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어떻게.”
“이거 먹고 힘내서, 공연 연습 촬영하자. ‘서한율 네가 안타깝다고 말했던, 실력 있고 열정 많은 배우들이 여기 있다’라고 알려야지.”
* * *
13일. 어스래빗 멤버들은 전날 화장품 CF 촬영에 이어서 오늘은 화보 촬영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다.
“우리 밥 좀 먹고 연습하자. 배고파 죽겠다.”
“그럽시다.”
멤버들을 태운 차가 회사 입구에 바짝 붙어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기다리던 극성팬들이 핸드폰과 카메라를 들고 떠들었다. 외국인도 적잖이 섞여서 더 정신이 없었다.
“얘들아, 어디 갔다 와?”
“한율 씨!”
[남석아, 머리 잘 어울려!]
“한율 씨, 잠깐만요! 한율 씨!”
[라이언, 사랑해!]
“아, 이 아저씨 뭐야! 막지 말고 저리 가요!”
오늘따라 더 난리네.
한율은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저를 부르는 걸 들었지만, 무시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 팬이 아예 없는 게 아닌 까닭이었다. 성별을 떠나 팬인 척 사진과 영상을 찍거나, 소지품을 훔쳐 돈을 버는 사람도 있고.
“구내식당 갈까? 아니면 배달시킬까?”
“오늘 구내식당 메뉴 뭐지?”
저녁을 먹고 나서 한율은 오래간만에 보컬 트레이너 왕연수에게 수업을 받았다. 너무 본인 팀 노래만 부르면 오히려 노래 실력이 퇴화하거나 이상한 버릇이 드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새벽 1시까지 안무 연습을 하고 멤버들과 함께 퇴근했다.
“얘들아, 오늘도 수고했어!”
“한율 씨…! 저기, 잠깐만요, 한율 씨…!”
“거 조용히 좀 합시다! 동네 시끄러워서 살 수가 있나!”
“죄송합니다!”
다음 날 새벽. 동도 트기 전에 일어난 한율은 캐리어에다 짐을 쌌다. 오늘 <일일 멘토> 촬영이 끝나면 숙소에 들르지 않고 바로 공항으로 갈 예정이었다.
샵에 갈 준비까지 마친 뒤엔, 침대에 드러누워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달냥을 쓰다듬었다.
“나중에 집에서 데리러 올 거야. 난 사흘 후에 돌아오니까, 그때까지 밥 잘 챙겨 먹으면서 얌전히 기다려.”
므앙.
이른 시간이라 숙소 앞엔 아무도 없었다. 조유찬이 한율의 캐리어를 대신 트렁크에 실었고, 한율은 조수석에 탑승했다.
조유찬이 운전석에 타며 물었다.
“아침은 뭐 먹을래?”
“간단하게 샌드위치에 커피요.”
조유찬이 시동을 걸었다.
그때였다.
…어? 한율 씨…! 잠깐만요!
“……?”
어제도 들었던 남자 목소리가 차 뒤쪽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한율은 사이드미러를 확인했다. 한 손에 삼각김밥을 든 남자가 이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조유찬도 그를 봤지만, 무심한 얼굴로 차를 움직였다. 남자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졌다.
조유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팬이어도 그렇지, 주말 아침부터 숙소 앞까지 찾아오고. 에휴….”
팬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그러나 한율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가방에서 오늘 만날 멘티의 자료를 꺼냈다.
“그나저나 PD님이 말씀하시기를, 오늘 어떤 이야기를 듣든지 일단 금전적인 지원으로 해결해줘야겠다는 생각은 미뤄달라고 하시더라. 오늘 만나는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일일 멘토>에 출연할 아이들을 위해서도.”
“네, 명심할게요.”
“후아….”
우승찬은 담에다 등을 기댄 채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진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네.’
서한율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용건을 전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처음에 우승찬은 서한율 소속사인 WB래빗으로 전화를 걸었다. 자기소개와 용건을 밝히고 서한율과 연락하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러나 직원은 하루에도 이런 전화를 수백 통씩 받는다는 듯, ‘죄송하지만 아티스트와의 개인적인 연결은 힘듭니다. 죄송합니다.’ 기계적으로 말하곤 끊었다.
서한율의 개인 SNS, 스타아이 어스래빗 채널에도 글을 남겼으나, 이 또한 수많은 팬의 메시지에 밀려 아득하게 멀어졌다.
배우 강덕심에게 도와달라 부탁하는 것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강덕심에게 미운털이 박힐 수 있어서 포기했다.
그래서 WB래빗으로 직접 찾아가 로비 직원에게 USB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직원은 팬 이벤트가 아닌 이상 선물은 따로 받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선물은 아니지만 정말 우리에겐 중요한 파일이다, 서한율에게 꼭 보여주며 설명하고 싶다고 했더니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죄송합니다. 그런 부탁이라면 더더욱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하필 그때 이상한 사이비 종교인들까지 와서 더 큰 나눔을 행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느니, 조상님들이 노하신다느니 지껄이는 바람에 함께 경찰서로 끌려갈 뻔했다.
그래서 다른 팬들처럼 회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몇 시간 동안 기다렸으나, 지금처럼 무시당했다. 꺅꺅 소리 지르며 카메라와 핸드폰을 들이대는 수많은 극성팬과 비슷한 부류로 치부되어.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우승찬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제 손에서 볼품없이 구겨진 삼각김밥을 내려다보았다.
‘인기 많은 아이돌은 정말 따로 만나기가 힘들구나….’
터벅터벅. 되는 대로 발길을 옮기며 그는 삼각김밥 포장지를 뜯었다. 이제 알바를 하러 갈 시간이었다.
뀨우.
“……?”
그러다 귀엽고 앙증맞은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바로 옆 필로티 주차장에서 동물 이동장을 들고나오던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우승찬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어? <뮤직뮤직> MC?”
군 복무 시절, 잊지 않고 꼭꼭 챙겨봤던 <뮤직뮤직>에서 자주 본 아이돌이었다.
“……?”
모자랑 마스크까지 썼는데 용케 날 알아보네.
스타믹스 JE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까딱하고선, 구동이 든 이동장을 안은 채 그의 앞을 지나갔다. 끼웅.
우승찬은 뒤늦게 정신 차렸다.
“저기, 잠깐만요!”
소화제 꼭 챙겨
“우연히 만난 다른 아이돌한테 USB를 부탁했다고?”
‘보리극단’ 배우들이 자주 모이는 옥탑방. 알바를 마치고 돌아온 우승찬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한율한테 전달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돌이라고 다 친한 건 아닐 거 아냐. 그런 부탁을 들어줄 의무도 없고.”
“그런데 회사랑 숙소에 찾아가도 도저히 만날 방법이 없더라. 목이 터지라 불러도 안 돌아보고.”
“당연하지. 너 서한율 만나겠다고 나간 뒤로 검색해보니까, 지금까지 극성팬은 물론이고, 팬으로 위장한 범죄자들한테도 많이 시달렸더라.”
“인기 연예인이 항상 매니저랑 경호원에게 둘러싸여서 다니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지.”
“그래서, 우리 영상 받은 아이돌은 누군데? 이른 아침부터 한가하게 돌아다니는 아이돌이 서한율이랑 친할 것 같진 않은데….”
우승찬은 스타믹스 JE의 사진을 검색해 보여주었다.
“…어?! <뮤직뮤직> 남자 MC! 군대에 있을 때 자주 봤는데.”
“이 사람 인기 많지 않아? 정말로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알고 보니까 그 근처에 살더라. 서한율이랑도 해외여행 같이 갈 정도로 친하고.”
“이야…. 넌 둘이 친한 거 전혀 모르고 건넨 거잖아. 운 대박 쩐다. 우리 뭔가 잘 풀리려나 봐!”
“그럼 남은 문제는, 이 사람이 USB를 서한율한테 잘 전달해주느냐인데….”
“저기, 그런데 있잖아….”
동료 배우들의 시선이 머뭇거리는 우승찬을 향했다. 우승찬이 면목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 사람한테 내 연락처 주는 걸 깜빡했어.”
“…바보냐?!”
* * *
명상센터로 위장한 마법 학교. 공기계에 USB를 꽂아 내용물을 확인한 계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 영상이네요.”
“연극이요?”
“네. 바이러스 같은 건 없어요. 깨끗해요.”
JE는 계나리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아 영상을 보았다.
‘…재밌는 것 같은데?’
공부가 얕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배우들도 연기를 잘하는 것 같다.
계나리가 물었다.
“이 앞에서 만났다고 했죠?”
“네. 전달을 부탁하곤 도망치듯 가더라고요. 그래도 혹시 몰라 바로 센터로 올라오지 않고, 구동이 집에다 데려다 놓은 다음에 다시 여기로 왔어요.”
“음. 얼마 전에 뜬 공연장 후원 기사를 보고 도움을 청하려는 걸까요?”
계나리가 사과패드로 [배우 우승찬]을 검색했다.
“평범한 신인배우네요. 그나저나 해원 씨는 어땠어요? 통화론 괜찮다고 하던데.”
JE는 핸드폰을 돌려주며 대답했다. 그는 그제, 구동을 데리고 이해원이 있는 양평으로 가서 하룻밤 묵었다.
“평소대로예요. 수련을 정말 열심히 하는지 마나도 전보다 정갈해진? 그런 느낌도 들고. 까마귀들이랑도 잘 지내던데요. 이우그룹 쪽은요?”
“아직은 잠잠해요.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는데….”
“뭔데요?”
계나리가 손을 내저었다.
“별것 아닐 수 있어요. 제가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채현이 너무 조용해서요.”
“마음이 뜬 거 아닐까요? 해원이랑 관계가 끝난 지 시간도 좀 지났고, 현타도 어느 정도 맞았을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지만, 발령받은 미국 지사에도 초반에만 얼굴을 비추곤 이젠 공식 석상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사고라도 쳐서 아예 감금이라도 된 건지 뭔지.”
에휴. 계나리는 한숨을 내쉬곤 화제를 돌렸다.
“이 USB는 어떡하시겠어요?”
공항으로 향하는 WB래빗 엔터 차량.
한율은 스타믹스 JE와 통화를 나눴다.
-[사실은 내 선에서 자르려고 했는데, 나중에 괜히 이상한 말 나오면 너만 당황스러울 거 아냐.]
“선배님도 당황스러웠겠네요. 모르는 배우가 갑자기 전해달라고 부탁해서.”
-[본인을 배우라고 소개해서 엉겁결에 받기는 했지. 어쨌든,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섣불리 도와주겠다고 나서진 않는 게 좋을 거야. 상대방의 선의를 기대한 일방적인 부탁은, 한번 들어주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어지거든.]
“그렇기는 하죠.”
기부 기사가 뜰 때마다 WB래빗엔 여러 개인과 단체로부터 ‘우리도 도와달라’는 연락이 들어왔다. 그리고 WB래빗은 한율에게 전달조차 하지 않고, 연락한 곳이 어디든 중간에서 다 잘라냈다. 그 이유가 뭐겠는가.
“어쨌든 그 사람 연락처랑 파일 보내주세요. 일단 선배님에게 USB를 건넸으니, 반 정돈 성공했다며 답변을 기다릴 것 같네요.”
-[연락처 없는데?]
“……?”
-[보리극단의 우승찬이라고만 밝히고, USB만 달랑 주고 갔어. 혹시 영상에 자막으로라도 박지 않았을까 살펴봤는데 그런 것도 없고.]
뭐지.
-[일단 파일만 보낼게.]
“네. 운동 열심히 하세요.”
-[웬 운…. 알았어. 잘 다녀와.]
“네.”
통화를 마치자 곧 JE가 동영상 파일을 보냈다. 한율은 이어폰을 끼곤 영상을 재생했다.
낡고 좁은 연습실에서 펼쳐지는 낯선 배우들의 연극.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오냐오냐 네가 최고다 칭찬을 받으며 자란 소년, 반대로 마음에 여유가 없는 부모로부터 세상의 눈치를 보는 법부터 배운 두 소년이 자라, 한 악덕 사장에게 고용되며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너무 잘하려고 몸짓 하나하나에 힘이 바짝 들어간 걸 제외하곤, 배우들 연기도 괜찮았다.
몇 명만.
한율은 고재영에게 톡을 보냈다.
[너 ‘보리극단’이라고 알아?]
한율이 일본 도쿄에 있는 호텔에 도착한 건 밤 8시 즈음. 조유찬과 함께 객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자, 복도 가운데에 떡하니 선 길우성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오너라, 나의 룸메이트.”
“유찬이 형, 저 방 좀 바꿔주세요.”
“함께 저녁을 먹으려 일부러 쫄쫄 굶으며 기다려주던 친구에게 그 무슨 섭섭한 말이냐.”
객실에다 짐을 풀고 나선, 아침 일찍 샵에서 받은 메이크업을 깨끗하게 지웠다. 샤워하고 나왔을 땐 길우성이 스태프에게 받은 도시락을 테이블에 펼치고 있었다.
한율은 기초화장품을 바르고 나서 맞은편에 앉았다. 길우성이 물었다.
“어떤 애 만났어?”
길우성도 올해 초 <일일 멘토>에 멘토로서 출연했었다.
“독학으로 연기 공부 중인 배우 지망생.”
“오. 애 울리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애를 왜 울려. 내가 배운 대로 기초만 좀 잡아주고, 조심해야 할 기획사나 학원을 빙자한 업체에 대한 정보, 오디션 팁을 줬을 뿐이야.”
“잘했네.”
TV에선 일본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택가 나무 위로 올라간 새끼 곰을 구조하는 뉴스였다.
“그냥 마취총으로 쏴서 떨어뜨려 버리네. 아프겠당.”
“새끼가 있으면 근처에 어미도 있을 가능성이 크잖아. 멀리서 조치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
“하긴. 곰은 사람을 찢는댔지. 아, 너 기억나냐? 전에 00즈 모임에서 완언이 우울하게 주정했었잖아. 나, 그 녀석이 갑자기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알았어.”