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봐요, 이해원 씨! 왜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어!”
와락. 이해원을 보자마자 화를 버럭 낸 박가람이 그를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토닥.
“무사해서 다행이다, 진짜. 다친 데는 없어?”
“응, 괜찮아.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형이 미안할 게 뭐 있어. 느닷없이 나타난 납치범들이 나쁜 놈들이지.”
까악. 근처 나무에 앉은 까마귀가 울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나는 계속 까마귀가 따라오면서 진로를 방해하길래 차를 세운 거지만….”
“서한율이 형 있는 위치를 딱 집어내더라. 근처로 가면 까마귀가 길을 안내해줄 테니 형이랑 합류하라고. 나도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진짜로 쟤….”
까마귀를 가리키려던 박가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녀석이었지? 다 똑같이 생겨서 모르겠네. 아무튼 까마귀 따라왔어.”
“그럼 한율이는?”
“뒤처리한다고 택시 타고 갔어. 아무튼 이동하자. 그놈들이 차에다 GPS를 설치했을지도 모르잖아.”
이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한율은 이해원의 차가 방치된 장소에 도착했다.
“정말이라니까요? 웬 시커먼 남자들이 쇠 파이프 같은 걸로 차 문을 뜯어내더니, 운전석에 있던 청년을 자기네 차에 막무가내로 집어넣고 가더라니까?”
“사채업자들인가?”
“사채업자라도 사고 난 사람을 그딴 식으로 끌고 가요?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곳엔 인근 주민들이 너도나도 흥분한 채 떠들고 있었다. 경찰들은 심각한 얼굴로 경청하며 차 안을 살폈다. 사고 충격으로 열린 트렁크도. 트렁크엔 청소용 세제와 반찬거리 등이 마트 봉투에 담겨 있었다.
우웅. 박가람으로부터 전화.
“네, 형. 만났어요?”
-[한율아, 나야.]
“해원이 형?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고?”
-[응, 아이템 덕분에 멀쩡해. 그런데 정말 네 별장으로 가도 괜찮은 거야? 만약에 그 사람들이 내가 지내던 집을 알고 있다면….]
펜션 부지를 포함해 언덕 위 집 모두 한율의 소유였다. 그러니 이해원이 또 다른 한율의 집으로 이동했을 거로 생각하고, 이번엔 그쪽으로 쳐들어갈지도.
“괜찮으니까 일단 거기에서 쉬고 있어요. 전 여기 상황 좀 살피고 갈게요.”
-[응. 미….]
“형이 이우그룹 표적이 된 건 다 제 불찰 때문이니까 사과하지 마세요.”
-[어?]
“별장 2층 안쪽에 인형의 방이 있어요. 그 바로 옆방에 있다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요.”
-[그래, 알았어. 한율이 너도 조심해.]
“네.”
한율은 계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놈들 어느 병원으로 갔어?”
* * *
“그러니까….”
이우그룹 회장의 장손, 이채환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차가 전복될 정도로 큰 사고가 일어났는데, 다른 차에 있던 놈들까지 집단 감전된 것처럼 쓰러지고, 이해원 그 녀석만 멀쩡히 남은 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거잖아. 그렇지? 친절하게 교통사고 신고까지 해주고?”
부하직원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크으.”
이채환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어릴 적 좋아했던 만화 캐릭터가 떠올랐다.
“인간 피○츄?”
“네?”
“생각해봐. 아무리 이해원이 전기충격기를 감추고 있었어도 그놈들이 몇 명인데, 전부 가만히 서서 당했겠어? 이거 진짜 뭐 있다. 뭐가 있어도 단단히 있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부하직원은 생각이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을 관리했지만, 이채환의 눈에 딱 걸렸다.
“아니, 아저씨. 뉴욕이랑 상하이, 태국 에라완에 나타난 미스터리 홀 영상 안 봤어? 그 안에서 막 나오려고 몸부림치던 거대 몬스터들 안 봤냐고. 그리고 그 빌어먹을 해커가 우리한테 방공시설을 지으라고 한 거 생각해봐!”
부회장인 아버지가 시킨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크게 혼날 판인데, 이채환은 신난 얼굴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해원은 바로 영화 속 초능력자 같은 존재인 거야! 그래서 미스터리 홀을 예측한 해커가 이해원을 도운 거라고! 이제 평범하고 시시한 지구는 끝이다!”
“…….”
부하직원은 이번에야말로 표정 관리에 힘썼다.
약이랑 술 좀 적당히 처먹지, 진짜. 이딴 것도 상사라고.
10년 후에도 솔로일 것이다
“응? 써한 어디 갔어?”
어스래빗 숙소. 캐리어와 가방을 들고 1층으로 내려온 길우성은 두리번거렸다. 서한율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고, 달냥은 캣타워 꼭대기에 무료하게 늘어져 있었다.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던 이건우가 대답했다.
“한율이? 한참 전에 전화 받고 급히 나갔어. 가람이랑 같이.”
“가람이 형이랑? 누구 전화였는데?”
이건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모르지.”
길우성은 어스래빗 단톡방을 살폈다. 외출할 때마다 어디를 가는지, 언제쯤 돌아오는지 반드시 알려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만, 그래도 다들 멤버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알리고 다니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둘 다 잠잠했다.
‘대체 무슨 급한 일이기에. 그것도 또 가람이 형이랑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길우성을 향해 이건우가 살며시 웃었다.
“우성이 너만 두고 가서 섭섭해?”
“아니, 뭐. 애도 아닌데 섭섭할 리가. 그리고 나 오늘 제주도 내려가잖아. 나도 바쁜 사람이거든?”
“누나랑은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어?”
“응. 현우 형이 나랑 곰순이 둘 다 공항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했어. 커플 사이에 끼는 거 상상만으로도 싫다.”
“그럼 뭐 타고 가? 택시?”
길우성은 고개를 흔들곤 신발을 꺼냈다.
“A팀 매니저분이 태워다주기로 했어.”
어스래빗을 담당하는 매니지 B팀 또한 현재 공식 휴가 중이었다.
“그래, 조심히 잘 다녀와.”
“엉. 달냥아, 오빠 갔다 올게.”
달냥이 아래로 늘어뜨린 꼬리 끝을 까딱거렸다.
므앙.
길우성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우리 달냥인 참 대답도 잘해.”
우웅. 숙소 앞에 도착했다는 B팀 매니저의 전화.
이건우는 대문 앞까지 나가 길우성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대신 실어주었다. 오늘도 하릴없이 숙소 앞을 서성거리던 사생 몇 명이 이게 웬 떡이냐는 얼굴로 영상 혹은 사진을 찍었다.
“대박.”
“우성아, 어디 가?”
친한 척 말까지 건다.
“도착하면 톡해.”
“엉, 들어가.”
타악. 차가 떠나는 것과 동시에 이건우는 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막 자다 일어난 차남석이 고양이 낚싯대 장난감을 집어 들고 있었다.
“길우성 갔어요?”
“어, A팀 매니저분 차 타고. 남석이 넌 오늘 뭐 할 거야?”
“오늘은 그냥 늘어져 있으려고요.”
강보배도 어슬렁어슬렁 방에서 나왔다. 졸린 눈을 끔뻑거리면서 하는 말.
“오늘 나랑 같이 공포영화 보러 갈 사람. 원래 가람이 형이랑 보러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바쁜 일 생겨서 힘들 것 같대.”
“박다람이, 공포영화 보기 싫어져서 도망간 거 아냐?”
“설마.”
* * *
한율이 별장에 도착한 건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 즈음이었다. 오면서 사 온 음식을 식탁에다 세팅하면서 박가람과 이해원에게 말했다.
“오늘 해원이 형을 납치하려 한 사람들은, 이우그룹 전략기획실 직원의 사주를 받은 심부름센터 직원들이었어요. 말만 심부름센터지, 실상은 깡패들인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양평에 있는 펜션과 집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걸 본인들 입으로 술술 털어놓았을 리는 없고. 어떻게 안 거야?”
한율은 박가람에게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박가람은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아’ 하며 별장 대문과 현관문 열쇠를 돌려주었다.
“혹시 몰라 양평 집에도 들러봤는데 별 이상 없었어요. CCTV에 찍힌 수상한 사람이나 차량도 없었고.”
“질문이 무시당했습니당.”
“어쨌든 형이 납치되는 걸 본 목격자들이 많으니, 내일 경찰서 가서 피해자 진술을 하면 될 것 같아요. 견인된 차도 찾아야 하고.”
“괜찮을까? 이우그룹이 또 사람들 시켜서 해원이 형 해코지하면 어떡해?”
“그 문제는 학교가 알아서 할 거예요.”
“…….”
한율을 바라보는 박가람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네가 스스로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을 뿐, 딱 이런 표정이었다.
이해원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고마워, 한율아. 너한텐 항상 신세만 지네.”
“나중에 다 갚을 기회가 올 거예요.”
“응. 꼭 갚을게.”
그날 밤. 이해원은 새 냄새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은 미행을 인지했을 때부터 벌어진 일들이 정말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제대로 실감 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한율이 오고, 앞으로 처리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진정되었다.
오늘 있었던 일도 차분히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생생하게 떠오르는 건, 납치범들에게 공격 마법을 발동시켰던 순간.
‘굉장히… 든든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이었어.’
팔찌에 새겨진 마법은 아이템 착용자가 아닌, 마나를 불어넣은 자를 보호하고 그 외의 것을 모조리 공격하는 마법이었다.
착용자를 비롯해 가까이 있던 사람까지 보호하는 보호 마법과는 전혀 달랐다. 밀착한 적을 물리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이는 다른 사람이 팔찌를 착용해도, 거기에 마나를 불어넣기만 하면 팔찌를 찬 사람까지 당한다는 뜻.
하물며 위력도 강했다. 건장한 젊은 남성들이 외마디 비명만 꽥 지르고 바로 정신을 잃었으니.
‘그래서 이 팔찌를 처음 건넸을 때, 정말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되도록 쓰지 말라고 당부한 거였어.’
이해원은 손목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흔한 염주 팔찌처럼 생겼으나, 꿰인 구슬 중 하나는 은은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공격 마법을 연달아 사용하기 전엔 지금보다 더 짙었다.
후우. 이해원은 천천히 한숨을 내쉰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람이 들어오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 바닥에 앉았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수련을 하자. 그래야 나중에 한율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이해원은 살며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한편, 박가람은 서한율이 간식으로 사 온 과자를 먹으면서 별장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기 진짜 조용하네.’
양평의 집은 언덕 아래 펜션에서 바비큐 냄새가 올라오거나, 사람들의 목소리, 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나 이곳은 개인 사유지에 지어진 별장. 다른 민가는 산에서 내려가야 드문드문 나와, 들리는 소리라곤 풀벌레 울음소리가 전부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무서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더 어둡고 고요한데도.
‘사건, 사고가 벌어졌을 리 없는 새집이라 그런가?’
바삭. 박가람은 과자를 먹으며 창밖을 살폈다.
‘응?’
정원 한 곳에 서 있는 서한율을 발견.
‘뭐 하는 거지?’
서한율이 손에 든 무언가를 휙 뿌렸다. 그러자 나무에서 시커먼 까마귀들이 홰치며 내려앉았다.
‘오늘 고생한 까마귀들한테 먹이 주는구나. …엉? 쟤네 여기까지 왔어?’
우웅.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유호의 전화.
“어, 리더.”
-[대체 무슨 일이야?]
“엉?”
-[무슨 일인데 한율이랑 너랑 급한 일 생긴 것처럼 나가선 외박하냐고. 해원이는 아예 전화도 안 받고 톡도 안 읽던데.]
“음…. 조금 일이 있었어. 내일 숙소 가서 얘기해줄게.”
-[해원이는 괜찮은 거지? 혹시 같이 있어?]
“엉. 그리고 해원이 형 폰 고장 났어. 바꿔줄까?”
박가람은 이해원이 있는 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냐, 괜찮으면 됐어. 그럼 내일 몇 시에 오는 거야?]
“그건 서한율한테 물어봐야 알 것 같아. 가게 되면 미리 톡이나 전화할게.”
-[그래, 알았어.]
“그리고 형, 수련 빼먹지 말고 열심히 해. 오늘 막내도 제주도 내려가서 방에 혼자 있잖아.”
-[알았어. 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