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20년 후, 50년 후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고.”
“다들 저녁은 어떻게 할래? 내일 일찍 스케줄 있잖아. 가볍게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일은 단체로 SBC <달리는 예능> 녹화가 잡혔다. 정식 게스트로 나가는 건 차남석과 강보배. 다른 멤버들은 두 사람을 응원하는 연출을 위해 오프닝에만 등장하기로 했다.
“점심은 배 터지도록 실컷 먹었으니, 저녁은 가볍게 족발이랑 보쌈?”
“좋다.”
므앙. 한율은 다리에 비비적거리는 달냥을 쓰다듬었다.
“씻고 나서 놀아줄게.”
우웅. 오 팀장으로부터 전화. 한율은 방으로 들어가서 받았다.
“네, 팀장님.”
오 팀장의 용건은 다른 게 아니었다. 2주 후인 23일, 드림래빗의 박세은이 MBS 예능 <시골집밥>에 출연하기로 했는데, 해당 프로그램 PD가 깜짝 손님으로 한율이 잠깐 나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는 것.
“뭐 하는 프로그램인데요?”
-[이름 그대로 시골에서 밥해 먹는 프로그램이야.]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세은 씨가 편집을 많이 당하겠지. 이쪽에선 심심찮게 출연자 편애, 갑질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PD거든. 참고로 MBS 사장과 친척 관계고.]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갈게요. 어차피 스케줄 없는 날이기도 하고. 그런데 박세은은 알아요?”
-[아니. 말 그대로 깜짝 출연이라 세은 씨한텐 비밀로 할 거야. 다른 루트로 흘러 들어갈 수 있으니까, 한율이 너도 멤버들한텐 이야기하지 마.]
“네, 그럴게요. 미팅 날짜 잡히면 알려주세요.”
씻고 나왔을 땐 족발과 보쌈이 도착해 있었다. 한율은 멤버들과 거실에 모여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달냥은 테이블 아래로 떨어진 젓가락 포장지를 가지고 신나게 뛰어놀았다.
차남석이 말했다.
“오늘 낮에 팀장님한테서 톡 왔는데, 유찬이 형 신혼집에 에어컨이랑 냉장고, 세탁기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대요.”
씨익. 박가람이 상추와 깻잎을 든 채 악당처럼 웃었다.
“후후. 채우는 보람이 있겠구먼?”
다음 날, SBC <달리는 예능> 녹화장으로 가는 길.
어스래빗 멤버들의 선물 목록을 받은 조유찬은 놀라 펄쩍 뛰었다.
“그 집 10평도 안 돼서 이거 다 못 들어가…!”
한 시간 정도야
SBC <달리는 예능> 녹화는, 새벽부터 샵에서 단장을 받고 대기한 시간과 비교해 아주 짧게 끝났다. 그러나 인기 예능에 잠깐이나마 완전체로 출연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그들은 기분 좋게 촬영장을 나섰다.
차남석과 강보배만 두고 회사로 가는 길.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남석이 형이 두 번째 출연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회사에 도착하고 나선 피부가 상하지 않도록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일주일 가까이 푹 쉬었으니, 이제 다시 달릴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연습실에서 몸을 푸는 중, 그들에게 친숙한 안무가가 찾아왔다. <2020 RMMA in JAPAN> 오프닝에서 길우성이 춰야 할 안무, 어스래빗이 할 스페셜 무대 안무 시안 파일을 들고.
“진짜 세트까지 이렇게 제작해서 한다고요?”
“작년이랑 비교하면 스케일 진짜.”
“빨리 남석이랑 보배한테도 보여주고 싶다.”
기본 설명을 듣고 나선 안무 연습에 들어갔다. 스페셜 무대다 보니 댄브에 들어갈 새롭게 짜인 안무도 있고, 세트도 활용해야 하므로 시안의 동선대로 움직여 보면서 의견도 제시했다.
“이 부분에선 남석이가 시그니처 포즈를 취하면서 나오는 게 더 임팩트 있을 것 같아. 잘생긴 녀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지.”
“선생님, 여기서는 조금 더 디테일하게….”
“우성이 네 책임이 막중하구나. RMMA 오프닝도 열어야 하니.”
“혼자 여는 게 아니니까 더 잘해야 한다. 다른 팀 애들보다 못하면 안 돼. 네가 어스래빗 대표야.”
“부담감 팍팍 실어줘서 참 고맙소, 형님들.”
그들은 안무가가 돌아간 뒤에도 자율 연습을 하다가, 첫 끼 겸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일부러 점심 운영시간 막바지에 왔는데, 구내식당에는 뉴빗 후배들이 막 식판을 챙기고 있었다.
“안녕, 안녕.”
“안녕하세요.”
“휴가는 잘 보내셨어요?”
“그럼, 아주 알차게 잘 늘어졌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현강희도 멤버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더니 한율에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제 선배님이 SNS에 올린 연극 포스터 봤는데. 혹시 선배님도 올라가세요?”
“아니. 친구가 홍보를 부탁해서.”
길우성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친구 누구?”
“고재영.”
“으음…. 아무리 좋은 취지로 하는 자선 공연이라도, 단순히 친분 때문에 SNS 홍보까지 해주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만약 그쪽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공연장 대관료 내가 냈는데.”
끔뻑. 길우성이 눈을 크게 뜨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아, 공연 후원자셨군요. 그럼 홍보할 만하지. 그런데 그런 좋은 일은 널리 알려야지, 왜 말을 안 해서 사람을 오해하게 만드니. 회사는 알고 있니?”
“길우성 태세 전환 보소.”
“얘들아, 시금치랑 두부 많이 먹어. 비타민이랑 미네랄, 단백질 챙겨야지.”
“시금치랑 두부 같이 먹으면 오히려 안 좋다던데?”
“시금치냐 두부냐, 그것이 문제로다.”
“동생들 불편하게 하지 말고, 따로 앉자.”
“아뇨, 저흰 괜찮습니다!”
“많이 먹어.”
그렇게 어쩌다 보니 후배들과 가까이에 앉게 되었다. 연습생 생활을 같이했던 이들이나, 밥을 사주거나 연습을 봐주거나 하면서 가까워진 이들이 많아 어색하진 않았다.
“그런데 우리 회사 이사한다는 거 사실이에요?”
“검토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아직 확실히 정해진 건 없는 것 같아.”
“그런데 임승준이 안 보인다?”
“오늘 <락뮤닷> 방송 있잖아요.”
“아. 내가 요일 감각이 흐릿해서.”
마치 회식처럼 왁자지껄하다. 한율도 옆에 앉은 현강희와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구내식당에 들어왔을 때부터 한율을 연신 훔쳐보던 후배가 머쓱하게 웃었다.
“봐도 봐도 연예인을 보는 것처럼 신기해서요.”
현강희가 웃으며 말했다.
“너도 3개월 후면 연예인이야.”
“흐. 우리 정말 무사히 데뷔할 수 있겠지?”
“당연하지. 이미 녹음 다 마치고 뮤비 촬영 앞두고 있는데.”
글쎄. 과연 무사히 데뷔할 수 있을지.
우웅. 한율은 후배들을 향한 미안한 마음을 감추며 핸드폰을 꺼냈다. 고재영의 톡.
-[우리 공연 인터뷰 요청 들어왔다. 다 네 덕분이다ㅜㅜ]
-[대관료 네가 지원해줬다고 자랑해도 되지?]
[ㅇ]
-[고맙다!!!!!]
“한율이 형 폰 케이스 무슨 일이야? 그런 취향이었어?”
핸드폰을 내려놓는데 변지욱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한율의 핸드폰 케이스는 하늘색 바탕에 새하얗고 몽실몽실한 토끼 캐릭터가 그려지고, 푹신한 실리콘 재질의 하트와 구름이 아기자기하게 붙어 있었다.
“팬한테 받은 선물인데.”
변지욱이 척 엄지를 세웠다.
“괴엥장히 멋져! 센스 굿! 탐난다!”
우웅.
오 팀장의 톡.
-[한 시간 후에 집밥 미팅 가자.]
[네.]
잠시 후, MBS 예능국 <시골집밥> 제작팀 사무실. <시골집밥> PD는 회사 후배의 분량을 빌미로 갑질 섭외를 한 사람답지 않게, 한율을 아주 친절하게 대했다.
“한율 씨가 녹화하는 23일이 첫 방송 날짜라 예습은 힘들겠지만, 어렵게 생각할 거 저언혀 없어요. 말 그대로 손님으로 와서 밥만 맛있게, 아니, 솔직하게 맛을 표현하며 드시면 되거든요.”
“네.”
“내일은 <매니저의 하루> 스튜디오 녹화하러 오시죠? 거기 PD가 나랑 아주 친한 후밴데….”
미팅을 시작하고 프로그램 관련 이야기는 고작 3분. PD는 쓸데없는 사담을 주절주절 떠들었다. 15분 동안이나.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 미팅 정말 즐거웠어요, 한율 씨.”
“네, 수고하셨습니다.”
“참, 23일엔 한율 씨가 아는 사람도 깜짝 손님으로 등장할 거예요. 누군지는 비밀이라 말해줄 수 없지만요.”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23일 촬영장에서 뵙겠습니다.”
* * *
[서한율, 선행의 끝은 어디? 자선 연극 공연장 대관료 전액 후원]
[서한율이 소외계층 아동을 돕기 위한 자선 연극의 공연장 대관료를 후원해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다.
(사진=WB래빗 엔터테인먼트)
12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학교 연극 동아리 ‘달달’과 시즈닝 극단이 합동으로…(중략).
‘달달’에 소속된 배우 고재영은 “홍보만 조금 도와줄 수 없냐고 했더니 대뜸 공연장은 빌렸냐 묻더라.” 그리고 “연기에 대한 열정과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걸 선보일 기회가 적은 배우들을 보면 안타깝다면서 대관료를 모두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그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편 서한율이 후원한 공연장 대관료는 약 1,500만 원에 달한다.]
-얘 분명 수익금 기부 날짜 되면 본인도 보탠다. 두고 봐라.
ㄴㅋㅋㅋㅋㅋ
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차라리 배우들한테 직접 주지... 당장 차비랑 식비 없어 힘들어하는 배우들도 많은데
ㄴ그렇게 어려운 와중에도 자선 공연 준비하는 배우들 보고 감명받아서 대관료라도 내주는 건데 너무 가신 듯..?
ㄴ정말 연기가 하고 싶은 사람에겐 당장 식비가 아니라 무대가 더 절실합니다. 식비야 알바를 뛰어서 벌 수 있지만, 공연장 대관료는 한꺼번에 다 내야 해서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거든요. 홍보도 힘들고
-친구 잘 뒀네, 재영 씨
-돈이 아니라 대관료를 내준 게 오히려 잘한 거임ㅇㅇ 나 아는 연극배우들 힘들다, 배고프다 하면서 조금이라도 돈 들어오면 술 처먹기 바쁘더라. 본인들이 진정한 예술인, 희극인이란 착각에 취해서 TV에 나오는 잘나가는 배우들한텐 열폭이나 하고.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ㅋ
-예매 언제 열리나요
ㄴ다음 주에 열린대요
-포스터 무슨 아이돌 화보인 줄
ㄴ아이돌 화보 전문 사진사가 찍은 거 맞아요ㅎㅎ 인터뷰 전문 봤는데, 서한율 소개로 저렴하게 찍어줬다네요ㅎㅎ
-SNS에 갑자기 연극 홍보 글을 올리기에 잉? 했는데 이거였구나. 사랑한다, 천사율톢♡♡♡
11일 수요일. MBS 예능 <매니저의 하루> 스튜디오.
“한율 씨가 평소에 기부를 워낙 많이 해서 기부 천사돌로 유명하잖아요. 오늘은 소외계층 아동을 위한 자선 공연팀을 위해서 대관료를 모두 후원했다는 기사도 뜨고.”
MC가 한율을 향해 물었다.
“본인이 지금까지 총 얼마 기부했는지, 혹시 물어봐도 될까요?”
“어….”
얼마 했었지?
한율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박가람이 고개를 흔들면서 대신 대답했다.
“저도 한번 물어본 적 있는데, 기억을 못하더라고요. 해놓고 잊어버려요, 쟤.”
“네?!”
다른 출연자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한번 할 때마다 억 단위로 하는데 잊어버린다고요?”
“나 같으면 아주 동네방네 ‘나 얼마 기부한 남자야! 엣헴!’ 이러고 떠들고 다닐 텐데.”
“네, 기억이 안 나네요. 세무사 선생님께 물어보면 알 것 같기는 한데.”
“아니, 본인 돈으로 한 거 아니에요?”
한율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빌려준 돈은 잊지 않아요.”
“어우, 기특해. 귀여워.”
“지인한테 돈도 빌려줘요?”
“얼마까지 가능?”
어스래빗 팬덤은 몰라도 이 방송을 볼 대중, 시청자들은 돈이 많은 아이돌의 금전 감각을 궁금해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유도하는 거고. 그걸 알기에 한율은 산뜻하게 대답했다.
“길우성한테 딱 한 번 빌려준 적 있어요.”
“아, 춤 정말 잘 추는 그 친구?”
“얼마나 빌려줬어요?”
“1,217,000원이요.”
이번에도 과장되게 놀라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