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8화 (248/427)

“히익. 아니, 몇 살 때? 왜요?”

“길우성이 아픈 고양이를 동물병원에 데려갔는데…. 아, 이 얘기는 걔네 부모님이 모르실 텐데.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이미 늦었어.”

“와, 한율 씨 진짜 빌려준 돈은 천 원 단위까지 기억하는구나. 그러면서 몇억 기부한 건 까먹고.”

한 출연자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나는, 친구 이름을 성까지 꼬박꼬박 다 붙여서 부르는 게 왜 이렇게 웃기지?”

그들이 오늘 관찰할 영상은 어스래빗이 한창 활동하던 때 찍은 것이었다. 영상 속 어스래빗 멤버들과 매니저들은 새벽부터 나와 MBS 음악방송 <뮤직센터> 스페셜 영상 녹화, 짧은 수면, 패션 잡지에 실릴 화보 촬영, 인터뷰, 라디오 게스트 출연, OST 회의, 다시 <뮤직센터> 사녹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이돌 매니저는 볼수록 진짜 극한 직업인 것 같아.”

“이렇게 바빠서야. 이분들 연애는 언제 하시죠?”

“그래도 다아 합니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박가람에 이어, 한율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유찬이 형, 곧 장가가요.”

“네?!”

MC와 출연자들의 시선이 스튜디오 한쪽에 앉아있던 조유찬을 향했다. 조유찬은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매니저의 하루> 스케줄을 끝내고 방송국을 나오는 길.

“가람인 앉아서 멘트하는 예능은 처음이라 조금 걱정했는데, 잘하더라.”

“후. 멤버들 조언대로 평소보다 텐션을 약간 낮췄죠.”

“그럼 이제 어디로 데려다줄까? 회사? 숙소?”

“미팅 오래 걸려요? 나 데려다주러 왔다 갔다 하면 시간만 더 걸릴 것 같은데. 퇴근 시간대라 차도 막힐 거고. 그분들 지금 서한율 오기만을 기다린다면서요.”

벌써 저녁 시간이었지만, 한율은 교육방송 <일일멘토> 프로그램 제작진과 미팅을 하기로 했다.

“예전에 우성이랑 라이언 미팅할 때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어?”

“한 시간 정도야 드라마나 예능 한 편 보면 후딱 지나가겠네. 기다릴게요.”

“아니면 미팅 자리에 같이 가도 될… 걸? 작가님께 연락해서 물어볼까?”

박가람은 의젓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형. 저 어린애 아닙니다.”

잠시 후, 교육방송국 지하 3층 주차장.

차에 혼자 남겨진 지 5분. 박가람은 크게 후회하며 가방을 챙겼다.

‘한 시간은 무슨! 안 되겠다, 1층에 있는 편의점이나 카페에라도 가야겠어!’

그렇게 차에서 내렸을 때였다.

“박가람?”

막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사람이 박가람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응? 박가람도 그를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호들갑을 떨며 반응.

“당신은…!”

상대는 어스래빗 데뷔 초, 그들에게 기둥서방이니 비아냥거리고 시비를 걸었던 보이그룹, 코우가 속해 있었던 ‘퍼스트라인’의 멤버였다.

박가람은 놀란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다가 목 뒤를 긁적였다.

“선배님 이름이 뭐였죠?”

“너 이 씨.”

인기 아이돌은 만나기 힘들구나

방송국 1층 카페. 박가람은 커피를 앞에 두고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퍼스트라인의 리더, 평원을 힐끗했다. 데리러 오기로 한 매니저가 늦는다고, 할 일 없으면 같이 카페나 가자는 말에 따라오기는 했지만 참 어색했다.

‘그래도 지하 주차장에 혼자 있는 것보단 낫네. 잡것도 안 보이고.’

평원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너희 요즘 잘나가더라? 월드투어 도시도 많이 돌고, 음방 활동도 배짱 좋게 일주일 만에 끝내고?”

“우리 멤버들이 다 잘났거든요. 누구네처럼 처음 보는 사이에 대뜸 시비 거는 못난 사람도 없고.”

“…….”

“누구처럼 도끼눈으로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하. 평원이 한숨을 쉬었다.

“말을 말자.”

박가람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1층 카페에 있습니당]

조유찬에게 톡을 보내고 난 뒤엔 어스래빗 단톡방에서 떠들었다. 서한율 미팅에 따라왔다가 퍼스트라인의 평원을 만나, 어쩌다 보니 카페에 마주 앉아 있다고. 그러나 다들 안무 연습 중인지, 답장은커녕 읽는 사람 없이 잠잠했다.

평원이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넌 여기 왜 왔냐?”

“선배님은 왜 왔는데요?”

“난 여기 고정 프로그램 있어서.”

“전 미팅하는 멤버 따라왔음요. 그런데 고정?”

박가람은 평원에게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명색이 교육방송국인데 욕쟁이를 고용하다니.”

“…야. 내가 너희한테 직접 욕한 적 있냐?”

“이 대장 찹쌀떡 보소? 리더로서 멤버들 단속 제대로 안 했잖아.”

“아이돌 리더야 말만 리더지, 또래 새끼들 통제하는 게 쉬워? 그리고 은근슬쩍 말 놓을래?”

“…요. 우리 팀 리더는 합니다.”

“너네야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애들만 있으니까 쉬운 거고. 만약 우리 팀 놈한테 미팅할 동안 차에서 기다리라고 했으면 개지랄했을걸.”

“…….”

박가람은 빨대로 커피의 얼음을 휘저었다. 하아. 평원이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들었다.

“내가 왜 내 이름도 몰랐던 놈한테 이딴 말이나 지껄이는지.”

“그런데 선배님.”

박가람은 문득 그를 놀리고 싶어졌다.

“고정이면, 매주 지하 주차장 이용하겠네요?”

“…….”

평원이 뚱한 얼굴로 박가람을 보더니 픽 웃었다.

“내가 왜 별로 친하지도 않은 너한테 카페나 오자고 했는지 아냐?”

탁. 그가 컵을 내려놓으며 상체를 내밀었다. 그러곤 은밀한 목소리로 묻는다.

“너도 봤지? 빨간 옷 여자.”

박가람은 질색하며 상체를 뒤로 뺐다.

“어으.”

평원은 몸을 바로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 지하에서 출몰하는 그 귀신 제법 유명한데. 몰랐냐?”

“난 여기 온 게 오늘이 처음이라.”

우웅. 평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형. 저 지금 1층 카페요. 금방 내려갈게요. …난 먼저 간다.”

“잘 가요.”

놀리는 거 실패했네. 박가람은 김이 샌단 얼굴로 커피를 들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가는 평원을 보며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퍼스트라인은 2년 전, 일본인 멤버 코우가 탈퇴한 뒤로 천천히 하락세를 걷는 중이었다.

본래 팬덤이 큰 것도 아니고, ‘마약 사건 연루 멤버가 있던 팀’이란 수식어를 단번에 떼어낼 정도로 회사가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전체적으로 활동이 위축된 사이 팬들은 이탈하고, 비슷하지만 새로운 팀들이 치고 올라온다.

그리고 현재, 그나마 인기 있는 멤버만 소소하게 개인 활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그룹이든 멤버 잘 만나는 것도 복이라더니.’

박가람은 여전히 아무도 읽지 않는 단톡방에다 톡을 올렸다.

[응답해라 복덩이들아]

[나 심심하다]

“한 시간 정도는 드라마나 예능으로 보낼 수 있다면서요.”

“응?”

현실에서 돌아온 응답. 박가람은 테이블로 다가오는 한율과 조유찬을 발견했다.

“일찍 끝났네? 아직 30분밖에 안 지났는데.”

“이 근처에서 저녁이나 먹고 가요. 뭐 먹고 싶어요? 기다리게 했으니 제가 살게요.”

박가람은 활짝 웃었다.

“고마워, 복덩아!”

세 사람은 근처에 있는 불고기 전문점으로 갔다. 메이크업을 지우지 않은 상태라 그런지, 주문을 받는 직원이 연신 한율과 박가람을 살폈다.

“혹시 연예인이에요? 곱상하게 생긴 학생들이 예쁘게 꾸미기까지 했네.”

두 사람은 일부러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소불고기 6인분 부탁드립니다.”

“네.”

직원이 물러난 뒤 조유찬이 말했다.

“너희들 이거 먹으면 곧바로 숙소로 가서, 가볍게 운동한 후에 씻고 일찍 자. 다른 애들도 오늘은 일찍 들어갈 거야.”

내일은 어스래빗 데뷔 후 처음으로 단체 화장품 광고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네.”

“<일일 멘토> 촬영은 언제야?”

“14일이요.”

“응? 그날 우리 일본 가잖아.”

“한율이만 저녁에 따로 출국할 거야.”

박가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네가 만날 멘티는 어떤 애야?”

“배우 지망생이요.”

한편 그 시각, 대학로의 한 고깃집.

사람은 여섯이지만, 음식은 3인분만 세팅된 원형 테이블.

“서한율 기사 봤어?”

“공연장 대관료 대신 내준 거? 어, 봤어.”

“그 기사 웃기더라. 어차피 공연 수익금 전부 기부되는 건데, 어려운 배우들까지 돕는 걸로 포장된 게.”

“크리스마스 시즌에 대학로의 시설 좋은 공연장에서 하루 두 번 공연. 그것 자체가 대박 좋은 기회잖아. 서한율이 홍보했으니까 티켓도 전부 팔릴 거고.”

“그러니까 그 좋은 기회를, 어? 본인이 다니는 대학 동아리 친구들한테 줘놓고 왜 ‘실력과 열정은 있지만, 기회가 없는 배우들’을 돕는 것처럼 생색내냐고. 난 그게 어이가 없는 거야. 그냥 친구 도와준 거잖아.”

“시즈닝 극단 배우들은 배우도 아니냐?”

불만을 토로하던 배우가 흥분해 언성을 높였다.

“아니, 생색을 내려면 우리처럼 정말 간절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내야 하는 거 아냐? 자선 공연할 여유 있는 팀이 아니라? …차라리 그런 말을 하질 말든가.”

동료가 진정하라는 듯 그의 팔을 두드렸다.

“너 어디에서 벌써 술 먹고 왔냐?”

“내가 술 사 먹을 돈이 어디 있어. 연습실 빌릴 돈이랑 대관료 잔금도 모아야 하는 판에.”

“…….”

“그때 공연장 장비 망가뜨리고 튄 새끼만 아니었어도….”

“하아….”

그들은 저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곤 입을 다물었다.

치이익. 돈이 없어서 인원수만큼 시키지 못한 싸구려 고기만 익어갔다.

“아, 나 알바 가야겠다.”

덜컹. 한 동료가 일어났다.

“오늘 야간 파트 대신 나와달라는 거 깜빡했네. 너희들이 내 몫까지 먹어.”

“어, 수고해.”

“내가 만나볼게.”

“응? 누구를?”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또 다른 연극배우, 우승찬이 고개를 들었다.

“서한율. 내가 만나서 부탁해볼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너 걔 따로 알아?”

“아니. 하지만 예전에 한 번 만난 적 있어.”

“뭐?”

막 알바를 가려던 동료도 우승찬을 돌아보았다.

“언제?”

“전에 강덕심 선생님 있는 극단에 객원으로 갔을 때, 서한율이 방송 때문에 온 적이 있었거든. 그때 얘기 몇 마디 나눴었어.”

“…난 또.”

놀란 얼굴로 그를 주목했던 동료 배우들이 고개를 돌리거나 한숨을 쉬었다. 우승찬이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잖아. 대표 형이 대출받고 투잡 뛰면서 고생하는 거 보는 것도 힘들고… 다들 각자 생활에 쪼들려서 연습도 제대로 못 하고 있잖아. 이대론 계속 악순환이야. 우리에겐 이 악순환을 단번에 타개할 큰돈이 필요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걔가 우리를 왜 도와줘. 돈 좀 달라, 후원해달라 매달리는 사람이 좀 많겠냐? 그런 거지 중 하나가 되자고?”

“승찬이 너 서한율이 얼마나 인기 많은지 몰라? 걔 SNS 봐. 게시글 하나에 수천 명이 댓글을 달아. 뭐, 기획사라도 찾아가게?”

우승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그리고 무작정 돈 달라는 구걸이 아니라, 투자해달라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도 협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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