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6화 (246/427)

“엉.”

통화를 끊은 박가람은 다시 창밖을 보았다.

‘잉? 그새 어디 갔어?’

반짝. 별채에 불이 켜졌다.

저기에 갔나 보다. 박가람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든든한 까마귀 부하들도 있겠다, 마법 실력도 좋으니 혼자 있어도 괜찮겠지.

‘나도 수련 좀 하다가 자야겠다.’

다음 날 7일. 이우그룹은 난리가 났다.

한동안 잠잠하던 해커가, 방공시설을 지으면 유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기밀문서 중 일부를, 아는 사람만 알 정도로 이미지를 살짝 왜곡해 너튜브와 SNS에 퍼뜨린 까닭이었다.

[욕심은 선 안에서 적당히.]

이런 글자까지 대문짝만하게 박아서.

이는 어제 벌어진 이해원 납치 미수 사건에 대한 명백한 경고였다. 또다시 허튼짓하면 약속이고 뭐고 다 까발려버리겠다는 경고.

“그러기에 제가 깡패들을 시켜 납치하는 무식한 방법 말고, 그룹 사람이 직접 찾아가 대화를 요청하는 게 좋지 않겠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해커로선 우리가 이제 와서 방공시설을 밀어버리지 못할 걸 뻔히 아는데.”

“VIP가 한시라도 빨리 그 해커를 찾아달라고 친히 부탁했는데, 어느 세월에 찾아가서 하하 호호 대화하고 단서를 얻냐? 그리고 그 무식한 방법 덕에 이해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됐잖아.”

이우그룹 부회장실. 입을 꾹 다물고 분노를 참는 아버지 앞에서, 이채환은 동생인 이채욱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원 그 자식, 블랙박스 메모리랑 핸드폰들까지 몽땅 가져갔어. 병원에 입원한 놈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가서, 본인들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하나도 기억 못 하고 있고. 이건 정말… 세상이 판타지 영화처럼 변할 징조라니까?”

이채욱은 형의 말을 무시하며 아버지에게 의견을 말했다.

“어쨌든 해커가 너튜브와 SNS에 게시물을 올렸으니, 대화할 수 있는 창구가 열린 셈입니다. 일단 이번 일에 대해선 정중히 사과하고, 방공시설을 짓게 한 진짜 목적을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방공시설 쓰임새가 뭐예요. 재난 발생 시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이잖아요.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는 아닐 겁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한국인일 거고요.”

후우. 부회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 일은 채욱이 너한테 맡기마. 하지만 시간은 오래 못 준다.”

이채욱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버지.”

이채환은 시시하다는 얼굴로 딴청을 피웠다.

“잘하면 집안에 초능력자 사위를 들일 수 있었는데 아깝게 됐네. 우리 예쁜 사촌 동생 채현인, 어디에서 뭘 하면서 지내나.”

* * *

제주도. 길우성은 가족과 함께 관광지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았지만, 당당히 얼굴을 드러낸 채 아이돌다운 포즈를 척척 취했다.

“아빠는 이렇게, 엄마는 이렇게. 곰순이는 알아서. 치~즈! 하지만 이건 사진이 아니라 영상이지롱.”

지난번, 할머니가 길우성을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부모님도 서울로 올라와 함께 만났다. 그러나 썩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어머니가 머리끝까지 기분이 상한 상태라,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고 헤어졌다. 누나인 길미현도 없었고.

그래서 이렇게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편집해서 브이로그처럼 올리는 것도 재밌겠당.”

“얼굴은 가려주는 거지?”

“응. 우리 아빠 미남이라고 자랑하고 싶지만.”

“솔직히 미남은 아니지.”

“엄마 너무행.”

“미남은 아니고 귀여운 타입이잖아.”

“으오으.”

길미현은 동영상을 촬영하는 길우성의 모습을 또 핸드폰으로 찍었다. 길우성이 장난스럽게 질색하더니 길미현에게 말했다.

“이래서 커플이랑은 같이 놀러 나오면 안 돼.”

“그거 나도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든 상황을 또 촬영하던 박현우가 물었다.

길우성이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큽. 나만 솔로야!”

“10년 후에도 솔로일 것이다.”

“저 말이 마냥 악담이 아니라는 게 슬프다….”

가족, 그리고 누나의 남자친구까지 낀 짧은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온 집. 길우성은 부모님이 키우는 고양이 ‘삐약’을 무릎에 앉힌 채 말했다.

“엄마, 아빠. 우리 더 넓고 좋은 집으로 이사하자. 나 돈 많이 벌었어.”

“지금 이 아파트도 적당히 좋은데 왜.”

“써한… 아니, 서한율이 그러는데, 부모님 집 장만해드리려거든 엄청나게 튼튼하고 좋은 단독주택으로 하래.”

채우는 보람이 있겠다

-[어떻게 할까요?]

9일 아침. 한율은 계나리가 통화 중 보낸 이미지를 확인했다. 이우그룹에 경고를 날린 SNS를 통해, 그들이 되레 DM을 보냈다.

[경솔한 행동으로 불쾌감을 드린 데에 깊이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미스터리 홀로부터 우리나라를 보호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싶은 마음은 진심입니다.]

DM엔 이우그룹 부회장의 둘째 아들, 이채욱의 개인 연락처까지 적혀 있었다. 이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더는 이해원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뜻일 터다.

-[방공시설을 미스터리 홀 때문에 짓게 했다는 확신까지 갖고 있네요. 아니, 확인하려는 건가?]

“네 생각은 어때?”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협조해준다면 큰 도움이 되겠죠. 그런데… 어차피 다음 달 모의 훈련이 시작되면 국가 차원에서 대비에 들어갈 텐데요. 그리고 솔직히 이 사람들이 해원 씨한테 한 짓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나요. 기업 이익을 위해 벌일 짓들을 생각해봐도….]

이익을 위해 ‘벌일’ 짓?

한율은 살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정원그룹은 몰라도, 괜히 이우그룹에도 협박한 게 아닌가 본데.’

섣불리 아는 척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나리는 그를 게이트가 벌어진 미래를 겪고 과거로 돌아온 ‘지구인’으로 알고 있으므로.

“그럼 일단 두자. 네 말처럼 다음 달이면 모두 알게 될 테니.”

-[네.]

이해원을 납치했던 자들은 사고 당시와 그 직후 벌어진 일을 모조리 잊었지만, 납치를 사주한 사람에 대해선 경찰에게 술술 털어놓았다.

이해원도 변호사와 함께 경찰서로 가서, 사고가 났을 때를 틈타 정신없이 탈출했다고 진술했다. 다른 납치범들이 어떻게 한꺼번에 기절했는지는 전부 모르쇠로 일관했다. 견인되었던 차는 되찾아 정비소로 넘겼고.

경찰로선 의혹투성이 사건이겠지만, 이우그룹 이름이 나온 게 더 큰 일로 작용할 터다.

‘이우그룹도 최선을 다해 사건을 수습하려 들 테니.’

계나리와 통화를 마친 한율은 책상에 놓인 봉투를 집었다. 봉투엔 대학 연극 동아리 ‘달달’과 시즈닝 극단이 합동 공연할 연극 포스터와 팸플릿이 담겨 있었다. 오늘 아침 고재영이 회사로 보낸 걸, 조금 전 회사 직원이 숙소로 가져다주었다.

찰칵. 포스터와 팸플릿을 비스듬하게 펼쳐 사진을 찍었다. 그러곤 SNS에 업로드.

[수익금 전액 기부 자선 공연 포스터와 팸플릿. :) #전출연안해요 #우리대학동아리 #시즈닝극단]

똑똑.

“한율아, 가자.”

“네.”

한율은 외투와 가방을 챙겨 방을 나왔다. 거실엔 이미 다른 멤버들이 외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공식 휴가 마지막 날인 오늘, 그들은 다 함께 차남석의 집에 가기로 했다.

“달냥아, 집 잘 보고 있어.”

“갔다 올게, 달냥.”

“늦지 않게 올 거야.”

므앙. 멤버들은 달냥에게 한두 마디씩 인사하곤 지하실과 차고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율의 차에는 길우성과 이건우, 라이언이 탔다.

“내가 운전할까?”

“제가 할게요.”

한율은 차고 앞을 비추는 CCTV 모니터를 통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 개폐 리모컨을 눌렀다.

어? 어? 차고 문이 열리고 한율과 유호의 차가 차례대로 나오자 사생들이 술렁거리는 게 보였다. 몇 명은 근처에 주차한 차에 올라탄다.

“쟤네 따라오려나 봐.”

“따돌리면 돼.”

두 차는 갈림길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남양주로 가는 동안, 길우성은 제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떠들었다. 어디를 갔다느니, 박현우가 이랬다느니, 뭘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느니 등등.

“그리고 나 부모님 집 사드리기로 했어.”

“오, 정말?”

“막내가 다 컸네.”

“흐. 그런데 써한이 집을 사려거든 튼튼한 단독주택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단독주택으로 알아보자 그랬거든? 그런데 엄마가 싫대.”

“왜?”

길우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안이 불안하다고. 지난번처럼 이상한 놈이 담을 넘으려고 하면 어떡하냐고. 그리고… 넓고 튼튼한 주택 매물은 대부분 조용한 동네에 있잖아. 그런 곳은 또 쓸데없이 소문이 잘 퍼지기도 하고….”

이건우와 라이언은 이해한다는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길우성이 어떤 소문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어떤 괴롭힘을 당했는지 다 알기 때문이었다.

길우성의 부모님이 지금 집으로 이사하기 전엔, 일그러진 팬심을 지닌 사람들과 너튜버, 기자들이 집 앞을 기웃거렸었다. 동네 주민들은 시끄럽다며 불만을 터뜨렸고.

“제주도에도 우리 숙소 같은 집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남석이처럼 아예 땅을 사서, 우리 숙소처럼 요새 같은 집을 짓는 건 어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한율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의 훈련에 이어 게이트가 터지면 도중에 공사가 중단될 가능성이 크다.

“제주에 새로 집을 지으려면 건축 자재 운반부터 오래 걸린다더라고요. 값도 운송료가 붙어서 더 비싸고.”

길우성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으음…. 고민된당….”

유호의 차와는 남양주에서 무사히 합류했다.

“호 형 운전 진짜 많이 늘었더라. 담담한 얼굴로 이리저리 차선 바꾸고 골목 들어가면서 사생들 따돌리는데, 몇 년 전까지 거북이처럼 기어 다니던 그 형이 맞나 싶더라.”

“담담하게 보여도 초 집중한 상태였어. 사생을 줄줄이 달고 와서 남석이네 할아버님께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

“와, 집 예쁘다.”

차남석의 새집은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들이 흔히 머릿속에다 그릴 법한 예쁜 2층 주택이었다. 여기에 차고를 포함한 넓은 정원과 텃밭, 작은 정자까지.

“남석이 너 진짜 신경 많이 썼다.”

“건축사 선생님이 신경을 많이 써주셨죠.”

“어서들 와요.”

미리 연락을 받은 차남석의 할아버지가 나왔다. 멤버들은 일렬로 서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유호가 선창하자, ‘왜들 이래?’라는 표정으로 휙 쳐다보는 차남석을 제외한 멤버들이 손 구호를 했다.

“래빗!”

“인사드립니다!”

꾸벅. 그들의 힘찬 인사에, 할아버지와 집에서 함께 나온 강아지가 짖었다. 왈!

어스래빗 멤버들이 차남석의 집에서 휴가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WB래빗 엔터테인먼트. 그들보다 일찍 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매니지 B팀 직원들은, PC를 켜고 활기차게 업무를 시작했다.

“할 일이 쌓였네요. 아이, 좋아라.”

“유찬 씨, 신혼집은 잘 구했어요?”

오동식 팀장의 물음에 조유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네. 작은 전셋집 하나 구해서 계약했어요.”

“풀옵션?”

“풀옵션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건 있어요.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TV랑 건조기가 없네요. 언제 들어가기로 했어요?”

“네, 다음 달에 먼저…. 누구한테 톡 하시는 거예요, 팀장님?”

오 팀장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어제 <너의 집> 녹화하러 갈 때 남석이가 그러더라고요. 유찬 씨 결혼 축하 선물을 준비해야 하니까, 집을 구했다고 하면 가전제품 중 뭐가 없는지 알아내서 알려 달라고. 그리고 회사에선 축의금으로 축하할 거예요.”

“하하…. 감사합니다.”

“팀장님, 뉴빗 뮤비 찍기로 한 프로덕션에서 메일이 왔는데요.”

“네.”

윤승우의 부름에 오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유찬은 단톡방을 통해 아이들에게 무어라 말을 할까 고민하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내일이면 만나니, 그때 하자. 오늘은 다른 할 일도 많고.’

내년 2월엔 자신의 결혼식도 있지만, WB래빗 엔터의 새 보이그룹 데뷔도 잡혀 있었다. 아직 정식 그룹명을 정하지 못한 상태라 임시로 ‘뉴빗’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뉴빗 또한 매니지 B팀 담당이었다.

조유찬은 달력에 빼곡한 뉴빗의 데뷔 준비 일정을 보며 웃었다.

‘어스래빗 데뷔할 때가 생각나네.’

누가 처음부터 망할 걸 생각하며 수십억을 투자해 아이돌을 데뷔시킬까. 그러나 회사 눈엔 정말 잘하고 외모도 출중한 애들이라 야심 차게 내놓아도, 막상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년에 쏟아지는 수십 개의 그룹 중 극히 일부만 살아남는 것처럼.

그래서 어스래빗의 데뷔가 다가왔을 때도 조마조마한 마음이 컸다. 일각에서는 그래도 잘생긴 애, 연기 잘하는 애가 있으니 팀이 망해도 개인 한두 명은 살아남지 않겠냐 말 같잖은 소리를 지껄였지만 말이다.

‘제발 잘 돼라! 너희들이 못 뜨면 K-POP에 문제 있는 거다!’

그리고 3년. 어스래빗은 월드투어를 두 번이나 할 만큼 성공 가도에 올랐다.

‘새로운 팀에 승준이랑 강희, 지욱이가 있다고 안이해져선 안 되지만, 그래도 든든한 버팀목이 둘이나 있다는 생각 때문인가. 왠지 그때보다 더 마음이 편하네. 이러면 안 되는데.’

띠리리.

“네, WB래빗 엔터…. 아, 안녕하세요, 작가님. 네, 조유찬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네? 아….”

조금 전까지 밝았던 조유찬의 얼굴이 흐려지자, 주변 동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네, 유 팀장님께 여쭤보고 답변드리겠습니다. …네. …네, 들어가세요.”

조유찬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누구예요? 무슨 일인데 유 팀장님 얘기가 나와요?”

유 팀장은 크리스탈 래빗과 드림래빗, 배우 박현우와 유제희를 담당하는 매니지 A팀의 팀장이었다.

조유찬은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에서 말씀드릴게요.”

어스래빗 멤버들이 숙소로 돌아온 건 오후 5시가 될 무렵이었다. 고양이 혼자만 있던 넓고 조용했던 집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남석이네 아버지 못 뵌 건 좀 아쉽네. 전에 호 형 얘기 듣고 조금 기대하고 있었는데.”

“무슨 얘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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