쳤던 박가람의 얼굴이 멍해졌다. 서한율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일단 침착하고, 인터폰으로 누군지 확인해봐요.]
“어…. 아냐, 손지은이였어. 음…. 조금 전 내 꼴사나웠던 목소린 잊어줘. 치킨 식지 않게 빨리, 조심히 와.”
어디를 박살 낼까
“왜 예고도 없이, 그것도 비바람 치는 날 밤에 불쑥 찾아와서 사람을 놀라게 하냐고.”
조금 전까지 적막했던 집이 소란스러워졌다. 비바람이 치는 어둑한 정원은 블라인드로 가리고, TV에선 음악 프로그램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식탁에는 치킨과 차가운 캔맥주, 과자와 과일이 널렸다. 공기는 보일러를 틀어놓아 훈훈했다.
“두 시간 전부터 얘한테 전화하고 톡 남겼거든? 그런데 아무런 대답이 없어서, 혹시 무슨 일 생겼나 직접 와 본 거지.”
“구동이도 데리고요?”
“어. 여기에서 자고 아침에 근처 산책시키려고.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치기 시작하더니 히터까지 고장 나서 꺼지는 거야.”
JE가 한숨을 쉬며 맥주를 마셨다. 구동은 푹신한 방석을 깐 소파에 누워 자는 중이었다.
“여기 자주 왔었어요?”
“일주일에 한두 번? 휴식기라 한가하기도 하고, 구동이가 인터넷에서 파는 수액보다 직접 나무에 매달려 마시는 걸 좋아하거든. 여기가 사람도 별로 없고, 눈에도 잘 안 띄잖아.”
“그래도 한 번 눈에 띄면 잘 안 잊힐 것 같은데. 그나저나 스타믹스, 휴식기가 너무 긴 거 아냐? 컴백 준비 안 해?”
“우리 연차 정도 되면, 개인 활동이 늘어나고 앨범 발매 간격이 길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할 수 있는 콘셉트 폭도 좁아지고, 이미지 소모 속도도 조절해야 하니까.”
박가람의 눈썹 끝이 쳐졌다.
“왠지 슬프다. 우리 직업의 수명을 산 증인에게 적나라하게 듣는 느낌이야.”
“산 증인이라고 하니까 내가 엄청 나이 든 것 같잖아. 나 너희 팀 리더랑 동갑이거든? 그런데 너희도 놀러 온 거야?”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원이 형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보고, 마력 쌓는 수련도 할 겸해서요.”
“난 그거 언제 배워?”
“선배님은 몇 달 더 지나면요. 원래는 체내 마나 유동을 최소 1년 정도하고 나서 마력 쌓는 단계로 넘어가는 게 좋다더라고요. 지금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속성으로 진행하는 거고.”
박가람이 한율을 힐끗 보곤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교장이 우리를 조금 더 빨리 영입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자를 들여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최근에야 하게 돼서 그럴 거예요.”
“왜? 이유가 뭐래?”
“글쎄요.”
한율은 방울토마토의 꼭지를 뚝 따면서 대답했다.
“좀 부정적이었나 보죠.”
“…….”
JE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한율이 교장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썩 긍정적인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술 너무 많이 마시진 말아요. 내일 아침에 수련할 때 방해되니까. 전 먼저 씻고 잘게요.”
한율은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잘 자랑.”
“잘 자, 한율아.”
“네.”
쫑긋. 한율이 계단으로 향하자, 자고 있던 구동이 벌떡 일어나 따라왔다. 한율은 깡충깡충 계단을 오르는 구동을 품에 안고 2층으로 향했다.
한율의 인기척이 멀어지자 박가람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녀석이 교장 같은데….”
“그래?”
“응.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니까 점점 확신으로 촉이 기울여져. 형들은 안 그래?”
이해원은 살며시 입가를 올린 채 대답했다.
“만약에 한율이가 교장이면, 감추는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을까?”
“동감.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서한율이잖아. 입 다물고 숨기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아니면 뭐 아닌 거고.”
박가람이 감탄한 얼굴로 이해원과 JE를 번갈아 보았다.
“이런 이해심 많은 대인배들 같으니.”
“그런데 호는 수련 제대로 해?”
“몰라. 워낙 할 일이 많아 바쁜 형이라. …하아.”
박가람이 닭다리를 집으려다가 한숨을 쉬며 내려놓았다.
“웬 한숨이야.”
“사실은… 이번 활동 끝나면 결정하기로 했거든. ‘그날’이 다가올 때까지 이대로 아이돌 일을 계속할지, 아니면 그만두고 수련에 집중할지.”
박가람은 마음속 고민을 천천히 털어놓았다.
“머리론 미래를 위해 조금이라도 수련에 집중하고 힘을 기르는 게 좋을 거란 걸 아는데… 마음이 안 따라. 지금이 아니면 영영, 다신 아이돌을 못 하니까 끝까지 하고 싶다는 서한율의 말에도 흔들리고. 그만두면 또… 숙소에서도 나와야 하잖아. 난 지금 멤버들이랑 같이 지내는 게 너무 좋거든.”
“그럼 계속해.”
“어?”
JE가 박가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조만간 다시 미스터리 홀이 나타날 거잖아. 그럼 세상은 본격적으로 재앙에 대비하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우리 일 또한 강제로 멈추게 될 가능성이 크고.”
“…….”
“진짜 재앙은 내년 여름에 찾아오지만, 당장 겨울부터 엔터 업계는 물론, 우리의 일상이 멈출 수도 있단 소리야. 고작 몇 달…. 그래, 몇 달간의 수련도 나중에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겠지. 그런데 지금처럼 행복하고 편안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그럼 형도 서한율이랑 같은 생각이야?”
“어. 솔직히, 몇 달 더 수련에 매진한다고 엄청나게 강해질 것 같지도 않고.”
JE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확실히 묻진 않았지만, 호도 비슷한 생각일걸? 걔 지금도 열심히 곡 작업하는 거 봐.”
박가람이 실없이 웃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을 법한 사람들만 모였네.”
“그렇다고 재앙을 아예 대비하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기는 하지. 음.”
툭툭. 이해원이 캔맥주를 두드렸다.
“그럼 우리 이것만 마시고 그만 자자. 내일 수련에 지장 생기면 안 되잖아.”
“좋아.”
“짠.”
세 사람은 각자 캔맥주를 들어 가볍게 부딪쳤다.
“…크으. 치킨은 마저 먹어도 되겠지?”
“괜찮지 않을까?”
다음 날 아침. 박가람이 한율을 찾아왔다.
“나 집에 간다.”
“……?”
막 깨어난 한율은 눈을 잔뜩 찡그린 채 박가람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찾았다. 7시 20분.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강릉에요?”
“응. 해원이 형이 양평역까지 태워다주기로 했어. 거기에서 KTX 타고 갈 거야.”
박가람이 베개 옆에 웅크린 구동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집에 가서, 엄마랑 아빠가 해준 밥 먹으려고.”
어제 JE, 이해원과 술을 마시면서 고민 혹은 생각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표정이 산뜻했다.
한율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조심히 갔다 와요.”
“응. 나중에 숙소에서 보자.”
“네.”
박가람이 문을 닫으며 나갔다. 풀썩. 한율은 도로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9시 즈음, 다시 눈을 뜨곤 일어나서 씻었다. 아직 이해원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라, JE와 함께 구동을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
비가 그친 맑은 날씨. 그들은 진한 숲 내음을 맡으며 계곡 쪽으로 느긋하게 걸었다. 구동은 활발하게 이 나무, 저 나무를 타며 수액을 조금씩 마셨다.
“이 녀석은 여기에만 오면 이러더라. 편식하는 건가?”
“당장 배고프진 않으니, 시식 코너에 온 것처럼 이것저것 맛보는 것 같아요.”
사아아. 바람이 불자 나뭇잎에서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툭툭. JE가 제 머리로 떨어진 물기를 털어냈다.
“서울 모의 훈련, 12월로 미루기로 했다며?”
“네. 어디를 박살 내는 게 좋을까요?”
“범죄 조직이 있는 곳? 아니면 신도 등골 빼먹고 사기 치는 사이비 종교 시설?”
“늘 사람이 있는 곳 말고요. 아니, 범죄자들이라 상관없나?”
“그냥 해본 말이야,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 피해자도 있을 수 있잖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서울에 은근히 폐건물이 많더라고요. 그중에서 하나 고르려고요.”
“그럴 거면 왜 물어봤냐.”
“다른 좋은 의견이 있을까 해서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JE가 대답했다.
“극악무도한 놈들만 모인 교도소?”
“교도관도 다치잖아요. 혼란을 틈타 탈출할 수도 있고.”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땐 이해원이 아침 겸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식당에서 포장해왔어. 맛은 괜찮을 거야.”
“감사합니다.”
밥을 먹은 후 한율은 이해원의 마나 유동을 두 시간 정도 봐준 뒤, 혼자 차에 올랐다. JE는 이곳에서 하룻밤 더 묵고 가기로 했다.
“그럼 다음에 또 봐, 한율아.”
“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나중에 시간 나면 보자.”
“네.”
끼웅. 한율은 JE의 품에 안긴 구동의 머리를 쓰다듬고선 차창을 올렸다.
한율은 곧장 서울이 아닌, 다른 경기도 지역에 있는 별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숙소에서부터 싣고 온 물건을 안으로 옮겼다. 모두 팬들이 선물로 준 인형이었다.
‘이 방은 완전히….’
데뷔 때부터 팬 이벤트나 콘서트 때 외엔 선물을 잘 받지 않았는데도, 벌써 방 하나가 인형으로 채워질 판이었다.
한율은 일단 공기 청정기부터 켰다. 책장과 창가 앞, 테이블, 침대, 의자와 테이블은 이미 빼곡하게 가득 차, 하는 수 없이 방바닥에다 옹기종기 앉혀놓았다.
냉정히 말하면 모두 쓸모없는 물건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쓸 데가 있을 것이다.
충동적으로 구한 어린아이나, 부모를 잃고 우는 아이에게 안겨줄 순 있겠지.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