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귄다고 했으면 미랑이 누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상상만으로도 걱정이 태산처럼 쌓인다고.”
“…무슨 촬영 중에 찍힌 거래?”
묵묵히 핸드폰 게임을 하던 차남석이 물었다. 길우성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달리는 예능>.”
“미션하면서 같이 다닐 때 찍혔나 보네.”
“그런가 봐. 라욘 형은 알고 있었지?”
요가 매트를 가지고 오던 라이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최초 열애설 기사 났을 때 안 물어봤어?”
“응.”
“왜?”
라이언이 요가 매트를 펼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둘이 사귈 리가 없으니까.”
확신에 찬 말투. 그러나 멤버들은 다른 뭔가 아는 게 있냐며 묻지 않았다.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괴담> 방송이 시작되었다.
TV 속 강보배가 재연 영상과 더불어 사연을 읽어주고, 직접 괴담 속 현장을 찾아가는 영상이 흘러나왔다. MC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저 현장에 갔을 때, 큰일 날 뻔하기도 하고 신기한 일도 겪으셨다면서요?]
[네. 영상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2층을 살피려고 계단을 딱 밟는 순간에 갑자기 위에서 쾅, 문 닫히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강보배의 얼굴이 단독으로 잡혔다.
[처음엔 ‘바람 소린가?’ 의아했는데, 창밖에 있는 나무는 미동도 안 하는 거예요. 바람 때문에 문이 닫힌 게 아니란 소리였죠.]
“어우, 뭐야아.”
소름이 돋는지, 길우성이 소파 위로 두 다리를 올리곤 감싸 안았다. 한율은 이미 조유찬으로부터 사정을 들은 터라, 조용히 TV만 보았다.
별안간 2층에서 나타난 노숙자가 PD에게 깨진 술병을 휘두르고, PD와 강보배, 조유찬이 함께 계단 아래로 쓰러졌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감싸준 것처럼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이야기.
당시 상황을 담은 영상이 짧게 흘러나왔다.
헉. 멤버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저, 저 나쁜 놈…!”
“유찬이 형은 완전히 깔렸었는데? 진짜 다친 곳 없었어?”
“저 날 유찬이 형 멀쩡하게 돌아왔잖아. 보배 형도 아무렇지 않게 생방 무대 뛰었고.”
강보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PD님도 그렇고 유찬이 형도 그렇고, 다 괜찮았어. 나는 유찬이 형 덕분인 줄 알았는데, 유찬이 형도 뭔가가 안전하게 감싸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더라. 스튜디오 녹화 가서 PD님한테 물어보니까 PD님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했고.”
“되게 신기하다. 유찬이 형 곧 장가가니까 형네 조상님이 도와주신 건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박가람이 한율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끔뻑거렸다. 한율은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 후. <괴담>이 끝난 뒤 방으로 들어가는데, 박가람이 따라 들어오더니 문을 닫고선 조용히 물었다.
“아까 폐가에서 보배가 겪은 이야기, 보호 마법이 발동됐었던 거 맞지?”
“네. 보배 형이랑 붙어서 두 사람도 덩달아 보호받은 것 같네요.”
“…….”
“왜 그렇게 봐요, 형?”
가만히 한율을 바라보던 박가람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슥 미소 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계단 아래로 쓰러졌던 사람들의 ‘무언가가 보호해주는 것 같았다’라는 경험담은, <괴담> 프로그램 특성상 과장이 섞인 이야기로 치부되었다. 시청자들은 다른 데에 더 관심을 두었다.
-버려진 폐가 같아도 다 주인이 있습니다. 함부로 들어가지 마세요.
-계단에 있는 사람한테 깨진 술병 휘두르는 건 살인미수 아닌가?
-어스래빗 매니저님 이 와중에 애 다칠까 봐 달려와서 받쳐주는 거 감동ㅠㅠ
ㄴ극한 직업
-차분하게 이야기 들려주는 톤이나 딕션, 목소리까지 좋아서 몰입이 더 잘 됐어요.
-지난주 나온 아이돌보다 말하는 게 훨씬 안정적이라 좋았다. 다음에 섭외할 때도 출연자 리딩 테스트해 보고 섭외하길
6일 금요일 아침. 한율은 3층 러닝머신에서 가볍게 뛰고자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2층에 있는 길우성과 유호의 방문이 활짝 열린 것을 보았다.
“뭐하냐?”
방안을 들여다보자 길우성이 옷장을 활짝 열어둔 채 고민하고 있었다. 유호는 회사에 가고 없었다.
“요즘 부쩍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고, 사진에도 찍히잖아. 그래서 뭘 입고 갈지, 어떤 옷을 챙겨갈지 고민 중이다.”
“오늘 제주 내려가려고?”
“엉. 누나 수업 끝나면 같이 가기로 했어. 그런데 넌 학교 안 가냐? 어째 휴가 기간인데도 학교 가는 꼴을 못 봤다?”
한율은 말을 돌렸다.
“얼마 전에 받은 화장품은 안 챙기냐?”
“아, 맞다. 모델 계약했으니까, 평소에도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거 맞지?”
“아니. 그런데 무심코 다른 화장품 사용하는 게 드러나면 의리 없다는 말을 듣거나, 재계약은 일찌감치 물 건너갈 수 있으니까 주의는 해야지.”
“엉.”
한율은 길우성이 짐 챙기는 걸 잠시 구경하다가 3층으로 향했다. 3층에는 이건우가 스미스머신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 중이었다.
“…후우! 달냥이랑 운동하러 왔어?”
한율을 따라다니던 달냥이 운동기구 옆에 설치한 캣휠에 올라갔다. 그러곤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네. 30분 정도만 가볍게 뛰려고요.”
우웅.
“……?”
러닝머신에 올라가려던 찰나, 계나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통화를 하기 전엔 톡으로 미리 양해를 구했었기 때문에,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옥상으로 나갔다.
“어. 무슨 일이야?”
-[갑자기 전화해서 죄송해요, 오빠. 그런데 너무 큰일이라….]
대체 무슨 일인지, 퍽 경황이 없어 보인다.
“일단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해원 씨가….]
후우. 계나리가 한 차례 심호흡하곤 힘없이 말했다.
-[저 때문에 이우그룹 사람들한테 납치된 것 같아요….]
이딴 것도 상사라고
정원그룹과 이우그룹을 협박해 대규모 방공시설을 짓게 한 해커. 그 해커는 이우그룹 회장의 손녀, 이채현이 더는 이해원을 찾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우그룹으로선 해커와 이해원의 관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 그러나 이해원을 추궁하지 않은 건 당시 그의 폭로로 세간의 이목이 쏠린 것도 있지만, 이채현이 그를 가만히 두라고 당부한 까닭이었다. 이우그룹 회장도 그러라고 지시했고.
이채현의 저의는 몰라도, 회장은 해커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우그룹 회장의 장남, 그러니까 이채현의 큰아버지이자 부회장이 새롭게 지시를 내렸더라고요. 방공시설을 짓도록 협박한 해커를…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찾아내라고.]
“미스터리 홀 때문이겠지.”
-[네. 하….]
계나리가 속상한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이우그룹 회장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실질적인 힘이 부회장에게 기울여지고, 또 그 부회장이 이채현의 지시를 쉽게 뒤집을 수 있단 걸 미처 캐치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해원 씨가 납치당한 건 다 제 불찰이에요….]
“네가 자책할 일이 아니야.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아니에요. 제가 해원 씨를 도울 때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도록 조금 더 신경 써야 했는데….]
“그만. 전부 내 지시였잖아.”
-[…….]
주위를 크게 둘러보는 한율의 눈이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이해원에게 새긴 위치 추적마법이 감지되지 않았다. 일정 반경 안에는 없다는 뜻.
대신, 난간에 앉아 한가롭게 깃을 다듬는 까마귀가 보였다.
“그럼 이제 납치 상황에 관해 설명해봐.”
* * *
이우그룹이 해커의 단서를 얻고자 이해원을 찾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거처를 양평으로 옮길 때 추적당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
핸드폰은 새로운 타인 명의의 것으로 바꾸고 가족에겐 번호를 알리지 않도록 했다. 그쪽을 통해 유출될 가능성이 있는 까닭이었다. 통화는 위치 추적이 힘들도록 특정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외출할 때는 본인도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음악방송 MC를 하고 CF, 드라마도 찍었던데다 키도 훤칠하게 크고 굉장히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한때 VEL 엔터와 스폰 이슈로 기사에 오르내리기도 했고.
“그런데 키랑 목소리만으로 알아본 사람이 있었단 거지? 그 사람이 SNS에 ‘나 양평 어느 마트에서 이해원 본 것 같다!’ 이 한마디 적은 것 때문에 이우그룹 놈들이 그 마트 일대에 잠복했던 거고?”
양평으로 가는 길. 상황을 들은 박가람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머리를 긁적였다.
“존잘은 아무리 꽁꽁 싸매도 그 포스를 감출 수가 없다더니.”
“정말 이런 상황에 할 말이 아니네요.”
“미안.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서 해원이 형, 아니, 나리 씨를 찾으려는 이유가 뭘까?”
“대기업이 무슨 이유로 그러겠어요. 미스터리 홀로 인해 앞으로 보게 될 막대한 손실, 혹은 그 반대를 계산한 거겠죠.”
음. 박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 거리 안에 있으면 해원이 형 위치를 알 수 있는 거지?”
한율은 양평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보곤 살며시 눈을 감았다.
“네. 잠깐 집중 좀 할게요.”
“응.”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운전하던 박가람은, 신호에 걸려서 차를 세울 때마다 한율을 조심스레 살폈다. 한율이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나에 관해 설명했을 때나, 마나 유동을 도와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짙어. 그리고 정갈하게 잘 벼려진 느낌이야.’
그리고 한율이 교장이란 확신이 섰다.
마력을 쌓는 단계로 넘어가 보니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어릴 적부터 마나를 느끼고 다뤘다곤 해도, 마나를 정제해 마력으로 만드는 건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스스로 터득하는 게 힘들다는 걸.
‘정말 우리처럼 단순히 제자라면 기껏 몇 달 먼저 배웠을 뿐인데, 이렇게 마력을 구심점 삼아서 마나를 다룬다고? 말이 안 돼.’
서한율 너 대체 정체가 뭐냐.
묻고 싶은 게 산더미만큼 쌓여서 입을 근질거리게 한다. 그러나 박가람은 꾹 참았다.
‘형들 말처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감추는 거겠지. 그리고 지금은 해원이 형의 안위가 우선이야.’
우웅.
“네, 나리 씨.”
전화를 받은 박가람은 스피커를 눌렀다. 계나리의 목소리가 크게 흘러나왔다.
-[해원 씨를 납치한 차량이 사고가 났는데, 현장에 해원 씨가 없는 걸로 봐선 아이템을 사용해 자력으로 탈출한 것 같아요. 핸드폰은 여전히 꺼진 상태고요.]
눈을 뜬 한율은 계나리에게 물었다.
“사고 위치는?”
-[지금 보냈어요.]
우웅.
한율은 내비게이션에 계나리가 보낸 주소를 입력했다.
“얼마 안 남았어.”
한편 그 시각, 이해원은 전원이 켜지지 않는 핸드폰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사람들… 많이 다치진 않았겠지?’
한 시간 전쯤이었다. 이해원은 유리세정제를 사기 위해 마트를 찾았다.
펜션 이용객이 자주 드나드는 지역이라도 자주 나타나면 눈에 익게 되기 마련이라, 그는 매번 다른 가게를 갔다. 그리고 한꺼번에 많이 샀다. 외출 횟수를 줄이기 위해.
언덕 위 집으로 돌아갈 땐 미행에 대비해 다른 곳을 돌아다니다가 들어가는 게 습관. 오늘도 장을 본 물건을 트렁크에 싣고 다른 길로 달리는데, 웬 차량 두 대가 거리를 두고 쫓아오는 게 보였다. 두 차량 모두 흔한 모델과 색상이었지만, 달리면서 번호판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이해원은 일부러 읍내 골목을 누비면서 블랙박스 메모리를 제거했다. 그리고 계나리에게 연락을 취하던 그 순간이었다.
『……!』
골목에서 나오는 사람을 뒤늦게 발견한 그는 핸들을 꺾었다. 쾅. 차는 전봇대를 들이받고 멈췄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
다행히 보호 마법이 새겨진 피어싱 덕분에 다치진 않았지만, 올해 초 죽음에 이를 뻔했던 교통사고, 당시의 공포가 떠올라 이해원은 잠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두 차량이 이해원의 차를 포위했다.
차에서 내린 괴한들은 도구를 사용해 강제로 문을 열곤 이해원을 끄집어내 자신들의 차에 강제로 태웠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이템에 새겨진 마법을 사용할 순 없었다. 그래서 기회를 엿보다 선량한 시민들이 휘말리지 않을 법한 곳, 속도를 줄이는 커브에 접어들었을 때 공격 마법이 새겨진 팔찌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파지직. 팔찌에 새겨진 공격 마법은 상상보다 강력했다. 이해원을 제외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모두 기절, 차는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전복되었다.
이해원은 놀라 다가오는 다른 차량의 괴한들에게도 공격 마법을 먹여준 뒤, 그들의 핸드폰으로 교통사고 신고를 하고 차를 탈취해 도망쳤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잠시 차를 세웠다.
‘마법 아이템들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끌려갈 뻔했어.’
휙. 이해원은 괴한들의 차량에서 빼낸 블랙박스 메모리는 강에, 그들의 핸드폰은 대충 길가 수풀에 버렸다.
‘내 뒤를 집요하게 밟은 걸 보면, 내가 어디에서 지내는지 아직 파악 못 했을 가능성이 커. 어쨌든 나리 씨에게 연락해야 하는데.’
통화 도중 사고 소리, 납치당하는 소란을 들었으니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잘못 떨어졌는지, 액정이 박살 난 핸드폰은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어쩌지? 이대로 서울로 갈까?’
까악.
“……?”
까마귀 울음소리?
이해원은 무심코 하늘을 살폈다. 웬 까마귀 대여섯 마리가 힘차게 날아오더니, 이해원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
까악, 까악.
잠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